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 잔
2024년 8월 4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5:15-18
(25:1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진노의 잔을 받아 가지고 내가 너를 보내는 바 그 모든 나라로 마시게 하라
(25:16) 그들이 마시고 비틀거리며 미치리니 이는 내가 그들 중에 칼을 보냄을 인함이니라 하시기로
(25:17) 내가 여호와의 손에서 그 잔을 받아서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신 바 그 모든 나라로 마시게 하되
(25:18)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과 그 왕들과 그 방백들로 마시게 하였더니 그들이 멸망과 놀램과 치소와 저주를 당함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선지자는 말씀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선지자에게 주어진 그 말씀은 사정없이 선지자의 육신에 담기게 됩니다. 그러면 그 말씀은 선지자의 육신을 가만두지 않습니다. 선지자는 그 시대에 곤욕을 당하게 됩니다. 그것은 선지자의 말이 사람들이 납득되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미 이 세상에서 적응하려고 애쓴만큼 나름대로 노력해 오고 있는 중입니다. 왜 세상에서 살려고 할까요? 그것은 인간들 입장에서 이 세상 외에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좋든 싫든 인간이 이 세상에서 힘들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다보니 ‘힘들게 살아왔음’이 어느새 자기 의로움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고생한 만큼의 대가라도 누리고 죽고 싶은 겁니다. 이는 전적으로 세상을 부정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사정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들은 하나님께서 내려진 쓴 잔의 맛을 못봤구나” 하나님의 잔은 그 안에 저주가 가득 담긴 자를 말합니다. 이 저주의 내용마저 선지자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사랑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사랑이란 함께 하는 겁니다. 같은 것을 공유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사랑이란 자신이 치던 칫솔로 상대방에게 양치질 해주는 겁니다. 자신의 치부를 서슴없이 공유하는 관계가 사랑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선지자 관계는 이처럼 사랑의 관계입니다. 실은 이 사랑의 관계가 선지자 뿐만 아니라 전체 이스라엘 관계도 이러해야 합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이스라엘 전체는 진즉에 이 사랑의 관계에서 벗어났고 선지자만이 어쩔 수 없이 하나님에게 붙잡힌 바가 되어 강제로 사랑 안에 사로 잡힌 상태입니다. 이는 모든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훼방하고 방해하는 요소가 늘 가득 차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이 지금껏 살아온 모든 것은 악마로부터 제공된 겁니다.
악마의 덕을 본다는 말이 아니라 의미나 해석에 있어 악마 해석으로 하나님께 받았던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겁니다. 즉 ‘나 잘 되기 위해 이 모든 것이 나에게 주어졌다’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들에게 있어 자신이 타인에게 지고 망하고 자신이 무너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여기는 겁니다.
이런 의식은 그동안 인간이 주변 환경에 대해서 무척이나 친숙하고 정들어 있음을 뜻합니다. 좋은 관계로 맺었는 것을 굳이 깰 이유가 없다고 여깁니다. 그 이유는, 자신은 다치기 싫다는 겁니다. 온전하게 보존하고 싶은 겁니다. 힘든 상황에 자신을 방치하기 싫은 겁니다. 이미 악마가 제공해준 환경에 결정적으로 길들여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자신에 대해서 조금이라고 손해가 일어나는 내부적으로 분노가 일어납니다. 이는 단순히 뭘 갖고 싶다 정도가 아니라 앞으로 뭘 더 갖고 싶은데 방해하지 말라는 욕망도 포함됩니다. 빼앗기기 싫어서 화를 내는 것만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지기 싫다는 것까지욕망이 확대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잔’은 제자들끼리 경쟁하는 자리에서 나왔습니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마 20:20-
22)
제자들까리 높은 자리를 노리는 다툼의 자리에서 ‘잔을 마시는 것’ 일은 이 세상에서 참으로 무관해 보이는 주제처럼 느껴 질 겁니다. 그만큼 우리 인간들은 저주나 진노는 나랑 상관없이 피하는 것이 나에게 유리하다는 의식으로 무장되어 왔습니다. 남에게 지는 것보다 이기는 것이 낫다는 것이 진리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아무도 ‘죽음, 저주의 잔’을 받아들이는 것은 여태껏 쌓아온 모든 의미있는 바를 한꺼번에 무너뜨리는 행위라고 간주됩니다. 그만큼 제자들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이 달랐고 그만큼 제자들의 생각과 악마의 생각은 통했고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악마와 결별하게 위해서 예수님 자신이 마실 잔을 언급하십니다.
