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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바다 특강

아빠와 함께 2024. 1. 30. 23:02

여수바다 특강(240129, 이근호 목사, 겨울 수련회 에베소서 정리)

수련회 때 안 나온 이야기가, 그 내용이 나와요. 왜냐하면 강의가 끝나기 전에는 전체 그림은 못 그렸어요. 이제는 수련회 강의가 끝났기 때문에 전체 그림을 그릴 수가 있어요. 성경을 볼 때 내가 여기 있고 ‘창세 후’부터 시작했잖아요. ‘창세 후’부터 마지막 재림 종말까지. 이것 가지고 인간들은 죽자, 하고 붙들고 있는 거예요.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마지막에 세상 심판한다, 끝낸다, 이게 전부였다 그 말이에요. 그런데 에베소서는 ‘창세 전’까지 포함을 시켜버렸어요. 포함을 시키니까 이렇게 ‘창세 전’까지 포함을 시켜버리면 뭐가 문제냐? 이건 결정적 문제인데요. 이걸 존재라 하는데요. 여기에 같이 포함되었기 때문에 해답이 안 나와요. 해답이 나올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본인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본인이 포함되지 않는 상태에서 관찰되어야 되고, 파악되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본인이 여기에 첨가되어 버리면 본인이 포함되어 있는데 본인이 이야기한다? 너무 이것은 일방적인 자기주장일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이 우리 집안이 어떻다 하면 객관적이잖아요.

그런데 “내가 우리 집안을 객관적으로 이야기해 줄게.” 이거 객관적 아니에요. 왜 그러냐 하면 본인이 그 집안에 소속이 되어 있으니까 객관적이 아닌 거예요. 지금까지 교회나 어디서 성경공부 하면서 객관적인 것을 원하지만 객관적일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내가 성경 전체를 파악하려고 하니까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어떻게 보느냐? 제 9강에 보면, 디모데후서 1장에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해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9절)   Who hath saved us, and called us with an holy calling, not according to our works, but according to his own purpose and grace, which was given us in Christ Jesus before the world began,

그러면 여기 있는 내가 창세 전으로 건너갈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내가 여기 이미 태어났는데. 이미 있는 존재는 창세 전으로 못 돌아가요.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에베소서의 내용은 뭐냐? 창세 전에 있는 분이 나의 자리에 와요. 나의 자리에 옵니다. 나의 자리에 오면서 우리보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비켜라, 비켜라!” 비켜라.

마태복음 16장 24절에 “자기를 부인”하라 했어요. 예수님이 자기를 부인하라 했잖아요. 자기를 부인하라. 이걸 어떻게 우리는 못해요. 우리가 이렇게 있는데 자기를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자기를 부인을 하려면 창세 전의 사태가 나에게 와야 자기가 부인이 돼요. 창세 후의 사태로 아무리 반성해도 부인이 안 됩니다.
  And He is the image of the invisible God, the first-born of all creation.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주님이 우리 자리에 와요. 우리 자리에 오게 되면…, 우리는 창세 후잖아요. ‘창세 후’지요? 주님은 ‘창세 전’의 분이지요? ‘창세 전’의 분이 ‘창세 후’에 오는 것, 이게 뭐냐? 이게 자기 부인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수련회 때 강의 안 한 겁니다. 비슷하게는 이야기했지만.

이게 자기 부인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내린 결론은? 인간의 힘으로 자기 부인이 된다, 안된다? 안됩니다. 될 수가 없어요. 자기 부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에베소서는 전체적으로 …, 벌써 에베소서가 끝나버렸어요. 굉장히 간단한 문제입니다.

에베소서 1장에서 ‘창세 전’이라 되어 있는데 골로새서 1장 16절을 연결해 보자는 겁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 잘 아시지요?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모든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이 누구로 말미암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여기에 하나 더 넣읍시다, 예수님을 위하여. 그러면 이 전체가 뭐냐? 이게 바로 ‘창세 전’입니다. ‘창세 전’에는 ‘나를 위하여’가 있다, 없다? 허용이 안 되지요. 그러면 ‘나를 위하여’는 지옥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천국입니다.

