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06a 울산강의-역대기하(6강) 7장 17절 : 가로막는 주님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역대하 7장 17절, 솔로몬이 성전 짓고 난 뒤에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졌습니다. 12절에 보면, 밤에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나타났습니다. ‘밤에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났다.’ 창세기 32장에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야곱에게 나타났잖아요. 성경에는 그렇게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에게 찾아오는 경우들을 계속해서 나열하고 있어요.
여기서 인간에게 찾아온 하나님 말고 그러면 하나님이 안 찾아오면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이 인간에게 안 찾아왔을 경우에는 어떻게 되느냐? 그거는 인간 쪽에서 하나님을 찾아가는 거죠. 그러면 하나님이 두 종류의 하나님입니다. 한쪽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친히’ 찾아오는 것(1). 두 번째는 인간이 하나님을 또는 신을 찾는 방식(2).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는 이 방식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게 이스라엘이죠.
그러면 아래쪽의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것은 이스라엘 외에 모든 이방민족, 또는 이방인이죠. 어떤 차이가 있느냐 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흔적이 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흔적이 되면 2번은 자동적으로 탈락이죠. 하나님 스스로 흔적을 남기는 식으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그 외에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러면 2번,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것은 헛발질이죠. 이건 소용없는 거예요. 신을 찾고 신에게 빌고 신을 섬기고 신을 모시고 이게 다 소용없는 짓이에요. 제가 계속 차이를 말씀드리는데 이렇게 되게 되면 하나님의 흔적이 이스라엘 되려면 하나님의 선제공격이죠. 이걸 습격, 하나님이 내 인생에 쳐들어오는 거예요. 작살나죠. 하나님이 와버리는 데 작살나는 거예요.
그런데 2번, 이방민족의 하나님은 뭐냐? 본인이 멀쩡해요. 멀쩡하기 때문에 인간이 신을 찾는 것은 뭐냐 하면 자기 강화. 강화란 말 아시겠지요? 자기 자신을 돈독하게 하고 강하게 만드는 것, 어지간히 힘들고 어려움에도 버틸 수 있도록 자기가 자기 자신을 지켜나가는 것, 내가 다치지 않게, 내가 불편하지 않게, 내가 불행하지 않게, 내가 비극적인 삶이 되지 않도록 자기를 지켜나가는 것, 이것 1번입니까, 2번입니까? 2번이죠.
본인이 멀쩡하고 더욱더 멀쩡하게, 본인이 안정적이고 더욱더 안정적으로 이걸 성경에서 죄라고 이야기합니다. 죄란 자기가 자기를 지키는 걸 죄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1번과 2번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찾고 섬기고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은 뭐가 됩니까? 죄가 되지요. 교회 나가서 하나님 말씀 듣고 실천 옮기고 섬기는 것, 그게 바로 죄의 극치입니다.
왜 기도하십니까, 왜 교회 나오십니까, 왜 헌금하십니까, 왜 교회에 충성봉사하지요? 사람들은 들은 게 있어서 이렇게 답변하지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인간의 본분은 뭐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게 본분입니다. 그러면 묻지요. 영화롭게 해서 그다음에 주어지는 건 뭡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준다는 거예요. 그리고 죽어서 천국 보내준다는 거예요.
그럼 이건 누구 좋으라고 하는 거예요, 결국? ‘나 망가지기 싫어요.’ 결국 그 이야기에요. 부처가 되던 하나님이 되던 내가 한 그 노동, 내가 하나님께 섬기고 바치고 하는 그 노동이 나한테 적절한 보상으로 주어지기를 원하는 거예요. 적절한 보상, 적절한 대가로. 그게 바로 죕니다.
그런데 같은 한국사람, 같은 인간들끼리 다들 그렇게 하니까 그게 잘못된 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예요. 왜? 다들 그렇게 하니까. 교회는 의당 그래야 되고 성당은 의당 그래야 된다고 생각하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습격하는 사람이 그중에 한 명이라도 있다 한다면, 하나님의 습격입니다, 침공입니다, 침략하는 거예요. 침략 당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빼놓고는 다 쓸데없는 일을 하지요.
그러면 습격을 당했다는 이 말이 여러분 어렵다면 쉽게 생각하겠습니다. 소떼가 있는데 뒤에서 사자가 덮쳤어요. 이게 뭡니까? 습격이죠. 그냥 평화롭게 있는데 아주 평화롭게 고요하게 풀이나 뜯고 있지요. 이 평화롭게라는 말을 좀 길게 하면 평화롭게 장사하고 있는데, 평화롭게 직장생활 잘하고 있고, 평화롭게 주부생활 잘하고 있는데 뒤에서 스라소니나 표범이 덮쳐버린 거예요. 껍데기 홀라당 다 날아가지요.
뒤에서 덮쳤다는 말은 잡아먹혔다는 거예요. 주님한테 잡아먹힌 것을 신약성경에선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것을 ‘예수 안’이라 하는 거예요. 주님한테 잡아먹히기 전에는 어느 안에 들어있어요? 내 안에 있어요. 내가 나하고 이야기하고 맨날 나만 생각하고 스물네 시간 나와 대화하고 내 안에서 놀던 내가 뒤에서 습격해서 덮쳐버리니까 자기가 원해서 환경이 아닙니다. 이거는 자기가 원했던 인생도 아니고.
나 말고 다른 이질적인 것, 내가 요청하지도 않은 다른 이질적인 것에게 삼킴을 당해버린 거예요. 그 삼킴을 당한 것을 구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구원받았다. 내가 찾는 예수님을 따로 있는데 내가 찾는 예수님을 나를 강화시키고, 나를 풍성하게 만들고, 내가 보다 많은 여유 있는 돈을 확보해주는 그런 하나님이기를 원해서 내 쪽에서 찾아가는 그것이 내가 하는 종교생활인데 그걸 덮쳐버리니까 그 수작 다 작살났어요. 덮쳐버렸습니다.
예수 안에 들어오면서 이제는 질문을 내가 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이 질문해요. 주님의 질문이 뭐냐 하면 주님의 기도라고 하는 겁니다. 주님이 아버지께 하는 기도에 우리를 넣어주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예수 안에서 하는 기도입니다. 주님이 아버지께 하는 기도에 나를 넣어주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딸이 어릴 때는 교회 나왔지만 커서는 교회 안 다녔단 말이죠. 안 다녔는데 억지로 강제로 방송국에서 프로그램 하나 짜자 해서 ‘엄마와 함께’ 이런 프로가 있다합시다. 엄마와 함께 가는데 엄마가 교회에 열심입니다. 그래서 어디 여행 가서 주일 됐다고 예배드리는데 생전 처음 간 교회죠. 앞에 목사님이 설교하고 엄마는 주여, 주여 하면서 가만있지 않지요.
“설교 잘 들어. 너보고 하는 소리야. 기도해.” 그럼 옆에 있던 이효리가 프로그램 때문에 옆에 촬영기사가 있으니까 따라 안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교회 다니지도 않는데 엄마가 하라니까 ‘주여’ 하고 있단 말이죠. 그 엄마가 아버지께 기도하면, “빨리 나 따라 기도 안 해?” 이것도 일종에 습격이죠.
주님의 기도에 강제로 동참하는 걸 가지고 주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성경에서 주의 이름으로. 내 뜻은 아닌데 주께서 옆에서 자꾸 쑤시는 거예요. 허리를 치듯이. 주님의 습격에 의해서 주 안에 있으면서 내 기도는 다 커트당하고 주님이 아버지께 하는 그 기도, 여러분 아버지께 하는 기도 커닝하고 싶어요? 어떤 기도하고 싶어요? 이런 내용입니다.
“창세전에 아버지께 이것, 이것 하라 해서 내가 이 땅에 와서 이것, 이것 다 했습니다, 아버지.” 그 기도에요. 그런데 옆에 있는 만약에 따님이라면 예수님의 가족이라면 이것, 이것, 이것. 그게 뭔데 그게? 그걸 알려주는 거예요. 이것, 이것 다 이루었던 그것의 내용이 뭔지를 이것저것 그 옆에 있는 같이 습격해서 강제로 예수 안의 세계로 들어온 사람한테 이것, 이것 다 했다는 거예요. 이걸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가질래, 네 인생을 가질래?” 결정하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법을 가질래, 안 그러면 네 인생을 따로 가질래? 네 인생을 가진다면 너는 법과 빠이빠이다. 네가 다 이루신 하나님의 법을 하게 되면 너한텐 안 된 이야기지만 네 인생은 없다. 그런데 내 인생이 없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한테 줄 수 있는 최고의 복입니다. 내 인생이 없는 거예요.
