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십자가의 원수

아빠와 함께 2024. 6. 18. 19:01

강남-누가복음 23장 12절 (십자가의 원수) 240604a-이근호 목사



오늘은 누가복음 23장 1절입니다.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빌라도 뒤에 누가 있느냐 하면은 가이사가 있습니다. 로마 황제입니다. “갈릴리 사람이냐” 묻고 7절에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라고 되어있지요. 빌라도가 총독은 총독인데 갈릴리 지방의 통치자는 아니에요. 로마에서 유다 나라를 분할해서 통치했습니다. 원래 헤롯이 있었는데 헤롯 아켈라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정식으로 왕이 되고 싶어했어요. 로마에서 땅을 유대 나라 분해할 때에 1/2짜리 왕, 1/3짜리 왕, 1/4짜리 왕. 왕의 권한을 1/2, 1/3, 1/4 이 정도로 줬습니다. 다 준 게 아니에요. 분봉왕이라는 게 바로 권한이 많이 압축이 되고 축소가 된 왕입니다. 로마가 군대를 보내서 땅을 접수하고 난 뒤에 어떻게 통치할까요?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통치하겠습니까? 골치 아프겠지요. 통치할 때 치안과 세금 문제는 빼가고 나머지는 너희들끼리 평화롭게 살아라 하고 그 지역에 자체적인 지도자한테 땅을 맡겨버립니다. 땅을 맡겨요. 땅을 맡기되 그 권한을 다 주지는 않아요. 까불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요.


그런데 아켈라오 같은 경우에 땅을 받아놓고 1/2, 1/3 이게 맘에 안 들어서 황제한테 부탁해가지고 제대로 왕 노릇하게 해달라 이렇게 했더니만 유다 백성이 그 아켈라오 아버지가 진짜 유대인 혈통이 아니에요. 헤롯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헤롯이라는 사람은 헤롯의 뿌리가 위로 올라가면 뭐냐 하면은 에서에요. 에돔. 에서 위에는 이삭이 되겠지요. 이삭이 리브가가 40년 동안 애기 없다가 40년 만에 낳은 아들이 쌍둥이를 낳은 거예요. 에서와 야곱을 낳은 거예요. 우리 보기에는 쌍둥이니까 형제간이니까 사이좋게 잘 지내면 되는데 하나님께서 사이좋게 못 지내게 만들었어요. 운명적으로. 그래서 에서는 야곱의 지배를 받아요. 종이 되고 야곱은 에서의 주인이 되고. 하나님의 복이 어떤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주인이 되고 하나님의 저주가 어떠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종이 된 겁니다. 그러니까 에서와 야곱, 야곱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지요. 야곱이라는 나라, 에서가 나라를 만들면 에돔, 야곱의 나라 된 이스라엘 두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은 하나님이 준비한 복과 저주가 어떤 식으로 내용이 다른가를 보여주는 그러한 환경으로 사용한 거죠. 이 역사 자체를 하나님의 언약이 품고 있던 복과 저주가 어떤 내용으로 차이 나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언약이 갖고 있는 복과 저주 내용이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복과 저주와 아무 상관이 없어요. 교회가 주의해야 됩니다. 복 주세요 할 때 그 복을 하나님은 생각한 적도 없고 저 사람 저주받게 하옵소서 한다고 그 저주가 언약적인 저주가 아니에요. 대구 강의에서 제가 초반에 언급한 것을 다시 언급해 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있을 때 지옥 아니면 천국 갑니다. 갈 때 사람들이 내가 나쁜 짓을 하면 지옥 간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일은 없습니다. 나쁜 짓해서 지옥가고 반대로 착한일 한다고 천국 가는 그런 건 없어요. 그건 인간들이 생각한 거예요. 인간들의 지옥과 천국은 일단은 어디를 경유하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언약을 경유해야 돼요. 언약에서 말하는 저주를 받고 지옥 가고 언약에서 말하는 복을 받고 천국 가는 겁니다. 그렇게 되려면 인간이 자기 죽어서 갈 곳을 본인이 정하도록 용납하겠어요? 용납하지 않겠습니까? 용납하지 않습니다. 오고가는 지난 인간세계나 앞으로 올 모든 인간의 주께서는 뭐냐? 언약으로 우산을 씌워버리죠. 우산을 씌운다. 언약 랩. 언약으로 랩을 씌워버려요. 인간은 언약 밖에 못 나갑니다.


그러면 인간이 그냥 지옥 못가고 지옥 갈 만한 요소를 짊어지고 지옥 가야 돼요. 그래서 나쁜 짓 한다고 해서 그냥 지옥 가게 되면 지옥에서 안 받아줘요. 기쁜 소식인지 모르겠어요. 너 지옥 갈 건덕지가 없으니 안 받아요. 지옥 갈 만한 사람만 지옥가야 돼요. 언약적으로. 그게 뭐냐 하면은 지옥 가는 건 뭐냐 하면은 예수를 사랑하지 않을 때 지옥 가는 거예요. 언약이라는 요소가 여기서 대기하고 기다리고 있다고요. 너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 하냐? 나는 예수는 모르겠고 한 평생 내가 이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모르겠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는 자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면 어떻게 됩니까? 저주받고. 이게 언약의 시작이죠. 창세기 12장에. 마찬가지로 이게 완성이 되면 예수님에 대해서 너희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계속해서 예수님은 그거 묻는다고 평생을 다 보냈어요. “너희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죠. “베드로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메시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입니다.” “복 받았다. 베드로야 복 받았구나” 이걸 알게 한 것은 네가 아니라 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언약이 너희들에게 그렇게 적용된 것이다. 덮어씌운 거예요. 언약을 경유한다는 말은 우리 인간들이 내 생각 때문에 좌절하거나 낙담할 필요가 없다 이 말이죠. 내 일기장이 지저분하다고 해서 지옥 가는 거 아닙니다. 지옥은 함부로 가는 게 아닙니다. 자살한다고 지옥 가는 거 아닙니다. 갑자기 자살 이야기하니까 어떤 목사가 확 생각나네.


언약 안에 저주와 복, 지옥과 천국이 다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언약에 놀아나는 겁니다. 언약이라는 그런 모자이크를 장식하는 개별자들, 개개인들. 얼룩덜룩해요. 어떤 것은 저주, 어떤 것은 복. 하여튼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저주냐 복이냐 두 종류로 타일이 깔려요 이 땅에. 깔리는데 그걸 이제는 인간에게 적용하기 전에 에서와 야곱, 에돔과 이스라엘 사이에 그 밑에 모델적인 형식을 갖춘 겁니다. 그래서 에돔 나라는 일단은 이스라엘에게 지배를 당해요. B.C 124년 경인가 그쯤에 하스몬 왕가에 의해서 에돔이 접수를 당하면서 그들은 형식으로 유대교로 개종이 됩니다. 유대교로 개종 돼요. 그러나 인종은 변함이 없고요 종교만 바뀔 뿐이죠. 종교 바뀐 것은 아무 의미 없습니다. 이스라엘 같지도 않은 이스라엘이 에돔을 지배해서 유대교로 바꾼다고 해서 이게 사람 될 이유는 없지요. 사람 되지는 않습니다. 사람 될 필요 없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에돔을 일단 지배했으니까 주인 노릇하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런데 이 이스라엘이 누구한테 지느냐 하면은 로마한테 해서 졌어요. 그러면 이스라엘 밑에 있던 에돔이라는 지배받던 나라는 누구한테 붙으면 이스라엘 이기겠습니까? 로마에 붙으면 힘이 세니까 오히려 이스라엘을 어떻게 해요? 지배할 수 있겠지요. 이게 누구냐 하면은 헤롯 안티파스. 헤롯 대왕의 아버지가 이걸 한 거예요. 그리고 그 밑의 아들이 헤롯 대왕이라는 겁니다.


