예수님이 수첩
2024년 9월 25일 본문 말씀: 말라기 3:16-18
(3:16)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3:1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3:18)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이 구분되는 것은 이 땅에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출현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인간들은 흔히 대상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은 직접 인간들 속에 들어오셔서 그들의 인식에 변화를 유발하고 그로 인해 하나님 자신도 같이 변화하게 됩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이름’ 때문입니다.
이 땅의 세계에서 이름이란 타인으로부터 불림을 받는 대상이 됩니다. 우리가 내가 아닌 다른 존재를 부를 때는, 나라는 존재가 엄연히 굳건히 있음을 전제로 해서 부르는 겁니다. 상대의 이름으로 내가 없어진다는 것은 인간 세계에서는 미리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람이 이름을 지닌다는 것은 그 이름에 합한 ‘나’라는 존재는 독자적으로 따로 정립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바로 인간 세계의 이런 형편을 다 아시고 하나님께서 사람들로부터 불림을 받는 이름을 지니시고 오신 겁니다. 출애굽기 3:13에서 모세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에게 부탁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즉 ‘이름 없는 하나님’과 ‘이름 있는 하나님’과 구분되고 사람들에게 나설 때는 ‘이름 있는 하나님’으로 나서야 하나님의 일이 된다는 것이 모세 생각입니다. 하지만 출애굽기 6:3에 보면,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타나셨지만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더는 백성들, 자신이 이름이 필요치 않는 상태로 이끄시겠다는 겁니다. 마치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나타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서 일을 한 자가 아니라 먼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그들은 전능한 능력으로 다루어오신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생겨난 민족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름이 하실 일을 위하여 선택된 일꾼들입니다. 그들만큼은 ‘하늘의 하나님’과 ‘지상에 나려오신 하나님의 이름’ 사이의 관계들을 실제적으로 그들 역사로 통해서 실현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름에 대한 죽음을 통해서 ’ 하나님 이름에 예속되기’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이스라엘 속에서 행하시는 그 작업을 모아놓은 책의 내용들이 되는 겁니다. ‘기념책’이란 곧 ‘하나님의 이름’의 사적 다이어리입니다. 수첩입니다. 그 수첩 안에 잡다한 죄인들의 이름들이 모아지지만 그 이름들을 삭제하시는 일을 통해 ‘하나님 이름’이 ‘주님’으로 승격되시는 겁니다.
따라서 주님의 기념책이란 같은 이름들 사이에는 높은 위계를 증명하는 책입니다. 이 책의 내용을 위해 부름을 받은 인물인 모세는 죽음의 시내산 꼭대기로 부름을 받게 됩니다. 곧 이것이 모세의 죽음입니다. 모세 이름의 잃어버림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그 죽음의 산꼭대기로 올라가지 못했다면 알지 못할 내용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업무가 일일이 기재되는 책의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2) 모세는 자신의 이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의 자기 변신에 필요한 인물들이 또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바로 인물들을 통해서 드러나야 할 사항은 모세처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겁니다. 즉 자신의 이름이 그저 숫자에 불과함을 알아야 하는 겁니다. 이 숫자가 ‘하나님의 이름’에 종속되므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과의 특이성입니다. 신명기 7:7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모든 민족가운데 가장 작은 민족이라는 취지를 살려서 이스라엘을 택하셨다는 겁니다. 그만큼 모든 인간들은 자신들의 숫자를 늘이는 것으로 각자의 이름들을 계속 살리려고 하는 겁니다.
