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23장 18절 (영문 없는 구원) 240618a-이근호 목사
오늘은 누가복음 23장 13절,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들 불러 모았습니다. 십자가 예수님의 효과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의도하지 않더라도 예수님 자신 앞에 모든 인간을 불러 모으는 거예요. 양과 염소의 심판주가 되시기 때문에. 이미 오실 때부터 심판주고 하는 모든 행적을 통해서 너희들이 나를 재판하는 과정을 통해서 너희들이 나에게 도리어 재판을 받아야 될 대상인 것을 알려주는 그 일을 주님께서는 내심 성공리에 수행하고 계십니다. 인간이 예수님을 재판하는데 그 재판이 벌써 자기 재판을 주님에 의해서 실시 됐다는 사실을 인간들이 지금 모르고 있어요. 스스로 모르고 있지요.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속이면서 안 들킨다 생각하는데 주님은 인간이 처음부터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주님 앞에 나오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는 진리라는 것이 조금도 있을 수 없고 자기들끼리는 서로 진리라고 우기지만 예수님 재판 현장에서는 그들의 속내를 거짓 것을 가짜인 것을 그대로 다 나타나게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보통 인간 세계에서는 인간은 가짜니까 진짜는 어떻게 되겠어요? 가짜가 나오게 함으로써 나오게 하는 그것이 진짜가 돼요. 그게 진짜에요. 무슨 말이냐 하면 더 함축해서 ‘이 세상은 십자가 지신 결과가 이 세상이다’가 아니라 이 현실은 십자가 지신 현실이 결과가 아니라 십자가 자체가 현실이다. 모든 현실은 십자가 안에 다 응축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걸 더 함축해서 이야기하면 십자가 뭐냐? 십자가가 창조가 되는 겁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주님, 십자가 안에 그 창조의 비밀이 다 들어있어요. 십자가를 위해서 창조된 거예요. 십자가를 위해서. 십자가 생기면 모든 창조나 안식이 완성이 되는 겁니다. 인간이 죄 지으면 악하게 되지요. 주님은 십자가 안에서는 인간이 악해서 죄 지어서 악이 되는 게 아니고 악에서 인간을 뽑아내요. 왜? 인간이 악이니까. 죄 짓지 말자가 아니라 죄가 무엇인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을 매개로 사용하는 거예요. 가시적인 악의 가시성, 눈에 드러난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이런 것을 밝혀내려면 예수님 앞에서 인간의 모든 정체가 다 드러나야 되겠지요. 나는 예수님을 안죽였다 라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빌라도로 하여금 그 당시 예수님 중심에 있는 백성들과 장로들과 빌라도 본인까지 합해서 다 누구 앞에 있습니까? 예수님 앞에 나오게 한 거예요. 그런데 빌라도는 오해해가지고 자기 앞에 예수님도 있고 장로들도 있고 백성들도 있는데 그들은 모두 자기보다 권력이 한수아래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리고 그 장로들과 백성들은 예수님보고 이야기 안 해요. 예수님은 권력이 없기 때문에 누구보고 이야기하느냐 권력 있는 자에게 예수님 죽여 달라고 요청하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이 세상은 예수님 빼놓고 돌아가는 세상이 되겠지요. 예수님 빼놓고 돌아가는 세상. 이게 인간들이 친숙하고 익숙해져있는 거예요. 모든 게 있는데 예수님만 없었으면. 또는 예수님 없는 것을 인간들은 선호하고 있어요. 주의 말씀 안 들었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그 소원이 모든 인간 속에 다 들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지난 수요일날 그런 이야기했던가요? 인간은 하나님 있든 없든 상관없이 살아간다고요. 내가 있는데 왜 못살아. 내가 있는데. 예수님이 있든 없든. 여러분 이순신 장군 있어서 삽니까? 이순신 장군이고 뭐 강감찬이고 간에 내가 있어야 살지 이순신 장군 없이 못 살겠다는 사람 있긴 있어요. 누구냐 하면 이순신 장군 재건 회사 직원들. 그 사람들 이순신 장군 없으면 회사 망합니다. 거북선 제작사업 이런 거 있잖아요. 이순신 팔아서 밥 먹고 사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이순신 없이 못 살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순신 장군 존경해요. 존경하고 나라 지켰다고 좋아하는데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있으니까 이순신 장군은 그렇게 내 인생에 중요한 인물은 아니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유도하느냐 하면은 너희 속에 무엇이 가짜고 무엇이 빠져있고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사건을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일으킵니다. 그게 십자가 사건이에요. 너희 속에 빠진 게 있는데 뭘 빠뜨렸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게 어떤 식이냐 하면 “저 예수를 없이 하소서”를 외치는 거예요. 자기들 입으로 예수 없는 세상, 사회를 원하고 있었던 겁니다.
처음에 그들은 몰라요. 그들은 예수님 있으나 마나 그 아무 상관없는 사회, 지장 없는 사회라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이 계속해서 끝까지 밀어붙여서 결국 어디까지 유도하느냐 하면은 인간은 어디에서 하나가 되느냐? 예수 없다는데서 비로소 그들은 그날 친구가 되는 거예요. 예수 없다는 점에서는 의견 일치를 보는 거예요. 예수 없다는 점. 그러면 의견일치 본다는 말은 인간의 공통성이 밝혀진 거예요. 예수 없이 살기. 이거 누구의 소원입니까? 우리의 소원은 뭐죠? 남북통일이죠. 인간들의 소원은 뭡니까? 예수 없는 사회. 이게 인간들의 소원이었어요. 예수 없는 그 사회. 그럼 교회의 소원은 뭐겠어요? 예수 없는 교회. 예수 없는 교회에요. 이게 교회의 소원입니다. 어떤 사람이 권사가 되면 권사의 소원은 뭡니까? 예수 없이 살 수 있는 권사 되는 것. 어떤 사람이 목사 되었다. 목사의 소원은 예수 없이도 목사 짓 할 수 있는 목사 되는 것. 5살 애한테 물어보세요. 엄마 좋아 예수님이 좋아 물어보세요. 아빠 좋아? 하지 말고 그거는 너무 상투적이고. 예수님이 좋아? 엄마가 좋아? 아이큐100 안 되는 애는 엄마가 좋아. 아이큐 좀 되는 애는 예수님이 좋아. 솔직하게 과자가 좋아요. 과자가 좋아. 엄마의 묻는 취지까지 간파했으니까 교회 열심히 다니는 엄마가 예수님이 좋아? 내가 좋아? 할 때 답변은 이미 딱 끝났잖아요. 예수님 좋아하면 과자 하나 더 주지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예수님께서는 구약에서도 나오는데 열왕기하 1장 아하시야가 난간에서 넘어져서 병이 걸렸어요. 대구강의에서 했지요. 병이 걸렸을 때 엘리야를 찾은 게 아니고 바알 신을 찾았어요. 엘리야가 선지자니까 그 북이스라엘 왕 아하시야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를 아하시야 안에 마음 속에 어떤 괴물이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 아하시야한테 돌을 던집니다. 돌을 던진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은 연못이 있는데 아이들이 장난삼아 연못에 돌을 던지는 거예요. 놀면서 돌을 던져요. 애가 저녁이 돼서 저녁 먹으러 가야되는데 돌을 던지는 애들 집에 안와요. 애들이 오지를 않는 거예요. 그 다음날도 애가 또 안와요. 나중에 보니까 물속에 괴물이 살고 있었는데 괴물이 애가 던진 돌에 뿔을 맞았어요. 그 괴물이 누구냐? 바로 북이스라엘 왕의 입장에서 괴물이 누구냐? 바로 여호와였던 겁니다. 엘리야 잡으라고 군인들 보냈지요. 군인들 족족 어떻게 됐습니까? 하늘에서 불 내려서 죽었잖아요. 아하시야 왕 때. 여러분 신기하지 않습니까? 열왕기하 1장 다시 한번 봅시다. 저는 그런 게 굉장히 재미있고 흥미로워요. 열왕기하 1장 50명을 보냈는데 죽었지요. 또 50명 보내서 또 죽었지요. 벌써 군사 100명 죽었어요. 그 다음에 가니까 50명 대장이 벌벌 떠는 거예요. 우리가 건들지 말아야 될 자를 체포하러 간다. 살려달라고 하지요. 그래서 살려주고 왕한테 바로 이야기해라. 어떻게 물어야 될 데가 없어서 여호와 두고 왜 바알한테 묻느냐 라고 해서 그날 여호사밧은 죽고 여호람이 대신해서 왕이 되었다.