자, 헤롯대왕인데 자기가 통치하는 나라가 어떤 나라냐 하면은 옛날에 자기를 에돔이라고 우리는 복 받았고 너희는 저주 받아라 했던 그 민족들 그 백성들을 지금 저주 받아야 될 에돔 사람이 오히려 그걸 로마한테 잘 보여가지고 통치하고 있으니까 어떤 정책을 쓰면 이 나라가 평화롭게 되겠습니까? 헤롯이 유대 나라를 평화롭게 하겠다는 이러한 생각은 누구 눈치보고 있는 거예요? 이 땅이 통치는 헤롯이 하는데 사실은 이 땅의 소유권이 누구한테 가 있습니까? 로마한테 갔지요. 아켈라오라는 사람이요 자기가 1/2 왕이면서도 전체 왕으로 까불다가 유대인들이 로마한테 고소를 했어요. 진짜 정통 아브라함 자손도 아닌 게 유대교로 개종했다가 이제는 우리나라 지도자라고 하는데 절대로 왕 시켜주면 안 됩니다 라고 탄원서를 냈고 그 탄원서 낸 소식이 헤롯 아켈라오한테 들리니까 이 사람이 화가 나가지고 유대인 3천명 죽였어요. 3천명 죽이니까 누가 화나느냐 하면은 이번엔 로마에서 화가 나가지고 너 왕 그만해! 하고 왕을 처단해버렸어요. 왕을 처단하고 그 자리에 이거는 로마가 직접 통치한다 해서 등장한 인물이 있었으니 오늘 누가복음 23장에 본디오 빌라도가 직접 통치하는 거예요. 어느 땅? 예루살렘 그 근처, 옛날 유다지파 그 근처만 그래요. 그럼 그 위에는 헤롯 안디바가 그냥 그 땅에 있는 거예요. 헤롯 왕의 세 번째 아들 빌립이 통치하고 있고 복잡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땅 전체를 아들 헤롯이 다스릴 때는 다 다스렸어요. 헤롯이 다스릴 때 유화정책을 썼습니다. 제일 크게 쓴 것이 뭐냐 하면은 성전을 46년 동안 성전을 지었고 그걸 46년 모자라서 결국 80년 만에 다 지었어요. 지으면 뭐합니까 짓고 난 뒤에 6년 후에 로마가 불타버렸는데. 성전을 얼마나 잘 지었는지 지을 때 자기 야심이 있었어요. 그 야심이 뭐냐 하면은 형식으로서는 유대교 아닙니까. 구약성경을 알고 있겠지요. 자기는 몰라도 자기 밑에 성경학자들이 있을 거 아닙니까. 이 세상에서 유대역사 가운데서 위대한 왕이 누굽니까? 물으니까 솔로몬이요. 솔로몬이 왜 위대합니까? 성전을 크게 지었습니다. 그렇다면 솔로몬보다 큰 성전 지으면 역사가운데 누가 마지막으로 위대하지요? 임금님. 그럼 내가 성전 더 크게 짓지. 이래서 성전을 그렇게 무리해서 크게 지은 거예요. 벽에다가 다 금을 입혀놨어요. 온 벽에다가. 그런데 지은 지 8년 만에 홀랑 불타버리고 또 하나 한 게 맛사다라는 것을 만들었어요. 그건 자기 별장이에요. 헤롯대왕의 별장. 그리고 헤롯대왕이 다윗 솔로몬 영토만큼 차지했는데 이 사람이 정치하면서 어떤 때는 이스라엘 땅에 가뭄이 들었을 때는 이집트에 가가지고 밀을 대량으로 수입해가지고 밀 값을 낮춰가지고 백성들한테 인기를 얻었어요. 경제정책. 나라 컸지 왕이 또 유대교로 개종했기 때문에 종교생활에서 지장 없지 밥 먹고 살만했지 성전, 그 그리던 그 성전 근사하게 지어줬지. 뭐 유대인 입장에서는 그게 불만이 없었지요. 그런데 아들 때 와가지고 엉망이 된 거에요. 그 아들 때 와서 태어나신 분이 누구냐?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태어났어요.


그런데 이 헤롯 대왕이 예수님 태어났을 때 자기가 족보가 정식 아브라함 혈통 아니지요. 에돔이잖아요. 에돔인데 동방박사가 와서 하는 말이 동방박사가 말을 잘못했는지 모르겠어. 제대로 했겠지요. 유대인 족보의 왕이 태어났다는 거예요. 이거는 누구 목에 창을 겨눈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이제 제대로 된 유대 혈통의 다윗 혈통의 왕이 태어났다고 이야기하니까 그걸 듣고 헤롯이 물었어요. 어디서 태어나는지 보고 저에게 꼭 알려주셔야 됩니다. 저도 경배하려고 그렇게 했는데 이 거짓말에 천사가 와서 동방 박사로 하여금 샛길로 다른 길로 피하게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헤롯 입장에서는 자기의 권력에 지장이 오니까 대충 베들레헴 넉넉 잡아 다 죽이면 그 안에 하나 아기 예수 걸려 죽겠지. 메시아 죽겠지 해서 죽인 겁니다. 그런데 그것도 누가 알고 있었어요? 하나님이 알고 계셨어요. 그래서 아기 예수 중심으로 아기 예수 가족이 하나님이 어디로 빼돌리냐 하면은 애굽으로 이집트로 빼돌리죠. 지금도 이집트에 가면 그 교회가 있답니다. 예수님 빼돌려서 아기 예수가 있던 그 교회가 관광객들 지금도 많이 모으고 있어요. 예수님 빼돌리면서 그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의 말씀을 이루게 하지요. 내 아들이 있는 곳이 진짜 이스라엘이다. 예언을 이룹니다. 내 아들을 애굽에서 이스라엘로 빼돌렸다는 예언을 지리적으로 역으로 나가죠. 이스라엘에서 애굽으로 빼돌려놓고 본문을 그렇게 적용시키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예고하느냐 하면은 아기 예수님이 하나님의 율법대로 앞으로 이스라엘 땅을 활동하면서 모든 성경해석은 전부 다 예수님 중심으로 뒤집기를 해야 돼요.


뒤집기 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강의가 시작되는데요 뒤집기를 한다는 말은 인간들이 세상을 환경을 파악할 때 본인이 뒤집기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본인이 뒤집어야 이 현실세계가 납득이 되는 겁니까? 그런 거 아니지요. 뒤집기하고 상관없지요. 인간 뒤집을 줄도 모르고 뒤집어야 될 이유도 모르고 이 그림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인간이 나름대로 이렇게 살아가는데 전부 다 어딜 향하느냐 하면은 천국 가기를 희망해요. 천국 가기를. 그러니까 인간과 천국에 계신다는 하나님 사이에 여기 어떤 중간 단계가 있어요? 없어요? 중간 관계가 없다고요. 그냥 성의껏 하게 되면 주님과 좋은 관계 맺으면 인간들은 천국 가는 겁니다. 그러면 나를 천국 보낼 때 이 하나님의 성품은 어떠한 성품이에요? 고약한 성품? 나쁜 성품? 이러면 안 되겠지요. 우리가 어떤 죄를 지어도 용서해주고 인자하시고 자비롭고 그리고 우리 인간을 만들었으니까 만들 때는 어떻게 만든다? 사랑으로 만든다. 여기에 자기가 뒤집을 하등의 이유가 없지요. 사랑의 하나님에 대해서 내가 성의껏 최선을 다하여 경배하고 하나님 뜻대로 바르게 살겠다고 나서면 되겠지요. 이게 뭐냐 하면은 여기 무리가 일어나서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갔지요. 무리. 무리에 해당되는 사람들. 무리의 지도자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 장로들 이 사람들이 무리를 선동해가지고 예수님을 누구한테 끌고 갑니까? 빌라도에게 끌고 가지요.


빌라도는요 예수님 십자가 사건 이후에 로마로 가버려요. 가버리고 벨릭스라는 사람이 후임으로 왔고 그 후에 사도행전에 나오는 야고보 죽인 사람 있잖아요.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죽거든요. 죽일 때 그게 누구냐 하면은 분봉왕 중에 안디바 있고 빌립이 있고 하는데 아까 그 그림 보셨지요. 아래쪽에는 아켈라오 이쪽에는 갈릴리에는 헤롯 안디바스. 누가복음 3장에 나오는. 그 다음에 그 위에는 빌립, 이렇게 세 아들이 각자 관할해서 통치했는데 그들이 나중에 얼마 통치를 못해요. 못하고 아들 아그립바 그 사람이 야고보 그 사람을 죽여요. 그리고 그 아들도 아그립바 2세가 사도 바울을 심문해요. 여러분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거예요? 지금 그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살해했잖아요. 십자가에 못 박았죠. 십자가 못 박았다는 것, 사도 바울의 복음은 뭐냐 하면은 죽은 예수님이에요. 그게 복음이에요. 그게 십자가에요. 사도 바울의 복음이 죽은 예수님이라고요. 안 죽은 예수님이 아니고 살아있을 때 근사한 말씀하신 예수님이 아니고 죽은 예수님이고 부활한 예수님이거든요. 그러면 예수님 쪽에서는 죽었다가 부활했잖아요. 그러면 죽었다가 부활했다, 단절됐다가 다시 아버지에 의해서 살아난 그 요소가 사도 바울의 복음이 되는 겁니다. 왜? 나는 어리석은 십자가 외에는 다른 능력 없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이 복음이 되거든요. 그러면 오늘날 성도라는 것은 어떤 요소가 있어야 돼요? 그냥 구경만 하는 겁니까? 아! 예수님 죽었다가 부활했데. 우리가 박수 쳐주자. 이러고 끝날 문제에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그 사건이 누구한테 와야 돼요? 우리한테 오지 아니하면 우리는 계속 잘못된 있지도 않은 다른 예수를 믿어요. 지금 다른 예수를 믿고 있다고요. 예수님은 세상을 거꾸로 보셨는데 우리는 거꾸로 볼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사랑의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데 그 중에서 예수 믿으라고 하니까 예수 믿어주지 뭐 이런 식이에요. 내가 뒤집어지는 것은 우리는 상상도 못하는 겁니다.


