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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돔에 대한 저주(겔25;12-14)이근호140122

아빠와 함께 2014. 1. 23. 20:03

에돔에 대한 저주(에스겔 25: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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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01-22 21:06 
에돔에 대한 저주

2014년 1월 22일                  본문 말씀: 에스겔 25: 12-14

(25:12)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돔이 유다 족속을 쳐서 원수를 갚았고 원수를 갚음으로 심히 범죄하였도다

(25:13)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손을 에돔 위에 펴서 사람과 짐승을 그 가운데서 끊어 데만에서부터 황무하게 하리니 드단까지 칼에 엎드러지리라

(25:14)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손을 빙자하여 내 원수를 에돔에게 갚으리니 그들이 내 노와 분을 따라 에돔에 행한즉 내가 원수를 갚음인 줄을 에돔이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스라엘과 유일하게 짝을 이루어 등장되는 나라는 에돔입니다. 두 나라의 뿌리는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창세기 25:21-23에 보면,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두 나라의 시조는 형제지간으로서 등장되는데 그 이유는, 둘 다 축복을 받는 자들이 아니요 둘 다 저주를 받는 자들이 아니라 축복과 저주가 같이 붙어서 대비되는 가운데 구분시켜 등장시키겠다는 하나님의 뜻 때문입니다. 이는 곧 인간이 축복과 저주를 놓고서 임의대로 선택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골라잡은 대상이 아닙니다.

도리어 인간보다 축복과 저주가 먼저 있습니다. 이로서 인간이 복받겠다고 기도하거나 저주 안받겠다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거부당합니다. 복이 되었던 저주가 되었던 주는대로 받아야 합니다. 축복받기 싫다고 저주를 받을 수 있는 사항도 아니요, 저주 싫다고 해서 축복받은 사항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축복과 저주를 일찍 정해놓으신 이유는 ‘주되시는 분의 등장’을 위한 배경으로 삼기 위함입니다. 즉 진정한 축복이란 주님이 주님으로서 등장하심을 그 내용으로 합니다. 저주란 그 주님을 기피하고 외면하고 싫어하고 저주하는 상황을 두고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현 세상의 모든 체계는 주님되심을 기준으로 하여 이미 축복진영과 저주진영으로 구분되어져서 정리된다는 사실로 나타납니다.

많은 이들은 기도합니다. 그 기도 내용은 곧 “나에게 복을 내려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발상은, 자신이 먼저 있고 그 다음의 자신의 자리에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퍼다 담으면 그것을 복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실은 이러합니다. ‘나의 자리’는 없습니다. 축복 의 자리가 아니면 저주의 자리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따라서 참된 기도란, 내 자리에 좋은 것으로 채워달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그 축복의 내용이 자신을 통해서 나타나도록 기도하는 것 뿐입니다. 촉복의 내용을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굳혀놓으신 세상 체계가 구체화되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바로 이런 역할을 맡은 자들이 국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망했습니다. 자칭 ‘축복의 나라’라고 주장했던 나라가 망했으니 그동안 저주받은 나라라고 놀림받은 에돔 나라라부터 이스라엘이 얼마나 큰 고소함과 놀림을 받았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멸망이 곧 축복의 사라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분명 이스라엘의 조상은 야곱이요 에돔의 조상은 에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야곱과 에서에게 내리신 미래상도 유효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나라가 멸망했다면 제대로 축복의 나라의 역할을 할 주인공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이 받은 축복의 내용에 보면 이스라엘의 멸망 속에서도 죽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27:29에 보면, 그 축복 내용이 나옵니다.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여기서 ‘주’의 등장이 곧 축복의 실체의 등장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즉 내가 무엇을 더 챙기는 것이 아니라 나 아닌 주님께서 주님의 면모로서 세상에 나타나는 것이 축복이라는 겁니다. 사람의 본성이라는 것이 이러합니다. 자신이 더 챙기는 것이 즐겁지 결코 자기 외의 다른 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을 원치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런 상태로서 축복을 기대했다가 망한 나라가 곧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나라가 잘 되는 것을 축복으로 이해했습니다. 자기 나라가 옆에 있는 에돔나라를 점령하고 다스리고 지배하는 관계를 가지고 ‘축복-저주’ 관계의 성립이라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해서,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시는 주님과 저주받도록 태어난 에돔과의 관계가 축복과 저주의 관계입니다.