이러한 인간의 숫자성을 공박하시면서 많은 숫자 안에 자신의 이름을 숨겨 계속 유지하려는 것은 용납하지 않고 심판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숫자에서 ‘주의 이름’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것을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단, 하나님의 이름의 업적으로 나열하기 기록한 그 책의 내용 속으로 합류하는 겁니다. 이 일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이름’은 이스라엘 내부를 쪼개게 됩니다. 즉 ‘인간의 행함’으로 사는 자들과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자들 사이의 구분입니다.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3-6)
도대체 이 은혜는 어디서 오는 겁니까? 그것은 모든 이름을 가진 자를 저주하고 버리시고 그 중에서 한 분의 이름에서 오는 겁니다. 곧 ‘하나님 자신의 이름’만 도로 찾으시는 그것을 기준으로해서 ‘하나님의 이름의 나라’를 만드시는 그 일이 곧 예수님의 기념책이 됩니다. 그것이 신약에 오면 ‘죽음을 당하신 어린양의 생명책’이 되는 겁니다. (계 13:8)
이 생명책에 의해서 세상은 악마에 속한 자와 예수님의 나라인 천국에 속한 사람들로 영원히 분류됩니다. 바로 이 내용이 오늘 본문에 다음과 같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말 3:18)
성도의 기쁨은 이 생명책 자체의 내용에 참여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 10:20)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이름은 사라지고 ㉯죽었다가 다시 사신 그 이름으로 바뀐 것을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7강-말라기 3장 16-18절(예수님의 수첩) 240925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말라기 3장 16절에서 18절까지입니다.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아멘.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을 대하면서 주의 깊게 성경을 본 사람은 다음과 같은 의문점을 가지게 될 겁니다. “하나님은 무엇이고 하나님의 이름은 무엇이냐?” “왜 하나님과 이름을 하나님 쪽에서 그것을 구분 지어서 생각하게 하는가?” 하나님 따로 계시고 하나님의 이름이 따로 있다는 것은 하나님 자체 내에 위계, 어떤 레벨, 위와 아래의 레벨을 형성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 자체에서 위계를 형성하는 겁니다. 위에 계신 하나님과 아래로 내려오신 하나님 사이에 수준의 차이를 두고 이야기합니다. 아래로 내려오셔서 이스라엘과 함께하신, 이스라엘이라는 사람들, 민족들과 함께하셨던 그분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따로 계시고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이스라엘은 그 함께 계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연결되는 유일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유일하게 연결된다는 유일한 민족 속에는 유일한 연결점이라는 것이 들어있고, 그 유일한 연결점이라 하는 것은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이름을 가졌지만 유일한 이름으로 그들과 함께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연결되어있는 관계있는 민족이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님과 관계있는 민족이니까 참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실거에요.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시면 좋습니다.
하나님과 관계지었다는 말은 하나님 마음에 담고 있는 모든 뜻이 이 인간 속에서 쏟아내는 현장의 역할을 이스라엘이 했다. 하나님의 뜻이 그냥 하나님의 품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쏟아내어서 그걸 받아내는 실질적인 그러한 그런 역할, 뜻이 역사적으로 현실적으로 드러내는 그 현장에서 생성된 민족. 그게 이스라엘입니다. 이 말이 함축하는, 내포하는 그 의미는 무엇이냐 하면,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서 새로 만들어진다, 그 뜻입니다.
■기존의 인간들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새로 만들어진 사람만 사람이다. 그럼 그걸로 끝이냐? 그걸로 끝이 아닙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그 사람에 의해서 하나님 자신이 이 세상에서 재구성되는 근거로서 그들이 쓰여지고 있는거에요. 하나님이 하나님이다. 끝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 자체적으로 변화를 스스로 자진해서 변화를 일으키는데 그 변화를 일으키는 요소와 조건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렇게 재구성 되는거에요. 하나님이 스스로 하나님을 변신하는데 있어서 그 이스라엘이라는, 죄인의, 그 잡다한 죄인에 의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재구성되면서 전에 없던 새로운 영광을 하나님의 이름이 갖게 되는겁니다.
그래서 제가 방금 이야기한 걸 쭉 보게 되면 그중에서 이런 이야기 중에서 제일 중요한 이름이 뭐냐? 바로 그 이름이라는 것, 하나님 따로 있고 하나님의 이름이 따로 있다는거에요. 이름이라는 그 특수성이 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계시면 될 텐데 왜 하나님 이름이라는 분이 따로 이 지상에 개입해야 되느냐? 그 이름을 갖고 있는 그 이유가 뭐냐? 이점이 상당히 중요하죠.
그 하나님의 이름이 있음으로써 이름이라 하는 것은 만들어지고, 만들어졌고, 또 만들어 져야될 대상에다가 이름을 붙이는 거에요.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에 모세가 하나님에 대해서 궁금하면서도 자기가 솔직하게 궁금하단 소리를 못하고 우회로 이야기했어요. “내가 애굽에 가서 바로왕 앞에 설 때에 그 바로, 애굽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너는 어떤 이름의 신으로 왔느냐?”라고 그들이 물을 때 제가 굳이 뭐라고 답변해야겠습니까?”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출애굽기 보면 이름과 관련해서 나와요.
3장 13절, 방금 이야기한 게 나오죠.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인간들이 하나님을 다루기 위해서 하나의 대상화 시키기 위해서 필히 이름을 원했어요. 왜냐하면 나는 저쪽이 아니니까. 나는 따로 있고 저쪽은 저쪽 따로 있다고 했을 때 내 이름 따로 있고 저쪽 이름 따로 가지는 방식이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나는 당신에게 복속되어있고 흡수되어 있습니다.”라고 한다면 그쪽의 이름만 있으면 되지 내 쪽의 이름은 필요치 않는거에요. 그러면 내가 굳이 이름을 부를 필요 없죠. 그분의 이름으로 내가 소속되어있으니까 그분의 이름으로 나는 통용되고 그분의 이름이 갖고있는 그 운명 안에 같이 들어있어버리면 따로 내 이름을 가질 필요가 없다 이 말이죠.