에서와 야곱 관계에 있어서 이게 설명한다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이유가 이게 트릭이 한 번 있고 두 번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것은 우리가 해석을 잘못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떻게 해석해야 될 것까지 친절하게 하나님께서 그렇게 트릭을 집어넣은 거예요. 왜냐 하면은 먼저 난 자가 장자고 나중 난 자가 나중된 자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태어나게 해놓고 쌍둥이로 해 놓고 먼저난 자는 에서 나중 난 자는 야곱이라고 해 놓고 그 다음에 슬슬 본격적으로 주님께서 요리해나가십니다 장갑 끼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되는 거예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는 겁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때에 여기서 두 개의 트릭이 속임수가 등장하는 이유는 에서가 알았던 오해, 팥죽 받아먹는다고 장자가 바뀔 리가 있나. 아이고 바보 같은 동생, 철이 없어. 이미 한번 낳은 건 끝났어 끝났어. 팥죽 준다고 네가 형 되고 그런 건 없어 라는 것이 에서의 잘못이라면 야곱은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내가 큰 자가 된다는 것이 이게 또 야곱의 잘못이었어요. 뺏어야지 거짓말해서라도. 이게 야곱의 잘못이었다고요. 그러면 야곱과 에서의 둘 다 잘못인데 이것의 잘못을 교정하고 바로 맞추기 위해서 제 3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게 누구냐? 에서와 야곱 사이에 둘 다 오해하고 있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바르게 가르치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보여주기 위해서 등하하는 인물이 누구냐 하면은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 얍복강 바로 밤에 찾아왔던 하나님. 야곱은 없어지고 이스라엘 속에 포함이 돼야 돼요. 그럴 때 이스라엘 되시는 하나님은 인간에게 지고 졌기 때문에 인간에게 이기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는 것은 인간에게 사단의 종이 되어서 맥없이 당하고 당했기 때문에 인간은 예수님에 의하여 심판받고 종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심판주가 되고 종이 되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23장에서 보고 있는 것은 그 중에 한 작업을 보고 있는 거예요. 주께서 거꾸로 뒤집기할 때 뭘 이용하는가? 여러분들 다 수준이 있으니까 어렵게 어렵게 가겠습니다. 에서와 야곱 사이에 누가 끼어듭니까? 이스라엘. 예수님이죠. 요한복음 1장에서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했으니까. 예수님입니다. 천사가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진짜 예수님이죠. 나다나엘은 이 예수님에게 속해서 간사한 것이 없는 자로 네가 참 이스라엘로 포함이 되어버린 겁니다. 이것은 인간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은 끼어들었다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구성을 구성이라는 표현으로 봐야 돼요. 왜냐하면 구성이라는 표현은 주로 어디 많이 나오느냐 하면은 홈쇼핑에 많이 나오잖아요. 스킨 하나 더 드립니다. 이렇게 구성을 해놓고 이 구성에서 이번에는 예수님이 먼저 와 버려요. 예수님이 먼저 와 버리면 여기서 에서가 누구고 야곱이 누구냐 하는 것은 예수님의 자체적인 뒤집기를 이해하는 쪽이 야곱이 되고 그걸 이해 못하는 쪽이 에서가 되게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먼저 와서 이게 저주거든요. 저주받을 자, 지금 제가 헤롯이라는 말씀 드렸지요 헤롯. 에돔 핏줄이 아브라함 자손이 아니에요. 오히려 이스라엘로부터 저주 받아야 될 에돔이 현재 유대인의 통치자 지도자로 되어있다고요. 이스라엘 역사의 구성에서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여겼던 사람한테는 당황스러운 겁니다. 그래서 이씨 두고 보자. 늘 두고 보자는 식이에요. 언젠가는 메시아가 오게 되면 로마나 에돔 헤롯 너희 죽었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힘이 없으니까 누굴 의지해야 돼요? 본디오 빌라도를 의지해야 되는 거예요. 헤롯이 미우니까.


23장 12절 봅시다.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서로 견제 관계에서. 헤롯은 에돔 족속이고 빌라도는 유대 나라 치안이 안정적이길 바라는 거고. 유대인들의 자치권을 어느 정도 옹호하는 겁니다. 여기 헤롯은 헤롯 안티바스를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쉽게 가겠습니다 쉽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은 예수님이 스스로 자기를 뒤집기한 게 하나님이면서도 사람의 종으로 오신 뒤집기를 했단 말이죠. 인간들은 유대인들은 왜 굳이 굳이 하나님이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지난 몇 일 전에 낮설교 제목이 뭐 였던가요? ‘하나님의 부정성’. 하나님이 인간과 좋게 좋게 알아듣게 서로 아는 이야기하면 안돼요? 왜 스스로 자체적으로 부정성을 만들어서 부정성을 심어버리는 겁니까? 왜 그러는 거예요? 왜 이스라엘에게 계시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말이 왜 굳이 그게 개입되야 되느냐 이 말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은 이게 이유가 이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악마 때문에 그래요 악마. 악마를 가지고 에베소서 1장, 골로새서 1장 로마서 8장,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지금부터 제가 설명할 권세. 이게 권세에요. 보이는 권세를 보이지 않는 권세가 보이는 권세를 다스리고 있어요. 요한계시록에서는. “사망이나 죽음이나 어떤 권세라도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이 권세라는 것에 인간은 둘러싸여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무엇의 일부냐 하면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권세에 일부에요. 권세의 일부에요. 참 이것 설명하려면 몇 시간 넘어가는데 그냥 압축해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여기에 헤롯, 빌라도 뭐하는 사람들입니까? 이 사람들을 뭐라고 하지요? 각각 할당된 지역을 통치하는 권세자예요. 7절에 봅시다.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그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예수님은 유대에 있는데 왜 갈릴리 왕한테 하느냐? 6절에 보세요. “빌라도가 듣고 그가 갈릴리 사람이냐 물어” 그러니까 종로경찰서하고 강남경찰서하고 지금 사건 났거든요. 교통사고 났는데 이거 누가 담당하느냐? 이 문제입니다. 관할문제에요. 관할문제. 관할이 갈릴리 사람이니까 갈릴리한테 해주는 거예요. 왜냐 하면은 좋아서가 아니라 나 위에도 로마황제가 있고 너 위에도 로마황제가 있는 거예요. 23장 2절 봅시다.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라는 말들을 무리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거예요. 그 말 보세요. 얼마나 정치적이고 권세적입니까. 그런데 지금 이 이야기가 오늘날 소위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일상의 관심사가 되어있어요 지금. 권세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니까. 아니 권세에서 안 벗어나려고 하는 이유가 인간은 권세에 대해서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매일매일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못 빠져나와요. 인간은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이 권세에서. 권세에서 못 빠져나오면서 뭘 믿어요? 예수를 믿어요? 복 주는 예수. 이게 뭐에요. 전혀 관계없는데. 복음하고 아무 관계없어요.