이 잔은 예수님께서 단독으로 아버지와의 대화에서 나온 주제입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9) 즉 아버지께서 내린 저주가 예수님 속으로 들어오고 그 들어온 저주는 성도에게 까지 흘러들어갑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0: 9-11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예수님의 쓴 잔은, 이미 이 세상이 저주의 장소로 결정되었음을 알리는 겁니다. 따라서 성도는 불신자가 살아가는 식과는 반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성도 본인이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고 가로 막는 최후의 적이 됨을 인정해야 합니다. 말씀을 듣지만 입에서 달콤한 것으로 그쳐서는 아니됩니다.
우리 내부까지 쓰게 들어가서 이 남은 인생 전체가 세상에서 뿜어내는 그 저주성을 감지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쉴새없이 친근할 수밖에 없는 세상적 아름다움에 접하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만 두어라. 내가 처리한다”(마 13:29) 쓴 잔이 가진 그 내용 달성의 권한은 인간에게 없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이 자진해서 쓴 잔을 원하지 않았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인간이 용감하게 ‘쓴 잔 주세요. 하나님“라고 요청할 자도 없습니다. 인간은 자체적으로 자신이 어디까지 대단할 수 있느냐를 알고 싶어합니다. 누가 쓰디쓴 생을 살고 싶어하겠습니까? 따라서 쓴 잔에서 오는 저주를 요청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일임해야 합니다. 쓴 잔이 스스로 활동하도록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쓴 잔이 들어 있음을 도리어 감격스러운 기적으로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14강-예레미야 25장 15~18절(쓴 잔)240728-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5장 15~18절입니다. 구약성경 1079페이지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진노의 잔을 받아가지고 내가 너를 보내는바 그 모든 나라로 마시게 하라, 그들이 마시고 비틀거리며 미치리니 이는 내가 그들 중에 칼을 보냄을 인함이니라 하시기로, 내가 여호와의 손에서 그 잔을 받아서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신바 그 모든 나라로 마시게 하되,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과 그 왕들과 그 방백들로 마시게 하였더니 그들이 멸망과 놀램과 치소와 저주를 당함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예레미야가 한 일,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이 일을 한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를 알려면 그때의 역사를 다 들춰야 하는데, 불가능하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이 예레미야의 말씀을 예수님 자기 시대에 그대로 복사해서 실행했습니다. 어떻게 실행했느냐. “너희들이 미쳤다”라고 예수님이 이야기했죠. 그러니까 저쪽에서 하는 말이 “예수님, 네가 미쳤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미쳤다는 말은 ‘공유할 수 없다, 공존할 수 없다,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주셨을 때, “네가 미쳤다. 너는 망한다” 그리고 오늘 본문대로 “너는 저주당한다”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는 수용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걸 선지자라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도 선지자 되고 싶지 않습니까?
선지자는 말씀이 오게 되면 그냥 담는 거예요. 어떤 가수가 부른 노래를 보면 사랑을 ‘잔’에 비유한 노래가 있어요. 노래 제목은 ‘찰랑찰랑’입니다. ‘찰랑~찰랑~찰랑대는 위스키 잔’이라는 이 말이 굉장히 중요한데요, ‘나는 당신 앞에 빈 잔이고 싶어라. 당신은 이 빈 잔을 사랑으로 채워라’라는 그런 뜻이죠. 이 노래를 그런 깊은 뜻을 담고 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채워라. 나는 빈 잔이다’라는 겁니다.