그러면 선지자 하는 일이 뭡니까? 왕 죽이는 거죠. 왕을 죽이는 거예요. 왜 자꾸 북쪽 이스라엘은 왕이 죽어요? 이게 뭐냐 하면은 이거예요. 오답노트 작성. 틀린 것을 자꾸 모이게 하는 것. 어디서 틀렸느냐 어디서 틀렸느냐 자꾸 틀리는걸 하는 거예요. 틀린 것을 하다보면 나중에 오답노트 짜증이 나서 못해요. 100문제 가운데 한두 개 틀려야 오답노트 적는 재미가 있지요. 두 개는 다음 시험에서는 맞겠다 하는데 100문제에서 99개 틀려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오답노트 안 하지요. 이스라엘은 오답노트를 작성조차도 그들은 결국은 못합니다. 안됩니다. 인간은 오답노트를 스스로 해보지만 실패로 끝나요. 오답노트라고 하는 것은 아직도 뭘 모르느냐 내가 나아질 가능성이 1%라도 있다고 할 때만 하는 것이 오답노트에요. 다음에는 성공하리라는 기대 희망이 있을 때 하는 거지만 주님께서 새로운 예상 못한 오답을 줘버리면 우리가 아무리 따라붙어도 내가 말씀 지키는 것은 이거는 내가 안 되는 거다 할 때 어떻게 돼요? 안 되니까 옛날식으로 겉멋으로 사는 재미라도 건지자 해서 오답노트 안 해요. 주님께서 오답노트를 하게 하는 것은 너를 믿지 말라고 했는데 나중에 오답노트에 지겨워가지고 내가 이제 하나님 믿으면 내가 손에 장을 지진다 해가지고 이제는 나 믿기로 작심을 더욱 더 작심에 작심을 하게 하는 것이 오답노트를 통한 주님의 이스라엘 밀어붙이기예요.
그래서 이 세상은 주님 보시기에 하나님 보시기에 도대체 인간은 나한테 없는 게 뭐냐를 몰라요. 내가 없는 게 뭐냐를 모른다고요. 제가 하나의 예를 들 테니까 이 말의 의미를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아저씨가 커피집에 가가지고 커피를 주문하면서 이렇게 했습니다. 프림 안 넣은 커피 주세요. 프림이 없는 커피를 주세요 이렇게 하니까 그 종업원이 하는 말이 우리 집은 원래 우유가 없습니다. 프림 없이 달라고 했는데 우리 집은 원래 프림이 없습니다라고 말해야 되는데 우리 집은 원래 우유가 없습니다. 우리 집은 블랙커피밖에 없습니다. 프림이 우유로 만든 거 아니잖아요. 그렇죠? 그러면 왜 친절하게 프림 없다고 하면 되는데 우유 없다고 이야기하느냐? 종업원 생각은 이거에요. 당신은 우리 집이 원래부터 블랙커피만 파는 커피집인지 당신 모르고 왔지? 그렇지? 그런 뜻이에요.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제가 구원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데 인간이 뭘 모르느냐 하면은 원래 천국에 인간이 없다는 사실을 인간들은 그걸 인정을 안 하는 거예요. 이미 생명나무에서 짤렸다는 것을 인간은 생각을 안 하고 자기가 죽어서 갈 곳을 본인이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교회 찾고 하나님 찾고 기도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오답노트를 어디까지 밀어붙이느냐?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는 신으로 밀어붙이면 되겠지요. 그게 무슨 신입니까? 바알 신이지요. 바알 신은 통합니다. 바알 신은 뭐가 없냐? 언약이 없어요. 제가 아까 강의 초반에 이야기했지요. 인간들의 공통점은 뭐가 없는 사회? 예수님이 없는 사회를 원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없는 사회를. 그러면 예수님이 없는 사회가 무슨 사회냐? 바알의 사회예요.
여러분 바알에 대해서 바알과 하나님께서 어떤 관계인 것을 이미 사무엘상 5장에서 이미 알려줬어요. 하나님이 이미 바알 점검에 나섰습니다. 사무엘상 5장에서.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전쟁하는데 언약궤 앞장 세웠잖아요. 언약궤 빼앗겼습니다. 언약궤가 빼앗기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졌고 언약궤만 달랑 포로가 된 거예요. 이제 남은 전쟁은 뭐냐? 언약궤와 블레셋 전체의 전쟁이에요. 일당 백 정도가 아니지요. 언약궤는 뭐냐 하면은 그냥 나무상자에요. 나무상자. 인간이 외부에서 힘을 줘야 움직이는 거예요. 물리적으로. 스스로 움직이지를 못해요. 나무상자가 어떻게 스스로 움직입니까. 말이 안 되지요. 그러면 언약궤 특징은 뭐냐?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죠. 언약궤는 움직이지 못하는 상자. 움직임이 없다. 움직임이 없는 거죠. 이 말은 블레셋은 언약궤를 들고 이동할 수 있지요. 블레셋은 움직임이 있다. 있다 없다를 제가 강조합니다 지금. 언약궤는 없다는 보여주고 블레셋 인간들은 있다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것도 움직임이 없으니까 이건 죽은 거잖아요. 언약궤는 죽은 거고 블레셋은 살아있으니까 움직이는 거예요. 둘 중에 누가 이기겠습니까? 죽은 게 이기겠어요? 살아있는 게 이기겠어요? 죽은 게 이기지요. 그게 언약적 행동방식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 행동방식이고 언약궤 행동방식. 살아있는 것들은 다 죽어야 돼요. 옛날 그 개그콘서트에 숙이인가 하는 개그우먼이 외친 게 있어요. 도포자루 휘날리면서 이 세상에 날씬한 것들은 다 가라고 했지요. 뚱뚱한 사람의 세상이 오리니 믿습니까?! 누구 친척 가운데 목사가 있다던가? 어릴 때부터 많이 보고. 믿을지어다 아멘! 뭐 이렇게.
이 세상은 살아있는 자의 세상이에요. 죽은 자는 가라 이 말이죠. 죽은 자는 원래 없어지게 되어있어요. 장례 치뤄서. 그런데 살아있음을 욕되게 하고 살아있는 자체를 모욕하는 자들은 어떻게 돼요? 그거는 죽여 없애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이 인간의 뭐가 빠졌는지 뭐가 인간의 실상이 뭔지를 알리는 방법이 이정도 얘기했으니까 여러분 예수님의 아이디어가 뭔지 아시겠지요. 이걸 다시 말씀드리면 인간이 죄를 지으면 악이 되는 게 아니고 악이 바로 뭐가 된다? 인간이 된다. 인간이 악을 인간의 선함이 노력이 돼요. 그런데 악에서 인간이라는 구체적인 형태를 뽑아내버리면 여기는 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바로 예수님께서는 악에서 인간을 바꾸는 일을 해요. 바꾸는 일. 악은 악마잖아요. 악마의 대변인이 뭐냐? 인간이 되는 겁니다. 바이러스는 생명체가 아니에요. 단백질 껍질로 되어있고 안에는 RNA 또는 DNA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자체적인 에너지를 생산하는 게 없어요. 바이러스는. 번식하면 타인의 다른 쪽에 있는 에너지를 활용하는 거예요. 코로나 바이러스는 RNA 바이러스죠. 이상해요. 죽어있는 것이 살아있는 모든 것을 죽이는 겁니다. 바이러스의 특징. 그런데 옛날 바이러스는 박테리아보다는 작았어요. 세균보다 작았는데 지금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세균보다 더 큰 바이러스가 나타났고 바이러스에 기생하는 바이러스도 발견되었어요. 인간은 가라 바이러스의 세계가 오는 거예요. 바이러스의 세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자진해서 분란의 중심 축이 되려고 했던 겁니다. 분란의 중심 축. 살아있는 것들은 가라 이제 죽은 자의 세상이 오리니. 그걸 외치고 싶은 거예요. 그걸 스모킹 건이라고 하는데 스모킹 건이라고 하는 것은 연기 나는 권총이에요. 이건 뭐냐? 범죄현장에서 누가 범인이야 할 때 어떤 사람이 권총에 연기 피우고 있으면 뭡니까? 100% 확정적 범죄 주모자라고 하는 것이 드러났지요. 그걸 스모킹 건이라고 해요. 확실성 있는 범죄 증거물, 스모킹 건. 연기가 피어오르니까. 그래서 주님께서 그걸 어떻게 합니까? 사람들은 빨리 예수님의 흔적을 지워서 빨리 여전히 산 사람끼리의 사회를 하고 싶은데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결과가 현실이 아니라 아예 십자가 자체 안에 모든 현실을 담아버린 거예요. 예수님이 거대한 바이러스에요. 세계, 세상보다 더 큰 바이러스로 삼아버린 겁니다. 십자가 사건 껍질 안에 세상 전체를 다 집어넣게 되면 그들은 누굴 죽였어요? 언약의 하나님을 죽인 사건이 되는 겁니다. 인간들이 언약의 하나님을 죽인 사건을 포장을 해놓으면 그게 무슨 사건? 십자가는 현실, 십자가 현실 외에는 다른 현실은 없습니다. 왜 십자가가 그렇게 하느냐 하면은 구약에서는 율법이 있었잖아요. 율법. 이스라엘보다 거 큰 게 뭡니까? 율법이었어요. 이스라엘 운명은 어디 달렸습니까? 율법에 달렸습니다.