유대인 지도자들이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이죠. 그들은 뭐냐? 권세자에서 약간의 할당받은 권세자예요. 국가 권세는 큰 권세지만 작게는 뭐냐? 집안의 가장, 남편 아버지가 권세자입니다. 물론 어떤 가정에서는 아내가 자기 남편을 굉장히 사랑스럽고 존경스럽고 다정하게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대부분의 경우는요 자식도 그렇고 아내도 그렇고 남편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두려움 가운데 바라봐요. 이게 왜 그러느냐 하면은 남편이 못나고 변변치 못해도 세상에 나가서 저 사람은 우리 남편이라고 할 때는 일단은 높여주고 보자는 거예요. 남편을 높여주면 누가 높아진다? 아 참 훌륭한 아내네. 남편을 저렇게 높이다니 훌륭한 아내네 할 때 그 순간 우리는 세상이 우리한테 요구하는 권세 시스템에 대해서 우리가 칭찬받을 가능성이 놓아지기 때문에 그래요. 남편이 이뻐서가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남편을 높여줌으로서 정숙한 아내라는 티를 내는 겁니다. 그러니까 남편은 뭣도 모르고 밖에 나가서 한 방 먹은 거죠. 이 여자가 왜 갑자기 나를 좋게 대하지? 좋아서 좋게 대하겠어요? 가정이라는 것은 여자가 아무리 돈 벌고 쎄도 가정의 대표자는 누구이여야 한다는 것이 보편적 상식입니까? 남자가 죽었으면 몰라도 살아있는 한 남자는 가장이여야 되고 자식들이 아무리 부모 말 안 들어도 대외적으로서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인정을 해줘야 자기의 뿌리가 안정적이잖아요. 따라서 이것이 즐겁다 아니면 불안정가운데 이뤄진다? 무섭고 두려운 가운데 이뤄진다. 불안정가운데. 불안정해요. 그래서 바라기는 뭐냐? 우리 가장되신 남편이 좀 이렇게 우리보기에 믿음직스럽게 좀 든든했으면 좋겠다. 재산을 많이 가진다고 욕심 부리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4조 2천억 정도는 가져서 언제든 1조 2천 정도는 언제든 줄 수 있는, 그 정도가 우리 아버지 내 남편이라면 본인이 얼마나 기가 살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이 뭐냐? 권세는 도립이 없다. 거꾸로 서는 게 없어요. 권세는. 권세에 따르는 것뿐이에요. 권세에 고개 숙이고 순종하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순종하기만. “내가 뒤집어지게 하옵소서” 라는 기도를 안 해요. “실망스러운 내 남편이 이제는 사람답게 예수도 잘 믿고 가정을 좀 돌보는 남편 되기를 바랍니다” 라고 기도는 하지요. 거꾸로 뒤집는걸 싫어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옵소서. 결국 이게 무슨 말입니까? 현재 있는 권세 속에서 내가 안정감을 얻게 하옵소서. 이 권세 품 안에서 힘들지 않고 정서 흔들리지 않고 이 권세 밑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옵소서라는 기도에요. 그게 복 달라는 거고 하나님 우리를 사랑해달라는 겁니다. 그냥 뒤집어야 돼 이거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과 행위가 기존의 인간들이 무엇에 겁을 내고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을 이걸 표내는 식으로 그동안 행동을 해왔어요. 사람들은 다른 건 건드리되 로마의 안정적인 유대 지도자의 체계는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겁니다. 왜? 너무나 건드릴 수 없는 무서운 초월적인 대상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것은 하나님이 손 대야 되지 우리가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왜? 권세가 힘이 없으니까. 힘이 없으면 더 큰 힘에 주눅들 수밖에 없지요. 그 이유가 뭐냐 물으시면 우리 자신도 그 권세에 충실한 하수인으로 평생을 살아오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의사들이 데모를 하고 시위를 한단 말이죠. 그중에서 없지만 우리 의사라는 것은 국민의 건강이 우선이지 이렇게 데모 하는 것은 의사 할 도리가 아니다 히포크라테스 선언에 어긋난다 하는 사람이 있다 칩시다. 그 사람을 대한의사협회 회장으로 만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떻게 되겠어요? 권력자 권세자의 행위에 나서게 됩니다. 왜냐 하면은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내가 나에 대해서 이미 그럴싸한 권세자기이길 소망하고 욕망하고 살아오기 때문에 그래요. 나를 버리기가 싫은 거예요. 대구강의 때 스데반 집사님 이야기했지요. 그 스데반 집사의 이야기 중에서 하나의 중요한 것을 다시 한번 끄집어 이야기하면 스데반 집사는 죽을 때 예수님이 하늘의 우편에서 일하신다 한 것이 아니고 평소에 살아있을 때부터 죽을 때만 한 게 아니고 살아있을 때부터 그 마음가짐으로 살아왔어요. 언제 죽더라도 스데반 집사를 단절을 내면 그 단절 속에 인자가 일하신다. 하나님 우편에서 일하신다가 연속되는 겁니다. 죽을 때 멋지게 이거 해야지 이런 꼼수 없어요, 그냥 살아있는 자체가 예수님의 작품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물을 수 있는 것은 스데반 집사는 누구의 권세 밑에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의 권세 밑에 있지요. 그게 자유잖아요. 이 세상이 사람들 무서워하는 권세를 벗어난 채 이 세상에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 보기에 스데반 집사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을 꼭 빼닮았어요. 완전히 거꾸로 사는 거예요. 뒤집어서 사는 거예요. 뒤집어서.


이야기 계속 해봅시다.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말씀과 행동을 하면서 나 잡아가세요 날 잡수세요 행동을 했다고요. 자, 예수님을 잡아갔을 때에 예수님을 체포했을 때 비로소 불쑥불쑥 정체를 드러낼 권세자들의 그 다양함이 뭐냐? 여기 본디오 빌라도 나왔지요. 헤롯 나왔지요 10절에 보면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 그 바로 밑에 어떤 권세층이 있느냐 하면은 10절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소하지요. 그렇다면 여기 어둠의 권세 있거든요. 그냥 인간은 이 자체가 삶의 환경이에요. 어둡고 뭐 그런 거 할 거 없습니다. 권세가 부럽고 권세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굴복 당하고 나름대로 권세를 챙기고 제일 큰 권세가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 본디오 빌라도 그 두 사람 위에 권세가 누굽니까? 2절에 가이사, 로마 가이사가 여기 나오지요. 권세 그 밑층에 있는 권세가 뭡니까? 대제사장, 서기관들, 장로들도 있겠지요. 그 권세 밑에 누가 있습니까? 일반 백성들이 있겠지요. 그러니까 이 권세의 안정성, 권세에서 빼도 박도 못하는 거예요. 이 권세의 체제, 계층 주님께서 백성들 편에 와서 최종 권세까지 답습하고 있는 겁니다. 보자 이 권세들 한번 보자 하고 하는 거예요. 그럼 이 권세들이 예수님에게 뭔가 자신의 권세의 속성을 양보하거나 주저하지 않고 결국은 예수님이 유도한 대로 그들의 본색을 드러내겠지요. 다 드러내겠지요.


그러면 이렇게 생각합시다. 이 세상은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질문. 그 답변은 바로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자를 향하여 창으로 찔러 죽이는 쪽으로 모든 힘이 이 세상의 힘이 과학 힘이든 경제 힘이든 모든 논리의 사회 모든 힘이 오직 예수님을 힘써 죽이는데 거기 집중되어있다는 것을 예수님에 의해서 까발리게 하시는 거예요 그걸. 그게 누가복음 23장입니다. 밝혀내시는 거예요. 예수님 성공하신 거죠. 따라서 나중에 성령이 성도한테 오잖아요. 성령이 와 버릴 때 지금 이 구조, 예수님을 힘써 죽이는 이 현실에 권세 구조를 성령을 통해서 그냥 옴팍 성도 안으로 다 들어오죠. 이 안목이. 이 해석이. 그게 바로 성령의 충만한 스데반 집사입니다. 그리고 빌립 집사. 스데반 집사. 사도 바울. 이 구조가 그대로 다 들어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 당시에는 세상 권세가 전부였어요. 인간은 세상 권세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 보기에 뭐 좀 이렇게 메시아라고 하지만 짓눌러버리지요.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고 짓눌러버렸지요. 세례 요한 죽인 사람이 헤롯 안티바스인가. 세례요한하고 예수님을 짓눌러버리니까 예수님이 어떻게 했어요? 죽었다가 되겠지요. 죽었다. 세상 권세에서 죽어버리면 예수님은 세상 권세에서 어떻게 됩니까? 이미 빠져나온 게 되지요. 세상 권세에서 빠져나왔지요. 빠져나와서 자기를 죽였던 세상 권세 성격이 하나님을 죽인 그런 성격이잖아요. 그 성격을 죽은 분이 죽었다가 살아난 게 아니고 그 죽은 분이 살아났지요. 한 인간이 있는데 죽었다는 현상과 살았다는 현상이 있는 게 아니고 죽은 분이 살아난 거예요. 죽은 분이 살아났다면 그 죽은 분, 그 존재를 죽게 만든 그 상황이 어떻게 돼요? 그 상황이 예수님 이 세상 바깥으로 어떻게 돼요? 완전히 이걸 둘러싸서 포위하게 되는 겁니다. 이 세상을 둘러싸서 포위를 한 거예요. 예수님은 야곱이고 이 세상 자체는 뭡니까? 에서가 되죠. 이게 언약대로 된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대로. 예수님이 자기 신분세탁 비슷하게 하나님이면서도 죄인으로 오셔가지고 결국 밝혀낸 것은 뭐냐 하면은 언약대로 된 거예요. 이 세상 모든 것은 저주에 있고 오직 예수님만 복의 사람이 됐다 라고 이렇게 밝혀진 겁니다.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23장 12절 (십자가의 원수) 240604b-이근호 목사



첫째 시간에 권세 이야기를 했는데 제가 권세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인간은 못 빠져나온다. 이 권세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는 겁니다. 아까 로마서 이야기도 언급했지만 그 로마서 8장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골로새서 1장에 보면 16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여기 권세가 나오잖아요. 왜 권세를 언급했느냐 하면은 이게 현실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비현실이 아니고 우리가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고 우리는 어떻게든 현실을 도망치는 게 아니고 현실을 적응하는 것이 우리 삶의 목표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하나님이여 예수님이여 제발 이 권세 속에서 내가 숨을 쉴 수 있도록 편하게 살 수 있도록 복을 달라고 기도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권세 자체를 문제 삼는 게 아니고 권세 자체를 문제 삼아버리면 뭘 문제 삼느냐 하면은 권세에 순응하고 있는 내가 문제 삼아야 되요. 내가 문제 삼아야 된다고요.