내 인생이 없으니까 내가 미래에 대해서 걱정할 건더기가 다 날아간 거죠. 내 히스토리, 내 역사가 있을 때나 내일 뭐하지, 일 년 뒤에 뭐 되지, 삼 년 뒤에 뭘 이루지? 이런 게 걱정이 되는데 내 인생이 거덜나버리니까 걱정할 것 없고 내일 되면 또 마주치고 모레 되면 마주치고 다음 주 되면 추석이잖아요. 추석 되면 마주치는 게 뭐냐 하면 다 이루었다면 마주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신약의 예수 안의 세계입니다.
그러면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되느냐 하면 1번에서 출발해야 되겠지요. 이스라엘부터 출발해야 됩니다, 이야기가. 오늘 역대하 7장이니까. 17절, 18절, “네가 만일 내 앞에서 행하기를 네 아비 다윗 같이 하여 내가 네게 명한 모든 것을 행하여 내 율례와 규례를 지키면 내가 네 나라 위를 견고케 하되 전에 내가 네 아비 다윗과 언약하기를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대로 하리라”
이 이야기를 이제 설명할 타이밍이 되었습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하느냐 하면 이렇게 설명하면 깔끔해요. 이스라엘은 다음 중 누구의 말을 들을 것인가? 제가 객관식으로 할 테니까 답변을 해보세요. ①하나님, ②인간, ③자신의 양심, ④왕, 몇 번입니까? 하여튼 말을 안 해. 틀릴까 싶어서.
제가 처음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흔적이죠. 그러면 하나님은 아니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흔적이니까. 인간? 인간은 남한테 인정받고 남의 소리 들어서 남의 견해에 의식되게 되면 자기 인생이란 게 없잖아요. 그거는 사람이 힘든 이유가 자기를 주시하는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힘들어요. 내가 이런 행동을 하게 되면 집의 부모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자식이 어떻게 우습게 되겠는가? 내 친구가, ‘꼴좋다, 인간아. 완전히 망했네’ 그것을 힘들어하는 거예요.
그 이유가 수백 번 이야기했지만 또 합시다. ‘자아는 타인의 말로 구성된다.’ 말 또는 음성. 나란 정체성이 그동안 만났던 모든 사람들의 말에 의해서 잡동사니가 돼 있어요. 그러면 인간이 처음 만나는 사람이 누굽니까? 부모지요. 부모의 시선, 부모의 말, 그다음에 결혼하게 되면 남편, 아내 있지요. 자식 낳게 되면 아빠, 엄마 기대하는 게 있지요. 그리고 크면서 친구들이 있지요. 그 많은 말들의 잡동사니, 섞인 것, 일종에 주먹잡곡밥, 온갖 것, 팥이고 콩이고 밀, 쌀이고 섞어서 대충 꾹꾹 눌러서 만든 것이 나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평소에 누구의 말을 듣고 있느냐? 이미 내 안에 들어와 버린 타인의 말을 의식하면서 우리는 행동하게 돼 있어요. 이런 행동 했을 때에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이런 것, ‘내가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실망했겠는가?’ 이런 것. 그러니까 어릴 때부터 타인에 의해서 만들어졌기에 타인은 눈에 보이잖아요. 하나님은 눈에 안 보이죠.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지요.
교회 백날 나와도 하나님 말은 우습고 옆에 있는 다른 사람들, 식구의 말은 정말 진지한 거예요. 인간이란 것은. 그들의 요구에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내 삶의 동력이 되는 겁니다. 잘했다 하면 고래도 춤을 추고 좀 못했다 하면 좌절하고 엎어지고 난리고요. 안 그러면 거기다가 더 뭐라 하면 죽여 버릴까, 이런 생각.
그래서 사회에 많은 죄들 있잖아요. 모든 죄는 어디서 나오는가? 중요한 것은 좀 적어놓으세요. 모든 죄는 내가 나를 지키려고 할 때 죄가 발생됩니다. 내가 나를 지킬 때. 모든 범죄는 뭐냐? 내가 나를 지키고 싶을 때. 이선균, 참. 온 국민의 여자들이 지금도 잊지를 못하는 이선균, 자살했잖아. 왜 했어요? 3번, 타인으로 만들어진 남으로 만들어진 내가 나를 꾸중하기 때문에. “많은 팬들이 너에게 얼마나 기대를 했는데 네가 행동을 그따위로 해. 차라리 죽어라, 인간아.” “그래 죽자.” 가룟 유다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보세요, 2번. 나라는 것은 남들의 시선과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는 것이 무엇의 대기자에요? 자살의 대기자가 되는 거예요. 언제든지 자살할 수 있는 잠재성을 갖고 있어요. 끝까지 남들의 기대에 부응 못할 것 같으면 최후의 모습이라도 “나는 스스로 내가 나에게 처벌한다. 어찌 장하지 아니하냐? 그래도 기본 양심은 있지, 사람들아.” 내 양심은 지키면서 빠이빠이다. 나 먼저 세상 뜰게, 이런 거예요.
남들도 죽고 지도 죽는데 누가 죽이는 건 생각 안 하고 그들이 멀쩡하게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없어질 안개들이 무슨 소릴 해도 너는 안개거든요. 나도 안개고. 다 같이 없어질 인간들이 지들끼리 뭐 할 건데요? 인간이 스트레스를 받는 이유는 두뇌 속의 기억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기억력 다 소진한 치매 환자가 행복할 수가 있어요.
일본에 나이 많은 사람들, 치매 걸린 사람들은 집에 에어컨 다 있는데 더워서 많이 죽어요. 왜? 자기 집에 에어컨 있는 걸 잊어버렸어요. 자기 집에 에어컨 있는지 없는지 그 기억도 없어. 기억이 없으니까 죽을 때 죽는 게 아니고 기억이 없는 순간 이미 그 사람은 더워서 죽든 삶아먹든 찢어먹든 그 사람은 이미 죽은 거예요. 인간이 기억이 없으면. 다시 말해서 타인이 심어준 자아가 없는 상태는 이미 그 사람은 죽은 상태에요.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 이게 보통 이방인 같으면 죽은 거고요. 이방인들은 타인만 의식하기 때문에 이미 죽은 거예요. 남 죽을 때 같이 따라 죽으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덮쳤잖아요.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로 덮쳤던 말이죠. 덮쳤을 때에 누구의 말이 떨어지는가? 1번이 정답처럼 느껴지지요.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아닙니다. 왜, 뭐 때문에? 이스라엘은 직접 안 되지요. 흔적이니까.
그러면 이스라엘에게 남겨진 하나님의 흔적이 뭐냐? 4번이 정답이에요. 왕입니다. 왕의 말을 들어야 돼요. 그래서 오늘 역대하 7장에 보면 지금 하나님이 이스라엘 전체 백성에게 나타났습니까, 솔로몬에게 나타났습니까? 솔로몬이죠. 솔로몬에게 나타나는 거예요. 왕에게 나타나는 겁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아예 이스라엘 백성 그 자체를 하나님께서는 사람 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네가 뭐 어디 가서 잘하든 뭘 하든 바르게 살든 착하게 살든 안 그러면 간음을 하던 살인을 하던 뭐가 됐던 네가 착해도 너를 배제하고, 악해도 배제하고 나 너하고 상대하지 않아.” ‘나 너하고 상대하지 않아’ 이것을 가지고 무슨 언약이라 하느냐 하면 이게 바로 왕 언약, 다윗언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을 하나의 표로 이야기해볼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그냥 말씀을 하는 게 아니고 중간에 왕에게만 이야기해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실선이 아니고 뭐가 되느냐 하면 점선이 됩니다. 점선이 되면서 하나님과 왕하고 계약, 이걸 언약이라 합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맺었어요. 언약을 맺어서 왕의 말을 듣지 않으면 이 점선은 나중에 뭐가 되겠어요? 점선은 점점 가다가 점점 더 날아가 버리고, 이스라엘 전체가 날아가 버려요. 점선이니까.
