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날 – 이 근호 목사(240817, 수동고을펜션)
내가 물음이 있을 때 비로소 존재는 있는 거예요. 그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를 반대한 사람이 ‘알랭바디우’(Alain Badiou, 1937~)에요. 하이데거와 알랭 바디우. 알랭 바디우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철학은 존재 밖으로 못 벗어난다는 그것이 맞는데 이 존재를 표현을 못 한다고 하지 말고 표현을 하는 방법이 있다. 그것이 수학이다.’ 그게 수학의 집합론이에요. 그래서 알랭 바디우가 나오면 너무 어려워서 그 책을 볼 엄두가 안 나요.
하이데거는 수학은 없기 때문에 그럭저럭 되는데 말의 자리에, 존재의 자리에 수학을 집어넣어 버리니까 안 그래도 수학은 짜증이 나는데 ‘집합론’ 이것은 산수가 아니거든요. 집합론의 사고방식, ‘체르멜로 정리’ 이런 것을 공부해 보면 도대체 무슨 말인지, 한 페이지를 못 넘어가는 것이 아니고, 한 문장도 아니고 한 단어도 못 넘어가요. 그 정도로 알랭 바디우가 어려워요.
그런데 그 알랭 바디우가 수학을 빌려올 때 그 본래 사상, 내용은 누구 것인가? 라캉(Jacques Lacan, 1902-1981)의 내용으로 다 채워버려요. 같은 시대인데 라캉이 빠르지요. 알랭 바디우와 라캉은 서로 좋은 관계지요. 그리고 지젝(Slavoj Žižek, 1949~)은 라캉쪽이고요. 그리고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는 불교입니다. 왜냐하면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쪽이거든요. 들뢰즈는 니체쪽이고 일종의 불교에요.
불교라는 것은 관계만 있고 아무것도 없다는 거거든요. 그런데 라캉은 기독교적이에요. 라캉의 극단이 지젝인데 지젝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에요. 다른 하나님은 없고 십자가에 달린 그 분이 하나님이다. 이것이 지젝입니다. 그렇게 주장을 하는데 그게 한계라는 거지요. 철학은요, 절대로 뭘 하라고 하면 안 돼요. 그렇게 하면 그것은 철학계에서 반칙이 돼요. 사랑 이야기는 지젝도 하고 알랭 바디우도 하고 다 하기는 해요.
지젝의 주장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만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사람들은 그걸 믿을 수밖에 없다는 말을 해요. 그 말은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렸든 안 달렸든 나는 안 믿는다는 뜻인데 그 안 믿는다는 그 말은 안 해요. 왜냐? 모르겠다. 모르기 때문에 아는 것은 아닌데, 곧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만 하나님이라는 그것은 인정을 못 하겠는데 뭘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게 철학의 한계라니까요. 성령이 없는 사람들의 특징이에요.
그래서 세상의 지혜는 십자가를 찾아가는데 십자가가 도망쳐 버리잖아요. 절대로 십자가는 인간에게 잡히지 않는다고 어제 했지요. 이번 수련회 녹취 정리하면서 그 내용이 들어갔어요. 알랭 바디우는 완전히 기독교지요. 왜냐하면 라캉을 인정하기 때문에 기독교에요. 그래서 ‘있음’ 안에서 우리는 서로 협력할 뿐이다. 다만 진리는 아니고 지식에 불과하다. 진리는 아닌데 진리인 척을 하는 것이 네 가지다. 예술, 정치, 사랑 등 이런 거요.
다시 말해서 그냥 사는 대로 살면 된다, 그거예요. 성령을 안 받았으니까 저쪽 세계를 모르는 거예요. 모세가 40일 동안 밥도 안 먹고 물도 안 마셨다는 그것을 자기는 생각하기 싫은 거예요. 왜? 자기 한계 밖에 있으니까. 한계 밖에 있으면 논리적으로 다른 사람의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많아요. 가능성이 아니고 완전히 공격받지요. ‘왜 모르는 이야기를 하느냐? 철학의 존재 이유는 사람들이 알아듣는 이야기를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행복하게 하고 진리를 알게 해주는 것이지 왜 모르는 이야기를 하느냐? 그것은 종교가 아니냐?’