그런데 모세 말고 다른 사람들은, 모세도 마찬가지겠습니다만, 그렇게 신에게 흡수 통합 되기가 싫은거에요. 내 세계는 확고하고 굳건하고 그다음에 신의 세계는 하나의 대상으로 따로 저쪽에 신의 세계가 따로 있어서 굳건하게 있는 내 인생, 내 의미, 내 가치를 유지하는 대책으로 방식으로 “하나님이여 나를 도와주소서” 하고 싶어서 하나님 이름을 부르는거에요. 흔히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합니까? 기도라고하죠 기도. 기도할 때 “하나님이여 저의 이름을 제거하시고 주의 이름에 흡수 통합해서 아예 나라는 존재 자체가 내가 챙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그런 기도를 하십니까? 그런 기도 안 하죠.
하나님이여 내가 좋아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하고 결혼하지 말게 하옵소서. 유치원에서 그렇게 하잖아요. “내가 좋아하는 여자가 내가 싫어하는 남자가 혼인하지 않게 해주옵소서.” 그래 놓고 끝에는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비록 유치원생의 기도지만 그 유치원생이 크면 유치원생의 속성이 같이 커져가지고 어른도 똑같아요. “주를 부를 때 무슨 이름으로 불러서 기도하면 됩니까?”라는 거에요. 바로 이러한 인간들의 이름, 철딱서니 없는 이러한 생각에 하나님께서 끼어들었어요. 이 얼마나 낮아지심입니까? 그 철없음을 어떤 식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 그 철딱서니 없음에 같이 동조해서 하나님이 자기 이름으로 이스라엘 속에 들어오신 거에요.
그런데 출애굽기 6장에 보면, 이렇게 “이름을 대라. 당신 이름이 누구냐”라고 이렇게 인간 쪽에서 이야기할 때 6장 3절에 하나님이 이렇게 합니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니가 그렇게 묻는, 이스라엘이 내 한테 이름이 궁금해서 묻는 그런 식의 이야기 하는데 너희 이스라엘의 조상들, 내 쪽에서 먼저 택했고 다가갔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그들은 내 이름을 묻지 않았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현재 너희들은 내 이름을 묻지만 그게 그거는 하나의 과정에 지나지 않고 최종적인 지점에서는 내 이름을 물을 필요가 없는 상태로 만들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건 뭐냐? 제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받은 자는 이제는 자기 이름으로 존재하지 못하게 하겠다는거에요.
그러면 우리 존재에서 이름이 탈락해버리고, 그러면 탈락했다는 말은 그동안 내 이름하에 내 자존심걸고 “이거는 내 인생이야”라고 버텼던 그 모든 인간들의 기본적인 자립성을 하나님은 가만두지 않고 그걸 없애겠다는 거에요. 자립적인 너를 없애고 비자립적인 너를 새롭게 만들어내겠다 하는 것이 이름을 가지고 그들과 합류했던 하나님의 최종목표인거에요. 그러면 그 이야기를 듣고 인간들이 상당히 불쾌하죠. 내가 없어지죠. 내가없어진다는게 무슨뜻이냐? 내가 없을 것 같으면 굳이 찾아오지 않더라도 죽으면 없어지는데, 왜 굳이 찾아와서 나를 없애겠다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우리가 하나의 책이 되기 위해서 하는거에요. 그게 오늘 뭐냐? 그게 기념책이에요. 16절에 보면,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기념책에 기록했다, 기념책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적인 다이어리에요. 수첩입니다. “몇 년도 어떤 인간, 모세. 또는 아브라함, 까불다가 내한테 죽어가지고 내가 다시 내사람으로 만들었다.” 주님의 스토리. 주님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 기념책이에요.
주님의 자신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기 위한 책이 기념책이에요. 그 기념책에 누가 필요하냐? 주의 이름에 합류 당한 자들이 필요한 거에요. 그들이 잡다한 그들로 인하여 무엇이 굳히기에 들어가느냐? 기념책이 제대로 기념책으로 완성이 되어가는데 이스라엘이 여기에 포함이 되어있습니다. 책 하나 쓰실려는거에요. 그 기념책은 뭐냐? 하나님의 이름의 이야기.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름의 이야기라면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 각 각 각 각 자기 이름이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 이름이 있는데 그 이름을 지우고 결국 주님의 이름, 주의 이름은 곧 주님의 하실 일의 집합체지요.
