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원주특강 / 천년왕국의 반복 / 질문과 답변
강의 아니라도 궁금한 거 있으면 말씀하시면, 여러분 궁금한 것이 다른 분들의 궁금한 것이 되거든요. 이런 기회에 내 궁금함을 하나를 따라서 성경 전체가 다 깔끔하게 정리가 되는 그런 기회가 될 수 있으니까 어떤 궁금한 것도 질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백흥진 성도님이 아까 차 안에서 나한테 물었잖아요. 그거 다시 한 번 질문을, 사실 정리가 됐었어요? 천사하고 성령하고 기능의 차이, 기능의 차이잖아요.
질문 : 아까 무슨 질문을 드렸냐 하면 이제 주님께서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라 하고 하시잖아요. 처소의 개념을 좀 여쭤봤어요. 그러면서 이제 마지막에 목사님께서 14만 4천에 대해서 설명하셨잖아요. 12지파하고 12 해갖고 천 해서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그런 숫자, 그러면 주님께서 지금도 일하고 계신 그 처소는 계속 그 저기 완성되는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거냐고 여쭤봤어요. 주님께서 그러면 택한 백성들이 다 구원돼야 되니까 창세전에 택한 백성들이 그걸 기다리고 계신 거냐고 이제 여쭤봤는데 이 목사님께서 이제 지적해 주시는 게 기다림은 기다린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일하시는 게 아니니까 생산하시는 걸로 이렇게 수정을 해 주시더라고요. 그냥 차 안에서 여기까지의 잠깐 질문을.
답변 : 생산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원칙은 이미 정해져 있어요.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거. 성도는 없어요. 생산해야 생겨나는 거예요. 성도는 죽어 있는 자를 살려줘야 그게 성도가 되는 겁니다.
질문 : 성도는 그러면 창세전에 이미 생산돼 있는 자들 아니에요?
답변 : 예를 들어서 레시피가 이미 만들어진 거죠. 그 레시피가 만들어졌는데 그 레시피는 쉽게 하면 쉽게 말씀드리면 그 레시피는 이 땅에서 죽 쒀서 개 준 꼴이 되죠. 죽 쑤어서 개 준 꼴이지만 레시피는 남아 있습니다. 그걸 이스라엘에게 먼저 적용을 했고요. 이스라엘은 그것을 개 줬지요. 죽 쑤어서 개 줬거든요. 근데 그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하신 일을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그것이 신약에 와서 성도 되는데 성도 본인이 아무것도 기여한 바 없음을 확인해 주는 하나의 계기가 된 겁니다.
질문 : 저는요. 목사님. 아까 말씀에 의해 죽고 말씀에 의해 산다고 그랬잖아요. 그 말씀에 의해서 산다는 것은 결국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얘기.
답변 : 아니, 아닙니다. 그건 아니에요. 아까 참 중요한 질문 했는데요. 그런 오해를 할까봐 내가 약간 걱정을 하면서도 시간 관계상 그냥 넘어갔는데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말씀대로 사는 주체가 결코 우리가 아니고 예수님이 말씀대로 적용시키는 거죠. 예수님께서.
질문 : 아니 목사님 죄송합니다요. 말씀대로 사는 게 아니고 말씀에 의해서.
답변 : 그럼 오케이. 그럼요. 그렇죠. 그거예요.
질문 : 성령으로 거듭나는 게 말씀에 의해서 다시 살아나는 거죠.
답변 : 말씀의 적용이라 하는 것이 깔끔하죠. 말씀을 적용하는 거예요. 밀가루 부어놓고 앙꼬 집어넣을 때 국화빵 돼죠. 그 앙꼬를 집어넣는 것이 말씀이라면 말씀을 계속 찍어내는 거, 생산하는 거예요. 자기 말씀을 완성된 말씀을 집어넣어놓고. 닫아버리고 집어 넣어놓고 닫아버리고, 성도가 하나씩 생산되는 거죠. 그 안에 뭐냐? 주님이 다 이루신 말씀만 안에 계속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질문 : 저는 그게 궁금하거든요. 예수님은 성경으로 잉태를 하셨잖아요. 그러면 성도들 또한 저는 성령으로 앙태 된 게 아닌가?
답변 : 당연하지요. 오케이. 그렇습니다.
질문 : 그냥 우리 육은 어떤 육신의 부모 어차피 이게 이제 그런 것이고 창세전에 이미 저희도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하셨듯이 우리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답변 : 네. 당연하죠. 네 맞습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당하는 그 수모, 그 육적인 허약성 반복해야 돼요. 아까 제목을 반복이라 했잖아요. 반복해야 됩니다.
질문 : 제가요. 한 달 전에 목사님하고 사모님 꿈을 꿨거든요. 그런데 어떤 꿈을 꿨냐면, 이성대 교수님이 저희 집에 오셔서 예배를 했어요. 그런데 그때 무슨 말씀을 전하셨냐 하면 누가복음의 귀신 얘기를.
답변 : 잠깐! 방금 그 오신 분이 꿈속에 오셨단 말입니까? 실제로 오셨단 말입니까? 이성대 집사님이?
질문 : 실제로. 그래서 군대 귀신 열두 귀신 돼지로 들어간 귀신. 이제 말씀을 전해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예배가 끝나고 이제 서로 이렇게 얘기를 했던 게 뭐냐면 제가 그 질문을 드렸거든요. 성령 받은 성도도 귀신이 틈을 타는가?
답변 : 본격적으로 설치죠. 본격적으로.
질문 : 그런데 내부에 성령께서 내재해 계신데 어떻게 감히 귀신이 설쳐대느냐 하는 거죠?
답변 : 성령께서 반복시키는 거예요. 예수님이 당했던 그 상황을 그대로 반복시키거든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계실 때 예수님인데 어떻게 감히 예수님을 시험해? 아니에요. 귀신이 아예 예수님을 핍박을 하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가는 데마다 조롱하고 그와 똑같이 성령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귀신이 설치는데 다만 차이점은 성령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귀신이 하는 을 알지요. 예수님이 마귀가 하는 일을 듯이 성도는 이게 귀신의 일인 걸 알아요. 다 이루었다에다가 인간의 행함을 집어넣는 일이 귀신의 일인 것을 알아요. 그게 반복이에요. 반복. 예수님이 하신 그것을 그대로 되풀이 하는 겁니다. 그걸 어떻게 느끼느냐? 아주 고맙고 감사하고 느긋하게 즐기죠. 어떤 분이 제가 어떤 분이 저한테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이제 성도가 새 사람 됐기 때문에 이제부터 죄를 줄여 나가는 방식대로 사셔야 되겠죠 라고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설교 시간에 죄가 없으면 의도 같이 날아가 버립니다. 죄를 줄이면 의가 남는 게 아니고 죄가 없어져버리면 의도 같이 날아가 버려요. 남는 것은 나 잘 난 나 구원받았다. 그것만 남아요. 그게 마귀의 노린 거거든요. 이미 우리는 죽은 자니까 주께서 활용하시는 거예요. 죄를 안 짓는 게 아니고 반대로 생각하면 이제 본격적으로 남은 인생 90 몇 살인지 모르지만 남은 인생 본격적으로 죄가 아니라는 것도 죄로 들추어내는 그 신기한 모습을 마음껏 경험해야 돼요. 내가 이토록 죄인이었구나, 신난다. 이렇게 되어야 해요.
질문 : 다음 질문은 제가 한번. 복음서에 보면요. 귀신 들린 자들이 그런 모습들이 나타나지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가지고 정상적인 사람으로 돌아오게 했는데 그 당시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도 사실은 보면 다 귀신 들린 자라고 이렇게 우리가 보여지는데 그분들이 그러면 진짜 귀신 들려가지고 간질병 걸리는 그런 형태를 보인다든가 뭐 여러 가지 어떤 병적 증세를 그런 보이는 모습 그거하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핍박하는 그거하고 같이 이렇게 볼 수가 있는가요?
답변 : 악마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는 악마의 몸체에 해당되고 그리고 간질병이라든지 이렇게 몹쓸 병에 걸린 것은 발가락이라고 보면 돼요. 작은 것, 누가 봐도 그 당시에 유대 사회에서 저건 귀신 들린 거 맞다, 라고 할 수 있는 것부터 주께서 출발하셔서 이게 주님의 사역의 출발이에요. 출발하면서 어느 선까지 계속 깊숙이 들어가느냐 하면 멀쩡한데 자기 애비가 악마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 그것까지 치고 들어가는 거예요.
질문 : 그럼 이제 이 시대로 우리가 보는 것 같으면 귀신 들린 자와 안 들린 자의 차이점을 보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과 안 받아들인 것 그 차이인가요?
