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이전지역강의포함)

강릉수련회(사적모임1)

아빠와 함께 2024. 8. 23. 19:19

♠첫날 – 이 근호 목사(240815, 수동고을펜션)

~~이걸 끝까지 밀어붙이려니까 내부하고 외부하고 온도 차이가 나는 거예요. 다만 그걸 알고 있으면 천만다행이지요. 그걸 알면 기적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요.

- 한 번은 어떤 분이 그래요. 말씀을 듣는 중에 남 비판하는 주제가 나왔답니다. “너도 틀렸고 너도 틀렸고…, 하여간 남들은 다 틀렸어...” 그런데 갑자기 목사님이 “네가 그래, 네가!!”라는 강력한 멘트가 터져 나오니까 그 사람이 듣다가 깜짝 놀라서 발걸음을 멈춘 채 그 자리에서 빵~ 웃음이 터졌답니다. 자기 자신에게 대놓고 하는 소리로 곧장 들렸다는 거죠.

하여간 지옥에서 고생 되게 하시네요. 지옥입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말씀을 듣는 그 상황, 그 자체가 너무나 고마운 거예요. 말씀을 버려도 되는데, 이 성경 말씀 버리고 돈 보고 살면 되잖아요! 그런데 돈이 안 되는 걸 왜 쥐고 있느냐, 하는 거지요. 자기가 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어깨에 메고 있다는 말씀입니다.(눅 15:5) 그게 얼마나 귀한 겁니까?

사람이 열등감이 있을 때 누가 나에게 말을 건네주지 않으면 사람이 힘들어 못삽니다. 다만 특징이 뭐냐? 온 가정에 다 문제가 있어요. 그래서 누가 되었든 특히 미혼여성들이 절대로 기죽으면 안 돼요. 결혼을 해도 지옥이고요. 그렇게 세상을 힘들게 살면서 세상이 뭘 바라보는가를 알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돈입니다. 돈이 없으면 아무도 안 찾고 퇴직을 해도 퇴직금이라도 있으면 금방 달려들게 되어있습니다.

돈 있으면 고독사는 하지 않습니다. 돈 떨어지면 죽어요. 돈 떨어지면 죽는다니까요. 사람들은 돈 보고 달려들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결혼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데 결혼은 동업이지요. 복잡해 보여도 간단해요. 돈 있으면 그럭저럭 살고 돈 없고 돈 떨어지면 갈라서고 떠나는 거고요. 사람들이 금방 좋다고 결혼했다가 금세 헤어지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서로 갖고 있는 동영상이 달라서 그래요. 결혼하고서 이틀은 너무 짧습니다만. 제가 그런 적 있잖아요. 대화 상대만 있으면 된다고요. 그런데 문제는 복음이 안 나오는데요 뭐.

여자들은 대화 상대를 원하는데 남자들은 결혼을 원하는 이유가 편하게 살고 싶은 거예요. 나 대신 살림 살아달라는 겁니다. 밥해주고 빨래해주기를 원하는 거예요. 이야기 들어보면, 여자들은 친구를 원하고 맛있는 거 사 먹고 여행 다니면서 대화하기를 원하는데 남자들은 식모를 원해요. 청소하고 빨래하고 밥해주기나 바라니 다 안 맞아요. 그러니 필리핀 가정부 들여서 한 달에 2백만 원이나 2백 5십만 원 주면 됩니다. 여자는 남자 돈 보고 결혼하고 남자는 내가 돈 내니까 너는 나에게 무조건 복종하고 살림 살아달라는 거지요.

그래서 사는 것 자체가 빨리 벗어나라고 사는 거예요. 지옥 같은 세상에 미련 끊고 빨리 오라고 하는 거예요. 제가 수련회 녹취를 정리하면서 계속 추가되는 것은 이거예요. 숨겨 놓은 것도 없으면서 찾는다는 것, 땅에서 보화를 찾는다는 그 대목, 거기에 제가 보충을 해놨어요. ‘아, 이것은 보충을 안 하면 못 알아듣겠다’ 싶어서.

인간은 찾다가 못 찾으면 없는 거예요. 아무리 파도 없으면 없는 거예요. 없는데 그걸 주님께서 이용해서 아무것도 없게 만들고 그걸 찾으면서 비로소 있게 만들어요. 그래서 보물이 있었다는 거예요. 인간은 뭐가 있어야 찾아요. 있어야 찾는데 만약에 인간이 농부라면 거기에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리 농사를 지어도 거기 뭐가 없어요.

따라서 인간에게 천국은 가려졌다, 천국을 찾을 수 없다. 없으니까 못 찾는 거예요. 그런데 없음을 분명히 해놓고 거기서 주님께서 천국을 끄집어내 버리면 처음부터 거기 천국이 있었다, 가 되는 거지요. 그게 천국이에요. 주님이 농부예요. 주님께서 자신이 보물이 되기 위해서 자기가 숨고, 찾고 찾아지는 당사자 역할을 다 하고 있는 거예요.

또 보충한 것 중에 뭐가 있느냐 하면, 인간은 자아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집단으로 태어난다는 것. 왜냐하면 인간의 자아는 부모가 가르쳐주기 때문에 자아는 분명히 나인데도 불구하고 집단의 것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집단에서 파급된 것만 내어놓으니까 자아가 집단의 일원이지 나라는 것은 따로 태어난 적이 없어요.

그래서 집단의 이름으로 태어난 거예요. 그렇게 되어야 아담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아담은 옛날 사람이고 나는 나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담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인간은 대대로 내려오는 집단의식을 부여받기 때문이에요.

지난 낮 설교(8월 4일)의 핵심단어는 그거였어요, 중간생산물, 중간생성물. 왜냐하면 인간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어요. 시작과 끝을 논할 자격이 안 돼요. 지난 낮 설교에 너무 함축된 내용이 많고 듣는 사람이 부담을 가질 것 같았어요. 이걸 즉흥적으로 푸는 방법이 ‘상하이’였어요. “샹하이, 샹하이, 샹하이, 샹하이, 트위스트 추면서…” ‘상하의’, 상의와 하의, 그 할배 개그. 설운도가 아니었으면…

- 아, 언어를 아무리 쪼개도 아무 의미가 나오지 않는다는 그 이야기요?

본인이 살아있다고 하는데 무슨 의미가 나와요? 본인이 살아있는데! 시작도 없고 끝이 없는데 인간들은 시작도 있고 끝도 있다는 거예요. 나, 나라고 하는 동영상, 그것이 있다고 하니까 그걸 가지고 성경 원어 연구하고 헬라어 히브리어 연구해도 무슨 소용이 있어요? 아무 소용없는 거예요.

- 어떻게 그렇게도 다 잊을까요? 들을 때는 겁나 좋거든요. ‘됐다. 이거 하나 알고 살면 됐다’고 내심 충족감에 빠지곤 하는데…

어제는 바로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께서 분명히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내가 놀랐지요. 죽을병이 아니라고 했는데 죽었잖아요. 거기에 대한 해결책은 뭐냐? 레위 언약의 완성은 노선이 달라요. 이쪽 노선은 그 말씀을 이해 못 해요. 다른 노선으로 따로 설정되어 있어요. 레위 언약을 뒤집어쓰고 나오는 사람은 그 핏속에 불이 들어 있어요.(아, 그거요! 불로 심판, 피로 표백!)

그리고 예수님과 세례요한의 차이점은, 같은 물속에 있지만 한쪽은 성령을 받은 사람과 안 받은 사람의 차이입니다. 세례요한의 잘못은 뭐냐 하면, ‘주님이 시키는대로 했기 때문에 나는 이제 심판에서 제외되었고 나는 이제 구경이나 하련다’ 한 그것이 잘못이에요. 그러니까 결국 예수님이 누군지를 못 알아보는 거예요.

- 결국에는 알아본 거 아닌가요?

나중에는 결국 알아봤겠지요. 그런데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자기 행위에 문제가 있을 때는 못 알아보는 것이 맞는데, 세례요한의 생각에 자기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못 알아봤다는 것. 도대체 이 문제해결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시험에서 백 점을 맞았는데 통과가 안 돼요. 그러면 대체 뭐가 빠졌느냐 하는 거예요, 뭐가?? 그 빠진 부분이 오늘날 ‘바로 우리에게서 빠진 부분’이라는 거예요. 난 성경대로 다 하는데, 대체 왜…!?

그러고 보니 이 대목에서 딱 생각나는 사람들 있겠지요. 다 했어요. 그 힘든 녹취도 하고 이것저것 다 했다고요. 다 했는데 꼭 세례요한 같은 거예요. 시키는 대로 다 해요. 도끼 이야기도 하고…, 주님 맞지요, 맞지요, 하면서 다 했는데 안 맞았어요. 도대체 어디서 잘못되었는지? 주님과 세례요한 사이에서 다이렉트로 가면 안 돼요. 십자가로 우회해서 와야 돼요.

- 예수님조차 십자가로 우회해야만 된다는 말씀이네요.

그럼요! 십자가로 우회해야 되지요. 왜? 세례요한은 구약의 선지자기 때문에. 그래서 세례요한이 대단해? 천국에서는 어린아이가 세례요한보다 대단하다(마 11:11)고 하지요. 왜냐? 십자가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래서 지난 수요일에 했잖아요. 천국 생활이란 무엇인가? 이 세상에 없는 것들을 공급받는 식으로 살아간다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그 은사들,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을 공급받는 사람이 천국 생활을 시작한 것이라고. 그래서 나온 이야기가 뭐냐? 시댁 어른들 오는데 청소 하나도 안 하는 그것. 그 이야기를 나는 몰랐지요. 그런데 예배 시간 직전에 뒤에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린 거예요.

- 그날 예배 참석한 분이 “시댁에서 손님들이 오면 청소도 하고 번잡스러울 것인데요.” 하길래, “당사자는 별 관심 안 둡디다” 했거든요. “안 치워도 아무렇지도 않고 반찬도 그냥 있는 것으로 먹고요” 딸이 그렇게 한다길래 나도 처음으로 그런 줄 알았죠.

