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날 – 이 근호 목사(240816, 수동고을펜션)
…32면체, 64면체 새로운 내용이 추가되는 거예요. 추가 면이 계속 발전하는 거예요. 축구공에서 이쪽 면을 이야기했다면 이쪽 면을 하면서 저쪽 면을 보게 되면 그렇게도 설교할 자신이 없는 거예요. 너무 완벽해서 자신이 없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은 내가 했다’가 될 수 없고 주께서 그냥 활용한 거지요. 그 때의 나를 주께서 활용하시고 그래서 전하고, 그것은 그 때로 끝났고 오늘 또 활용하시면 그것으로 끝내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 가끔 주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목사님의 지난 설교를 듣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5년 전, 10년 전의 설교를 듣고는 그때의 설교가 더 좋았다, 지금보다 더 나은 것 같다, 또는 그 반대의… 그런 소리들을 가끔은 듣습니다만.
그것은 뭐냐 하면, 그 사람이 사는 현 상황이 그 설교와 부합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상황이 달라지게 되면 또 다른 내용이 그 상황과 맞을 수가 있기에 그것은 주님께서 말씀을 그 사람에게 써먹는 것이지 설교자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 그때가 낫다, 지금이 낫다, 라는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그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제 책을 거의 안 보는데 어쩌다 예를 들어 『민수기 속의 그리스도를』 보잖아요. 보게 되면 ‘왜 나는 지금 이 수준만큼이 안 되는지’ 하게 됩니다. 너무 잘해놓은 거예요. 그래서 이걸 보면 열등의식을 느껴요. 제가 제 책을 거의 안 보지요. 보게 되면 이 수준만큼을 내놔야 되는데, 보게 되면 이 수준만큼 맞출 자신이 없는 거예요.
지금 이 순간은 주께서 하시는 일을 증거 하기 위해서 들어온 소스(source)이기 때문에 과거하고 항상 단절되어 있는 거예요, 지금의 이 소스는 발전했다는 말이 아니고요, 이 (面)을 하다가 또 다른 면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고요, 또 뭐가 기다릴지는 모르겠어요. 그래서 과거의 설교나 강의를 보면서 ‘야, 정말, 이 표현은 정말 멋진 표현이다.’ 남의 이야기를 하듯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고 왜 그걸 보기 싫으냐 하면, 지금 그만한 수준으로 할 자신이 없기 때문에요. 열등의식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내가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내가 이 정도까지 끌어올려야 되는데’라는 욕심이 생기기 때문에 아예 그걸 안 보는 거예요. 그게 하나의 우상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다만 이런 것도 있습니다. 대장간에서 나온 『레위기 속의 그리스도』 이런 책을 보잖아요. 보게 되면 ‘이런 것은 좀 더 친절하게 해줄 걸 왜 정답만 이야기했을까?’ 그런 불만이 있습니다. 지금 보니 그렇지 그 당시로 돌아가면 그때는 그것밖에 몰랐기 때문에 그때는 그대로 다 내어놓은 거지요.
중국에서 강의한 것 있잖아요. 그런 강의 들어보면 약점을 찾을 수가 없어요. 다 맞는 이야기니까요. 다 맞는 이야기인데 굳이 약점이라는 것은 뭐냐? ‘이것을 이렇게 구구절절 다 이야기했었어야 했나?’ 이렇게요.
- 복음 전한다는 것은, 항상 알아듣지 못하는 말만 해야 되고 두 번째는 진멸이 그 내용 속에 들어가야 한다고 하셨지요…?
그래야 돼요. 그래야 성령께서 듣는 사람에게 직접 작용을 하시지 내가 말하는 지혜와 지식이 그 사람에게 도움을 주면 안 돼요. 고린도전서 2장 4절에 나오지요. ‘내가 전하는 것은 사람의 지식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역사로 한다’면 나는 못 알아듣는 이야기를 해야지요.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 진멸, 그 내용은 넣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대체 못 알아듣는 이야기를 한다는 이것은 도무지 가능치 않아 보입니다.