물론 이 관계가 처음부터 다 드러나는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처음 애굽으로 나왔을 당시에는 하나님께서 에돔의 관계를 평화롭게 조성해주셨습니다. 신명기 2:4-6에 보면, “너는 또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세일에 거주하는 너희 동족 에서의 자손이 사는 지역으로 지날진대 그들이 너희를 두려워하리니 너희는 스스로 깊이 삼가고

그들과 다투지 말라 그들의 땅은 한 발자국도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세일 산을 에서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너희는 돈으로 그들에게서 양식을 사서 먹고 돈으로 그들에게서 물을 사서 마시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되려 에돔 쪽에서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하고 그들은 이스라엘을 형제 나라로 간주하지 않고 악한 감정을 가졌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멸망당할 때 그들은 협조했고, 앞잡이 노릇했고, 그 틈을 노려 자신의 이익을 챙겼으며 즐거워하고 방관해하고 고소해했습니다. 오바댜 1:11-12에 보면, “네가 멀리 섰던 날 곧 이방인이 그의 재물을 빼앗아 가며 외국인이 그의 성문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얻기 위하여 제비 뽑던 날에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느니라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할 것이 아니며 유다 자손이 패망하는 날에 기뻐할 것이 아니며 그 고난의 날에 네가 입을 크게 벌릴 것이 아니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몰랐던 것이 있습니다. 진정한 축복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주님’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스스로도 이 사실을 멸망하면서 새삼 알아야했습니다. 그들 존재가 축복이 아니라 주님의 존재가 축복인 것을 말입니다. 자신이 복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 자기 존재가 와르르 무너짐을 통해서 그동안 자신의 욕심에 가리워져서 나타나지 않는 진정한 축복자는 발견하는 계기가 되어야 했습니다.

참된 축복이란 이스라엘이 주님이 그저 주시는 겁니다. 출애굽기 33:19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복받을 짓을 해서 복받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저주받을 짓을 해서 저주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로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신다는 주님으로서 권한은 축복과 저주 체제로서 나타나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값없이 거저주심의 사랑에 감격하게 하옵소서. 이유없이 복받음에 늘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25장 12절에서 14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90페이지입니다.



에스겔 25:12-14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돔이 유다 족속을 쳐서 원수를 갚았고 원수를 갚음으로 심히 범죄하였도다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손을 에돔 위에 펴서 사람과 짐승을 그 가운데서 끊어 데만에서부터 황무하게 하리니 드단까지 칼에 엎드러지리라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손을 빙자하여 내 원수를 에돔에게 갚으리니 그들이 내 노와 분을 따라 에돔에 행한즉 내가 원수를 갚음인줄을 에돔이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에돔이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냐 하면, 이스라엘과 짝을 이루는 나라입니다. 이스라엘과 짝을 이루는 나라가 에돔밖에 없는 이유가 에돔의 조상을 따라가 보면 압니다. 이스라엘 조상은 야곱이라는 사람이었지요? 에돔의 조상은 야곱의 형 에서입니다. 다 알다시피 야곱과 에서는 같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인간들 보기에 누가 봐도 형제지간이라고 생각을 하지요. 그러나 실은 남남입니다. 이 남남의 관계가 얽힘으로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느냐하면, 무엇이 축복이며 무엇이 저주인가를 하나님차원에서 하나님이 정하신 그 축복과 저주를 표현하는데 이 에서와 야곱의 관계만큼 적당한 것이 없습니다.



축복과 저주, 이 저주와 축복을 성경에서 언급하는 이유는 내가 복이나 저주를 받을까, 하는 사람들의 평소의 생각이 시작부터 잘못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내가 복을 받아볼까? 내가 저주를 받으면 안 되잖아.’라는 생각 자체를 성경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생각입니다. 성경에서 인정하는 생각은 뭐냐 하면, ‘나는 축복의 장(영역)에 속했는가, 나는 저주의 장(영역)에 속했는가?’ 그것을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축복과 저주, 그 둘로서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덮어버리고 그 범위 안에서 모든 것을 다 그 안에 두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특징입니다.