신명기 잠시 한번 보겠습니다. 신명기 28장 54-57절 “너희 중에 온유하고 연약한 남자까지도 그의 형제와 그의 품의 아내와 그의 남은 자녀를 미운 눈으로 바라보며 자기가 먹는 그 자녀의 살을 그 중 누구에게든지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 적군이 네 모든 성읍을 에워싸고 맹렬히 너를 쳐서 곤란하게 하므로 아무것도 그에게 남음이 없는 까닭일 것이며” 아버지가 자식을 잡아먹으면서 그것도 아까워서 같은 식구라도 안 준다 그 말이에요. “또 너희 중에 온유하고 연약한 부녀 곧 온유하고 연약하여 자기 발바닥으로 땅을 밟아 보지도 아니하던 자라도 자기 품의 남편과 자기 자녀를 미운 눈으로 바라보며 자기 다리 사이에서 나온 태와 자기가 낳은 어린 자식을 남몰래 먹으리니 이는 네 적군이 네 생명을 에워싸고 맹렬히 쳐서 곤란하게 하므로 아무것도 얻지 못함이리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게 무슨 이야기입니까? 이스라엘을 적들이 포위할 때 먹을 게 양식이 떨어져가지고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최악의 짐승 같은 짓을 하게 하는 경우에요. 어떤 경우에?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면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인간은 어디에 소속되어있는 겁니까? 인간의 존재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얼마나 착하고 훌륭하느냐를 증명하기 위해서 태어난 게 아니고 율법이 품고 있는 복과 율법이 품고 있는 저주를 알리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대표로 율법을 받은 거예요. 율법을 받은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겁니다. 율법을 못 지키게 되면 차마 인간이 해서는 안 될 짓이다. 인간이 해서는 안 될 짓이다를 볼게요.
차마 인간이 해서는 안 될 짓이다. 못 할 짓이다. 이런 짓하면 인간이 아니다 하는 것을 왜 이스라엘이 이 짓까지 했어요. 왜 해야 되는가? 무엇 때문에? 율법 때문에 율법. 율법은 뭘 갖고 있다? 복과 무엇을 갖고 있다? 저주를 갖고 있는데 인간이 말씀을 못 지키니까 못 지키면 다른 대안 없어요. 못 지키면 저주를 받아야 되고 저주를 위해서 이스라엘은 이런 짓까지 해야 되는 거예요. 이런 짓까지. 자기 애를 먹는데 그것도 나눠주는 게 아니에요. 그것도 배고파서 나만 먹겠다는 극도의 이기주의를 보여주는 거예요. 왜? 저주를 보여줘야 되니까. 저주를 보여주는 역할이 있으니까. 그 역할에 충실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라고 할 때 아직도 자기가 흔히 말하는 인간이라는 여전히 인간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거예요. 이 세상에는 인간이 생각하는 인간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복 된 사람 아니면 저주의 사람. 인간 앞에 붙어야 돼요. 복된 존재냐? 저주의 존재냐? 두 개 밖에 없어요. 인간 자체는 성립이 안 됩니다. 왜? 인간보다 말씀이 먼저 있기 때문에. 말씀이 내용이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인간 자체적으로 나는 뭐 하고 싶다, 뭐 하고 싶다는 자기 생각이고요. 인간 자체가 없는데요. 인간은 창조에 속하는데 창조는 뭐냐? 언약의 하나님이 언약을 위해서 창조한 거예요. 천국 아니면 지옥, 이걸 보여주기 위해서 창조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창조에 관련되어있고 특히 십자가와 창조와 관련되어있어요. 십자가에는 뭐가 들어있는가? 복과 저주가 들어있어요. 인간들이 이걸 골라잡은 게 아니에요. 십자가 사건을 누가 일으켰습니까? 하나님이 일으킨 거예요.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너희들이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고 내가 알아서 하나님의 뜻에 알아서 내가 죽는다. 죽이기 싫어도 인간들은 예수님을 죽여야 되는 거예요. 예수를 죽일 때 인간들은 누굴 죽이는가? 나라는 인간을 내가 창으로 찌르는 사건이 돼야 돼요. 그래야 십자가 안에 현실 속의 인간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소속이 우리가 언약 소속이라면 우리는 날마다 내가 아니고 십자가 되기 위해서 말씀이 나를 나는 말씀을 찌르고 그 찌른 그것으로 인하여 말씀이 나를 찔러줘야 돼요. 그래야 내가 생각하는 인간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늘 확인 돼야 되니까요. 저주가 무엇인가를 위해서 율법이 필히 이스라엘을 이렇게 저주받게 하신 거예요. 따라서 이 저주받은 이스라엘은 이런 율법을 주시고 이런 말씀을 주시고 율법을 주시고 언약을 주신 하나님께 뭐해야 됩니까? 찬양해야지요. 자기 애 잡아먹으면서. 자기 애 잡아먹으면서 찬양해야지요. 아 이제야 내가 인간이 아니구나. 나 인간 뗐다. 나 인간 표 뗐다. 아무도 그런 인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예수님이 그래서 한 거예요. 죄 된 몸으로 와서. 저주가 무언가를 보여주었어요. 저주가 무엇인가. 죄 짓지도 않으면서. 저주에 합당한 저주는 주님 십자가에서 다 짊어진 거예요. 이것을 그 주님의 십자가 안에서 십자가를 믿는 자가 성도입니다. 십자가 바깥에서는 안 믿어져요. 성령께서 십자가 안에 집어넣고 믿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우리가 봐야 될 누가복음 23장 사건은 참으로 고마운 사건이에요. 이 사건 아니었으면 어떡해 어떡해. 이런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평소에 예수님에 대해서 분석하고 평가하고 예수님이 좋은 분이면 믿어주고 안 좋은 분이면 안 믿을 거야 그런 마음 자세로 예수님을 대했다는 것. 누구 하나 예외 없이 예수님에 대한 첫인상을 그런 식으로 대했다는 사실이 여기서 다 들통 납니다. 특히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분노하는 것은 예수님 빼놓고 나머지 인간들은 나름대로의 자기 것이 있어요. 자기 소유, 자기 것이 있어서 그게 자기가 되는 거예요. 내 것이 있어서 내가 되는 거예요. 내 것이 없으면 내가 안돼요. 내 안에 내가 끌어 모은 내 것이 있어요. 나의 역사, 내 가족, 내 돈, 나의 명예, 남한테 인정받는 훈장, 상장 받는 것, 남몰래 착한일 것까지 다 내 것으로 된다고요. 내 것. 이게 나에요 나. 나한테는 뭐가 있다? 나 있음, 나는 껍데기고 내 것이 있음이 나에요. 만일 내 것이 없으면 나는 뭡니까? 스스로 뭐해야 돼요? 내 것이 없으니까 나는 있을 이유가 없지요. 안에 내용물이 없는데 껍데기가 왜 있습니까. 껍데기는 마포대교 올라가가지고 교통방해 해가면서 더러운 세상, 일등만 알아주는 세상 하면서 뛰어내리려면 뛰어내리든지 뛰어내린다 해가지고 나중에 살아가지고 벌금 200만원 내고. 죽을 용기도 없어가지고. 물이 너무 차가워서. 죽는 마당에 물이 차고 물살이 너무 쎄고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있음이 아니고 뭡니까? 없음이에요. 예수님 말씀은 다 없음에서 나온 겁니다. 그러니까 있음을 유지하는 사람에게 예수님 모든 말씀 못 알아들어요.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장사 치르고 따라가겠습니다. 죽은 자는 죽은 자가 장사하고 나를 따르라. 이게 무슨 말인지 이 말을 못 알아들어요.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주님은 항상 없음이에요. 제자들 가는데 성전 세 받는 사람이 왜 너희 선생과 너희들은 성전 세 왜 안내느냐? 할 때 하필 타이밍 맞춰가지고 고기 잡아봐라. 고기 잡으니까 성전 세 한 세겔 나왔지요. 타이밍이 아주 죽여주지요. 타이밍 좋게 한 세겔 나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주님은 개뿔도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없는데 뭐는 있어요? 타이밍은 있어요. 모든 시간은 주님에게서 나왔고 주님으로 도로 회수가 되는 겁니다. 십자가 안 만이 유일한 현실이 되고 십자가 안에 율법처럼 복도 있고 저주도 있고. 율법이 바로 그거에요. 율법은 복 있고 저주 있어요. 인간의 소유가 없어요. 인간이 갖고자 하는 돈과 금전 명예 인정받는 것 자기 착한 일 이런 것 없어요. 복 있고 그 다음에 뭡니까? 저주 있고 이래요. 그리고 복 받는 사람은 정해져 있고 저주 받는 사람 정해져있어요. 문제는 복 받는 사람이 예수님 빼놓고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 예수님 빼놓고는 아무도 없어요. 인간이 자꾸 속임수를 쓰는 이유가 뭔지 알아요? 자꾸 속임수 쓰는 이유가 여러분 마술 있잖아요. 마술은 관객 없을 때 마술합니까? 안 합니까? 관객이 없으면. 타인이 없으면. 마술은 타인을 속이는 재미로 하는 게 마술이에요. 자~보세요. 손가락 보세요. 어?! 손가락 없어졌다. 있네. 이게 혼자서 하면 재미 하나도 없어요. 왜? 본인이 속임수를 아니까. 다만 나는 속임수를 아는데 남이 몰라야 재미가 나요. 남이 몰라야. 남이 얼마가 있던 나의 있음을 남한테 자랑해야 나는 타인에게 인정받는 있음이 되는 거예요. 이 세상이 있음의 세계에요.
