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심판과 피

아빠와 함께 2024. 10. 3. 10:10

심판과 피 

2024년 10월 2일           본문 말씀: 말라기 4:1

(4: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심판이나 예수님의 피흘리심이나 모두 일체 인간의 것을 받지 않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인간의 것이 하나님에게 도달될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이 속해 있는 환경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눈에 보이는 환경이 전부인 줄 압니다. 유일한 현실로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다른 환경에서 주어진 겁니다.

하나님께서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을 주시는 이유는 인간들의 통상적인 관점을 바꾸기 위함입니다. 심판은 차질없이 주어집니다. 최종 심판 이전에 선지자를 통해서 하늘의 불심판을 미리 언급하시는 이유는, 이 말씀이 구체적으로 예수님에게 전달되어 완성을 보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인간은 제대로 정리되고 정립됩니다. 베드로전서 1:24-25에 보면,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들은 범죄하고 난 뒤, 모두 애초부터 지푸라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푸라기를 지푸라기로 적절하게 대우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불이라는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참으로 합당하고 당연한 겁니다. 문제는 인간들이 말씀 앞에서 자신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치워버리고 아무런 근거도 없이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라고 여기는데 있습니다.

이러한 안일한 통상적인 관점은 하나님에게 사로잡힌 자와의 만남에서 그 한계가 드러납니다. 다니엘 3장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다니엘 세 친구는 느부갓네살과 그 부하들에게 체포되어 죽음에 직면하게 됩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인간에게 가장 겁나는 낯선 환경으로 겁을 줍니다.

하지만 다니엘 세 친구는 다른 환경을 생각합니다. 일반인의 관점에게 생각할 수도 없는 환경에 속해 있었던 겁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극렬한 불무불 속에다 다니엘 세 친구를 집어넣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네 번째 사람과 더불어 뜨거운 불 속에서 살아 있었습니다. 이로서 통상적인 관점인 자들과 하나님 말씀 속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불’이라는 경계가 형성되었습니다.

불 밖에 살아있다고 자부하는 자들이 불 속에 놓이게 될 자들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불 속에서 살아남지 못할 자들이기 때문이요 그들의 통상적인 세상관은 거짓이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그 어떤 요구없이 일방적으로 전면적인 심판을 감행하시는 하나님은 인간들이 도저히 생각못할 새로운 환경을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세 가지 공간상이 나옵니다. 하나는 모든 인간들이 받아들이는 아름다운 세상이 그 하나입니다. 또 다른 공간은 그 아름다운 공간이 온 천지가 물로 덮힌 공간입니다. 또 하나는 ‘방주’라는 일방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마련된 공간입니다. 이 세 번째 공간인 방주 안에 들어오지 아니하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다 죽습니다.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창 6:17-18) 똑같은 조치가 세상 마지막에 주어집니다. 이는 눈에 보이는 이 세상 말고 다른 세상을 준비해 두셨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세상이 공간이 이 세상이라면 이 공간은 불로 몽땅 다 태워집니다. 이 일이 일어나기 전에 새로운 공간이 방주처럼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 공간이 ‘피 속’이라는 공간입니다. ‘피 속’새언약이 완성된 공간이요 모든 말씀이 집중되어 있는 공간이요 이 피 안에서 보면 모든 인간은 지푸라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성격이 어떠니, 혹은 인간의 취미나 재산이나 인물이나 품위나 그 사람의 과거가 어떠한지 전혀 상관없습니다. 모든 이가 불 타 버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피 안에서만 말씀 성취가 되니 구원될 자들은 오로지 피 속으로 들어와서 그 안에 사는 자를 말합니다. 이 피를 증거하기 위해 성령이 온 자들이 사도요 성도들입니다.

따라서 이런 전도자들에게 있어 말씀 내용은 오직 ‘피’ 하나 뿐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원래 심판은 인간의 몫이 아니라 천사의 몫입니다.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마 13:39-40)