- 그런데 설교 시간에 그 이야기를 듣는 입장에서는 아주 생동감이 있는 거예요.

그 자리에 당사자가 있었다면 그런 소리는 절대 하지 않지요. 그 자리에서 설교 듣고 있는 입장에서는 ‘와, 그래도 조금이라도 치워야지’ 하는 생각이 들 수가 있잖아요. 본인이 없는 그런 상황에서 아버지 목사인 내가 이야기해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여보, 제 약 좀 주세요. 부시럭~~

인간은 기계잖아요. 나이 들면 그 기계가 다 되는 거예요.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모세도 그렇고 엘리야도 그렇고 쓸만할 때 그 용도가 끝나면 그냥 데려가는데, 그렇게 그냥 가면 되는데, 인간이 점점 죄가 관영하게 되면 아무 쓸모 짝도 없는데 자기가 더 살고 싶어서 온갖 병명을 다 만들어 내고요, 링거 꽂고 다 하지요. 그런데 주께서는 “옳지 한번 잘 해봐. 누가 힘든지 한번 해 봐.”

- 버티기로 인생을 살아가니 참 힘든 거죠. 모세는 죽을 때도 건강했다는 식으로 성경에 나오지요. 기력이 좋았다는 식으로.

그럼요. 건강하지요. 모세가 죽는 이유를 이번 수련회 때 언급을 한 것 같은데요. 본래의 자기 위상으로 가요. 원래의 자기 위상으로. 왜? 중첩되어 있기 때문에. 그걸 유령성이라고 했잖아요. 이번 수련회 때 놀란 것은 모세가 40일 동안 물도 안 마시고, 떡은 물론이고 물조차 안 마셨어요. 무슨 그런 인간이 다 있어요? 그걸 믿으라는 거예요. 사람들은 안 믿지요. 왜? 자기 뒷배가 있으니까.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하는 그 뒷배.

모세를 믿으라는 말은 네가 모세처럼 되어야 한다는 뜻이거든요. 그게 무슨 수로 됩니까? 어떻게 40일 동안 물을 안 마셔요? 수련회 제일 마지막에 이야기했잖아요. 교재 결론 부분에 있지요. “성경? 할 일 없거든 봐라. 그리고 진지하게 생각하지 마라. 너 챙기는 인간 같으면 절대로 성경 봐도 소용없다.” 저쪽에서 공격하는 것을 먼저 내가 선수 쳤거든요. “네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 이거잖아. 내가 이야기해 줄게. 이거지? 너희들은 그렇게 하면서도 이유는 모르잖아.” 그게 뭐냐? 너와 너 자신이 헤어지지 못한다는 것.

모세는 헤어졌는가? 모세는 강제로 납치되었지요. 주님한테 납치되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어깨에 메어진 채 오는 거예요. 자기가 알아서 오는 것이 아니고 ‘데려옴’ 당하는 거예요. 그걸 보게 되면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하는 그게 최곱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

- 모세는 사라진 겁니까?

아니요. 그냥 죽었지요. 죽었는데 시체는 찾을 수가 없어요. 알려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세의 기능은 육신에 있는 것이 아니고 유령성에 있기 때문에. 분명히 죽었는데 산 사람처럼 다룰 때 이렇게 다룬다는 겁니다. 그리고 모세의 죄는 정말 사소한 죄예요. 성질나서 반석을 한 번 더 친 그것. 그런데 주님께서 기다렸어요. ‘걸리기만 해봐라. 그러면 나는 너의 유령성대로 데려가겠다.’ 이렇게요. 왜냐하면 모세가 그리스도는 아닌 거예요. 반드시 자기 성과에 의해서 타인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메시아만이 자기 하는 일에 남에게 효력을 주지 메시아 외에는 자기가 하는 어떤 행동도 남에게 효과를 못 주지요.

인간은 그 자체로 일단 환자예요. 환자로 태어납니다. 환자인데 어디까지 환자인지를 본인은 모르기 때문에 주의 성령께서 말씀으로 ‘이것까지 환자’라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얼마 전에 조항조의 ‘거짓말’이라는 노래 가사를 설교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사랑했다는 그 말도 거짓말
돌아온다는 그 말도 거짓말

그런데 그 가사를 보게 되면 저쪽에서 하는 모든 것이 거짓말인데 그걸 듣고도 그 주인공이 “내가 용납해줄게” 곧 ‘바른말을 해서 용납해주는 것이 아니고, 나오는 게 거짓말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용납해준다. 내가 빈자리를 마련해 두었다는 거예요. 내가 네가 돌아올 자리를 마련해 두었다. 거짓말하는 채로 돌아오라. 거짓말을 해도 탓을 하지 않을 테니까.’

다시 한 번만 더 나, 너를
다시 한 번만 더 너에게
나를 사랑할 기횔 주어본다

어떤 사랑으로 나의 용서에 답할 련지
또 잠시 날 사랑하다 떠날 건지

그래서 사람들이 목사를 대할 때는 그 사람을 이용 거리로 대하는 겁니다. 복음이 안 나오면 그 목사를 찾을 이유가 없고 더 들을 이유도 없어요. 인간관계에서 나에게 이익이 없는데도 그 사람을 계속 사귀고 관계 맺을 이유가 없어요. 인간관계에 있어서 누가 날 우습게 여긴다든지 내친다, 그래서 서운하다든지 괘씸하다 할 것이 아니라 나한테서 나오는 것이 없나보다, 해야 옳겠지요. 왜 상대방이 시간 낭비를 하면서 힘들게 나를 만나겠습니까? 복음 모를 때야 ‘내가 공들였으니 내 사람이다’ 이런 보람이라도 있었다면, 이젠 그 모든 게 역겨운 짓인지를 다 아는 마당에서 서로 만나는 거예요.

그래서 특히 목사는 뭐냐? 차라리 이용당해버려라, 그 말이지요. ‘감히 날 이용해?’가 아니고. ‘반짝반짝, 하듯이 복음이 나오면 만나주되 안 나오거든 너를 내칠 거야.’ 그 내침을 당하라는 것이 주의 뜻이에요. ‘내침’을 당해라.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 하나가 성령 후의 삶이 뭐냐, 하는 건데요 성령 이후의 삶이 뭐냐? 성령 이후에 개떡이 나오는 것을 성령 이후의 삶이라고 하는 거예요. 성령 후의 삶은 ‘성령으로 나 개떡같이 살았다’는 그것이 성령 이후의 삶이에요.

수련회 때 이 이야기를 안 했는데요. 서수(序數)가 뭐냐 하면, 옛날 유적지에 보면 그 당시 사람들이 같은 조개를 늘어놓을 때 동그랗게 열을 지어서 놓는다고요. 선사시대 사람들이 ‘이거 다음은 이거, 이거 다음은 이거, 그리고 이거 다음은 이거’ 이런 식으로 진리를 추구했던 거예요. 물론 원시적인 방법이지만. 그게 서수(序數)에요, ordinal. 순서를 정해놓는 거예요. 그런데 언제부터 기수(基數)가 나오느냐 하면, 그걸 몽땅 가질 때 그게 폭력이거든요, 그 폭력이 기수에요.

서수는 그냥 자연스러운 인간의 운동이거든요. 운동, 또는 행함이라고 볼 수 있어요. 운동이고 서수인데 이걸 폭력으로 해서 그 결과를 ‘그 서수를 몽땅 내 것으로 만들겠어.’ 할 때 드러난 것이 니므롯(창 10:8)이에요. 니므롯, 영웅, 바벨탑 그런 것들이라는 말이지요. 서수에 대해서 기수가 그걸 몽땅 폭력적으로 차지하고 추상화시키는 방식이 기수라는 말입니다. 서수, 첫째, 둘째, 셋째…, 그리고 기수, 1, 2, 3…, 그걸 제대로 이해하면 1과 3과 5, 7, 이것은 아무 연관이 없는 거예요.

아무 연관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예컨대 6은 1+1+1+1+1+1, 이걸 뭉뚱그려서 6이라고 했는데 그게 6을 하든 7을 하든 ‘너는 너고, 나는 나다’라는 것에서 아무 관계가 없어요. 1도 따로고 3도 따로고 전부 다 따로 노는 거예요. 그런데 생각조차도 사실은 또 자기중심의 기수에요.

그걸 아시고 주님께서는 어린양이라는 기수를 통해서 맨 위에서부터 계단을 타고 피가 흘러나오도록 했다고 했지요. 유령성의 모세 하나를 통해서 율법을 담아 보내서 율법을 떨어뜨리면 모세처럼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모세의 자리가 주님 오실 자리를 보여준 게 됩니다. 이번 수련회의 핵심단어라 하면 기수와 서수입니다. 질적 일의체도 거기서 나오는 거니까요.

이번 겨울 수련회는 ‘다니엘’ 합니다. 다니엘을 포용할 수 있는 단어를 아직 종합적으로 끄집어내지를 못했어요. 못해내면 수련회를 못 하는 거지요. 할 수가 없어요. 왜냐? 그것을 못 해냈는데 한다? 그러면 기존의 것을 끌어모아서 하는 것인데 그것은 용납이 안 되지요. 기존의 것은 동영상이 있고 녹취가 다 되어있는데 뭐하려고 그걸 또 합니까? 그것은 안 되지요. 주께서 허락을 해줘야 하지 인간끼리 모여서 하는 그런 것은 내가 용납이 안 돼요. 이게 주의 일이 되어야지 주의 일을 빙자한 인간의 일이 되어버리면 그것은 아까 심방 설교에서 이야기한 ‘엄살’이 돼요.

내 것 지키기 위해서 주님 끌어옴으로써 나를 방어하는 거예요. 나를 안 다치려고 하는 것, 지킬 것 지키고자 하는 수작을 부리는 거예요.

- 목사님은 다니엘서를, 이미 많은 강의나 설교를 하셨잖아요.