주님의 이름이 갖고있는 그 포함되어있는 내용을 펼쳐버리면 이스라엘에게 작용했던 하나님의 말씀, 언약의 작용과 결과가 되고 그 결과를 주워 모으면 ‘다시 주의 이름은 이런 내용이었다’ 라는 것이 이렇게 드러나게 되어있어요. 드러날 때 그것은 하나님 편에서 그렇게 일하신다 치고, 그러면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찾으실 때 내 이름은 어디로 가버리느냐 이 말이에요. 내 이름은 어디로 가버리느냐 하면은 이름이 뭐로 바뀌느냐? 숫자로 바뀌어요. 숫자. 만약에 내 이름이 따로 갖고 있으면 따로 내 책이 되어요. 따로 내 이야기가, 내 스토리가 된다고요.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주님의 이름은 인간이라는 이름을 절대 용납하지 않습니다. 인간이라는 그 이름은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천국에 들어가는 백성이 되려면 일단 이 지상에서 이름을 가진 자는 뭐로 바뀌느냐? 숫자로 바뀌어야 됩니다. 그 숫자에 대해서 신명기 7장 7절에서 8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라고 이야기했어요. 이걸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이라 치고 모든 인간은 각자 이름이 있더라도 본인의 이름이 있더라도 그들은 그 이름 가지고 뭘 노림수가 있어요. 그 노림수가 뭐냐? 숫자적이에요. 많은 숫자. 많은 숫자의 일원으로서 내 이름이 거기에 끼어들기를 바랍니다.
인간들이 그랬어요 인간들이. 인간들은 많은 숫자가 많은 힘을 가져오고 그 많은 힘 속에 내 이름이 들어있으면 내 이름은 든든하게 유지 보존이 된다. 그 내 이름이 도중에 삭제당할 일은 없다. 그리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숫자가 인간 입장에서 나름 대로의 숫자가 많아졌다는 말은 힘이 세졌다는 것이고 그 속에는 인간들의 이름이 해내었던 업적과 그런 것들이 이야기로 가득 차 있을 거에요. 그런데 여기 신명기 7장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숫자가 적기 때문에 너를 택했다”고 되어있어요.
숫자가 가장, 그것도 모든 민족 가운데 가장 숫자가 적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너희 인간 숫자는 나는 생각도 안 해”라는 것보다 가장 작은 숫자를 통해서 큰 숫자의 그 쪽 방향을 주님께서는 심판하고 정죄하는 기능을 발휘하는 거에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 이곳은 참 조용합니다”라는 표현을 할 때, “아무것도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합니다.”라는 표현보다 “바늘 하나 떨어뜨려도 소리가 날 정도로 조용합니다.”라고 표현하는 거에요. 표현하고 싶은 어떤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위해서 바늘 하나 떨어지는 작은 소리를 일부러 거기에다가 집어넣고 표현하거든요.
근데 물리적으로 보면 바늘 떨어지면 그만큼 소리가 더 시끄러워요. 근데 그게 시끄럽다는 표현이 아니라 저쪽, 우리가 이 정도로 조용하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작은 하나의 반대되는 예를 드는 것처럼 모든 인간이 질주하면서 달려들면서 목적으로 삼는 것은 우리 인간들의 힘으로, 인간들끼리의 힘으로도 든든할 수 있기 위해서는 숫자가, 쪽수가 많아야 된다는 쪽으로 달려갈 때, “아니야 아니야, 그게 바로 하나님의 원수가 하는 짓거리야”라고 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숫자 적은 민족을 통해서 큰 민족을 심판하는 그러한 대상으로 삼은거에요.
작업의 대상. 하나님과 이름이 함께 있는데 숫자는 월등하게 적어요. 근데 중요한 것은 그들 가운데 주의 이름이 있다는 거에요. 주의 이름이. 그러니까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은 사람 이름을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고 그냥 쪽수로만 계산한다는, 숫자로만. 숫자로만 계산하기 때문에 숫자로 있는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서 오신 그 유일하신 이름, 예수님의 나라. 그게 천국이에요.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고 예수님의 나라, 아들의 나라가 천국이에요.