전도자들은 이런 천사의 심성이 장착된 자들입니다. 천사도 그러하듯이 이들 전도자들도 융통성이라는 손톱만치도 없습니다. 자신의 전도 내용이 상대방에게 얼마나 큰 심적 부담과 충격을 주는지도 전혀 관심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적으로 피 밖에 그3대로 있는 자들로부터 온갖 모욕적인 발언을 듣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전도자에게는 그런 욕설마저 너무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겁니다. 피 속에 들어온다는 것은 아무나에게 주어진 혜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할 일을 해야 하는 자이기에 해야 할 일에 대해 두려움은 전혀 없습니다. 피 안에 들어오지 않은 자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그들은 자신이 죄인이기를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진정 자신이 죄인인 것을 자부하게 되면 후에 자기 인생이 쫄다 망해도 하나님께 항변할 근거자체가 날아가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또한 피 밖에 있는 자들은 세상에 여전히 희망과 기대와 포기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피 밖에 있는 자들은 자꾸만 성경과 피를 설명하고 해석하려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이 자신을 구원하는 바른 삶이라서 그 바른 삶이 자기 구원에 보탬이 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불과 물 심판은 이 눈에 보이는 세상이 악마에 현혹되어 펼져진 얇은 환상의 막에 불과함을 말해줍니다. 다른 공간이 있습니다. 이런 데서 인간이 못 빠져나오는 것은 인간 자체가 악마의 억압에서 빠져 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는 처지며 알아서 피 속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 처지가 악마의 지배 하의 인간 모습입니다. 하지만 말씀 완성의 능력이 주어진 자는 이미 피 안에 있기에 이 세상이 불타는 최후의 날이 된다할지라도 상관없이 그 불 속에서 춤 출 지경입니다. 성령받은 사도들을 향하여 피 밖의 사람들이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했습니다.(행 2:13)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인간이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 안에 사는 즐거움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8강-말라기 4장 1절(심판과 피) 241002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말라기 4장 1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아멘.

여기 하나님 등장하고 사람 등장합니다. 만군의 여호와 등장하시고 그 맞은편에 교만한 자와 악이 등장합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뭔가 일을 인간을 향하여 제공합니다. 하나님이 그냥 하늘에 계시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서 뭘 주신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격렬한 풀무불 같은 것이 날라오고 그 지상의 인간들은 그 어떤 대책도 세울 수 없이 그들은 그 풀무불에 사라지고 뿌리와 가지까지 남기지 않게 되는데 그 인간들의 처지는 오늘 본문에 의하면 “초개같다. 지푸라기 같다.”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인간 쪽에서 이제 기대할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명시하시고 확고히 하시는 하나님 쪽의 사태 결정이죠. 결정적 의지를 드러내고 거기에 합당한 조치를 지상에서 내리는 겁니다. 인간 쪽에서 어떤 것도 받지 않는다는 거에요. 그것은 더 이상 인간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겠다는 하나님 쪽의 선언인 겁니다.

그런데 이 조치를 취하시면서 그냥 조치를 취하시면 되는데 왜 말라기라는 선지자를 통해서 이 이야기를 미리 우리들에게 알려주느냐 말이죠. 안 알려주고 그냥 불사질러 버려도 되잖아요. 근데 불사른다. 나중에 유황불 떨어진다. 이걸 왜 사전에 알려주시는가 그 말입니다. 그것은 이 예언이 인간은 사라져도 하나님의 예언, 말씀은 전혀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완성을 본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간추려서 말씀드리면 예언은 우리에게 통상적인 관점을 바꾸기를 요청하는 거에요. 통상적인 관점.

통상적인 관점이 뭐냐 하면, 나는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상대하겠다는 그것. 그게 통상적인 관점이죠. 내 쪽에서 하나님이든 누구든 간에 내 쪽에서 내가 관계를 맺겠다는 그 의식이 인간에게 있지 않습니까? 그 관점이 잘못됐다는 겁니다. “너 자신을 그냥 지푸라기로 보면 안 되겠니?” 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인간이 아니고 하나의 지푸라기로 본다면 그만한 내가 지푸라기 일 수밖에 없는 근거가 있어야 되는데 그 근거는 역시 말씀에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24절에 보면,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 같으니,” 인간을 풀이라고 그렇게 연결 시킵니다. 풀의 특징은 뭐 파릇파릇하다, 냄새가 좋다. 그것 때문에 풀이란 표현을 한 게 아니고요. 풀은 마른다는 뜻이에요. 풀이 잠시 꽃을 피울순 있지만 꽃은 떨어지기 위해서 피어야 된다는 거에요. 인간이 풀이 되는 것은 말라 비틀어 져야 되고 거기서 잠시 나오는 꽃도 떨어지기 위한 꽃이다는 겁니다. 모든 육체는 풀 같고 모든 영광은 꽃 같으니. 왜 인간은 그러해야 하는가?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 말은 뭐냐 하면 주의 말씀 안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인간은 인간이 아니고 그냥 풀이고 인간의 모든 영화나 영광은 잠시 피었다 지는 꽃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내용까지 포함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줬다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하늘의 풀무불 같은 그런 불이 떨어지는 날을 준비한 것은 하나님 입장에서 그냥 말씀이 말씀대로 진행되는 것이고 쓰여진 각본대로, 창세 전에 예정된 각본대로 그냥 진행할 뿐이다 이 말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그 이야기를 왜 우리한테 하느냐 이 말이죠. 그냥 말라기 그런 것 없애버리고 그냥 유황불 떨어지면 되는데 왜 이야기를 굳이 우리에게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지금 니 한테 하는걸로 들리냐?” 이 모든 말씀은 인간에게 하는 말씀이 아니에요. 이 말씀대로 이루어질 예수님한테 연결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에게.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피조물 다워야 되고 피조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인정하고 그걸 호응하고 그걸 존중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 이게 그냥 하나님이다, 인간이다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하나님 쪽에서 내세운 분이 따로 있어요. 그분이 바로 구주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중간에 있다 이 말이죠. 하나님 계시고 인간 있고 그 사이에 하나님이신 다른 주가 되시는 주님이 거기 계시거든요.