답변 : 받아들인다고 한다면 그거는 안 되고요. 입에서 복음이 나오느냐 안 나오냐 이렇게 하세요. 받아들인다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거든요. 그거 말고 모든 것과 복음과 연계시켜서 이야기할 수 있는가? 그러면 그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이고 복음과 연관 안 되고 복음 따로 자기 하는 일을 따로 돼 버리면 자기 하는 일이 의롭게 돼버려요. 마치 복음은 내가 죄 지은 것만 용서해주고 내가 의롭다 하는 것은 이건 손도 대지 마세요. 이건 나는 충실히 다한 거고 내가 봐도 하자가 없습니다 라고 따로 자기의 의의 몫을 따로 챙겨버리면 복음이 잔챙이만 주님이 잔챙이만 처리하는 것 밖에 안 돼요. 그게 바로 바리새인들의 잘못이거든요. 이 그림으로 설명하면 칠판 가까이 있는 이유를 감사합니다. 악마는요. 이 악마라면 뿔 났다 하죠. 악마는 인간의 다양한 문화 활동, 문화 활동 창세기 4장에 나옵니다. 창세기 4장 문화 활동에 보면 예술도 돼 있고 요새 말로 하면 과학도 돼 있고 정치도 돼 있고 정치에 필요한 것은 법률적 그물망이에요. 그물망. 모든 현대 사회가 법률로 돼 있잖아요. 그물망을 이렇게 전부다 새끼 치듯이 이렇게 된 겁니다. 그중에서 제일 큰 것이 이제 법적으로 법을 세우는 거예요. 이 땅의 질서를 찾기 위해서 법을 세우는 거예요. 다른 것은 법으로 모든 것을 이렇게 지배할 수가 있어요. 마치 검사나 그 출신이 대통령이 된 것처럼 법을 아는 자들이 엘리트가 되어서 세상을 법적으로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여기서 미술을 하는 사람이 있다. 미술 하는 사람이 복음을 받아 들였다고, 아까 제가 복음을 받아들이면 했죠? 그게 잘못이라는 거예요. 복음을 받아들이면 미술도 이것도 의롭고 복음도 의롭다 이래 돼버려요. 그러면 이거는 이 선에서 악마의 선에서 이걸 봐야 되는데 자기 선에서 이걸 하니까 이것도 받아들이고 이것도 다 받아들인 게 돼요. 마치 통지표에 국어 수학 미술 체육 전부 다 수우 이래 있는 것처럼 또는 그 파레트에 미술 파레트에 빨간색 노란색 있는 것처럼 여기에다가 종교란에 기독교 이런 것과 똑같은 거예요. 복음은 이 전체를 여기 십자가를 경유해서 전부 다 하나를 꿰야 돼요. 악마까지. 십자가에서 꿰어서 다시 이것을 봐야 돼요. 다시 이것을 보게 되면 미술을 하는 이 작업조차도 나로 하여금 더욱 더 죄인 되기 위해서 나에게 이런 미술 하는 재능을 특출한 타인과 다른 재능을 주셨다는 것을 복음으로 뭐 하냐 하면 기뻐하는 거예요. 미술 때려치우고 신학교 가는 게 아니고 미술 하는 것 속에서 뭘 발견한다? 내가 죄인인 것을 발견하면서 동시에 죄와 더불어 뭐가? 복음은 뭐냐? 의가 드러나는 계기가 되는 게 이 미술 하는 게 음악 하는 게. 이게 나를 구원하는 게 아니다 이 말이죠. 피카소의 고상한 그림이 피카소를 지옥 안 보내고 천국 갈 수가 없는 거예요. 농사짓는 것도 마찬가지고 고기 잡는 것도 마찬가지고 공무원도 마찬가지예요. 이거 잘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다 이 말이죠. 그거 잘해서. 임윤찬 피아노 잘 쳤잖아요. 그거 잘해서 지가 구원받는 거 아니거든요. 근데 사람들은 이제 니도 교회 가면 좋겠다. 교회 다니겠지요. 교회 가면 좋겠다 하면 이거는 이것대로 하나님의 탈랜트고 거기다가 추가해서 플러스 복음까지 곁들였으니까 이 땅에서는 피아노 치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좋은 계기고 복음도 복음대로 좋다 이렇게 섞일 수 없는 것을 둘을 섞어버리면 이거는 뭐냐 하면 아까 말씀대로 궁극적으로 악마의 뿌리에게 접근을 못하는 거예요. 거기다가 몸까지 멀쩡하고 정신 멀쩡하고 예의 바르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일 것 같으면 그럼 도덕적 윤리는 아까 누가 잘해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잘하잖아요. 그 사람들은 나보다 더 의로운 자가 없기 때문에. 심지어 사울이라는 사람이 뭐라 합니까? 내가 율법으로 흠이 없는 자로다. 하지만 이걸 뭐로 여긴다? 배설물로 여긴다.
질문 : 전에 목사님께서 설교하신 대로 복음으로 나오는 그 모습이 의식이 나오듯이 그렇게 고백이 된다.
답변 : 가정주부가 직업도 없이 애만 키웠다. 이게 뭐가 잘못이냐? 이거 대전 강의에 첫 번째 강의 나와요. 이게 뭐가 잘못, 이게 뭐가 문제냐? 그 자녀가 남의 자녀입니까? 어떤 의식이 뭡니까? 내 새끼죠. 벌써 자기 부인이 안 되는 거예요. 딴 애는 다 굶어도 내 새끼만큼은 하나님이 지켜 달라고 중보기도 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자체가 이 복음과는 상관없는 거예요. 내 자식이 귀한 만큼 그만큼 내가 이 귀한 자식이 이쁠 만큼 이것조차도 죄가 된다는 걸 아브라함이 누굴 바칩니까?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칼로 이삭을 죽임으로써 비로소 언약은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주께서 주셨다는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난 복음 아니까 자식을 키우지 않겠다가 아니라 자식에 대해서 더욱더 애착을 가지면서 니가 없었으면 내가 죄인이 아닐 뻔 했어, 라는 그런 마음으로 자식에게 다가서게 되는 겁니다. 주께서 자식을 붙여준 이유가 비로소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되죠. 부부는 동업자지요. 그 말할 것도 없고 그 자식하고 비교합니까? 부부는 계약에 의해서 김정민이가 불렀던 거룩한 언약식 있잖아요. 계약에 의해서 되는 거고 자식은 내가 원치 않았는데 태어난 거예요. 부부는 갈라서면 되지요. 돈 정리해가지고 니 지분은 얼마고 해가지고 깔끔하게 정리하면 되는 거지요. 그러나 자식은 버릴 수가 없어요. 호적 파라 해도 파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그 애를 먹여도 자식은 누가 건사해요? 마지막 자식은 내가 제일 관심 있어요. 여기서 내가 라고 하는 것은 남편을 두고 하는 게 아니고 아내를 두고. 자기 몸의 확장이기 때문에 자기 몸에서 태어났잖아요. 부정할 수가 없어요. 닮은 걸 어떻게 부정합니까? 닮은 DNA가 닮았는데. 또 다른 질문 괜찮아요. 하세요. 하세요. 다른 사람 할 사람 없습니다. 누가 대신 얻어터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질문 :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아까 제가 질문 드렸던 거, 구름 타고 이제 오신다고 그렇다고 하셨죠. 주님께서 구름 타고 오시는 이유가 이제 시공간의 세계로 오셔야 되기 때문에 가시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답변 : 그렇습니다. 네 자연을 떠나서 일하지 않습니다.
질문 : 부활하실 때는 아무것도 안타고 승천하신 게 이 시공간의 세계를 초월해서 그러니까 엑소더스 나가시니까 아무것도 안타고?
답변 : 부활하고 아무것도 안 탄 게 아니고 부활해서 이 땅을 승천할 때 구름 탔는데요. 사도행전 1장에. 그리고 부활은 그때 나타난 부활 영체는요. 주님이 아버지한테 바로 가는 게 아니고 제자들에게 가르칠 필요가 있었어요. 똑같은 몸을, 부활했는데 몸이 똑같아요. 희한하죠. 몸이 똑같은데 만지지 말라는 거예요. 똑같이 보이지? 그러나 질이 달라. 그걸 언급을 할 필요가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내가 평소에 나는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난다는 그 말씀을 너희들은 믿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루었다. 그래서 내가 부활해서 너희를 계속해서 사랑한다는 그 뜻은 내 쪽에서 예수님 내 쪽에서 너희를 이룰 거야. 왜? 너희들은 이미 나의 부활을 말씀 자체를 아예 안 믿었으니까 그 안 믿는 것을 유지해 줘야 그 제자들에게 그 다음에 성령이 왔을 때는 저들이 군소리 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 전합니다. 자기가 믿었다는 이런 걸 전하지 않아요. 자기가 오직 배신한 것만 이야기하죠. 그래서 그 작업이 필요했던 거예요. 근본적으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는 창세기 3장 24절처럼 이미 추방되었기 때문에 건너갈 수 없습니다. 같이 있을 수가 없어요. 그게 기본이에요. 안 되는 걸 주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되게 하시되 그 대상은 창세전에 예수님이 선택한 자에게만 그 혜택이 주어지지 다른 사람한테는 혜택이 안 돌아가죠. 내 안에 택한 자만 내 백성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아까 시공간을 온다는 그거는 굉장히 좋은 생각이에요. 맞아요. 예수님이 나타나면 시공간을 통해서 나타나요. 시공간에 나타나지 않으면 인간이 상상의 나래를 펴요. 종교성으로 상상의 하나님이 멋지시다,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거룩하시다, 저 하늘나라에 계시겠지, 전부 다 이거는 시공간과 상관없는 인간의 상상의 산물이에요. 실제로 오신 하나님은 비참한 하나님이에요. 도살하는 양 같이 처참하게 망가진 하나님이에요. 그 외에 그 다른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걸 성경에서는 구약에서는 우상이라 하는 거예요. 인간이 상상하는 거룩하고 자비롭고 전능하신 하나님 다 우상이에요. 거짓 하나님이에요. 그런 거 알라신한테 찾으러 가세요. 알라신 그런 거 힌두교 신 그런 거 잘 만들어내요. 그게 그 근거가 바로 예수님이 사도바울을 찾을 때 누구십니까? 나? 나사렛 예수다. 됐냐? 시공간에 있는 나사렛 예수. 옆집에 누구 청년이랑 똑같은 거예요. 난 나사렛 옆집에 있었던 누구잖아.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에요. 예수님 외에 다른 예수님의 아버지는 예수님 외에는 다른 방식으로 알 길이 없습니다. 막혀 있습니다. 또 다른 질문 하세요.
질문 : 에스겔이 환상 가운데서 본 성전과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사도요한이 보았던 성전의 차이점? 차이나 아니면 같은 점?
답변 : 이번에 수련회에 할 건데 반칙이에요. 미리 수련회 주제 이야기하라고 하는 건데 수련회 때 할 걸 지금 하는 셈인데요. 에스겔 1장에 보면 하나님의 보좌가 나와요. 그리고 에스겔 48장에 보면 성전 나옵니다. 이 성전 없습니다. 없어요. 이 보좌도 없습니다. 누구한테만 있느냐? 에스겔에게만 있어요. 에스겔에게만. 에스겔에게만 보좌가 있고 에스겔에게만 성전이 있습니다. 없는 성전과 보좌가 에스겔에게 포함이 되어버리면 에스겔은 뭐가 되냐 하면 인자가 돼요. 인자. 예수님의 호칭 인자, 개인이 된다. 개인. 개인이 알아버린 그 계시는 꽁꽁 묶여져 있어요. 왜냐하면 에스겔 안에 미래의 이스라엘이 전부가 들어 있기 때문에 현재 이스라엘은 이 이스라엘과 너무나 차이지기 때문에 철저하게 이거는 하나님의 뜻에서 이스라엘이 배제돼야 됩니다. 그러면 배제된 이스라엘 속에 뭐가 있습니까? 성전이 있었지요. 배제된 이스라엘에 옛날에 예언이 있고 하나님 보좌 있고 이런 거 있다고 예언서에 돼 있죠. 이 전체가 인간들이 이해하는 이 성경 해석이 나중에 처참하게 다 깨져야 돼요. 이게 잘못된 거짓된 해석이라는 것이 들춰져야 됩니다. 그래서 이 성전을 짓는 그 치수를 재었는데 이 치수가 누구 치수냐? 이게 바로 예수님 치수예요. 이 치수가. 성전 치수가, 이렇게 장 척 장을 재는, 예수님 치수입니다. 예수님 치수가 나중에 예수님의 십자가로 완성이 되게 되면 이거는 성도의 숫자가 돼 버려요. 성도의 숫자. 기존에 이스라엘이 안고 있는 성전은 이스라엘 멸망과 함께 이건 불타 없어야 돼요. 에스겔은 이게 왜 없어져야 되느냐를 설명하는 겁니다. 이미 잠재적으로 따로 준비된 게 있기 때문에 이거는 아끼지 말고 이거는 날아가 버려요. 그러면 이 보좌는 어디 있느냐? 하나님의 보좌는 에스겔에게만 나타나고 다른 사람이 나타나버리면 뭐로 나타나냐? 이거는 불심판으로 나타나 버려요. 보좌를 쳐다볼 새도 없어요. 불이 떨어집니다. 하나님의 보좌가. 불심판이 있는 곳이 보좌가 되버려요. 함축해버리면. 차이점은 하나는 없어져야 되고 하나님의 성전은 이게 없다는 거예요. 없을 때 뭐 나타난다 했어요? 성전과 보좌가 한꺼번에 나타날 때 뭐로 나타났습니까? 인자.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성전의 주인이다. 내가 곧 성전이다.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짓는다. 일반 그 당시에 46년 동안 지은 유대인한테는 이거는 진짜 미친 소리에요. 건물도 벽돌도 없는데 내가 성전이 돼요. 내가. 이 성전이 기존에 있는 성전은 왜 성전이 아니냐? 진짜 성전이 이 땅에서 죽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지어지는 모든 예배당과 모든 성전은 이거는 거짓임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미 그게 밝혀지지요. 왜냐? 왜 그게 없어지느냐? 사람의 손으로 지었거든요. 인간의 행함이 포함된다고요. 법궤 만들 때 누구 손으로 법궤 만들었어요? 그 지혜로운 자들이 만들었죠. 오홀리압이 만들었죠. 그거 다 불타야 됩니다. 그 성전의 그 기구들 다 없어져요. 왜? 모형이에요. 모형에는 반드시 인간의 손이 들어가면 더러워서 안 받아요. 하나님께서.