축복과 저주가 우리 앞에 있고 나는 또 따로 있고, 그런 것은 성경에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내 앞에 축복과 저주가 있어서 그 둘 중에서 어느 것을 할까, 이런 것을 우리에게 묻는 것이 아니고 애초부터 우리는 축복의 장에 속하면 저주의 장에는 안속하고 저주의 장에 속하지 아니하면 축복의 장에 속하는 겁니다. 내가 천국과 지옥을 골라잡거나 선택할 입장이 못 된다는 이야기에요. 그렇다면 이 말은 축복과 저주의 내용이 어떻든 간에 그 내용에 대해서 우리가 임의로 “이것을 주옵소서. 저것은 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요구할 처지에 있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더 쉽게 이야기해서 우리가 기도하되 “하나님이여, 축복은 주시고 저주는 물러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할 입장에 있지 않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축복이나 저주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이미 포섭이 되어 있고 포함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도리어 이렇게 해야 됩니다. “내가 받은 축복은 무엇이며 내가 받지 않게 될 저주는 무엇입니까?” 이렇게 하든지 아니면 “내가 받은 저주가 무엇이며 내가 도저히 받지 못할 축복은 무엇입니까?” 그렇게 되어야 된다는 말이지요.



이것은 뭐냐 하면, 사람이 기도를 할 때 그 기도의 내용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은 이 안에서만 기도해야 된다는 식의 기도내용이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그것은 나를 위한 기도는 일체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슨 기도를 인정하시는가?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저주장과 축복장, 축복의 영역과 저주의 영역을 만들어놓았다고 방금 제가 말씀 드렸지요? 그렇다면 모든 체계, 시스템이 저주와 축복, 축복과 저주, 두 모습으로 이미 갖추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기도를 할 때도 “이것이 축복이고 이것이 저주입니다.”라는 고백과 더불어서 기도가 되어야 돼요.



“하나님이여, 나는 이것이 축복인줄 믿고 저것이 저주인줄 믿습니다.”라는 식으로 기도가 되어야 된다는 말이지요. 우리가 기도를 임의로 할 수가 없고 이미 짜인, 하나님께서 정해놓은 축복과 저주의 두 내용이 우리 기도의 말을 경유해서 기도라는 모습으로 고백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조상이 야곱이라고 했지요? 에돔의 조상은 에서입니다. 에서와 야곱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태어났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축복을 내가 가져야 되겠다.’는 그런 권한은 없고 에서가 ‘나는 저주 편에 서야지.’ 할 권한이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야곱과 에서라는 개인보다 더 우선하고 더 먼저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이것이 축복이고 이것이 저주다.’라는 사실이기에 그렇습니다. 야곱과 에서라는 개인보다 먼저 있다는 이 말은 이스라엘보다 또는 에돔보다 먼저 있는 것이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축복과 저주라는 것입니다. 축복과 저주가 먼저 있다면 이스라엘과 에돔은 뭐냐, 축복을 증거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등장했고 저주를 증거 하기 위해서 에돔이 등장한 거예요. 다시금 제가 이야기하지만 나 개인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이것은 터무니없는 잘못입니다.



“하나님이여, 축복주옵소서.” 하고 무심코 내 뱉게 되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네가 말하는 축복은 하나님이 정하는 축복에 속하는지, 아니면 저주에 속하는지의 것을 네가 먼저 점검해 봤느냐?”를 우리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답변하기를 “점검하려니 성경도 잘 모르겠고 그저 나한테 이런 것이 있으면 좋겠다 싶어 축복해 달라고 했을 뿐입니다.”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정해놓은 축복과 저주의 시스템, 그 체제 바깥에서 노는 사람이에요. 그런 인간은 존재하지 않지요. 그런 사람들이 바로 저주에 해당된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사실은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축복 권에 속했다고 자부하지만 그들이 기도하고 기대하고 요구했던 모든 것은 전혀 하나님께서 이야기한 그 축복과 저주시스템에 부합되는 것이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축복권에 속한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저주를 받은 민족이 되고 말았지요. 그래서 우리가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어떤 것을 기도해야 되겠다고 성급하게 나서지 마시고 성경에서 “하나님이여, 야곱은 왜 태어나게 했으며 에서는 왜 태어나게 했습니까?”라고 우리의 관심사를 내가 얻어 챙기는데 두지 마시고 성경 속으로 들어가야 돼요.