실선 같으면 요지부동 구원을 받는데 이게 점선이잖아요. 점선이니까 유도리가 있는 거예요, 유도리. 여러분 운전하시다가 중앙선, 실선 돼 있는 것은 건너가면 안 되잖아요. 있으나마나 건너가지만. 그러나 점선일 때는 어떻게 됩니까? 점선일 때는 추월하기 위해서 그걸 넘어가도 위법사항이 안 된다 이 말이죠. 점선이라 하는 것은 미확정적이고 불확정적이에요. 여기 조건이 붙는 거예요. 점선이니까.
아까 이야기를 다시 해봅시다. 인간은 두 종류의 신이 있다 했어요. 하나는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죠. 또 하는 뭐라 했습니까? 이방인들은 신을 찾는데 자기가 찾는 식이죠. 이스라엘은 누가 덮칩니까? 하나님이 덮쳤지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신을 찾아요. 모든 인간들은. 자기의 장래를 생각해서 죽고 난 뒤를 생각해서 보험 들 듯이 신을 찾는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세우신 언약의 왕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뭐가 되느냐 하면 이스라엘은 자기 나름대로의 실선이 되면서 이거는 뭐냐? 이방민족화 돼버려요.
뭘 포기했습니까? 하나님과 왕의 그 계약을 포기했으니까 이거는 이름만 이스라엘이지 실은 뭐가 돼요? 일반인들이 신을 찾는 것과 똑같이 돼버린 거죠. 그러니까 이 자리에 있다가 하나님의 왕, 계약 자리에 있다가 바깥으로 밀려나가서 이거는 하나님의 언약 밖에, 언약 밖은 저주입니다. 저주로 나가버리게 되는 거죠.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이야기하기를 나의 명령과 규례, 그걸 지키게 되면 여기에 역대하 7장 18절, “내가 네 나라 위를 견고케 하되 전에 내가 네 아비 다윗과” 그다음에 뭡니까? “다윗과 언약하기를” 이 솔로몬과 언약하기를 솔로몬언약이 아니라 하지요. 무슨 언약이었습니까, 방금? 다윗언약이죠. 점점 어려워집니다. 솔로몬과 해놓고는 이름을 다윗언약이라.
다윗언약이니까 여기서부터 이 점을 쉽게 하기 위해서 뭐부터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느냐 하면 첫째는, 하나님은 인간과 상대하지 않는다. 유도리다. 확정된 게 아니고 조건부로 찾아오는. 율례와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면 너는 일본 쪽 표준말로 나가리에요. 나가리 되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은, 왜 하나님이 인간을 이렇게 구원하지 않는가? 인간은 구원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해하든 모르겠다, 그냥 할게요.
하나님은 구원을 구원해요. 뭐 되도 않은 말장난이라 하는데 하나님은 구원을 구원한다는 말은, 하나님은 구원자를 구원해요. 구원자가 누굽니까? 예수님을, 예수란 이름이, ‘하나님이 구원하시다’에요. ‘구원하시다’를 구원해요. 하나님은 말씀을 구원한다 이 말이죠. 이 말은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은 자기 언약을 구원하지요. 언약을 구원해요.
그러니까 괜한 통박 굴려서 ‘하나님, 나 천국 보내주세요’ 그렇게 해봐야 하나님은, ‘나 너하고 상대 안 하는데’ 하나님은 우리와 상대 안 해요. 우리의 기도 같은 건 안 들어요. 아까 예수 이름으로 기도, 또 잊어버렸습니까? 제가 분명히 이야기했지요. 하나님은 주님의 기도를 듣지 우리 기도를 안 들어요. 그러면 우리 기도는 소용없잖아? 원래 인간 소용없어요. 내 기도 소용없는 게 아니고 하나님은 내가 필요치 않아요.
그러면 하나님은 내가 필요치 않으면 하나님에게 필요한 인간은 어디 있느냐? 십자가를 그려보겠습니다. 여기 십자가를 쳐다보는 사람이 있어요. 그때 로마군병도 있었고 강도도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있었죠. 십자가를 쳐다보는 사람, 여인들도 있었고. 십자가를 쳐다보는 사람, 나지요, 나. 영어로 하면, ‘I’ 나란 말이죠. 이거 구원 못 받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 안 해요.
그럼 하나님이 구원하는 나는 어디 있느냐? 바로 예수님과 십자가에 달린 이 나가 구원받아요. 십자가 쳐다보는 나는 구원 못 받아요.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십자가를 믿어서, 제가 십자가 믿을 테니까 구원해달라는 것은 탈락이에요. 십자가 믿어서 구원되는 게 아니고 십자가와 함께 죽어야 구원받아요.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구원받지 예수님의 십자가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믿습니다, 그거는 이순신 장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믿으면 이순신 장군 됩니까? 돼요?
나는 이순신 장군의 만화책을 읽었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그런 말도 나오고, <명랑> 이순신 장군 영화를 봤다. 그럼 그 사람은 이순신 장군입니까? 아니지요. 난 예수님의 일대기를 안다, 성경을 백독을 했다. 구원받습니까? 안 되지요. 안 돼요. 자꾸 보면 눈만 침침해지고 하는 것도 치매 걸리면 빠져나가고 남는 게 있어야지요. 아무것도 남는 게 없는데.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다는 이야기는 반드시 전제가 있어요. 네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 믿는 그 믿음은 이것은 우리 행함에서 나오면 안 돼요. 나에게서 나오면 안 돼요. 주님의 믿음이 우리에게 덮쳐야 그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습격이에요. 그냥 덮치고 습격인 거예요. 덮치고 습격하게 되면 우리는 내가 구원받는 게 아니고 주님의 흔적으로써 이미 편입돼 있어요.
그래서 성도는 뭘 하느냐 하면 두 가지를 다 알고 있어요. 성도의 육신이 있으니까. 밑에 나1, 나2라면 성도는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나 아니야’를 인정하는 사람이에요. 십자가에 대해서 공부하고 십자가 연구하고 십자가 믿겠다는 나는 아니고 예수님께서 자신의 옆자리를 내준 거예요. 그 옆자리가 무슨 자리냐 하면 율법에 보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 있죠. 그 율법은 누구만 지키느냐 하면 이 세상에 아무도 못 지키고 예수님만 지켰어요.
그러니까 예수님만 지키다보니까 예수님이 그 일을 이뤘을 때 어떤 자리가 새로 만들어졌어요? 이웃, 이게 나와야 되는데 나올 타이밍인데. 이웃이란 자리가 마련된 거예요. 그 이웃 자리에 자기 백성을 집어넣는 거예요. 집어넣으면 그다음에 예수님 승천하시고 성령이 오시게 되면 내가 너희에게 세례를 주노니 그러면 너는 나와 함께 하나님 우편에 앉으리라고 돼 있어요.
이게 에베소서 2장 6절의 말씀입니다. 2장 5절, 6절.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나1은 지금 살아 있는 거예요, 죽어 있는 거예요? 죽었지요. 나1이 나2로 자리를 옮기면서 그 옮긴 자리가 죽은 자리에요.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하늘에 앉혔다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죽은 자를 드르륵해서 쇠사슬로 해서 어디까지 끌어당기는 거예요. 예수님이 계시는 하나님의 우편 그 이웃이라는 자리에다가 그걸 끌어당겼다 이 말이죠. 끌어당길 때 마태복음 25장을 여기다가 집어넣으면 이렇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예수님에 의해서 구원받은 사람을 뭐라고 놀리겠습니까?