그것은 그때 주셨지요. 물론 ‘그때는 이렇게 봤구나.’를 보지요. 그걸 확인하고 그 때 한 것을 뺄 때 뭐가 나오느냐 하면, 그걸 제낄 때 또 뭐가 나오는가 보는 거죠. 그게 받쳐지지 않으면 밑엣 것이 안 나오지요. 이렇게 뺄 것을 치워버릴 수 있어야 하고 그걸 치우는 용도로써 필요한 거예요. 그것 때문에 하루를 더 사는 거예요. 그다음 하루를 또 더 살고. 그게 안 나오면 주께서는 다 썼으니까 이젠 끝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누가 뭘 어쨌다 저쨌다 해도 지금 답답한 것은 나지요. 옛날 것을 써먹으면 되는데 그건 안 된다니까요. 심지어 우 집사님 댁 심방예배 한다는 이야기를 오면서 비로소 들었다고요. 전에는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동안에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그냥 어디 바닷가에 놀러 가는가?’ 그렇게 생각했는데, 옆에서 갑자기 하는 말, ‘심방해야지’라는 그 이야기를 듣고부터는, 나에게는 ‘또 다른 시작이’ 시작된 거였어요.

운전하면서 ‘본문은 뭘 로 할 것인가? 내용은 뭘 로 할 것인가? 맹탕인데 뭘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기존에 알던 것으로 썰을 풀까요? 그것은 우 집사님도 용납을 안 할 거예요. 우 집사님이 ‘뻔히 아는 것을 심방용으로 써먹었구나.’ 할 수가 있다니까요.

- 지난번에는 수련회 끝나고 나서 여수에서 짧지만 새로운 내용으로 강의를 하신 적도 있지 않습니까? 이번에도 그런 내용이 혹 있으셨는지? 수련회 끝났으니까 얼마든지 그런 것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때는 미리 이야기를 들었었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그동안 너무 바쁘게 지내다 보니 심방 한다는 생각은 못 하고 8월 15일에 바람 쐬러 바닷가 간다는 그것만 생각했는데 “심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갑작스런 지시에 “심방 해야지요.” 했는데, 문제는 그 본문과 할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는 그 말이지요. 심방(설교)을 뭘 해야 하는데요, 뭘…? 운전하면서 계속 그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본문도 생각이 안 나고.

- 그런데 뭔가를 적어 오셨던데요?

그것은 오는 길에 휴게소에서 적어 온 거예요. 휴게소에서 ‘아하, 엄살이다.’ ‘엄살’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어요. 똥줄 타는 것은 맞는데요, ‘엄살’이라는 단어가 떠오른 뒤에는 똥줄 타는 그것을 다 잊어버리고 제가 기뻐요. ‘아, 인간들이 엄살을 부리고 있구나.’ 그 엄살의 내용을 분석해 들어가면서 그다음에 본문을 ….

- 그러니까 본문에서 ‘엄살’이라는 단어가 나온 것이 아니라 ‘엄살’이라는 용어가 먼저 떠오르고 그다음에 본문으로 찾아가셨다는 건가요?

그렇게 된 거죠. 성경에 따로 ‘엄살’이라는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닌데 ‘엄살’의 내용을 분석해 가면서 인간의 속내에 ‘예수가 뭔데? 하나님이 뭔데?’ 이럴 수가 있거든요. ‘그런데 불신자는 이런 생각이 당연하고 신자라고 해서 이런 사람이 없겠어?’라는 생각이 미친 거예요. ‘그러면 그걸 지적하는 대목이 있을까? 있다, 나발. 나발과 아비가일의 그 나발. 이거였구나.’

부부인데 달라도 너무 달라요. 왜 다를까? 그들의 사고방식은 어떻게 다를까? 아비가일은 어떤 사고방식인지 모르지만, 나발이 하는 행동을 이 아내가 노골적으로 개무시했다는 사실이 아주 특이한 거예요, 저한테는. 아내는 남편 편들기 마련인데 이거는 안 살겠다고 작정한 것처럼, 죽기를 바라는 것처럼 ‘평소에 내가 너 봐왔어.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너 쳐 죽일 거야.’ 아비가일의 그런 믿음은 도대체 어떻게 확인될 수 있는가?

다윗과의 만남에서 확인될 수 있지요. 물론 그걸 자세히 설명하게 되면 좀 지루해져요. 좀 빼면서 이야기했는데 사실은 성경에 그 내용이 나오거든요. 더 깊이 있는 내용이 나오려면 다윗의 행색이 얼마나 초라했는지 빌어먹는 초라함이라. 그러니까 부자인 나발이 보기에 “요새는 지나 개나 다 얻어먹고 다녀, 도대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거예요. 부자겠다. 아내가 예뻤겠다. 그래서 제가 집사님에게 물은 거예요. “부자고 아내가 예쁘면 무슨 문제 있습니까?”

우 집사님이 바로 추임새를 넣었어요. “문제없습니다.” 바로 문제없는 거예요. 문제없는데 왜 믿지? 교회 왜 나가지? 엄살, 엄살이죠. 그런데 이제 두 번 다시 엄살이라는 단어는 안 쓸 거예요. ‘다음에 또 그거 쓰기만 해 봐라. 바로 그때 너한테 준 거야. 오늘 준 거 아니야. 주의해.’ 예를 들어 주일 아침에 다 쏟아냈잖아요. ‘주일 오후에 주일 오전 것 써먹기만 해봐라.’

맥락은 같아요. 맥락은 같은데 맥락이 같더라도 다른 형태를 가지지요. 그래서 이것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정답이고요, 두렵고 떨린다는 말은 ‘주시옵소서’하는 말의 다른 표현이에요. ‘주시옵소서. 안 줘도 되는데 주옵소서.’ 어제 주일 낮에 설교에 있어서 위기가 있었어요. 그 위기가 뭐냐 하면, 다윗이 두줄 길이의 포로는 죽였다는 그 대목, 그 본문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설교 시간 10분 전에도 못 찾았어요. “여보, 여보. 이런 내용이 있는데 검색 좀 해줘 보세요.” 검색어를 뭘 넣어야 할지를 몰랐어요. 그래서 ‘침상인가? 침대?’ 침대라는 단어는 옛날에는 없었으니까 그런 단어로는 안 나오고요.

검색을 해도 나오지를 않는 거예요. 예배 5분 남았어요. 설교 준비한 것 다 포기한다. 이것은 내가 아는 내용인데 지금 내가 못 찾고 있다는 것이 평소에 얼마나 내가 무식하고 게으른가가 티가 났으니까 이것은 날 위해서라도 찾아야 한다. 설교 되고 안 되고 그것은 모르겠고, 보통 설교는 짜인 대로 해야 하는데 다 포기했어요.

‘포기하고 이 본문만 찾자. 다윗이 한창 잘나갈 때, 소위 까불 때가 언제지? 사무엘상에서는 다윗이 까불기도 하지만 사울에게 쫓긴다고 진짜 똥줄이 탈 때니까 여기는 아니다. 그러면 사무엘하를 보자. 예루살렘, 살렘성을 정복할 때 그 전, 여부스 사람들 이야기 나올 때의 그 전, 그 이야기가 나오면 그것은 예루살렘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에 그것은 딴 이야기거든요. 그 이전에 잘나갔을 때의 이야기다. 제가 또 좀 헷갈렸던 것은 침상에서 다리를 자른다는 그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에서 들은 이야기로 아는데 그래서 그것은 오후 설교에서 이야기했었어요. 그러다가 찾았는데 8장에 그게 딱 있는 거예요.

‘반갑다 친구야’ 찾아서 보니 줄의 길이로 해서 포로를 죽인다는 이야기에요. “다윗이 또 모압을 쳐서 저희로 땅에 엎드리게 하고 줄로 재어 그 두 줄 길이의 사람은 죽이고 한 줄 길이의 사람은 살리니 모압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삼하 8:2) 그 잔인함. 그 잔인함에 대해서는 사무엘하 12장 31절, 써레질 도끼질 톱질하는 그 내용. “그 가운데 백성들을 끌어내어 톱질과 써레질과 도끼질과 벽돌구이를 하게 하니라 암몬 자손의 모든 성을 이같이 하고 다윗과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니라”

이게 나중에 보니까 본문 주석부터 다 엉터리로 해놓은 거예요. 다윗이 암몬 도성에서 그렇게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잖아요. 그러면 이것은 전쟁 중이에요. 포로를 잡아서 써레질을 시키고, 도끼질을 시키고, 벽돌 굽는 일을 시키는 이것은 포로를 잡아서 예루살렘에서 해야 될 일이지요. 이것은 노동을 시킨 것이 아니라니까요. 그런데 사람들이 다 그런 해석을 해놨는데, 메이첸(존 그래셤 메이첸 1881~1937, 미국장로교신학자)의 해석을 보니까 그게 나왔어요. 직접 벽돌구이하는 그 뜨거운 곳을 지나가게 했고, 직접 써레질로 찢었고, 직접 도끼질을 했다는 그 해석도 있고요. 그런데 이 해석은 옛날 해석이라면서, 최근에는 인권 생각한다고 다윗이 그렇게 잔인하게 죽였을리는 없다 해서 대부분의 해석은 그들로 하여금 노동을 시켰다는 쪽으로 간 거예요.

노동을 시켰으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이유가 없지요. 전쟁 중이에요. 전쟁 중에 무슨 노동을 시킵니까? 그래서 사무엘 하를 다시 봤어요. 그렇게 모압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이는데 이 경우엔 살려두는 그것이 더 치욕스럽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조공을 바쳤다고 되어있어요. ‘아, 이방 사람들은 혼쭐을 내야 하는데 다윗은 그 방법을 사용했구나.’ 어느 정도로 혼쭐을 냈는가? 아예 다 죽였다는 것은 아니고 죽일 사람은 그렇게 죽였다는 거예요. 아마도 관리들이었을 거예요. 관리들을 백성들 보란 듯이 그렇게 했을 거예요. 너희 종교 믿는 사람들 이렇게 된다고. 그다음부터는 이들이 꼼짝 못 하게 전략적으로 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래서 주일에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진멸하라”는데 “양심상 못합니다” 하는 말은 본인이 하나님 앞에 진멸 당하기 싫다는 의사를 갖고 있다는 겁니다. 하면 뭐합니까? 그냥 다 지나가는데. ‘또 다음 것 내놔라.’ 그래서 없어요. 없는데 내놔야 해요, 없는데. 그런데 막상 나오면 내가 기뻐요. ‘세상에, 이런 일이 있었네. 이걸 같이 나눌 수 있어서 기뻐요.’ 이런 거요.