제가 수련회 녹취한 것을 취합해서 정리를 끝냈습니다. 거기에 이런 요소가 들어가 있어요. ‘십자가를 알려고 할 때, 그 십자가를 알려고 한다면 그 십자가는 미련한 속성의 내용이 날아간 엉터리 십자가’가 돼요. 십자가가 계속 미련해야 되는데 ‘언젠가는 내가 너를 먹고 말거야, 치토스!’ 하는 것처럼 미련한 것을 지식으로 바꾸기 위해서 애쓴다면 십자가는 점점 뒤로 물러가는 거예요. 우리 손에 안 잡히는 거예요. 만약 그 미련한 십자가가 지식이 되어버리면 그것은 내 손에 있는 십자가가 되기 때문에 미련 요소가 빠져버리고, 미련 요소가 빠져버리면 구원의 권능도 함께 날아가 버려요.
옛날에 신학교에서 강의했는데 만약에 그전처럼 또 시간을 준다면 정말 단 한 사람도 못 알아듣는 이야기만 계속해서 하는 거지요. 그렇게 하고, 그리고 묻는 거예요. “내가 하는 말이 틀렸습니까?” 이렇게 묻지요. 그러면 틀린 말은 하나도 없는데 본인들이 전혀 안 믿고 있었다는 것이 들통나겠지요. 내가 안 믿어져야 그다음에 주님의 능력으로 믿는다는 것이 성립이 돼요. 70 이레 강의[*2010년, 2월 27일, 한국개혁신학회 주최 학술발표회 강연, <다니엘 70 이레에 대한 비역사적 해석>]를 할 때 오목사님이 그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을 제가 기억해요.
그때 목사님이 굉장히 흥분하고 분노했거든요. (맞습니다. 그때 그랬습니다.) 그때 제가 목사님을 보면서 ‘목사님이 좀 참았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든 이유가…, 70 이레 서문에 나와 있어요. 이것은 인간이 못 알아듣는 이야기를 한 거지요. 못 알아듣는 내용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멋진 효과가 나온 거예요. 소위 독일에서 신학박사를 한 사람들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고 하는 거예요. 바로 그거라니까요. 그렇게 못 알아듣는 데 문제는 ‘이 말이 틀렸는가?’ 그 말입니다. 그러면 그들에게는 모순점이 생기지요. 틀린 말이 아니고 다 맞는데 본인이 못 알아듣는 거예요. 왜 못 알아들었을까? 진리가 없어서 못 알아듣는 거지요. 그들의 지식의 한계 때문에 못 알아듣는 거예요.
-그래도 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안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아니에요. 생각 다 해요. 왜? 그들이 제일 기분 나쁜 것이, 분명히 틀린 말은 아닌데 말하는 족족 못 알아들을 때 첫 번째는 분노를 느끼면서 두 번째는 뭐냐, 자기를 돌아보게 돼요. ‘나는 이런 내용의 공부를 왜 안 했을까?’ 그게 내가 하는 강의의 효과에요. 왜 나는 들뢰즈 공부를 안 하고…, 논문에 들뢰즈 이야기 나오고, 지젝 이야기도 나오잖아요. 들뢰즈나 지젝, 세상의 철학가들의 개념을 하나도 그들이 모르는 거예요. 함축되어 있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너무 공부를 안 한 거예요. (나름 그 사람들이 공부깨나 했다는 사람들인데요.) 그런데 못 알아듣지요. 박영선 목사도 마찬가지예요. 자기 딴에 인기가 있어도 나의 그런 이야기를 그들이 못 알아먹는 거예요.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김성수 목사입니다. 저에게 찾아왔어야지요. 제 것을 베꼈으면서 말입니다. 부끄러워서 못 오는 거예요. 서울대학 출신에다 수만 명이 자기를 최고라 하는데 왜 저를 찾아와요? 추종자가 많아서 그래요. 그게 시험입니다. ‘나’의 추종자가 많아서. 다른 말로 뒷배가 많아서 그래요, 뒷배가. 그래서 만약에 70 이레 강의를 또 하라고 한다면 기존에 70 이레 강의에서 나왔던 내용을 하나도 안 하지요.