굉장히 간단한 문제에요.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해 예수 믿는 것은 다 지옥 가는 거예요. ‘주를 위해서’ 천국 가는 거예요. 그런데 ‘나를 위해서’에서 ‘주를 위해서’로 가려면 뭐가 되어야 되느냐 하면, 자기 부인이 되어야 되거든요. 이거 우리가 된다, 안된다? 안돼요. 안됩니다.

그러면 에베소서 1장에서 인간은 불가능이지요. 인간은 불가능. ‘인간은 불가능’을 다른 말로 합시다. ‘창세 후’의 존재는 ‘창세 전’의 사태로 못 돌아간다. 이 말이 굉장히 상식적인 말이에요. 맞는 말이고 상식적인데 문제는 못 돌아가면 어디로 가느냐 하면, 지옥으로 가야 돼요. 못 돌아간다면. 왜? 자기 부인이 안 되니까. 할 수가 없어요.

자, 그러면 여기서 제 강의를 잠시 멈추고 여러분의 아이디어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창세 후에 태어나서 자기 부인이 안 되는 상태에서 지옥 가는데 어떻게 하면 우리가 구원될 수 있느냐? 아이디어를 한 번 끄집어내 보세요. 이런 아이디어를 끄집어내는 게 중요해요. 왜냐하면 내 위주로 나 구원받기 위해서 신앙생활 하다가 이걸 멈췄다는 뜻이에요.

문제를 제기한다는 자체가 ‘지금까지의 신앙생활이 나 잘되라고, 구원받으려고 하는 이것은 일단 엉터리다. 이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게 아니라면, 이게 아니라면 뭔데? 어떻게 하는데? 에베소서 2장 봅시다. 1장과 관련되는데 1장 3, 4절에 이 단어가 나와요.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여기에 ‘예수 안’이라는 말이 나와요. ‘예수 안’을 그리고 여기 예수님이 이렇게 있고, 이게 예수 안이에요. 동그라미 친 이게 ‘안’이거든요. 예수님이 여기 있고, ‘예수 안’을 동그라미. 그러면 여기는 예수님만 계신 것이 아니고 이 동그라미 안에 들어올 사람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들어오는 조건이 뭐냐? ‘창세 전’에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내용을 알아야 들어올 수가 있어요. 이유가 뭐냐? ‘예수 안’을 예정했기 때문에 그래요. “예정하사” ‘예수 안’을 예정하신 거예요. 언제부터? 창세 전부터. ‘창세 전’부터 ‘예수 안’을 예정했기 때문에 천국 간다는 사람은…, 이걸 우리가 아는 게 아니고요.

창세 후의 사람은 창세 전으로 못 돌아가요. 그 전제를 놓치면 안 돼요. 이 전제를 놓치게 되면 지식이 된다고요. 우리는 예수 안으로 들어가서 이렇게 들어가야 돼요. 예수 안으로 갑니다. 방향이 1번(예수 안)→2번(창세 전), 이렇게 되어야 해요. 여기까지 뭐 어려운 것 없지요.

이제 에베소서 2장 들어갑니다. 우리가 예수 안으로 들어가려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려면 우리가 누구 안에 있느냐, 부터 먼저 알아야 돼요. 우리가 누구 안에 있느냐? ‘우리가 누구 안에 있기는? 나 혼자 있지’ 이러잖아요. 주님께서는 에베소서 2장에서 ‘너는 저주와 처벌을 받아야 될 진노의 자녀와 함께 이 악한 세상 신, 세상 신 안에 있다.’고 보는 거예요.

우리가 악마 안에 있는 거예요, 악마 안에. 우리는 몰랐지요. 우리가 악마 안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원하지도 않고, 우리는 그냥 태어났을 뿐이에요. 태어났는데 그걸 ‘악마 안’ 있다는 거예요. 동의 안 하지요. 사람들이 이것 동의 안 합니다. ‘내 주변 아무리 봐도 마귀가 아닌데? 내가 결정해서 인생 살았는데?’ 이렇게 되지요.

그래서 에베소서 2장 1절에서는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해서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라고 해요.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 죄와 허물, 그리고 진노의 자녀, 악마지요, 악마 안, 이걸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이걸 죽음이라고 표현해요. 이것도 우리로서는 납득이 안돼요.