- 그것도 유령성인 거지요?

유령성이지요. 이게 유령성이에요. 그걸 점점 느끼는 거예요. +알파, 여분의 것.

- 사람들이 그걸 보는 것 같아요. 그게 나오는 구멍을.

나온다고 보지요. 나는 그걸 이용한다고 봅니다. 어떤 사람이 그 이야기했어요. 죽 나오다가 지금 안 나오는 사람이 그런 이야기 했어요. ‘제가 이 목사님 교회에 가는 이유는 아무도 안 믿는 것을 혼자 믿는 그것을 구경하러 간다’고요.

- 어떤 20대는 이랬어요.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이 복음이 혹시 고도의 사고능력에 의한 정교한 논리 때문에(너무나 그럴 법해서) 그래서 믿고, 거기서 위로와 안정을 삼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이 ‘믿는다’는 것이 인간쪽에서는 아무런 이유와 목적이 없어야 할 것 같은데, 가만 생각해보면 이유가 보인다는 거예요. 망해도 나온다? 저주받음을 기뻐한다? 이미 죽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이 진리라고 말씀하시는 당신들이, 사실은 이걸 알아채는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위로받고 안심될 거라는 거죠. 돈 많아야 감사하는 세상에서 망하는 자리로 기뻐한다니, 세상에 이것보다 더 고도의 정신작용이 어디 있겠어요?

그럴 수가 있지요. 하지만 그것은 내 소관은 아니지요. 정말 내 소관 아니에요. 그걸 유도한다든지 그것은.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니고요.

- 어떤 30대는 또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근호 목사님에 대한 가장 적절한 단어를 댄다면 ‘그리움’일 것이라고. 그게 뭔 뜻이냐 했을 때, 그 사람 답변이 ‘아마 목사님은 이 땅에서 누구한테서도 위로가 안 될 겁니다. 또 어떤 말을 들어도 절대로 위로가 안 될 거예요. 아무리 무슨 말을 한다 해도 어쨌든 그 주님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거고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거니까. 그래서 그분은 항상 그리움을 품고 사실 것 같다’고도 했고 당연히 ‘목사님은 어떤 사람하고도 절대로 닿는 부분이 없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참 건방진 말처럼 들리더라고요….

그 말은 고맙지요. 사도바울이 이야기했듯이 내가 원해서가 아니고 부득불(고전 9:16) 한다는 그 이야기, 부득불 한다는 그 말과 똑같은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누구하고 대화하느냐 하면, 주님하고 대화해요. 그 닿는 부분이 없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계속 공부를 하라는 이야기예요. 세상 각 분야에 정통한 사람들이 그렇게도 많거든요. 그 정통하다는 사람들의 책들을 본다고요.

죽 보면서 그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말을 해요. 그게 그들의 치명적인 한계에요. “여러분, 저의 이론은 이 정도입니다.” 하고 보여주기 위한, 주님을 대하는 것이 아니고 보이는 인간을 대하면서 대화하는 거예요. 그게 한계라니까요. 그걸 넘어서서 보이지 않는 주님과 대화가 되어야 하는데 보이는 인간에게 ‘나 이 정도 연구 많이 했기에 이 정도 많이 압니다.’ 그게 한계에요. 놀라운 것은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런다는 건데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걸 우리 교회 교인들이, 십자가 마을 사람들이 눈치채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로 하여금 더 궁지에 몰리게 만들지요. 예를 들어서 어떤 목사가 설교를 하면서 ‘이것은 복음적으로 똑같은 관점이니, 사람들이 설마 그 차이를 못 알아내겠지.’ 생각했는데, 그런데 다 알아내요. ‘비슷하기는 하지만, 이상하다’ 하면서. 그래서 나도 교인들이 무서워요. 말썽 되게 부리는 것 같은데 설교 시간만 되면 딱 집중하면서 ‘내놔, 내놔’ ‘뭘?’ ‘나도 뭔지는 모르지만 무조건 내놔’(내가 뭘 모르고 있는지를 알려달란 말입니다…!)

참 신기해요. ‘참 신기하다. 그리고 참 고맙다.’ 이 말씀을 이렇게 거부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고마워요…. 여기 오니까 지금 수련회 첫날 같아요.

- 전에는 수련회에서 더러 사람들 방에도 들러서 이야기도 나누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랬습니다. 지금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강의를 할 때 한 시간, 한 시간 우선 내가 만족스러워야 하니까 준비에 몰입해야 해서 그렇습니다. 옛날에 나온 제 책들을 보니까 다음 강의 할 것을 내가 미리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마음 놓고 밖에 나가서 이야기도 나눌 수 있었던 거예요. 이거 한 다음에는 이거 하고, 이런 식으로 이 시간에 이렇게 하면 된다, 는 이것을 예상하고 했는데 지금은 그렇게 안 돼요. 모든 것을 첫째 시간, 둘째 시간에 다 쏟아 넣어요. 셋째 넷째 시간에 할 것은 없어요. 없는데 다만 그날 밤이 있으니까 그 밤에 잠을 안 자고 해야 돼요.

어떤 분이 십자가 마을 수련회, 다른 분도 강사를 해야 하지 않느냐고 했을 때 제가 한 이야기는 그거였어요. ‘그렇다면 강의안을 한번 제시해 보라’고. 누굴 시킨다, 그런 소리 하지 말고 강의안을 한번 보자. 그래서 과연 이것이 모일 만한 새로운 내용인지를. 피차 아는 이야기, 우리끼리 모여서 ‘참 훌륭한 신앙이지?’ 이런 따위의 소리를 하려는지 한번 보자는 거예요. 강의안을 내놓으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교재 자체도요, 제가 먼저 내놓잖아요. 교재의 내용이 함축되어 있고 상당히 어려워요. 일부러 어렵게 하지는 않는데 할 수 없어요. 지면이 7페이지나 8페이지로 한정된 그 범위 안에서 이야기를 담으려고 하니까 내용이 어려워져요.

- 이 강의 다음에는 이런 내용으로 한다는 어떤 원칙 같은 것이 있습니까?

없어요. 원칙은 하나밖에 없어요. 다 비운다, 다 비웠다는 것. 다 비웠는데 나는 살아 있잖아요. 살아있다는 말은 주께서 또 뭔가 주실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지고, 즉 사는 조건은 새로운 것을 주신다는 조건하에 살아있으니까요, 안 그러면 교통사고 나서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 예를 들어 다음에는 다니엘서로 수련회 강의한다고 정하신 어떤 이유라도…

이미 나온 책들을 죽 보니까 거의 다 했어요. 거의 다 했지요. 다니엘은 없더라고요. ‘70 이레’라는 주제로는 했는데 다니엘은 하지 않았어요. 성경에서 빠트린 것이 있으면 그것을 해야지요. 다니엘 하기로 했는데 그 내용에 대해서는 지금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어요. 앞으로 몇 개월이 남아 있으니까요, ‘주께서 주셔야 된다’가 아니라 안 주시면 내 쪽에서 못하지요.

- 수련회 준비를 위해서 서점에서 책을 미리 구입해 오시나요?

그건 아닙니다. 구입한 책들은 9월부터 시작되는 지역강의를 위한 책들이에요. 지역강의를 위한 책들인데 벌써 내 컴퓨터 안에 2025년도 겨울 수련회 강의안이 벌써 그 내용이 채워지고 있어요. 지역강의를 위한 책들이지만 책 읽다 보면 나오는 것들이 있잖아요. 그걸 전부 다 담는 거예요. 책을 읽으면서 하나하나 담는 거예요. 그게 안 나오면 책을 돈 주고 살 이유가 없어요. 내가 찾지 못한 맥락, 또 어떤 개념과 개념을 내가 잇지 못한 맥락이 책에서 보이면 그 책을 구입합니다. 노선을 이렇게 이을 수도 있는데, 이런 노선이 있다면 이것은 내가 몰랐던 것이니까 그것을 적어놓는 거예요. 그걸 적어서 두고 나중에 교재를 쓸 때 거기서 인용을 한다든지, 그 부분을 편집해서 한다든지, 나름대로 정리를 한다든지 그렇게 하지요.

- 그게 다양한 세상 학문 책들이지요.

세상 학문의 책들을 왜 보느냐? 거기에 간단하면서도 평소에 내가 안 쓰는 단어가 나오기 때문에요. 이번 수련회에 나온 ‘흑인’과 ‘흑인 되기’, ‘여자’와 ‘여자 되기’는 들뢰즈 책에 나오는 단어에요.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인정받고 귀염받는 여성이 되고자 하는 쪽이지 ‘여자 되기’는 안된다. 왜? ‘여자 되기’는 모르기 때문에. 남성에 의해서 여자가 되기 때문에 여자 본인은 여자가 뭔지를 몰라요.

- 역사적으로 남성의 관점에 맞춰진….

계속 맞춰진 여자로 살기 때문에 여자가 뭔지를 여자가 모른다니까요.

- 유쾌한 내용은 아닌데 맞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더라고요.

그렇지요. 남성을 빼고 남성 자리에다 주님을 집어넣고 주님에 의해서 여자가 무엇인가, 이렇게 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누가 막아버립니까? 기존의 남성이 막아버리는 거예요. ‘너 그러면 나 너 사랑 안 해. 그러면 너를 내 아내로 삼지 않을 거야. 그러면 너는 여자답지 못하다고 욕할 거야.’ 이런 식으로요.

- 역사적, 문화적으로는 여성이 학대를 받는 약한 존재라고 되어 있잖아요.