- 그때 그리고 그 뒤에 하셨던 것들을 하나도요?
예! 주께서 다른 소스를 주면 그 소스대로 70 이레 강의를 하되 그 강의를 이미 다 들었던 사람이라도 새로운 그 이야기에 대해서 못 알아듣는 이야기를 해야죠. 그래서 이건 뭐냐? 구원은 주께서 살아계셔서 직접 다이렉트로 그 사람을 구원하는 거예요. 내가 주님을 어떻게 쫓아가고, 어떻게 주님한테 해드리는 것하고 아예 그 관계가 끊어져야 돼요. 그 관계를 끊는 것은 뭐냐? 내가 나하고 관계가 끊어져야 된다는 거지요.
- 수없이 들어도 그 말처럼 또 어려운 말이 없습니다. 아니, ‘어렵다’ 가 아니라 불가능하지요.
그러니 목표가 없어야 돼요. 목표가 없어야 주께서 목표를 새롭게 주시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나에게는 직접 그런 소리 안 했는데 다른 사람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해요. 칼빈 그리고 칼 바르트 다음으로 목사님을 존경한다고. 내가 그게 화가 난 거예요. 내가 칼빈과 칼 바르트를 비판했거든요. 칼빈과 칼 바르트를 나하고 비교한 거예요. 칼빈과 칼 바르트가 뭐가 약점인지를 내가 다 알고 있는데 (자기가 칼 바르트나 칼빈을 잘 안다는 그것 자랑하려고 한 거 아닌지) 칼 바르트가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칼빈은 전통적으로 최고고요. ‘모차르트하고 베토벤을 감히 나하고 비교하다니’ 그것과 똑같은 거예요.
왜 그리스도만 증거 하지 못 하는가, 그것에 내가 화가 난 거지요. 그리스도만 우리를 우리 되게 한 것, 살아계신 주님이 그렇게 했는데 왜 칼빈과 칼 바르트가 거기에 왜 끼느냐, 그 말이지요. 그래서 70 이레, 당시의 교수들이 그렇게 화를 낸 거예요. 자기들은 칼빈과 칼 바르트 공부를 다 했잖아요. 심지어 어떤 교수는 불트만 이야기도 했지요. ‘내가 이목사 당신을 비판할 건데 왜 우리에게 비판할 수 있는 어떤 여지를 안 주느냐? 왜 우리가 아는 이야기를 하나도 안 하느냐?’ 그 말이지요.
그래서 그 논문 발표시간에 그들이 화가 난 거예요. 그러니 그런 자리에서 오목사님은 굳이 화낼 필요가 없었다고요.
- 저도 그때 뒤쪽 자리에 있었거든요. 그런데 저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사님이 더 강력하게 근거를 들어서 말해주기를 바랬거든요. 그런데 생각보다 금방 끝내시는 느낌이 들어서 너무 안타깝고 속이 상하더라고요. 저것들을 그냥 확…, 그런 생각, 좀 저들을 보기 좋게 이겨주시기를 바랬던 거예요.
그런 것은 논문에 다 있으니까요. 논문에 자기들이 아는 이야기가 있으면 그냥 넘어가면 되는데 서론에서 첫마디부터 나온 단어가 무슨 이야기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 목사님이 쓴 논문 중에서 아주 어려운 논문 중 하나인 거지요?
최고 어려워요. 함축되어 있기 때문에 어려운 거예요. 깊이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함축되어서 어렵지요. 그래서 전에 미국으로 박사 따러 간다는 어떤 분에게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해준 거예요. ‘논문 쓰려거든 언어를 창조하라’는 거지요. ‘기존 언어를 가지고 쓰지 말고 네가 언어를 개발해서 담아버려라. 그러면 심사하는 교수가 부끄러워서라도 통과시켜 줄 것이다.’ 기존 심사하는 교수가 다 아는 언어를 써버리면 다른 것을 요구해요. ‘앞으로 내게 뭘 잘 해줄래? 내 논문 대신 써 줄래?’ 이런 식으로 학위를 주면서 주고받는 것이 있기 마련인데 그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네 논문이 내 안에 다 있다’ 그런 뜻이거든요.