내 목숨 끊어지는 것이 죽음이지, 어디 안에 있는 것을 두고 멀쩡히 살아 있는데 죽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죽음이란 뭐냐? 죽음이란 창세 전과 창세 후가 관계가 끊어진 것, 끊어진 상태, 이게 바로 죽음입니다. 이게 죽음이에요. 창세 전과 후가 끊어진 상태.

한 번 보세요. 지금까지 한 것에서 우리가 뭘 해야 되는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어요,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면 이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마귀가 우리보고 뭘 하라고 했어요? 뭘 하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뭘 자꾸 하라고 하는 거예요. 주님은 그럴 필요 없다는 거예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해 봤자 마귀 안에서 노는 것밖에 없어요. 그러면 주님께서는 “기다려 봐” 어떻게 하느냐? 에베소서 2장 죄와 허물, ‘죄+허물’이 뭐라고 했어요? 죽음이지요. 여기서 죽음 1과 죽음 2를 봅시다. 죽음 1은 예수님이 창세 전에 알았던 죽음, 그리고 죽음 2는 인간들이 마귀 안에서 아는 죽음이에요.

여러분이 강의 들은 것이 생각날 거예요. ‘죄+허물’에 대해서 두 가지 안목, 하나는 뭐냐? 첫 번째는 인간들의 안목이지요. 인간들의 안목, 두 번째는 예수님의 안목, 이렇게 두 가지가 있겠지요. 인간들의 안목, 예수님의 안목. 인간들의 안목은 무슨 안목이냐?

선악 지식에 대한 죄와 허물을 따지는 거예요. 양심에 의해서. 예수님의 안목은 뭐냐?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는 것이 죄가 돼요. 십자가의 의미.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는 것이 죄가 됩니다. 그러면 여기가 인간 공간입니다, 인간 공간.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와 허물 속에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어떻게 하느냐? 여기서 인간이 선악 지식을 동원하지요.

인간의 선악 지식의 내용은 뭐냐? 선과 악을 분별하는 겁니다. 왜? 선악 지식이기 때문에. 그것이 인간 공간이지요. 그러면 예수님의 활동은 뭐냐? 예수님의 활동은 이 안에 들어오지요. 들어와서 공격받지요. 선악 지식의 공격을 받으면 그래서 터진 예수님의 사건이 무슨 사건이냐? 바로 십자가 사건이 터집니다.

인간이 선악을 분별한 모든 지혜의 집대성이 예수님을 향하여 공격을 해버려요. 공격을 했으니까 예수님은 죽었잖아요. 죽었으니까 이 안에 있어야 되잖아요. 예수님은 이 인간세계에서 죽었습니다. 죽고 난 뒤에 예수님이 사흘 만에 부활했지요. 어디 갔지요? 이게, 이게 진짜 어려운 거예요. 수련회 때는 이걸 설명을 못 했어요.

이게 ‘인간 안’이란 말이에요. 인간 안에서 죽어서 여기에 구멍을 내요, 구멍을, 구멍을 내 버린다고요. 구멍 바깥에 뭐가, 뭐가 나오느냐? 예수님이 인간 안에서 벗어나서 나온 요 ‘다 이루었다’의 공간, 이걸 가지고 뭐냐 하면, ‘예수 안’이에요. 하나님 계시고, 예수님 계신 데 여기서 ‘예수 안’이 있느냐 없느냐? 여기는 ‘예수 안’이 없어요. 성립이 안 돼요.

이게 천국이 누구 나라입니까? 천국이 아들의 나라에요, 아들의 나라. 하나님과 아버지 있다고 천국이 되는 게 아니라 그 말이지요. 그리되면 예수님이 주님이 안 돼요. 심판을 해야 주님이 돼요. 하나님과 예수님이 그냥 있으면 심판할 자가 없어요. 그러면 심판할 자는 어디서 만드는가? 인간세계에서 마귀가 죄를 지어야 심판할 대상이 생겨버린다고요.

하나님 계시고……, 여기 중요하니 천천히 해 봅시다. 하나님 계시고 예수님이 계셔요. 여기는 예수 안이 생성되지 않았어요. 여기는 뭐가 있느냐? 인간세계가 있잖아요. 인간세계가 예수님 오셔서 여기서 나간다고요. 나가버리면 인간은 어디 ‘안’에 산다, 가 돼요. 인간은 어디 ‘안’에 살아요. 어디 ‘안’에 산다.