저 사람이나 나나 그렇고 그런데 왜 주님께서 나는 안 건져주시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할 사람도 없지만, 예를 들어서 나는 구원 안 해주시고 저 사람은 뭐 잘났는데 구원합니까, 그 이야기 할 거예요. 저 삐졌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정작 성령에 의해서 끌려오는 사람은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고 오히려 똑같은 생각을 해요. “주님, 제가 언제 주님을 위해서 뭘 했습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제가 주님을 위해서 한 적이 없는데 왜 저를 구원하십니까, 오히려 반문하듯이 그런 질문을 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 구원은 없습니다. 구원은 없으니까 주님께서 어떤 사람을 자기의 이웃, 이웃을 사랑하기를 내 몸 같이 사랑했다는 그 말씀을 완성한 흔적으로써 이웃 자리에 누굴 잡아당기니까 나머지는 어떻게 돼요? 나머지는 그냥 있는 게 아니고 그 자체가 이미 지옥에 가는 겁니다. 그들의 지옥 가려고 애쓴 것도 아니고 지옥이 좋아서가 아니라 한쪽을 일방적으로 빼내버리니까 그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지옥 가는 거예요. 구원을 못 받았으니까 지옥 가는 거예요. 지옥 가고 싶어서 죄 지어서 지옥 가는 게 아니고. 구원이 안 됐으니까 지옥 가는 겁니다.
제가 지난 화요일에 늦게 강의 마치고 기차 타고 오는데 제 뒷자리에 내 나이 또래 됐어요. 그 사람이 밤에 조용한데 휴대폰으로 전화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돌아보면서 전화하시려거든 기차에선 밖에 나가서 전화합니다, 그랬어요. ‘제가 몰랐습니다’ 이래야 되는데 갑자기 소리 지르면서 “끊으면 될 거 아이가” 시끄럽게 그러는 거예요. 제가 얼마나 점잖습니까? 가만있었지요.
그런데 마침 승무원이 들어와서 이분이 객실에서 전화하는 걸 잘 모르고 그런 것 같은데 잘 이야기 좀 해주세요, 하니까 그 사람이 객실에서 전화하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들키니까 화가 난 거예요. 뭐라 하느냐 하면 “나를 감옥에 처넣어라” 이러거든요. 야, 그때 제가 잠시 잃어버린 단어가 확 떠올랐어요. 뭐냐 하면 ‘처’라는 단어, ‘처’라는 단어는 어떤 때 쓰냐 하면 무가치하기 때문에 함부로 다룸, 이런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구원되지 못한 사람은 저쪽 사람이 대통령이든 검사가 되던 판사가 되던 의사가 되던 얼마든지 함부로 다뤄도 괜찮은 무가치한 존재로 보는 거예요. 지옥 갈 때는. 그냥 안 가요. 처넣어버리는 거예요. 속으로 고맙다, 이 사람아. 지옥 갈 때 처넣어버리는 거예요. 지 입으로 처넣어버리라 했으니까.
주님께서는 법이냐, 내 인생이냐? 우리 인생은 주님에 의해서 둘로 나눠있어요. 따라서 여기 구원받은 사람은 네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란 이 말씀은 주님께서 이뤘는데 그 이루는 방식이 우리를 살려놓고 우릴 구원하는 게 아니고, 자신의 죽음에 같이 동참해서 우리를 죽여 놓고 그래서 이제는 내 인생 어떻게 해볼까, 하는 것이 아예 그 자체가 이거는 하나님 말씀과 안 맞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가운데서 우리를 예수 안에서 구원하신 겁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을 그리스도, 기름 부은 자라 하거든요. 그런데 오늘 본문 구약에 보면 왕을 뭐라고 합니까? 그리스도. 기름 부어야 왕이 돼요. 선지자, 제사장, 왕은 기름 부어야 돼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계약을 할 때 기름이란 특별한 거예요. 선택했다, 특별히 선택한 분과 계약함으로서 모든 인간을 배제하신다. 모든 인간의 하나님 섬김, 찬송, 순종, 봉사, 헌금, 전도 모조리 다 거부합니다. 인간이 세웠던 교회, 성당 다 거부해요.
그거는 계약에 포함돼요, 안 돼요? 계약에 포함 안 됩니다. 예수님 홀로 다 이뤘기 때문에 인간의 요소가 끼어들면 그거는 하나님께서 허락한 적이 없어요. 이제 무척 어렵고 어려운 이야기가 남아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아까 이야기한 것 중에 중요한 것, 죄가 뭐라고요? 죄란 내가 나를 지키는 것. 착해도 소용없고요, 양심적으로 살아도 소용없고, 악한 일해도 소용없어요.
어쨌든 간에 우리와 계약을 한 적이 없습니다. 습격해서 우리를 죽이는 계약만 있을 뿐이지 우리가 살아서 뭘 하는 계약은 일체 하나님 앞에 계약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문장이 성립돼요. ‘내가 욕을 얻어먹어도 싼 이유는 내가 나를 구원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욕을 하던 뭐 칭찬을 받던 그것 내 구원과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아까 솔로몬 이야기 조금만 하고 10분 쉽시다. 점선 이야기. 하나님께서 왕에게 줬다. 솔로몬이 왕이잖아요. 솔로몬이 왕인데 무슨 언약이라 했습니까? 다윗언약이죠. 야아 이것 또 무서운 이야기에요. 제가 아까 그림 그릴 때 하나님은 왕과 계약했습니다, 하고 밑에 이스라엘 해놓고 이스라엘을 뭐로 했어요? 실선입니까, 점선입니까? 점선으로 둘러쳤지요. 그런데 솔로몬도 다윗 앞에서 뭐냐? 점선으로 둘러쳤어요. 다윗과 약속을 했기 때문에 점선인 거예요. 점선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다윗 구원받았으니까 솔로몬 구원받는다? 안 되지요. 다윗 구원받았으니까 이스라엘 구원받는다? 이거는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솔로몬이 구원되면 안 돼요. 뭐로 돼야 되느냐? 다윗의 복사판, 다윗의 흔적. 솔로몬이 구원되려면 솔로몬이라는 그 자체를 인정하면 안 되고 나는 다윗의 자손입니다, 라고 이야기해야 돼요.
잠언 볼까요? 잠언 1장 1절 누가 크게 읽어볼까요?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됐습니다. 솔로몬이 자기 시대로 한 게 아니고 누구 아들? 다윗의 아들. 지금 북한 김정은은 김일성 할아버지를 섬기면 뭐하노 나를 섬기라, 우리 아버지 말고 나, 나 김정은이 섬기라 하잖아요.
전도서 1장 1절도 마찬가지죠. 이건 솔로몬 자기 이름도 없어요.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다시 말해서 솔로몬은 자기를 나타내는데 환장한 게 아니고 누굴 드러내는데? 내가 계약자가 아니고 아버지가 계약자입니다. 나는 그 계약의 결실물, 계약의 그 열매, 생산물이 바로 접니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신약시대에 하나님이 누구와 계약했어요? 예수님이죠. 그러면 성도는 뭐라 합니까? 예수님의 흔적으로서 납니다.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예수님으로 끝났습니다’를 증거하라고 우리가 호출 받았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게 성령이 임해야 돼요. 성령이 임하면 네가 땅 끝까지 나의 증인 되라 했잖아요. 사도행전 1장 8절에.
이제 성경 전체의 내막이 점선에서 실선으로 바뀌지 않습니까? 나를 실선으로 여겼던 그 실선은 없어지고 예수 그리스도가 다 하심으로 나를 새로운 실선으로 완전 둘러 감기는 느낌 들지 않습니까? 그 감기는 느낌으로 10분 쉽시다.
20240906b 울산강의-역대기하(6강) 7장 17절 : 가로막는 주님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 잘 들어본 분들은 솔로몬을 통해서 율례와 법도라는 것이 어떤 특정한 방향을 향한다는 것을 감안할 겁니다. 율례와 법도가 내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앞길을 가로막는 용도에요.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 가로막지요. 왜? 우리는 양 같아서 자신의 욕망, 아까 한 것 다시 복습합시다. 이 자신, 다른 말로 하면 ‘나’지요. 영어로 하면 ‘I’지요.
I 속에 뭐가 덮쳤다 했습니까? 타인의 시선, 타인의 평가, 판단, 나에 대한 남들의 기대감, 이것이 뭐로 작동한다? 바로 스물네 시간 쉬지 않고 내가 자신에게 묻는 것은 뭐냐 하면 “나 어때요? 여보, 나 어때? 얘들아 아빠 어때?” “오늘 멋있는 것 같아요.” “그렇지. 내 사는 보람이 있다.” “사장님, 저 어때요?” 이런 것. 인간의 욕망이잖아요. 항상 타인을 의식하는 것.