질문 : 목사님. 근데 언약궤가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늘이 열려 있어 언약계가.
답변 : 계시록의 개념은 구약 선지자에 있는 그 개념을 그대로 따와서 설명한 거예요. 그대로 따 와서. 사도 요한이 볼 때 하늘의 언약계가 보인다 했지요. 그 언약궤가 보인다. 언약의 개념을 언약궤ㅏ는 그 단어 자체가 구약의 선지자에 있는 모형적 단어를 그대로 가져오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 요한계시록이 땅에 있는 성도들에게 인간적 언어로 전파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나중에 보니까 거기에 언약궤만 있는 게 아니고 성전이 있어서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옵니까? 물이 흘러나오죠. 그건 바로 에스겔 47장에 나오는 거기에 물이 흘러나오는 그 대목이 오백 미터 가서 해보니까 이만큼 더 오백 미터 가니까 나중에 더 깊게 깊이 있게 더 들어간다는 거 그걸 신약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그걸 하느냐 하면 바로 요한복음 7장에서 마지막 초막절에 성령 안에를 물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을 성령 안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에스엘 인자가 물속에 들어가다가 나중에 물속에 잠길 정도가 되지요. 나보다 성령이 나를 잠식시키고 덮어버리는 그 시대, 그 시대가 올 것이다. 그래서 에스겔의 역할은 예수님 역할로서 다 했고 예수님이 에스겔의 말씀을 다 이루셔서 성도로 하여금 처소를 성령 안을 처소를 만들어 버리죠. 시간이 흐르지 않는 처소를 만들어버리죠.
질문 : 그러면 지금 이제 언약궤는 사실은 하늘에 없다 이 말입니까?
답변 ; 언약궤는 불타버렸죠.
질문 : 그럼 그 순간에 요한계시록에 보이는 언약궤는 구약 그거를 그대로 빌려와가지고. 답변 : 구약적 용어로 묘사한 거예요. 요한계시록에 다 묘사된 거예요. 요한계시록에. 요한 계시록의 지파 12지파도 전부 다 구약 지파로 나온 거고 다 묘사된 거예요. 완성이 들어있는데 그 완성을 구약적 언어로 완성을 표현한 겁니다. 그걸 이제 마태나 요한복음 보면 간단해요. 그냥 사도 바울은 그걸 뭐로 표출하느냐? 그냥 언약궤 안이라 안하죠. 예수 안 또는 십자가 안 성령 안 그렇게 간단하게 표현해버려요. 표현하는 방법이. 완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전제 되어있는 것들을 요한계시록은 동원시켰다 이렇게 보면 돼요.
질문 : 누가복음 17장 마지막에 보면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답변 : 이거는 예언서에 이미 거기에 이사야인가 예언서에 나와요. 예언서에 보면 징후 또는 징조라고 하죠. 그게 뭐냐 하면 자연 세계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만 인간들만 무식해서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인간 세계가 이미 침울하고 어둡고 어두운 징후를 갖고 있는데 인간들만 모르고 뛰고 까불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연 세계는 이미 파악하고 있으니까 마치 그 땅거미 내려앉듯이 독수리가 어두운 암울한 미래를 이 자연 세계는 이미 알고 있다는 그런 뜻이에요. 또 대표해서 왕장창 깨지실 분?
제가 아까 강의에서 설명하다가 이거는 좀 난해한 부분이라서 제가 주제했던 대목이 뭐냐 하면은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게 뭔가 하면,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관한 문제죠. 조금만 보충하면 이렇습니다. 경제의 핵심은 뭐냐? 자본이에요. 그 자본을 감당을 못합니다. 경제를 핵심을 자본을 감당을 못하고 여기에 반응한 정치가 경제에 경제를 이렇게 보자 했는데 정치가 정치적으로 기껏 해놓은 게 뭐냐 하면 대의민주주의예요. 이것이 자본을 관리가 통제가 가능하냐? 통제가 안 됩니다. 오히려 자본이 대의민주의의 꾀를 통제해버리면 여기서 돈 가진 자가 국회의원이 돼 버려요. 국회의원 되고 대중들의 생각은 차단되고 국회의원들 의원들이 대중들의 의견을 대변해버리는 거예요. 거기에 돈 가진 국회의원들이 돈 없는 대중들의 의견을 대표해서 자본을 더욱더 키워나가는 거, 나가는 거. 그렇게 되니까 이거는 민주주의라는 방식이 뭐가 되느냐 하면은 계급 사회가 돼버려요. 이것을 현대의 경제나 정치에서는 해결이 안됩니다. 이게 해결이 안 돼요. 그래서 이게 요한계시록 17장에 보면 결국은 이 세상에 권력을 쥐는 것은 바로 음녀인데 음녀의 특징은 뭐냐 하면 무역한 거예요. 무역은 세상에 돈으로 통합하는 걸 무역이라 해요. 돈으로 통합하는 거, 니 나라 내 나라 없이 글로벌한 사회에서는 자본이 모든 것이 자본이 말을 해요. 자본이. 어떤 대통령이나 어떤 수상이 말을 하더라도 경제적인 이득을 그 안에 포함시켜서 말을 하고 어떤 나라가 군사를 일으켜서 전쟁을 할 때도 거기에 반드시 경제적인 이익을 내다보고 거기에다가 그 이익을 확대시키기 위해서 군사력을 거기에다가 동원시키는 겁니다. 왜? 군대의 모든 무기는 돈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에 본질을 뽑아야 될 거 아닙니까? 거기에 무기 생산에 들어가는 투자 비용 그 전쟁을 해서 경제적 이익이 없는데 무슨 전쟁을 해요? 이익 때문에 전쟁을 하는 거예요. 거기 민주주의 하는 게 이게 제 이 말은 뭐냐면 민주주이란 이 말이 다 허풍이다 이 말입니다. 핑계에 불과하다 이 말이에요. 지금. 민주주의가 돼버리면 이거는 각계 국가별이 되죠. 각계 국가라는 것이 이거는 형식이고 실제로 뭐냐 하면은 자본으로 이미 한 통속이 되는 글로벌 사회가 된 거예요. 돈으로. 우크라이나 전쟁하는데 우리나라 채소값 상추값이 오르잖아요. 이거 나라들로 어떻게 이 조치를 할 수 없어요. 관세를 높이고 해가지고 수출입을 관리해도 저쪽 나라에서 우리 쪽에 수출을 관리해 버리면 그냥 항복해 버리는 겁니다. 이 경제는 뭡니까? 돈이거든요. 돈 밑에는 종교도 우습고 과학 철학 이런 것도 다 어떤 화장한 거예요. 그래서 이 바다에서 오는 그 짐승은 이 자본과 결탁하는데 자본은 음녀고 음녀가 경제가 대의 정치, 정치를 하고 있는 짐승을 올라타지요. 요한계시록에. 올라타는데 올라타면서 그 짐승의 글자가 있는데 그게 뭐냐? 복음 그딴 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는 복음을 모독하는 식으로 경제가 발전되는 거예요. 그 경제를 발전시키도록 누가 했느냐? 악마가 했고 악마를 그렇게 활기차게 누가 했는가? 우리 주님이 하시죠. 왜 주님이 그렇게 하시는가? 성도로 하여금 왜 이 세상에 대해서 미련을 안 가져야 될 이유를 성도 보고 알려주기 위해서. 니 마음대로 활개치도록 하기 위해서 주께서 그렇게 악마를 조절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되면 뭡니까? 복음과 무엇과 연관되어 있다? 복음과 경제 자본주의 이론과 그리고 민주주의 형과는 전부 다 같이 연계돼 있죠. 이런 식으로 여러분들이 복음을 이해할 수 있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나는 뭐 애널리스트고 나는 뭐 투자 전문가이기 때문에 복음은 거기다가 내가 하는 일은 주의 재능이고 거기다가 복음 하나 추가하면 구원받겠지 이런 식으로 할 수 없다 이 말이에요.
질문 : 목사님 아까 인자 말씀하셨죠. 이게 한때 굉장히 이해가 안 됐던 부분이었는데 목사님 며칠 전에 창세기 말씀 이렇게 보면 목사님 이 부분을 거론하셨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이제 뭐 아담한테 니가 동물 이름도 붙여주고 만물을 다스리는 어떤 그런 권세, 근데 그거를 만물을 다스릴 인간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열두 제자들도 막 바다 풍랑 일고 그럴 때 그걸 못했는데 오로지 하신 분이 예수님이시죠. 그래서 그러면은 인자라는 것이 사람의 아들인데 그러면 이제 저희들은 다 사람도 아니잖아요. (그렇죠) 그러고 오로지 유일하게 사람이신 분이 예수님.
답변 :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걸 마지막 아담이라고 합니다. 처음 아담과의 대비되는 마지막 아담 두 번째 아담. 그리고 첫 번째 아담은 모형이에요. 두 번째 예수님을 위한 모형이고 인간을 만들어 놓은 거예요. 그래야 대자연 풍랑과 이 대자연이 그야말로 정복하고 다스리라가 철저하게 인간에게 지배당하고 복종당한 게 맞지요.
질문 : 그러면 목사님. 잘못하다가는 예수님도 창조가 됐다고 그렇게 생각.
답변 : 그걸 창조에서 그걸 피하는 방법은 예수님은 인간이라고 그냥 할 게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 골로새서 1장 15절에. 인자 자체에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있어요. 골로새서 1장에 나오는 말입니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그러니까 형상이니까 사람이지요. 원래 창조, 1장의 원리에 의하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든 게 사람이에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앙꼬가 있어줘야 그게 만두라고 할 수 있다. 근데 범죄하고 난 뒤에는 형상 없는데 그 인간이라 할 수 없지요. 그러면 왜 만들었냐? 미리 모형으로 만드신 거예요.