그럼 말씀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면서 집중하기는, 초점을 맞추기는 예수님이 하시는 일과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근데 지금 제가하는 일은 그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말씀 이루기 위해서 말라기 줬다는 그 사실을 우리가 접하고 있으면서도 처음에 제가 던진 그 의문점 아직도 유효하죠. 그럼 하나님하고 예수님하고 잘 하면 되지 이 이야기를 우리한테 왜 알리냐 하는 그 문제는 아직도 남아있어요. 거기에 대한 답변은.

그 이유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에 계셨더라면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 없는데 그분이 이 땅에 오시면서 사람의 육신을 입고 오신 거에요. 사람의 신체를 통해서 이 땅에 나타나셨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에게 인간이 관여가 되고 접선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을 위한 성경인데 그 예수님을 위한 성경을 진행하시면서 어쩔 수 없이 인간이 거기에 관계 되어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럼 어떤 식으로 관계 되어져 있는가? 그걸 이제부터 말라기 4장 1절 이제 본격적으로 되는거죠. 하나님께서 격렬한 풀무불, 격렬한 풀무불이란 것은 그냥 온도 낮은 불이 아니고 최상의 최고의 온도를 보여주는 풀무불. 풀무불이라 하는 것은 다니엘 3장 22절 26절에 보면 인간이 만들어내는 최고의 용광로 불. 무려 7배나, 여기 다니엘 3장에 다니엘 세친구가 느부갓네살한테 잡혀가지고 어디에 들어가느냐 하면, 21절에, “이 사람들을 고의와 속옷과 겉옷과 별다른 옷을 입은 채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질 때에”

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 이게 용광로 불이죠. 용광로 불에다가 온도를 가장 높여서 집어넣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인간 쪽에서 펼칠 수 있는 제일 악조건,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악조건을 느부갓네살 쪽에서 그걸 제시해서 다니엘 세친구를 죽였습니다. 불 속에 들어갔어요. 그러면, 그들이 불을 지펴서 극렬한 풀무불 속에 다니엘 세친구를 집어넣었다는 말은 인간 스스로 판단이 되었던 거에요. 불속에 들어가는 자는 더 이상 불에 들어가지 않는 우리와 같은 세계에 있지 않는다는 그런 합당한 논리에 따르는 조치를 한 겁니다.

인간 쪽에서 불을 지름으로써 풀무불을 함으로써 인간세계에서 인간에 속한 세계와 인간에 속하지 않은 세계를 인간은 한계를 드러내면서 그렇게 구분한거에요. 근데 여러분 아시다시피 그 불 속에 들어갔던 세 친구는 인간 쪽에서 그들은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안 죽었어요. 네 번째 사나이가 있어가지고 같이 불 속에서 멀쩡하게 살아있습니다. 이 말은 풀무불을 지폈던 모든 인간 쪽의 조치가 그 다니엘 세친구 쪽에 속한 세계에서 보면 한도점, 또는 한계점이 있다는 것이 발각된 거에요.

인간이 죽여도 죽지 않는 세계, 그 세계가 따로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이 다니엘 세친구에 들어갔던 이 내용은 시편 118편 12절의 말씀과 관련해서 일어난 일인데요. 시편 118편 12절에 보면, “저희가 벌과 같이 나를 에워쌌으나 가시덤불의 불 같이 소멸되었나니”라고 되어있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이 열방들이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을 공격하다가 그들이 도로 불 속에 놓이게 되었다는 거에요. 이 논리가 굉장히 절묘합니다.

인간 쪽에서 “니는 우리속에 속하면 안돼.”라고 불을 지펴서 불 속에 집어넣었잖아요. 그러면 인간들이 이거는 인간의 세계라고 여기는 것과 그리고 그 인간의 세계에서 배제당한, 추방당한 자의 세계 사이에 뭐가 놓이느냐 하면 극렬히 타는 풀무불로 완전히 따로 구분되어 있는거에요. 딱 구분이 되어있죠? 구분되어 있으니까 풀무불 속에 있는 입장에서 보면, 저쪽이 불 속에 있는 겁니다. 이쪽에 살았던 자들이 불 속에 이미 놓인거에요.

