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 방해죄
2024년 8월 11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5:31-33
(25:31) 요란한 소리가 땅 끝까지 이름은 여호와께서 열국과 다투시며 모든 육체를 심판하시며 악인을 칼에 붙이심을 인함이라 하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25:32)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재앙이 나서 나라에서 나라에 미칠 것이며 대풍이 땅 끝에서 일어날 것이라
(25:33) 그 날에 나 여호와에게 살륙을 당한 자가 땅 이 끝에서 땅 저 끝에 미칠 것이나 그들이 슬퍼함을 받지 못하며 염습함을 입지 못하며 매장함을 얻지 못하고 지면에서 분토가 되리로다
선지자가 날리는 예언은 듣는 이가 뭘 하겠다고 미리 대비할 수 없습니다. 그냥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때 선지자의 말씀을 듣는 이들은 그 누구라도 부화가 치밀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예언이 우리의 장래를 처참하게 망가뜨리는 예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전에 우리들의 장래를 조정할 수가 없습니다.
장래를 변경하려고 하면 할수록 예언된 본 내용의 밀도가 더욱 짙어집니다. 오늘 주신 예언은 이미 창세기 3장에서 내린 그 예언을 더욱 심화하는 내용입니다. 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9)
즉 “너는 원래 흙이나 화낼 필요없어. 잠시 인간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현상에 불과하고 본질은 여전히 흙이야”라는 겁니다. 이 창세기의 선언이 한결같음을 보여주기 위하여 염하는 것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으시기 위해 급하게 하나님께서 유대나라를 망하게 하십니다. 인간의 마지막 누리는 품위마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겠다는 겁니다.
흙이 흙으로 돌아가는 절차 가운데 인위적인 요소의 가미로 가치가 향상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용납하시지 않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잠시 인간으로 살게 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인간됨의 요소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방해하는 식으로 작용하게 됨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즉 흙이 흙으로 돌아가는 데는 인간에게 그만한 이유와 원인이 붙어있다는 겁니다. 이 가미된 원인성을 하나님은 밝혀내시려는 겁니다. 인간은 자신이 유한한다고 자부하지만 그 유한성을 기초로해서 무한성에 접촉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무한은 그런 방식으로 무한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흙이니 흙이다에 충실해야 한다는 겁니다. 흙이 온전한 흙으로 돌아가지 아니하면 새로움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인간들은 자신만이 유한한 현실을 위하여 자꾸만 과거의 체험을 수집합니다. 하지만 결코 온전한 ‘흙’ 자체는 될 수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8:20-22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시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다녀 가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것도 그냥 관람만 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무한 안에 유한한 자를 담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이름, 즉 예수님이 하실 기능이 ‘임마누엘’이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이란 ‘하나님께서 우리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하시는 ‘유한과 무한의 공존’은 철저하게 인간이 ‘흙’이라는 인식를 견지해야 합니다. 사람이 자신이 죽은 흙이 아니라 산 인간이라고 버티면 인간 내부에 담겨 있는 각종 추억과 기억이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움을 훼방하고 증거하지 못하게 합니다. 인간들이 평소에 나는 것은 ‘일관성’ 있는 자기만의 삶입니다.
여기서 ‘일관성’과 ‘비-일관성’과 구분해야 합니다. 일관성이란 인간이 자신이 경험한 모든 것들을 긁어모아 자체적으로 질서를 갖추어 ‘자기만의 현실’, ‘자기만은 인생사’로 구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일관성 안에 담겨 있는 것들은 본인이 모두 설명이 가능한 것들입니다. “저 일은 내가 한없이 감사하고 기뻐했던 일”이라면 계속 되새겨 가면서 추억을 즐기려 할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 즉 인간의 질서체계에 담기지 않는 무한 것들이 제공되는 기쁨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이래 가지고서는 무한에 예속되는 유한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비-일관성’이란 아직 개인의 판단 대상이 되지 못하고, 그런 경우가 있는지도 모르고 있는 여전히 질서 밖에 있는 숱한 것들입니다.