그런 논문은 쓰면 안 되지요. ‘교수가 심사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쓰려면 딱 하나밖에 없다. 그게 뭐냐? 그들이 쓰지 않는 용어를 거기에 집어넣어라.’ 그분에게 내가 그런 조언을 했어요. 언어를 만들어야 해요, 언어를. 언어를 새로 만들려면 어떻게 하느냐? 기존에 저쪽에서 쓰는 언어, 예를 들어 ‘다면체’(多面體) 라는 개념의 언어. 혹은 수학에서 쓰는 서수(序數) 혹은 기수(基數)를 가져오는 거예요.
단어를 따오면 저쪽 개념이 날아가 버려요. 이 안에서 새로운 개념이 개발돼요.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되지가 않아요. 어떻게 하느냐? 실례로 내일, 혹은 모레 준비될 언어에 대해서는 어떤 음악 속에 이미 들어 있어요. 유행가가 하나 있어요. 어떻게 활용될지를 지켜보는데 일단 나만 지켜보는 거예요. 그게 들어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지켜봐야 돼요. 준비했다고 다 들어가는 것은 아니에요. 이것이 들어갔을 때 그 흐름이 방해가 되는지 아닐지 그것은 설교하는 그 현장에서 다시 결정되는 거예요. (아이고! 이래가지고 누가 설교하겠습니까. 아이고, 들으나마나 한 소리 같습니다. 이건 설교를 하지 말라는 거지)
한마디를 했을 때 그 다음 말이 예상되면 안 돼요. 어떤 말 뒤에 그다음에 예상을 못 한 말이 나와야 되고 그래놓고 또 그다음에 예상 못 한 말이 나와야 되고요. 그러면 시간 가는 줄 모르지요. 예를 들어 월요일 대전강의 때 “어제 한 주일 설교 요약합시다.” 혹은 안양강의에서 수요설교 요약할 때 요약하면서도 내가 모르는 내용이 거기에 들어간다니까요. 새로운 내용이 요약하면서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수련회 강의에서 했지요. 꿈을 꿔놓고 꿈을 해석할 때 꿈과 다른 내용이 들어간다고요. 그러니 꿈의 연장이지요. 설명하면서 그 꿈이 새로운 꿈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마치 요셉이 꿈 이야기할 때 5년 전의 꿈 이야기가 5년 후의 꿈 이야기와 또 다르거든요. 자기의 꿈이 바로 왕에게까지 전염이 되고, 바로의 신하에게까지 타고 넘어가는 것은 요셉의 예상 밖이었습니다. 내 꿈인데 저쪽이 내 꿈속에 예속이 되어버리는 현상이거든요. 그게 살아계신 언약의 활동입니다.
이것은 뭘 어떻게 하라, 말라, 그 이야기가 아니고 참, 이 세상이 오묘하고 신기하고 놀랍다…. 이것이, 이미 시작된 천국 생활이에요. 천국 생활이라는 것은 이 세상 인간들이 만들어내지 못한 것에 대해 공급을 받고 있는, 이미 시작된 생활이에요. 죽고 사는 문제는 이미 없어요. 그것은 아무 문제 아니에요, 죽고 사는 문제는. 지금 사는 것도 신기한데요.
지금의 상태가 되기까지 주께서, 얼마나 많은 변수를 천사와 성령께서 막아줬는지 몰라요. 왜 오목사님의 휴대폰은 물에 빠지고 내 것은 안 빠졌느냐? 그것은 그 시간대에 파동이, 그때 파도가 안 쳤어야 됐어요, 사실은. 파도가 안 쳤어야 되는데 왜 그때 하필 파도가 쳤느냐는 겁니다.
- 저는 목사님이 탄 튜브가 앞으로 진행되기를 바라는 것 같아서 갑자기 그렇게 해드리고 싶었던 거죠. 그런데 목사님은 목사님대로 뒤집어져버리고 제 휴대폰은 물에 가라앉아버리고… 휴! 구원은커녕 다 망했습니다.