그 블레셋에 잡힌 언약궤가 어떻게 됐습니까? 언약궤를 이동하죠. 이동할 때마다 없어져요. 악질 걸려서 없어지고 독종 걸려서 없어지고 자꾸 없어져요. 그리고 뭐가 없어지느냐? 다곤 신이 없어져버렸어요. 우리 다곤 신의 이름으로 승리했다고 좋다고 사무엘하 5장에 보면 나옵니다. 놔두니까 아침 되니까 다곤 신상이 손모가지 다 날라갔어요. 목, 손 퍽 엎어져가지고. 언약궤는 뭐?! 이러고 있고. 내가 뭐? 다곤 신은 절하듯이 엎어져가지고. 졌나이다 하고 엎어져있어요. 이상하다 이게 우연인지. 우연이고 싶어할 거예요. 왜? 언약궤는 움직임이 없으니까. 죽은 거니까. 그냥 나무상자니까. 그래서 뭐 귀신 붙었을 수도 있으니까 옮겨보니까 그 쪽 도시가 또 난리 났어요. 이쪽 하니까 다섯 고을이 다 난리 났어요. 이걸 감당이 안 된다. 감당이 안돼요. 감당이 안 되면 결별이에요. 결별. 감당이 안 되는 거예요. 지금 사두개인과 바리새인 서기관들 백성들이 누굴 감당 못해요? 예수님을 감당을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감당을 못해서 예수님을 어떻게 하느냐. 나라의 안보 차원에서 없애버리기로 했어요. 드디어 있음이 한통속으로 마음이 합해졌어요. 모든 있음은 뭐를 규정한다? 예수님만 없으면 돼요. 이게 우리의 모든 인간이 지향하는 바를 몰랐던 겁니다. 인간은 각자 자기한테만 속인다고 생각했는데 그 자기들이 모여서 뭘 이루느냐? 예수님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서 그들은 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 없기를. 예수님의 없음의 효과를 제일 무서워하는 거예요.
자, 예를 들어봅시다. 율법 줬다. 율법 하는 말이 나 지키면 복 받고 나 안 지키면 저주 받는다. 그 율법 집에 들이겠습니까? 안 들이겠습니까? 안 들이죠. 복 받는 것도 좋지만 뒤에 무슨 조항이 붙습니까? 못 지킬 경우에는 너희 집 작살난다 이게 싫은 거예요. 괜한 모험을 할 필요가 없어요. 그냥 있는 대로 소박하게 살면 되지. 굳이 율법을 수입해서 무슨 좋은 일이라고 행여나 못 지키면 안 되잖아요. 율법은 이 땅에 횡포자로 와요. 횡포자. 징벌자. 이게 율법이에요. 언약입니다 모세 언약. 횡포에 제일 크게 당했던 나라 이름이 뭐냐 하면 유월절 날 누가 당했어요? 애굽. 10가지 재앙을 받았어요. 바로 왕이 잘못한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바로 왕은 잘못한 게 없지요. 왜냐 하면은 바로 왕은 자기 소유가 있어요. 애굽 나라가 자기 소유에요. 애굽 나라가 소유이기 때문에 애굽 나라가 벌 받으면 왕의 할 일은 국민들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는 게 그 지도자의 역할이잖아요. 지도자의 역할 다 했지요. 그래서 바로 왕이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감당이 안 되니까 내보내려고 해도 하나님께서 뭐를 작동시키느냐? 바로 왕을 강퍅케 하니까 분명히 어제 저녁에 내보내기로 마음을 정했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무슨 발동을 했는지 아 기분 나빠. 살다보면 자연 재해가 있을 수도 있거든요 경험상. 이거는 우연이야. 내가 바보같이 우연을 믿다니. 그냥 우연인 자연 현상을 가지고 내가 쫄았잖아. 못 보내. 또 작살났어요. 다른 방법으로 작살났어요. “보내라!” 마술사들도 “이거는 마술이 아닙니다. 임금님 이거는 신의 오묘한 조화입니다.” “그렇지?!” “그렇습니다.” “내일 보낼게.” 아침에 일어나니까 이것들이 왕의 통치를 뭐로 보고 김정은을 뭐로 보고. 대포 가지고와서 쏴버렸어요. 내가 아니라면 아닌 거야. 자꾸 기어이 10번이나 작살나고 자기 아들 맏아들 후계자 죽고 했어요. 해서 끝났습니까? 그래서 고이 보내드렸습니까? 아니지요. 나중에 그들이 홍해 가까이 갔을 때에 임금님 정보에 의하면 그들이 갈수 없는 홍해로 갔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그래? 그러면 그동안 내 자존심 만회할 찬스가 왔네. 군대들을 보냈지요. 그때 성경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강퍅 안 하고 싶은데 자꾸 주님께서 강퍅케 해요. 해서 애굽의 남은 군인들까지 홍해 바다에 작살내게 만들었습니다. 이거는 강제 결별. 강제로 짤라내요 강제로. 복 받을 자는 저주 못 받고 저주 받을 자는 복 못 받는 겁니다. 이 기쁜 소식을 안 쓸 수가 없지요.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1. 복 받을 자는 그 어떤 경우도 저주 안 받고 2. 저주 받을 자는 그 어떤 경우에도 복을 못 받는다. 1번 소식과 2번 소식 어느 것이 기분이 좋습니까? 어느 것이 기분 좋아요? 아 심보 나온다. 심보 나오지요. 2번이 기분 좋습니까? 1번이 기분 좋습니까? 인간은 2번이 기분 좋아요. 나는 지옥가도 내 미운 놈 지옥가면 된다. 그게 왜냐 하면은 암논과 친구 요나답이 작동을 해서 자기 배 다른 여동생 있지요. 다말. 다말을 암논이 너무너무 사랑했어요. 어느 정도 사랑했는가? 비실비실 야위어질 정도로. 비실비실 말라갈 정도로 사랑했어요. 진짜 사람 잡겠어요. 사무엘하 13장 암논. 간사한 요나답 재벌1세 아닙니까. 재벌 1세하고 붙어가지고 비실비실 밥맛도 없어요. 이게 인간적으로 노리고 한 게 아니에요. 이스라엘 현실은 언약이 현실입니다. 오늘날 전 세계는 무엇이 현실입니까? 십자가가 현실이에요. 이건 믿고 자시고 할 문제가 아니에요. 그 자체가 현실이에요. 나 십자가 안 믿었으니까 저주 받을 거야 그게 아니고 우리가 저주를 못 받아요. 저주를 줘야 저주 받아요. 저주 받을 자는 복을 못 받게 되어 있고 주님이 주시는 대로 끝까지 가요. 중간에 변경이 안 됩니다. 내 손으로 수정이 안돼요. 복 받을 자는 끝까지 지옥을 구경을 못해요. 지옥 오면 지옥에 후드려패요. 천국 안 가냐. 팬다니까요. 너 집이 천국인데 왜 지옥을 와. 미쳤어?! 이러고 있다고요. 반대는 뭡니까? 너는 지옥이야. 천국 못 가. 딱 이 두 종류를 누가 일방적으로 만들어요? 십자가 지셨기 때문에 그 분의 권한입니다. 왜? 모든 인간은 십자가 사건 안에 전부 함몰되어있기 때문에.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암논 이 사람이 배 다른 누이동생을 사랑하는데 여기 이쁘다 뭐 이런 거는 이유도 안돼요. 그냥 미치겠어 그냥. 이건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겁니다. 다들 그런 사랑 다 해봤지요. 그런데 얼마나 이 사람이 사랑할 때 자신 만만했겠어요. 왜냐하면 이건 사랑이 나를 미치게 만들었기 때문에. 미치겠지요. 그래서 내가 갖고 있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요나답이 강간을 시켰지요. 병든 체 누워 있다가 다말이 오빠 과자 좀 드셔보시고 힘 한번 내 볼라고 할 때 강제로 손 잡아당겨가지고 겁탈하면 된다.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요나답이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불타는 사랑은 인간적인 행위로 이게 사랑을 결실을 맺어야 사랑은 비로소 완성이 된다는 쪽이 인간 쪽의 제시죠. 완성이 됐습니까? 딱 그러고 난 뒤에 어떻게 됐습니까? 다말이 이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해도 그건 들리지도 않아요. “암논이 심히 미워하니 미움이 더한지라” 혐오. 사랑이 혐오와 같이 있었던 겁니다. 자기는 혐오인데 혐오할 수밖에 없는데 누가 혐오합니까? 내가 너를 혐오하는 거예요. 혐오하는 이유는 있어요. 너 때문에 내가 다음에 차기 후계자 선출에서 오점이 발생된 것을 누구 탓으로 돌립니까? 네가 왜 괜히 내 사랑의 대상이 되어서 이렇게 해가지고 돌리는 거예요. 이걸 듣고 진짜 오빠 다말 오빠 압살롬이 어떻게 합니까? 암논을 죽이지요. 다윗의 나라 개판되어버렸죠. 후계자 구조가 개판되어버린 거예요. 엉망진창된 거예요. 그게 뭐냐? 다윗 언약에 속했기 때문에. 다윗 언약의 해석은 뭐냐? 왕이 책임지고 왕이 제사장 되는 거죠. 제사장 되는 거요. 일어나는 욕정을 퍼질러놓은 그 모든 결과, 그 결과는 인간이 수습됩니까? 수습이 안돼요. 수습이 안 되는 일만 우리에게 터지는 겁니다. 기분 상 일어난 일이고 인간이 수습해봐야 소용도 없는 일이에요. 그렇게 혐오할 줄은 사랑할 때는 상상도 못했지요. 가! 가란 말이야! 낙엽 던지고 해도 소용없어요. 그래서 첫째 시간 끝내겠는데요 첫째 시간 제목은 수습이 안 된다. 왜? 이세상은 무슨 세상이기 때문에? 십자가 세상이기 때문에.