성경을 읽어라, 성경을 그냥 보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성경 안에는 어떤 체계와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는가?”를 알아야 나의 개인적 욕심, 사심에 의해서 기도하거나 하나님을 믿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지요. 이 시간도 우리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개인적인 기대나 희망을 잘라버리고 우리 자신이 속해 있는, 이 우주라는 시스템,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면 축복, 축복이 아니면 저주라고 두 가지로 만들어놓은 이 체제 안에서 나는 어느 편에 속하는가를 생각해 봅시다. 내가 뭘 원하는가를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어느 쪽을 선택할까, 골라잡아라,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우리의 의사와 기대와 상관없이 “이것이 축복이다. 이것이 저주다.”라고 정해놓았어요.



이미 정해놓은 그 내용이 무엇인가, 그것에 우리가 관심을 두게 되면 우리가 기도해야 복 받는다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기도해서 복 받는 것이 아니고 이미 복에 속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기도를 통해서 이미 받은 복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아, 이런 것이 복이구나.’ 지금부터 제가 복과 저주를 설명하는데 복과 저주를 설명할 때 “이런 것을 가지면 복이고 이런 것이 없으면 저주입니다.”라는 소유개념으로 설명하지 않을 거예요. 왜냐하면 그런 것은 성경밖에서 인간들이 생각하는 축복과 저주이기 때문에.



그러면 성경 안에서 축복과 저주는 어떻게 설명하느냐 하면, 야곱은 어떤 식으로 하나님이 인도했고 에서는 어떤 식으로 하나님이 인도했느냐? 하나님께서 야곱은 축복했고 에서는 저주를 했거든요. 축복과 저주를 했던 그 시스템, 그 구조를 시간 따라 세월 따라 확대시켜 나가는 겁니다. 확대시켜 나가게 되면 그 안에서 모든 인류가 축복 아니면 저주, 저주 아니면 축복으로 포함이 되게 되어 있어요. 그 원조는 뭐냐, 야곱이고 에서가 되는 겁니다. 말라기 1장 2절에서 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말라기 1장부터 야곱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야곱이 어떻게 처신 했는지, 그것과 관계없이 이미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했고 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에서가 어떻게 행동하고 처신했는지와 관계없이 에서를 미워하기로 작정했다고 되어 있어요.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에서나 야곱에게 무슨 감정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이미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이 따로 생각해놓은 축복과 저주, 저주와 축복을 알려주기 위해서 축복의 대변자로 야곱이 세워졌고 저주의 대변자로 에서가 세워진 겁니다.



이것은 에서와 야곱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오늘날 모든 인간에게 다 해당되는 거예요. 바로 이 시스템, 성경 안에 구성되어 있는 이 골격, 구조를 우리가 모르게 되면, 우리가 이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자기 야심대로, 자기 희망대로 그냥 축복해주옵소서, 하면 마귀가 좋다고 하면서 마귀가 그 사람을 가지고 놀게 되지요. 그래서 성경이라는 것이 그만큼 중요한 겁니다. 오늘 본문 에스겔 25장도 그만큼 중요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에돔을 향하여 야곱이 당한 것에 대한 복수를 대신 해준다고 할 때 이것을 옛날이야기로, ‘이스라엘이 에돔한테 당하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에돔을 작살내는구나.’ 하고 남의 이야기로 끝내버려요.



그런데 제가 분명히 이야기했지만 이것은 하나의 체제에요. 그 당시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이 원리원칙대로 폭삭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여기 나오는 이스라엘만 이스라엘이 아니고 여기 나온 에돔만 에돔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신약에 오기 전에 이미 구약 때부터 야곱과 에서를 태어나게 하시고 거기서 각각 나라를 만듭니다. 야곱은 이스라엘 나라가 되게 하고 에서는 에돔이라는 나라가 되게 해서 그 둘 사이에서 장차 완성되는 축복의 체제와 완성되는 저주의 체제를 앞당겨서 시작을 하신 거예요.