질문 : 결론적으로 하시는 말씀이 아까 예수님 창조 거기.
답변 :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물을 만들었는데 골로새서 1장 16절에 보면 모든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과 다 그가 만드셨고 그를 위하여 만들었다 이 말이죠. 사람을 비롯해서 악마부터 천사부터 해가지고 하나님의 형상을 위하여 모든 게 만들어지는 거예요. 골로새서에 보면. 성경책 거기 보면 나와요. 그래서 그분이 사람의 모양으로 와버리니까 기존의 인간들은 뭐라 봅니까? 자기가 인간이라고 보거든요. 왜 같은 인간인데 말이 안 통하죠? 그리고 인간이라 하면서 우리는 육으로 태어났는데 그분은 아빠 없이 태어났어요. 아빠가 없이 태어났어요. 아빠 없이 태어났으면 그냥 하늘로서 떨어지면 되는데 또 엄마는 있어. 마리아라는 육은 있고 또 태어났거든요.
질문 :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대로 그러니까 자기의 형상대로 빚으사 이 땅에 오신 게 예수님이잖아요?
답변 : 그렇죠. 그렇죠.
질문 : 그런데 저는 목사님 설교하실 때 그냥 이 부분을 이렇게 말씀을 해 주시면 좋은데 특히나 3일째 나올 때 왜 목사님은 저렇게 설명을 하실까? 그냥 하나님이 자기 형상으로 해서 그냥 이 땅에 오신 거야. 그러니까 하나님 하나님 예수님은 똑같아. 저는 그렇게 이해를 하고 있는데. 삼위일체.
답변 : 삼위일체를 피하기 위해서.
질문 : 어렵거든요.
답변 : 어려운 것은 피하면 되죠. 어려운 걸 껴안을 필요 없고요.
질문 : 그러니까 이게 인간이 만든 거죠?
답변 : 인간이 만든 거죠.
질문 : 이건 말이 안 되죠?
답변 : 말이 안 되죠. 왜 그러냐 하면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과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형상이 같다 이렇게 했잖아요? 그 하나님이 개념 자체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이 아닌데요. 삼위일체가 그래서 문제가 돼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게 성경의 이야기예요. 근데 인간들이 사용하는 하나님 용어가 되어 버리면 인간들은 스스로 삼위일체 늪에 빠져가지고 그러면 이 하나님하고 하나님이 한 분이 아니고 왜 두 분이고 세 분이 되느냐? 이거는 인간은 지가 무식하다는 생각을 안 하고 자꾸 그걸 지가 생각하는 것을 맞춰야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아까 했잖아요. 사울이라는 사람이 만난 사람은 나사렛 예수라고요. 출발점을 따라가세요. 그러면 그분은 사람인데 보니까 그게 인자고 그게 하나님의 형상이니까 하나님 쪽에 속하신 분이구나, 하나님이시구나. 그분이. 이렇게 할 때 출발점이 이미 인자로부터 나사렛 예수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딱 잘라 버리고 시작되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삼위일체의 짐을 피할 수 할 수 있는 거예요. 기존에 삼위일체 설정해 놓고 예수님이 여기다가 어느 지점에 위치하면 우리가 옳은 생각을 합니까? 이래 버리면 기존의 삼위일체의 그 틀이 깨지지 않으니까 용어 혼선이 일어나거든. 용어 개념이 혼선이 일어나요. 용어가 이래 있으면 용어들이 이렇게 용어들이 용어a 용어b c라고 있으면 용어가 가만히 있는 게 아니고 이게 자기 영향력을 발산을 뻗어나간다고요. 용어가. 여기도 고정돼 있으면 뻗어 나와가지고 나중에 이 둘이 만나게 되면 여기서 칙칙 막 싸운다고요. 싸울 때에 둘이 모순되는 일이 벌어져버리면 a b c 용어 선정에 모순되는 일이 벌어져 버리면 내가 b를 선택할지 a를 선택할지 그건 최종적으로 지가 또 하나를 또 선택해야 돼요. 삼위일체 모순점이 그겁니다. 3위가 계시다. 3은 3이잖아요. 3은 반드시 용납이 안 돼요. 3은 인간의 이성에 그런 거 없어요. 반드시 인간은 1로 귀환하게 돼 있습니다. 그러면 이 두 개가 날아가 버리게 돼 있어요. 인간의 한계가 그래요. 예를 들면 사랑은 상대를 이뻐하는 것이다. 이쪽 개념으로 시작합니다. 근데 b라는 개념은 사랑은 희생하는 것이다. 희생하는 것이다. 둘이 만났어요. 카페에서 둘이 만나 이야기합니다. 사랑은 상대를 그냥 무조건 좋게 보고 이뻐하는 것이다. 아니야. 사랑은 희생하는 것이야. 그럼 두 개를 합쳐 봅시다, 못나도 못났는데 사랑할 수 있느냐? 이쁘지 않은데 사랑할 수 있느냐? 이쪽에서 딱 대겠지요. 못났는데 왜 그게 사랑이 되지? 그러니까 내가 말이 맞잖아. 그러면 이쪽에서 못나도 자식인데 희생 안 할래? 그러면 희생해야지. 그래. 내 말이 맞잖아.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가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그 용어부터 고집을 부려가지고 상대한테 안 지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용어 저런 거 치우고 예수님이 십자가부터 출발하자는 게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령 받은 사도들의 생각이에요. 그분은 죽었고 그분은 부활했다. 그 말은 뭐냐? 모든 인간은 다 죽어 마땅하고 그분이 살려준 사람은 백성이다. 이게 사도행전에 나온 사도들의 복음이에요. 복음. 그다음에 왜 죽느냐 하는 건 죄 때문에 죽고 죄는 뭐냐? 율법 때문에 죽고 그게 쭉 나오는 거예요. 신학 자체를 사도는 인정을 안 하지 않습니다. 신학 자체는 철학의 일종이니까 인정을 하지 않아요. 신학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그건 신학은 인간의 지혜고 오직 내가 자랑하는 것은 십자가 외에는 다른 게 자랑할 게 없다고 그랬어요. 십자가 사건, 사건화 시키는 거예요. 십자가 사건 자체, 십자가라는 용어를 믿는 게 아니고 지금 십자가로 와서 활동하시는 예수님 자체의 활동이 오늘날 우리를 구원한다. 사도 바울은 그런 쪽으로 나가지요. 삼위일체를 체크하는 것은 그거는 뒤에 이제 뒤에 수습한다고 철학 이용해가지고 뭐가 존재냐 실존이냐 그것까지 동원시켜서 만든 거예요.
질문 : 십자가 말씀하셨으니까 성도가 주님께서 다 이루신 건데 성도에게 십자가라는 것은 복음이 들려지게 하시고 그게 믿어지면서 목사님 하신 대로 그냥 사는 거.
답변 : 바탕이죠.
질문 : 그게 성도의 십자가
답변 : 아까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데 그게 로마서 4장이 나옵니다. 아브라함 이삭 이야기 하면서 이삭이라는 것은 아브라함이 사전에 예상한 거 없어요. 인간이 예상 못했습니다. 내가 예상하지 않는 일이 나한테 발생된 거예요. 아브라함에게 예상 못한 일이 발생된 거예요. 그래서 이름도 이삭이에요. 농담하십니까, 이런 뜻이라 말이요. 지금 누굴 놀리십니까,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을. 자식 주려면 진작 주시지 왜 이렇게 자식을 못 낳는 시점까지 끌어 당겨서 자식 못 낳는 것을 분명히 하시고 왜 자식 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할 정도로 당황스럽죠. 그런데 똑같은 방식이 로마서 4장에 보면 4장 25절에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의롭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심은 우리 죄 때문에 죽었고, 무슨 뜻입니까? 입 다물고 있어. 가만히 있어도 죄야 ,그런 뜻이에요. 예수님이 살아난 것은 부활한 것은 너희 의 때문에 부활했고, 뭔 뜻입니까? 가만히 있어. 니가 의로워.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십자가는 뭐냐? 성도가 성도되게 하는 사건의 바탕이죠. 바닥이죠. 바탕이 되는 겁니다. 사도가 그것을 나는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했다. 그 이야기 해가지고 가까운 사람한테 욕 되게 많이 얻어먹었어요. 많이 얻어먹었어요. 성경에 보면 십자가만 있는 게 아니고 부활도 있고 성령의 열매도 있고 뭐 재림도 있는데 왜 너는 왜 십자가만 주장하느냐? 사도가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했다면 출발점이 그건데 너는 출발점을 삼지 않고 이것저것 개념들을 꽃다발을 만든다는 거예요. 십자가도 있고 성화도 있고 자꾸 뭐도 있고 이게 진짜 신학을 배웠기 때문에 그런 후유증이 발생되는 거예요. 내 구원하는 데 좋은 것은 다 챙기자. 빠뜨리면 내 구원에 지장된다.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출발점이 십자가인데 그게 아니고 좋은 거는 다 끌어 모으는 거예요.
질문 : 그러니까 오늘 말씀에서 목사님. 천년 왕국도 아까 그 천년이라는 숫자를 가르쳐주셨잖아요. 인간들이 넘볼 수 없는, 이 천년 만국은 아직 우리들은 꿈도 꾸지 말아라. 이거는 주님의 나라니까 대신에 주님의 다 이루심으로 거저 주어진다. 그렇게 이해를 하고.
답변 : 꿈을 꾼 사람이 있었죠. 인간은 계시가 오게 되면 인간의 숨어있는 꿈이 자극을 받아가 발작을 일으킵니다. 천년의 꿈을 꾼 자가 있었어요. 그게 유대인들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천대까지 복을 주리라. 시편에 보면 천대 언약이 천대까지 가리라. 시편 105편에 나오니 그걸 보고 그들은 이 주님의 묵시적 세계에서 이룰 것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자기가 구원받으려는 생각, 구원 못 받는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 이 정도로 친절하게 계시를 줬으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려고 아주 작심을 하셨구나. 이렇게 오해를 한 거예요. 근데 막상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서 오실 줄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어요. 사람이 와서 딱 왔을 때 예수님이 분명히 진실을 이야기했거든. 내가 바로 메시아다. 아무도 안 믿었습니다. 이게 유대인의 오류뿐만 아니고 오늘날 우리들의 오류예요. 근데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어요. 근데 성령이 오니까 내가 나에 대해서 몰랐구나. 제가 어제 수요일 날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사람이 틈만 있으면 세상 비판하고 세상에 분노를 하는 거예요. 근데 제가 뭐라 했던가요? 본인이 분노의 대상인 걸 모르고 모든 탓은 남 탓으로 다 돌려버린 거예요. 남 탓으로. 내가 인생 힘든 것은 전부 다 누구누구 때문에 힘들다. 못 살겠다. 갈라서자. 지금 니 때문에 니가 내 인생에 끼어들어가지고 되는 일이 없어. 낙엽 막 던지잖아요. 가라. 가란 말이야. 이 그 CF를 모르시는 모양이죠. 왜 남한테 하느냐? 수요일에 제가 언급했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용서받는 사람이 되기를 굉장히 싫어하는, 자존심이 상해서 싫은 거예요. 용서 안 받고 근사하게 넘어가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완벽에 완벽을 기하고 하자 없는 사람 되고 싶지 하자 있는데 용서받았다는, 완전히 너덜너덜 넝마 같은 인생을 자기 취향에 안 맞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게 숨겨진 우리의 육적인 본성이죠. 우리 성도님도 너무 신학 같은 거 너무 동화시키지 마세요. 신학 같은 거 의미 줄 필요 없어요.