불 속에 놓이면서 그 불 속에 놓인 자가 뭐라고 오해하느냐 하면 “인간은 불 속에 들어가면 죽는다”라는 그 죽음이라는 것을 그들이 불 속 들어가는 것과 안 들어가는 것과 그들이 이미 결정을 내린 겁니다. 지금 이게 왜 논리를 이렇게 복잡하게 몰고 가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 불의 심판, 하나님의 폭력이거든요. 하나님이 인간을 향하여 폭력을 행사한다 이 말이죠. 하나님께서 인간을 폭력을 할 때 흔히 말해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다 저주다 하는데, 그 죄의 구체적인 내용은 인간의 이기성입니다.

인간은 자기 위주로 생각한다 이 말이죠. 그래서 아까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인간들의 통상적인 관점을 하나님의 말씀이 바꾸기를 요청하는 거에요. 인간들의 통상적인 관점. 인간의 통상적인 관점은 느부갓네살 왕과 그 신하들이 갖고 있었던 거에요. 그러면 다니엘 세 친구는 뭐냐? 그전에 하나님 말씀에 의해서 그들이 어떻게 달라졌느냐 하면, 인간들이 통상적으로 느끼는 그 관점, 그 관점에 의해서 그들이 결정하는 그 환경이라는 것을 다니엘 세 친구는 전혀 다른 환경을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그 다른 환경이 뭐냐? “하나님의 말씀이 살았지 우리가 산게 아니라”는 거에요.

우리가 산 것이 아니고 말씀이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같이 있는 그 말씀이 우리 인간세계에 도달했다는 말은 이미 죽어있는 인간을 말씀의 세계로 옮겨놓는 능력이 말씀에서 나온다는 것을 다니엘 세친구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거에요. 인간 세계는 불 속에 들어가면 죽는다, 이게 인간 세계고 이게 통상적인 관점이고, 다니엘 세친구는 뭐냐 하면 말씀이 없으면 죽었다. 이게 다니엘 세 친구의 관점이에요. 여러분 어느 관점이에요?

성경에서 그걸 아주 정밀하게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이 비슷한 예로, 이 말은 뭐냐 하면 일방적으로 말씀이 와서 건진다는 말은 애초부터 하나님께서는 일체 인간에게서 아무것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거에요. 죽은 인간에게 뭘 받아요? 받을 게 있어요? 이미 죽었는데. 일방적으로 건지는 겁니다. 일방적으로. 말씀이라는 방법으로 일방적으로 말씀이 와서 건지는 거에요.

이 불 이야기 하기 전에 물 이야기부터 먼저해야 되겠습니다. 창세기 6장 17절 18절.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하나님의 폭주죠. 하나님의 폭력입니다. 하나님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두 가지죠. 인간의 이기성, 인간의 자기 관점을 하나님께선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는 그 사실과 또 한 가지는 하나님 쪽에서 소위 자기 백성을, 말씀에 속하는 자를 건질 때는 일체 인간의 아무것도 받지 않고 일방적으로 말씀이 덮쳐서 구원한다는 그 두 가지.

벌써 두 가지만 해도 첫 번째 것 다 잊어 먹지요. 첫 번째는 인간은 고정적인 세상 보는 관점이 갖고 있었다는 것. 그걸 제가 이기성으로 이야기해요. 이기주의, 이기성으로. 근데 말씀이 오게 되면 그 이기성이 들통나죠. 이기주의가 들통납니다. 그거는 하나님께서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폭력을 행사합니다. 그 폭력을 행사할 때는 이미 너는 죽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기 위한 하나님의 폭력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죽었다 하면 되는데 물은 왜 오는가? 이게 상당히 중요해요. 왜 하나님은 물을 사용하고 왜 불을 사용해서 심판하느냐? 그냥 너는 죽었다 하면 끝날 문제를.

그 이유는 물로 멸망하기 전에 인간들이 통상적으로 세상이 아름답고 해와 달이 있다는 그 현실을 인간은 인정하는 거에요. 이것이 무너지거나 사라진다는 것은 인간 생각에는 없습니다. “별이 있고 달이 있는 것처럼 내가 여기 있다. 거울에 비친 내가 여기 있다.” 여기에 대해선 아무 어떤 인간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선 물로서 심판을 내리시고 또 불로서 심판을 내리는데 거기 창세기 6장 마저 읽으면 이렇습니다. “모든 육체는 다 죽으리라.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언약이라 하는 것은 말씀이 집중되어 있는 게 언약이에요. 언약 안에 모든 말씀이 응집되어서 만들어진 게 언약이다 이 말이죠. “언약을 세우리니” 그 언약 세운 게 뭐냐 하면,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라는 거에요. 방주라는 그 좁은 공간 안에 하나님의 뜻이 거기에 다 담겨 있고 거기에 여덟 사람을 쑤셔 넣는 겁니다. 쑤셔 넣는거에요. 그러면 현재 인간들이 생각하는 멀쩡한 해와 달과 해뜨고 해지는 풀이 아름답게 피어있고 땅 있고 개간하고 문명이 있는 이 현실 하나 하고, 두 번째, 또 하나의 현실은 뭐냐? 방주라는 현실.