말씀의 수용체가 뭐냐 하면, 항상 내 의미를 게워 내고, 토해내고, 현실을 현실대로 그대로 진행하시는 주의 말씀만 찰랑찰랑 내 잔에 넘치게 한단 말이죠. 그런데 이 잔이 말씀으로 안에 채워지게 되면 그 내용이 뭐냐. 바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저주하고 진노하신다는 그 내용입니다. 성도는 위스키 빈 잔이고,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그 잔을 채우고, 그 잔에 찰랑찰랑 넘치는 내용은 이 세상은 이미 하나님의 저주 대상이라는 내용이고.
바로 이러한 일을 한 자를 선지자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선지자 입장에서는 선지자를 보면 또 우리교회 성도들, 여러분들을 보는 거 같아요. 갑자기 웬 칭찬? 끝까지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이게 칭찬인지, 욕인지 한 번 들어보세요. 제가 칭찬할 리가 있습니까. 요한계시록 10장 9절에서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 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거기 보니까 입에서는 꿀같이 달다고 나와 있어요. 이점이 우리 교회 성도를 닮았다는 겁니다. 말씀을 들을 때, 모두들 조는 사람도 없이 다 기뻐해요. 말씀이 달아요. 그런데 이게 왜 칭찬이 아닌가 하면, 이게 달면 뭐 합니까. 속에서 쓰디써야 하는데.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달콤함으로 끝내고 끝이에요. 끝. 속에서 쓰려야 하는데, 쓰리기가 싫은 거예요.
말씀으로 인해 내 인생이 다치는 것이 싫은 겁니다. 왜 그러냐. 이걸 먹어야 쓴데, 입에서만 머물고, 입에서는 맛이 괜찮단 말이죠. 그러니 ‘그걸로 족합니다’라고 이렇게 되어버리는 겁니다. 속으로 내려가서 속까지 쓰려야 해요. 위산과다? 아니면 위궤양? 그 병에는 괜찮은 약이 있어요. 이 약은 속 쓰린 것을 고치면 안 되는 약이에요. 왜 말씀이 우리 속으로 들어 가면 속이 쓰리냐.
그 내용이 바로 예수님이 마신 잔이 바로 그 잔이기 때문에 그래요. 칭찬하다, 욕하다, 다시 칭찬으로 돌아옵니다. 예수님의 마신 잔을 주님께서는 자기만 마시고 끝내는 것이 아니고, 제자들에게 권했고, 또 제자들에게 사실상 권한 것이 아니라 강요했습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내가 마시는 잔이 있는데 너희도 마실래?”(마20:22)라고 묻습니다. 그런데 그건 답변을 원하고 묻는 것이 아니고 “답변하지 마. 하지 마. 내가 반드시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시게 해줄 거야”라고 단언을 해버려요.
이 쓴잔, 쓰디쓴 잔이 마태복음 26장에서 예수님께서 인간들 제끼고 아버지와 대화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대화 장면의 포인트가 뭐냐. “이 잔을 꼭 굳이 마셔야 합니까?”라는 대화예요. 여러분들이 만약에 주일날 집사님들 기도하는데, 아직까지 그런 내용은 안 나왔어요.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이 마신 잔을 우리들이 마시게 하옵소서”라고 그런 기도하는 집사님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 잔을 마시게 하옵소서”라고. 미쳤어요? 입에만 달면 되지, 그 쓴잔을 내가 왜 마셔야 해요? 안 그래도 위궤양 때문에 속이 안 좋은데. 이건 욕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어요. 제자들도 예수님이 이 ‘잔’ 이야기할 때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냐면, “우리 중에 누가 제일 높습니까?”라는 것이 대화의 핵심이었어요.
