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강의

성막과 성전

아빠와 함께 2024. 6. 9. 09:06

20240607a 울산강의-역대기하(4강) 5장 8절 : 성막과 성전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역대하 3장, 4장, 5장까지 솔로몬 성전이 어떤 식으로 만들어졌는가에 대해서 언급해 드리겠습니다. 솔로몬 성전은 모세 때에 성막으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성막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고 난 뒤에 성막이 된 겁니다. 시내산, 불붙은 시내산.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와서 남성만 육십만, 이스라엘이 여기에 대기하고 있었지요. 육십만 여기 있을 때 사람은 있는데 뭐가 없느냐? 율법이 없어요. 하나님의 율법이 여기 없습니다. 그러면 시내산이 지상이라면 시내산에서 지상에 없는 것을, 모세와 여호수아가 올라가요. 여호수아는 중간에 놔두고 모세만 단독으로 올라갑니다. 단독으로 올라가서 구름 안으로 가요.

그럼 구름 안에 뭐가 있느냐 하면 여기 화산이 있습니다. 불붙는 화산 속으로 들어가요. 밑에는 불이 없어요. 불 속에서 뭐가 나오느냐? 모세가 불 속에 들어가고, 화산 속에. 막 소리도 들려요. 나팔 소리 들리고. 구름 있고 불붙는 화염 보이고 거기에 모세가 들어갔는데 사십일 동안 아무 소식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십일 있다가 내려왔는데 모세 양편에 돌 판을 가지고 내려왔습니다. 십계명이죠. 돌 판은 가져왔고 여기서 들었던 모든 율법은 자기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습니다. 뭐 그 후에도 여러 번 왔다 갔다 해요. 그러면 이 육십만 이스라엘 사람에게 뭐가 없느냐 하면 여기에는 성막이 없어요.

성막이 없고 성막에는 율법이 주어질 때 율법 안에 성막 설계도면이 다 들어있거든요. 구체적으로. 성막은 어떻게 지어져야 되고, 거기에 놓여 있는 기구들, 여러 가지 도구들, 장치들. 이런 것도 율법에 의해서 규격까지, 색깔까지 다 만들어서 줍니다. 그러면 육십만 대군 중앙에 뭐가 생기느냐 하면 성막이란 게 생깁니다. 가로, 세로 대략 오십 미터, 이십오 미터. 십 미터, 오 미터 뜰이 있고. 번제단도 있어요. 오 규빗, 삼 규빗. 물두멍도 있고. 울타리는 개수가 육십 개.

이것이 있다는 말, 다시 말해서 이건 뭘 뜻하느냐 하면 현재 육십만 이스라엘에게는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 의식하는 사람들이에요. 의식한다는 것은 과거가 이렇고, 현재가 이렇고, 미래는 이렇다고 내다본다, 그게 의식이거든요. 의식은 반드시 시간과 관련돼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을 때 그 시절을 다 기억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들이 과거에 애굽에 없었던 것, 없었던 것이 모세가 시내산 가서 내려오면서 턱하니 성막이란 게 생겼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성막은 인간에게서 나온 거예요, 인간에게서 나오지 않은 겁니까? 적어볼게요. 성막이란 것은 인간에게서 나왔다. 인간의 머리에서 또는 인간의 의식에서 나왔다. 인간의 두뇌에서 나왔다, ①번. ②번, 성막은 인간에게서 나오지 않았다. 인간의 의식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맞습니까? 율법, 성막 다 어디서 나온 거예요? ①번이 맞아요, ②번이 맞아요? 묵언수행을 하는지 답변을 안 하시는데 이건 오늘 강의 시작부터 끝까지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인간에서 나왔어요, 인간에게서 나오지 않은 겁니까? 인간에서 나오지 않은 거죠.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인간에게 나오지 않은 것에 그들은 무엇으로 지금 함께 섞여 있느냐 하면 인간에서 나오지 않은 의식되지 않는 것, 의식에서 나오지 않은 것에 대해서 그들은 의식적으로 다가가고 있는 거예요. 의식적으로 다가가고 있다.

그러면 의식적으로 알던 그들이 인간의 의식에서 나오지 않은 것을 대할 때에 이것은 백 프로 잘못 생각할 가능성이 아니고 백 프로 잘못 생각하겠지요. 오해하겠지요. 왜? 인간에서 나온 것은 기존의 의식에서 나오기 때문에. 의식이란 뭐냐? 시간적으로 과거의 기억과 과거의 경험에서 축적된 것이 지금의 현재 의식이란 말이죠.

지금까지 제가 한 취지를 여러분들이 쉽게 알기 위해서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9장 3절에 어떤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찾아왔어요. 친구와 같이. 그때 친구와 중풍병자는 뭘 의식하는 겁니까? 과거에 자기에 기억하고 알고 있는 걸 하겠지요. 중풍병자와 친구들은, 내 친구가 중풍병에 걸린 거예요.

예수님을 시내산에서 온 율법 덩어리로 봅시다. 예수님을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 가져왔듯이 율법 돌 판이라고 봅시다. 그러면 중풍병자 친구들은 예수님을 대할 때에 예수님이 누구신지는 관심 없어요. 뭐냐 하면 자기가 의식하고 있는 중풍병 걸린 것을 의식하면서 중풍병 낫기 위해서 온 거예요, 예수님한테.

왔는데 마태복음 9장 2절에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들은 생각하기를 중풍병 낫는 것, 그게 전부에요. 그게 자기의식의 한계인데 주님께서 전혀 의식하지 않는 이야기를 해버렸어요.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소리를 듣고 3절에 보면, 옆에 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병을 얼마나 잘 고치느냐에 관심 두고 유심히 봤던 바리새인들이 여기에 그만 발칵 그들의 의식이 드디어 심기가 틀어진 거예요. ‘병이나 고쳐라. 병 고치러 왔잖아. 병이나 고쳐. 병 고침 받으러 온 사람에게 왜 죄 사함이 없다고 그렇게 선언해버리느냐’라고 바리새인들이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대표해서 이야기한 거예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교회에 왜 오지요? 여러분 의식하고 교회 와요. 뭔가 하나님께 행운이나 뭔가 인간은 할 수 없는데 내가 위험한 게 있는데 주께서 채워주고 들어줄 거라고 오지요. 그런 우리를 향하여 주님께선 뭐냐 하면 네 죄 사함 받아라 할 때 우리가 교회 올 때 가진 의식이 죄에 포함됩니까, 포함 안 됩니까? 질문이 딱 둘 중에 하나에요.

자, 우리가 교회 와서 하나님께 도움 받아야 된다는 그 생각이 죄에 포함돼요, 죄에 포함 안 되는 거예요? 포함되죠. 그 죄를 내가 일방적으로 용서하겠다, 이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나 교회 와서 천국 갈래, 그게 죄에요, 죄 아니에요? 그게 죄에 해당되는 거예요. 왜? 우리가 보험들 듯이 이미 노리고 교회 오기 때문에. 하나님은 뭔가 특별한 기적을 베풀 것이라고 우리가 짐작하고 오기 때문에.

이처럼 마태복음 9장에서의 중풍병자는 난데없이 최고의 복을 받았지요. 그런데 애굽 사람들은 이미 의식하고 있는데 애굽 사람에게 없는 성막을 여기다 강제로 투입시킨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그 당시 애굽 사람이라 치고 애굽 사람의 현장에 있다고 치고 우리가 뭘 해야 되는가?

출애굽기 40장 34절에 보면, 성막을 다 완공했습니다.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 앞으로 발행하였고”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봅시다. 성막을 인간이 지었다고 해서 꼭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해야 돼요? 어떻습니까? 사람이 어떤 건축물, 건축물도 아니지요. 어떤 구조물을 설치해놓으면 그건 인간이 만든 거잖아요. 인간이 의식적으로 만들었지요. 인간이 만들었으면 백 프로 하나님의 영광이 거기에 임하는 겁니까? 꼭 굳이 임해야 돼요?

이게 어려운 거예요. 내가 교회 나왔다는 의식을 하면 꼭 은혜 받아야 됩니까, 우리가. 이게 어려운 거예요. ‘인간이 어떻게 의식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신께서 복을 줘야 된다.’ 그런 것은 엘리야 시대 때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가 그 짓했어요. 거짓 선지자들이. 뭐 밤새 온종일 그들은 가슴을 치면서 칼로 자기 몸을 난도질하면서 ‘신이시여, 신이시여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소서’ 하고 부르짖고 통성하고 그야말로 총화적인 흥분에 사로잡혔습니다.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가 팔백오십 명이에요. 엘리야는 혼자고. 팔백오십 명이 그렇게 될 때 그 경쟁을 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있었겠어요. 그때 바알 선지자가 자기를 치고 찬송하고 가슴 치면서 주여 응답해달라고 할 때 누가 흥분이 고조되겠습니까? 본인부터 해서 보는 백성들이 고조되겠지요. 고조, 고조 흥분이 올라가겠지요. 북한말로.