또 하나의 현실은 바로 멸망 뒤에 나오는 현실. 멸망 뒤에 나오는 현실은 뭐냐? 완전히 물바다죠. 물이죠. 홍수니까. 온 천하가 홍수가 된 그 현실 모습. 이 사망이 한 조가 되어서 움직이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야, 이 멋진 아름다운 세상. 내일 어디로 놀러 갈꼬.” 이런거요. 그 현실. 그것이 깡그리 없어지면서 다 물로 덮인 현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하게 유일하게 살아남은 방주라는 현실. 그 세 가지 현실로 말씀을 하나님께서 말씀을 집중시킵니다. 그 말은 인간은 주어진 현실 밖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평소에 벗어나지 못했다. “아름다운 세상, 해와 달과 아름다운 세상에서 인간은 다 벗어나야지.” 그런 인간은 없고 그 안에서 살길을 모색하는 거에요.

그런데 그 세상이 물로 변할 때 어느 인간도 똑같은 현실인데 물로 덮일 때는 어느 인간도 거기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다 죽었고 물이 오기 전, 홍수가 오기 전까지는 뭐 기고만장하면서 마음껏 살고. 그 대표적인 게 뭐냐? 빠라빠라빠라밤. 이것 아닙니까? 오토바이 타고 까불어가면서 음악 틀어가면서... 여름에 하여튼 잠을 못자 이동네. 그들이 그게 물바다 속이라는 것은 생각도 못하죠. 그래서 인간은 자기 주어진 환경 밖을 생각 못 하고 생각 못 하니까 못 빠져 나오는거에요. 빠져 나올수가 없는 거에요. 똑같은 방식으로 나중에 불을 준비합니다.

불을 준비하는데 아까 그 다니엘 세친구처럼 인간들은 불 밖으로 못 나오기 때문에 다니엘 세친구를 불지른거에요. “이젠 죽었겠지” 이렇게 하면서. 그 새로운 공간에 있다는 것을 몰랐어요. 말씀이 응축되는 공간. 그걸 창세기 6장에서는 언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 약속이 말씀인데 그 안에 새로운 공간이 마련되는 거에요. 그러면 인간은 어째서 못 빠져 나오는가? 그 이유가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나옵니다. 마태복음 12장 29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와요.

하나님의 나라를 예수님이 설명하면서 12장 29절,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빨리 읽었는데 천천히 다시 읽어보면,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 하는 이유는 현재 하나님의 자기 백성이 있는데 그거 인간보다, 자기 백성보다 더 센게 그 인간을 지금 묶어놓고 잡아놓고 포로 잡고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그 강한 악마보다 더 센 힘으로 악마를 묶어 놓는거에요. 묶어놓고 난 뒤에 그다음에 그동안 악마한테 묶여있던 자기 백성을 빼내 가는 식으로 하늘나라가 이루어진다. 그런 이야기를 하셨거든요. 그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가 유념해야 될 것은 뭐냐하면, 악마가 묶였다고 해서 인간이 “오, 그동안 악마 묶였네. 그럼 난 이제 자유롭게 나갈 수 있겠네.”라는 인간은 없다는 거에요. 묶어 놓는 것도 주님의 능력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가 이제 “아, 그동안 묶인다고 애먹었어.” 이렇게 나갈 인간은 없는 거에요. 왜? 악마와 한통속이니까, 마음이 한통속이니까요. 아담의 마음이 악마의 마음 아닙니까? 한통속이니까 나갈 생각을 안 하고 있어요. 나가긴 어딜 나가요. 모세와 아론이 출애굽 할려고 왔을 때 히브리인들이 나갈 생각 안 했어요. “니나 가라” 이렇게 된 거에요. 주님께서 강제로 이끌어 줘야, 이끌어 줘서 나가서 다시 보니까 아, 그동안 내가 몸 두고 마음두고 정성 다두고 내 소망과 희망을 다 쏟아부었던 이 세계가 이게 죽음의 세계고 저주의 세계고 멸망의 세계고 불 심판이 떨어져 마땅한 세계라는 사실을 그제서야 아는 거에요. 인간은 주어진 환경 밖을 못 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물이든 불이든 특징이 뭐냐? 어떤 인간도 물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물이고 어떤 인간도 불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불로 심판하는 거에요. 근데 물과 불 사이에 뭐가 있냐? 악마가 있는 거에요. 어떤 인간도 악마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거에요. 그래서 마태복음 12장에서 악마를 가지고 강한 자라고 하는 거에요. 인간은 강한 자 밑에서 그게 전부인 줄 알고 그냥 무심코 아무 별 문제 없이 잘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방주가 마련되어야 되는데 방주를 이제 물에서는 방주죠. 불 심판 앞두고는 뭐냐? 방주가 뭐냐? 예수님의 피에요. 예수님의 피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죽지 않으면 탈출이 안 되기 때문에, 그 정도로 악마는 세요. 산채로는 악마에게 벗어날 자, 위인은 있다, 없다? 없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전도자를 보내서 사도바울이나 베드로를 보내서 그 자기 백성을 어디에다 집어넣었느냐 하면은 피 속에다가 집어넣어요. 그냥 꾸역꾸역 피 속에다가 집어 넣는 거에요. 피 속에다가.