하나님이 인정하는 유일한 이름의 나라에 절대로 주의 이름과 관련 없는 숫자에 지나지 않는 인간들은 끼어들 수 없다는 것을 강하게 강조하는 겁니다. 그게 주의 이름으로 오신 그 말씀에 대한 내용이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백성을 작은 숫자로 선택을 했습니다. 작은 숫자를 이렇게 선택을 했는데 그 작은 숫자 내부, 이제는 내부에 들어가서 또 작은 숫자에서 또 작은 숫자로 나눠져요.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숫자가 많아지니까, 이건 이방 나라하고 똑같이 되어버린거에요.
그래서 열왕기상 19장 18절에 보면, 그 엘리야 시대 때 다른 옆의 나라. 쪽수에 지나지 않는 다른 나라의 신들이 마구 수입이 된 겁니다. 왜? 거기에는 인간들의 힘이 넘치는 선진국이니까. 선진국 쪽으로 온거에요. 오니까 이스라엘이 거기에 같이 융합이 되고 말았어요. 전부 다 변질이 되고 말아가지고 나라가 이스라엘이 아니고 그쪽 신으로 완전히 도배를 했습니다. 엘리야는 한명인데 그 이스라엘 내부에 다른 종교 믿는 사람은 850명이었어요. 850대 1 도대체 몇 퍼센트입니까? 1퍼센트도 안 되잖아요.
그 정도로 이스라엘 전체가 완전히 북이스라엘 전체가 다른 나라 신으로 도배가 된 겁니다. 그런데 그게 “하나님의 뜻이다”라는거에요. 뭐라고 되어있는가 하면, 그러나 거기에서 엘리야가 다 죽고 나만 살았습니다 하니까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7천을 남기리니 그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했다. 여기 7천이라는 숫자가 나오는데 얼추 많아 보이지만, 엘리야가 “나만 남았다” 하니까 하나님께서 아니야, 7천 명 남았다. 하지만 7천 명 하지만, 이스라엘 전체 숫자에 비하면 턱없이 이거는 적은 숫자가 되는 겁니다. 이 남은 7천 명에 대해서 신약 로마서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대목을 로마서 11장에서 이걸 해석을 해요.
7천 명이 뭐하는 7천 명이냐 하는 그거요. 로마서 11장 4절에 아까 그 엘리야 시대에 남겨둔 7천 명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내면서 이렇게 설명해요. 5절에, “그런즉 이와 같이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는자가 있느니라.” 은혜로 택하심을 남는자가 7천 명이라는거에요. 그러니까 이 7천명의 특징은 뭐냐? 개개인이 믿음이 좋아서 7천 명이 아니고 택한 자의 택함의 가치. 택했다는 그 주의 이름으로 택했다는 주의 이름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택한 자는 자기 택함받은 자기를 드러내는게 아니고 일방적으로 자기를 택했던 분의 그 이야기, 그 내용. 그게 나중에 뭐가 된다고 했습니까? 기념책의 내용이 되는거에요.
그 기념책의 내용이 왜 내용이 있다 했습니까? 예수님이 주님의 이름이 하는 일, 그걸 통해서 주의 이름 자신이 새롭게 정립 되는거에요. 주의 이름이. 하나님 자신이 하시던 그 일과 그 결과로 소속된 자들로 인하여 주의 이름이 하나님의 이름이 뭐로 바뀌느냐? 주님이 되셔요. 그러면 하나님은 뭐고 하나님의 이름은 뭐고 주님은 뭐고 각기 다 다르다는 말인가? 역사적으로 다 달라요 역사적으로. 역사적으로 다 달라요. 뭔가 추가되는 내용, 추가되는 일, 작업 하나님께서 작업을 해 줘야 하나님 버리시고 주의 이름으로 이 땅에 오시고 하나님의 이름은 주가 아니고 아버지가 주신 언약을 다 이룰 때 만 예수님은 그제서야 주가 되셔서 주의 자리인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겁니다.