축복이라는 것은 천국이죠. 저주의 끝은 지옥입니다. 지옥과 천국으로 마감되는 그 여정에 있어서 중간부분의 에돔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어떤 관계이었기에 하나님의 천국은 천국이고 지금의 지옥은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는가? 그렇게 천국과 지옥을 가름하는 그 원리는 어디서부터 시작되고 어디서부터 비춰지고 구체화되는지를 알아야 되지요. 결론을 단적으로 축약해서 말한다면, 축복을 받는 사람은 저주를 받는 사람으로부터 미움을 받아야 됩니다. 체제가 그래요. 축복 저주의 관계가 그래요. 축복 따로 저주 따로, 가 아니라 축복과 저주는 항상 티격태격하는 관계로서 축복과 저주의 장을 만드셨어요.



축복과 저주 사이에서 사람들보고 선택하라면 사람들이 어느 쪽을 선택하겠습니까? 저주를 선택하겠습니까, 축복을 선택하겠습니까? 묻는 제가 바보지요. 저주 쪽을 손들고 나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축복받을 사람 손들라고 한다면 저요, 저요, 다 손들고 나올 거예요. 저주도 모르고 축복도 모르고 자기 한 몸밖에 모르는 사람에게 축복이라는 것은 그저 자기 소원대로 되는 상황을 축복이라고 오해들을 하니 하나님께서는 그 오해 속에서 진짜 축복과 진짜 저주가 어떻게 정립되는가를 이스라엘과 에돔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창세기 27장에 보면 야곱에게 축복이 주어지고 에서에게 저주가 주어지는 내력이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28절, 29절에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삭이 야곱에게 내린 이 축복의 내용 가운데서 제일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주’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반대쪽은 그 주가 되는 쪽에서 굴복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을 주 예수님이라고 하지요. 그러면 해답은 나왔네요. 예수님이 주가 되시는 나라가 축복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주가 되시는 나라가 축복의 나라고 그 나라에 가담되는 사람이 복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 예수를 믿는 자는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개인적인 소원성취를 말함이 아니고 예수님의 주되심의 축복을 증거 하기 위해서 참여된 자라고 보시면 됩니다. 예수님만이 진정한 주님이십니다, 라고 초정 받게 된 그 집단을 가지고 이스라엘이라고 하고 그것을 축복이라고 하는 겁니다.



방금 제가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흔히 세상이나 교회에서 축복이라 하는 것은 내가 뭘 더 추가적으로 가지는 것을 축복이라고 해요. 권력, 돈, 명예, 건강 같은 것을 더 가지는 이것을 축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방금 제가 이삭이 아들 야곱에게 내린 축복이 뭐냐 하면, 네가 주가 된다는 내용이에요. 하나님에 의해 중심이 된다는 겁니다. 어느 정도로 주가 되는가 하면,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축복과 저주라는 것은 인간들로서는 뭘 챙기는가를 두고 은근히 노렸는데 성경의 축복이란 인간이 뭘 가지는 것이 아니고 인간 말고 따로 예수라는 분이 주님이라는 것을 알아채면 그것이 바로 축복이라는 겁니다.



내가 뭘 가지는 것이 축복이 아니고 예수님이 몽땅 가지는 것에 대해서 저는 너무 흐뭇합니다, 하고 그것을 기뻐하고 찬양할 때 그것이 축복이라는 그 말입니다. 뭔가 가져서 축복이라는 것은 꿈 깨시기 바랍니다. 그런 축복은 있을 수 없는 축복이에요. 어떻습니까? 내가 일단 여기에 존재하잖아요. 내가 존재하게 되면 우리가 제일 기쁜 일은 뭡니까? 여기 존재하는 내가 더욱더 넘치게 가지는 것이 기쁩니까, 아니면 나 말고 다른 분이 주님이 되는 것이 기쁩니까? 어느 쪽이 더 기뻐요?