홍수 물 노아 때 홍수 왔을 때 “하나님 저 성격 좋은데요. 저거 우리 애가 여덟 명인데 아, 이거 구원시켜 줘야 됩니다.” 뭐 이런거 됩니까? 그냥 이 죄 속에, 악마 속에 있는 인간. 이 현실이 유일한 현실이라고 여기고 살기를 원하는 인간은 그냥 노아 마저도, 노아 식구 마저도 누구든지 방주 없이는 누구든지 그거는 다 죽어야 돼요. 그게 방주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피도 마찬가지에요. 피도. 하나님의 성령 받은 그 전도자들은 예수님의 피만 외쳐요. 인간의 것을 받지를 않고 그냥 피를 외치면서 피를 외치는 정도가 아니고 피 속에다가 하여튼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자기 백성을 거기다 집어넣는데 있어서 이거는 완전히 융통성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거에요.

왜냐하면 마지막 심판은 인간이 하는게 아닙니다. 마지막 심판은 천사가 해요. 마태복음 12장에 그 말씀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13장 40절에,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것 같이 세상끝에도 그러하리라” 불로 사지를때에 심판하는 것은 천사의 자기 업무에요. 우리 인간보고 심판하라는 소리 안 합니다. 심판은 내게 맡기라 했거든요. 로마서에서. 그러니까 심판은 우리가 하는 게 아니고 우리는 뭐냐? 피 속에다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 집어넣기만 하면 돼요.

피 속에 들어가는데 무슨 인간 조건이 필요합니까? 당신의 MBTI는? 이런걸 왜 물어요. 성격을 왜 묻습니까? 건강 상태? “건강하거든 피 속에 들어오세요.” 이런 것 없어요. 취미가, 학력, 재산, 과거 뭐했습니까? 무슨 짓 했습니까? 그런 것 모르겠고 무조건 피 속으로 집어 넣는거에요. 피 속으로. 방주니까. 언약이니까. 피는 새 언약으로 완성이니까요. 그러니까 이 성령받은 전도자들, 사도바울, 베드로 마찬가지고 오늘날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 받은 전도자들은 할 일을, 사람이 어떤 두려움 같은 게 있을 수가 없지요. 심성이 천사의 심성 같아서. 아까 했잖아요. 융통성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다고요. “어떻게 삽니까?” 어떻게 살 생각 하지 말고 피 속에 들어오세요.

방주 속에 들어오세요. 천사의 심성은 뭐냐? 할 일을 하는 사람의 특징은 두려움이 없어요. 요지부동이에요. 그냥 시킨 대로 하는거에요. 반면에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그 부자 청년이 나오는데 제가 보기엔 코미디 같아요. 어떤 코미디냐? 19장 22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자기가 알아서 영생 얻겠다고 예수님을 어렵게 찾아와 놓고 그 끝은 뭐냐?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여 도로 빠꾸. 도로 돌아간 거에요. 예수님 십자가 피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뭐를 방해한 겁니까?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한 거에요. 그러니까 근심한다는 것은 두렵다는 뜻이에요. 이걸 잃을까봐 두렵다는 거에요. 이거는 본인이 뭘 해야 되는지 본인이 할 게 없어요.

그러나 성령 받은 사도나 오늘날 성도들은 할 게 있기 때문에 두려움이 있을 수가 없지요. 자기 일 아니고 주의 일이니까. 피 속으로 그냥 들어가면 돼요. 그래서 이 세상은 피 안에 들어온 사람과, 방주 안에 들어온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처럼, 피 속에 들어온 사람과 피 속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으로 둘로 나누어 지는거에요. 새 언약속에 들어온 사람과 새 언약 속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을 둘로 나누어 지는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피 속에 아직 못 들어온 사람들은 어떤 특징이 있는가를 한번 생각해 봐야 되죠. 자, 피 속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제가 한 세 가지를 뽑았고 거기에 공통점까지 뽑아서 네 가지를 뽑아봤습니다.