좋은 이야기를 했는데 여성이 학대를 받았잖아요. 그것은 기존 인간세계에서, 곧 말의 세계에서 하는 주장이고요, 그러면 여성을 주님께 가져가 버리고 그 여성의 학대를 주님께 가져가 버리면 이 세상에 학대받은 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학대받은 분이 예수님밖에 없다면 진짜 여성은 누구냐? 예수님이에요. 왜? 예수님은 여자의 후손이기 때문에. 남성의 요소가 들어 있으면 남성의 후손이 되는데 여성의 요소가 들어 있는 것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예수님 자신이 여자의 후손인 동시에 여성성의 후손이 되어버려요. 유일한 여성성입니다.

- 목사님 자체가 여성적 이미지가 강한 것 같다는 개인적인 의견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표현이 아주 세밀하다든지, 여자 자신들도 잘 모르는 여성의 심리를 이야기할 때 ‘여자도 아닌데 어떻게 저런 표현이 나올까?’라는 생각도 들고요.

괄호, 곧 비어있는 성이 여성성이에요. 괄호성, 같은 말로 여성성.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자기를 창조한 자를 잃어버렸잖아요. 잃어버렸으니 공백이 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모든 성도가 여성이에요. 모든 성도가 여성인 것이 아니라 ‘여성 되기’가 되어야 해요. 자기의 남편을 잃어버렸으니까. 아까 어떤 사람이 말했다는 ‘그리움’이지요. 맥락이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일반 책들은 그것을 모르지요. 성령을 안 받았으니 그것을 모르는데 함부로 개념들을 끌어당길 때 그런 일반 책들을 보면서 ‘이게 아니라면 뭐냐?’를 생각할 수 있는 재료를 준다고요. 그런 기회를 주지요. ‘이 논리가 틀렸다면 그러면 뭐냐?’ 이 말입니다.

- 이 책 이야기를 들으니까, 갑자기 생각나는 대화가 있어요. 최근에 이러저러한 이유로 과학, 철학의 어떤 분야들, 양자론, 동양철학, 생물학 등의 책들을 접하게 되면서 자기 자신이 얼마나 세상 학문과 저명한 학자들을 무시하면서 살았는지를 돌아보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들을 깊이 알수록 어쩌면 세상을 깊이 아는 것이고 어디까지가 죄인지를 더욱 생생히 소급해서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또 그러한 책들을 마주하는 것이었는데 말이죠. 자신이 얼마나 먼지 티끌도 안 되는 어리석고 무지한 자인데 그들이 이뤄낸 학문적 업적들을 무조건 무시하고 읽을 생각조차 못했는지를 탄식하듯 말했었거든요. 그러면서 신앙생활 잘한다고 여겨졌던 교만한 자신이 인식되면서 기가 막혔던 거죠. 그들이 하나님을 안 믿는다는 이유들이 사실은 그만큼 자신은 기독교 세계관에 철저히 갇힌 인생임이 드러났다는 의미로 그렇게 들렸습니다마는…

그렇죠! 기회가 주어진다면 열심히 공부를 해야죠. 그런 기회들도 주님이 주신 귀한 사건인 겁니다. 똑똑한 그들은 얼마나 논리적입니까? 다 논리적으로는 맞는데 아까 말한 것같이 인간의 말의 세계 쪽에서 보면 결과적으로 꼭 세례요한 같아요. 열심히 연구하지요, 시키는 대로 다 하지요. 물세례 주고, 도끼 이야기 다 하고, 회개하라고 하고,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다 외치고 다 했어요. 했는데 아니라~!

그러면? 그게 뭔지를 모르는 거예요. 내가 새로운 지식의 세계를 인지하고 겸허이 그들의 관점을 수용하고, 주님 시키는 대로 했는데 그게 아니라면? 정답은 뭐냐? 하나님께서 “나는 너하고 안 놀아.”

- 그게 얼마나 기쁜 일이냐고, 주님이 인간하고 상대 안 한다고, 그걸 늘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예, 우리를 상대 안 한다는 이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어요? “저 강도입니다.” “나는 너 하고는 안 놀아. 오늘날 내가 너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게 얼마나 기뻐요? 인간승리가 딴 게 아니고 그게 인간승리지요. 그게 공백을 쥐고 사는 거예요, 공백을. 과부가 빈 베개를 베고 잔다는 이야기처럼 성도는 그냥 빈 공백을 베고 자는 거예요. 그럴 때 아내는 남편을, 남편은 아내를 서로 사랑하게 되지요. 아무것도 아닌데도 이렇게 있어 주는 그것만 해도 고맙지요. 내 곁에 없어도 되는데 이렇게 있게 해주시는 그 은혜에 감사하지요. 서로에게.

- 가끔은, 아주 가~끔은 고맙지요.

가끔이 어딘데요? ‘가끔’이라면 그것은 보통 사이좋은 게 아닙니다. 부모 자식 사이도 마찬가지예요. 자식도요, 나는 비어있어야 마땅한데 내 곁에 부모가 있다는 이 자체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대화 상대가 되어주고, 관심 준다는 자체가 고맙게 느껴지겠지요.

- 그런데 아내로서 해주는 것이 없으니까요…

그게 안 되는 거예요. 그건 공백을 자기가 만들어요. 본인이 공백을 만들어 버려요. ‘저 인간이 나 굶길지 싶어’ 본인이 공백을 만들어 버리지요. ‘너 나한테 들어오지 마. 나는 공백으로 비어있을래’ 이런 식으로요. ‘없음’으로써 공백이 되는 것을 모르고. 세리와 강도, 창기가 되어야 그것이 빈자리인데 ‘너는 더러우니까 오지 마’ 그렇게 되는 거예요. 바리새인처럼 그렇게 되는 거예요.

어제 주일 낮 설교에 고침 받고 주님께 다시 돌아온 문둥병자 이야기했지요. 챙길 것을 다 챙겼는데 왜 돌아와요? 챙길 것 다 챙겼잖아요. “문둥병 고쳐 달라면서? 고쳐줬잖아. 왜 돌아와?” 세례요한이 그걸 몰랐던 거예요. 앉은뱅이가 나을 필요가 없는데 왜 앉은뱅이가 걷느냐는 그 문제.

- 그 대목은 들을 때마다 어렵습니다. 세례요한의 그 질문하고 예수님의 답변이 전혀 엉뚱합니다.

예. 너무 엉뚱하지요. 그래서 제가 몇 주 전에 그런 설교를 했지요. 12년 동안 혈우병 걸린 그 여자, 그리고 귀신들린 여자, 또 백부장,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온다는 그 백부장이 다 초보라고요.

- 그 ‘초보’라는 그것이 하나의 논쟁거리가 되었는데요. 두 번의 주일 설교에서는 목사님이 초보를 설명할 때 일단 애굽을 떠난 것으로 개념 정리를 했습니다. 애굽을 떠나와야 일단 초보가 된다는 식으로요. 그런데 그다음 주 설교에서는 초보라는 것은, 아예 시작도 안 된 것 같은 뉘앙스로 설명하셨거든요.

이걸 확인해야 돼요. 일이 끝나고 난 뒤에 장성한 자의 입장에서만 초보가 나오는 거예요. 그리고 초보의 개념에서 듣는 이들이 그렇게 느껴질 것도 내가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게 둘 다 맞아요. 그게 이런 거예요. 첫 번째 초보 이야기할 때는 장성한 자만이 초보를 안다. 그런데 그 생각을 내 것으로 가질 때, 즉 ‘맞아. 장성한 자만이 초보를 알고 그래서 나는 초보를 아니까 장성한 자가 맞아.’라고 하는 그 사람의 그 초보를 어떻게 작살내느냐, 가 세 번째 네 번째의 설교입니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봐야 할 것인데 ‘그래서 나는 구원 받은 것이 맞아.’라고 나왔을 때는 그 방식이 바로 히브리서 방식이에요.

- ‘초보’라는 개념은 그러니까 딱 확정되어 있는 개념은 아닌 거예요…

그렇지요. 초보라는 말을 함으로써 ‘나 초보 안 될래. 나는 장성한 자 될래’라는 사람을 초반 초보가 작살 내요. 초보는 장성한 자의 것이지 장성한 자 되고 싶어하는 자는 초보가 아니라는 겁니다.

- 그렇게 움직이는 개념이라는 거지요.

그렇게 해놓고 초보를 아니까 장성한 자라고 또 하는 것은 그다음에 준비된 초보가 또 나와요. 히브리서 6장에서는 아주 과격해요. 히브리서 6장의 내용이 아주 과격한 거라고요. 세 번째가 뭐냐 하면, 노선 이야기를 했지요. 둘 다 돌이킬 수 없다. 이미 구원받은 자는 절대로 초보가 될 수 없을 정도로 돌이킬 수 없고, 그리고 이미 초보로 멈추는 사람은 이미 구원될 수 없는 것으로 돌이킬 수 없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히브리서가 완성을 시켜버려요. 초보 이야기를 던지면서.

그러면 그 전에 뭐가 있느냐? 말씀이 뜯어내요. ‘내가 뭐 되겠지’가 아니라, 말씀이 너의 골수를 쪼갠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그것은 뭐냐? 말의 세계가 아니고 뭐가 돼요? 말씀의 세계가 되지요. 말씀의 세계에서 ‘내가 뭐 되겠다’ 하는 것이 얼마나 작살나야 될 대상인지 지적하지요. 말씀이 운동하는데 ‘내가 뭐 되겠다’는 이것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여기 포도가 있는데 “저 따먹으세요.”라고 포도가 말을 하면 안 돼요. 그런데 와서 따먹고 나서 ‘내가 맛있다’ 하잖아요. 내가 맛있다고 하는데 포도가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려요. 보니까 ‘주인이 내 것을 따먹었어.’ 이것은 또 작살나야 돼요. 이 포도 또 작살나야 돼요. 그러니까 이걸 설명하려면 초보1, 초보2, 계속 이것이 시리즈로 나가줘야 돼요, 시리즈로.