사람이 본성상, 육신의 죄악 된 본성상은 내가 더 가지는 것을 축복이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배척받고 십자가에 못 박힐 수밖에 없지요. 그만큼 이 세상이 축복과 저주에 대해서 거꾸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축복받은 나라를 이스라엘로 보거든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오늘 본문에서 망합니다. 이스라엘은 망하고 그 이스라엘이 망한 것에 대해서 얼씨구나 하고 좋아하는 그 에돔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복수해주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신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에돔에게 저주를 해버려요. 심판을 해버리는 겁니다.



여기서 머리 좋은 사람은 감 잡았을 거예요. 누가 축복입니까? 이스라엘입니까? 이스라엘 되게 하시고 이스라엘과 그동안 동행하신 그 주님이 축복입니까? 이스라엘은 오해했어요. 우리나라가 축복받은 나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게 아니에요. 그 나라 속의 어떤 분이 축복입니다. 돈 주고 세운 교회가 축복입니까, 아니면 교회 안에 계신 예수님이 축복입니까? 사람들은 교회 신경 쓰다 보니까 예수님을 놓쳐버려요. 교회 크고 잘되면 그것을 복이라고 여깁니다. 교회라는 존재가 예수님이라는 축복을 오히려 가려버리고 우습게보고 무가치하게 만드는 원인제공이 되어버려요.



가정에 즐거운 일, 기쁜 일이 생겼다. 그 때 갑자기 이 내 가정 잘되니까 그 가정을 축복이라고 여깁니다. 그게 아니거든요. 그 가정 안에 누가 계시는가, 그 계시는 그 주님이 축복이에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은 자기가 축복받은 나라라고 착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가 망해갑니다. 희한한 것은 축복받은 그 나라가 망해가더라도 하나님의 축복시스템은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에요. 이스라엘이 망할 때 이스라엘은 생각하기를 ‘야, 복 받은 내가 망했구나.’ 하는데 오히려 복 받은 내가 망함으로 말미암아 그동안 가려진 진짜 메시아, 진짜 이스라엘 왕이 처음부터 제대로 된 축복된 분이었다는 것의 윤곽이 드러나는 거예요.



그것을 이스라엘도 몰랐고 에돔도 몰랐어요. 그래서 이 어리석은 에돔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멸망하니까 얼씨구나 하고 고소하게 여겼습니다. 오바댜 선지서에 그 내용이 나와요. ‘형제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멸망할 때 같은 형제인 에돔인 네가 고소해 하면서 앞잡이 노릇을 했다.’는 거거든요. 신명기 2장에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하나님께서 형제국가 에돔을 의식해서 이스라엘 보고 “다른 나라는 다 쳐도 좋은데 에돔만큼은 형제국가이므로 점령하지 말라. 혹 통과하게 되거든 양식이나 물도 돈 주고 사먹어라.”고 했어요. 신명기 2장 6절에 보면 에돔을 힘들게 하지 말라고 되어 있어요.



“너는 또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세일에 거하는 너희 동족, 에서의 자손의 지경으로 지날찐대 그들이 너희를 두려워하리니 너희는 깊이 스스로 삼가고 그들과 다투지 말라 그들의 땅은 한 발자국도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세일산을 에서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로라 너희는 돈으로 그들에게서 양식을 사서 먹으며 돈으로 그들에게서 물을 사서 마시라.”(신명기 2:4-6)



하나님께서는 에돔의 영역을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어요. 세일산이 에서의 땅인데 세일산을 에서에게 줬지 너에게 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스라엘은 아는데 정작 에돔은 몰라요. 왜 하나님께서 처음에 분명히 에서를 저주하고 야곱을 축복했잖아요. 그러면 축복받은 야곱의 나라가 이스라엘이고 저주받은 에서의 나라가 에돔인데 처음부터 이스라엘이 에돔을 점령하고 지배하고 굴복시키면 하나님의 계시대로 될 것인데 왜 처음에는 서로 좋게 지내도록 했는가가 궁금하실 거예요.