인간이 스스로 자기 감정을 고취하기 위해서 인간이 의식적인 행동을 하게 되면 누가 흥분합니까? 하나님이 흥분해요, 인간이 흥분해요? 인간 본인들 흥분하는 거예요. 철야 안 해본지 너무 오래됐지요. 부흥회 손뼉 친지 너무 오래돼서 그럴 수도 있겠다고 하는데 여러분들이 부흥회 가보세요.

앞에서 인도하는 사람이 뭘 자극합니까? 인간의 흥분을 자극시키지요. 왜? ‘인간부터 움직이면 하나님은 반드시 도와주게 돼 있다.’ 이 원칙이잖아요. 그게 무슨 종교입니까? 그게 바알과 아세라 종교지요. 이방종교지요. 왜? 인간의 의식에 하나님께서 거기에 동조한다는 논리지요. 인간의 의식적인 흥분상태나 열심 상태에 하나님이 필히 도와준다는 논리가 있는 거예요. 이것은 인간의 의식이 그러니까 인간은 내재적으로 타고난 거예요. 이 사고방식은. 모든 인간은 다 이렇게 종교적이에요.

그래서 열심내고 열심을 더 내고 헌금을 더 많이 하고 봉사를 하게 되면 그냥 가만있는 게 아닙니다. 자기 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내가 뭘 했는지 의식하고 거기에 대한 보상과 내 인생이 만회되기를 은근히 노리고 있잖아요. 신을 그런 식으로 다루잖아요. 그런데 보세요. 이 성막은 어떻습니까? 인간의 의식에서 아이디어를 창안한 게 아니지요.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의식한 게 있지요. 신은 뭐냐? 모세가 시내산 올라갔을 때 그들은 뭘 만들었습니까? 그들은 나름 금으로 신을 만들었어요. 황소 신을 만들었어요. 그것은 어디서 나왔느냐? 애굽에서 신이 황소에요. 황소는 그냥 무대포지요. 앞에 어떤 난관도 돌파할 수 있는 완력의 상징이 황소입니다.

옛날은 또 농경시대고. 밭을 갈고 논을 매고 할 때 소가 들어가잖아요. 소 없으면 우리의 생명이 없으니까 소의 힘 같은 대단한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이처럼 당차고 힘찬 그런 하나님을 우리가 믿습니다, 해서 황소 만든 거예요.

내 속에 있는 의식과 본심을 담아서 가만있지 못하고 그걸 형상화시킨 것이, 그걸 성경에서 뭡니까? 우상이라 하지요. 우상은 단순히 가짜 신이 아니고, 이 우상이라 하는 것은 무엇을 공격해요? 의식하지 않은 데서 온 하나님의 진짜 말씀을 도전하고 공격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우상이란 말이죠. 그래서 우상 숭배하지 말라 하지요. 그런데 우상을 누가 만들어내는 거예요? 의식하고 있는 인간들이 자기를 의식해서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성막 보여줘야 돼. 첫 페이지 성막입니다. B.C.12세기 성막. 그다음에 B.C.10세기경에 나오는 이것, 솔로몬 성전. 다르지요. 성막은 이동용이에요. 그러나 성전은 고정성입니다. 고정적으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요. 성막, 그다음에 솔로몬 성전. 그다음 페이지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평면도가 나와 있어요. 에스겔 새 성전, 에스겔 40장부터 나오는 에스겔 새 성전 평면도.

그다음에 나오는 게 뭐냐 하면 솔로몬보다 지가 더 위대하고 싶어서 환장해서 백성들 세금 짜내서 헤롯 대왕이 신자도 아닌 게 성전을 지었어요. B.C.10년부터 망하는 것은 A.D. 서기 80년에 홀라당 불타버린 이 헤롯 성전. 현재 이스라엘에 남아 있는 것이 헤롯 성전의 서쪽 벽만 남아 있고, 그림에 안 나타나 있는 그 헤롯 성전의 지성소에 대해서 마지막 페이지에 나와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네 가지 성전 가운데서 어느 것이 제일 크겠습니까? 헤롯 성전이 규모가 제일 큽니다. 그러면 성전 지어놓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임합니까, 임하지 않아요? 임하지 않지요. 그런데 성막 짓고 난 뒤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했다 했지요. 출애굽기 40장에. 그런데 이것 한 번 생각해보세요.

모세가 성전 지었는데 계획한 치수보다 0.1밀리미터가 틀어졌어. 그러면 영광이 임합니까, 영광이 임하지 않습니까? 그때 자가 정확하지 않아서 2센티미터 더 나가고, 홍색, 자색, 청색으로 실을 짜야 되는데 청색에 홍색이 한 가닥이 끼었어.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이 임합니까, 임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임하지요. 내 설계대로(이야기했다 하면 다 틀려요) 완벽에 완벽을 기하면 영광이 임하는 게 이다, 아니다? 그게 아닌 겁니다.

오늘 역대하 봅시다. 역대하 4장에, 성전 다 지었습니다. 아니 5장 13절에 다 해서 나팔 불고 장고 치고 다 했지요. 그다음에 “그 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순금 백 프로여야 하는데 순금 99.5%로 하면 영광이 임합니까, 임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임하겠지요. 의식적으로 인간이 완벽하게 행할 때 완벽한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의 의식 따로 하나님의 영광 따로에요. 인간의 행동 따로 하나님의 은혜 따로입니다.

그래서 지금 사람이 내가 이렇게, 이렇게 완벽하게 성막 만들면 하나님의 영광이 임한다, 라고 우리가 의식적으로 예상한다면 출애굽기 40장, 영광 임할 때 사람들이 놀랐겠어요, 안 놀랐겠어요? 뭐 놀라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요. ‘우리가 애써서 성막 만들었는데 영광 정도는 임해야지, 그 정도는 성의를 보여야지’ 이러잖아요.

전혀 그것이 아니고 오히려 이렇게 돼요. 왜 임하지? 만들기는 우리가 만들었는데 여기에 왜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지? 왜 굳이 임하십니까, 그렇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인간의 의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한계가 있다는 것을 모르면 우리는 신앙 자체가 근원적으로 잘못된 거예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벌써 몇 번 이야기했는데 또 이야기해야 되겠어요.

마태복음 1장에서 요셉과 마리아가 서로 모르는 사이가 아니에요. 이미 정혼, 약혼, 사실은 관계는 안 했지만 부부관계라 할 수 있어요. 그때 약혼도 장난이 아니니까요. 정식으로 했으니까. 분명히 둘이 동침한 적 없는데 자기 약혼녀 마리아가 임신이 된 거예요. 어느 날 카페에서 볼래, 했는데 배가 불러 왔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때 요셉이, “야 참 마리아 네가 신앙 좋기는 좋은 모양이다. 하나님께서 너에게 임신을 시키다니.” 이렇게 이야기했습니까? 세상에 어느 인간이 그렇게 생각해요. 백 명의 남자는 소위 교양 있고 이성 있고 점잖은 정말 아내를 사랑한 사람은 이래요. 딱 한 마디입니다. “보내줄게.” 얘 아빠한테 보내줄게. 딴 소리하지 마. 뭐 이상한 소리하지 마. 이게 증거야. 보내줄게. 나 쿨한 남자야. 이것으로 붙들고 치사하게 내가 준 가방 내놔라, 치사한 소리 일체 안 할 테니까 그냥 조용히 끊고자 하지요.

이 이야기가 왜 중요하냐 하면 요셉이 신앙생활 안 했습니까? 요셉이 신앙생활 했지요. 여호와 믿었지요. 믿으면 뭐합니까, 막상 하나님의 개입에 대해서는 전혀 자기가 갖고 있던 과거의 의식으로선 그걸 받아들일 바탕이 없는데요. 혼자 상상한 신앙이에요. ‘내가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잘 섬기면 하나님이 날 구원하겠지.’ 이거는 시작도 끝도 그냥 자기 생각 속에 맴도는 의식이에요. 신앙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만큼 성의 있게 했으면 성막 지었으면 영광 임해야지.’ 아닙니다. 오히려 임한다는 것이 기절초풍할 지경이에요. 여기 솔로몬 성전도 마찬가지고. 물론 시키는 대로 다 했어요. 시키는 대로 다 했지만 시키는 대로 다 한 인간들의 손때가 묻은 그 건축물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한다는 것은 딴 문제에요. 내가 이렇게 성의를 표했으니까 하나님께서 반응을 보인다, 지금 이것과 매치되는 게 아닙니다. 인간이 하는 것은 인간이 하는 걸로 끝나는 거예요. 약혼한 것은 약혼으로 끝나는 문제고.

그러니까 요셉의 입장에서는 아내가 임신한 것에 대해서는 의심한 여지도 없어요. 요셉이 아내가 임신한 것은 다른 남자와 동침했음에 의심한 여지가 없지요. 그렇다면 이미 요셉은 뭐냐? ‘믿습니다’에요. 뭘 믿어요? 자신의 의식과 예상을 믿고 있는 신앙인이에요. 자기 자신을 믿는 거예요. 그래서 의식은 아까도 했지만 의식은 자기 자신에서 맴돈다.