질문 : 그 분들도 꽤 십자가 부활의 의미를.
답변 : 부활의 의미는.
질문 : 부활이 영광이 된다.
답변 : 부활은 이겁니다. 닥터 스트레인저 영화에 보면 나오지만, 십자가 지신 분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현상은 일어나요. 그 현상이 어떤 인간이에요. 볼품도 없고 내세울 것도 없는데 또는 반대로 볼품이 있고 내세울 거 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만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이나 사도들이죠.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누가 뭐 니가 십자가에 대해서 니 공부를 많이 했구나, 이런 이야기하면 그 사람을 모독하는 겁니다. 주께서 자꾸 찾아오셨다는 거예요. 바로 그 기능을 부활의 영 또는 부활의 주님께서 하시는 거예요. 부활하는 것은 뭐냐 하면 십자가의 내용을 현상적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부활의 영의 성령께서 하신다, 이렇게 정리하면 돼요. 근데 인간들은 자기 자신을 못 버리기 때문에 따지는 거예요. 십자가 시기 끝나고 오후 2시에 십자가 오후 3시에 그다음에 부활 오후 4시에는 승천 오후 5시에서는 재림, 시간 스케줄을 딱 짜가지고 내가 어디쯤 가고 있을까, 이거 따지죠. 그거는 바로 자기 구원에 미쳐서 그래요. 성경을 자기 구원을 하는 데 아이디어로 제공되었다고 모여서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질문 : 목사님 언젠가 설교 중에 엘로힘과 여호와를 그냥 잠깐만 언급하시고 이렇게 좀 긴 설명을 안 해주셨는데.
답변 : 그건 신학자들이 거기에 대해서 언급을 많이 했어요. 많이 하고 그 신학자의 구분 때문에 성경 자체가 편집됐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고 만 거예요. 창세기 1장에 엘로힘인데 2장부터는 여호와 나왔다. 이 둘 이거 짜집기 했구나. 그게 뭐냐면 논문 표절했다고 하는 거예요. 논문 표절했다. 왜 그러냐 하면 성경이 아니고 성서라고 보기 때문에 그래요. 성서. 그냥 여러 가지 책 중에 하나가 성서라고 본 거예요. 성령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일체 인정을 하지 않아요. 그냥 옛날에 있었던 동영상 정도로 편지 조각 정도로 지금이라도 사도바울 편지 있으면 그거 주워 모아가지고 우리가 탐색하고 연구하면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성서는 그냥 쓰여지기만 해. 그냥 말씀 자체가 까불지마. 가만히 있어. 해석은 우리가 해석해서 얻을 것 챙길 거야. 이게 소위 신학 공부하던 사람들이 대세예요. 그래야 박사 학위 줘요. 이거 안 하면 박사 학위 주지를 않습니다. 그러니 신학 박사가 얼마나 수상한 거래를 했는지 아시겠죠. 신학 박사가 우리 아는 사람 중에 신학 박사 있습니다. 엘로힘과 여호와가 다르다는 거예요. 그들의 주장이 의하면 엘로힘은 고대 근동 사람들이 신을 부를 때 엘이라고 너무나 거룩해서 말을 줄여서 엘, 아! 하는 신음 소리 언어가 있기 전에 신음 소리가 이렇게 오래 하다 보니까 엘 그래서 고대 근동에 있는 모든 알라도 마찬가지고 모든 신의 이름은 엘에서 나왔다는 걸 주장하는 게 뭐냐? 고고학적으로. 고고학 누가 그걸 주장하는데? 인간들이. 고고학 연구를 수집하고 탐색하는데 누가 했는데? 본인들이. 뭐 해서? 관찰해서. 뭐로 관찰해서? 내 눈으로 봐서. 니 눈은 믿을 만하냐? 그것까지는 말 할 수 없대요. 지 눈으로 봤다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에 보면 인간의 눈은 절대로 뭘 알 수가 없다? 진리를 알 수가 없다고 돼 있잖아요. 눈으로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눈을 만들어 놨는데 그 눈으로 봐가지고 나왔던 기껏 결과물이 뭐냐? 엘과 여호와는 다르다. 그 결과가 나온 거예요. 여호와도 여호와 아니고 야훼라는 거예요. 누가? 신학자들이. 무엇을 근거로 해서? 우리가 조사해 보니까. 조사할 때 뭐로 조사했는데? 눈으로 보고. 또 눈으로 봤대요. 언제 여호와 했다고 주께서 구원하시고 엘 했다고 구원하십니까?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받지요. 세리 창기가 신학 박사였습니까? 강도가 무슨 강도가 검정고시 패스했어요? 인간의 지혜와는 완전히 격이 다른, 다른 십자가의 지혜로 인간을 구원하기를 기뻐했다고 돼 있어요. 고린도전서 1장에서. 사람의 지혜를 부끄럽게 만들기 위해. 근데 사람들은 이 복음의 지혜를 피로 말미암아 유월절 피를 보고 넘어갔는데 그 안에 배운 사람도 못 배운 사람이 있는데 그런 거 따지지 않고 그냥 피만 보고 넘어갔어요. 그게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하게 되면 우리는 공부를 해야 돼요. 신학을 공부하고 여러 가지 공부를 하고 이때 돈벌이를 해야 되는데. 왜? 아까 이야기했지만 그 모든 것이 우리의 죄는 어디까지 뿌리가 뻗혀있는가를 발견하는 넉넉함과 자유함과 즐기기 위해서.
질문 : 유월절의 은혜를 입고 홍해를 건넌 어린 양의 피 때문에, 그 이스라엘 민족들이 이제 가나안에 못 들어간 사람들이 많잖아요. 그들은 구원이 된 겁니까? 아니면 그냥 탈락 된 겁니까?
답변 : 구원의 개념은 그 언약 틈 안에서의 구원의 개념이 그때만 적용되고 그다음 언약이 주어지려면 기존의 구원 개념은 폐기되고 새로운 구원 개념이 또 등장해요.
질문 :그게 구약이라 그런가요?
답변 : 신약도 마찬가지고요.
질문 : 그럼 신약도 그러면 성도가 성령을 받았다가 그 성령이 또 떠나가시기도 하고 그러십니까?
답변 : 십자가로서 이미 모든 언약은 마감됐어요. 다 이루다 했으니까. 더 이상의 언약은 없습니다. 근데 성도 그 인간 성도는 육 자체가 이미 구약적 요소를 다 포함하고 있어요. 그래서 어제 구원받은 것이 오늘의 아무 소용이 없어요. 어제 은혜 받은 게 오늘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질문 : 십자가 사건 전까지만?
답변 : 십자가 사건 전까지는 모형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특수한 이스라엘 집단을 위해서 모형적으로 한 것이고 오늘날 어제 은혜 받은 것이 오늘에 효용이 없다니까요. 오늘 오늘 치의 은혜를 또 주시는 거예요. 그래야 인간은 이미 얻은 구원을 내 소유화 못 시켜요.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주님의 소유가 된 거기 때문에 내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죠. 걱정한다고 하면 주신 것을 도로 뺏는 게 되니까. 그래서 성도는 뭐냐 하면 매일같이 먹든지 마시든 뭐와 같이? 자기 일을 못하고 주의 일을 할 뿐이에요. 주의 일을. 이걸 먹든지 컵을 마시든지 이게 다 주의 일이 되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그걸 이 24시간 늘 아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육을 통해서 이거는 은혜를 받은 이거는 주의 일이라고 하는 내가 주의 일을 하고 있는 거야. 이런 자기 생각을 또 집어넣거든요. 그런데 그걸 집어넣는 이유가 죄와 의라 하는 것은 반드시 죄가 발생될 현장에 동반해서 다시 의가 되기 때문에 어제 짓지 못한 죄를 오늘 지어줘야 오늘 치의 의가 또 새롭게 감사가 되는 겁니다. 어제까지는 커피를 내가 안 마셔가지고 커피나 마시면 토합니다. 못 마신다 했는데 그때까지는 커피 마시는 게 죄인 줄 몰랐는데 오늘 아침에 먹으니까 커피가 이거 당기네요. 이제 커피 먹어야지 하면서 커피 마실 때 커피를 마시면서 커피 마시는 죄를 오늘에야 비로소 새롭게 짓게 만들어서 커피 마셔도 천당 가는 게 아님을 감사하는 거죠. 커피뿐만 아니라 모든 일이 그래요. 그래서 매일 일용할 양식을 매일같이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것이 내가 애써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결과물로 오늘 또 이렇게 살아서 이야기하고 숨 쉬고 있는 거예요. 만약에 호흡을 취해버리면 호흡을 취해버리면 우리가 아깝다는 생각을 하면 안 돼요. 왜냐? 이미 주님의 것이 된 상태에서 몇 년을 살아야 덜 아까운 거 이런 게 없거든요. 몇 년 살든지 그거는 주님이 자기의 권한의 문제지 더 살 건데 이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어요. 인간의 그 시한 의식이 갖고 있는 그 한계가 그런 게 문제가 되요. 미리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내일 염려는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내일 하라 이 말은 내일 살려주거든 그때 하라 이 말이죠. 니가 내일까지 산다는 보장은 없다 이거예요.
질문 : 목사님께서 그냥 사세요. 그냥 살다 보면 천국에 도착돼 있습니다. 그런 말씀을 하셨거든요. 그러니까 거기서 그냥 산다는 게 사실은 성도가 느끼는 게 하루를 살면서도 순간순간 아니 계속은 못 느껴요. 순간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구나. 그 울림, 그게 그냥 그냥 사는 거예요?
답변 : 울림인데, 그게 감사하던가요 짜증 나던가요? (감사합니다) 그러면 그 감사한데 앞에서는 소급해서 전에 것도 감사해야지요. 어제 짜증 낸 것도 짜증내게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래 되어야지요. 감사하게 되면 질문도 끝나버렸죠. 감사, 고마운데 질문할 게, 뭔가 결핍이 있어야 질문이 되는데, 고맙습니다 하고 있는데 무슨 질문이 나오겠어요.
질문 : 하나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님께서 재림을 하시고 재림을 하셔서 백성들을 데리고 다시 올라가세요. 주님 나라로. 거기서도 주님은 육을 입고 계세요?