어떻게 되느냐 하면 ‘주인이 나를 따먹었으니 나는 구원 받았다’는 그 노선 따로 있고, ‘나는 나를 위해서 너를 이용했다’는 그 노선이 따로 있는 거예요. 따로 있을 때 이미 완성된 노선에서 볼 때 인간들의 노선의 아이디어가 기껏 아무리 성령의 비췸을 얻고서라도 역시 누구 생각하느냐 하면, ‘그래, 나 구원받았지, 구원받았어’라는 생각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 현재 십자가가 이걸 보여줍니다.

- 예수님 십자가 지기 전 그 당시의 이야기를 가지고 성령의 비췸을 설명하셨던 것 같은데요.

성령의 비췸은 성령의 비췸부터 설명하면 안 되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심판용이라는 것부터 시작해야 돼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심판용이에요. 성령의 비췸이라고 하니까 사람들은 뭘로 생각하느냐 하면, 성령의 비췸을 받았으니까 나를 구원시켜줬다는 식으로, 나 좋은 쪽으로 성령을 해석하는데, 그러니까 성령의 비췸이 십자가를 재현했다는 생각으로 해보면 성령의 비췸은 ‘너 죽었어’라는 심판을 의미하는 거예요.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마태복음 12장의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32절)를 언급했어요. 성령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함이 없다는 말을 해요. 이 말은 곧 성령은 심판하고 계신다는 뜻이에요. 성령은 심판하고 계시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령을 뭘로 아느냐? 성령을 구원용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어디서 잘못되었는가? 자아를 못 버리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자아는 공격받을 용도인데, 나는 이렇게 빌빌거리는 존재인데, 성령의 비췸을 얻는다고 하니까 활짝 피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 그 대목이 그런 느낌이 그냥 듭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거기다가 뒤통수를 쳐버린다는 말이지요. 어떻게 뒤통수를 치느냐 하면 “네가 성령의 비췸을 받았지? 그러고 난 뒤에 네가 그걸 소홀히 하고 잊어버리거나 한다면 두 번 다시 회개는 할 수 없어.”라고 한 거예요. 그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이 뭐라 합니까? ‘성령 받았으니 이제 정신 바짝 차리고 살겠다’는 거예요. 정신 바짝 차리는 그것이 자기 구원에 왜 끼어듭니까? 정신은요, 환경 따라 달라지게 되어있는 것이지 자기가 정신 차린다고 해서 정신이 차려집니까? 안되지요.

그러면 그런 차원은 어디서 이야기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서 “너는 회개해도 소용없어. 너는 끝났어!”라는 차원은 뭐냐 하면, 모든 것이 다 마무리된 차원에서 다른 노선, 구원받은 사람끼리 있는 노선에서 바라볼 때 그렇게 보이는 거예요.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은 뭐냐? 십자가의 효력이 어느 정도인지, 그 모든 것에 월등하다는 것을 느끼고 아는 거예요.

그래서 그 설교의 처음이 뭐냐? ‘왜 십자가의 도가 그리스도 초보라고 하면서 장성한 자가 마지막에 십자가로 마감하느냐? 십자가가 초보 아니었나? 십자가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다 아는 이야기인데 그 초보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왜 하느냐?’ 그 이야기를 먼저 끄집어냈지요. 그것 때문에.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에 나 십자가 믿고 구원받았다는 소리가 나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만약에 성령의 비췸을 받고 다시 타락한다면 너는 끝났어.” 끝났다는 말은 뭐냐? 내가 처음에 초보를 알고 나 구원받았다는 이것이 구원이 아니었다. 이유가 뭐냐? 뭘 좀 더 알아야 장성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나를 상실하지 않았다는 이것 때문에 더 추가해서 성경을 알더라도 이것은 아예 구원이 안 되는구나.

- 아, 그 말이 정말 어려운 말 같습니다. 나를 잃어버린다든지, 나를 상실한다든지 하는 그 말요….

그런데 사도바울에게 그 말 한다면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겠어요? 어려운 것이 아니고 불가능하다고 하겠지요. 어렵다, 하는 것은 노력하면 손에 잡힐 것 같다는 노력하면 된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사도바울이 예수님 만난 것은 이미 끝난 거예요.

- 어젯밤에도 상실이라는 말이 새삼스럽게 확 들어왔는데요, 살다 보면 뭔가 ‘내가 다쳤다, 상처받았다’라는 것, ‘또 나를 건드려?’라거나 ‘나를 몰라줘?’ 내가 뭔가 잃어버린 것에 대한 그 마음…

잃어버린 것을 유지하지 않으면 주께 영광이 안 되잖아요. 주께 영광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잃어버린 그것이 자꾸 다시 나오도록 주께서 조치를 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왜 이런 짓을 하지?’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은 주께서 그런 생각이 들게 하시는 거예요. 상실되었음을 확인시키는 방법은 다시 일깨우는 겁니다.

제가 그래서 이야기했잖아요. 성령 받은 사도들의 삶은 성화 되기 전의 그 삶을 되풀이하는 거라고요. 이번 수련회에서도 했잖아요. 언약궤 옆에 뭐가 있는가?(시 90:8)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라는 것이 따라붙어서 있어야 된다고요. 그 대목 보고 깜짝 놀랐어요. ‘아, 신명기에 이런 내용이 있구나.’ 언약궤가 언약궤 되기 위해서 목이 곧은 그것이 거기에 붙어 있다는 말은, 붙어 있는 그자가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이번 수련회에서 사람들이 제일 기억하는 것이 뭐냐? 원망하는 것이 성도의 삶이라는 그것을 제일 기억해요. 소감문 중에도 그런 내용이 나왔지요. 물론 강의 때 이런 이야기가 나왔구나, 하는 것이 잘 정리되어 있고요. 소감문은 ‘나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하면서 정리하는 것도 있고요. ‘내용을 굳이 반복하지는 않습니다. 느낀 점 중심으로 쓰겠습니다’ 해서 새로 쓰는 방식으로 할 수도 있어요. 제목은 제가 뽑았지요. ‘원망하는 삶’ 혹은 ‘언약 위에 얹힌 시체’ 그걸 소감문에서 뽑았어요.

댓글은 읽는 이로 하여금 이런 속마음을 들키도록 쓴 거지요. “그래서 네가 발전되었디? 그래서 네 생활이 달라졌어? 그거 알아서 뭐 하는데? 네 속마음은 따로 있지 않아? 네 속마음이 뭔지 모르겠지? 내가 이야기해 주마. ‘솔직히 말해 예수님의 십자가 그 처참한 이야기는 싫고 솜사탕같이 조용한 하나님이 좋아요.’ 이게 네 속마음이잖아?” 인간의 본색은 그거지요. 두 종류의 하나님을 놔두고 하늘에 계신 다정한 솜사탕 같은 하나님이 기본이고.

“고장 난 기계를 전문가(성령님)에게 맡길 때, 비로소 구원은 그냥 주시는 것이지, 획득하거나 쟁취하거나 달성하는 목표가 아님을 압니다.”(녹취자 주, 소감문 댓글 중에서)

이번 수련회는 쉽다는 사람이 많았어요. 그런데 나중에 책으로 나온 것을 다시 보면 ‘아, 왜 목사님이 그때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이 부분을 이렇게 수정했는지’ 하는 것이 다 나올 거예요. 신명기에서 어렵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어요. 율법을 왜 다시 이야기하느냐? 왜 해야 되는데? 수요일에 이야기한 것도 마찬가지에요. 앉은뱅이가 걸었다. ‘야~, 걸었대.’ 그게 아니고 ‘왜 걸어야 되는데? 그냥 앉은뱅이로 살면 되지 왜 걸어야 되는데?’ 마찬가지로 ‘모세는 그걸 왜 이야기해야 되는데?’

그게 유령성 때문에 그래요. 한쪽은 다 죽었잖아요. ‘이 사람들은 왜 안 죽는데? 똑같은 인간인데 왜 안 죽는데?’ 그것부터 신명기를 시작하는 거예요.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은 40년 동안 다 죽었잖아요. 그러면 살아있는 이 사람들은 애굽사람 아닌가요? 맨 애굽의 성질이 그대로 다 있는데 죽이려면 다 같이 죽여야지. 그 내용이 수련회 녹취에 보충되어서 다 들어가 있어요. 제일 힘든 기간이에요. 녹취를 책으로 내려고 할 때 1년 중에서 두 번은 너~무너무 힘들어요.

- 전에는 녹취록 원본 내용이 어느 만큼 살아있었는데 언젠가부터 다 갈아엎으시는 것 같습니다.(떨어진 말씀이 선포되라고 우리들은 그냥 ‘마루타같이 앉아있어야 하는 거구나, 기쁘게’라는 생각이…)

다 갈아엎습니다. 그리고 책으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수련회는 9시간으로 끝나지만 책은 10년, 20년 계속 가기 때문에요. 지난번에 나온 책 『복음과 다른 복음』에 실린 내용인데 라캉의 ‘도넛’ 그림이 있지요. 그 내용은 인간세계에서는 제일 어려운 내용이에요. 인간세계, 이 ‘말의 세계’에서는 제일 어려운 내용이에요. 그게 라캉의 이론이에요. 인간이 끄집어낸 이론 중에서 최고의 이론이 그 이론이에요.

‘인간이 신을 믿는다면 그 신 속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신을 믿는다’는 것이 그 이야기거든요. 나와 타자 사이에 둘 다 아무것도 안 들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얽힌다는 거예요.

- 이번 수련회에서는 ‘인간이 신을 버리기 위해서 신을 믿는다’는 표현을 쓰셨습니다. 그게 같은 맥락인가요?

그렇죠. 같은 맥락이에요. 신이 없기 때문에 신을 만들어 내는 거예요. 그게 신명기에서 ‘우상숭배’에요.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신 5:8)라는 이유가 인간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계신다는 말이지요.

- 첫 계명과 두 번째 계명을 붙여서 설명하신 것 같은데요?