의식은 이거는 하나님을 동원하고 예수님을 동원하고 백날 동원해도 그건 의식적인 거예요. 이만한 성의를 보였으면 하나님도 뭔가 천국 보내주겠지, 라는 자기 내부 안에서 메아리에요.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주여, 주여 하면서 동굴 속에서 지 혼자 주여 하고 있다고. 그냥 메아리에요.

그럼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은 모든 인간이 그 정도밖에 아닌데 무슨 대책이 있습니까? 모든 인간이 그 수준밖에 안 되고 자기 한계를 못 벗어나서 백날 하나님이 듣는지 안 듣는지도 모르고 맨날 주기도문 외우고 그냥 기도하고 있고, ‘되면 되고 안 되면 안 되는 거지 어쩔 거야’ 이건 뭐 도박도 아니고. 하나 얻어 걸려라. 하나 걸리면 간증집회 나서지요. ‘기도 빡세게 했더니만 복 받았다.’

그럼 이게 아니라면 이게 신앙도 아니고 자기가 의식적으로 하는 놀이에 불과하다면 거기에 대한 대책은 뭐냐? 대책은 간단하지요. 성령이 오게 되면 또는 성전에 영광이 임하면 그러한 의식 자체 덩어리가 전체가 바로 죄입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는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지요. 인간은 죄라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구원받는 거예요.

뭐 성경 시키는 대로 하면 갑자기 죄인에서 의인되는 줄 알아요? 아닙니다. 인간은 평생 죄라는 굴레 그 안에 들어있고 주님께선 그걸 고대로 네가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면서 예수님 자신의 생명으로 건져 올리면 그 사람은 축하드립니다. 천국 갑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죄의 몸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래서 여기에 성경적 논리가 하나 필요하지요. 일종의 공식 같은 건데요. ‘인간은 자기의식 안에서 맴돈다.’ 그걸 한 자로 뭐라 했습니까? 이게 ‘죄’지요. 죄의 특징은 뭐냐? 잘 보세요. ‘인간은 어느 누구도 자기를 대신할 수 없다.’ 이게 인간 죄, 또는 의식 안의 내용입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나를 대신할 자가 없다.’ 이렇게 돼요.

그런데 사도 바울의 편지에 보면 뭐라 합니까? 예수님이 너를 대신하여 모든 죄를 대신 담당했기에 그걸 대속이라 해요. 이걸 믿는 자는 네가 사함을 얻고 영생을 얻느니라, 이렇게 돼 있어요. 어떻습니까? 이 방정식, ‘인간은 어느 누구도 나를 대신할 없다’에 갇혀 있는 우리, 그런데 그 바깥에서 들려오는 말씀은 뭐라 합니까? “너, 대신할 없다고 이야기했지?” “예.”

그런 그게 죄인 거예요. 그 죄로 인해서 주께서 대신 했다는 거예요. 그럼 그걸 듣는 우린 뭐라 합니까? ‘근거를 대. 근거를 대야지.’ 대신했다는 근거를 대야 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마땅히 의식적으로 그걸 요구하겠지요. 요구한 적 없어요? 마땅히 요구하겠지요.

그게 뭐냐 하면 너는 죄로 인하여 네 안에 뺑뺑이 메아리치는 네 안에서만 대화하고 평생을 아무도 나를 대신할 수 없다는 이거는 그야말로 그냥 젊은 애들 말로 꼴통이고요, 나르시시즘이죠. 철저한 갈수록 자기 안으로 함몰돼요. 이게 점점 더 자기밖에 몰라요. 함몰된다고요. 이게 타고난 거니까, 아담의 죄에서.

이 죄는요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행위에 의하면 이것이 바로 저주받아야 돼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저주를 받았어요.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아놓고 하는 말이, 내가 저주를 받을 때 이 저주는 내가 찾아가야 될 그 사람과 더불어 함께 십자가에서 저주받았다, 라는 것을 이미 다 이루시고 그것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통보를 해주는 거예요. 성령을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방금 이야기한 것 로마서 편지에 다 나옵니다. 로마서나 에베소서 사도 바울의 편지에 다 나오는 이야기에요.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뭘 자꾸 믿고자 해요. 나한테 이익 되는 것, 나한테 이득이 될까 싶어서 교회 와요. 하지만 백날 해봐야 뭐냐 하면 내가 의식적으로 뭔가 노리고 들어오는 거예요. 기대하고 들어오는 거예요. 소망이니 사랑이 어떠니 백날해도 소용없고.

기대하고 들어오는데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런 기대조차도 죄가 되어서 아버지로부터 끊어진 상태다. 이미 저주받은 상태고 이거는 저주받아 죽어야 되는 거다, 라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결정적으로 십자가의 결과물이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들어오게 되면 주님의 행하심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채워야 될, 우리의 모든 치러야 될 것을 주님 안에 다 치러졌다는 사실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가 확 들어와요. 확 안 들어오면 곤란한데…. 확 들어온다고요.

지금 제가 이야기한 것을 사도 바울의 복음에 나온 거예요. 근데 이걸 구약적으로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구약적으로 이렇게 설명하고, 이렇게 설명하고,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설명하는 거예요. 성막을 설명하면서 제가 해답부터 먼저 말씀드리는 것은,

이 하나하나의 설명이 만약에 해답 말씀드리지 않고 그냥 성막 이렇습니다, 이렇습니다. 이건 예수님의 뭘 상징하고, 뭘 상징하고 이렇게 해버리면 그 듣는 사람이 뭘 하느냐 하면 그걸 의식적으로 받아들여서 ‘나 그렇게 살면, 성전에서 교훈한 대로 살면 하나님 저 구원해주실 것 맞지요?’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그러면 기껏 요셉밖에 안 돼요.

지금이 모든 성막, 성전의 해석이 바로 성막이 이렇고, 성전이 어리니까 우린 정신 바짝 차려서 성막 안의 하나의 기구처럼 우리고 그렇게 바르게 살아보자, 이런 식으로 결론이 나는 거예요. 그거는 성경을 보면서 은근히 우리가 의식적으로 기대하는 게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해석에 대해서 속아 넘어간 거죠.

방금 이야기한 것을 전체적으로 공식 하나 들어갑니다. 이 공식은 상당히 함축된 공식인데 지난 수요일도 언급했으니까 수요 설교 들으면 이해될 겁니다. ‘사건이 존재보다 앞선다.’ 뭔 뜻인지 이제 아시겠지요. 주님이 일으킨 사건이 내가 여기 있음, 이 존재보다 앞서는 거예요. 마리아라는 존재보다, 요셉이란 존재보다 성령이 임한다는 사건이, 예수님이 마리아 속에 들어온다는 사건이 먼저인 거예요.

이걸 뭐라 하느냐 하면 사건화 된 존재라는 거예요. 주님께서 마리아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임신했어요. 마리아는 자기가 임신한 처녀라는 의식과 나를 처녀 아니고 임산부로 만든 주님의 사건과 함께 중첩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마리아가 모든 성도의 원형이고 모델이에요. 누구든지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이 말을 달리 하면 누구든지 예수님을 잉태하지 못하면 그거는 성도가 아니란 뜻이에요. 천국 못 간다는 이야기에요.

인간들이 하는 모든 행동은 사건이 아니에요. 나라는 존재가 먼저 있고 내가 만든 사건, 그걸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요. 내가 고등학교 삼학년이고 공부 열심히 해서 서울대학 간다. 나라는 존재가 먼저 있는 거예요. 서울대학 들어갔다는 사건은 내 존재가 먼저 된 사건이에요, 그게. 나는 남자다. 드디어 내일 장가간다. 마찬가지 아닙니까, 모든 게.

그걸 교회 와서도 똑같이 적용하거든요. 뭐냐? ‘하나님, 나 여기 왔습니다. 존재가 여기 있습니다. 나 천국 보내는 사건 일으켜주소서.’ 이래 나온다고요. 이거는 성막 만들 때 열심히 만들었으니까 하나님의 영광 임해달라는 이거는 강도도 아니고 억지스러운 거예요. 그게 바알과 아세라 종교입니다.

그러면 사건화 된 존재니까 사건화 된 구조물, 사건화 된 건축물 이게 성막이요, 그다음 뭡니까? 성전이 되겠지요. 성막이고 성전이란 말이죠. 그럼 성막과 성전의 차이점이 뭐냐? 성막은 같이 움직이죠. 그런데 성전은 그 자리에 있지요. 뭔 뜻이냐 하면 성막 할 때는 광야니까 이스라엘이 살아 움직이고 덩달아서 성막이란 하나님이 임하는 곳이니까 하나님도 살아 같이 움직이는 것이 성막 시대에요.

그런데 성전은 거기에 제물이 죽어요. 하나님이 죽는 장소에요. 죽는 장소기 때문에 성전에서 누가 죽어야 돼요? 그 앞에 모든 이스라엘은 성전에서 자기의 의식과 자아는 어떻게 돼요? 죽어야 되는 거예요. 성전에 와서 나 잘 되라고 빌면 안 돼요. 왜냐하면 내가 살아 있어버리면 이거는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멀쩡하게 살아 있는 나의 일이 되거든요.