하나님 스스로가 하나님 자기 자신을 새롭게 변신하고 조성하는 작업에 택한 자들이 그들이 거기에 참여하게 된거에요. 그럼 택한 자들은 이 선택에 의해서 7천 명이라는 숫자가 왔다면, 그러면 그 7천 명은 구원받는 사람인가? 아니죠. 구원받는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구원이라는 것은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남게 된 자에요. 그들이 구원받느냐는 이야기는 틀린 이야기고요. 구원받는 자는 그들은 구원을 받지를 못해요. 왜? 그들의 이름은 창세기 3장에서 버림받은 이름이기 때문에 버림받은 이름은 구원의 대상이 못됩니다. 이게 지금 이야기는 복잡해도 하나도 어려운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숫자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고 이름을 받아들이고 이름이라도 하나님이 인증하는 이름만 받는 그 나라, 그 세계가 바로 천국입니다. 아들의 나라에요. 그러면 구원은 누가 받는가? 주님만 구원받죠. 주님만 구원받기 위해서 7천 명은 주님의 구원을 위해서 7천 명이 있는거에요. 7천 명 구원받기 위해서 주님이 계신게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이 주가 되시기 위해서 그 7천명은 거기에 말려든거에요. 뽑혀온겁니다. 뭘로? 은혜로. 이거는 뭐냐? 은혜로 라고 되어있으면서, 그 앞에 로마서 11장에 보면, “은혜로 된것이지 그들의 행함으로 된 것이 아니다.”라고 되어있어요. 11장 6절, “만약 은혜로 된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라.”라고 되어있어요. 왜냐? 그렇지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 사도 바울이 이 로마서 11장 6절에서 말하는 문장 뉘앙스를 한번 보세요. 뉘앙스가 자꾸 방향을 어느쪽이냐하면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하는 인간쪽에 두는게 아니고 은혜를 주신 그분 쪽으로 모든 말씀의 내용을 그분쪽에 비중을 맞춰서 돌리고있는거에요.
무엇 때문에? 기념책 때문에. 책 내용 때문에. 예수님의 다이어리 때문에 그래요. 그 수첩 때문에, 일기장 때문에 그런 거에요. 그 일기장이 뭐 그리 중요하냐? 이렇게 생각하겠죠. 요한계시록, 일기장에서, 모든 능력이 일기장에서 나와요. 요한계시록 13장 8절에 보면,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짐승에게 누가 경배하느냐 하면, 그 사람들이 행동을 똑바로 못해서 짐승에게 경배하고 지옥가는 게 아니라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은 다 짐승에게 굴복하게 되어있다는거에요. 그런데 여기에 생명책 이름이 뭐냐? 어린양이에요.
어린양이라 하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겁니다. 특이한 이름을 가진 분의 특이한 죽음. 하나님께서는 그 특이한 죽음을 선택하고 그 죽음 이야기가 기념책이고 그걸 신약에 와서 무슨책이라 하느냐 하면, 그걸 생명책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생명책은 거기에 생명책에 기록되기 위한 이야기를 채우기 위한 많은 죄인들이 필요한 거에요. 알기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게 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다는 것은 모세 입장에서는 그건 죽은거에요. 근데 시내산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면서 모세가 올라가기 전에 미처 몰랐던 내용이 있습니다. 그건 뭐냐? 올라가보니까 생명책에 자기 이름이 기록된거에요. 생명책에. 생명책에 자기 이름이 기록되었다 하니까 이걸 듣는 많은 사람들은 제 이름도 있던가요? 이게 막 궁금한 거에요.
지금 이야기 초점이 내 다이어리 아니에요. 내 이야기 아니고 내 일기장 아닙니다. 나는 쪽수, 숫자에 불과하고 주님의 이름의 일기장이에요. 주님의 이름의. 하나님의 이름의 책에 내 이름이 기록된거에요. 그래서 출애굽기 32장 32절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 이미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모세가 죽음 속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것도 본인이 그냥 죽을려고 올라간게 아니고 주님께서 “드루와 드루와,” 모세로 하여금 이 모세라는 이름을 가진 그 인간을 모세를 이름을 가진 그 인간을 모세 이름이 있는 곳이 아니라 모세 이름을 죽여버리는 그 죽음의 세계 속에 모세를 집어넣고 그 모세 이름은 주의 이름으로 필히 이게 교체가 됨으로써 내가 이미 창세 전부터 구원된 자라는 것 확인하는 것이 모세가 말하고자하는거에요.
모세가. 근데 모세만, 지만 생명책에 기록된 게 아니라는 사실도 그것도 발견했죠. 그럼 뭐냐? 그 책에 예수님 이름하고 지 이름 달랑 두 개, 이게 아니고, 그리고 자기의 죽음은 그 생명책 이름에 있어서 자기 죽음은 의미 없어요. 왜냐하면 어린 양의,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책이거든요. 모세 죽음 말고 예수님 죽음이어야 돼요. 예수님 죽음. 왜 예수님 죽음이 되느냐 하면, 마태복음 27장 십자가 이야기해서 모든 인간들이 도저히 납득 되지 못한 그 발언을 외치면서 십자가에서 죽어가십니다. 그게 27장 46절, “제 9시쯤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엘리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나의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되어있어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찌하여라는 말이에요.