10분 휴식.
강남-누가복음 23장 18절 (영문 없는 구원) 240618b-이근호 목사
첫째 시간에서 중요한 것은 십자가의 결과로 세상이 만들어진 게 아니고 일찌감치 이 세상은 십자가 안에서 일어났던 겁니다. 십자가 안에서 창조된 거예요. 십자가 안에서 창조되었다는 이 말은 이렇게 하면 제일 쉬워요. 인간은 그 어떤 경우에도 가능치 않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예수님이 하셨기 때문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죄 지어서 구원, 아니죠. 강퍅해서 구원, 아닙니다. 영문도 모르게 구원, 맞습니다. 영문도 모르게 구원받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뭐냐? 이걸 가지고 ‘회개’라고 합니다. 회개라는 것은 선과 악 그 위에서는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생명나무. 생명나무 보니까 선과 악하고 그 자체에서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선과 악, 내가 착하게 산다고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선과 악 그 이상의 범위를 생명나무 범위로 보는 걸 가지고 회개라고 이야기해요. ‘회개’. 그러면 날마다 회개한다는 말은 뭡니까? 날마다 위에서 보는 생활을 날마다 회개라고 하지요. 그 회개의 경우가 누가복음 15장 16장에 잘 나와 있는데 15장에 보면 제일 먼저 나와 있는 것이 양, 잃어버린 양 특징이 뭐냐 하면은 영문도 몰라요. 본인이 “아이고 우리 목자!” 하고 찾아 다녔어요? 자기 혼자 좋다고 다니다가 “그런데 친구들 다 어디 갔지? 99마리 다 어디 갔지? 나만 남았네?” 이러고 있을 때 누가 찾아 왔어요? 친구들이 왔습니까? 야! 호철아 하고 찾아왔어요? 아니죠. 누가 찾아왔어요? 목자가 찾아왔어요. 목자가 뭘 놔두고 찾아왔습니까? 99마리 양을 두고 친히 나 하나 찾기 위해서 온 거예요. 찾으니까 비로소 자기는 뭘 알아요? ‘아하! 내가 잃어버렸구나’ 라는 사실을 그제서야 발견하는 겁니다. 그제사. 양은 잃어버렸지만 잃어버린 양 조차도 주님의 권력 안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그 양은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가능한 것은 주님만 가능하게 되어있어요. 주님만.
또 동전. 동전이 무슨 이성이 있어요. 주인이 갖고 나가다가 또르륵 해가지고 책상 밑에 떨어졌는지 의자 밑에 빠졌는지 모르죠. 찾는 데는 누가 찾습니까? 낑낑 동전이 주인을 찾습니까? 누가 찾아요? 밤새도록 찾는 것은 주인이 찾죠. 답답해도 주인이 답답해요. 우리가 답답하면 안돼요. 이게 무슨 베짱인지 모르겠지만 찾아도 주님이 찾아내지 우리가 주님을 못 찾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악해지는 게 아니고 인간 안에서 악을 뽑아졌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어디 가도 인간은 악해요. 인간은 선한 것이 없으니 하나도 없어요. 인간에게는. 인간 본성에는 뭐가 있습니까? 제발 예수만 없었으면 좋겠다는 그 본성. 다시 말해서 인간은 왜 구원받지 못하느냐 하면은 인간 전제가 뭐냐? 있음에서 나오거든요 있음.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자아가 있고 자아는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자기 뜻이 있고. 인간은 있음에서 나와요. 없음을 못 느껴요. 내가 여기 있는데 없다 이게 말이 돼? 거울 비춰 봐 내가 있잖아. 거울 볼 때 내가 한번 안 비춰봐야 아이고 이게 귀곡산장인지 귀신인지 이거 느껴봐야 정신 바짝 차리지요. 정말 신기한 것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신기한 게 아니고 예수님 모습이 비췄다면 제발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자기가 성도라고 착각해가지고 또 영화 찍을라. 제2의 파묘 나올 수도 있어요. 양과 동전 이야기를 합한 것이 세 번째 탕자 이야기에요. 아버지는 탕자를 기다렸지만 탕자는 아들로서 귀가하지 않습니다. ‘그저 종이라도 되었으면’ 아들에게는 아들 의식이 없어졌어요. 벌써 자기는 아들 자격이 없어요. 그래서 아무도 나를 찾을 필요가 없어요. 이거는 내가 구원받겠다는 그거는 나한테 너무 시건방진 생각이에요. 그걸 가지고 회개라고 합니다. ‘회개’. 내가 아버지 앞에 아들?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왜 아들이야 내가 뭐했다고 아들인데. 나는 아버지를 버린 자야. 아버지, 하나님을 버렸어. 나는 나 스스로 하나님 없이 살겠다고 작심을 한 그것이 나한테 친근해. 그 마음이 익숙해졌어요. 그게 자연스러워요.
있음의 세계에 통하는 것은 있음의 세계 뭡니까? 인간이 있잖아요. 있음과 있음의 세계에서 엮어주는 것은 뭐냐? 윤리와 도덕과 법입니다. 법에는 관행법, 관습법, 풍습 과거 내려왔던 그러한 상식 다 포함 돼요. 윤리, 도덕, 법 이것이 서로 묶어주죠. 우리는 있다. 그래서 윤리 있고 도덕 있고 법 있다. 바르게 살기 있다. 이게 있음의 세계에요. 없음의 세계는 오직 있는 것은 뭐 밖에 없는가? 십자가 밖에 없어요. 십자가 더하기 십자가 더하기 십자가 더하기 십자가 더하기. 그게 어떤 식이냐 하면은 아까 이야기한 시간은 누가 가져갔습니까? 십자가에 예수님이 달림으로서 있음의 세계에서 예수님의 세계가 떨어져나갔죠. 떨어져나가면서 인간이 있음의 세계에 있던 시간들 속에 그 다음부터 뭐가 오느냐? 시간이라면 시간이 만약에 두꺼운 책이라면 내가 만약에 여고생 2학년이다. 그럼 가을에 낙엽 막 떨어지잖아요. 그럼 괜히 좀 슬퍼져 눈물 흘리면서 낙엽을 주워요. 이쁜 낙엽 또는 가끔 있는 네잎클로버. 해가지고 그걸 바짝 말려가지고 비닐에 해가지고 책갈피 해가지고 책갈피마다 다 집어넣어요. 추억의 책장을 넘기며. 공부는 하나도 안하고 은행잎 이것만 집어넣은 거예요. 모든 시간 그 틈 사이에 전부 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다 들어가는 것, 그게 회개의 삶이고 그게 바로 없음의 세계에요. 있음이 그대로 있고 있음을 쪼개는 거예요. 십자가로 쪼개는 거예요. 그게 바로 회개하는 성도의 삶입니다. 인간은 윤리 도덕 법이 있는 이유가 이것이 우리 개인을 힘들게는 하지만 개인의 존엄성을 높여주는 계기도 되지요. 너 법 안 지키지? 나 법 지켰다! 이러거든요. 법이 고맙고 도덕이 고맙고 윤리가 고마운 거예요. 왜? 나의 있음을 계속 있어도 당연해. 있을 가치가 있다고 우리에게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그래요. 단군신화 몰라도 배달의 기수 할 수 있습니다. 배달하는 사람이 꼭 단군신화 그거 꼭 알아야 됩니까? 예수님이 누구건 관계없어요. 예수님을 뭐로 바꾸면 돼요? 법으로 만들고 예수님의 모든 이야기 도덕으로 바꾸고 예수님의 모든 일을 착한 윤리로 바꾸면 나의 가치는 어떻게 되느냐? 더 높아지지요. 이게 바로 기존 교회가 하는 짓거리 아닙니까.