그런데 그 빌립보서 3장 18절에 보면 용어 하나 나와요. 무슨 용어냐 하면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간다. ‘십자가의 원수’. 보통 상식으로 교회에서는 뭡니까? 원수가 누구 원수에요? 하나님의 원수잖아요. 사도 바울은 하나님 원수라고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십자가의 원수로 해야 된다는 거예요. 멀리 있던 하나님이 십자가로서 자기 뜻을 다 드러냈잖아요. 코 앞에 십자가 눈 앞에 보이는데 왜 자꾸 십자가를 비껴서 옛날에 알던 것 권세에 순응하면서 살던 그 종교적인 행위가 뭡니까? 하나님이여 날 도와달라는 거에요. help me. 날 도와달라 하는 식으로. 그럼 앞에 개입된 주님께서 트릭을 쓰셔서 오셨던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셨던 그 죄인으로 오셨던 그것은 인간이 그걸 왜 빼요? 그 점을 왜 고려 못합니까? 그냥 살던 대로 그냥 살게 좀 내버려두라는 거예요. 그냥 조용하게. 그러니까 스데반이 순교한 것도 모르겠고 난 조용한 게 좋은데 하나님이여 살아계시면 복 줘가지고 만사형통하게 해달라. 더 바라지 않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죠.


그런데 이 권세가 예수님의 평소의 산상설교라든지 모든 말씀을 지금 권세한테 체포되어서 꼼짝없이 예수님이 돌아가시잖아요. 돌아가시는 것을 가지고 예수님이 몸이 터졌다고 한번 표현해봅시다. 예수님이 빵빵한 몸이 퍽 터졌다고 생각해 봅시다. 십자가에 못 박아서 창으로 찌르고 못을 박을 때 그동안 예수님 남기신 말씀도 같이 뻥하고 뻥튀기처럼 온 천지에 말씀이 다 날린다고 보잔 말이죠. 웰컴투동막골에 보면 꽃 꽂고 미친 여자 나오죠. 그런데 갑자기 빵! 하고 터지고 강냉이가 확 터져요. 주의 말씀이 확 터져버리면 뭐냐 하면은 인간은 욕망으로 되어있다는 거예요. 예수님 산상설교가 다 그런 거예요. 네 욕망은 네가 추스릴 수 없는 거예요. 네 욕망은. 남을 비판하지 말라는 뜻이 뭐에요? 너는 비판하고 싶은 욕망에 이미 길들여져 있다는 겁니다.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은 네 모든 욕망은 거기에 향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권세를 욕망으로 해석해보자.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권세는 뭐냐 하면은 타인의 욕망이에요. 타인의 욕망을 내가 욕망하는 거예요. 욕구와 욕망의 차이는 욕구는 달성되면 결여를 달성하면 이게 충족 돼요. 이건 동물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나 동물에 없는 인간의 욕망은 자꾸 충족을 미룹니다. 자꾸 타인의 욕망을 미뤄요. 미룰 수밖에 없지요. 욕망이 없으면 못 사니까.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산다는 말을 하는데 그건 거짓말이고 욕망이 계속 커지기를 원하고 있어요. 욕망은 완성되면 안돼요. 욕망은 계속 생산 돼야 살맛이 나는 거예요. 그게 소망이라는 겁니다. 인간에게.


인간은 타인이거든요. 그 타인이 어릴 때는 아버지만큼만 되었으면 엄마만큼 되었으면 하잖아요. 그러나 사회에 나가면 엄마와 아빠가 이 세상에 출세한 사람에 비해서 비리비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아빠 엄마 말 안 듣고 친구 말 듣고 있지요. 그런데 친구 말 듣고 하면서 점점 더 이 세상에 인터넷을 통해서 유투브를 통해서 욕망이 대단한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라는 것을 그걸 아는 순간 내 욕망의 범위도 어쩔 수 없이 커진 겁니다. 그걸 가지고 중독이라고 하는 겁니다. 욕망의 중독. 중독은 인간의 도파민이 경로에 따라서 인간의 피질로 나아가는 그 경로가 이게 인간의 의지로 멈추지 못할 때 중독이라고 해요. 마약이 그런 거예요. 마약. 담배, 마약, 술 다 마찬가지에요. 물론 술은 인간의 의지로 줄일 수 있다고 하는데 심한 사람은 못 줄여요. 인간의 의지가 소용없는 것, 그러면서도 나의 행동과 나의 생각은 내 욕망의 노예가 되어서 끌려가는 거예요. 이게 바로 중독이죠. 결혼하고 난 뒤에도 옛날 어릴 때 했던 장난감 사는데 수천만원 쓰는 사람들. 돈도 개뿔도 없으면서 고급차 중고 사가지고 출세한 흉내내기. 돈이 없으니까 중고 사야지요. 2천만원짜리 벤츠 사서 돌아다니고. 사회 전체가 욕망의 경쟁 장으로 변하고 말았어요.


그러니까 그런 인간들끼리 믿음 소망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뭡니까? 욕망으로 인하여 포장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에요. 그 욕망을 매개하는 게 그게 바로 돈입니다. 사람들은 돈 있으면 마음껏 쓰겠다고 하지요. 절대로 그런 식으로 되지 않습니다. 돈이 있으면 사람은 돈 자체가 내가 구매하려는 상품이 되기 때문에 돈은 쓰는 재미가 아니고 돈은 모아지는 재미에요. 그렇지요? 돈은 쓰는 재미로 사는 게 아니에요. 그거는 너무나 철딱서니 없는 말이고 돈은 모아지는 그 자체가 돈을 버는 이유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한다는 말은 이 세상이 돈에 지배된 겁니다. 지금부터 나눠드려야죠. 지금 제가 노래 두 개를 들려주는데 이건 뭐냐 하면은 우리가 지금 예수님 십자가 못 박히는 그 현장에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소망에 관한 노래 두 개를 준비했는데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에 잡혀있습니다. 십자가에 잡혀있는 예수님,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원수를 찾는 게 아니고 십자가의 원수를 가지고 천국 지옥을 나누면서 십자가 달리는 그 현장에서 인간은 무엇을 소망하고 있느냐는 거예요. 과연 십자가를 소망할 수 있느냐를 제가 묻기 위해서 두 개의 노래를 준비했습니다. 두 개 노래 차이점이 뭔지 물어보겠어요. 우선 첫 번째 노래, 1절만 듣겠습니다.

찬바람 비껴 불어 이르는 곳에 마음을 두고 온 것도 아니라오

먹구름 흐트러져 휘도는 곳에미련을 두고 온 것도 아니라오

아 어쩌다 생각이 나면 그리운 사람 있어 밤을 지새고

가만히 생각하면 아득히 먼 곳이라 허전한 이내 맘에 눈물 적시네 

 

비껴 불어 이르는 곳에 마음을 두고 온 것도 아니라오

먹구름 흐트러져 휘도는 곳에 미련을 두고 온 것도 아니라오

아 어쩌다 생각이 나면그리운 사람 있어 밤을 지새고

가만히 생각하면 아득히 먼 곳이라 허전한 이내 맘에 눈물 적시네


여기서 아득히 먼 곳, 여기 이 세상 있어요? 없어요? 아득히 먼 곳. 현재 이 노래 부른 사람한테는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아득히 먼 곳에 유념해서 제 질문에 답해주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의 노래도 들을 텐데 소망, 아득히 먼 곳에서 희망을 갖는 그 희망과 또 다른 노래


Sing the wondrous love of Jesus,Sing His mercy and His grace.

In the mansions bright and blessedHell prepare for us a place.
When we all get to Heaven,What a day of rejoicing that will be!

When we all see Jesus,Well sing and shout the victory!

While we walk the pilgrim pathway,Clouds will overspread the sky
But when traveling days are over,Not a shadow, not a sigh.
Let us then be true and faithful,Trusting, serving every day

Just one glimpse of Him in glory Will the toils of life repay.
When we all get to Heaven,What a day of rejoicing that will be!

When we all see Jesus,Well sing and shout the victory!

Onward to the prize before us! Soon His beauty well behold Soon the pearly gates will open
When we all get to Heaven,What a day of rejoicing that will be!

When we all see Jesus,Well sing and shout the victory!


자, 두 개의 노래입니다. 질문은 앞에 있는 그리움과 뒤 그리움의 차이점은? 이제 질문이에요. 차이점이 뭘까요? 아득히 먼 곳과 요한계시록이나 데살로니가 4장에 나오는 것처럼 특히 요한계시록에 나온 그 가사 내용처럼 차이점이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앞에 있는 노래는요 어떤 사람을 그리워해요. 어떤 사람을. “찬바람 비껴 불어 이르는 곳에 내 마음 두었던” 그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리운 사람이 있어요. 그리운 사람이 지금은 없어요. 그리운 사람이 어디에 갔는데 그게 뭐냐? 현재 그리운 사람이 빠져버린 이 자리보다도 그리운 사람이 가있는 그곳을 아득한 먼 곳을 그리워서 자기는 잘 때 내 마음에 눈물 적신다. 찬바람 비껴 불어 이르는 곳에 마음을 두고 온 것도 아니라오. 그런데 뒤에 보세요. When we all get to Heaven 아주 신나지요. 부흥회가 따로 없습니다. 우리가 하늘에 오를 때 그날이 얼마나 기쁠까요. 우리 모두 예수님을 볼 때 예수님을 보며 승리를 외칠 거예요. 빅토리! 승리하는 거. 나의 승리죠 나의 승리. 누구를 그리워하는 게 없어요. 나 출세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찬송가의 차이점은 바로 한 사람은 누구를 보고 싶어서 그 곳에 가고 싶다는 거고 두 번째 이 찬송가는 뭐냐? 나 잘되면 됐지 하는 거예요. 나 잘되기 위해서 교회 다니면서 어떤 수모 있더라도 이 찬송 부르면서 감당해낼께요 참을께요 하는 식으로 이 찬송을 부르는 거예요. 이 노래를 어디서 들었다 했습니까? 어디서 들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현장에서 한번 보자.