첫 번째, 1번. “왜 내가 굳이 죄인인가? 나 죄인 안 되고 싶어.” 이거요. 성경에서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 피로 죄사함을 얻는다”라고 이야기 했을 때 죄인 안 되고 싶은 이유가 왜 안 되고 싶으냐 하면, 만약에 내가 죄인으로서 내가 스스로 자인 한다면, 내 인생이 어떻게 꼴아 박아도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 항변할 거리가 없다는 게 불안한 거에요. 나중에 “하나님, 내 인생 왜 이렇게 조져놨습니까?”하면, “니가 뭐라했어? 니가 죄인이라 했잖아. 죄인이면 그만큼 살아도 됐지 이젠 죽어도 관계없잖아. 죄인이라 했잖아.” “괜히 내가 죄인이라 했어.” 죄인이라고 이야기한 순간 자기 인생이 어떻게 꼬이든 자기가 항변할 건덕지가 없어서 그게 무섭고 두려운 거에요. 죄인 안 되고 싶은 거에요. 이게 첫 번째.

두 번째 하면 첫 번째 잊어 버릴까봐 제가 또 단디 복습하겠습니다. 두 번째가 뭐냐 하면, 이 세상이 좋고, 아까 현실이라 했죠. 현실. 이 현실은 물에서도 못 빠져 나오고 인간은 불에서도 못 빠져 나오지만 악마에서도 못 빠져 나오잖아요. 그 악마가 펼쳐놓은 가상 스크린이 이 세상이에요. 악마가. “니는 이 안에서 놀아라. 이게 에버랜드다.” 용인에 놀이동산 있죠. 그것처럼. 악마가 스크린처럼 펼쳐놓은 이 세상. “불이 될 일 없고 물이 될 일도 없어 그냥 이 세상이 전부야. 저런 것은 전부 과학적 관측의 대상들이야. 외계인 있는가, 없는가 그거나 신경써.” 뭐 이런 식으로. 그런 식으로 악마가 펼친, 왜냐하면 악마는 눈에 보이는 현실 속에서 인간을 가두어 뒀기 때문에, 악마를 못 벗어난다는 말은 인간의 주어진 이 통상적인 관점 안에서 이게 물로서 홍수 받았고 홍수로 다 멸망 했고 장차는 불로서 다 불탄다는 이 사실이 인간에게는 없는 거에요. 그러니까 불 속에, 피 속에 불 속에 가기 전에 피 속부터 와야 방주에서 와야 구원 받으니까, 피 속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의 특징은 이 세상에서 기쁘고 즐겁게 살기 위해서 미래에 대한 계획과 기대와 희망에 부풀어 사는 사람. 희망 생각만 해도 좋은 사람. 이런 사람들. 뭐 대표적인 것이 소돔과 고모라 그런 사람이죠.

세 번째는 뭐냐? 첫 번째 뭐라했죠? 죄인 되기 싫은 사람. 여기 다 오라. 두 번째는 뭐냐? 세상이 이게 전부니까 여기서 행복하게 잘 살면 된다는 것. 이게 두 번째. 세 번째가 뭐냐 하면, 세 번째가 상당히 재미있는 건데요. 피 속에 안 들어가고 자꾸 피에 대해서 설명하는 사람. “피는요 예수님이 흘리신 핀데 그 피를 믿으면 죄사함 받습니다.” 본인은 피 속에 들어가 본 적이 없어요. 피를 자기 쪽으로 자꾸 끌어당겨요. 예를 들어서 성만찬 반복하는거요. 성만찬. 맨날 성당에 가면 매주, 성당 매주 안가도 평소에 가도 떡 먹고 하면서 자꾸 피를 마셔요.

피에 대해서 자꾸 설명해주려고 하는거에요. 이 세 번째가 상당히 기이하죠. 피 속에 안 들어가면서 왜 자꾸 피를 설명하느냐? 이게 1번, 2번, 3번 공통점이 있어요. 공통점. 이 타입에 공통적인 타입이 뭐냐? 벌 안 받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살아가는 특징이 있어요. 피 바깥에 있는 사람은. 벌 안 받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살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잘하면 되잖아. 잘 살면 되잖아요. 열심히 말씀대로 훌륭하게 살면 되잖아요. 피 믿으라 하면 피 믿고 천국 믿으라 하면 천국 믿고 성경 다 믿으면 되잖아요.”