첫 번째, 뭐 ‘안’ 이란 피조물에게 해당된다. ‘안’이라는 것. 왜냐하면 창조자는 전체를 다 포함하니까 ‘안’ 성립이 안 돼요.
두 번째, 예수님이 사람이 된다. 육신이 된다.
세 번째, 사람이 살던 세계 안으로 들어오신다. 사람 사는 세계 안으로 들어와요. 그러면 예수님도 세상 ‘안’이 되어버려요.
네 번째, 세상 안에서 예수님이 구멍을 내버려요.

세상 안이 없으면 그다음에 뭐가 없느냐? ‘예수 안’이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그냥 예수님이 있는 곳을 ‘예수 안’으로 하자. 복잡하게 설명하지 말고. 이렇게 되면 뭐가 성립이 안 되느냐? 예수님 계신 곳에 인간이 들어올 수 있는 처소가 형성이 안 돼요. 요한복음 14장에서, 내가 처소를 마련하게 되면 내가 다시 오겠다 했잖아요.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13절)

여러분이 요한복음 14장 보면서 무슨 생각 했어요? ‘그전에 미리 처소를 왜 안 만들어 놨을까?’ 이런 생각 들지 않겠습니까? 요한복음 14장에서,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성령이 내 안에, 성령이 너희 안에, 이것이 되려면 예수님이 이 땅을 다녀가야 ‘예수 안’이 형성이 돼요.

이 어려운 문제는 알 필요까지는 없지만 성령까지 동원되면 복잡해져 버려요. 뭐냐 하면, 그전까지는 예수님이 성령의 지시를 받았어요. 예수님 공생애 때.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완성해 버리면 성령은 예수님의 지시를 받게 되어 있어요. 쉽게 말해서 예수님은 따로 자기 세계를, 아버지의 허락하에 ‘예수 안’이라는 자기 세계를 따로 만드는 것을 가지고 두 자로 천국이라고 하는 거예요.

천국은 하나님 계신 곳이 아니고, 천사가 있는 게 천국이 아니고 예수님의 공로 있잖아요, 이 땅에서 십자가 지신 그 공로를 기념하는 공간이 천국이에요. 그래서 백성들은 자기 면류관을 반납하고. 일이 좀 복잡해요. 좋게 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오지 아니하면, 우리가 가면 되잖아.’ 아니에요. 그건 천국이 아니에요.

천국은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천국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셔야 되고, 그 열매와 성과가 있어야 그것이 ‘예수 안’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안 = 성령 안’이 되지요. 왜냐하면 ‘예수 안’이 될 때 성령은 그것을 인수받아서 ‘성령 안’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예수님 세례받았잖아요. 그때 누가 왔습니까? 성령이 오셨지요. 예수님 + 성령, 이 함께 계신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이 말씀을 다 이루었기 때문에 이게 뭐냐 하면, ‘예수 안’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 성도가 여기 그냥 있으면 안 되고 ‘예수 안’에 들어가야 되지요.

예수 안에 들어가려면 그 표준모델이 뭡니까? 예수님 + 누구? 성령, ‘예수님 + 성령’이 오셔야 되거든요. 이걸 그대로 복사를 하는 거예요. 우리 안에. 성도는 없습니다. 그냥 죄인입니다. 죄인에게 이걸 복사를 해버리면 우리가 구원받는 게 아니고 ‘예수 안’으로 들어오지요. 왜? 우리 안과 예수 안은 교류를 누가 하느냐? 성령께서 하시기 때문에요.

마태복음 12장 31, 32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인자에게 죄를 지어도 사함이 되지만 성령에게 범죄하면 사함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그러면 인식이 어떻게 되느냐? 인식은, 내가 구원받고 싶다. 이것은 희망이고 실제는, 주님이 우리를 어디로? ‘예수 안’으로 들어가게 해요. 자, 이걸 안다고 치고, ‘예수 안’은 ‘예수님 + 안’이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이룬 성과가 뭐냐?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지요.