놀랍게도 두 번째 이 가스펠송은요 누가 빠졌어요? 자신의 야심과 야망 구원의 욕구만 드러낼 뿐이지 성경 말씀을 동원했을 뿐이지 십자가가 누락되어있습니다. 빠져있어요. 실컷 기쁜데 주님 먼저 가있으니까 내가 곧 따라갈께요 그런 식인데 이러면 내가 예수님처럼 뒤집기가 안돼요. 기다렸습니다 이런 대단한 분을 우리에게 빅토리 승리준 분을 기다렸습니다 자기 야심을 드러내요 야망을 드러내는 거예요. 거기에 비해서 첫 번째 불렀던 아득히 먼 곳은 찡찡대고 있는 거예요. 나 당신 없이 못살아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야 어디 갔어 어디 갔어. 나 두고 가버리면 나도 그 곳에 가겠어. 그런데 간 곳을 몰라요. 왜? 어떻게 표현했는가? 아득히 먼 곳. 여기 없는 다른 어떤 곳. 바로 이 두 가지의 요소를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다 부정해 버립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이게 바로 모든 인간은 십자가의 원수가 된 거예요. 앞에 노래는 이거는 발라드 대중가요는 안 불러도 되지만 두 번째 이거는 가스펠송인데 우리 찬송가에는 이게 안 들어있고 아마 미국의 침례교 찬송가에는 들어있는 것 같은데 이 찬송가 부르지 말라고 하느냐. 그렇게 이야기할 수가 있거든요. 그러면 십자가를 경유했을 때 우리가 하늘 오를 어느 날 이것은 그러면 십자가 앞에서는 이런 찬송도 하지 말고 여기 관련 모든 말씀은 의미가 없다는 말인가? 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 찬송을 부르는 우리에 대해서 십자가가 먼저 와닿아야 돼요. 연관을 지어줘야 돼요. 십자가와 연관을 지어줘야 돼요.


무엇이냐 하면은 과연 나를 사랑하느냐 아니면 십자가 지신 주님을 사랑하느냐 문제로서 우리는 십자가 앞에 자신을 세워봐야 됩니다. 그 당시 유대 지도자들이 메시아 오기를 간절히 기다렸죠. 왜 그 당시 유대인들이 로마 권세로부터 아브라함 자기 혈통을 건져내기를 왜 그렇게 원했던가요. 원했던 이유가 뭡니까? 일단 그들은 고통? 아닙니다. 핍박? 아니에요. 자기 욕망을 기존의 권세가 충족시켜주지 못하고 있다. 이미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자로 모세의 율법을 받은 자로서 부풀어져있어요 욕망이. 욕망이 부풀어져있는데 로마가 이러한 에돔이나 헤롯이나 이런 것이 자기 욕망을 충족하지 못하고 있어요. 욕망은 이만큼 큰데 에돔처럼 큰데 자기들의 욕망은 이 정도 안개 정도 밖에 안돼. 안개 정도. 이 나머지는 누가 채우느냐? 메시아 오셔서 채워주소서. 그런데 메시아는 어떻게 온다고 했어요? 메시아는 뭐 타고 온다고 했어요? 구름타고 오셔서 메시아여 채워주소서 이렇게 되는 거예요. 자기는 지금 손 안대요. 나한테 있는 이 권세가 유발하는 욕망은 문제가 없다고 본 거예요. 내가 무슨 문제가 있는데?! 내가 시집 와서 얼마나 고생했는데! 지금 내가 남편 잘못 만나서 이 사단 났지! 내가 뭐가 잘못 됐는데 뭐 이런 식이에요. 그러니까 자기가 결혼해서 남자와 애 낳고 산다는 것은 이미 어떤 욕망이 뭡니까? 욕망이 부풀어 있고 그 욕망은 어디서 참조로 가져온 거예요? 어디서 참조로? 이 세상의 돈의 세계에서 출세의 세계에서 타인의 욕망에서 우리가 전부 다 거기서 눈에 띄는 것들을 골라잡아서 내 욕망으로 구성한 겁니다.


찬송가를 부른다는 것은 우리가 부르면 안돼요. 그럼 뭐냐? 성령께서 부르게 하셔야 돼요. 성령께서. 이게 에베소서 5장에 나옵니다. 네가 술 취하지 말고 찬송하는데 목청 곱게 올려서 찬송하지 말고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성령에 술 취하듯이 어디에 취해서? 성령에 취해서 찬송하라는 겁니다. 그럼 찬송의 내용이 뭐가 되겠어요? 이 가사처럼 되는 게 아니고 바로 우리를 십자가에서 천국 가고자 하는 나를 주께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그것을 죽이게 해주는 것을 찬송하는 겁니다. 그게 이사야 6장에 나오지요.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도다” 진작부터 망했는데 왜 나는 나에게 너무 관대했느냐 말이죠. 바닥, 주님은 오셔서 바닥을 쳤어요. 우리는 성령께서 바닥으로 내몰면 우리는 바닥이 아니고 발작을 일으킵니다. 제가 뭐가 못나서 남보다 못합니까 이런 식이에요. 남 있잖아요. 타인의 욕망, 남. 남이 전부 다 따지고 보면 뭐냐 하면은 전부 다 바닥이에요. 이 세상에 멀쩡한 사람 없습니다. 이 세상 전부가 개뿔도 아니에요. 전부 다 noting이에요. 제가 대구강의에서 했잖아요. 30cm의 목줄의 개, 2m짜리 목줄 개. 어느 개가 행복하냐? 물론 2m짜리가 행복해요. 왜? 이쪽은 4조2천억 갖고 있으니까. 이거는 통장에 2백만원 있으니까. 행동반경이 너무 좁은 거예요. 하지만 목줄, 마귀한테 매여 있잖아요. 마귀한테 매였다고요. 마귀한테 매여 있다. 바리새인 나쁜 사람 서기관 나쁜 사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개인적으로 자아는요 그 당시의 권세의 일부가 그들의 내부의 권세로서 지금 가득 차있는 거예요. 가득 차있는 겁니다.


뉴스에 일기예보 나오지요. 일기예보 말하시는 분이 서울은 구름이 끼고 오늘 최고기온 20도까지 올라간다 하잖아요. 대구는 몇 도고 김천은 몇 도고 나올 때 여러분 일기예보 끝까지 들어보세요. 마지막에 나오는 게 뭐냐 하면은 오늘은 동해바다는 물결이 파도가 2m가 되겠습니다. 동해바다 이야기 왜 하지요? 동해바다 이야기 왜 합니까? 동해바다 살지도 않는데. 우리는 배 타는 사람도 아닌데 동해바다 이야기를 왜 해요? 일기예보는 전체 권세를 다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살지 않더라도. 그런데 우리가 만약에 배 타고 간다. 그럼 서울이 몇 도인가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왜 멀미가 나지? 도대체 오늘 파도가 몇 미터야? 이렇게 되겠지요. 그러니까 이미 인간은 갇혀있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십자가라는 것은 전체를 다 이야기하는 거예요. 네가 출세를 하고 성공을 해도 너는 뭐냐? 십자가 앞에서 너는 타인의 욕망에 미쳐서 환장한 사람이다. 타인의 욕망에 중독된 사람이다. 중독이라는 말은 영어로 addiction이라고 하는데 그냥 물리적인 중독은 치료가 되는데 addiction은 정신적인 중독은 약이 없어요. 꽁꽁 묶어놓고 1년간 쉬면 약간의 완화된다 이 정도 밖에 안돼요. 왜냐하면 중독 자체가 이미 내가 통제할 선을 넘어섰어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이게 생물학적으로 참 어려운 말인데요. 이걸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언급을 했는데 사람들은 되게 욕했지요. 도킨스라는 사람이 이런 소리 했어요. 우리의 주인은 DNA지 내가 아니다. 그 소리 해서 상당히 욕 많이 얻어먹었거든요. 내가 두뇌를 조종한다. 아닙니다. 두뇌는 그냥 기계에요. 기계에 부대효과가 자아에요. ‘나’라는 거예요. 두뇌세포의 부대효과. 자기들끼리 기계가 움직이는데 나오는 효과가 뭐냐? 나가 어떻고 너가 어떻고 가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그 기계가 약물을 집어넣어서, 약물은 외부적 물리적이죠. 약물을 집어넣어서 기계가 자기 마음대로 작동한다면 그제사 아는 거예요. 망가진 나에 대해서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다는 것. 차마 과학은 말을 그렇게 못해요. 과학은 만사를 모든 걸 해결해야 되기 때문에.