맞아요. 없던 신을 만들어 내는 거예요. 모세가 산 위로 없어졌을 때 비로소 본색이 드러난 거예요.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인간들이 여호와를 믿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셨다가 가시고 난 뒤에는 그 여호와가 우상이 되어버린 거예요. 참, 지난 낮 설교에서 그 성경 구절 못 찾던 그때가 예배 몇 분 전이었어요? 아, 미치겠는 거예요.

(5분 전이었나요? 내가 시간 다 되었다고 이제는 그만 그냥 올라가시라고)

성경의 구절을 못 찾는 거예요. 성경 구절 빼고 이야기야 할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봉사하는 입장에서, 듣는 사람들이 그 구절이 어디 있느냐 할 때 답변을 해줘야 하지요.

- 그 구절을 굳이 누가 묻기는 할까요?

묻는 사람이 있어요. 그 대목이 아주 생소하거든요. ‘설마 주의 종이 그렇게까지 했을까?’

- 그런데 아까 말씀하신 대로, 성경 구절 하나가 생각이 안 났을 때 설교를 일단 접고 그 구절 찾는 여기에 승부를 거신다는 식으로 하셨잖아요. 지금 설교를 해야 하는데 왜 그걸 찾는 일에 승부를 거신다고…, 그냥 ‘일단 올라가서 설교는 해야지’ 그런 생각은 하지 않으셨는지…?

그게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찾는 순간 무슨 느낌이 드느냐 하면, 주께서 이 설교를 하게 하셨다는 생각이 들면서 앞에 준비한 것들까지 결국 다 엮이면서 진멸 이야기를 했고 마지막 결론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설교가 56분에서 58분쯤 하거든요. 그런데 그걸 쪼개면 1분, 1분, 1분…, 해서 58분이 되잖아요.

그러면 1분에서 5분까지의 설교, 그 설교의 내용은 딱 1분에서 5분까지만 해야 되지요. 이걸 늘여서 50분까지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것은 진짜 반칙이고 그런 식으로 하려거든 설교 때려치워야 돼요. 1-5분까지 할 내용을 대충 50분으로 늘려서 한다? 이런 것은 진짜 용납할 수가 없는 거예요. 5분 동안 설교했습니다. 그러면 그다음부터의 시간은 그 자체로 또다시 설교가 되어야 돼요. 그래서 50분의 설교를 한다면 적어도 그 10배 이상을 준비하지 않으면 50분 설교가 안되는 거예요. 10배 정도가 되어야 잘라낼 것을 잘라내도 되지, 50분짜리 준비해서 50분 설교하게 되면 그것은 안 되지요.

- 그런데 저것이 숨 쉬는 이유라 하시는데, 할 말이 없을 때라도 그런데 저게 된다는 거잖아요.

‘될 거야’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안 된다’라고 생각하고 그냥 하는 거지요. 아까 빈자리 이야기했잖아요. 나는 빈자리에 있고 주님이 그 빈자리는 채우시고 그 옆에 그저 붙어 있는 거지요. 나는 그냥 전하는 일만 하는 거지요.

- 도무지 이런 것이 있을 수가 없다는 소리들도 듣습니다. 암만 생각해도 있을 수가 없다고. 하나님, 십자가는 모르겠는데 저렇게 희한한 내용의 말씀이 나오는 자가 있어서 대체 이것이 무슨 일인지 가끔은 동의가 된다는 소리까지 합니다만.

신학자들을 불신자라고 보는 이유가 간단해요. 신학자들은 사람을 의식해요. 그게 신학자들이 불신자인 이유에요. 그 논리, 단어 선정이나 이런 것을 보게 되면 불신자예요.

- 목사님을 안 만났으면 저는 설교를 아주 잘했을 겁니다.

아까 말한 세례요한이요,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이미 알았어요. 요한복음 1장에서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예수님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 했잖아요. 그런데 자기가 통합이 안 되는 거예요. 왜? 구약 인물이기 때문에 통합이 안 됩니다. 그래서 엘리야도 초보고 모세도 초보에요. 십자가가 빠져버리니까 초보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 빼놓고는 다 초보예요. 예수님의 장성함이 들어올 때만 장성함이 돼요.

그런데 예수님의 장성함이 뭐냐 하면, ‘다 이루었다’거든요. ‘다 이루었다’를 알리기 위해서 네가 얼마나 미흡하고 어설프고 다 채울 수 없는 존재인 것을 날마다 기쁨으로 자각하면 되는 거예요.

- 언젠가 대전강의에서, 그 뒤로는 그 대목을 따로 언급을 하시지 않았는데요, 로마서 7장을 하시면서 사도바울의 선악 체계의 그 마음이 아예 깨져버렸다고, 그걸 그림으로도 그리신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깨진 마음의 선과 악이 합치가 되지 않는 상태라고.

그게 이래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그러면 누가 깨졌어요? 주님이 상처를 입었지요. 이걸 따먹지 말아야 하나님이 만족하는데 따먹었잖아요. 깨졌잖아요. 그걸 깨기 위해서 그 현장에 누가 있었느냐 하면, 악마가 있었던 거예요. 그 결과로 악마가 인간을 자기편으로 만들어서 지배를 했지요. 그러면 이번에는 누가 누구를 따먹을 참입니까? 인간이 하나님마저 따먹을 참이잖아요. 이제는 누가 누구를 따먹어요? 하나님 쪽에서 이쪽 선악과를 따먹어버려야지요. 인간이 하는 짓을 하나님께서 그대로 해내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 자신이 자기하고 헤어져야 되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그대로, 깨진 그 흔적을 자랑하지요. 주께서 와서 나를 작살 낸 흔적을. 이미 인간은 마귀와 결탁이 되었는데 그 결탁이 된 사실을 몰라요. 그런데 사도는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이 선과 악이 깨어졌다는 것, 악이 선을 향하여 공격하고 손가락질한다는 사실을 알지요.

- 성령 받은 사도바울의 내부와 성령 없는 사람들과 어떤 차이가 나는 것입니까?

그게 로마서 7장 1절에 나옵니다. 그걸 혼인으로 이야기하지요. 남편이 죽었을 때는 자유가 된다고 하잖아요. 남편이 죽었을 때는 여자가 자유가 된다. 그런데 그 여자가 과연 자유일까요? 남편이 죽었다는 사실을 품은 자유겠지요. 남편이 있었는데 남편이 죽었다. 그러면 뭘 아느냐 하면, 전에 남편이 안 죽었을 때는 자기는 자유가 전혀 없었다, 를 알지요.

그러면 성령이 오신 이유가 뭐냐? 성령이 오신 이유는 ‘옛날에는 전혀 자유가 없었다.’ ‘자유가 없었다.’를 설명하려면, 곧 내가 누구한테 매여 있다는 그것은 성령 받은 사람만이 아는 거예요. “왜 자유가 없는가? 네가 나오면 될 것이 아닌가?” “아니, 못 나가.” 왜냐? 율법 자체의 기능은 인간 자신이 들락날락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된다는 거예요. 율법은 인간이 들락날락 못 한다는 정도가 아니고, 악이 자기 맘대로 악을 저지르거나 안 저지르거나 할 수 없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율법의 선함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악마는 계속 악마다워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악이 악을 전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고, 이것은 율법이 보기에는 율법에 놀아나고 있는 거예요. 율법의 선함을 증거하기 위해서 악은 끝까지 악 다워야 되고 그 악의 악다움에 걸려든 자, 그 악의 표현체가 누구냐 하면, 인간이었던 겁니다. 그걸 로마서 7장에서 결혼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율법하고 혼인을 했는데 못 벗어났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는가? 남편 죽고 난 뒤에는 자유야. 그런 상태가 뭐냐? 성령 받은 자만이 그 상태가 된다는 말이지요, 성령 받은 자만이. 성령 받은 자만이 자기 과거를 알아요. 과거를 서슴없이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요.

성령은 항상 활동하잖아요. 인간이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활동하잖아요. 그렇다면 성령이 성령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나는 맨날 과거에 알던 짓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어요. 성령 받기 전의 상태를 성령 받고 난 뒤에는 반복을 해줘야 된다는 그 말이 그 말이에요. 어떻게 구원받느냐가 아니라 주님이 무슨 일을 하느냐, 가 주님을 증거하는 것이지요.

- 지금 시간이 많이 되었는데요, 피곤하지 않아요?

수련회 왔는데 지금 무슨 시간을 따지십니까? 이제 막 수련회 시작했는데요. 이야기하다가 피곤하면 나도 자겠는데 지금은 안 피곤해요.

- 한번은, 수요 녹취하는 정○○씨가 설교 끝난 지 거의 한 시간 만에 올린 적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설마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녹취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진짜 그렇게 하고 있는 건가요?” 물었거든요. 그랬더니 답이… ‘아, 넵! 맞습니다. 저는 그런데 녹취 전에 닭 한 마리를 꼭 해치우고 한답니다. 그러면 녹취할 힘이 생겨서요.^^’ 그래서 제가 어찌나 웃었는지.

녹취를 열심히들 하시는데요, 제가 그 내용에 스토리를 줘버리면 스토리를 따라서 하기 때문에 녹취가 가능해지는 거지요. 그래서 항상 설교 처음에 어떤 스토리를 줘야 해요. 수사극의 특징이 뭡니까? 문제 해결하는 거기에 빠지게 만들듯이 없던 문제가 여기서 만들어지고 어떻게 풀어져 가는가의 그 스토리를 줘버리면 설교를 듣는 사람들도 그렇고 특히 녹취하는 사람들도 푹 젖어서 하게 돼요.

스토리가 없으면 설교 2분, 3분 지나면 더 못 들어요. 여기서 기본은 그거예요. 설교를 못 한다, 잘한다 보다도 누구나 다 사람 관계가 있거든요. 그러면 하나님이 주신 것만 하면 되거든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5분짜리 줬는데 그걸로 50분을 늘리는 그것이 문제인 거예요. 5분짜리를 줬으면 5분만 하고 내려와야 되는 거예요. 주께서 그것밖에 주지 않았다면 그것만 하고 내려오면 되는데 내려올 용기가 없어서 그래요.

- 그것은 아예 못 올라가겠습니다.