에서와 이스라엘의 관계가 처음부터 누군가는 저주받고 누군가는 복을 받는 관계가 아니고 서서히 그렇게 되는 겁니다. 왜 서서히 그렇게 되느냐 하면, 처음부터 이스라엘로 하여금 에돔을 지배하게 하면 이스라엘은 자신들 자체가 마치 축복받은 나라의 완성이라고 오해를 하게 돼요.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복을 받았다고 자부를 했지만 결국은 망했지요? 결국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아니었다는 말은 이스라엘과 짝을 이루는 나라가 에돔만이 아니라는 거예요.



장차 천국에 이스라엘만 가고 지옥에는 에돔만 갑니까? 아니잖아요. 야곱과 에서, 이스라엘과 에돔은 지금 신약에 오기 전에 구약 그 당시 상황의 축복과 저주시스템을 설명하기 위해서 임시적으로 사용했던 나라들이에요. 그 티격태격하는 관계 속에서 우리는 뭐만 끄집어내면 되느냐 하면, 도대체 야곱은 왜 축복받아야 되며 에서는 왜 저주받아야 되는가, 그것만 끄집어내면 되는 거예요. 그것을 끄집어내는데 그 결론부터 미리 말씀드리면 야곱은 왜 축복받아야 되는가?



이유가 없습니다. 이유가 없다는 말을 출애굽기 33장의 말씀으로 하면 이렇습니다. 야곱이 왜 축복받아야 됩니까? 이유가 없어요. 제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왜 축복받아야 합니까, 하면 그 질문은 잘못이고요, “축복은 누구를 통해서 나타납니까?” 이것이 옳은 질문이거든요. 축복이 먼저 있으니까 “축복은 누구를 통해서 나타납니까?” 야곱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그러면 야곱은 왜 축복을 받아야 됩니까? 그것은 이유가 없습니다. 왜 이유가 없습니까? 출애굽기 33장 19절에 보니까 “나는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여러분, 복음이요? 신앙이요? 따져보면 굉장히 단순하고 막상 정답을 딱 들으니까 느낌이 어떻습니까? 좀 시원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너무나 간단한 문제잖아요. 신앙생활 한다는 것이 너무나 간단한 문제에요. 그냥 주신 것을 주신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라는 말이지요. 제가 축복과 저주에 대해서 기도하지 말라고 했지요? 그 이유가 뭐냐? “모든 것이 주께 받은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기도이어야 한다는 그 말입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그것이 주어졌으니까. 그렇다면 누구를 통해서? 그것은 축복되시는 분, 예수님이 축복되시는 분이니까 예수님의 희생으로, 예수님의 긍휼, 사랑으로, 피의 용서로 말미암아 우리가 축복에 참여된 자가 되니까.



흔히 교회에서 축복, 축복을 언급하니까 이게 대 혼란이 일어나는 겁니다. 누가 누가 많이 가졌느냐 하는 축복경쟁으로 빠져버리고 내가 어떻게 하면 그 복을 따내겠느냐, 하는 축복시합의 스트레스까지 받거든요. 그런데 막상 정답을 딱 보게 되면 “어떻게 해서 야곱은 복을 받았습니까?” 정답은 “그냥” “에이, 그냥이라고 그냥 답하지 말고 왜 그냥 주십니까?” “하나님 맘대로.” “어떻게 맘대로?” “나는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 베푼다는 그 원칙대로 준 거예요.



그러면 답변은 간단해요. “저 에서는 왜 지옥 가고 저주받습니까?” “긍휼과 자비를 주기 싫어서.” 그게 정답이거든요. 그 체제가 나의 욕심보다 우선하고 먼저 있다는 말이지요. 우리는 그 체제 안에서 그냥 머물러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체제 안에서 그냥 복 받은 사람은 어떠냐 하면, 그냥 받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십자가 피 용서도 그냥 받고 주님의 영생도 그냥 받고, 한 것도 없는데 그냥 받았다는 거예요. 내가 행함으로 받은 것이 아니고 값없이 받았다는 겁니다. 로마서 4장의 말씀처럼.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4-8)