그런데 그렇게 타인을 의식했던 사람 중에 누가 있었느냐 하면 바로 다윗이 있었던 겁니다. 다윗의 특징은 뭐냐? 율법에 정통했어요. 어릴 때부터 율법을 배웠고, 다윗 일대기 다 아시죠. 다윗이 누구한테 쫓겼습니까? 사울에게 쫓겼지요. 사울에게 쫓기면서 다윗이 자기가 내부적으로 고민과 염려했고 질문하고 싶었던 것이 시편에 나옵니다.
시편에 나오는 것이, “하나님이여, 제가 뭐가 잘못됐기에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제가 뭘 하나님 말씀을 어겼다고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할 때 내가 율법의 어떤 대목에서 위반했기에 내가 이렇게 시달리면서 심지어 저주의 길을 가야 합니까, 질문을 한 거예요. 이 질문은 다윗 이전에 욥이 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 앞에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 섬긴 것 밖에 없는데 상대적으로 친구들과 자기는 너무나 차이 나게 직하 완전히 꼴아 박습니다.
심지어 자기 부인도 욥보고 이런 이야기해요. 당신이 이 지경인데 아직도 당신의 순진함을 지키겠느뇨? 벌써 이 지경됐는데 당신은 아직도 하나님 찾느냐, 이 말이에요. 그야말로 경상도 말로 때려치와뿔라, 때려치워버려라. 거기에 대해서 욥은 때려치워버리라는 말을 함부로 못하고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하나님, 차라리 저를 죽여주옵소서. 내가 태어나지 말았으면 더 좋을 뻔했다. 왜 태어나서 이 고생합니까?” 욥이 이야기했어요. 내가 고생하는 건 받겠는데 고생해야 될 이유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인생에 내가 살아갈 이유에 대해서 도통 의미를 모르겠다는 겁니다. 참 중요한 질문을 던졌지요.
다윗언약,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을 했어요. 했는데 이 내용을 들어보면 얼마나 어려운 내용인지 알 수 있어요. 사울 왕에게 늘 쫓기잖아요. 쫓기면서 하나님이 도와줘요. 이게 앞뒤가 맞는 이야기입니까? 쫓기는데 도와줘요. 쫓기는 것은 쫓기는 대로 남고 도와줄 것은 도와주고. 뭐예요? 아예 도와주려면 화끈하게 안 쫓겨야 되지 않습니까? 목숨이 간당간당해요.
그래서 시편 22편 같은 경우에는 뭐냐? 하나님이여 어찌 저를 버리시나이까. 왜 저를 버리십니까? 이 말은 다윗이 뭘 안다? 율례와 법도에 대해서 점점 더 깊이 있게 알게 됩니다. 그런데 다윗이 놓친 게 있어요. 율례와 법도로 백성들이란 타인에게 하나님의 종으로서 율례와 법도를 가르쳐야 될 입장에서 백성들을 가르칠 생각만 했지 본인이 원천적으로 율례와 법도를 못 지키는 자라는 사실을 다윗은 감히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계약을 했지요. 계약 밑에 유도리가 돼 있는 백성들이 있는 거예요. 다윗은 이 구조를 인정했어요. 인정하고 왕이 되어서 율례와 법도에 대해서 정통해서 율례와 법도를 가르치고 그것으로 통치하려고 했습니다. 사울 왕과 다윗과 솔로몬의 차이는 사울은 정복대상입니다. 두 번째 시간에 이것 하는데 어렵더라도 여러분 참아내야 돼요.
사울은 정복대상이고 다윗은 정복자고 솔로몬은 통치자에요. 그런 약간의 차이가 있어요. 어쨌든 간에 정복을 완성한 것은 다윗이 완성했어요. 그러면 사울과 다윗의 차이는 뭐냐? 사울은 이스라엘을 자기 소유로 여겼어요. 나라 자체를 자기 소유로 여겼어요. 이걸 세상으로 하면 전제군주라 해요.
제가 문장을 하나 읽어드리겠습니다. 약간 길기도 한데. “법흥왕이 울진 지역을 신라의 영토로 편입하자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신라에서는 법흥왕과 13명으로 구성된 6부의 귀족들이 회의를 열어 대인(장군)을 파견하여 난을 진압하고 그 반란을 처벌하였다. 얼룩소를 잡아 제사 지내고 하늘에 그 사실을 알렸다.”
1988년도에 울진 죽변 논두렁에서 발견된 비석의 내용입니다. 그때가 서기524년 지금부터 150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지금 이 내용을 보게 되면 왕이 하는 짓이 뭡니까? 그냥 죽변 주민들 알아서 살도록 두면 안 됩니까? 왜 그걸 흡수 통합해야 됩니까? 깡패기 때문에 그래요. 세상의 왕들은 깡패들이에요.
이걸 약간의 체계를 갖추면 이렇게 됩니다. 이웃공동체를 침략을 해요. 나쁘지요. 그래서 족장사회, 그 이웃공동체가 족장, 전통적으로 오랫동안 같은 씨족, 혈족, 족장제도를 전복시키고, 그다음에 이 집단을 흡수 통합해서 지배영토를 늘리고, 그다음에 조공을 바치고, 그다음에 또 다른 침략을 할 때 군사들이 필요하지요. 군사로 강제로 징병하고, 그다음에 이 전쟁에서 얻은 노략물을 전쟁에 참여한 군사들에게 약탈한 것을 나눠주는 거예요. 나눠주고 그다음에 뭡니까? 얼룩소를 누구한테 바치고? 제사로 하늘에게 바치고 신에게 알리는 겁니다.
왜 이런 짓을 하지요? 전 세계 모든 세계사가 왜 이런 짓을 하냔 말이죠. 그냥 이웃공동체로 살면 되잖아요. 왜 이런 짓을 합니까? 간단해요. 정신병 환자들이에요. 이걸 편집증이라 합니다. 못 잡으면 본인이 근지러워서 살지를 못하는. 기업합병, 부도 직전의 회사 합병해서 재벌 만드는 것, 정신병 환자들이에요. 뭐 힘으로 하진 않지만 힘으로 하는 조폭은 아니지만 그 사상은 조폭입니다.
출세하겠다는 것은 정신병 환자들이 하는 짓이에요. 이게 인간 속에 들어있는 욕망입니다. 그 욕망이 모든 것이 공통된 의식이에요. 이 욕망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아느냐? 전쟁입니다. 전쟁은 인류를 평준화합니다. 전쟁이란 욕망의 흐름입니다. 전쟁이란 말이 너무 거창합니까? 그럼 이렇게 바꿀게요.
경쟁이란 욕망의 흐름입니다. 욕망은 인간이 내 욕망을 내가 못 다스려요. 계속 흘러가요. 이게 분출되는 겁니다. 꼭 온천 같아. 가만있을 수가 없어요. 우리애가 1등해야 돼. 참을 수가 없어요. 자기 아들보고 너는 만년 과장이고? 언제 부장 되는데? 추석 가까이 오면 요새 집값 올랐나, 묻지요.
전쟁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이런 이야기했지요. 우리의 전쟁은 혈과 육, 사람과 전쟁하는 게 아니고 보이지 않는 이 세상 신과의 전쟁이라 했어요. 그러면 이 세상 신, 인간에게 욕망을 부여한 독자적으로 살라고 부여한 게 누구죠? 뱀이죠. 악마죠, 짐승이죠. 그 짐승의 세계가 초월적인 어떤 형식을 갖추면 그게 뭐냐? 왕이에요, 왕. 그걸 감안해서 하나님께선 왕에게 계약을 맺은 거예요.
