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모압에 대한 저주(겔25;8-110이근호140115

아빠와 함께 2014. 1. 16. 23:12

모압에 대한 저주(에스겔 25: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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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01-15 21:12 
모압에 대한 저주

2014년 1월 15일                     본문 말씀: 에스겔 25:8-11

(25:8)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모압과 세일이 이르기를 유다 족속은 모든 이방과 일반이라 하도다

(25:9) 그러므로 내가 모압의 한편 곧 그 나라 변경에 있는 영화로운 성읍들 벧여시못과 바알므온과 기랴다임을 열고

(25:10) 암몬 족속 일반으로 동방 사람에게 붙여 기업을 삼게 할 것이라 암몬 족속으로 다시는 이방 가운데서 기억되지 아니하게 하려니와

(25:11) 내가 모압에 벌을 내리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다른 이방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에서, 그들의 벌 받음으로 좋아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기준에 준해서 그들에게 벌을 내리시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들을 벌주는 내용을 만약에 우리가 모른다면 우리들도 똑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의 대상자가 됩니다.

남들이 벌 받는다고 해서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모압이 어떤 의식을 내놓았기에 하나님으로부터 벌받게 됩니까? 8절에 보면, “유다 족속은 모든 이방과 일반이라 하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 보기에 이스라엘이나 유다나 특별날 게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일반들이 말하는 특별남이란 그들의 기대하는 바에 더욱 근접한 상황을 두고 말하는 겁니다. 즉 흔히 말하는 축복받음에 대해서 유다나라라고 해서 유별되지 않아 보인다는 겁니다. 교회 다닌다고 해서 그 집안이 만사가 형통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다른 종교인들이 평하는 것과 같습니다.

유다나라에 대한 이러한 모압의 평에 대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서서 벌을 주신다는 것은 그들 모압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잘못 보고 있다는 겁니다. 이는 유다나라가 자신들이 섬기는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는 것 조차도 유별난 조치라는 겁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감히 생각지도 못한 참 하나님의 특별난 품성의 발현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로 특별나는 겁니까? 뉴스를 통해서 알려진 바에 의하면, 요근래 퍽 특이한 사건이 하나 일어났습니다. 부모가 자기 아들을 죽이기 위해 아들 자는 방에다 번개탄을 피운 사건입니다. 그러고서는 자신들은 연락 끊고 딴데로 사라져 버린 사건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의도적으로 죽이려는 그 부모의 심정은 참으로 공분을 자아낼만 합니다.

그런데 바로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이 이런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너무 사랑하시기에 그 아들을 죽이려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참 하나님을 나타내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상은 곧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자라면 도리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야 마땅함을 이해하는 자라는 겁니다.

이 얼마나 난해하고 믿기 힘든 실제적 일입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자신을 신뢰하는 자들을 자기 손으로 죽이려 합니까? 이렇게 되면 그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길 마음이 싹 가실겁니다.  이런 하나님의 품성에 대해서 모압을 비롯해서 주변 이방민족들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방민족 뿐만 아니라 본 이스라엘 자손들도 자기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이런 식으로 다루시는 겁니까? 민수기 23:21에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과 더불어 동행하시는 그 취지가 나옵니다.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의 동행 관계가 그들은 허물과 패역에 주목하시는 것에서 시작하십니다. 즉 백성들의 허물과 패역을 찾아내시고 그 허물과 패역을 용서하시고 자비로 덮어주시는 식으로 동행하시는 겁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막 탈출한 이후에, 모세가 받아온 하나님의 언약을 그들이 지킬 능력이 없음이 밝혀진 사항을 고려하신 겁니다.

출애굽기 33:12-16에 보면,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고 되어 있습니다.

즉 모세는 하나님께 요구합니다. 은혜주시는 그 은혜와 긍휼히 여기시는 그 긍휼의 반복이 없이는 결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 속에 있을 수 없으니 나 모세에게 맡기지 마시고 친히 자비의 하나님께서 동행해 달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동행의 원칙은 곧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자기 백성의 허물과 죄를 들추어내시는 작업이 연속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죄 지을만한 여건은 어떤 식으로 조성되는 겁니까? 이방민족들의 성향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안정된 정착을 목표로 민족과 국가를 형성했습니다. 자기 소유의 땅과 지역을 이 지상에서 해결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동행하게 된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운명을 허락받지 못합니다. 정착이 아니라 도리어 이 땅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디로 향하게 되는지 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인간들은 조금이라도 친숙해지면 그만 그 친숙성에 주저않고 머물고 싶어합니다. 안정적인 기초에서 번영과 번성을 꾀하려 합니다. 이스라엘도 그러고 싶어 주변 나라들의 번영이 부러워 여호와는 판이한 그들의 신을 섬기게 되는 겁니다.

누가복음 24장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 사이에 끼어 한 동안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두 제자는 그분이 자신들이 과거 기억에 남겨진 그 인상의 예수님이 아니라서 알아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알아보는 순간, 예수님은 홀연히 그들이 헤어집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자기 제자들과 동행하시는 겁니까? 그들은 인간들이 기대하는 소망의 나라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인간들이 소망하는 것에 합치되면 그들은 이 세상의 인상에서 떠나는 것이 그들이 예상한 천국에 가는 바가 됩니다. 그렇다면 그 나라는 이 세상의 연장된 나라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점을 지적하시고자 합니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를 제자들이 미리 알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들은 자기 백성과의 동행은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늘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시면 자기 부인을 유발하시면서 동행하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끊임없이 주님과 움직여서 이 세상의 즐거움에 탐익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