쉽게 말해서 남에게 지기 싫다는 거예요. 남에게 지기 싫다는 것은, 내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타인을 통해서 확인해 보겠다는 거예요. 우리의 매일 일상이 뭐냐 하면 확인하는 거예요. 한국에 금메달 몇 개? 9개? 그걸로 그치지 않죠. 일본은 몇 개? 일본은 언제 추월했지? 이러고 있어요. 여자 양궁 금은? 땄다! 그러면 그걸 듣고 한국 사람은 뭐라고 하는 줄 압니까? 왜 3등은 못 했는데? 동메달은 왜 못 했는데?
아무리 금메달 따고, 은메달 따고 해도, 끝까지 우리는 남에게 지기 싫어해요. 지면 안 된다는 거예요. 얼마나 평소에 관심사가 그쪽에 있었으면 예수님에게 그렇게 물었겠습니까. “예수님 우리 가운데 누가 높습니까?” 하늘나라 가는 것은 내 입에 달기 때문에 내가 도착한 것을 믿습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있고 제자이기 때문에 구원받을 줄 믿습니다. 믿는데, 그 믿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하늘나라 갔다고 칩시다.
치고 난 뒤에, 우리 중에 누가 높은 자리 앉습니까? 이런 대화를 한 거예요. 뭐를 놓쳤어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도대체 우리는 어떤 식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가리는가. 우리 중에 무엇이 그토록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토록 가리게 만드는가. 그쪽으로 머리를 한번 써보세요. 도대체 내 행동과 내 태도와 내 마음씨 가운데서 도대체 십자가를 가리는 그런 요소가 내 속에서 계속 나온다면, 남들보고 ‘이 원수야!’라고 하지 말고, 원수는 우리 자신이 딱 맞아요. 우리 자신이.
마지막 최후에 십자가 원수는 우리 자신입니다. 미쳤다고 쓴잔을 마셔요? 짧은 인생인데, 편하게 살아야지, 다 못 살아본 행복, 남은 행복, 그 행복을 마저 누려야지요. 행복도 제대로 못 누리고 죽으면 억울하다는 생각 안 듭니까? 남에게 졌다는 생각 안 들어요? 바로 이런 것들이, 이런 리스트들이 십자가를 가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뭐라고 하시느냐.
“내가 마시는 잔, 너희들 안 마시고 싶을 거야. 그래서 기어이 이 잔을 내가 너희에게 마시게 할 거야” 기어이 이 잔을 마시게 합니다. 마태복음 26장 39절에서 예수님이 기도 하시면서,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했어요.
이 기도 내용이 중요한 것은 이 기도 내용을 예수님 본인이 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에요. 하나님의 언약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말은 이 언약 내용에 우리의 뜻이 가미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미 확정된 언약 내용이에요. 이제 남은 것은 우리가 이 하나님의 언약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우리 속에 마귀가 작동해서, 이 잔을 밀쳐내요.
하나님의 언약인 약속을 극구 밀어냅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지금껏 우리가 살아오면서 제공받은 모든 것이 마귀로부터 제공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귀가 할 때는요, ‘돌이 떡 되게 해라. 네가 사람에게 인정받아야 해. 네가 출세깨나 했다면 세상 권력의 한 모퉁이는 네가 가져야 세상 사는 보람이 있을 거 아니냐. 언제까지 비리비리하게 그렇게 살래? 내세울 것도 없이 그렇게 살래?’