이게 신앙생활이에요. 어렵습니까? 난해하십니까? 너무 간단해서 이상스럽습니까? 마귀가 복잡하게 만든 겁니다. “이렇게 하시면 복 따냅니다.”라고 마귀가 그렇게 온천지의 교회에 사주를 다 했어요. 배후조정을 그렇게 한 겁니다. 너무나 간단한 문제인데. 이미 체제가 저주와 축복, 축복과 저주, 그것뿐인데.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마귀가 완전히 혼란하게 만든 거예요.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이스라엘이 자기가 복 받은 나라라고 생각하다가 그 자체가 망해버렸을 때 진짜 복 있는 사람들은 ‘나의 원수는 주께서 갚으신다.’는 사실을 아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미 복에 속한 사람은 내가 갚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주의 원수이기 때문에 그래요. 로마서 5장의 말씀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 된 자이거든요. 하나님의 원수 된 자가 스스로 복 받았다고 우겼으니 이게 얼마나 그동안 잘못알고 있었던 거예요? 거꾸로 알고 있었던 겁니다. 따라서 나의 원수가 주님의 원수가 아니에요. 나의 동지가 주님의 원수일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못난 인간을 하나님이 그냥 사랑해주셨습니다.” 하는 순간 비로소 우리 눈앞에 저주받은 사람이 등장합니다. “보소, 네가 헌금해야 복 받는 거야. 네가 교회 출석해야 복 받고 전도해야 복 받고 부모한테 효도해야 복 받는 거야. 찬양도 해야 복 받는 거야.”



복 받는 이유와 근거를 가지고 등장하게 만드는 것, 그래서 야곱과 에서를 이 시대에 새롭게 규명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작전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에돔에 대한 복수요?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 복 받은 인간이라고 자부하는 그것이 망가져야 돼요. 내가 복이라고 여기는 것이 복이 아니었음을 우리가 알아야 돼요. 그럴 때 진정한 복음 오직 주님밖에 없어요. 주님이 복이었습니다. 주님이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겁니다. 우리가 거기에 압력을 가한다든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어요. “하나님, 내가 복 받았는데 저 사람도 복 주세요.”라고 우리가 뇌물 줄 수도 없고 협조를 구할 수도 없고 그런 입장이 못돼요. 우리 자신도 그냥 이유 없이 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생겨난 것이 야곱이에요.



너무 간단해서 이상합니까? 오늘 본문 핵심은 이겁니다. 축복과 저주의 시스템은 비록 이스라엘이 망해도 그대로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에돔만 저주받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에돔 같은 것들이 나타날 거예요. 왜, 축복과 저주의 시스템은 계속 유지되어야 하니까. 지옥 갈 자들이 에돔이라는 모습으로 등장해요. 에돔은 자기 형제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잡혀가서 멸망할 때 아주 고소해 했습니다. 잘 됐다고 손뼉을 쳤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나서서 복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스라엘도 BC 164년경에 에돔을 정복한 적도 있어요. 하지만 이미 그 이스라엘은 십자가 이후에 아무 의미 없는 나라입니다. 그 당시 차원에서는 복수가 되었지만 그 후에는 이스라엘 자체가 망했으니 복수라는 것도 있을 수가 없지요. 로마서 12장 19절에 보면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복 주세요.”라고 할 입장이 못 됩니다. 끝으로 잠언서 16장의 말씀을 보고 마치겠습니다.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세상이 이런 거예요. 우리가 제비를 뽑는데 그 제비를 뽑는 것이 원인이 아닙니다. “제비를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다.” 우리가 축복된 사람이다? 작정은 이미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서 끝난 문제입니다. 이것은 변경이 안 됩니다. 이 사실을 믿는 자가 이스라엘이에요. 그리고 “도저히 못 믿겠다. 인간이 뭔가 축복받을 짓을 해야 복을 받지.”라고 하는 그 사람이 저주받을 에돔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축복과 저주의 원칙이 정해져 있는데 우리는 나를 위한 축복을 따로 받기 위해서 온갖 서툰 짓을 하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나 위주가 아닌 성경 안의 세계로 들어가서 그야말로 거저 주신 그 은혜가 얼마나 큰 사랑인지를 깨닫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