- 예수님이 언제 유다를 구원해라 했습니까? 냅둬야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사후적이고 소급적이에요. 사후적으로 돌아보면 모든 것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이 짧은 멘트 안에 다 들어 있는 거예요. 범사에 감사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올림픽은 그때 왜 열려서 어떤 이는 신학교에 가게 됐더란 말이냐, 뭐 그런 거죠. 하여간 이 인간이라는 거는요, 나이 들어본 적이 없어요. 인간은 처음 태어날 때부터 그리고 나이 70이 되어도 하늘나라에서는 시간이 절대로 흐른 적이 없어요. 그냥 순간이고 또는 영원입니다.
- 어제와 오늘이 그런 것 같습니다 …. 아, 그런데 저는 되게 힘들어요. 뭐가 지금 잘 감당이 안 되고 있어요.
목사님은 ‘내’가 뭔가를 갖추려고 하니까 힘든 거예요. 내가 갖추려고 하니까 힘든데 그야말로 나는 내 것이 아니고, 로마서 14장 7절에 나온 것처럼 나는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이라 한다면 ‘또 뭘 어떻게 만들어내실 겁니까?’ 하고 기다려 보세요. 다음에는 또 뭘 더 빠트릴지. 그러다가 나이 80 넘어서 죽으면 ‘아, 내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
지난 주일 낮 설교하면서 제가 충격 받은 것은 그거예요. 요한복음 12장 24절 ‘한 알의 밀알이 죽지 아니하면 그대로 있다’는 거요. 우리는 그대로 있고 싶어서 얼마나 애를 썼어요? 나 그대로이고 싶어서. 그게 바로 우리가 이단의 표상이었어요. 나다움이 유지되기 위해서. 죽으라고 인간을 태어나게 했는데 이게 안 죽고 버티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이것은 얼마나 주님을 훼방하고 있는지 장애 요소고, 방해요소지요. 설교하면서 제가 저한테 충격받은 거예요. 세상에 이것도 모르고 그동안 뭐 했느냐 하는 식으로.
- 설교하실 때 그 내용을 듣다 보면, 다 목사님의 현재 이야기같이 들립니다.
그렇지요. 그런 것을 깨우치기 위해서 아내가 있어서 쉴 새 없이 잔소리를 해대는 거예요. 쉴 새 없이 하게 되지요. 배후의 주께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항상 의문점, ‘이것은 뭐지, 이것은 뭐지?’ 하는 의문점, 의문을 계속함으로써 뭔가 안다는 것이 얼마나 더 크게 모르는 것이 남아 있다는, 그 남아 있는 부분을 더 많이 알기 위해서, 계속 ‘나는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로써만 이 땅에 살게 하는 겁니다.
‘어떤 것들이 모르는 것이 있는가?’ 하는 거지요. 모르는 즐거움, 무지에서 오는 즐거움입니다. 무지가, 모르는 게 많이 남아 있다는 데서 오는 포만감. “나 이것도 모른다~! 나 신났어~!” 이런 거요. 그럴 때는 남하고 비교하거나 비교 대상이 안 된다는 것. 타인의 인생을 부러워하거나 그 인생 앞에서 절망하거나 할 이유가 없지요. 모든 것은 주님 앞에서 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그 사람 인생이고 나는 내 인생인데 차이점은, 내가 모르는 것에 의해서, 내가 모르는 힘에 의해서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아는 힘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게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과 반대지요. ‘아는 것이 힘’이 아니고 ‘모르는 것이 힘’이 되는 거예요. 모르는 것이 힘인데 그걸 실천에 옮기는 분이 오 목사님 같아요. “모르는 것이 왜 설교단에 서겠어요? 나 못 섭니다.” 실천이지요. 이게 말로가 아니라 실제로.
- 저는 자신 있게 그런 것이 아니고 절망스러워서 그렇게 됐습니다. 신이 나서 그렇게 되면 목사님의 취지대로 맞는 건데, 저는 그런 쪽은 아니었습니다.