죽어라고 피는 안 들어가고 성경 말씀 설명하고 그거 공부 해가지고 그것 모아서 살려고. 천국 갈려고 시도하는 사람. 백퍼센트 마귀에 사로잡힌 자에요. 마귀가 그 짓 잘하거든요. 목사들 신학자들 앞세워서 그 짓 잘해요. 그러면 그것마저 피를 설명하는 것마저 이게 마귀의 이야기라면 그러면 진짜로 피 속에 들어온 사람은 어떤 형태인가? 이 사람은 피 속에 있는 기쁨 때문에 거의 실성한 상태에요. 그냥 실성했어요. 어느 정도로 실성했느냐 하면, 쏟아지는 우박과 유황불 속에서도 좋다고 춤추는 수준입니다. “이게 웬 단비냐?” 왜? 피 속에 있기 때문에. 방주 속에 있으면서 홍수에 대해서 기분 좋아하는 것, 그것하고 똑같은 거에요.

“비야 쏟아져라.” 왜? 자기는 방주 안에 있거든요. “세상아 유황불 떨어 져라” 왜? 자기는 피 속에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걸 아는 전도자는 자기, 어떤 지푸라기거든요. 지푸라기 같은 사람에게 피 속에 들어와야 산다는 그것 외에는 다른 진지한 말은 할 줄은 모르는 거에요. 다른 진지한 일. 그러면 이미 피 속에 온 사람에게, 융통성이라는 손톱만큼도 없는 그 인간, “피 속이 끝.” 그것만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아까 1번, 죄인 되기 싫어하는 사람. 2번, 세상이 얼마나 살기좋은데. 3번, 피 믿어야 구원받습니다. 이것. 자기는 들어가지도 못하면서 “이거 성경대로 해야 이게 착한 일이 되고 착한 일로 되게되면 혹시 아나? 하나님께서 착하다고 구원해줄지.” 이런 통빡, 계산하는 사람. 이 사람들의 특징이 있어요. 그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피 속에서 실성한 사람보고 욕하게 되어있고 미워하게 되어있어요. 미워하면 미워할수록 피 속에 이미 들어온 사람은 아예 신이 났어요. 신났어요. 환란 중에 기뻐한다는 말이 그 말 아닙니까? 사도바울이.

실제로 이 일을 우리보다 먼저 한 사람이 있어요. 세례요한. 이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폭주, 하나님의 폭력을 그대로 전파했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말씀 안에서 도끼 들고 설치는 사람이에요. 마태복음 3장 10절, 도끼 들고 설치는데, 그 앞에 높은 사람이고 낮은 사람이고 눈에 뵈는게 없어요. 소위 높은 사람 와 가지고 “야 너 무슨 자격으로 선지자냐” 하니까. 그 도끼를 앞장세우면서 “이 독사의 자식들아.” 뱀의 자식이죠. “이 저주받을 인간아. 니들이 뭘 안다고 내 한테 궁시렁거려. 너희들이 뭘 알아? 지금 내 말 속에 도끼든 것 몰라? 도끼가 있어서 열매 맺지 않는 것은 다 작살낸다.” 그것을 작벌, 아주 가지치기 하면서 그 온 사람보고 “전부다 물속에 들어가. 죽어 거기서. 심판이 지나갈 때까지. 물속에 수구리. 누구맨치로.?” 경상도 표준말 나오죠. 수구리 누구맨치로. “예수님 맨치로.” 예수님과 같이, 함께. 예수님이 세례요한과 함께 물에 수장되고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이라는 게 얼마나 단촐한지요.

물속에 있을 때는 방주 안이냐 밖이냐. 지금 불 심판을 앞에 두고는 피 안이냐 밖이냐. 그 외에 할말이 뭐가 있습니까? 뭐 저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지요. 끝으로 한 말씀 드린다면, 피 속에 있는 사람은 자기 피를 증거하는 일에 있어서 주저함이 없기 때문에 꼭 융통성 없는 천사같은 심성을 안에 장착되어 있기에 어떤 데서 어떤 누가 욕을 하고, 비난하고, 뭐라고 궁시렁 거려도 오히려 그것을 도리어 기뻐하는 사람, 이것을 사도행전 2장 12절에선 그들을 가지고, 그 사람들을 욕하기를, 성령 받은 사람을 욕하기를 “이거는 취했다. 새 술에 취했다.”라고 그런 욕을 얻어먹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감옥에 있으면서도 얼마나 잠을 잤는지, 감옥에서도, 천사가 와서 깨웠어요. 사도행전 12장 보면 그런 말씀이 나와요. 그 정도로 당당함. 그 정도로 당당했거든요. 사도행전 12장 6절, 7절. 바로 오늘날 우리가 속한 이 환경은 없어집니다. 불로 없어질 때에 기뻐할 사람은 누굽니까? 피 안에 있는 사람만 기뻐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이미 할 일이 주어졌는데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하지 않고 나의 일을 하려고 할 때 그것이 얼마나 우리를 두렵게 하고 무서워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주시고 성령 받은 사도들이 뭐를 외쳤는가를 노아가 뭐를 보여줬는가를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뭐가 흘러왔는가를 능력이 되어서 피 안에 들어올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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