그런데 아까 말한 알랭 바디우, 라캉, 들뢰즈, 하이데거, 이 사람들은 종교를 아주 작살을 내 버렸어요. 종교는 철학이다. 그래서 그들이 종교를 연구하고, 신학을 연구하고 성경을 해석한 것들이 그들의 책에 다 들어 있으니까 저는 그 철학책을 보면서 아울러 다 알 수 있는 거예요. 종교의 끝은 어디인가? 그들이 다 밝혀냈으니까요.
특히 도넛 두 개가 얽힌 그 그림. 전에는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은 욕망의 화신이다’ ‘포이에르 바흐’(Ludwig Andreas von Feuerbach, 1804-1872)가 그런 소리 했는데 그것이 아니고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거예요. 하나님이 아무 내용이 없기 때문에 믿는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에게 타자, 남이 되기 때문에. 그래서 가운데가 빈 도넛 두 개의 그림인 거예요. 그들이 밝혀낸 종교는 그게 끝이에요.
신이 없기 때문에 안 믿는 것이 아니고, 없기 때문에 믿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는 내가 그 나의 대화상대가 하나님밖에 없기 때문에 기도한다 그 말이지요. 그래서 소위 종교 권력을 쥐고 있는 신부나 목사나 신학자들이 할 말이 없는 거예요. 수도사나 수녀들이 할 말이 없는 거예요. 자기들이 모르는 한계를 철학에서 다 밝혀냈으니까. 그래서 종교인들이 얼마나 사기꾼들이라는 것이 다 까발려져 버렸지요.
이 사람들은 성령은 안 받았는데 믿는 사람들이지요. 믿는 사람들이 관심은 성경에 있잖아요. 성경을 탐색하고 탐구하면서 성경의 본뜻은 무엇인가를 지적 호기심으로 연구해 가는 거예요.
- 그러면 그들의 주장은 일단 맞는 건가요?
성령이 없는 사람들은 맞는 것은 하나도 없어요. 그냥 노력하는 거예요.
- 그들이 기독교나 종교의 끝을 밝혀낸 그 부분에 대해서는…
무슨 뜻인지는 알겠는데 그걸 맞다고 하면 안 되고 그들은 그냥 노력한 거지요. 다만 본인 입장에서는 잘 표현했다고 할 수는 있어요.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유도한 거예요. 불신자의 끝은 어디냐? 다시 말해서 마귀가 인간에게 뭘 가르치는가? 이런 것들을 계속 공부시키는 거지요. 한계 안에서 반복하여 빙빙돌기, 그런 거지요.
사도바울은요, 하나님의 능력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그런 말도 그 사람들은 이해를 못 해요. 이해 못 한다고 해서 그만둘 사람들이 아니고 계속 연구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능력은 무엇이냐, 해서 그 능력을 연구해요. 항상 출발이 ‘있음’이라는 거예요, 있음. 우리가 여기 있다는 거예요. 성경은 뭡니까? 네가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은 ‘내가 여기 있는데 왜 없어?’ 이렇게 되잖아요. 그러면 그들은 ‘아, 성경에서 없다고 하는 것은 이런 뜻이구나’ 하고 내놔요. 그런데 그런 뜻이라고 내놓는 자기는 또 있잖아요. 그러니까 하이데거 같은 경우는 결국 불교랑 비슷하지요. 라캉은 불교의 한계를 알지요. 지젝 같은 사람은 불교를 굉장히 공격해요.