그들이 모여서 무슨 사건을 만들었습니까? 백성들과 장로들과 그리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거기 본디오 빌라도까지. 본디로 빌라도가 수집하는데 그들이 왜 따라올 수밖에 없었느냐 하면은 이것 때문에 그래요. 마태복음 11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논쟁하고 그들이 지니까 가이샤를 동원시켰어요. 그 시대에 대빵이 누구냐 하면은 로마황제 가이샤였어요. 예수님을 기어이 흔들기 위해서 누가복음 23장에도 나오네요. 23장 2절에 “무리가 예수를 끌고 가서” 고소를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우리가 이 사람을 볼 때 우리 백성을 미혹하여 가이샤에게 세금 바칠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여기 가이샤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했다고 그러한 죄목을 일부러 부각시키는 이유가 뭡니까? 그 당시에 대빵은 누구냐? 가이샤에요. 그러니까 이거는 그들이 하나님을 모독해도 가이샤에게 빌빌빌 아부를 다하고 있는 겁니다. 아부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뭐라고 뒤집어씌우느냐 유대인의 왕이라고 스스로 이야기했다는 거예요. 그 당시에 왕은요 로마시대에 복속기관이기 때문에 왕은 로마 원로원에서 지명해야 돼요. 인가를 받아서. 인가를 받아서 유대의 왕이 되지요. 왕이 아무나 되는 게 아닙니다. 안 그러면 민란이 일어나요. 국가 쿠데타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왕이라는 것은 이미 로마 권세가 왕을 정하는데 예수라는 작자를 자기가 스스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이런 고소를 하는 이유가 뭡니까? ‘예수 너는 이제 죽었어’ 이런 뜻이거든요.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다. 자꾸 로마 쪽에 심기를 건드려줘야 예수님을 사형시키는데 유리하게 작용한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들이. 아부쟁이죠 결국은.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세요. 오늘 본문에서 빌라도가 세 번씩이나 심문을 하는데 자기가 두 번하고 헤롯 왕한테 심문을 했는데 22절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짓을 했느냐 그를 죽일 죄를 찾지 못했다” 지금 예수님 빼놓고 예수님은 죄인으로 몰아놓고 자기들끼리 지금 논쟁이 벌어졌어요. 과연 예수님을 죽일 가치가 있느냐? 없다고 하는 것이 빌라도입니다. 왜? 빌라도는 예수님마저 자기 밑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위협적인 요인이 아니에요. 절대 위협적인 요인이 아닙니다. 있으나 마나예요. 있어도 예수님은 없는 존재예요. 그러나 유대인들은 뭡니까? 예수님이 만약 있어버리면 자기들은 하나님과 관련되어있다고 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와버리면 자기가 없는 존재가 돼요. 근원적으로 인간에게 제일 중요한 문제가 뭐냐 하면은 내가 여기 있는데, 누군가 내가 여기 있어도 없다고 할 때 인간은 근원적인 분노가 일어나는 거예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내가 있는데 없다는 거예요. 이게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 하면은 사람이 믿을 수 있는 한계는 뭐냐? 없는 걸 못 믿어요. 있는 것만 믿어요. 그나마도 유대 백성이 있으니까 하나님이 계신 거예요. 그나마도 바리새인이 있고 그나마도 헤롯이 있고 성전이 있으니까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의 백성 맞는 겁니다. 비록 로마의 압제에 있지만.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하느냐. 뭘 헐어버려라? 성전을 헐어버려라. 또 예수님은 뭐다? 유대인의 왕이 오신다. 내가 왕인데. 내가 메시아인데. 메시아는 구름 타고 오신다. 내가 메시아라니까 내가. 세상 권세? 내가 세상보다 더 센데. 그 세 가지를 사람들이 못 받아들이지요. 그걸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두 번째 뭐라고 했습니까? 첫 번째가 유대인의 왕으로 왔다고 했지요. 유대인의 왕으로. 메시아로 왔다는 거예요. 두 번째가 구름타고 오고 세 번째가 권세. 이 땅의 어떤 권세도 이겨낼 수 있다 했잖아요. 그래서 빌라도한테 이해가 안되는 게 저 광신도, 자기도취에 빠진 사람 그게 뭐 그리 굳이 그걸 없어야 될 이유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없애려고 했어요? 왜 없애려고 했습니까? 그냥 살려둬도 되잖아요. 첫 번째가 성전이었다 성전. 빌라도한테 대들고 세 번째가 내가 유대인의 왕이다. 성전을 없애야 된다. 헤롯이 점검을 했어요. 헤롯이 예수님을 심판할 때 어떻게 했느냐 하면은 진짜 기적을 행한다는 소문만 무성한데 진짜 소문대로 기적을 본인 눈으로 보고 싶었던 거예요. 사람은 있음을 믿습니다. 없음은 안 믿어요. 내 눈으로 기적 행하는걸 한번 볼까 했는데 예수님은 헤롯한테 어떤 기적을 안 했거든요. 기적을 안 했으니까 사이비니까 헤롯 입장에서도 죽일 필요까지는 없다고 하는 거예요. 본디로 빌라도도 마찬가지고. 여기서 오늘 강의의 제일 핵심인 부분이 나옵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뭐를 제안했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 살아있어도 없는 거고 죽어도 없는 거고 굳이 죽이고 살리고 할 필요 없을 정도로 제발 내가 예수를 무가치하게 보는데 당신들도 나처럼 예수님을 아무것도 없는 당신 기억에 남겨둘 필요 없는 존재로 좀 해줬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어떤 제안을 했느냐 하면은 빌라도가 나름대로 머리 쓴 게 그 당시에 가장 악한 살인강도가 있었어요. 바라바. 바라바가 있었어요. 바라바는 감당 못할 정도로 악하죠. 명절에 한 사람 풀어주는데 바라바하고 예수님해서 너희들에게 해를 줄 수 있는 바라바, 진짜 또 사람 죽일 바라바. 흉악한 죄인 바라바하고 예수님을 아무리 봐도 죄가 없어요. 그냥 종교에 관한 일이기 때문에 죄가 없어요.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여야 될 이유가 자기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직격탄을 날렸지만 본디오 빌라도 자기는 로마인이기 때문에 이거는 남의 종교에 관한 거예요. 자기와 별 관계없으니까 별 가치 없지요. 누굴 풀어줄까? 이렇게 하니까 바라바 아니고 예수님을 풀어주라 이렇게 나올 줄 알았는데 예상 밖으로 바라바를 풀어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한번 확인 차 물어요. 그럼 이 예수는 어떻게 할까? 이거는 완전히 격동이 되가지고 죽이소서! 죽이소서! 죽이소서! 라고 했어요.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야 되지요? 도대체 예수님이 그들 내부에 뭐를 건드린 겁니까? 바라바는 이미 사형이 결정되었지요. 없이 될 사람이에요. 없는 사람이에요. 바라바는 없는 사람 될 사람과 지금 안 없애고 살고 싶은 예수님 제시했을 때에 바라바가 하는 이런 것은 뭐냐 하면은 인간 정치의 한계를 보여줘요. 정치의 한계. 인간 생각의 한계를 보여주는 거예요. 한계인데 있음 세계 안에서 있음 세계가 스스로 감당이 안 되는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은 바로 대신 죽으심과 똑같은 결과가 뭡니까? 대신 살아났음. 살아났음인데 바라바는 뭐냐? 영문도 모르게 대신 살아남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이 일이 반복해서 일어나는 결과가 오늘날 성도입니다. 이게 오늘날 성도에요. 십자가에 일어났던 십자가를 반복하니까 십자가 사건의 반복을 통해서 바라바 같은 인물들이 계속 생산되면 그 생산이 유일하게 성도가 되는 방식, 그 외에 다른 방식은 없습니다. 다른 방식은 없어요. 그러면 주님께서 한 작업은 뭐냐? 유대인도 있음이고 빌라도도 있음인데 있음과 있음 사이에서 누가 우세하다? 예수는 아무것도 아니야 보다 뭐가 우세하다? 예수를 죽이소서가 절대적으로 우세하게 되어있어요. 다말이 얼마나 이쁘냐. 지금 이쁜 게 문제가 아니에요. 키가 크고 몸매가 좋고 그게 문제가 아니고 그냥 미치겠어 좋아서. 이거는 있음의 세계에서 감당을 암논이 감당을 못하는 거예요. 그런데 겁탈하고 난 뒤에 있음이 또 감당을 못해요. 자기 누이동생 때문에 내 인생에 오점이 났다는 그것이 그 생각하면 미워서 미칠 것 같아요. 이것도 감당이 안돼요.