그러면 아까 누구와 계약 맺었다 했습니까? 다윗과 했지요. 다윗이 뭐였습니까? 왕이지요. 정복자 왕이잖아요. 그러면 다윗에게는 이러한 세속 왕의 기질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둘 중에 하나에요. 어느 게 정답이겠어요? 있지요. 있는 거예요. 세속 왕과 다를 바 없는 욕망의 흐름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형식은 뭐냐? 왕인데 왕이 뭐냐? 하나님의 율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모범을 보여야 된다는 그 위치에 지금 다윗이 앉아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 다윗에 힘이 있잖아요. 왕이니까 힘이 있단 말이죠. 예를 들면 삼손, 삼손에게 힘이 있었지요. 그런데 삼손이 처음에 힘 가질 때 그 힘을 어디다가 썼습니까? 여자 꼬시는 데 힘썼잖아요. 여성들이 욕망의 세계에서 힘 있는 자를 선호하니까 “이렇게 나는 힘세다. 너 나한테 올래?” 여자 세 명 바꿨지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삼손에게 맡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로 하여금 삼손의 앞길을 막아줬다는 거예요. 삼손이 해야 될 일이 뭐냐 하면 자기 한 몸 바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거예요. 블레셋에서. 하마스에서 이스라엘을 건지는 거예요. 하마스가 지금 블레셋 아닙니까. 건지는 거란 말이죠.
근데 그걸 언제 했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가로막고 난 뒤에 원래 삼손이 해야 될 일을 자기 죽음과 더불어서 다 이뤘어요. 눈 뽑히시고 머리카락 홀라당 날아갔지요. 그런데 삼손은 죽었는데 뭐는 살아 있었다? 삼손에게 준 나실인의 역할과 기능은 삼손이 아무리 타락해도 방해받지 않았던 겁니다. 이게 신자 아닙니까. 이게 신자잖아요.
왜 내가 해야 돼요, 내가 왜 말씀을 지켜야 됩니까? 말씀이 수시로 나를 가로막고 있는 데요. 말씀이 스스로 자기가 살아 있음을 우리를 통해서 흔적으로 증명하고 있는데 왜 내가 내 잘남으로 그 말씀을 증명하려합니까? 있을 수 없지요.
삼손이 그렇듯이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윗언약 속에는 다윗이 있어요. 다윗이 있을 때 마귀가 악마, 사탄이 다윗을 어떻게 찾아가서 다루는가? 사탄의 다룸. 다윗을 사탄이 다루었던 그 사실을 경유함으로써 다윗언약이 성사됩니다. 다윗이 훌륭해서 성사된 게 아니고, 밧세바와 간음하고. 밧세바로 간음한 것으로 멈추지 않았어요. 어떻게 했습니까? 음주운전을 했으면 사고 당사자와 사과하면 될 건데 집에 가서 술을 더 마셔버렸어. 누가? 김호중이가. 알리바이를 만들려고.
아까 죄가 뭐라 했습니까? 죄는 내가 자기의 가치를 지키는 게 죄라 했지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주님께서 그걸 유도하신다는 거예요. 놀라운 사실은 반듯하게 아무리 살고 싶어도 나는 나의 알리바이를 성사시키고 내 죄를 없는 척하는 이 과정을 우리 능력으로 그 노선을 빠져나갈 수 없어요. 매사에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행복하지. 입만 떼면 거짓말. 뭐 달리 이거는 거짓말 아니고 없어요. 입만 떼면 거짓말. “짬뽕 어땠어?” “참 맛있었어.” 거짓말이에요. 배고프니까 맛있지. 거짓말 아닌 게 없어요.
로마서에서 나중에 적나라하게 이야기하지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이 모든 계명을 준 것은 너로 하여금 입을 막고 하나님 앞에 위반자, 율법의 위반자에게 주어진 게 뭐예요? 저주지요. 저주 아래 있게 함이라. 주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저주로 몰아넣어요.
저주로 몰아넣어서 도대체 나한테는 나올 게 죄밖에 없음을 아는 그 순간이 나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계약 당사자가 나 아니고 따로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는 자가 하나님의 흔적입니다. 언약의 흔적이에요. 그게 바로 구원입니다. 도대체 몇 년이나 나이 얼마까지 위선자가 되려고 해요?
여기서 왕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봅시다. 아까 내가 짧게 이야기했는데 여러분들이 피곤해하기 전에 후딱 해야지. 왕에 두 종류가 있어요. 하나는 세속 왕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언약된 왕이 있어요. 언약된 왕에 대해서 잘 나와 있는 것이 뭐냐 하면 잠언과 그리고 전도서에요.
잠언의 경우에서는 21장 1절 같은 경우에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다.” 무슨 뜻인지 딱 들으면 아시겠지요. 왕의 마음이 어디에 있다고요? 여호와의 손에 있다. 따라서 왕의 말을 위반하게 되면 여호와의 말을 위반하는 거죠. 잠언서 14장 35절에, “슬기롭게 행하는 신하는 왕의 은총을 입고 욕을 끼치는 신하는 그의 진노를 당하느니라” 잠언서 16장 10절에, “하나님의 말씀이 왕의 입술에 있은즉 재판할 때에 그 입이 그릇하지 아니하리라”
잠언서 25장 2절 같은 경우에는 더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은 절대로 인간에게 포착되지 않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고, 왕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이 포착되는 것이 임금/왕의 보람이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잠언서 31장 3절에, “네 힘을 여자들에게 쓰지 말며 왕들을 멸망시키는 일을 행치 말찌어다”
이것은 다윗이 사울 왕을 어떻게 했습니까? 계속 죽일 수도 있는데 기름 부음이 있어서 제가 손 못 댑니다. 당신 죽이는 것이 제 소관 아닙니다. 하나님 소관이라고 계속 이야기했지요. 전도서 8장 2절에, “왕의 명령을 지키라 이미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였음이니라” 전도서 10장 20절에 보면, “심중에라도 왕을 저주하지 말며 침방에서라도 부자를 저주하지 말라” 이렇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를 누가 했느냐 하면 바로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이야기한 거예요. 잠언서, 전도서.
그렇다면 방금 언약된 왕의 말을 들었지요. 딱 감이 오지요. 아하, 왕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타난 흔적이구나. 그러면 세속 왕에 대해서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세속 왕은 어디 나오느냐? 사무엘상 8장에 나옵니다. 8장 10절에서 18절, 이게 좀 긴데 제가 속도를 내서 빨리 읽겠습니다. 뺄게 하나도 없어서.
“사무엘이 왕을 구하는 백성에게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일러 가로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가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취하여 그 병거와 말을 어거케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그가 또 너희 아들들로 천부장과 오십 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병기와 병거의 제구를 만들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딸들을 취하여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를 삼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의 제일 좋은 것을 취하여 자기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여 자기 1)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취하여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너희 양떼의 십분 일을 취하리니 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라 그 날에 너희가 너희 택한 왕을 인하여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지 아니하시리라”
네가 왜 깡패한테 깡패를 달라고 하느냐, 이 말이에요. 네가 김정은이를 왜 자꾸 지도자로 모시냐, 이 말입니다. 왜? 이 말은 뭐냐? 하나님 보시기에 이런 세속 왕이 필요 있다, 없다? 필요 없다. 깡패가 왜 필요해요? 그러면 다윗과 솔로몬, 이건 또 뭐냐? 왕이 필요 없다면서 하나님께서 다윗과 솔로몬을 왜 주셨는가? 그거는 조금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다윗과 솔로몬에 뭐가 중첩돼 있어요? 세속 왕의 요소가 같이 들어있는 거예요.
그러면 사무엘상에서 인간들은 세속적인 왕을 왜 찾습니까? 이게 중요한 문제에요. 왜 찾는 거예요? 왜 우리에게 왕을 달라고 한 이유가 뭡니까? “이런 깡패데?” “그래도 좋습니다. 왕이 필요합니다.” 왜 그래요? 왜 그런 소릴 하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이미 배후에 보이지 않는 왕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걸 초월적 현실이라고 해요.
초월적 현실이란 것은 인간+인간+인간+ 하면 인간됩니까, 안 그러면 신격화된 인간됩니까? 인간+인간+인간+ 하면 뭐가 나와요? 그 위에 뭐가 나옵니까? 옛날에 국민학교 운동회할 때 탑 쌓기 있지요. 탑 쌓고, 탑 쌓고, 탑 쌓을 때 사람들은 밑에 깔린 사람을 봅니까, 위에 있는 단 한 명을 봅니까? 단 하나를 보지요. 단 하나의 대단한 영웅적인 사람이 누구냐를 사람들은 찾아서 그 힘을 의지하고 싶도록 악마로부터 인간들은 이미 장악당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거예요.