“어찌하여 저를 버리십니까? 저를 버리지 말아야 하는데 왜 버리십니까?” 라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은, 예수님 한 분밖에 없어요. 다른 인간들은 어찌하여 저를 버리십니까? “니 오늘 좀 맞자.” “니는 태어날 때부터 죽었는데 뭘 새삼스럽게 어찌하여냐?” 이 이야기는 시편 22편 1절에 나오는 다윗이 이야기했거든요. 다윗의 위치가 뭐냐 하면, 선택된 이스라엘의 대표성을 가지고 있어요. 그걸 왕이라고합니다. 왕이 된 다윗이 이미 왕으로 기름 부은 다윗이 쫓겨다니면서 외치느거에요. 시편 22편에 같은 말씀이에요.
잘 아시다시피. “나의 하나님, 내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다윗은 어찌하여라는 말을 할 자격도 없으면서 당장 자기 몸이 지금 쫓겨다니니까 하나님이 나를 왕되게 하고 기름 부었는데 다윗은 나를 살릴 줄 알았죠. 이스라엘 왕인 자기를 하나님 쪽에서 자기가 얻은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니까 자기는 마땅히 죽어서는 안되고 내가 죽으면 이스라엘이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서 진짜 어찌 하여 했는데, 이 다윗이 어찌 하여라 하는 것은 어찌하여 할 자격도 없으면서 그냥 어찌어찌하여 한거에요. 이 다윗이 제 뜻도 제 의미도 모르고 어찌한 것을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그 말씀을, “그 말씀은 니가 쓸게아니고 내가 쓸거야”하고 가져와서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했어요.
그것은 뭘 뜻하느냐 하면 그 기념책, 생명책에 들어올 사람들은, 모세도 마찬가지고요. 일단 죽었다가 자기 이름을 가졌다는 이유 때문에 일단 죽었다가 주의, 장차 십자가에서 아버지께 버림받고 다시 유일하게, 유일하게 구원되는 이름, 버림받고 유일하게 구원되는, 단 한분으로 구원되는, 그 구원의 이름으로 교체되면서 그 이름이 펼쳐지는 다이어리, 그 수첩 책에 모세이름이 있는 거에요. 수첩 책에.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먼저 있다고 치고요, 사실은 먼저 있어요. 하늘나라 시간으로 보면, 먼저 있고. 그다음에 그 책에 십자가의 내용을 알리기 위해서 모세한테 동일한 사건이 주어 졌다면, 언약 안에서 주어졌다면 모세는 그 무서운 죽음의 산에 올라가야 됩니다.
올라가서 죽었다가 다시 내려와야 돼요. 그래서 제가 그걸 유령이라 하는데, 이미 죽은 자에요. 죽은 자이기 때문에 죽은 자의 주특기가 40일동안 안 먹고 물 안 마시는거에요. 이거 지금 제가 웃고 있지만 사실은 이게 왜 웃느냐? 이걸 어떻게 인간이 흉내 냅니까? 어떻게 가능해요? 지금 이 복음이나 성경 내용이 인간들이 제일 답답해 하는, 제가 보기에 참 답답한 것은 인간에게 있을 수 없는 이야기를 지금 하고있는 겁니다. 인간에게 있을 수 없는 이야기. 아이고 뭐 사랑의 하나님, 나 귀찮으니까 빨리 날 구원해주소. 예수 피 믿으니까 구원해주소. 볼일 다 봤죠? 그럼 내 일 할게요. 인간은 지금 편하게 자기 생각하고 있다고요. 안다고.
나는 안다. 뭘 알아? 십자가 피. 아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니가 정녕 죽었느냐를 묻는 거에요. 정녕 죽었느냐. 니는 인간도 아니고 그냥 숫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니가 받아들였느뇨 하는 그 문제입니다. 7천 명있어도 7천 명 다 날라가요. 7천 명은 주께서 은혜로 구원될 자는 은혜로만 구원 되지 인간의 행함으로 안된다를 보여주기 위해서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는 7천 명이 엘리야 시대에 등장했을 뿐이에요. 그들의 이름은, 인간의 이름은 안 받아줘요.
철수, 영희, 광수, 영숙이, 그 솔로에 나오는 이름 하나도 안 받아줘요. 인간의 이름은 안 받아 줍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의 제자들이 알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자기 능력도 아니고 주님 주신 능력에 의해서 막 귀신도 쫓아내고 이렇게 하니까 누가복음 10장 18절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로 우리들에게 항복하나이다.” 주의 이름으로 하니까 귀신이 항복하나이다. 그러니까, 숲속에 모든 짐승들이 토끼한테 막 절을 하거든요. 토끼는 지 한테 절하는 줄 알았지 바로 뒤에 사자가 함께하는 걸 모르고. 주의 이름으로 하니까 항복하나이다 할 때에, 예수님도 그 제자들의 한계를 알아요. “이제 주님하고 한편이니까 우리도 같이 으쌰으쌰 되죠.” 뭐 이런 식이겠죠.