다시 말해서 세상이 요구하는 것을 언제든지 흔쾌히 ‘나 이 정도야~’라고 내세울 것을 네가 하루하루 노력하면서 모아놓는 그것이 바로 네가 성공한 인생이라는 식으로 마귀가 우리를 계속 설득해 온 겁니다. 마귀 빼면 누가 설득한 거겠어요? 내가 나를 설득한 거죠. 주위 사람들이 설득한 거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 겁니다.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 선지자 될 의향이 없습니까? 선지자 될 의향이 없어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해야 해요. 도대체 ‘선지자 되었다, 안 되었다’라는 그 레벨, 그 기준을 어디에 두고 ‘당신은 선지자 같네요. 당신은 선지자 같지 않습니다’라는 것을 말하느냐는 물음을 저에게 하셔야 해요. 그럴 줄 알고 제가 선지자 기준을 제공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과 공유했어요. 선지자는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면 함께 사는 생활이 뭐냐. 이런 생활을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어디 수학여행을 가서 친한 친구들끼리 이런 놀이 하죠. ‘나는 이것까지 해봤다’라는 거 제시하잖아요. 여러분도 제가 제시할 테니 한 번 들어보세요. 양치질할 때 보통 자기 칫솔 가지고 양치질하잖아요.
자기 칫솔 가지고 입 벌리라고 해서 남의 입 양치질하고, 그 칫솔 가지고 내 입속에 들어와서 내 이빨을 함부로 칫솔질하는 그런 사이, 그걸 사랑의 관계라고 합니다. 각자 부부끼리 한번 점검해 보세요. 사랑이라 하는 것은 상대의 수치를 내가 들여다보고 처리하는 관계. 상대가 내 수치를 똑바로 보고 처리하는 관계, 나도 상대의 수치를 똑바로 보고 처리하는 관계, 그것을 공존하고 공유하고 같이 사는 사랑의 관계를 말합니다.
물론 사랑의 관계는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는 경우도 있어요. 치과에 갔을 때. 의사가 강제로 꼼작 못하게 눕혀 놓으니까 일어서지를 못하죠. 눕혀 놓고 ‘좀 아픕니다’라고 하면서 그냥 막 들여다보면서 양치질 해주죠. 그래서 치과에 안 가려고 하죠. ‘직업이 뭡니까, 한 달 생활비 얼마입니까, 키가 몇 센티입니까, 자식이 몇 명입니까’라는 이런 거 치과는 일체 그런 거 묻지 않습니다.
그냥 썩은 이빨만 쳐다보면서 치료해요. 썩은 이빨만 보면서.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의사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나올 때, 입 벌리고 썩은 이빨 내밀고, 냄새나는 이빨 내미는 그런 처지에 있어요. 이게 무슨 관계? 사랑의 관계예요. 이게 사랑의 관계입니다. 그게 선지자예요. 그 레벨입니다. 따라서 ‘말씀이 좋다’라는 이게 아니라,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서 내 인생을 온통 바퀴벌레 기어다닌 것처럼, 내 인생을 후비고 쑤시고 다녀야 해요.
하나님의 진노를 이야기하기 전에 나부터 진노가 속에서 작동해야, 우리는 세상이 얼마나 살만한 세상이 아닌 것을 알아요. 예를 들겠습니다. 이제 여러분 휴가철 되어서 휴가 갑니다. 휴가 갔을 때 여행객들이 강원도나 물 좋다는 포천, 포천을 어디서 봤는데 경치가 그렇게 좋아요. 그리고 강원도 영월이나 충청도 골짜기, 또는 지리산 골짜기로 가잖아요.
가게 되면 특징이 뭐냐. 일단은 촌이 한적해요. 소음이 없고 조용해요. 조용해서 마음의 치료가 된다고 말들을 합니다. 하면서 또 기대하는 것은 촌사람의 인심이에요. 강냉이 삶아서 그냥 나눠 먹고, 감자도 삶아서 먹고 합니다. 역시 촌 인심 안 죽었다고 하면서 헤어집니다. 그런데 그 여행하면서 놓친 게 있어요. 뭘 놓쳤냐면, 그 거주민들이요.