답변 : 거기서요? 영광스럽게 오신다고 했으니까. 해와 같이.
질문 : 그러니까 재림은 구름 타시니까 육을 보여주실 거 아니에요? 시공간으로 들어오시니까.
답변 : 그게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 1장에서 봤던, 분명히 어떤 실존적 인물은 계신데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영광스럽고 휘황찬란하고 감히 눈으로 볼 수 없어서 엎드릴 수밖에 없는 그런 모습으로 오시죠. 오시게 되면 우리가 지나온 나는 이렇게 살았고 어떻게 했고 교도소 일곱 번 왔다갔다 하고 사기 당하고 사기를 해 먹었다 하는 그게 그렇게 다 소소한 일이고 그거는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일이고 괜히 고민했어. 아무 문젯거리도 아닌데 괜히 고민했어. 내가 애들 두 번 때리고. 세 번 때려도 괜찮아요. 그게 큰 문제가 아닌 거예요. 지갑 잃어버리고.
질문 : 영광체로만 느껴지는 거예요?
답변 : 돌아보면 지갑 잃어버린 것도 주께서 잃어버리게 하셨다는 것을 왜 그때서 이래 된 걸 왜 그때 쓸데없이 고민을 왜 했던가? 주께서 일부러 잃어버리게 했는데요. 그게 뭐냐 하면 모든 사건의 망은 주님이 쥐고 있지 우리 마음대로 안 돼요. 아내와 남편을 다른 남자 만나게 되면 하는데, 때 되면 또 그 남자 그 여자 만나게 돼 있고요. 서로 싸우게 돼 있어요. 그 싸우면서 감사하고 늘 고마워하시면 되는 겁니다. 상대방이 잘했다고 또 고마워한다고 오해시키지 말고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면 됩니다.
질문 : 목사님. 인자를 표현할 적에요. 십자가 지기 전에는 그리스도라는 개념이 포함돼 있고 십자가 지고 난 뒤에는 주가 되셨다는데 그런 건 그리스도와 주어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답변 : 문맥에 따라서 주님을 표현할 때는 주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표현한다 싶으면 그리스도를 한 것이에요. 그러나 그 실체는 그리스가 주고 변함이 없고요. 문맥 따라서 그다음에 다른 걸 설명하기 위해서 그렇게 개념들을 조합하시는 거예요. 조합하게 하시는 거예요.
질문 : 엉뚱한 질문 같기도 하겠지만 지금까지 저희가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세상 속 지식 학교에서 배운 지식, 아까 말씀하신 대로 이데올로기부터 해서 정치 과학 모든 게 제 뇌에서 정립된 게 세계관 인생관 역사관 종교관 하여튼 가족 창조론 창조과학회도 있지만 거기에서 창조론에 입각한 굳이 알 필요도 없이 복음대로만 살면 되겠지만 봤을 때 평평지구설이다 둥근 지구다 이런 것들이 제가 지금 하면서 여러 유튜버들이나 제가 이제 유튜브를 보면 보기는 하거든요. 평평지구설이나 어떤 사람들은 둥근 지구가 맞다 양쪽을 다 들어봤을 때 복음과 관련해서는 어떻게 되는가?
답변 :그게 창조과학 또는 창조론 그리고 여러 가지 설 그런 것을 들을 때 복음으로 그런 것을 어떻게 연관시킬 수 있느냐? 이게 왜 엉뚱한 질문입니까? 상당히 중요한 질문이죠. 지금 멀리서 질문이 안 들려오기 때문에 이제 질문을 다시 한번 요약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것은 두 자로 이렇게 표현하면 간단해요. 뭐라고 표현할 수 있느냐 하면은 편집이에요. 편집. 인간은 자기를 자기가 살리기 위해서 주변에 오는 모든 이론과 체험과 경험들을 자기 사는 데 유리하게 적용하기 위해서 내부적으로 편집한다. 편집하게 돼 있어요. 그래서 나는 창조를 믿습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 그 사람 주장이지 내 주장이 아니에요. 나는 지도를 믿습니다 하는데 그 사람 주장이지 내 주장 아니에요. 나는 그 사람의 주장을 일부 편집할 뿐이고 내 자체적으로 나만의 고유의 것으로 정립할 뿐이지 어떤 인간도 똑같은 생각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식 간이나 부부 생활에도. 그러니까 그쪽에서 하는 것을 그냥 참조만 하세요. 참조만 하시고 편집하는 것은 내가 편집하는데 단 결론이 어떻게 편집해도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그게 죄가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습니다. 그게 죄가 된다는 거예요. 예수 안에서 뭘 해도. 뭘 해도 그건 죄 되기 위해서 우리가 아직도 숨 쉬고 이 땅에 살게 하시는 겁니다. 니 죄 종류는 저런 종류의 죄고 나의 종류는 이런 종류의 죄구나. 문제는 그 죄 니가 어떻게 할래? 나는 이걸 지식으로 받아서 구원하겠다. 행함이구나. 그럼 내 죄는 어떻게 하냐? 이것도 죄니까 십자가 피 외에는 용서할 게 없어 피만 자랑한다. 이래 되면 되는 문제지 지식으로 누가 완벽한 지식을 갖추느냐? 그런 거 가지고 배틀 하지 마세요. 괜히 약오릅니다. 인간은 지고는 못 사니까요. 인간은 편집할 때 그 특징은 뭐냐 하면은 남에게 이길 무기 마련 용도로 편집해요. 사람은 타인과 만나서 싸워서 자기가 정립되는 거예요. 싸우지 않으면 내가 누군지가 모호해가지고 짜증나요. 누구 붙들고 싸워야 내가 이 정도였구나 하는 걸 지가 혼자 흐뭇해하고 있는 겁니다. 식사하고 난 뒤에 밥값 낼 때 내가 낼게, 아니 내가 낼게, 내가 낼게, 내가 그 정도는 내가 낸다. 이겼다. 이거는 내가 니보다 돈 낼 정도의 여유는 있다는 것을 또 한 번 확인하는 즐거움이 있어요. 그래 되려면 그 타인이 있어줘야 돼요. 그 타인이 없어버리면 자살합니다. 내가 정립이 안 되니까. 내 잘남을 정립이 안 되니까 내가 무너지는 거예요. 나를 알아주고 내한테 연락해주는 사람 아무도 없다면 내 자아 정립이 안 되기 때문에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니까 이래 살 봐애야 차라리 내가 없애지는 게 낫지. 그래서 죽어버리는 거예요. 독거노인들 전화 하나 안 오고 아무것도 없을 때 내가 자기가 사는지 죽었는지 확인이 안 되는 겁니다. 산다는 것은 시비걸 타인이 있고 그 타인이 있음으로써 윽박지름으로서 내 이 정도였었어. 할 때 비로소 하루라도 힘내서 살 수 있는 거예요. 하루라도 살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남편이 출장한다고 몇날 며칠 출장한다고 집에 안 들어오면 아내는 못 사는 거예요. 근데 남편은 내가 니한테 월급 다 갖다 줘. 냉장고 있고 집에 강아지까지 다 키우도록 허락했잖아. 그런데 니가 왜 못 사느냐? 그거는 인간을 몰라서 그래요. 인간은 시비 거는 대상이 있어야 살맛이 나는 거예요. 혼자 벽 보고 싸울까요? 안 되잖아요.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부부 헤어지지 말고 열심히 같이 사세요. 싸워야 되니까. 싸워야 내가 살 수 있어요. 그래서 배우자 하나 죽으면 스트레스를 수컷 죽으면 암컷 따라 죽습니다. 나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편집인 겁니다. 그래서 참고로 들으시면 돼요. 그리고 어떤 이야기 주장도 다 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할 수가 없어요. 어떤 주상도. 그래서 내가 말이 옳다. 나는 어떤 유명 학자가 이야기했다. 하거든 이렇게 생각하세요. 그것 가지고 내한테 붙어가지고 오늘 또 니가 내한테 이겼다는 보람으로 살라고 그런 소리 하는구나. 그러면 뭐 그래도 니 잘 났다. 이러면 되죠. 그러면 저쪽에서 또 화가 나요. 싸워서 이겨야 되는데 안 싸우니까 또 더 화가 나가지고 내한테 반박해보란 말이야. 뭐 어쩌라고 그러면? 맨날 그래서 여자분들이 전화 붙들고 한 시간 동안 이야기하는 걸 이렇게 옆에서 한번 보세요. 그 내용이 어떤가? 한 시간 동안 이야기하고 이렇게 쭉 하게 되면 쭉 이야기를 하잖아요. 우리 집에는 그런 사람 없습니다마는 보통 여자분들은 다 그런 사람이 있거든요. 붙들고 이야기하는 거 쭉 보면 내 같으면 저걸 5분 만에 줄일 수 있을 건데 이런 생각이 들어도 절대로 줄이면 안 돼요. 그 시간은 지금 뭐 정보를 전달하는 시간이 아니고 너는 옛날부터 내 친구였기 때문에 니가 친구로 있는 순간 나는 숨 쉴 이유가 되고 살맛이 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끊지 마라. 끊지 마라. 왜? 끊으면 안 돼요. 나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래서 될 수 있도록 모이기를 힘쓰세요. 제천에 가든지 안 그러면 원주로 오든지 모이기를 힘 써가지고. 모여가지고 오늘 내 질문 하나 하는데 누구 누구 질문은 좀 이상한 것 같은데. 나는 그 정도는 질문 안 하겠다. 나는 저 정도 질문을 모르겠는데 해가지고 내 위치가 좌표로 XY 엑스 좌표로 난 어디쯤 가고 있을까를 파악하는 그 즐거움을 가지시고 그것이 바로 내가 오늘치 알게 된 나의 죄다 아시고 십자가에 다시 한 번 은혜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박수 치면 끝인데.
질문 : 제가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아까 편집이라는 말씀을 하셨던데 편집을 할 때 아까 믿는다, 믿어진다, 또 그런 표현도 쓰기도 하고요 믿어지게 되었다. 또는 살리신다. 우리는 내가 내 쪽에서 생각할 때는 내가 산다고 표현한 거, 또 주님 편에서 생각할 때는 주님께서 나를 살리신다. 아까 표현할 때 막 그냥 사세요. 막 사세요. 우리 십자가 마을 안에 계신 분들이 그런 용어를 많이 사용하거든요. 그게 이제 어떤 관점의 주체에 따라서 이게 달라지는 건지, 어떨 때는 내가 산다고 표현을 하고, 어떨 때는 주께서 살리신다고 하고 성령께 주도권이 있다면 우리는 살려지는 삶인데 이게 어떨 때는 내가 주체를 나로 내 입장에서 표현을 하고 어떨 때는 주께서 라는 표현하고 이러니까 그런 부분에서.