여기 하박국 봅시다. 하박국 2장 20절에, “오직 여호와는” 어디에 계십니까?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뭐하라? “잠잠할찌니라” 그 잠잠한 게 입 다물고 있으면 되겠네. 입 다물고 있는 게 잠잠한 게 아니에요.

하박국 3장 17절에 보면,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이게 잠잠한 거예요.

전에 유명한 한국 야구대표팀 감독이고 해태 야구팀 감독(김응룡)이 ‘올해 해태 팀 잘 되겠습니까’ 하니 이런 유명한 말을 했어요. “아아 동렬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 이랬다고요. 차 떼고 포 떼니 할 게 없다는. 여기 보세요. 무화과나무 열매도 없고, 포도나무 심었는데 열매가 없고. 외양간의 주인이 누굽니까? 외양간에 누가 있어야 돼요? 소도 없고. 양 우리에 양이 없고.

없고, 없고 뭐예요? 죽었다는 이야기에요. 죽었는데 기뻐. 왜? 그동안 나는 나의 존재에 신명을 바치고 온 나의 의식적 과거가 이제는 다 옛말이고 한스럽다, 이 말입니다. 나 잘되기 위해서 하나님 믿었던 그 과거가 추접스럽고 더러워 죽겠다, 이 말입니다. 나 잘되기 위해서 교회 나온 이 모습이 어떻게 그런 마귀 짓을 삼으면서 믿음 좋다고 남한테 자랑질했는지 진짜 한탄스럽다는 거예요. 한심스럽다는 겁니다. 나를 있게 한 것은 주님인데 나는 내가 악착스럽게 살아서 내가 있는 줄 알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하박국을 보면서 또 여러분 주의할 게 있어요. 하박국 보니까 종범이도 없고 동렬이도 없고, 이래서 내 인생 차도 포도 다 떼버리고 없고, 자식도 없고, 남편도 없는 것처럼 없고, 그렇지만 나는 주님 이름으로 살아야지. 플리즈, 제발 이러지 마세요. 그게 의식이에요. 그냥 자기 존재로 사세요. 살게 되면 주께서 마동석 보내서 조팹니다. “내가 이게 죄라 했어, 안 했어? 무화과나무 없다고? 네가 무화과나무 없는 것도 주의 복인 줄 알아.” 패는 거예요. 그게 뭐냐? 존재보다 우선되는 사건이에요. 매일같이 그 사건이 터져야 돼, 매일같이.

제가 강남강의를 했는데 강남강의하고 난 뒤에 우리교회 집사님께서 이런 말씀하셨어요. 강남강의 다 듣고 보았는데 강남강의에 나왔던 그 노래를 팝송이 되어서 무슨 가사인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팝송 가사와 번역한 걸 일일이 다 해줘야 음성 듣는 참석 안 한 사람도 아는데 제가 그걸 깜빡 했어요.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이걸 다 하게 되면 복음 이야기할 시간이 너무 모자라요.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또 그러한 과오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이렇게 프린트해서 왔습니다. 영어 선생님도 계시는데 번역에 뭔가 문제 있더라도 참작해주시고, 한 3분밖에 안 걸려요. 후딱 할 거예요.

이걸 왜 하느냐? 울산강의에서 왜 하느냐? 이게 의식이에요. 의식을 도발할 수 있는 유발할 시킬 수 있는 거예요. 가사 내용이.

Sing the wondrous love of Jesus, 찬송하라 주의 크신 사랑 놀라우신 주의 큰 은혜
Sing His mercy and His grace;
In the mansions bright and blessed 천국에서 우리 쉴 곳 예비하고 계시네
He'll prepare for us a place.

이건 요한복음 14장에 나오는 말씀이죠. 네 처소를 마련하겠다. 제가 왜 이걸 하느냐 하면, 요한복음 14장을 장례식장에서 하잖아요. 하늘나라에 처소 있어서 간다고. 그때 우린 그걸 들으면 그걸 의식한다고요. ‘바르게 살아서 하늘나라 처소 따내야지.’ 청약해서 당첨돼야지, 그걸 생각한다고요. 그 의식하는 걸 뭐라 했어요? 그게 죄에요. 왜? 내 존재가 우선되기 때문에. 주실 분은 생각도 안 하고 있는데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단 말이죠. 그다음에,

When we all get to Heaven, 우리 모두 하늘을 오를 때,
What a day of rejoicing that will be! 그날이 얼마나 기쁜 날일까요!
When we all see Jesus, 우리 모두 예수님을 볼 때
We'll sing and shout the victory! 우리는 찬송하며 승리를 외칠 거예요

While we walk the pilgrim pathway, 이 세상의 나그네 길 갈 때 구름 잠시 하늘 덮어도
Clouds will overspread the sky;
But when traveling days are over, 머지않아 주님 뵐 때 슬픔 다시 없겠네
Not a shadow, not a sigh.

주께서 다시 그림자나 슬픔 같은 한숨 같은 건 없어진다, 이 말입니다.

Let us then be true and faithful, 우리 앞에 보상 바라보고 주님 맡긴 일을 행하세
Trusting, serving every day;
Just one glimpse of Him in glory 영광의 주 만나 뵐 때 모든 수고 끝나리.
Will the toils of life repay.

그다음에 뭐냐? 후렴 같은 건데,

When we all get to Heaven,
What a day of rejoicing that will be!
When we all see Jesus,
We'll sing and shout the victory!

우리가 천국에 납치당할 때, 그날이 얼마나 기쁜 존재가 되겠느냐.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 victory 승리, 이것 싫어하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나 교회 가서 인생 승리할래, 다 이러고 온다 이 말이죠.

Onward to the prize before us! 우리 앞으로 상이 주어지고
Soon His beauty we'll behold; 곧장 예수님의 아름다음을 보게 됩니다.
Soon the pearly gates will open; 곧 진주 문이 열리고
We shall tread the streets of gold. 우리가 금의 길을 밟게 됩니다.

When we all get to Heaven,
What a day of rejoicing that will be!
When we all see Jesus,
We'll sing and shout the victory!

여기까지만. 귀한 복음 시간 아깝기 때문에 여기까지만. 어떻습니까? 은혜 되지요. 갑자기 희망이 확 생기기 않습니까? 그런데 집에 가면 부도났다고…. 바로 주께서 이런 일이 있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 신앙생활 잘하면 주는 게 아니고 이게 이상하다는 거예요. 이걸 우리한테 왜 주느냐 이 말이에요. 천국을 왜 줘요? 왜 줍니까, 줄 필요도 없는데 우리가 뭐 했다고? 평생 죄만 지었는데 천국 주잖아요.

바로 That's right. 오늘 영어 막 나온다. 바로 그거에요. 죄만 지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의식, 나의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자기를 전적으로 죄인으로 간주 안 해요. 아무리 죄 지어도 약간 의의 구석은 있는데 전적인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이 천국을 무상으로 주시는 겁니다. 10분 쉬어야 되겠지요.

 

 

 

 

20240607b 울산강의-역대기하(4강) 5장 8절 : 성막과 성전
(강의:이근호 목사)


일 년에 칠월 십일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다른 사람 못 들어가고 혼자 들어가는 이유가 제사장에는 제물에 있었던 피와 기름이 제사장의 신체에 묻어 있기 때문에 남들 보기엔 사람이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죽었음이 걸어서 속죄소까지 들어가게 된다 말이죠. 왜? 너라는 존재를 내 희생이 대신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와 같은 경우가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 집사 나오잖아요. 스데반 집사가 죽을 때 뭐라 했느냐 하면, ‘보라 예수님의 인자가 살아 있다’ 했습니다. 하나님 우편에 예수님이 살아 있다. 그러니까 스데반 집사님은 죽을 때만 그런 게 아니고 평소에 이미 늘 뭐만 쳐다보고 살았어요? 자기 존재를 쳐다보는 게 아니고 주께서 자기 존재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 쥐고 있는 주인님이 따로 있고 자기는 종이에요. 그래서 스데반 집사를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는 거예요.

성령의 충만함에 대해서 에베소서 5장에 참 쉬운 예가 나오는데 성령의 충만함을 술 취한 걸로 대비시켜놨어요. 여러분들은 평생 술은 입에만 댈 수 있지요, 누구 말대로. 먹지도 않고 입에만 댈 수 있지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모르겠는데 진짜 술 먹는 사람은 술이 자기를 컨트롤해요. 알코올 성분이. 그것과 무엇이 똑같다? 성령이 나를 컨트롤하는 거예요.

친구들 모여서 친구가 사전에 주의를 주지요. “너 오늘 모일 때 복음 이야기하지 마라.” 신신당부를 했건만 슬슬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아 에라 모르겠다. 복음 이야기하자, 하고 막 터져 나오잖아요. 내가 하지 마라 했지, 해도 더 이상 안 듣지요. 글쎄 그게 성령이 충만해서 그런가?