그래서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이방 나라 빌라도가 보여주는 게 아니에요. 있음의 절정은 십자가 사건의 있음의 절정은 바로 권력은 빌라도가 쥐고 있지만 바로 유대인들이 보여주는 거예요. 유대인들이. 율법을 알아먹는 사람들. 율법이 우리에게 이미 있는 사람들. 하나님의 법을 아는 사람들. 여호와가 존재한다고 철썩 같이 믿는 그들이 누굴 죽이는 거예요? 여호와를 죽이고 있어요. 왜? 왜 죽입니까? 자기 자신이 없음이 되지 않기 위해서. 자기 자신이 계속 가치 있음의 가치를 유효하게 가져가기 위해서 필히 조건이 뭐냐? 예수가 없어야 내 가치는 사는 겁니다. 예수님이 없어야 나의 의는 존속되는 겁니다. 그동안 율법 지킨다고 퍼부은 투자, 투자금, 율법 지킨다고 내가 희생하고 양보했던 것, 나의 희생, 나의 순교, 주님께 대한 기도, 헌금, 전도 이거 어쩔 건데? 이거 어떻게 할 거예요? 이걸 그냥 내일 아침에 쓰레기통에 집어넣을까요 이걸? 사람이 소유가 없으면 뭐라고요? 내가 없어지는데요. 소유를 인정하는 신이 무슨 신입니까? 바알 신이에요. 블레셋을 작살냈던 그 언약궤는 예수님이 되고 그 예수님이 들어왔던 예수님은 뭐가 돼요? 블레셋이 되는 거예요. 바알 숭배자, 여호와의 이름에 바알 숭배자가 되는 거예요. 지금도 한국교회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이야기 나오게 되면 그들은 ‘죽여버리소서’에요. 하나님이여 저 십자가 증거하는 거 죽여버리옵소서. 왜? 이유는 단 한 가지. 무엇의 가치가 없어지기 때문에? 내 가치가 없어지죠. 내 속에 궁극적으로 마지막 소유된 것이 내 가치에요. 내 존재의 의미라고요. 존재의 의미. 아시죠? 존재의 의미. 끝까지 애인의 사진 붙들고 조금만 기다려줘 하는 것. 기다린들 뭐합니까. 여기 또 하나의 본문에 보면 가관이 또 나옵니다. 여기 23장 27절부터 28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아멘. 왜 웁니까? 왜 울지요? 사실은 네 자신의 있음을 가지고 울어라. 있음 자체가 이게 모든 것이 지금은 슬퍼서 울지만 그것은 네 있음의 기억에서 나온 것. 기억이란 사랑보다. 뭐 하나 준비했습니다.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노래하나 듣고 가실게요.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내가 갑자기 가슴이 아픈 건
그대 내 생각하고 계신 거죠
흐리던 하늘이 비라도 내리는 날
지나간 시간 거슬러 차라리 오세요
내가 갑자기 눈물이 나는 건
그대 내 생각 하고 계신 거죠
함박눈 하얗게 온 세상 덮이는 날
멀지 않은 곳이라면 차라리 오세요
이렇게 그대가 들리지 않을
말들을 그대가 들었으면
사랑이란 맘이 이렇게 남는 건지
기억이란 사랑보다 더 슬퍼
어떻게 기억이 사랑보다 더 슬픕니까? 이유가 뭡니까? 그것은 인간은 인간이 있음이죠. 내가 있음이죠. 내가 있음이 창조를 만들었기 때문에. 창조를. 두 가지 환경이 있는데 뭐냐? 첫 번째 그냥 주어진 환경이 있고 두 번째 내가 만든 나의 삶의 환경이 있어요. 나의 삶의 환경에서 무엇이 나오는가? 눈물이 터지는 거예요. 눈물이. 나의 삶의 환경은 시간이 내 시간으로 전부 다 바뀌어져요. 내 시간으로 바뀌어지면 그 시간에 투자한 나의 고통, 희생, 아픔, 슬픔 그리고 기뻤던 것 좋았던 것이 기억에 누적이 되고 그 기억은 바로 내 삶의 환경에 오점이 생긴다든지 흠집이 생겨버리면 그 흠집이 생긴 것의 안타까움, 내 가치의 손상, 내 가치의 손상은 뭐냐? 내 창조의 나의 창조세계의 파괴와 무너짐과 죽음을 의미하고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분노의 눈물을 흘리게 되어있다 이 말이죠. 내 자식이 어떤 자식인데 이태원 특별법을 만들어라! 세월호도 마찬가지고. 세월호 사업, 우리는 사업까지는 안 바라지만 특별법 해서 2억 달라 이런 식으로 나올 수 있거든요. 내 자식이 죽었으니까. 너도 네 자식 죽어봐라 안 슬프겠나?! 내 자식 죽었다고 데모한다고 시에서 없애버리고 이렇게 하는 이유가 뭐에요? 환경은 따로 있는데 환경은 누구 환경입니까? 이 환경은 무엇이 중심이다? 십자가 속에 주 없음의 세계에요. 없음의 세계로 드러내기 위해서 있는 인간들을 창조한 거라고요 주님께서. 하나는 저주, 하나는 천국 만드는데 이 주어진 환경의 내막은 모르고 인간은 그 안에서 마귀와 단짝이 되어서 나의 삶의 환경을 따로 만든 거예요. 따로. 참 예수님 훌륭한 분, 예수님 좋으신 분인데 쯧쯧 안됐다. 좀 참지 왜 할 소리 안 할 소리까지 다 해가지고 로마 당국자 왜 건드리고 바리새인들 왜 건드리나.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 믿는데. 너희 애비는 악마라고 왜 그런 욕까지 하시느냐. 성전에 들어가가지고 이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야 하고 엎어버리고 왜 그런걸 해. 좀 참지. 그냥 병이나 고치고 귀신 쫓아내고 얼마나. 하고 그 아주머니들이 자식 사랑하듯이 그렇게 사랑하면서 막 슬퍼서 우는 거예요. 예수님은 그들의 자기 삶의 환경 가운데 좋은 의미로 가치로 함께 했지요. 예수님은 우리 편, 나는 예수님 편 그렇게 생각했던 겁니다. 어때요? 오늘날 교인들하고 비교해보세요. 교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지난 주일날 설교인가? 기생 라합 이야기. 기생 라합이 누구를 보호했지요? 자기 동족을 파괴한 자를 기꺼이 보호했잖아요. 나를 파괴한 분을 보호하는 거예요. 그 껍질 역할이 성도의 역할이에요. 주님이 없어진 세계의 주인공이 주님이에요. 나로 하여금 나의 끈질기고 지독하고 깨어지지 않는 나의 삶의 환경을 유일하게 부술 수 있는 분이 주님밖에 없습니다. 날마다 십자가로 책갈피 해가지고 집어넣어버리면 이 시간이 나를 위한 시간은 일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먹든지 마시던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시간인데 우리는 먹든지 마시던지 나만의 세계, 행복한 세계를 구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 삼위일체 다 동원시켰잖아요. 나만 잘되기 위해서 그랬잖아요. 아까 신명기 28장에 저주받은 모습 봤지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합니까? 실질적으로 어떻게 해요? 실제적으로 하나님께서 아랍 나라와 바벨론 군대를 보내가지고 완전히 포위하게 해가지고 어떻게 해요? 먹을 게 없어서 자기 애를 먹는데 그것도 사이좋게 인간적으로 나눠주는 게 아니고 자기 혼자 먹어요. 자기만 살기 위해서. 그게 여유 있을 때는 내가 그럴 줄 몰랐지요. 내가 그렇게 나만 지독한 사랑쟁이인 줄 몰랐지요. 남을 사랑하는 줄 알았지요. 남을 사랑하니까 제발 예수님이 우리한테 좋은 소리하고 축복하고 위로해주면 이 좋은 성품을 어디다 써먹겠어요? 아낌없이 주님께 써먹을 용의가 되어있다는 것이 오늘날 교인들의 한결같은 주장입니다. 자기를 파괴하러 온 분이라는 것을 왜 생각을 못해요.