여행객들은 이틀이고 사흘이고 잠시 쉬면서 ‘참 좋다. 나도 나중에 은퇴하고 여기에 전원주택 지어서 쉬면 좋겠다’라고 진짜 철없는 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어요. 병원도 없는데 거기를 왜 갑니까. 나이 칠십 넘으면 아픈 게 할 일인데, 병원도 없는데 거기 가서 뭐 할 거예요? 거기 가서 ‘참 좋다. 여기 조용하니 좋겠습니다’라고 하는데, 거기 거주민들은 마음속으로 애걸복걸합니다.
‘나를 여기서 좀 빼내 주면 안 됩니까? 어느 도시에 허름한 자리도 괜찮으니 일자리 좀 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아이가 나이가 서른이 넘었는데 촌구석에 있으니까, 남자도 없고 처녀로 늙어 죽을까 봐 걱정됩니다. 서울에 어디 좋은 총각 있거든, 우리 아이, 중신 좀 들어 주세요’ 그저 어떻게든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서 빠져나갈 생각 해요. 그 자리에서.
도시 사람들은 도시의 매연과 반복되는 삶에 찌들어서 휴가로 왔는데, 휴가지에 있는 사람들은 나를 빼내달라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무한성은 유한성의 모습으로 오신 분이 다녀가면서 비로소 그 무한성이 밝혀지는 거예요. 무한한 예수님께서 유한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면서 주님께서 내뱉는 모든 찰랑찰랑한 저주의 말씀은 “내 백성 같으면 이곳에 안 산다. 내 백성 같으면 이곳에 살도록 내가 방치하지 않을 거야. 내가 처소가 마련되면 당장 데려갈 거야”라는 그런 취지로 오신 거예요. 그런 취지로.
그 말씀이 겉에만 하지 말고 우리 속까지 들어와야 해요. 그러면 우리 일상에 마음의 느낌은 이곳이 살 곳이 못 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받아들여야 합니다. 매일 매일 내가 나를 방해하고, 세상이 주의 일을 방해하는데, 도대체 주의 일이 뭐냐. 이미 저주로 확정된 이 세상에서 자기 백성 빼낼 궁리만 하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 인간은 나를 또 구원해달라고 설치죠.
설칠 때, 이 점이 중요해요. 마태복음 13장, 아무리 설명해도 사람들이 이해를 잘 못하는 거 같아요. 마태복음 13장 29절에 말씀인데요,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내가 이 땅에 사는 게 너무 힘들고 괴로우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를 좀 빼내 주시고, 어떻게 좀 편안하게 복음만 찾으면서 살도록 해달라고 할 때, 주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가만 두어라”
너는 이 세상에 저주와 더불어서 함께 저주받아야 할 육신을 가지고 그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빼내달라고 해서 빼내 주는 게 아니에요. “그냥 가만있거라. 내가 할게”라는 그 차이. 그게 성령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점이에요. 내가 싸댄다고 빠져나가는 게 아니에요. “가만 두어라”라는 그 말씀을 믿어야 해요. 여러분들이 육신을 아무리 보세요. 육신에서 복음 나오는가.
복음 안 나옵니다. 내가 복음을 위해서 설친다고 복음 아니에요. 설치는 나의 욕심만 나올 뿐이지, 복음이 안 나와요. 복음은 “가만 두어라. 힘들지만 가만 있어라. 내가 빼내 줄게” 그러면 그냥 가만 있으면 안 되겠죠. 가만 있을 때 왜 내가 이 세상에서 빠져나가야 할 이유가 뭔지를 우리가 새록새록 그 의미를 알아야 해요. 그 의미를 어떻게 아는가.
세상이 가르쳐줍니다. 어떻게 가르쳐주는가. 세상 가운데서 친근하고, 세상이 더 살만한 세상 같은 느낌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때, 뭐 교회 나올 때는 ‘빼내 주세요’라고 하다가 막상 월요일부터 세상에서 생활하다 보면 ‘여기가 좋사오니’가 되죠. 하나 예를 들겠습니다. 일제시대에 예인데요. 여자 이름은 최순애이고 남자 이름은 이원수예요.