이처럼 성도는 누가 나를 대신해요. 이게 신앙인이고 성도고. 불신자는 뭐냐? 어떤 경우라도 나는 나다.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살지 어떤 누구도 나를 대신할 자는 없다. 내가 착실하면 좋은 천당 가고, 내가 게으르면 나쁜 짓하면 지옥 간다. 이게 바로 우상 숭배자입니다. 그것을 이제 우리가 오늘 역대하 4장 솔로몬 성전에 대해서 보자 이 말이죠.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솔로몬 성전에서 성막과의 차이점을 앞에도 몇 가지했는데 거기에다 하나를 더 보태겠습니다. 성막에는 모세의 성막이죠. 누가 들락거리느냐 하면 입구에 동쪽에 제사장이 들락거려요. 백성들은 이 회막까지만 오고 나머지는 바치는 그걸 백성들이 잡아요. 그 잡은 피 그거는 제사장이 관리해서 제단에다 합니다.

여러분들이 보시면 제단 높이가 어떻게 됐어요? 첫 번째 제단 높이 치수 다 나와 있어요. 놋제단의 높이 1.4미터, 가로세로 2.4미터. 채가 있어서 성막 전체가 이동용이니까 움직이게 돼 있어요. 금방 짐 싸고 딴 데로 가게 돼 있어요. 자, 성막이 어디로 갑니까? 성막이 갈 때 누가 결정하느냐? 성막 위에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변해서 성막, 텐트는 네 겹으로 돼 있어요.

안쪽에는 사람들이 홍색, 자색, 청색의 실로 짜게 돼 있고 그 위에는 흰털, 염소 털로 덮게 돼 있고, 그 위에는 수양의 가죽으로 덮게 돼 있고, 마지막에는 해달의 가죽으로 방수용으로 덮게 돼 있어요. 네 겹으로 덮습니다. 덮는다는 말은 지붕이 있단 말입니까, 없단 말입니까? 지붕이 없어요. 언제든지 해체가 가능하니까요. 그걸 옆의 기둥들이 바치고 있어요.

48개의 기둥들이 바치고 있는데 그 기둥들 앞에 휘장이 있는데 회막에 들어갈 때 휘장이 있어요. 영어로 하면 veil 또는 curtain, 베일이 더 나아요. 또 휘장이 있어요. 성소와 지성소를 나눌 때 휘장이 또 있어요. 그런데 그 휘장에 차이가 나요. 나중에 성소에서 지성소 갈 때는 두 번째 성소와 지성소 나눌 안쪽의 휘장은 천사의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 차이고 입구에서는 앞에 들어갈 때는 천사의 그림이 없어요.

어쨌든 간에 옮길 때에 회막 여기에 구름이 떠오릅니다. 밤에는 불기둥이. 밤에는 불기둥이 떠오른다는 말은 이 회막 자체가 어디서 나왔다는 거예요? 원천이 고향이 어디란 말입니까? 아까 했지요, 첫째 시간. 시내산 꼭대기에 뭐가 있다 했어요? 불이죠. 불 속에서 나온 거예요. 불 속에서 나왔기 때문에 제사장 말고 그러니까 희생양의 피나 기름을 바른 그 제사장 말고 다른 사람이 회막 속에 들어가면 죽겠어요, 안 죽겠어요? 죽는다는 겁니다.

왜 ‘죽겠다’ 안 하고 ‘죽는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냐? 지금 회막이 움직이잖아요. 이게 나중에 정착이 되면 성전이 돼요. 성전이 딱 됐는데 성전은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고 불에서 나온 율법을 무시하고 외면했을 때 그다음부터는 성전 백날 들어가도 소용없어요. 왜? 하나님이 그 성전을 떠났기 때문에. 이곳은 거룩한 곳이고, 이거는 지성소고, 여전도사는 강단에 올라오지 말라, 해도 그건 아무 의미 없어요.

그러니까 인간이 만든 건축구조물에 하나님의 영이 임한다는 자체가 신기해요. 제사장 아들 두 사람, 나답과 아비후는 분향단의 제단불로 해야 되는데 그냥 향 피우면 되겠지, 하고 생각한 거예요. 술 먹고 그런 짓한 것 같아. 향 피우면 되겠지 해서 그러니까 음주 운전한 거죠. 들어갔더니만 그 향로 불이 두 사람을 죽였습니다.

여러분 참 신기하지요. 그러니까 사는 것도 신기하고요 더욱 더 신기한 것은 다른 불로 향 피웠다고 죽는 것, 너무 신기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강대상에 어린아이 올라오면 어린아이 죽습니까? 나중에 늙어 죽겠지요.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고요. 굳이 안 죽고 살아 있어도 죽은 거예요.

제가 무슨 말을 하느냐? 이거예요. 성전이 변합니다. 어떻게 변하는가? 성막에서 성전으로, 그다음에 성전에서 솔로몬 성전입니다. 솔로몬 성전에서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있는 데요 그건 아주 볼품없어요. 자재도 엉망이고. 학개, 스가랴의 스룹바벨 성전. 그다음에 새 성전, 이거는 천사가 측량해서 하는 건데 존재하지 않지요. 건축구조물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까 헤롯 대왕의 대성전, 엄청난 큰 성전 있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성전은 뭐냐? 인간이 만든 성전을 지어놓고 이 성전을 무효화시킵니다. 그러니까 성전 지었는데 아깝지 않느냐, 라는 생각을 가지면 안 됩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회막 지었는데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지요. 임한 게 이상하다니까. 인간이 했는데 인간이 구슬치기하는데 하나님이 왜 끼어드느냐 말이죠. 이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인간끼리 요셉과 마리아 둘이 동침해서 애 낳아야 되는데 왜 새치기해서 하나님이 마리아한테 아기로 태어나지요.

그러니까 교인들 중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믿어요. 사랑하라, 온유하라 그건 믿지만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일체의 기적, 십자가에 죽고 사흘 만에 부활, 마리아의 임신 그거는 부담스러워서 그건 빼고 믿는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특히 진화론. 육일 만에 천지를 창조했잖아요. 그런데 과학에서 진화론 이야기한다고 그걸 조화시키면 젊은 사람들이 교회 나와서 하나님 믿지 않겠느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신학교 교수가 유신론적 진화론이란 걸 내세웠어요. 성결교 대학에서. 신학교수가 잘렸겠어요, 안 잘렸겠어요? 잘렸어요.

여러분 진화론의 허점은 딱 하나 있어요. 뭐냐 하면 137억 년 전에 우주 만들어졌고 56억 년 전에 지구 만들어졌다 하잖아요. 그러나 과학적으로 따져보면 세포 하나 진화하는데 그 137억 년으로 터무니없이 모자라요. 시간 거의 무한대로 흘려보낸다고 새로운 게 생기지 않아요. 이걸 과학 하는 사람들은 그건 모르겠고, 이래 나와요. 무조건 시간을 길게 가져가보는 거예요. 무조건 길면 확률 상 뭐 되겠지 하는데 확률 상 안 돼요. 천지창조는 육일 만에 된 거예요.

그러면 진화론이 문제냐, 과학이 잘못된 거냐? 진화론이 잘못된 게 아니고 그들이 주 예수를 사랑하지 않은 게 잘못된 거예요. 그들은 자아가 살아 있어요, 자기 존재가 살아 있어요. 이게 문제에요. 자기의식이 살아 있다는 의식이. 의식이 살아 있으니까 마리아가 임신 못한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예수가 뭐 어떻고, 그런 소리할 자격도 안 돼요, 그들은.

그야말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 얼굴 파래서 하나님과 동해하는 중입니다. 만들기는 만들지만 이게 도대체 왜 만들어야 되는지를 몰라요. 그것은 바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이끄는 대로 다시 해체하고 다시 조립하는 식으로 반복하면서 그들은 40년 간 광야를 1년 만에 왔으니까 39년 만에 광야를 통과한 겁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만약에 만나가 안 온다든지 그리고 구름기둥이 안 핀다든지 불기둥이 안 온다면 이 성막 의미는 전부 다 구라입니다. 거짓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동행이 신기함을 넘어서서 무서움 그 자체에요. 왜 하나님께선 이렇게 이스라엘 사람들을 무섭게 하는가? 무섭게 해야 이스라엘 사람들이 소위 인간적 의미에서 무서운 게 뭐냐 하면 장대한 이방민족의 군사력이에요.

그들과 맞닥뜨릴 때 하나님이 더 무서워야 그까짓 인간들 숫자 무서워하지 않게 돼 있어요. 주님한테 은혜를 듬뿍 받아야 성도가 세상에 나가서 누구 앞에서도 할 말 다 할 수가 있습니다. 복음 이야기하지 말래도 상관없어요. 그냥 끝까지 밀어붙입니다. 왜? 사람보다 누가 더 무섭기 때문에, 누가 더 두렵게 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두려워함과 동시에 사랑하기 때문에.

이렇게 사랑은 무서운 거예요. 사랑을 해봐야 알지요. 사랑은 정말 지독하게 무서운 겁니다. 눈에 보이는 게 없어요. 당신만 있다면 그걸로 족해요. 그게 사랑입니다. 결혼하기 전에 몇 개월 동안 경험해봤지요? 몇 개월 하면 안 되는데. 더 가야 되는데.