그래서 하는 말이,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너희들 왜 기쁘지? 왜 기뻐하는 이유가 뭐지? 왜 기뻐하는데?” 왜 기뻐하겠어요. 제자들의 자기 다이어리. 자기 기념 책을 따로 일기장에 쓰고있는거에요. 오늘은 귀신 두 마리가 떨어져나갔다. 이게 뭐 일기장에 안 써도 자기 머릿속에 기억을 하고 있으니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거에요. “니가 지금 기뻐하지 말아야 될 것을 기뻐하고 있다”는거에요. 기뻐하지 말아야 할 것을. “지금 내가 여기 존재해서 주의 힘을 가지고 일한다는 그 자체를 기뻐하지 말고 니 존재의 기쁨의 근거를 니 존재에 두지 말고 생명책에 두라는 거”에요.
“생명책에. 너라는 모든 존재는 너가 일어나는 모든 일은, 지금 생명책 구성하기 위해서 생명책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이름이 주가 되는 그것을 기념하고 그걸 증명하기 위한 책에 그 내용을 위해서 너희가 다루어졌다”는 이야기에요. 요한계시록 17장 8절에 보면, 거기에 능력이 나오는데, 어떤 능력이 나오느냐?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기이히 여기리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생명책에 능력이 있는데 무슨능력? 분류 능력이에요.
그 분류 능력이 뭐냐 하면, 유일한 이름, 유일한 다이어리 주인공, 기념책, 책 저자가 어찌하여 버림을 받는거에요. 십자가에서. 아버지로부터 어찌하여, 어찌 하여라는 말을 유일하게 해야 될 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하셨다 이 말이죠. 그게 뭐냐 하면 이름을 가진 존재는 이름을 가졌다는 이유 때문에 필히 이 땅에 와서 저주를 받아야 되는 거에요.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야 되는 거에요. 하나님은 인간의 이름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그러니까 덩달아 이름을 가진 주님의 이름도 버림 받는거에요.
버림받는데 그 유일한 이름이 특이한 이름이 그 주의 이름에 아버지하고 이미 약속이 되어 있기 때문에 죽으시고 아버지의 언약에 따라 약속에 따라서 주님만 구원하는 거에요. 그래야 “주의 죽음만이 효과 있는, 구원의 유일한 근거로서만 작동한다, 작용한다는 것”을, 하나님 쪽에서도 증명하게 할 수가 있거든요. 그 이름에 의해서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은 그 자기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을 증명하는 그 책에 어떤 역사와 주님께서 어떤 일을 하는가를 하기 위해서 부름 받은 자들의 목록. 그게 생명책에 있는 사람들의 이름의 기록이에요. 요한계시록 21장 27절에 보면,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게 자꾸 그리스도의 생명책이 아니에요. 어린양, 그러니까 죽음이에요. 모세가 죽지 아니하면 구원받지 못하고 죽기 위해서 모세가 자살하라는 게 아니고 죽기 위해선 주님께서 언약으로 시내산 화산 속으로 죽게 만들었어요. 죽고 그 죽은 자로서 다시 이스라엘에게 다가옴으로써 이스라엘 속에 역사 가운데서 모세와 동일하게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 나처럼 모세처럼 죽었다가 살아날 분이 우리를 구원할 분이라는 것을 증명할 사람을 이스라엘 역사속에서 은혜로 남겨두고 그 은혜 남겨둔 이스라엘이 이제는 예수님이 우리의 이스라엘 왕이시기 때문에 왕의 자격으로 자기 백성을 택한 자를 계속해서 모집해나가시는겁니다.
그게, 그것이 뭐냐? 십자가 이야기죠. 죽었다가 살아나신, 그분의 이름이 이제는 우리, 내 스토리, 내 역사이야기, 내 인생 이야기를 모조리 지워버리고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있는 모든 것도 사실은 나의 스토리, 나의 이야기가 아니고 주님의 이야기인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바로 생명책에 이미 기록된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 사람은 세상에서 요구하는 “니 이름을 대라, 니 이름이 뭐니?” 이런것있잖아요. “니 인생이 뭐에요.” 이런 것에 휘말리지 않고, “나 이미 죽었어”라고 과감하게 기쁨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으로 기뻐하는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다이어리, 수첩에 의하여 우리 피조물인 우리가 채택된 것을 기뻐하고 감사케 하옵소서. 내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주님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었다는 그 자체를 두고 기쁨의 근거가 되고 즐거워하고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