허술한 나 대신 내가 의지할만한 최후의 단일자, 유일자, 일자, 최후의 단 한 사람을 눈으로 보고 싶어요. 그걸 신약에서 뭐라고 하느냐? 그걸 적그리스도라 하지요. 내가 기도하지 말고 우리 목사님 기도하면 좋겠다. 이게 뭐예요, 지금? 그게 뭡니까? 교회에 적그리스도 하나 모시는 거예요. 이번에 당회장 누가 오실꼬? 눈에 보이는 어떤 영웅적인 사람, 교주? 말이 교주지 적그리스도죠.
인간은 같은 사람에게 감사하고 싶은 거예요. 그게 어릴 때부터 이미 인간에게는 굳어져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인간의 내부 심리상 자신의 주인이 있어요. 자기에게 자신의 주인이 있어요. 그게 누구냐 하면 바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럼 엄마는? 아버지의 부속기관. 아버지는 팽팽히 놀고 엄마는 죽기 살기로 장터에 나가서 새벽부터 해서 다 해놨을 때 그 자식의 주인공은 누굽니까? 엄마일까요, 아버지일까요? 아버지입니다. 아버지에요. 아버지한테 실망해도 아버지의 흔적을 지울 수 없어요.
이게 바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저주했던 요소입니다. 여자는 남자를 사모할 것이고. 이미 가족 간에 대장은 잘났든 못났든 아버지가 대장질하고 있는 거예요. 가끔은 용감한 어머니가 나타나서 그걸 도전하지만 덮는 거예요. 그러면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모방하고 흉내 내고자하는 자들이 누구겠습니까? 아들이에요, 딸이에요? 꼴랑 아들이라고, 참. 아들이라고 아들 값하고 말이죠.
그러면 아들 없고 딸 셋 있다. 그러면 딸 셋이면 누가 아버지 역할을 합니까? 장녀. 둘째, 셋째 딸 지 마음대로 펑펑 놀지만 큰딸은 아버지 건강하십니까, 늘 안부 전화하는 것은 장녀에요. 이건 뭐 시켜도 안 돼요. 타고났어요. 장녀. 달라요. 장녀와 동생하고 달라요. 이상하지요, 이게. 인간의 육신이 하나님이 주신 법칙을, 프레임을 못 벗어나요.
아버지 중의 아버지가 누구냐? 왕이에요. 그 나라의 아버지가 왕이에요. 그래서 다른 나라를 폭력, 전쟁, 그리고 미치광이죠. 전쟁, 침략 못해서 환장한 것, 남의 나라를 노예로 못 삼아서 환장한 그 아버지가 틈만 나면 말 타고 이웃나라 침노해서 침략해서 전쟁을 일으킬 때 그런 왕을 모시는 백성들은 그 왕을 존경하겠습니까, 싫어하겠습니까? 어때요? 존경하지요. 왜? 우리 편이니까. 러시아 국민들이 푸틴을 존경하겠어요, 싫어하겠어요? 존경하지요. 왜? 우리가 이기고 있으니까, 우크라이나를. 지면 무조건 원수에요.
이번 파리올림픽에서 사격 여자 10m 공기권총 은메달 딴 김예지 있지요. 그거 어느 나라 선수에요? 우리나라 선수지요. 우리 편이라서 너무 다행이에요. 내 편, 나를 지키는 것이 뭐다? 죄죠. 나를 지키는 게 죄에요. 우리 식구가 나가서 어떤 죄를 지어도 용납을 해요. 남들은 우리한테 핏대를 세우지만 내 가족이거든요.
내 가족은 아버지 중심으로 이루어진 단수, 단 하나의 뭉치일 때 그게 나의 자아의 구현체, 내 자아의 초월적 형식구조에요, 이게. 비록 왕이지만 나는 그 왕이 나의 왕이란 점에서 우리는 초월적 형식에 포함된다는 것 이럴 때 인간은 마음에 안정을 느낍니다. 개척교회 열 명 나오는 그런데 가지 말고 한 이천 명 모이는 교회 다닐 때 정서적으로 포만감을 느끼지요. 그득한 예배당에다가, 울산제일교회? 울산제일교회 요새 교인들 다 빠져나갔는데 뭐 있어요?
사무엘상 8장에서 눈에 보이는 피라미드를 쌓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눈에 안 보이니까 이게 불안한 거예요. 이게 공허하고 허무한 거예요. 믿고 싶지요. 뭐 봐야 믿지 안 보이는데 뭘 믿어요. 보이는 인간이 더 믿어지는 데요. 그러니까 다른 민족, 주변에 있는 블레셋, 모압이고 아람, 암몬과 에돔이고 주변 나라 보니까 그 나라는 다 누가 있어요? 눈에 보이는 왕이 있어서 아까 법흥왕 이야기했지요. 보이는 왕이 설치니까 그게 안 믿으래야 안 믿을 수가 없고, 인간이 나서서 용감하게 하니까 이거는 그냥 그 사람을 의지하고 싶은 거예요.
보이는 것을 의지하는 걸 사람들은 믿음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게 수월하게 믿는 방법이에요. ‘하나님 보여주면 믿을게, 예수님 보여주면 믿을게.’ 그게 수월한 거예요. 보지 않고 믿으려 하니까 이게 억지가 되니까 나중에 짜증이 확 올라오는 거예요. 오십 년 믿어도 안 찾아오니 나 그만 믿을래. 뭐 믿는 구석이 있어야지 아무 증거도 없는데 계속 오십 년 전에도 믿자, 믿자. 지금도 믿자, 믿자. 자기가 스스로 지쳐버렸어. 믿자, 믿자 해놓고는 역시 믿을 것은 사람밖에 없다는. 내 식구밖에 믿을 것 없다.
이게 바로 인간입니다. 다윗은 바로 그 인간이었어요.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간음에다가 그다음에 자기가 거짓말한 것부터 해서 사람 죽이는 것까지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완전히 까발려졌습니다. 그때 다윗은 어떻습니까? 비로소 자기로부터 해방됐어요. 이제는 자리를 놔줄 때가 된 거예요.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어요, 본인이. 그 고백을 해요.
하나님께서는 내가 알고 있는 율법을 지키는 나가 아니고 율법을 못 지키는 나를 원한다는 사실을 왜 그동안 몰랐느냐, 이 말이에요. 성경 하나 못 지키는 나를 원한다는 것, 주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그렇게 많이 듣던 그 이야기가 왜 내 이야기가 아니었던가. 그동안 나와 괴리된 따로 놀았나, 이 말이죠. 그런데 어느 날 주께서 네가 바로 죄인이라 할 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다 날아가잖아요. 맞습니다. 제가 세리고 내가 창기고 내가 도둑이고 제가 강도입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이름이 육신적 아버지로부터 노선이 탈락해요. 노선은 이렇게 긋거든요. 노선이 뭐냐 하면 인간의 인생이라 하는 것은 수학적으로 하나의 직선이에요. 곡선이 좀 있더라도 따지고 보면 직선이에요. 내가 노력한 것이 나의 미래를 형성하고, 내가 노력한 것이 그다음 나를 생존케 하고, 나를 단도리하는 것이 2개월, 3개월 뒤에 나를 반듯하게 만든다. 뭡니까? 직선이죠. 직선적입니다.
내가 노력한 중에서 하나님 섬기는 게 있다. 내가 하나님 섬기면 도로 어디로 떨어집니까? 하나님 섬긴 나로 오지요. 그러니까 이 선에서 올라가봤자 도로 선으로 내려오는 거예요. 근데 성경은 뭐냐 하면 성경은 인간을 이미 확정했어요. 인간은 뭐다? 인간은 이미 죄인이다. 인간은 죄인으로 율례와 법도와 말씀이 주어집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저주 아래 있다. 말씀으로 우리 앞길을 막습니다.
막는 순간 이 하늘나라에서는 우리가 뭡니까? 인간은 아담의 후손들은 다 뭐예요? 죄인이죠. 지금 여기 직선에서는 나는 뭐냐? 내 노력하는 것이 잘난 나를 만들잖아요. 그럼 우리는 죄인 노선이 아니고 어쨌든 간에 변명이 계속 유통되는 노선이에요. 뭐 이렇게 운이 나빴다. 그때 날씨가 안 좋았다. 그때 하다 보니 그렇다. 그거는 내 실수였었어. 다음에 안 그러면 되지.