자, 여기에서 어디로 가야 하는 거예요. 어디로 가는 것은 하나님의 구름과 불기둥이 네 겹의 지붕 역할 하는 덮개 위에 있다 했지요. 그러나 더 파고 들어가면 어디 있느냐 하면 바로 언약궤 위에 있습니다. 언약궤 그 뚜껑이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장소에요. 참 신기해요. 오늘 신기하다는 말 여러 번 하는데 정말 신기합니다.

만들기는 인간이 만들었는데 하나님이 여기에 임한다는 그 자체가 황송스러워요. 우리가 뭔데 우리 같은 인간에 왜 오십니까? 천지를 창조했는데 왜 오지요? 신기하고 놀라워요. 아까 가사 치워버렸는데 나 같은 죄인이 천국의 길을, 생명 길을 걷는다는 것이 매일같이 신기하고 놀라워야 돼요. 절대로 당연시하면 안 됩니다.

당연시하면 또 천국은 됐고, 딴 짓한다고요. 비트코인이나 해볼까, 이런다고요. 주식투자? 이런다고요. 이게 너무 신기해버리면 주식투자 하지 말라는 게 아니고 주식하고 펀드해서 꼴아 박아도 그게 아무 내 기쁨을 앗아가지 못해요. 이쪽이 너무 신기해서. 주님이 아무것도 아닌 나에게 성령이 구름기둥 같이 임한다는 자체가 너무 신기한 거예요.

그러면 언약궤가 뭐냐? 언약궤 크기 나와 있지요. 가로가 2.5규빗, 1.5규빗, 1.5규빗. 한 규빗에 45센티미터라 하는데 그냥 50센티미터, 0.5미터. 이게 제일 중요해요. 그래서 솔로몬 성전 지을 때도 3장 10절에 보면, “지성소 안에 두 그룹의 형상을 새겨 만들어 금으로 입혔으니” 이것 설명이 좀 있어야 돼요. 그 언약궤 위에 뭐가 있느냐 하면 언약궤 위에 두 천사 형상이 있어요. 성막에선 이게 잘 안 보이지만 솔로몬 성전에선 이걸 아주 크게 만들었어요.

솔로몬 성전 봅시다. 크게 만들었지요. 지성소에. 여기 그것도 나와 있어요. 언약궤 날개폭이 4.6미터짜리 두 개 나와 있습니다. 이게 뭐예요? 천사들이에요. 이상하지요. 사람이 사는 이 동네에 천사가 거기 있어요. 천사가 있고 거기에 누구와 만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만납니다. 만날 때 여러분 물어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천사 때문에 사람과 만납니까, 아니면 천사 외에 다른 것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을 만납니까? 둘 중에 하나인데. 천사 때문에 만납니까, 천사 외에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 만납니까? 천사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언약궤, 속죄소하는 데에요. 속죄소는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어요. 속죄소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죽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기 죽을 장소를 인간 속에 만들어놓은 곳이 바로 그게 지성소에요. 그게 바로 십자가고. 참 치밀하지요, 계획이.

어떤 누구도 불을 통과 못합니다. 모세가 불 속에서 사십일 동안 밥도 안 먹고 물도 안 마시면서도 산 것은 그 모세 옆에 율법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율법은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고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을 가자, 하고 과거로부터 미래로 찾아가요. 그곳으로. 그 미래가 시간이 다 이룬 곳이 어디냐?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에요.

그러니까 제 말은 뭐냐 하면 성막, 성전, 새 성전 다 인간이 만든 구조물이잖아요. 진짜 성전은 사람입니다. 성전은 인물이에요. 어떤 사람, 인물이에요. 그러면 솔로몬 성전은 뭐냐? 그 중간 기착지에요. 이걸 지금부터 제가 설명 드리려하는 중간 기착지. 여기는 인간도 하나님도 같이 가요. 가자니까. 근데 이게 성막이 어디 도착하느냐 하면 약속의 땅에 도착합니다.

약속의 땅이 뭐냐? 이것 참 여러분 다 아셔야 하는데 한꺼번에 하면 또 넘칠까봐 걱정됩니다만 걱정돼도 내가 할 걱정은 아니고. 약속의 땅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는 곳이에요. 우리가 가는 곳이 약속의 땅이 아닙니다. 우리는 극락과 천국을 되게 사모해요. 그러나 가봤다 내 이름 있어요. 안 돼요. 그거는 지옥입니다. 천국은 내 이름이 삭제된 곳.

삭제된다 해도 자살하면 안 되고요. 주님에 의해서 대신 죽으심으로 삭제된 그 곳, 그래서 내 이름으로 살던 내가 이제부터 주의 이름으로 내가 만들어진 그 곳, 그래서 주의 이름이 내 이름을 대신하는 그 곳이 바로 주의 이름이 누구지요? 예수님이잖아요. 예수님이 앞장서서 자기 백성을 가자, 하고 이끕니다. 주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이죠. 하나님의 이름을 이스라엘 이름을 대신하여 가는 거예요.

갈 때 속죄소가 앞장선다는 말은 속죄소에는 어린양의 피, 그러니까 속죄소는 소 피나, 염소 피나 제물의 피가 들어가요. 어린양보다 더 등급이 높은 소 피가 더 좋지요. 대속죄일에는 소의 피를 잡아요. 소의 피를 희생제물의 피를 잡습니다. 이걸 다시 그림 보면 알 수 있어요. 시내산 다시 그립니다.

구름 있고 화산이니까 불붙고, 밑에 백성이 있습니다. 모세가 불 속에 들어가요. 불 속에 들어가서 십계명을 율법을 가지고 불에서 나온 계명이라 해요. 불에서 나온 계명을 우리가 어떻게 감당하리오, 백성들이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신명기에서. 이번 수련회에서 신명기합니다.

올라가서 모세가 내려온 게 아니에요. 돌 판이 내려오면서 모세가 하수인으로 종으로 내려와요. 올라갈 때는 자기의식으로 갔다가 이쪽에는 뭐냐? 주의 이름의 의식 속에 모세가 종속되어 내려옵니다. 그 증거가 뭐냐 하면 제사법으로 제단 쌓고 여기 제사 드릴 때 내가 주의 이름이 바로 거기 있다.

이 땅에서, 그러니까 성막 이전에 제단 있었고 그 제단에 내 이름을 거기다 두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조건이 있어요. 피를 뿌려야 돼요. 양푼에다 피를 담아서 제단에 뿌리고, 그리고 그다음 백성들을 향하여 뿌리고. 그러면 뭐로 묻힙니까? 피가 묻히고 피로 묻히지요. 마치 엄마가 위험할 때 아기를 자기 치마폭으로 확 덮어주듯이. 피의 치마폭으로 덮어주는 거예요. 죽어야 산다는 거예요, 인간아. 그리고 네가 그냥 자살해서 사는 게 아니고 안중근처럼 그런 게 아니고 언약된 그분이 죽어야 네가 사는 거예요. 그 안에서, 예수 안에서.

피 뿌리게 되면 하나님이 자기가 이 땅에다가 하나님이 여기에 기거하시는 거예요. 나중에 신약에 보면 알 수 있어요. 구약에 봐도 알 수 있는데 뭐냐? 시편 110편. 주께서 내 주에게. 주와 주 사이 하나님 내부의 부정성으로 두 분이 갈라지게 된 거예요. 한 분은 내어버리는 자, 한 분은 버림받은 주님. 버리는 주님과 버림받은 주님.

마귀가 이걸 제일 싫어합니다. 마귀는 그냥 하나님 믿어, 그냥. 그냥 하나님 믿어. 딴소리하지 말고. 그냥 하나님 믿으란 거예요. 복 준다고. 그런데 하나님은 복은커녕 자기 아들을 버리신 하나님이에요. 자기 아들마저. 이 세상에 왔던 자는 자기 아들이라 할지라도 저주받아 합당하다는 뜻이에요. 심지어 자기 아들, 독생자라 할지라도 이 땅을 밟았으면 필히 이 땅에서는 저주받아 죽어야 돼요. 그게 이 세상입니다. 아무도 살지 못하지요.

주님께서는 언약대로 약속대로 자기 아들만 어떻게 합니까? 살려내요. 사흘 만에 부활시키지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이 세상은 자동적으로 뭐가 된다? 지옥이 돼버려요. 어떤 누구도 구원받을 권한과 자격이 일체 없다는 것이 확연하게 다 드러나고 마는 겁니다. 약속의 땅이라는 것은 주의 이름이 거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서 성전 건물 말고 건물, 건물 나오다가 결국 마지막 성전은 뭐냐? 예수님 본인이 성전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 2장에 성전을 헐라. 사흘 만에 짓겠다. 제자들이 성전 오기 전까지는 이 성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다가 하루이틀사흘 고대로 짓는다. 의식이니까. 인간은 의식이 한계니까. 인간은 할 수 있는 것만 생각하니까 그게 다에요.

그런데 나중에 부활되고 성령이 오니까 아아 성전이 우리가 만드는 게 아니고 주께서 하나님의 신으로 예수님을 죽었다가 살아남으로써 예수님이 성전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이게 사실은 예수님 이전에 모세와 다윗 때 차이점이에요. 계속 이야기해 나갑니다. 성막은 모세 때에요. 그런데 성전은 모세 때 아니고 다윗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모세와 다윗의 위상적인 차이를 알아야 돼요.