그래서 성경에서는 죽음이라고 하잖아요. 죽음인데 실제 성경에서 죽음이라고 이야기해놓고 하나님의 언약이 와서 죽음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이걸 망가짐으로 봅니다. 망가짐 또는 흙이니 어디로 간다? 흙으로 돌아간다. 멀쩡한 사람인데 자꾸 쇠퇴하는 거예요. 쇠퇴해서 뭐로 돌아가요? 인간일 때는 인간처럼 보이잖아요. 인간의 자존심, 위치, 고귀함, 존엄성. 하나님의 법이 어떻고 하다가 결국 실상은 뭐냐? 의미 없어요. 그냥 아무것도 아닌 흙덩어리라고요. 흙덩어리. 흙덩어리인데 인간의 존엄성은 뭐냐? 이거는 환상일 수 있고 이거는 기존의 악마가 쥐고 있는 권세가 반영된 거예요. 악마의 권세가 기계 안에 악마의 권세가 반영된 거예요. 어차피 죽는데 악마는 죽기를 무서워하게 만들어 버렸어요. 죽는걸. 죽는다는 말은 흙이 된다는 말이 아니고 숨 끊어진다는 말이 아니고 내가 망가지는 거예요 내가. 내가 망가지고 특히 연세 많은 사람들 어떤 느낌입니까? 자기 하반신이 사라지는 느낌 들지요. 있는데 밑에서부터 이게 갑자기 희미해져. 초가 녹으면 주저앉잖아요. 그것도 무능력하게 아무 쓸모짝 없게 주저앉아요. 이게 70넘으면 이런 느낌이 가속되는데 아직 20대 30대는 몰라요. 축구 한다고 바빠 족구 한다고 바빠. 자기가 뭐든지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점점 더 무너져 내리는 거예요. 무너져 내리는 것. 마약 먹고 찍은 두뇌사진과 치매현상 두뇌사진과 둘 다 두뇌사진이 지질부분이 전부 다 쪼그라드는 사진이 있거든요. 쪼그라들어요. 압축이 돼서 무너지는 거예요. 전도서에도 나오지요. “망가진다” 되어있는데.


그러니까 인간은 뭐냐 하면은 타인의 욕망에 평생토록 놀아난 거예요. 주님이 너 이렇다는 것은 아주 개무시하고 듣지도 않고 마귀가 심어놓은 타인의 욕망, 환상에서 이번 수련회 때 교재 뭐라고 했습니까? 환상이라고 하지 않고 이걸 뭐라고 했어요? 이걸 꿈이라고 했지요. 타인이 보여주는 그 욕망이 나 잠잘 때 꿈으로 전환되고 꿈에는 인간은 자유롭잖아요. 내가 뭐든지 할 것 같고 뭐든지 일어날 것 같고. 그 꿈에 놀아나면서 점점 더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하반신부터 해가지고 왜 하반신이냐? 중력의 법칙 때문에 그래요. 중력의 법칙에 의해서 하반신부터 점점점 내려 앉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죽는 게 무서운 게 아니고 내가 아무 짝도 쓸 데 없다는 게 무섭고 더 나아가서 내가 치사하게 남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 자존감이 확 상해버려요. 내가 이 나이에. 내가 이 나이에 화장실도 못 가나.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진짜 비참한 내가 부정하고 싶은 정도로 이렇게 완전히 무너져버렸냐. 그거 원래 태어날 때부터 그랬어요. 그리고 남들 다 그래요. 본인만 그런 거 아니고 남들 다 그렇다고요. 고혼진 화장품 보면 38만원 짜리인데 아주 발악을 해요. 주름살 제거제. 따라서 그 화장품은 조선시대 때는 안 삽니다. 왜? 전부 다 여자 나이 40되면 다 망가지기 때문에. 지금은 70, 80 다 사니까 주름에 신경을 쓰고 있다고요. 그것도 십자가 앞에서. 그러니까 누가복음 23장의 십자가 이야기가 인간이 그동안 빠져나올 수 없는 권세에 완전히 포위되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이제 제가 이야기하는 것을 현대화시켜 봅시다. 현대화. 이 이야기를 현대화시키는 겁니다.


청개구리 이야기해봅시다. 참 이게 슬픈 이야기에요. 엄마 청개구리 아들 청개구리 있는데 아들이 엄마를 갖고 놀아요. 내가 뭘 할까 생각하고 있다가 엄마가 시키는 거 반대로 하는 게 자기 할 일이에요. 이 정도로 말썽꾸러기 청개구리에요. 동으로 가라 하면 서로 가고 서로 가라 하면 동으로 가고. 그러니까 자식이 돼서 엄마를 모델로 삼되 엄마가 하는 것과 꼭 반대로 하는 그러한 즐거움을 아들이 갖고 있어요. 그러니까 엄마 입장에서는 어떻게 되겠어요? 엄마를 하나님으로 보고 청개구리 말썽장이 아들을 인간으로 봅시다. 이미 인간은 말 안 들어요. 인간은 말 안 듣는데 어떻게 하는가? 악마가 중간에 개입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꼭 반대로 해요. 반대로. 하나님을 놀려먹는 방법이 그겁니다. 악마가 준 그 욕망, 무서움 중에 이뤄지는 욕망, 악마의 권세의 일부로서 자리 잡고 권세를 가지고 대장되시는 악마가 시키는 대로 하나님께 대들지요. 이걸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원수지요. 그런데 신약에서는 빌립보서 4장에서는 뭐라고 했습니까? 십자가의 원수. 십자가의 원수로 작용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웃어야 될지 울어야 될지 엄마가 죽기 전에 아들이 걱정이 된 거예요. 아들이 걱정이 되가지고 아들로 하여금 나 죽거든 묘를 개울가에 모셔라. 개울가에 모시라고 엄마 나름대로 신경을 썼어요.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은 내 아들은 나 죽더라도 절대로 안 바뀔거라는 생각을 하고 묘를 하게 되면 엄마 말에 무조건 반대로 하니까 엄마가 강가에 쓰라하면 저쪽 안쪽 땅 저 바깥에 강하고 멀어진 그 쪽에 묘를 쓸 것이라고 엄마가 통밥을 굴리면서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엄마가 죽고 난 뒤에 애가 개과천선을 해가지고 그때는 타이밍도 그렇게 안 맞아. 그때는 엄마 말을 들어서 엄마 묘를 개울가에 했잖아요. 해 놓으니까 어떻게 돼요? 비만 오면 엄마 묘가 없어져서 엄마의 부재에요. 엄마의 부재. 엄마가 없어지면 내 뿌리가 없을까 싶어서 막 우는 거예요. 그래서 청개구리가 비만 오면 운다는 전설이 있는 거예요.


이 청개구리 이야기가 물론 우화로서 재미있는 이야기로 되어있지만 인간이 성령을 받으면 어떻게 될까요? 인간이 성령을 받았다. 성령을 받으면 시키는 대로 할까요? 아니면 울까요? 물론 울기야 하겠습니까 기쁨의 눈물이죠. 성령을 받게 되면 내가 왜 그토록 나는 다른 말은 다 들어도 왜 하필이면 예수님 말은 왜 그렇게 안 들었는가를 꺼이꺼이 울지요. 평생을 살아가면서. 따라서 성령을 받게 되면 자기가 무너진다 죽는다 아프다 뭉개진다가 어떻습니까? 그게 슬픈 이야기겠어요? 마땅한 이야기겠습니까? 마땅한 이야기죠. 당연한 이야기죠. 그걸 성령받기 전에 진작에 좀 말 듣지. 악령이 있을 때는 뭐든지 반대로 했어요. 그럼 성령은 어떠하느냐? 성령은 인간을 십자가의 원수로 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하는 일을 반대로 인간이 했다면 이제는 성령은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을 반대로 해 버려요. 하나님 하는 것을 인간이 반대로 하고 그 인간이 하는 것을 반대로 하는 것. 그게 바로 십자가의 영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 지키는 것이 어때요? 굉장히 쉽지요. 하나님의 말씀 어떻게 지키는가? 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그것이 주님의 십자가를 못 박게 하는 일인 것을 인정하게 되면 그게 말씀을 지키는 거예요. 지금 아무도 동의 안하는 것 같은데. 자, 산상설교 한번 봅시다. “남을 비판하지 말라” 나오지요. 비판하지 말라. 비판하는 비판으로 네가 비판 당할 것이다. 자, 엄마가 이야기했어요. 아들은 어떻게 합니까? 말썽쟁이 아들. 로마서 7장 이야기입니다. 율법이 왔을 때 율법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못하게 만들고 내 속에 죄가 있어서 그걸 어떻게 합니까? 그걸 위반하는 식으로 나를 몰아세우는 것이 내 속에 악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율법이 주어진 곳은 내가 뽑아낼 수 없는 내 속에 괴물 악을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기능을 율법이 하는 거예요. 그 율법의 완성이 뭐냐? 십자가고 십자가 연속성이 성령이 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성령은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에게 비판하지 말라고 오죠. 옵니다. 그러면 그 비판하지 말라는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그동안 계속해서 지금까지 비판하고 있고 심지어 이 말씀을 듣는다 할지라도 이 순간에 이 산상설교 7장에 나오는 비판하지 말라 나는 들었는데 너는 이 비판하지 말라 모르지?! 나한테 한수 배울래? 하는 식으로 남을 비판하지 말라는 그 말씀 가지고 남을 비판하는 본성이 거기서 되살아나요.