최순애(1914~1998)라는 사람은 열두 살에 어떤 동시 공모전에 공모해서 당첨되었어요. 그 당첨된 곡 제목이 ‘오빠 생각’입니다. ‘뜸북~뜸북~뜸북 새~’ 이 노래입니다. 그리고 몇 해 후에 열네 살 먹은 이원수(1911~1981)라는 사람이 역시 동시 공모해서 당첨되었어요. 당첨된 동시 이름이 뭐냐. ‘고향의 봄’이에요.
그래서 최순애와 이원수가 ‘오빠 생각’ 작사하고 ‘고향의 봄’을 작사하면서 어릴 때부터 서로 펜팔을 했는데, 14년 후에 수원역 앞에서 만나자고 둘이 약속했어요. 마치 드라마 같지요? 마치 엽기적인 그녀라는 영화 같아요. 타임캡슐 해서 만나자고 한 겁니다. 14년 후에. 아직은 12살, 그리고 14살이니까. 그리고 14년 전에 이미 결혼을 약속했습니다. ‘뜸북뜸북’하고 ‘나의 살던 고향’하고 둘이. 최순애가 수원 살고, 이원수가 마산 살았어요.
14년 뒤에 최순애가 수원역에 갔어요. 갔는데 안 나타났습니다. 얼마나 실망했겠습니까. 왜 안 나타납니까?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겠어요. 그런데 이원수라는 사람이 뭘 했는가 하면 독립운동을 해서 옥에 갇혔어요. 그때 옥에 갇혔을 때 하필 옥에 갇힌 날이 14년 후 그 날짜였어요. 그러고 난 뒤에 7년 옥살이하고 마산에 사는 ‘고향의 봄’인 이원수가 ‘오빠 생각’인 최순애를 만나러 갔습니다.
그래서 만났어요. 그리고 1936년 6월에 결혼했는데 딸 셋 낳고 아들 셋 낳았습니다. 잘 먹고 잘살았어요. 오빠 생각했던 그 주인공 오빠는 일본에 유학가서 역시 독립운동 하면서 갇힌 사람이에요. 결국 이 말이 뭐냐 하면 제가 방금 이야기한 이 쓸데없는 이야기가 우리에게 납득되고 이해되는 거예요. 그게 이 세상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지 않고 싶은 이유는 이러한 멋진 로맨스가 나에게도 한번 일어나서 나도 한번 겪고 천당을 가든지 지옥을 가든지 가고 싶은 거예요.
이 땅, 이 세상은 마귀가 그동안 주요하게 제공했던 의미와 그러한 인생관들로 꽉 잡혀 있기 때문에, 이건 우리 힘으로 이 세상을 떠날 마음이 없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주께서는 “가만히 있어. 내가 데리러 올게” 그 방법은 이 세상이 결국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는 세상, 그리고 그 실망스러운 중에 누가 포함되어 있느냐면 나도 하나님 보기에 실망스러운 존재로서 세상모르고 이 세상이 좋은 줄 알고 딱하니 머무르는 나를 주께서는 십자가라는 그 족집게로 주께서 잔에 넘친 그 진노의 죽음의 사건을 우리 속까지 집어넣어서, 우리를 일방적으로 죄 사함을 통해서 데려가는 방식을 채택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은 이미 진노를 받은 것이고 중요한 것은 그 진노가 십자가라는 이름으로, 죄 용서라는 이름으로 십자가가 우리 안에 꽂혀있게 되었다는 거, 이것보다 더 멋진 로맨스, 사랑의 관계는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수치를 누구에게 들키겠습니까. 우리의 부끄러움을 고이고이 간직하고 싶은 이 본성, 그러나 십자가라는 말씀의 족집게가 오니, 우리 자체가 주의 일을 방해하는 수치스러운 존재인 것을 발각되는 기쁨과 즐거움이 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