모세는 뭐고, 다윗은 뭐냐? 사무엘하 7장에 보면 다윗이 자기가 성전을 지어드리겠다고 해요. “하나님이여, 제가 전쟁승리기념관을 지어드리겠습니다.” 승리하니까 영어로 뭐라 했어요? 아까 노래에 나왔지요. victory. 참 옛날이나 지금이나 승자 되는 것 되게 좋아하지요. 동창회 가서 자기가 승자 돼 보세요. 얼마나 좋겠습니까. 나도 남자 되어서 적어도 4조 이천억 정도 가지고 이혼할 때 1조 이천억 정도는 쿨하게 떼어줄 수 있는. 얼마나 승자잖아요. victory 아닙니까. 세상적으로 victory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성도가 예수님 이야기하고 하나님 이야기하고 하나님 믿으세요, 예수님 믿으세요, 하면 ‘네가 승자 돼봤어? 네가 지금 돈이 없으니까 다른 걸로 대체하려고 교회 나갔잖아.’ 이렇게 오해들 한다니까요. 그러면 그 소리 듣고 어떻게 돼요? 전도하다가 엄매 기죽어. 꼴랑 내세울 게 없으니까 예수 이야기하는구나. ‘아이구 어떻게 알았지? 들켰네.’ 이래 된다니까요.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의 승리기념관을 지어드리겠다는 거예요. 다윗의 이 제안이 뭐가 문제지요? 다윗이 승리기념관을 지어서 가나안 땅에 하나님이 머물게 되면 뭐가 문제가 되는가? 그렇게 되면 어떤 점이 잘못된 거죠? 이게 의식적인 세계가 돼요. 천국이 아니고 그냥 고만고만한 젖과 꿀이 흘러서 잘 사는 그런 평화로운 일반적인 선진국이 돼버려요.

그럼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다윗 왕이 늙어 죽으면 후기 왕이 또 생겨야 돼요. 죽음이 계속 반복이 돼요. 백성들도 죽고. 다시 말해서 그렇게 되면 죽는 문제가 해결이 안 돼요.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영생이죠. 하나님은 영생인데 백성은 죽는다? 이게 말이 돼요? 뭔가 핀트가 안 맞잖아요. 하나님이 영생 같으면 백성들도 적어도 같은 나라라면 그들도 안 죽어야 되고 영생해야 되죠. 복 된 영생을 누려야 되겠지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해요. 전쟁 승리했다고 기념하는 것, 그 집 내가 원하면 내가 지어줄게. 내 손으로 필요하다고 지어달란 소리 안 한다. 다윗이 그런 소리한 것은 뭐 때문에 그러냐? 언약궤 때문에 그래요. 언약궤는 누구와 누가 만난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인데 언약궤가 엄연히 있잖아요. 다윗 때는 언약궤가 있었거든요. 솔로몬 때고 언약궤 있었어요.

열왕기상 8장에 보면 중심은 오직 솔로몬 성전 언약궤 중심이에요. 그 언약궤를 지켜주기 위해서 두 기둥이 있어요. 야긴과 보아스. 봅시다. 높이 몇 미터 됩니까? 높이가 35규빗이니까 기둥 위에 있는 것과 합하면 53되지요. 53규빗 같으면 이게 얼마냐 하면 20미터 넘어요. 밑에 이게 14미터고 두 기둥은 20미터 넘어요. 성막에는 기둥이 없어요. 이동용이니까.

그런데 성전은 고정용이니까 기둥이 있다고요. 기둥 사이에 입구가 있어요. 휘장도 어마어마하고. 여기 물두멍이 물통이 5미터가 넘어요. 솔로몬 성전에는. 성막에는 얼마 크지도 않아요. 그런데 여기는 굉장히 커요. 이동할 필요 없기 때문에 늘 거기에 상주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야긴과 보아스란 이름이 있어요. 야긴이라 하는 것은 그가 세우리라. 그다음에 보아스는 그럴 능력이 그에게 있다, 이런 뜻이에요.

이 두 기둥 안에 바로 천사가 있고, 그러니까 이 건물 자체의 포인트는 뭐냐? 어디를 보란 말이에요? 여기 한 사람이 어디를 보란 말입니까? 이 제단도 크잖아요. 제단이 4.6미터 굉장히 커요. 이거는 성막의 제단과 다릅니다. 이 4.6미터 제단을 거쳐서 제사장이 들락날락할 때는 백성들이 뭘 주시해야 돼요? 도대체 저 안에 뭐가 있느냐 하는 거예요.

여러분 언약궤, 성막 안에 언약궤 있거든요. 그 언약궤에 구름기둥과 불기둥 오른다 했지요. 나무상자 안에 뭐가 들어있을까요? 퀴즈, ①공기, ②금덩어리, 가장 가능성 있는 것은 ③율법책, 생각나지요. 언약궤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는 거예요. 그리고 솔로몬의 성전에는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언약궤만 있어요. 이거는 확인할 필요 있어요.

열왕기상 8장 9절에 보면,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 것도 없으니” 돌판 말고 또 있어요. 언약궤 안에는 돌 판이 들어 있는 게 아니고요 깨어진 돌 판의 대용물이 들어 있어요. 우리는 죄인이거든요. 그러면 죄인이 의인 되어서 구원받아야 되는 게 아니고 죄인 채로 구원받는 거예요. 돌 판이 깨어졌다는 것은 언약이 파괴됐다는 뜻이고, 언약이 파괴된 것은 파괴된 죄인을 하나님이 은혜로 만나시는데 만나는 조건이 뭐냐? 언약이 파괴된 그 돌 판의 원형을 주께서 자신의 피로 예수님의 자기의 피로 피 발라서 천국 백성 만든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언약궤 돌 판에 깨어진 돌 판의 대용물, 깨어진 돌 판 버리고, 대용물 그것 들어 있고, 그다음에 아론의 싹 난 지팡이. 또 하나는 만나. 여러분 만나가 농사지은 겁니까? 농사지은 게 아니죠. 인간이 농사짓는 것은 지가 농사지어서 곡식 있어야 생명이 유지되잖아요. 그런데 만나는 누가 줬다는 거예요? 하늘에서 그냥 온 거죠. 그러면 생명은 뭐냐? 네 노동이 필요 없다는 거예요.

그다음에 아론의 싹 난 지팡이란 것은 죽은 지팡이에 싹이 날 이유가 없잖아요. 싹이 다 나는 게 아니에요. 싹이 뭐냐? 모세와 같은 계열, 아론의 제사장에게 싹이 났다 이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언약이 있는 율법과 언약 앞에 받아야 될 백성 사이에 하나님의 율법이 그 둘 사이를 차별화시키는 거예요. 차별화시키는 이유는, 백성들아 누군가 너희를 대신하지 아니하면 너는 하나님 앞에 나설 수도 없어, 라는 거예요.

그 차별화된 제사장은 나는 너보다 낫다는 게 아니라 사건화 된 존재입니다. 그냥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 사건이 가득 들어있는 사건화 된 인물이 모세와 아론이에요. 율법이 사건화 된 율법 사건을 같이 동행하게 된 대표자가 모세와 아론이고 저쪽은 그 덕과 혜택을 보는 쪽이에요. 언약궤 가까이 오지 마라. 근처도 오지 마. 우리가 알아서 할게. 제사장들이.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게 성막이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성막이 고정된 것이 뭐냐 하면 성전이란 말이죠. 그러면 성전은 인물이라면서? 성전은 건물이 아니고 건물의 모든 내용이 압축이 되어서 한 인물 속에 전부 다 들어가죠. 트랜지스터, 옛날에 진공관이라 해서 컸는데 인공지능으로 하면 요만하잖아요. 그게 다 압축돼 들어가는 거예요. 반도체라 해서. 옛날부터 반도체화 시켜서 이렇게 인물 속에 압축시킨 겁니다.

그러면 이게 인물 속이라면 언약궤 안에는 뭐냐 하면 바로 깨어진 돌 판의 대용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깬 쪽, 위반 쪽은 누구다? 인간이다. 인간이라는 것을 유일하게 아는 민족이어야 내 백성이라는 거예요. 죄 짓지 말라가 아니라 죄 지을 수밖에 없는 율법을 줘놓고 따라서 우리는 죄인 맞습니다, 라는 것을 율법, 다시 말해서 모세언약, 언약을 통해서 새롭게 의식이 아니라 다른 의식을 초월한 새로운 인식을 얻게 된 사람, 그 사람과 더불어 압축된 분이 누구냐? 죄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면 그전에는 이 성막 때는 제사장이 왔다 갔다 했잖아요. 지금 이 솔로몬 성전의 특징은 뭐냐? 제사장이 최고 높은 계급이 아니에요. 왕 지시 하에 제사장이 움직입니다. 많은 숫자의 왕을 하나밖에 없는 왕 지배하에 있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나님의 성전을 뭐라 하느냐? 사무엘하 7장 14절에 보면 내가 지은 집을 이렇게 돼 있어요. “나는 다윗의 가문” 다윗의 가문을 알기 쉽게 하면, 다윗의 후손으로 온다.