답변 : 참 좋은 질문하셨는데요. 답변은 굉장히 간단해요. 동사를 사용하지 마시고 명사를 사용하시면 되는 겁니다. 나는 죄인이다. 이 명사만 하게 되면 동사는 누구 몫이냐 하면 우리 주님 몫입니다. 끝났어요. 하게 하셨죠. 동사의 주체는 주님이고 나는 결과물로 나타난 명사예요. 죄인이구나 또는 성도구나 성령 받은 사람이구나, 감사 받아야 될 사람이구나, 명사를 주께서 생산물로 명사가 성경적 용어로 준비되어 있어요. 내 백성들아. 내 성도들아.
동사는 주님의 몫입니다.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동사는 주님의 주체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이미 구원받았고 다 이루었기 때문에 그냥 마음 놓고 사는데 그게 내 마음대로 마음 놓고 못 살게 돼 있어요. 동사의 주체가 주님이기 때문에 내 뜻대로 안 되게 돼있습니다. 그것도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이미 알고 계셔서 뭐라고 하면 내 뜻대로 마옵시고 띠 띠고 니가 원치 않은 길로 간다. 베드로에게 그런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이미 세상에 되어지는 일은 주께서 정해진 우리는 모르지만 주께서 정해진 그대로 우리는 몰고 목자가 양을 몰듯이 몰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걸 어떻게 확인하느냐? 가는 곳마다 우리가 몰랐던 죄를 아는 기쁨을 우리에게 주기 때문에 그게 바로 주의 길이고. 만약에 내가 어떤 인간도 성공해서 안 망한 인간이 없어요. 성공해서 안 망한 인간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자기가 낮아지려고 하잖아요. 낮아져서 안 망한 인간이 없어요. 왜냐하면 낮아진다는 것이 나 자신은 지가 노렸던 일종의 거룩한 성공처럼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안 망한 인간이 없어요.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하니까 이미 망했다고 치고 미래가 과거 현재 미래에서 끝나고 미래에서 주님이 준비한 미래까지 그 갭을 건너뛰고 난 뒤에 오신 분이 성령이거든요. 그러면 이미 모든 게 완료된 상태에서 과거를 우리가 몰랐던 이 계획과 이 세상을 답습한 거니까 그냥 우리가 남은 것은 범사에 즐기고 감사한 것만 남아있어요. 다른 일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냥 성깔대로 살고요. 그 성깔도 내 마음대로 안 되니까 성깔대로 살면 돼요. 내가 성깔대로 운전하면 옆에서 지적질 하겠죠. 그거 누가 지적질하게 했지요? 주께서 하게 하신 거예요. 그러면 지적질 듣지 않기 위해서 내가 또 조절하겠죠. 누가 조절하게 했어요?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조절했는데 조절하는 그거 보고 또 지적질 또 하겠죠. 그러면 그것도 누가? 주님이 하신 거예요. 그러면 나중에 영광스런 주님 만나면 그거 다 아무것도 아니고 사소한 문제예요. 신경 화낼 문제가 아니고 분노할 문제가 아니고 우리가 겪어야 되는 문제를 주께서는 겪게 하시는 겁니다.
질문 : 저기 목사님. 창세기 이제 설교 말씀 중에서 두려움이라는 제목의 설교가 있어요. 그때 이제 주님께서 목사님을 통해서 이제 마지막에 설교 마지막에 그 기도를 시키세요. 얼마나 두려웠으면 매달리고 기도를 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마저도 주님이 주시는 사랑이라는 그런 기도를 저는 개인적으로 굉장히 감정이 깊었는데요. 그 기도가. 구약에서 언급하는 두려움과 신약에서 언급하는 두려움은 차이가 있습니까?
답변 : 차이가 있어요. 구약에는 결핍 때문에 생긴 두려움입니다. 결핍. 결핍이 구약에서 모형이기 때문에 결핍이 메시아에 대해서 기다리게 만들어요. 결핍이. 이게 다가 아니었구나라는 뜻은 하실 일이 남아 있었구나, 주여 주의 날에 저를 기억해달라는 식으로 시편에 보면 거기에 이야기가 굉장히 많이 나오거든요. 결핍을 느끼게 만들어요. 결핍을 느껴야 구약 성도들이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해서 주님을 의지하게 되는 겁니다. 특히 선지자 같은 경우에는 두려워했어요. 선지자들은. 선지자들은 완전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벌벌 떨면서 했어요. 막 반항하기도 하고 그 말은 뭐냐? 선지자가 메시아가 아니라는 거예요. 메시아 아니면서도 메시아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근데 신약에서의 두렵다는 것은 함부로 까불지 말라는 데서 오는 두려움이에요. 함부로 까불지 말라.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를 섬긴다는 말이 그거거든요. 두렵고 떨린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은 까불지 말라는 말은 만족, 자족이 만족 자족이 자신이 전쟁에 군사가 됨을 잊게 만들어 버려요. 사적으로, 됐어. 이만하면 나 구원받았어. 그런데 주님은 성도를 뭐로 보냐 하면은 군인으로 보느냐 하면 군인, 니 전쟁 말고 내 전쟁 하란 말이야. 군인으로 본다고요. 사명감을 줘요. 사명감. 고린도 전서 9장 17절부터 18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할 때 뭐라고 하냐면 내가 이 하는 일은 부득불 한다 부득불. 그리고 내가 일을 해서 상을 받는 게 아니고 일 자체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 자체가 상이라는 거예요. 일해서 상 받는 것이 아니고 내가 감히 이런 일을 하다니 하고 벌벌 떨면서 그 일을 하는 거예요. 주님께 벌벌 떤다는 것은 세상 것에는 추호도 겁내지 않고 있다는 뜻이에요. 세상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겁내지 않고 오직 주님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섬기게 되면 자유죠. 왜? 세상에 대해서 평가나 비평에 대해서 신경 쓸 필요가 없기 때문에. 제가 어느 설교에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걱정 두려워하는 이유는 지 혼자 자기 놀이 하고 있는데 자기 놀이 하면 될 걸 저쪽 놀이가 부러운 거예요. 부러워서 겁을 내는 거예요. 이번에 주식을 사더니 대박 했다. 그 사람은 지금 자기 놀이 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 주식 놀이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다른 사람은 자기 놀이 하면 되잖아요. 난 주식 놀이 하지 않고 그냥 있는 돈 가지고 쓰겠어. 그건 자기 놀이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놀이 하면 되는데 그쪽 주식 대박 난 걸 꿈을 꾼다고요. 자기 꿈을 꾸는 게 아니고 그 사람 꿈에 같이 합세하려고 끼어드는 겁니다. 절대로 합세 안 됩니다. 이용당하죠. 우리는 내 꿈 내 놀이 하면 되지 저쪽 놀이에 부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구약에는 메시아가 오는 것을 신약은 다 이룬 그분에 대한 두렵고 떨림 때문에 세상에서부터 편안하게 구애받지 않는 자유와 기쁨을 주죠. 편안함을 주죠.
질문 : 그게 사랑인가요? 주님에 대한 두려움 떨림 이게 주께서 주시는 사랑인가요?
답변 : 우리 인간은 주님을 사랑할 수 없어요.
질문 : 주께서?
답변 : 주께서 주신 사랑, 사랑 안에 나타난 아주 아름다운 사랑의 현상이죠.
질문 : 두렵고 떨리는 게?
답변 : 예. 지금 사랑을 개념을 굉장히 좋게 보셨는데 사랑을 두렵고 떨린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이사야 6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그냥 황홀을 하고 감당 못할 축복 감당 못할 은혜 선물에 대해서 황공해 하는 모습, 이게 사랑이죠. 이게 사랑입니다. 그래서 제가 사랑도 같은 말로 자유인데요. 사랑 자유 이걸 뭐라 하느냐 하면 자발적 예속이라고 했지요. 예속, 자발적으로 예속. 주께서 그냥 조지는 대로 조지소서. 그래도 저는 기꺼이 받겠습니다. 주께서 어디로 가든지 가라는 대로 가겠습니다. 이게 사도 바울이 강의 위험과 도적의 위험과 갔던 것은 로마 갈 때도 마찬가지고 자기 생각을 안 하니까 자발적으로 자기 몸을 예속했잖아요. 던져줬잖아요. 그러니까 자기 생각을 안 하니까 자기 계획이 없죠. 그리고 자기가 뭘 하든 간에 그 현장에 주어진 것이 주님의 계획에 입각해서 나한테 선물로 준 인생이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까불지 않고 내가 까불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두려운 마음이. 까불지 않는다는 것은 나는 됐어 이게 아니고 주님만 바라보는 거지요. 나는 됐어 하면 또 나를 챙기는 게 되니까. 그 두려운 마음이 유지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 놀이를 해요. 자기 즐거움. 하다가 또 그게 죄인 줄 알고 다시 두려운 마음으로 감사하는 거죠. 지금 우리 성도님이 질문하는 뜻을 알아요. 두려움과 감사가 어떻게 이게 하나가 될 수 있느냐? 하나가 될 수 있죠. 너무 두려움을 주신 것을 감사하는 게 되죠. 자기 생각 안하는 공통점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감사고 두렵죠. 사람이요 자식이든 누구든 간에 감사한 마음이 있으면요. 뭐든지 누구를 만날 수가 있어요. 누구도 만나고 부대끼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감사한 마음이 있으면. TV 예능에 솔로 하는 거 있거든요. 전 TV 거의 안 봅니다만 후딱 보면 다 보여요. 총각 서른 살 먹은 총각들과 여자들이 선보는 프로그램인데 직장들이 빵빵하고 다 좋아하죠. 돈도 있고 다 좋은데 건강하고 심사해서 그렇게 했겠지만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고 하는 그게 굉장히 강렬해요. 그게 아까 말씀한 편집입니다. 저 여자는 와도 나는 나 안 받아줄 거야. 이게 자기 게 계속 자기 놀이를 하는 거예요. 저는 설교할 때 이거 굉장히 심사숙고해서 한 거예요. 모든 인간은 자기 놀이한다고. 폐쇄된 자기 놀이한다고요. 그러니까 남의 것을 부러워할 필요 없어요. 지는 지 놀이하면 되지. 오징어 게임 같이 전체 게임 할 필요 없어요. 지는 자기 놀이하면 됩니다. 무화 꽃이 피었습니다. 그냥 움직이는 거예요. 탈락. 알았어. 땡 탈락. 집에 갈게. 이러면 끝나는 문제지 일부러 그걸 지킬 필요는 없다 이 말이죠. 다 각자 자기 놀이이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 놀이를 하는데 이게 왜 죄가 되느냐? 편집을 하거든요. 저 여자는 와도 나는 안 받아줄 거야. 저 남자는 와도 나는 봉숙씨 해도 영식이 와도 안 할 거야. 거기 나오는 이름이 영식이 이렇게 뭐 철희, 뭐 이런 식으로 난 안 할 거야. 그걸 보게 되면 인간들이 30대지만 인간들이 어떤 식으로 평소에 자기 본색을 갖고 살아가는가 잘 나타나 있어요. 그것도 보세요. 세상 속에서 세상에 예능부터 해가지고 전부 다 통합하잖아요. 복음으로 통합하는, 뭐든지 보시고 복음으로 파악을 하시면 되는 겁니다. 오은영 박사가 있거든요. 상담 심리하는 사람들 애들 오은영 박사 나 오은영 박사 상담 좀 시키고 싶어. 상담이 복음적이 아니에요. 복음적이 아닙니다. 볼 때마다 저게 세상 학문의 한계구나. 정신 분석학의 한계가 저거구나. 얼마나 감사한지. 그들의 특징은 그들의 상담의 특징은 상담 받는 자의 죄가 나타나지를 않아요. 그것도 근원적인 죄가. 그냥 땜질 하듯이 그때그때 넘어가면 그만인 줄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들이 나와야 되거든요. 드라마 봤는데 이렇게 해야 되는데 그런 질문들이 안 나오는 것은 세상을 복음으로 자꾸 통합을 안 시키려고 하고 이거는 세상이니까 나 몰라도 되고, 나는 내 혼자 신앙생활 잘하면 된다. 자꾸 이렇게 분리시키니까 통합이 안 돼요. 위선자가 돼버리는 거예요. 한 십분만 하고 마칩시다. 그래서 제가 설교할 때 유념하는 것은 어떤 직업을 가졌든 어떤 성격을 가졌든 간에 다 해당되는 상황을 제가 제시하고 애쓰고 있어요. 다 해당되는 상황. 예를 들면 인간은 싸우는 가운데 자기가 정립된다. 이것도 누구한테나 다 해당되는 거예요. 누구한테나. 윤석열 씨가 이재명하고 싸워서 대통령 됐기 때문에 대통령 으쌰으쌰 하고 있지 만약에 이재명 씨가 없고 아무도 입후보한 사람도 없고 허경영이도 안 나오고 아무도 없는데 그냥 아무도 없이 내가 대통령 될게 하면 국민들이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잖아요. 싸워야 돼. 인간은. 싸우게 하도록 주께서 그렇게 조치를 하는 겁니다. 싸우는 가운데서 감추어진 자기의 위선과 더러운 게 다 튀어나와야 돼요.