변명을 유지한다는 것은 끝까지 나의 의를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거예요. 나의 존재 이유는 내가 잘났기 때문에 존재하는 거예요. 잘났기 때문에 나는 살 가치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뭐냐? 죽는 거예요. 왜 죽는다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죽을만해 죽어버리면 지금까지 살아온 내 가치를 찾을 길이 없는 거예요.
은행에 가서 예금을 찾는데 은행창구 여직원이 통장에 한 푼도 없는데요? 이러면 어떻게 돼요? 그러면 지금까지 은행에 저축한 게 없다는 되잖아요. 우리 인생은 나의 의로움의 잔고를 남기기 위해서 인생을 살아가요. 고생을 해도 보람이 있는 이유는, 그만큼 훌륭하고 착하고 성실하고 애들 대학 다 보내고 아파트 하나 사고 남편/아내 잘 섬기고 남한테 경찰서 한 번 안 끌려가고 그다지 괜찮은 인간으로 살았다는 의로운 잔고, 그게 지금 나를 살게 만든다 말이죠. 인간답게.
그런데 말씀이 와서 그걸 끊어버렸단 말이죠. 너의 본래 모습은 죄인이야. 네가 지금 의인 아니야. 그래서 말씀은 나로 하여금 죄인 되게 위로 올라가는 거예요. 펄쩍펄쩍 개구리 뛰듯이 가는 게 아니고 위로 올라간다고 위로. 그러면 우리의 왕은 위에 있어요, 아래에 있어요? 위에 있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원했단 말은 잘난 내가 눈에 보이는 잘난 우리끼리 잘난 나라 만들어서 그 나라 괜찮은 임금 덕분에 우리도 잘 먹고 잘 살고 싶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를 버리고 신을 섬기게 된 거예요. 하나님을 섬기게 된 거예요. 여호와 빠진 하나님을 섬기게 된 겁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하나님께선 다윗을 간음하게 하셨고 다윗을 살인하게 하셨고(고의 살인) 그런데도 하나님은 다윗을 뭐로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만들어서 임금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거기에 자손이 생기면 돼요. 자손이 누굽니까? 솔로몬. 솔로몬 이름이 여디디야. 여디디야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입은 자, 사랑의 습격, 하나님의 사랑의 공격, 사랑의 침투, 하나님의 긍휼, 죄 사함으로 거두어주심. 이게 솔로몬의 등장이에요.
다윗은 인구 조사를 했어요. 우리가 공부했듯이 사탄이 와서 인구 조사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계기로 해서 사탄이 들어간 것은, 다윗이 하는 일을 임금 되는 일을 하나님 쪽에서 가로막지요. 가로막고 난 뒤에 그다음에 다윗이 생각하는 이런 직선적으로 예상되는 일 말고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준비된 일을 인구 조사한 다윗에게 퍼붓습니다.
그게 뭐냐? 다윗이 제사장 되는 거예요.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나중에 모리아 산이거든요. 서서 다윗이 제사 드릴 때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비로소 거둬졌지요. 그러면 뭡니까? 다윗언약이란 게 뭐예요? 다윗언약이란 것은 하나님이 죄인을 향하여 다윗언약에 다윗 말고 다윗의 후손이 나중에 올 건데 죄 없는 다윗의 후손의 희생 제물로 인하여 일방적으로 죄 용서 받은 사람만 집합되는 그 백성이 이제는 더 이상 점선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온전한 실선의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율례와 법도의 완성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고 맺겠습니다. 아담에게 뭐가 들어붙었습니까? 악마가 사탄이 들어붙었지요. 아담으로 말미암아 창세기 11장에 바벨탑 쌓았지요. 영웅 니므롯의 고향에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그때에 하나 같이 의견이 일치되었어요. 인간의 마음은 너 다르고 나 다른 것 없어요. 그게 뭐냐 하면 눈에 보이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거예요. 탑을 쌓아서 탑 꼭대기에서 내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점검할 수 있는 하나님을 보고 싶은 겁니다.
그럼 하나님 쪽에서 오케이 하나님 보여줄게. 신약 때 와서 하나님 보여줬습니다. 그 하나님 어떻습니까? 너무나 나약해서 아무도 그 길을 가지 않으려고 하는 그런 지경이 되지 않는 그 모습으로 점점 더 내려가는 모습으로 하나님을 보여줬습니다. 그래서 강남강의에선가 했지요. 대구강의인가 기억 안 나는데 무슨 하나님이냐 하면 죽는 하나님이에요.
인간은 자기가 살아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하나님 만나서 우리 산 사람끼리 대화합시다. 이걸 원했는데 하나님 쪽에서 죽어버렸어요. 하나님 쪽에서 죽었다는 말은 눈 감았다, 귀 막았다가 돼요. 나 너하고 상대 안 한다는 거예요. 죽은 거예요. 그럼 인간이 진짜 하나님과 하려면 하나님이 죽었으니까 살아 있는 내가 기여할 대상도 없고 어떻게 의견 낼 대상도 없어요. 다시 말해서 가로막힌 거예요. 하나님께서 인간이 가로막혔다는 사실을 하나님 쪽에서 죽음으로써 증명해버린 거예요. 일체 하나님께선 인간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면 인간들이 가만있습니까, 가만있지 않고 어떻게 했습니까? 적그리스도를 만들어요. 사람과 대화가 통하는 인간이 납득이 되는 드디어 예수, 하나님, 삼위일체를 만들어내기 시작하는 거예요. 나를 살려주고 강화시키고 나를 튼튼하게 만드는 신을 찾기 시작한 거예요. 안 죽게 만들고 오래 살고 잘 먹고 잘 살고 건강하고 그 신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거예요. 거기에서 예외 된 인간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그래요.
그런데 성령이 죽었던 예수의 영이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이 덮쳐버리죠. 덮치니까 그때는 우리의 모든 생각을 주께서는 강제적으로 차단돼버리죠. 차단되면서 뭘 느끼겠습니까? 내 인생길을 괜찮게 가다가 위에서 와버리니까 성경말씀이 다시 보이게 되는 거예요. 맞아. 내가 살 가치도 없는 뭐가 된다? 죄인이잖아. 그때부터 질문이 뭐냐 하면 내가 왜 살지, 내가 지금까지 왜 밥 먹고 있지, 왜 아직도 걷는 거야?
코미디에 그런 게 있어요. 노인정 깡패 이야기하면서 막 시비 거니까 왜 시비 걸어, 이러니까 “어, 들리네?” 차려고 했는데 피하니까 “어, 걷네?” 내가 왜 그래야 되고 내가 왜 아직 살아 있어야 됩니까? 이걸 쉽게 하면 기적인데요. 이게 기적이거든요. 그렇다면 그다음에 계속 살아야 될 이유가 뭐냐? 세상 사람들 보니까 아무 이유도 없어. 그들은 그냥 무의미하게 세월만 보내고 있어요. 다음 주에 추석이다. 벌초하러 간다. 벌초해서 그다음에 뭐? 살겠지. 살아서 뭐? 없어요. 아무 대책도 없고 그냥 요양병원에 화장터에 가고 있어요. 아무 의미가 없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도대체 내가 왜 있지? 죄인인 것을 살려주신 그분 앞에서 나를 통해서 나를 살리는 게 아니고 말씀을 살리기 위해서 나를 살려주고 있는 겁니다. 이 약속을 살리기 위해서, 이 성경말씀을 살리기 위해서. 주의 말씀은 성취됨이 없이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말씀을 보자가 아니라 말씀이 여러분에게 늘 찾아와서 여러분의 앞길을 막을 때 내가 죽어야 되는데 왜 살지, 라는 그러한 고백을 주님한테 해주시면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리 요모조모 따져도 살 이유도 없고 하루 더 버틸 아무런 이유도 없는데 이것은 주님이 살아 계시고 주님이 일하시는 흔적과 증거로써 감격하면서 기적이라고 여기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만 증거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