절망에서 나오는 힘이라는 거지요.
- 그런데 오늘 우 집사님 아들이 운영하는 사업장에 가셨을 때 뭔가 하실 말씀을 준비하셨던 것 아닌가요?
혹시 아들이 한 3분이라도 그 좌석에 앉으면 할 이야기가 있었지요. 첫 주제는 그거예요. 인간은 기계라는 것. 그 단어, ‘인간은 기계다.’ 아까 이야기한 내용과 연결됩니다. 마찬가지예요. 인간은 기계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 그러면 반박을 해봐라.’ 하는 취지입니다. 맞지요. 반박이 안 되지요. 기계 맞으니까요. 기계 맞잖아요. 뭐예요? 아침에 일어나서 지금까지 한 것이 뭐예요? 기계, 방앗간의 기계 아닙니까?
그 말 하는데 한 30초 걸리겠지요. 그 말 하고 “바쁘신데 가셔도 됩니다.” 하게 되면 그분에게 ‘인간이 기계’라는 말은 누구에게서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을걸요?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몰라요. 누군가 이야기를 해줘야 하는데 누가 이야기를 해줄 때 반박이 안 되는 이야기를 해야 된다고요. 왜냐하면 인간은 누가 내 이야기를 하게 되면 반박을 할 준비를 하기 때문에요.
그러면 반박이 안 되는 그 이야기를 해야 돼요. 인간은 기계다. 기계 맞지요. 그다음 나오는 이야기는 그쪽에서 예상이 될 거예요. ‘왜 사냐? 기계인데.’ 기계는 자체가 죽은 거예요. ‘그러면 왜 움직이지?’ 기계가 죽을 수가 있어요? 생명이 없는데. 그러면 사는 의미가 뭐냐, 이 말이지요. 사는 의미요. 그것은 다른 기계를 흉내 내면서 살지요. 그저 다른 기계를 흉내 낸 거예요. 동대문 시장에서 바지만 팔다가 이제는 남방까지 팔고요.
준비된 멘트는 할 기회가 없었지만 아드님이 반갑게 맞아준 것만 해도 고마워요. 그것도 주의 은혜거든요.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 예수님 말씀이 있지요. 나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내 편이라고 하는 그 말씀이요. 똑같은 말씀인데 나와 함께 하지 않는 자는 내친다는 것도 있지요. 그 똑같은 말을 주께서 남겼다는 거지요.
어떤 상황일 때 그 말씀이 적용되느냐? 바로 주님의 모든 말씀은 내게 일어나는 변화와 연동되게 되어 있어요. 연동되게 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항상 어떤 사건이든, 어떤 일이든 말씀을 소환하는 계기로써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이해 안 되던 말씀이 새롭게 이해된다든지, 사랑의 깊이와 높이가 더 깊어진다든지, 그것 때문에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겁니다.
어쨌든 내 것이 없으니까 바지를 팔든 남방을 끼워 팔든 내 것은 아니니까, 자식을 둘 키우든 셋 키우든 어쨌든 내 자식은 아니니까, 주께서 말씀의 활동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미 천국 생활을 시작한 거예요. 그걸 위해서 대왕해물철판, 그런 것도 먹어보고요. 가성비 높고, 해물도 많이 있는데 국물은 해물탕보다 못하다는 거, 실컷 먹었는데 맛으로 먹은 것이 아니고 양으로 먹었다는 거. 처음에 맛보기처럼 먹었던 비빔국수가 더 맛있었다는…. 모든 경험들이, 말씀이 살아있는 거예요.
인간은 풀이고 말씀이 살아있다. 그것 하기 위해서 일어난 일이에요. 저는 거기에 휘말려 있고 여러분도 같이 휘말려 있고요. 내가 생생하게 휘말려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설교고 그렇지요.
- 현대철학, 정신분석학의 세계에서 라캉이 최고입니까?