그러면 ‘예수 안’에 들어간 사람은 뭐가 되느냐? 하늘에 이미 앉아 있다. 성도는 이미 예수님 안에서 하늘에 앉아 있다. 이게 바로 에베소서 2장 5, 6절입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예수님이 하늘에 앉으셔서 창세부터 종말까지 다 지켜보지요. ‘예수 안’에 있는 성도가 창세로부터 마지막 재림까지 예수 안에 있는 성도가 다 지켜봅니다. 체험하면서 그걸 이해하고, 분석하고, 다 끝내면서 지켜보는 거예요. 나의 미래가 곧 나의 과거지사. 내가 앞으로 살 때 내 과거가 된 것을 사는 거예요. 타임머신. 아무리 살아도 이미 다 주께서 허락하신 나의 과거 체험이 되는 거예요. ‘예수 안’에서 하늘에 앉아 버렸으니까.

나의 신상에 어떤 일, 가정, 자식에게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의당 ‘예수 안’에서 예수님을 위해서 일어나야 될 것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로마서 8장 30절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그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지요? 이게 과거완료입니다. “…하셨느니라.”

이게 나의 미래가 나의 과거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로마서 8장 30절은요, 내가? 아니요. ‘내가…’ 하면 안 돼요. 내가 아니고 누가? ‘예수 안’에서 이게 되는 거예요, 예수 안에서. 이거 주의해야 되지요. ‘내가’가 아니고 ‘예수 안’에 있는 나, 예수 안에서 이걸 내가 보는 거예요, 예수 안에서. 내가 뭐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다 이루었던 것을, 우리가 미래를 체험한다 그 말이에요. 내가 뭐 되는 것이 아니고.

분위기도 이러니 대충 정리합시다. 나의 존재는 없고 예수님이 나의 존재고, 나는 예수님의 숨어 있는 존재를 드러내는 사건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존재해서 계시지요. 나는 여기서 뭐냐? 다른 성도도 마찬가지지만 내가 살아가는 것은 하나의 사건들입니다, 사건들.

이걸 달리 그리면 우리는 하나의 사건들인데 막상 주님은 보이지 않는 존재입니다. 보이지 않는 존재로 우리는 여기서 사건들이지요. 정리해 봅시다. 내가 여기 있고, 다음에 오늘 1월 29일이잖아요? 1월 30일이라 해 봅시다. 여기에 1월 29일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없잖아요.

없을 때 내가 여기서 이렇게 가는 것, 29일에서 30일로 가면서 오늘의 나가 내일의 나다, 하잖아요. 그런 것 없어요. 어디로 가느냐 하면, 예수님을 경유해서 보게 되면, 오늘 사건, 그리고 내일 사건 모두 다 주님의 사건이 됩니다. 내가 존재하는 것이 주님의 사건이라니까요. 내가 존재하는 것이 내가 살아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살아서 일하는 것이 존재하기 위해서 우리는 증거물로 살아 있는 거예요.

내 문제는 없다, 입니다. 모든 문제는 주님이 다 이루심의 흔적이고 증거가 됩니다. 모든 것이. 에베소서 1장, 2장이 제일 중요해요. 제일 중요하고 나머지는 요 이야기를 사도바울이 자기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 부부에 대해서, 가정에 대해서 죽 설명한 거예요. 에베소서 1장, 2장이 제일 어려운 겁니다.

그다음 3장, 4장 조금만 하면 ‘예수 안’이니까 다 이뤘잖아요. 그러면 여기서 나오는 게 뭐냐? 통일이 나오지요, 통일. 통일은 숫자가 뭐냐? 1이겠어요, 2겠어요? 1이지요, 1. 영어로 one, 1이에요. 1이니까 아까 뭐라고 설명했습니까? 이미 보이지 않는 분이 무슨 사건, 1을 보여주는 사건들, 1을 보여주는 사건들이 발생해요. 여러 가지 사건, 사건1, 사건2 …, 사건은 이벤트니까 E1, E2, E3……,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내가 오늘 여기 있는 것도 E1이라면 내일 되면 E2가 되고, 나와 나는 동일하지 않아요. 단 동일한 주님의 사건. 결론, ‘이미 예수 안 = 이미 천국’ 이게 결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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