그런데 성도는 뭐냐? 성령 받은 사람은 이 일을 누가 했단 말입니까? 이 일을. 이 일을 누가 했지요? 내가 한 게 아니고 거룩한 율법의 연속선상에서 누가 하신 것이다? 십자가 안에 다 들어있고 그것을 성령께서 지금 율법적 기능을 우리한테 완전한 것으로 적용을 시키니까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럼 묻습니다.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을 우리가 이룬 겁니까? 안 이룬 겁니까? 둘 중에 하나인데 아무거나 찍으세요. 이룬 거예요? 안 이룬 거예요? 이룬 거예요. 성령 안에서 모든 것을 우리가 온전케 하고 완전케 된 겁니다. 이게 여러분들이 정리가 돼야 돼요. 마태복음 5장 46절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그 다음에 뭡니까? “너희도 온전하라” 라고 되어있지요. 너희도 온전하라. 그럼 이 말씀이 우리에게 딱 들어오게 되면 우리 속에 있는 죄가, 육신이 있는 한 죄가 있어요. 그래야 육신이 무너지니까요. 육신의 죄가 이 말씀을 이미 들었기 때문에 죄가 어떻게 돼요? 죄라고 하는 것은 악마의 욕망이죠. 마귀의 욕망이에요. 이 말씀을 쉽게 이야기해서 이 잔소리를 하나님 쪽에서 했잖아요. 그럼 내가 악마라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방법은 뭡니까? 이 잔소리를 알고서도 이걸 개무시해버리는 방법을 사용하게 되면 내가 누구보다 더 쎄다? 하나님보다 더 쎄지요. 내가 하나님보다 더 쎄다. 또는 더 소중하다. 또는 더 귀하다. 더 우선적이다. 더 가치 있다. 하나님보다 내가 더 의롭고 선하다. 이게 바로 악마가 아담에게 찾아와서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인간에게 이걸 심어준 게 이거에요. 내가 하나님보다 쎄고 더 소중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걸 하나님을 뭐로 바꿨습니까? 예수님으로 바꿨지요. 인간은 아무도 예수님을 못 알아봤어요. 예수님으로 바꿨다고요. 바꿔서 이야기하면서 예수님께서는 더 쎈 율법을 준 거예요. 산상설교보다 더 쎈 율법을 준 거예요.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켰다고 자부하니까. 오늘 본문에 의해서 이 말씀을 하나님께 충성스럽게 지키는 그 중에 사울도 있었어요. 지키는 사람들이 누굴 죽였습니까? 예수님을 죽였지요. 이게 무슨 권세다? 요한복음의 어두움의 권세고 악의 권세에요. 악의 권세를 주님이 일부러 건드린 거예요. 지금도 말씀이 우리를 건드려요. 건드리게 되면 잠자고 있던 잠잠한 악마의 마음, 다시 말해서 하나님보다 누가 더 중요하다? 하나님보다 내가 더 중요해요. 우리의 본심은 그게 우리 안에 들어있다니까요. 그런데 고마운 점은 뭐냐? 이 사실을 나만 꿍하고 누르고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이건 정신병 걸린 거예요. 이걸 하나님의 말씀으로 끄집어내주니까 이게 더 이상 내가 나를 조작할 수 없게 되는 거예요. 내가 죄인 됨을 내가 어떤 식으로 변명할 필요 없고 내 죄를 변명하지 않는데서 나는 뭘 느끼느냐? 자유를 느끼는 겁니다. 내가 나이 많아서 무너진다. 하나님 제가 요즘 다리가 아파서 걷지도 못해요. 나 아무 쓸모 짝 없어요 하면 하나님께서 뭐라고 합니까? 그래서? 그래서 뭐? 그거 당연한 거 아니야? 아! 참 당연하네요. 이게 자유잖아요. 이게 자유란 말이죠. 관절 수술하고 이게 아니고. 그냥 내가 이 나이에 다리 아파서 걷지도 못하고 남한테 도움 받는 이 구차함, 자존심 상함, 내가 어른으로서 자식들에게 얼마나 했는데 이제는 이 잘난 나를 상대적으로 나보다 못한 자식 손에 의탁해서 겨우겨우 비비고 살아간다는 이 자체가 젊은 사람은 몰라요. 나이 많은 사람은 그게 얼마나 비굴하고 자기 자존심이 망가지는 짓인지요. 나 내가 왜 이러지. 내 몸이 왜 이렇게 됐는가. 그러더라도 성령이 함께 하시면 어떻게 됩니까? 그게 바로 나로부터의 자유 아닙니까. 나의 그 본색을 이제는 주께서 알아서 노출시키고 공개를 해주니까 더 이상 나 잘났다 할 필요 없는 기분 좋은 인생이 준비되어있지 않습니까? 지금 나만 웃고 있나?


계속해서 평생 동안 여러분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주셔서 성령과 더불어서 말씀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점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처음에는 그냥 안 끄집어냅니다. 말씀대로 살라고 애를 써요. 그래! 주의 말씀, 거룩한 말씀 성경에 보니까 “내가 거룩한즉 너희도 거룩하라” 하니까 ‘말씀 지켜야 거룩하겠지’ 하고 바리새인처럼 말씀 지키고 하지요. 하는데 주께서 뭘 준비하는가? 사건을 준비해놔요. 사건을 딱 준비해놓으면 이게 내가 말씀 지키는 것도 욕망이고 그 욕망의 모델로 나는 타인을 찾았어요. 스데반 집사, 사도 바울처럼 또는 신앙 좋은 누구처럼 어떤 목사님처럼 그걸 모델로 삼아서 나도 그 사람처럼 신앙생활 잘하고 싶은 욕망이 내 속에 욕망이 거기서 자극을 받고 튀어나오는 거예요. 저 정도 되면 주위에서 나 믿음 있다고 하겠지. 종교적인 욕망의 자태의 모습을 보여준다고요. 천사처럼 되려는 그것. 그런데 감사한 것은 그것조차도 주께서 나를 구원하는 절차에 포함이 되어있다는 거예요. 요거 요거 요것 봐 요거 지키지도 못하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뭐 어떻게 지난번에 기도 응답했잖아요. 뭐 궁시렁 궁시렁 나오는 거예요. 이걸 다 끄집어낼 때 비로서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주께서 성령 안에서 우리로 말씀대로 지키게 하시는 거예요. 비판하는 자는 비판받는다를 이제는 내가 나가서 지키는 게 아니고 그 내 삶의 현실 자체가 비판하는 자는 비판받게 되어있다는 것을 티내는 현실로 바꾸어줄 때 그게 바로 언약의 온전함이에요. 이게 언약의 온전함이에요. 제가 뭐 더 할 것도 없어요. 그냥 성질대로 살면, 성질대로 살 때 조건이 있어요. 반드시 끝에 감사가 나와야 돼요. 십자가에 대한 감사. 감사.


자, 그러고 난 뒤에 우리가 하늘에 오를 때 찬송을 부른다 합시다. 부를 때 이 가사 내용에 나오는 모든 내용은 이거는 누가 준비하는 거냐 하면은 주님 쪽에서 준비한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겁도 없이 잘난 내가 이 노래를 부르면서 잘난 나로 나를 규정하려고 했던 거예요. 나중에 이 찬송 부르면 정말 우리가 이 찬송을 부를 자격도 없다는 식으로 부를 때 이 찬송을 누가 부르느냐? 우리 안에서 성령께서 이 찬송을 부르게 하는 겁니다. 이것만 찬송입니까? 아득한 먼 곳 그것도 십자가 안다면 자기 죄를 안다면 이것도 바로 찬송이 되지요. 떠난 여자 그리워서 어디 갔는지 모르지만 나 너 때문에 산다. 아 이게 바로 주께서 이야기한 마귀가 나한테 집어넣은 타인의 욕망, 충족되지 못한 타인의 욕망이구나 하고 나 자신을 다시 한번 들추어서 끄집어보는 그 즐거움이 있지요. 끝으로 산부인과에 간호사들이 애를 엄마 뱃속에서 끄집어내서 이렇게 들어서 엉덩이를 친다는 그런 설이 있어요. 그 설을 잘 안 믿습니다만은 치고 할 때 아이한테 의사를 물어봤습니까? “응애 응애 나를 들어주세요” 했습니까? 안 했지요. 일방적으로 들어서 발가벗은 모습을 다 드러내가지고 울어야 산다고 숨통이 트인다고 치지요. 주께서 우리를 이렇게 들어주는 거예요. 살라고 선언을 해버리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뭘 해도 성령 안에서 모든 게 용납된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 세상의 권세의 유혹을 우리가 너무 얕잡아봤습니다. 너는 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살면 될 줄 알았습니다. 서로 연관되어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나는 독불장군처럼 말씀대로 바르게 살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모두가 똑같은 인간인 것을 십자가의 원수인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바로 언약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온전한 말씀을 드러낼 수 있는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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