최고지요. 도넛 두 개가 얽힌 그림. 상대방 속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 내 속에 아무것도 없고, 타인의 속에도 아무것도 없고 그 사이에 언어만 있다는 그것, 그게 인간이 밝혀낼 수 있는 전부지요. 그동안 인간의 역사는 뭐냐? 인간 속에 뭔가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뭐가 있는 것이 아니고 허하단 말이죠. 저쪽 상대도 아무것도 없어요. 나도 역시 아무것도 없어요. 하지만 있는 것처럼 하면서 이야기를 계속 하는 거예요.
- 진짜 허하다는 게 너무 맞아요. ‘아무리 인간의 욕망, 무의식이 말을 통해 나타난다.’ 또는 ‘인간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해진다.’ 등등의 멋지고 깊이 있는 말을 하였다한들 그런 사람도 말년이 되면 약점들만 남기고 결국 죽드라구요. 세계 거장이다, 대단하다라는 사람들의 끝을 보면 더 허무해져요. 결국 본인도 본인의 말에 갇혀서 못 빠져나온 채 흙으로 가는 거니까요. 못난 사람들은 그냥 조용히 가는데.
그래서 다 허하기 때문에 없음이 목표가 되지요. 없음이 목표인데 그 사람한테는 없음이 목표가 아니고 ‘없음’을 ‘있음’으로 하는 과정에서 언어를 사용하는데 그 언어사용, 그것이 목표가 되는 거예요.
- 그냥 말을 하기 위한, 말 자체를 위한 것이라는 거죠.
그렇지요. 끊임없이 죽을 때까지 말하다가 그냥 다 죽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바로 치료의 방식이 된다는 겁니다. 정신병 환자에게서는 오직 말을 끄집어내면 되고요. 그래서 사자머리 있잖아요. 오은영 박사. 그 사람이 하는 수법도 다 그거예요. 어떻게 치료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치료합니까?”라는 이야기를 끄집어내면 이미 치료가 된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중에 그 사람은 또 치료가 된다고요. 무슨 이야기든 괜찮아요. 그래서 계속 이야기하라는 그 말이지요. 치료라고 할 때, 보통은 정상이라고 하는 그 평균이 안 되는 경우에 치료라는 말을 하잖아요. 라캉은 그런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고, 자기 증상을 자기가 수용할 맘이 있으면 이미 치료가 된 거예요. 말을 더듬는다? ‘나는 말을 더듬는 사람입니다.’ 하면 그것이 치료가 된 거예요. 라캉에 따르면 ‘자기가 말을 더듬으면서도 안 더듬으려고 하니 그것이 바로 병든 것이다. 말을 더듬는다면 그냥 더듬으면 된다. 그 치료가 되려면 끊임없이 남하고 이야기를 해야 된다.’고 합니다. 그 근거가 뭐냐? 인간은 어릴 때부터 부모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그런데 커가면서 돈이 개입해서 언어다운 언어가 없어졌기 때문에 돈을 개입시키지 말고 그냥 말만 하면, 오늘 우리와 같이 말만 하면 셀프치료의 방식이 가동되고 있다고 봅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이것이 자주 올 수 없는, 얼마나 귀한 기회입니까? 이렇게 멀리서 와서 만난다는 것이. 그래서 치료가 안 되는 사람의 특징이 말이 안 나오고 말이 안 될 때 이것은 백프로 정신병이라고 보면 됩니다. 말을 안 하고 꽁, 하고 있을 때. 자꾸 말을 해야 돼요. 이 이야기는 쉽지요, 어려운 것 아니지요. 그렇지만 말을 계속할 수는 없고 이제 주무세요.
댓글
우인숙
지네집 동네에 팬션을 지가 얻었으니 아무리 바빠도 퇴근하고 밤에 지들 내외 같이 방문했으면 하는게 내 바램이고 꼼수였는데 완전 어긋났네요~~월요일 내가 가게 가서 세분 사모님이 가져오신 선물 그대로 갖다 주었습니다 허허로운 마음 둘데가 없네요~~과한 내 욕심이지만 ~~잠도 얼마 못 잤을거 같네요 요번에 비쩍마른 오목사님 너무 수고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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