아까 신명기 28장에 저주에 보면 뭐가 없느냐 하면은 온유가 없다했어요. 심지어 있다 해도 그게 다 들통 나요. 없는 것으로. 그런데 민수기를 한번 볼께요. 민수기 12장에 보면 모세가 구스 여인을 취했어요. 모세가 결혼을 또 했는지 아내가 죽고 난 뒤에 했는지 그건 모르지만 구스 여인을 취했어요. 십보라 이후에.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는 그건 모르겠지만 또 결혼했는데 3절에 보세요.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라고 되어있지요. 유일하다 온유함이. 자, 온유함이 뭐냐? 온유함은 성령의 열매 중에도 온유함이 있는데 온유함이 뭐냐? 온유함이라는 것은 나의 가치를 일체 인정하지 않는 게 온유함이에요. 나의 가치를.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사랑에 대해 쭉 나와있잖아요. 그걸 한마디로 말해서 뭡니까?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고 했어요. 그걸 가지고 ‘선물’이라고 했거든요.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게 아니라 선물이에요.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나를 아예 없는 존재로 간주하는 방법은 뭐냐? 주님 나라가 이 땅에 없는 세계에요. 없는 세계에요. 있음이 없는 세계를 저주로 폭파하시는 것이 주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뜻입니다. 너는 죽었어 이거거든요. 요한계시록 6장에 보게 되면 16절에 보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하나님의 진노를 커버하는데 우리로서 커버할 길이 없고 좀 든든해 보이는 게 뭡니까? 그 두꺼운 산과 바위라도 덮으면 하나님의 진노를 약간은 덮히지 않을까 할 정도로 하나님의 진노가 완전히 확실하고 투명하고 노골적이고 이거는 막아낼 재간이 없어요. 모세는 그걸 시내 산 위에서 직접 경험했어요. 모세가 자기 가치를 내세울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모세는 뭐라고 하느냐? 모든 있는 자들은 없는 세계에서 자기 가치를 내세울 수 없음을 모세는 알기 때문에 모세는 온유한 사람이에요. 다른 말로 해서 온유하지 않으면 구원 못 받은 사람입니다. 온유하지 아니하면. 모세가 시내 산에서 알아서 온유했다는 말은 모세는 그 시내 산에 봤던 그 없음의 세계가 율법 안에 응축이 되어서 이미 이스라엘 백성 안에 이미 들어와버린 거예요. 들어와버리니까 모세는 기겁을 하지요. 백성들이 함부로 대들고 자기 누나가 여자 없어서 흑인여자하고 하느냐 이렇게 욕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식으로 한 것에 대해서 기겁을 했지요.
미리암이 어떤 여자입니까? 모세 누나지만 출애굽 할 때 찬양 지휘한 사람이에요. 선창해서 찬양해가지고 백성들 따라 해서 모세 하는 과업에 협조가 대단한 거죠. 원래 목사 가정에 목사 사모들이 협조가 많잖아요. 협조 많으면 뭐합니까? 지옥 가는데. 협조는 하는데 본인은 지옥가요. 협조한 이유가 뭐에요? 자기도 밥 먹고 살아야 되겠다는 거예요. 여느 아내들처럼. 당신이 잘 되야 내가 호강하잖아. 그러기 위해서는 교인들 앞에서는 뭘 보여야 돼요? 신앙 개뿔도 하나도 없으면서 신앙 있는 척을 해야 되겠지요. 그래서 견디다 견디다 못할 때는 어떻게 하느냐? 김건희 되는 거지. 명품 갖고 와. 차라리 그게 마음이 편해. 아닌 척 할라고 하니까 도저히 감당이 안 되가지고 노골적으로. 다른 큰 교회 연봉 2억 받는데 나는 1억 받으니까 괜찮잖아. 약간 위로가 되지요? 아까 있음과 있음 사이에는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윤리와 도덕과 법. 관습, 상식 이런 게 통해요. 그걸로 자기 의와 자기 가치를 그나마 커버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십자가는 들어가면 안돼요. 십자가 들어가면 온유하던지 아니면 자기 새끼 잡아먹던지. 인간도 아니던지 둘 중에 하나 해야 되거든요.
아까 노래 가사를 보면서 기억이란 사랑보다 더 슬퍼. 슬픈 이유가 남이 나를 슬프게 해서가 아니라 내 있음 안에 슬픔이 이미 내장되어있는 거예요. 그러면 사랑 좋은데 기억이 사랑보다 더 슬프냐? 사랑은 타인이 사랑할 때 내 기억이 착각을 한 거예요. 사랑은 오래가지 않아요. 한 순간의 착각이었어요. 사랑으로 왔다가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왔다가 사랑이 처음에 왔던 그 태도가 유지가 안 되고 어느 정도 나를 갖고 놀았다 싶으니까 슬슬 본전 뽑는 거예요. 서로가 마찬가지에요. 서로가. 인간은 자기 사랑에 미쳐있기 때문에 남에게 줄 사랑이 인색한 법입니다. 언제까지 사랑이 오래가지 않아요. 백만 한 번 백만 두 번 그거는 밧데리고 백만 번까지 가지도 않아요. 사랑은 남을 차지하기 위한 하나의 수법 수완에 불구합니다. 자기 사랑은 인간은 빠지지 않아요. 왜? 있음의 가치, 나 있다는 가치는 내가 늘 확보해야 되니까. 그래서 나의 가치에서 가장 최후의 적이다, 나를 힘들게 한다. 그게 뭐냐? 예수님의 십자가죠. 그 십자가 사건 안에 뭐가 있느냐? 여인들이 예수님 십자가 지고 가시는 모습을 보고 측은해서 우는 것이 십자가 안에 들어 있는 요소 중에 하나가 됐지요. 그 요소가 오늘날 십자가 사건이 반복되면 우리 안에서 터져 나오겠습니까? 안 터져 나오겠습니까? 터져 나오지요. 나 예수님 불쌍해서 못 보겠어. 이런 거. 네가 더 불쌍해 네가! 누가 누굴 걱정해. 네 걱정해 네 걱정. 예수님 위해서 울어주면 뭐 아이고 마음이 착하고 온유하고 칭찬할 줄 알았어? 완악해 너는! 주일날 설교 이야기했지만 다시 한번 써봅시다. 똑같은 말이에요. ‘온유함이 없으면 성도 아니다.’ 똑같은 말이 뭐냐? 강퍅함이 없으면 성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성도냐가 아니라 온유, 강퍅을 누가 두 양면을 다 까발려주느냐. 우리 안에서 다 끄집어내주느냐. 율법의 완성인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 덩어리, 사건은 십자가 죽음 뿐만 아니고 거기서 벌어졌던 거기 관여했던 모든 요소들이 십자가 사건 일어날 때 함께 동반해서 같이 반복해서 일어나죠.
그러면 거기서 처방전, 사람마다 처방전이 다르잖아요. 너는 예루살렘 여인 역할, 너는 바리새인 역할, 너는 본디오 빌라도 역할. 본디오 빌라도 역할 누가 하느냐 하면은 재벌들. 교회 와서 우리 교회 고아원 도와주고 어려운 사람 도와주는데 크리스마스 때 좀 도와주세요. 야 어느 교회에서 왔단다 조금 줘서 보내라. 얼마요? 20억 보내. 껌 값이다. 해 놓고 빨리 처리해. 세금공제 들어가요. 사회 복지 이름 내고. 그러니까 예수님이 중요하지 않아요. 자기 있음이 중요하니까. 그건 누구 역할? 본디오 빌라도 역할. 내가 예수님 일 하는데 교회 일 하는데 얼마나 도와줬다고. 이게 본디오 빌라도 역할이에요. 그러면 여러분 머리 좋으니까 아시겠지요. 바리새인 역할은 누가 하는 거죠? 바리새인 역할 누가 하는 겁니까? 당회장 목사가 하는 거죠. 당회장 목사. 왜? 교회가 있잖아요. 내 교회. 내 교회가 있잖아요. 여기 뭐 교회 전도사도 계시고. 내 교회가 있다고요. 내 교회.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준 내 교회가 있다는 거예요. 누가 누구한테 맡겼어요? 맡긴 적 없어요. 내가 맡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맡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어떻게 되겠어요? 내 교회 없어지면 누가 없어져요? 내 가치가 없어지잖아요. 내가 목자가 아닌가? 내가 신자 아닌가? 내가 신자 아니면 안 되고 목자 아니면 안 되는 거야. 그럼 내가 목자고 신자인 걸 뭐로 증명해야 돼요? 내 교회 교인 수가 불어나야 내가 진짜 목자다운 목자인 것이 증명이 될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방해되는 것은 짤라내야 되는데 아직 안 짤리고. 같은 한통속인가. 이게 십자가 사건이 터져버리면 제일 먼저 반응이 뭐에요? 온유의 반응입니까? 강퍅의 반응입니까? 제일 먼저 강퍅이 와요. 강퍅이. 제가 주인하겠다잖아요 저 사명감 있어요. 이런 식으로 앙탈을 부리지요. 그런데 그게 뭘 죽이는 거예요? 바로 이게 주님을 사랑한 게 아니고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들통날 때 그게 바로 선과 악이라는 수준을 뛰어넘는 그걸 내려다보고 있는 생명나무의 안목이에요 그게. 아 주께서 나를 이런식으로 주의 일을 양쪽다 하게 하시는구나. 겸하여서 복이라는게 없어요. 그런데 어딜 거쳐서 복되게 해요? 저주를 경유해서 저 저주의 값을 치루면서 함으로서 예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제2, 제3의 바라바가 되는 겁니다. 오늘 제목 정했어요. ‘영문없는 구원’.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도대체 성경을 우리가 그동안 어떻게 보고 해석해왔었습니까.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나 잘난 것만 끄집어내고 나 신자라는 것만 끄집어내는 목표로 봤는데 이런 목표와 목적을 주여 죽여주시고 파괴시켜 주셔서 영문도 모르는 체 이미 구원받았기에 십자가 사건의 반복성만 증거하는 그 감사와 즐거움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