질문 : 목사님도 십자가 마을 목사님들 설교 말씀 듣는 설교 말씀이 있으세요?
답변 : 제가요? 제가 사적인 질문을 지금 하셨는데요. 다 봐요.
질문 : 아니 십자가 마을 목사님들 거는 들으실 것 같고.
답변 : 왜 그러냐 하면 다른 목사 설교가 누가 시키느냐? 주께서 시킨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 설교에서 뭘 뽑아내느냐? 내가 성경을 늘 알고 있는 게 아니거든요. 내가 이 성경에 집중하다 보면 저 성경 귀절을 내가 깜빡할 수가 있어요. 그 성경 귀절을 어떤 사람이 인용을 할 때 맞아. 저 성경이 저기 있었지. 저걸 내가 설교하는데 강의하는데 저것 가지고 매치 시키면 더 설교가 깊이 있겠다. 이용하기 위해서 설교를 봐요.
질문 : 복음을 느끼기 위한 게 아니라.
답변 : 그럼요.
질문 : 근데 목사님도 뭔가 또 복음을 들으셔야 되는, 십자가 마을 목사님들이 계시니까 괜찮은가요?
답변 : 복음을 듣는다 하지 말고 성경 귀절을 들으면 그 안에 복음이 다 함축돼 있어요. 어떤 목사님이 어떤 귀절을 하든지 간에 복음이 들어있어요. 복음도 모르는 그 목사가 내가 안암 제일교회 장성춘 목사가 있는데 다녔는데 복음도 몰라요. 그냥 이북 사람이 윤리 도덕을 하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우연히 실수가 아니고 우연히 뭐라고 하면 로마서 3장 범죄하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니, 그 귀절을 딱 내가 어느 부활절 날 그 설교를 들었다 이 말이죠. 딴 설교는 안 들리고 그 본문 자체가 딱 막히는 거예요. 인간은 죄 지으매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화목 재물로 영광에 이르는데 이것이 뭐냐? 우리가 행한 의의가 아니고 우리 행한 율법 외에 다른 의의를 주셨다. 그 하나가 하나로 십자가를 알게 돼 버린 거예요. 제 입장에서는. 목사 설교와 아무 관계없어요. 내가 그 튀어나오는 성경 귀절들을 내가 잊어버린 성경 귀절을 다시 새롭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그 목사로 하여금 설교를 듣게 하신 거예요. 맞아. 저거구나. 드디어 행함에서 해방되어버렸죠. 어떤 행함도 영광에 이르지 못하니까. 이미 규정돼 버린 거잖아요. 제가 이 이야기하니까 여러분 그 귀절 생각나지요. 그것 때문에 제가 여기 오늘 있을 수도 있어요. 성경 귀절 하나 그것이 내가 놓쳐버리고 몰랐던 성경 구절을, 어떤 목사님이 설교하면서 어떤 해석을 하든지 그거는 자기 문제고 그 귀절을 할 때 그 귀절 자체는 주의 말씀이잖아요. 그걸 가지고 내가 이 단락에다가 이렇게 집어넣으면 어떻냐? 이걸 해가지고 하면 설명이 더 되겠지. 그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들어요. 답변이 됐습니다.
질문 : 전 궁금했어요.
질문 : 뭘 느끼거나 뭘 생각을 할 때요. 교회 다니고 그러다 보니까 이게 주님의 뜻으로 내가 받아들이고 그런다, 그러니까 주님의 뜻을 어떻게 분별하고 그러는지?
답변 : 일단은 주의 뜻이 뭐냐 하면 일단 편집된 거예요. 그 시간에는 별 할 일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직업이 없다든지. 인간은 자꾸 머리는 가만히 쉬지 않고 있거든요. 심심하면 주의 뜻 생각하고 주의 뜻이 무엇이냐 이게 고상해 보여서 그렇게 생각할 수 있거든요. 주께서 바쁘게 돌려버리면 주의 뜻이고 뭐고 지금 코앞에 있는 일이 답답해가지고 그것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주의 뜻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내 죄를 경유해서 다시 감사가 올라올 때 그건 성령의 일이고 주의 뜻입니다. 내 죄를 동반해서 끄집어내서 이게 내가 죄인이라서 내가 실제 욕심을 부렸구나. 다음에 또 욕심 또 부려요. 하지만 그건 다음 문제고. 지금 이것이 내가 고민하고 염려하거나 두려워할 문제가 아니고 감사해야 될 일이구나 하고 새롭게 떠오르거든 그 순간 주께서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일이에요. 그러면 그 일이 왜 자꾸 이어지지 않느냐? 바빠서. 또 자기 일이 또 있거든요. 바쁘다니까요. 누가 바쁘게 했느냐? 주께서 바쁘게 하셨어요. 맨날 도 안 닦게 만들어요. 바쁘게 하세요. 주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면, 설거지나 빨리 해라. 그러면 이런 게 있거든요. 그럼 설거지 해야죠. 그러면 그게 안 되죠. 매사가 은혜 받는 것도 우리 마음대로 은혜 받고 싶어서 받는 게 아닙니다. 자기 질문이라고 마시고 공통된 보편적 아담의 질문이라고 보시면 돼요. 전부 다 아담의 dna를 받았기 때문에 똑같은 질문들을 내놓을 수밖에 없어요.
질문 ; 어떨 때는 목사님. 숫자 있잖아요. 숫자. 7일 만에 7일 만에 안식을 하시고 또 아까 여기 또 나왔었죠. 7년 그것도 있고 열두 제자 12지파 열두 광주리, 이런 것들이 한편으로는 저는 그런 생각 들어요. 작위적 아까 편집 얘기하셨잖아요. 너무 작위적 편집이 들어가는 건가, 그런 생각도 해봤었어요.
답변 : 성경 저자가 작위적이라는 뜻입니까, 해석하는 사람이 작위적이라는 뜻입니까? 성경 저자가 지 맘대로 12 맞춰서 일부러 썼다는 뜻이에요? 아니면 그걸 해석하는데 해석하는 사람이 그걸 작위적으로 해석을 남발한다는 뜻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성경 저자는 아무 문제없는데 해석하는 사람이 거기에다가 꽂혀서 지 마음대로 해석하고 싶어 한다는 그런 뜻입니까? 어느 쪽이죠?
질문 : 12라는 숫자도 계속 그렇게 구약이나 신약이나 거기서 그렇게 12로 그렇게 강조가?답변 : 이게 지금 방울토마토잖아요. 왜 이게 방울토마토보고 니 왜 방울토마토냐 묻는 것은 이에 대한 예의가 아니에요. 성경에 12가 나왔다는 것은 왜 12입니까 묻는 것은 성경 저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죠. 나는 왜 있습니까? 묻는 것은 따지는 것밖에 안 된다고요.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내 뜻이 아닌 것만 알면 돼요 12라는 숫자가 등장한 것은 이거는 내 뜻이 아니고 주님의 의도가 있어서 12라는 숫자가 나왔다, 그 정도만 정리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12의 해석까지 알려고 한다는 것은 그 해석 끌어 모아서 남한테 지적으로 안 지려고 하는 그는 그런 본성이 들어날 수 있거든요. 나 이것까지 안 한다. 12의 해석이 12를 대체할 수는 없어요.
질문 : 또 12광주리도 12지파 때문에 12광주리?
답변 : 당연하죠. 언약의 야곱의 아들 12명이잖아요. 야곱의 아들 12명이라고요. 왜 하나님은 8일 만에 창조 안 하고 7일 만에 6일 만에 왜 안 하고 왜 7일입니까? 그것은 왜 부모님은 날 왜 낳았습니까 하고 똑같은 이야기예요. 야곱의 아들 12 명, 그냥 12명 된 거예요. 야곱이 생긴 것도요 야곱이 의도 해서 생긴 것이 아니고 창세전에 야곱이라는 그 레시피를 위해서 이미 창세전에 정해놓고 야곱이라는 인간을 추후에 만드는 거예요. 그게 뭐냐? 세상은 언약대로 이루어진다. 그런 것과 관련돼 있어요. 7일, 왜 7일입니까? 여기서 답변은 뭐냐 하면 7일에 인간이 꽂히는 그 죄를 범하기 위해서 칠이라 한 거예요. 모든 말씀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 짓게 하기 위해서 말씀이 있는 겁니다. 7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거 살피면서 7에 대한 지식이 십자가의 용서를 대체하려는 의도가 인간 속에 작동할 수가 있어요.
질문 : 그럼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둔 것도 구약의 12 지파의?
답변 : 맞습니다. 그렇죠. 그걸 그렇게 해도 되고, 하나님 예수님은 언약대로 움직인다. 이스라엘을 내가 회복하리라. 다시 이스라엘을 끌어 모으리라는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12라는 해석이 12라는 그 뜻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12는 의고 12에 대한 해석은 죄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럼 마칩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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