불교는 뭐냐? ‘있고, 없고’에서 끝나는 줄 알았죠. 불교는 마이너스가 없다는 거예요. 마이너스가 없어요. 허수를 몰라요, 허수를. 지젝의 책들을 보면요, 와……, 과학, 심리학, 인지과학, 인공지능, 전부 다 거론합니다. 그들의 한계를 다 밝혀내요. 두뇌 신경과학까지 다 있어요. 양자역학, 상대성원리 다 이야기해요.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에요, 그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거지요. 그래서 그 철학자들이 과학을 굉장히 비난하지요. 인간을 완전히 기계로 만들었다고요. 인간이 어디에 빠지는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그러면 과학계에서 가만히 있습니까? “철학자들! 우리가 틀렸다면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해?” 그것은 모른다고 하지요. 마지막 답변은 ‘모른다’예요. 결국은 남는 것이 뭐냐? 윤리인데, 철학의 마지막은 윤리인데 ‘피차 뭘 모르는 사람끼리 모른다고 하고 살자.’ 이것이 소크라테의 윤리입니다. ‘내가 얼마나 무지한 것을 알자’ 무지한 것을 알자고 한다면 그 무지가 뭔데? 그것은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러니 전부 다 ‘모르겠다’예요. 복음의 증인이 아니고 ‘모르겠다’의 증인이 되었어요. 성령을 안 받았으니까. 신학자들은 결국 봐도 모르거든요. 예를 들어 “몇 번이나 용서해줍니까?” 이런 것이 성경에 있으니 그것은 알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몇 번 회개하면 온전한 회개인가요? 전에 설교시간에 했지요. 히브리서 6장에서 ‘한번 비췸을 얻고’ 그 대목에서 했잖아요. 도대체 몇 번 회개하면 되는 거예요? 주님한테 물어보세요. “490번 회개하면 됩니까?” 490번의 490번이나 해라.
기존의 목사들이 그 짓 하고 있다고요. “회개하세요. 주께서 용서해주십니다. 탕자가 돌아오면 용서해주십니다.” 안 되는데, 인간이 안 되는 것만 성경에 나와 있는데 그들은 회개하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자기가 자기를 조작하라는 말과 같은 말이에요. 예를 들어 “난 올림픽 열리던 그때 회개했어요.” 이런 거요. 이것은 자기가 자기한테 사기를 치고 있는 거예요.
어쨌든지 진짜 복음을 들은 입장에서는 그런 것들이 다 짜증이 나는 거예요. 왜 사기를 가지고 진짜인 척을 하느냐? 내가 모르면 너도 몰라야지, 이것과 똑같은 소리예요. ‘진리가 있다면 믿는데 진리도 없으면서 진리인 척은 하지 말라.’
---------------(사이)----------------
- 몇 시간 논쟁하다가 자기는 또 영이 없는 사람은 맞대요. 당신들이 그것으로 기쁘다고 하니 부럽다는 얘기랍니다. 한 쪽에서는 “야, 그 세계는 말로 안 된다니까 글쎄. 그래서 뭐 먹을 거냐고! 제발 뭐 먹을 건지나 알려줘야 주문하지. 쓸 데 없는 소리들 하고 있어.” 생존 방식이 여러 가지로 교차합니다.
이 목사가 전하는 복음은 진리 맞는데 이건 도대체 접근 자체가 안 된다는 뭐 그런 소리인지. 사실 영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그런 소리조차 안 해요. 그게 이번 수련회 주제 중의 하나였어요. 사람들 관심은 어떻게 밥 먹고 사느냐, 어떻게 이 광야를 벗어나느냐, 그것뿐이에요. 그게 목이 곧은 거예요. 그런데 그 옆에 누가 붙어 있어요? 언약궤가 붙어 있는 거예요.
- 그런데 목사님의 말씀은 늘 ‘평소에 여러분들 잘하는 거, 그거 있잖아요. 밥 먹고 사는 데 집중하라’는 식으로 하시잖아요.
예, 이번 수련회에서는 아예 더 나가서 원망만 해야 한다고 했잖아요. 이렇게 더 나가야지요. 인간은 자꾸 조작을 하거든요. 선악과를 따먹어가지고 ‘내가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이것은 착한 것이 맞지요?’ 이런 식이라. 왜 자꾸 본인이 맞아야 되지요? 진멸의 대상인데. 일은 주님이 했는데 존재의 의미가 왜 자꾸 나한테 돌아오느냐는 말이지요.