5분짜리를 그렇게 늘리면 그것은 누구를 가르치려고 하는 거예요. 그것은 학원강사나 하는 짓이지요. 그렇게 되면 좋은 말만 할 수밖에 없지요. 좋은 말만 한다는 것은 뭐냐? ‘나는 당신에게 세상의 유익을 드리겠습니다.’ 하는 거예요. 지가 왜 유익을 줘요, 나에게? 본인이 메시아도 아닌게 왜 나에게 유익을 주느냐, 그 말이지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안 되지요. 사람에게 유익을 주지 않기 위해서 설교하면 돼요. 그런데 자꾸 사람에게 유익을 주려고 설교하기 때문에 그것은 더욱더 설교 아닌 게 되어버린다고요.

“저는 더는 설교 안 합니다” 하는 `그것이 최고의 설교입니다. 왜냐하면 저도 설교를 안 해요. 설교를 안 해야 돼요. 설교라 하는 것은 남을 영적으로 유익하게 해야 하는데 남을 유익하게 할 수 있는 잽이 못되고, 그럴 권한도 없고 자격도 없어요. 매일 그만두는 거예요. 매일 그만두면서 나오는 이야기가 설교여야 돼요.

저는 목사님들에게 요구하고 싶은 것은, 도서관에 가잖아요. 도서관에 가서 장기 둘 것도 아니고 책을 보잖아요. 책을 봤으면 책을 보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잖아요. 그러면 책을 보고 느낀 점을 적어서 십자가 마을이나 본인 사이트나 해서 올려버리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것조차도 사람들에게 큰 봉사가 돼요. 제가 지금은 그걸 할 시간이 안 돼요. 전에는 제가 그걸 했잖아요. 그걸 좀 해주셨으면 해요.

메모지 하나 줘보세요. 지금 시간이 문제가 아니다,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죽어버리면 이런 만남도 없어요. 늘 마지막이에요. 딱 이거예요. 수련회 둘째 시간에 한 걸 거예요. 존재와 의미, 밑에 존재의 박스, 그리고 위에는 의미의 박스입니다. 이 존재에서 의미로 왔다가 존재가 의미를 다시 회수를 한다고요. 존재가 되려면 반드시 의미를 획득해야 존재가 돼요. 그래서 이게 반복이잖아요. 인간의 의미는 바깥에 있는 그 의미를 존재로 가져올 때, 즉 의미를 소유해야 하는데 자살은 뭐냐 하면, 그 의미가 순환이 안 되어서 자살을 해요.

외롭다든지, 고독사라든지, 이런 것이 뭐냐 하면, 기존의 존재가 의미를 가지면 ‘나’가 되거든요. 그 ‘나’가 그 의미를 모르게 되면 또는 더 보충이 안 되게 되면 있던 의미가 자꾸 증발되거든요. 날아가 버려요. 휘발성이 있어서 날아가니까 그때그때 의미를 채워야 되는데, 의미가 날아가 버리면 존재가 깨져서 존재 자체가 희미해져 버려요. 존재가 기체가 되어서. 그러면 이 육신이 살아있어도 존재가 날아가니 이 육신 살아있다는 것이 짐이 되니까 너무 힘들어서 육신마저 날려 보낼 때 그게 자살이에요. 그래서 정치인들이 정치(자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 방금 말씀하신, 존재가 희미해진다는 것은 목사님이 말하는 성령 안에서의 자기 상실은 아니지 않습니까?

육신에서 나온 거지요. 육신이 의미를 획득하게 되면 ‘내가 여기 있다’가 돼요. 존재의 일의성입니다. 그러면 상실이라는 것은 뭐냐? 이 의미가 질적 일의성에서 주님의 의미가 와버리면 이 존재의 일의성이 주님의 것으로 대체가 되니까 자기는 즐거이 상실이 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주님의 의미가 내가 채울 의미를 대신해 버렸으니까 그게 ‘다 이루었다’는 그 의미잖아요.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죽어야지’가 아니라 이미 죽었는데 뭘 또 죽어요? ‘이미 죽었다’를 감사하고 기뻐하는 거지요. 그러면 내게 일어나는 것은 뭐냐 하면, 이 의미의 주인공이 되신 주님이 살아계셔서 나의 육신에다 의미를 입히는 거지요. 그러면 내 육신은 날마다 후패하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가 되는 겁니다.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6)

존재와 의미의 이 구조, 이 그림이 굉장히 간단한 그림인데 인간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는지 여기에 다 담을 수가 있어요.

- 서수의 회전하는 그림 설명하실 때 그 화살표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맞는 거지요?

예, 안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고대의 선조들이 조개의 배열을 그런 식으로 했고 중심을 향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 언뜻 들어가는 생각은, 발전의 개념이라면 화살표 방향이 안에서 바깥으로 향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고대 동굴의 벽화가 있잖아요. 그 벽화에 보면 그게 서열화되어 있어요. 희한하게도. 사냥하는 그것이 서열화되어 있다고요. 그래서 어떤 스토리를 만들어 내요. 동작 하나하나 그리고 그 전체를 통해서. 그게 서수에요. 인간은 운동하기 때문에 반드시 서수화 돼요. 운동하는 그것, 운동하는 것을 다음 운동으로 전개함으로써 그것이 하나의 숫자화가 되면 그것이 서수가 되는 거지요.

- 아까 말씀하신 조개 같은 것들은 예술품인가요?

일종의 예술품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예술을 모르던 시대의 예술품.

- 따로 의미는 두지 않으면서 그들이 그렇게 만든 것인가요?

그렇게 만든 거예요. 왜냐하면 그들은 자연의 일부기 때문에. 자연이 이 순서를 따른다고 여긴 겁니다. 이런 간단한 내용이 도서관에 가 보시면 이만한 책 속에 다 들어 있어요. 두꺼운 책 속에서 그걸 뽑는 거예요. 나머지는 쓸데없는 소리거든요. 책을 보시면 그걸 다 쓸 필요는 없고 자기가 새로 느낀 것을 뽑아서 쓰게 되면 다른 사람이 좋잖아요. 목사님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좋잖아요.

인간관계를 이 존재와 의미, 이 그림으로 설명할 수 있겠지요. 이 그림에 의하면 이미 알고 있는 의미의 뭉치가 존재잖아요. 의미의 뭉치가 존재라는 말이지요. 이미 알고 있는데 거기에 구닥다리 의미가 자꾸 붙는 거예요. 그러면 본능적으로 차버리고 싶고, 배울 것도 없는데 난 다른 사람하고 만날래, 이런 식으로 되는 거예요.

그래서 누가 누구에게 뭘 해줬다든지 그런 것이 아니라, 연관해서 이야기한 것이, 가장 큰 빚이 뭐냐? 구제, 구제인데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그게 최고의 무거운 빚이지요. 빚을 청산함으로써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갚을 수 없는 빚이 있다는 그것을 기뻐하는 거지요. 그게 바로 십자가의 피입니다. 어떻게 그걸 갚겠어요?

- 그러니까요. 구원해 줬더니 빚 갚는다고 나서는 게 진짜 웃긴 것 같아요.

그게 얼마나 모독적입니까? 복음은 복음에 갖가지 반응들을 나타내면서 결국은 초점이 주님 홀로 다 하셨다는 것, 다른 말로 주님 죽으셨다는 것, 나만큼은 살고 싶어 환장하는 그 인간세계에서 홀로 죽으셨다는 그게 정답이에요. 그래서 그걸 한 자로 ‘피’라고 합니다. ‘피’ 그게 새 언약이에요.

- 그런데 목사님, 참 신기한 게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 보면 저도 물론 그럴 때가 많고요. ‘누가 내 사적인 이야기를 목사님께 알렸느냐?’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꼭 내 사생활을 들여다보듯이 설교하신다는 반응들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목사님이 아주 날 대놓고 까는구만’ 할 정도로요.(내 속에 있는 것들이 설교 예화로 나온다면 그건 참 좋은 일 아닌가?)

- 사실은 어떤 식으로든 저도 그런 이야기는 종종 듣게 되는데요. ‘목사님의 설교는 내 생활 속에 아예 들어와 본 듯이 설교를 하신다.’고 하거든요. 주중에 일터에서 지지고 볶으면서 고민하던 것들이 말씀 듣고는 다 해결이 된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이전 교회인 박사교회에 있을 때도 그런 소리는 많이 나왔었어요. 오전 예배 마치고 점심식사 후에 수다를 떨다가 오후 예배에 들어가면 그 수다 떤 내용을 목사님이 꼭 듣고서 하는 소리같이 설교내용에 나온다니까요. 물론 목사님 본인도 들은 바가 없고 아무도 전해준 바가 없는 데도요. 누가 보면 ‘음, 사모님이 일러 바쳤군.’ 하는 오해를 할 정도로요. 그래서 더더욱 내가 목사님께 무슨 말을 옮기지를 않게 됩니다.

이렇게 나오니 내가 설교를 못 하는 거예요. 그만하고 싶은 거예요. 왜냐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은 나한테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는 나에게 뭘 어쩌라고? 오후 설교 같은 경우에는 완전히 제로지요. 아무것도 없는 데서 나와요. 그 현장에서 누가 나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나를 가르쳐줘요. 그 가르침을 그대로, 나는 이런 가르침을 받는다는 식으로 설교를 할 수밖에 없어요……

 

댓글

 

우인숙

거의 로그인 안하고 들어와 죽치고 있는데 할수 없이 또 로그인 했네요 요사인 집중력이 떨어져 눈만 한번 깜박여도 까먹고 네플릭스 영화도 본거 또보고 그래서 이사와서는 도서관에 아들이 데려가 줘서 회원 가입만 해놓고 가지를 않네요~~팬션이름도 목사님 글보고 알았네요 심방설교에서 엄살이라는 단어가 나왔을때 속으로 이 인간 참 감당이 안된다는 생각을 잠깐 했고 20분정도가 내 집중력의 한계다는걸 나보다 먼저 케치한 주께 꽉 붙들려 죽고싶어 환장한 분을  내게 붙여준 분께 찬양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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