다윗의 후손이 뭐로 돼 있다? 성전을 압축시켜서 딱 규격화시킨 그 인격으로 오신 분이 다윗의 후손으로 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거든요. 로마서 1장 2절, 3절에. 그래서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복음은 이것이니 다윗에게 준 성전이 아주 압축을 해서 인격화되신 분이 오셨기 때문에 그분은 육신으로 죽었다가 영으로 성령으로 부활했다고 이야기해요. 이것이 복음이라 했단 말이죠.

성전은 율법이에요. 율법 안에 뭐가 들어 있어요? 죄인이 어떻게 천사와 함께 살 수 있고,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과 만나는가? 죄인인데 어떻게 거룩한 하나님과 인간을 만나내는가? 거기에 메커니즘과 시스템이 성전 안에 기구들로 차 있다. 기구들로 묘사돼 있고 표현돼 있다.

그 번제단에 보면 성막 번제단이에요. 5규빗, 5규빗, 3규빗이라 돼 있는데 2.5미터, 2.5미터, 높이 1.5미터로 돼 있는데 이 성막 시대 때 재통, 부삽, 대야, 갈고리, 물 옮기는 그릇 이런 걸 만들어놨어요. 그리고 옆에 여러분 자세히 봐야 되는데 크게 확대해 놓은 솔로몬 성전도 있어요. 촛대 있어요, 등대. 초가 있는 게 아니고 등이 있어요, 등대. 그 안에 등대 있고 안에 있는 것 그려보겠습니다. 이걸 아시고 예수님에게 어떻게 함축이 돼 있는가를….

등대가 한 줄기가 있어요. 여기서 가지가 여섯 개 나와요. 한 개, 두 개, 세 개. 여섯 개니까 이쪽에 세 개, 이쪽에 세 개 이렇게 돼 있습니다. 높이를 나란히 맞춰요. 그런데 여기에 불꽃이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이렇게 돼 있어요. 그런데 이걸 만드는데 56킬로그램짜리 금덩어리 하나로 쳐서 만들어요. 조립한 게 아니고 이게 전부 한 덩어리로 돼 있어요.

불꽃 집게도 준비해서 불꽃 손질하게 돼 있고, 불똥 그릇도 계속 불꽃이 유지되도록 준비돼 있어요. 이게 등대고요. 왜 등대가 필요하냐 하면 지성소보다 더 바깥에 있는 성소는 조명시설이 없어요. 전기 같은 게 없어서 어두워서 일을 못하니 밝게 하기 위해서 한 거고.

그 맞은편에 뭐가 있느냐 하면 진설병이라 한 게 있어요. 진설병은 포도주 주전자 하나 있고, 여기에 금잔이 있고, 금잔 밑에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개 테이블 위에 있고, 이것도 금잔 있고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개 나와 있어요. 이걸 채가 있어 나중에 이동하게 테이블 만들어놓고요. 이게 전부 다 턱이 있어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는데 여기에 떡이 여섯 개씩이니까 몇 개입니까? 열두 개죠. 안식일마저 떡을 교체하게 돼 있습니다.

그럼 그 떡을 버립니까? 이 떡은 제사장이 먹게 돼 있어요. 딱딱한 떡을. 제사장도 참 딱딱한 떡을 다 쉬어 빠진 떡을 먹는 셈이 되죠. 또 하나 그게 둘이 마주봐서 등잔 빛이 진설병에 있는 열두 개의 떡이니까 이스라엘이죠. 이스라엘을 지긋이 비추도록 돼 있습니다.

그다음에 분향단이 있는데 아까 했지요. 분향단은 금향로가 제일 위에 있고, 단이니까 이렇게 생겼어요. 여기에 턱을 만들고 턱 안에 금향로가 있어요. 이것도 궤를 꿰어서 이동할 때 들고 나올 수 있도록 했어요.

그러니까 이런 게 왜 있어야 되지요? 여러분들이 설계자라 봅시다. 여러분들이 인테리어 업자라고 봅시다. 어떤 집에 우리 집에 성전 만들어주세요, 하니까 한 달 뒤에 다 됐습니다, 해서 가보니까 이런 게 있어요. 주인이, “아저씨 이것 왜 만들어야 됩니까? 왜 있어야 되지요?” 여러분이 업자라면 뭐라고 설명해야 됩니까? 이것만 있는 게 아니고 바깥뜰에 또 물두멍, 손 씻는 데, 제단, 제물 다 태우는 데 이게 왜 있어야 돼요? 울타리도 왜 있어야 됩니까? 입구는 왜 또 막아놨어요? 휘장으로.

예수님 돌아가실 때 찢어진 휘장은 지성소에 있는 휘장이 끊어졌어요. 헤롯 성전의 휘장인데 아주 높다란 이건 규모가 커요. 헤롯 성전은 제일 큰 데 거의 오백 미터 돼요. 에스겔에 나오는 성전은 이백오십 미터, 이백오십 미터인데 이건 거의 오백 미터에요. 아주 커요. 사각형은 아니고 직사각형 비슷한데, 오백 미터는 아니고 사백칠십구 미터라고 나와 있네. 사백칠십구 미터, 삼백육 미터 거기 적어놨지요.

솔로몬 성전은 이십칠 미터. 바깥은 어떻게 됐는지 그건 확실치 않아요. 어쨌든 간에 솔로몬 성전 이후에 제사장이 인구가 늘어나니까 많이 필요하지만 그게 누구 지배하에 있다? 왕 지배하에 있다. 자, 여기서 강의 마감하겠습니다. 제사장이 많은데 왜 왕이 필요하지요? 그리고 이 성전구조, 이런 장치는 왜 있어야 되지요? 인테리어 업자에게 물어보면 뭐라고 답변하겠습니까? 왜 있어야 됩니까?

하나님은 죄인에게 찾아오기 때문에. 하나님은 죄인을 건져서 백성 만드는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인을 규격화한 거예요. compact화한. 죄인을 콤팩트하고, 그다음에 그에 대신 죽으시는 하나님도 콤팩트하면 ‘죄인+의인’, ‘하나님+죄인’을 콤팩트화 돼버리면 그것이 존재일까요, 사건일까요? 사건이어야 돼요.

예수님이 일으킨 사건이죠. 그 사건이 예수님의 존재가 하나님 우편에 계시면서 지상에 지금도 존재는 하늘에 계시니까 거기서 성령이 오시니까 계속 이와 같은 콤팩트화 된 나는 죄인이고, 주님은 우리 때문에 희생되어 의인되시고 거의 콤팩트화 된 생활, 이걸 매일같이 반복하면서 여럿 같은 백성들과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이 지상의 천국입니다. 이게 천국이에요.

끝으로 그렇다면 주께서는 죄인을 부르러 오셔서 우리를 죄인 되게 하셨다는데 그 방법은 뭐냐? 우리는 이제 물두멍도 필요 없고 번제단도 필요 없는데 뭐 양을 잡아야 ‘내가 안수한 양이 저렇게 죽는구나. 난 죽어 마땅하다’ 이런 게 있는데 그게 없는데 우린 어떻게 죄인인 걸 아느냐?

사건화 된 세계에서는 주님 세계는 지금 존재로 보이는 이 세계 안에서 주님은 사건을 유발하거든요. 그 사건은 십자가 말씀이 다 뒤에 붙어있는 사건이 돼요. 우리에게 들어오는 어떤 사건도. 그게 무슨 사건이냐? 말씀 사건이에요.

저도 들었던 이야기인데 화류계 여성들이 낮에 손님 없을 때 어떻게 하느냐 하면 화투를 친데요. 화투로 점친다는 겁니다. 영화에 보면 그런 것 나오잖아요. 치마 들쳐서 속치마 보이면서 다리 세우고 주저앉아서 화투치잖아요. 화투는 그림이 다 다르지요. 48장. 그런데 그 뒷면 보세요. 뒷면은 어떻습니까? 칙칙한 색깔이 똑같지요.

모든 성경 말씀을 해석할 때 반드시 그 뒷면에 뭐가 나옵니까? 십자가 피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걸 유대인이 알아도 그들은 구원을 못 받아요. 왜?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 말씀이 무엇으로 의미가 모아지는 말씀입니까? 십자가로 모아지는 그러한 천지를 창조했는데 그들은 그냥 천지를 창조했데, 하나님이. 창조과학회도 마찬가지고요.

그거는 왜냐? 성경을 볼 때 내 의식적으로 예상되는 결과를 노리고 성경을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한 결 같이 쉬지 않고 십자가 사건이 늘 들이닥쳐서 말씀을 통해서 이런 말씀 하나 못 지키는 죄인 맞구나, 하고 그걸 도리어 기뻐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벌이신 일, 성전 만들기, 성막 지어주기, 이 모든 것을 주의 십자가로 다 이루었으니 십자가 속에서 성막도 찾고 성전의 의도 찾을 수 있는 그런 성령의 사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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