어쩔 수 없어요. 나는 존재하기 때문에. “그러면 내가 죽여줄게. 네가 아니라 내가 죽여줄게.” 그 죽이는 과정이 인생입니다. 대왕해물철판 그런 것 먹어가면서. 이런 식으로 죽는 거예요. 이게 자살의 방법 중에서 돈이 좀 들어가는 방법인데. 바지락 먹는다든지 죽는데도 돈이 좀 들어요. 얼마나 비싸다고요.
제가 오래전에 로이드 존스의 책을 보면서 성경을 그대로 본 것 같아요. 그런데 철학책들을 보면서 이들이 주로 서양 철학자들인데 이들에 의해서 분석이 끝났어요. ‘아, 인간은 저런 식으로 조작을 하는구나.’ 그렇다고 해서 뭔가가 번개처럼 스치듯이 한순간에 과거라는 어떤 특정의 언제, 어느 시점에서 복음을 그렇게 깨달았다는 그런 식은 아니에요.
- 그런데도 사람들이 많이 궁금해들 할 것 같습니다. 목사님은 언제 그 십자가 복음이라는 걸 알게 되셨는지. 그런 질문을 많이 받지 않으셨는지요?
언제 깨달았느냐, 하게 되면 다시 나에게로 의미가 되돌아와 버려요. 왜냐하면 그런 것이 하나의 어떤 순간이 되어버리고 다시 미래가 와버리면 그것은 순간이 아니고 과거가 되어버리지요. 그러나 ‘순간’에 ‘영원’이 와버리면 이것은 내일이 되고 모레가 되더라도 계속 영원으로 남아야 되지요. 나라는 인간이 갖고 있는 시간관념은 과거–현재–미래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상실되었다는 말은 지난 것도 영원의 주님께 속하고, 오늘도 주님께 속하고, 내일도 주님께 속한다면 ‘언제의 그 시점에 그런 일이 생겼느냐’ 하는 것은 의미도 없고 성립이 안 된다고요.
그것보다는 자기가 경험한 것들이나 고민거리들을 이야기하지요. 저한테 개인적 관심은 별로 없지요.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전에는 이러면 안 된다, 라는 식으로 했지만 성령 이후에는 기쁨으로 반복하지요. 왜? 이미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것을 반복할 수 있는 거예요. 바지 팔다가 이젠 남방까지 팔고 다음에는 자동차를 팔 지…,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거예요, 뭐든지.
- 남방 팔다가 망할 것 같은데요.
남방 팔다가 죽으라고 하는 거예요. 그거 해서 망하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한테 어떤 할 일이 주어졌다는 것을 굉장히 고맙게 여겨야 돼요. 망하나 안 망하나 이미 망했고, 일단 할 일이 주어졌다는 것. 그래서 제가 젊은 사람들에게 하는 소리는 딱 한마디입니다. “놀지 말라, 지나간 것은 그저 지나간 것이고 지금 너 뭐하냐? 놀지 마라.” 뭐든지 하라는 말이지요, 뭐든지.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아버지와 아들관계가 그대로 성도에게 주어지기 때문인 거예요. 아버지가 일하고, 아들이 일하고, 다음에는 우리가 일하고. 그런데 그 일이 주의 일인 거죠.
주의 일은 뭐냐? 날 죽이는 거예요. 나를 죽여야 주의 일이라고 해요. 내가 주의 일을 하고 있는데 주께서는 주의 일을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게 증인으로 나타나기를 원하는 거예요. 나타나는데 그 방해가 누구입니까? 내 계획이 있고 내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게 방해가 되는 거예요.
사람이 왜 죽습니까? 본인이 죽는 이유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왜 자꾸 늙는 겁니까?” “글쎄요. 죽네요.” “그게 죄 때문에 죽는 겁니다. 그런데 본인은 죄를 압니까?” “잘 모르지요.” 그러니까 주의 일을 방해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은 죄라고 규정했는데 그 규정을 나는 안 받겠다고 지금 보이꼬트 놓고 있는 거예요. 누구한테 시달려도 ‘아, 이렇게 죽이시는구나.’ 그럴 때 성령이 없는 사람은 나를 괴롭히는 사람에게 복수하면 되지요. 목을 조르든지. 잔소리를 심하게 하든지 꼴 보기 싫으면 목을 졸라버리면 되는데, 그것은 성령이 없는 사람이 하는 짓이고요.
성령이 있는 사람은, 그쪽에서 도리어 내 목을 조르기 위해서 그쪽이 살아있는 거예요. 이러나저러나 영광은 주께서 받으시고 우리는 감사할 문제지요. 그래서 부부도 이혼하면 안 돼요. 나를 죽이는 킬러하고 같이 살아야지요. 내가 그 기회를 빼앗으면 안 돼요. 이혼들 하지 마세요. 나를 죽이는 킬러이십니다.
그런데 집에 안갑니까? 얼른 가서 또 심방 설교 올려야지요. 참, 사모님이 엊그제 이 책이 어떤 책인가 물으셨는데 그 이야기만 잠깐 말씀드릴게요. 목회자가 쓴 책을 가지고 성경에 나오는 개념들이 어떻게 쓰이는가, 그걸 보는 거예요. 내가 이 책을 사게 된 이유가 ‘기존의 말의 세계에서 성경을 볼 때 기껏 어느 한계까지 볼 수 있는가’가 나와 줘서예요. 고마운 책들이죠. 예를 들어 이 책에서 히브리어로 ‘나비’라는 것은 ‘선지자’라는 뜻이거든요. 선지자에 대해서 여기 나오는 그 설명, 인간들의 지식, 말을 아는, 성령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성경을 열심히 볼 때 나올 수 있는 그 한계가 나와요. 그리고 연관된 본문들이 나오는데 그 본문들을 채택하는 그 이유, ‘왜 그는 이것이 이것과 연관되어 있다고 여기는지’의 그 사고방식이 파악이 되는 거예요.
이걸 보게 되면 이 개념 잡기, 개념잡기라는 것은 전체적인 의도 속에서 부분적인 개념잡기가 튀어나오게 되어 있거든요. 말을 할 때 그 개념잡기를 거꾸로 소급하게 되면 ‘나는 성경을 이렇게 봅니다.’하는 전체구조가 파악이 되게 되어 있어요. 그게 다양하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이걸 보면서 성경의 어떤 내용들을 내가 놓친 것이 있지 않은가, 내가 주목하지 않은 어떤 것들이 있었던가를 봅니다. 성경을 해석해서 나온 한글 해석들을 보면 사실은 다 제멋대로에요. 자기 신학의 사상에 맞추기 위해서 하는데 그렇게 맞추는 동기, 어떤 생각을 했기에 그것이 맞다고 우기고 주장하는지, 이런 것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책을 사게 되는 거예요.
이 책은 올해 3월 25일에 나오고 2쇄를 찍은 책인데요, 처음 몇 개만 봐도 그 사람의 신학 사상이 다 나와요. ‘아, 이 사람은 성경을 이런 눈으로 보고 있구나.’하는 것을요.
- 그렇게 해서 사람들의 생각의 동기나 구조를 빨리 들여다보신다는 거지요.
예, 동일한 성경을 놓고 개념을 어떻게 취득하고 그것을 구성하는지, 어떤 의식인가를 파악할 수가 있어요. 당연히 모든 인간은 다 진멸되어야 하니까요. 이런 사람들이 외국에서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겠어요? 10년씩 외국에서 공부를 하면서 공부한 것을 책 한 권으로 남겼으니 그걸 저는 쏙 가져다가 쓰는 거지요. 이 책은 히브리어 개념들을 정리한 것이고, 같은 유형인데 헬라어로 개념을 정리한 것도 있어요. 이 책이 2만 3천 원인데 가성비가 높아요.
여보, 우리 먼저 가면 안 될까요??
'기타(이전지역강의포함)'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릉수련회(사적모임2) (0) | 2024.08.23 |
---|---|
강릉수련회(사적모임1) (0) | 2024.08.23 |
여수바다 특강 (1) | 2024.01.30 |
원주 질문과 답변 (0) | 2022.07.02 |
천년왕국의 반복 (0) | 2022.07.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