따라서 만약 인간이 자신이 ‘흙’으로서 죽어 있고, 그리고 자신이 무한이신 예수님의 손에 놓여 있다고 한다면 수시로 날라다 주시는 예수님의 새로움을 만끽하고 그들을 대외적으로 고백할 수 있을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미 그것은 내가 안다’로 가로막히지 않게 되는 겁니다. 보통 인간 사회에서 커닝을 하는 것은 바로 ‘업무방해죄’가 성립합니다.
국가에서 공평하게 지적 실력을 겨누는 수능시험장에서 홀로 몰라 남의 답지를 염탐하고 베끼는 것은 ‘국가 시험’의 공정성을 방해하는 바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오셔서 ‘임마누엘’을 달성하기 위해 말씀과 결부된 사건들을 일으키시는데 그 사건에 대해서 잘못된 해석을 내리게 되면 이는 그 인간은 여전히 ‘자기 일관성’ 밖으로 못 벗어나는 바가 됩니다.
예수님의 일에 대해사 업무방해죄가 성립됩니다. 따라서 선지자의 말씀이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냥 들어라고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말씀 그 자체가 직업 위력을 발휘합니다. 쉽게 말해서 성도를 전적인 죄인으로 만들어 버리십니다. 그렇게 되면 ‘죄인이기에 뭐든지 할 수’가 있습니다.
즉 “나는 이런 일을 할 정도로 무가치한 존재가 아니야”하고 버틴다면 이는 여전히 자기 질서 안에 갇혀 있는 바가 됩니다. 무한하신 예수님이 준비해 놓으신 무한함이 들어서지 못하면 ‘새로움’이 성립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마스 수장을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죽일 때, 분명 그의 방은 포탄으로 폭발했지만 그 현장에 폭탄 말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것은 저 먼 이스라엘에서 원격조정했기 때문입니다. 말씀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말씀 깨달랐다고 누구에게 광고할 필요없을 정도로 자신만이 아는 체험입니다. 즉 “과연 나는 흙 맞구나. 흙이 아닌 적도 없고 흙에서 벗어난 적이 없구나”를 하면서 그때마다 예수님의 세계를 경험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따로 나의 세계를 구성하기 위해 시도하게 되면 이는 지금도 분주하신 임마누엘의 작업을 방해하는 업무방해죄에 해당됩니다. 매일 말씀에 폭탄에 의해서 흙이 되는 즐거운 파괴의 체험을 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다른 일관성을 지니고 살 때, 저희들은 늘 비-일관성에 노출됨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15강-예레미야 25장 31~33절(업무방해죄)240811-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5장 31~33절입니다. 구약성경 1079페이지입니다.
“요란한 소리가 땅 끝까지 이름은 여호와께서 열국과 다투시며 모든 육체를 심판하시며 악인을 칼에 붙이심을 인함이라 하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재앙이 나서 나라에서 나라에 미칠 것이며 대풍이 땅끝에서 일어날 것이라, 그날에 나 여호와에게 살륙을 당한 자가 땅 이 끝에서 땅 저 끝에 미칠 것이나 그들이 슬퍼함을 받지 못하며 염습함을 입지 못하며 매장함을 얻지 못하고 지면에서 분토가 되리로다”
하나님께서 역시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예언대로 현실은 성립되겠지요. 현실은 이루어지고 벌어지게 되는 겁니다. 이번에 예레미야에게 주신 현실 내용은 염(殮) 자체가 안 되는 시체들로 가득 찬 땅. 염(殮)이라는 것은 죽은 고인에 대한 마지막 배려죠. 짐승의 밥이 되는 그 비참함을 차마 못 보겠다는 겁니다.
이미 돌아가셔서 감각은 없겠지만, 살아남은 우리 후손들이나, 친구나, 친지들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시체 자체가 인간보다 못한 날짐승의 먹잇감이 된다는 것은, 지금껏 살아온 그 사람의 가치에 비해서 합당치 않다는 생각에서 장래를 거하게 치러줍니다. 고인이 살았다 치고, 섭섭하지 않도록 해주고 싶은 그것이 우리의 마음에 맞는 겁니다.
왜냐 하면 죽은 자와 살아있는 우리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추억들이 있기 때문에, 그 추억들을 아름답게 간직하기 위해서는 비록 고인이지만 살아있는 우리의 정서상, 기분상, 그냥 넘어갈 수가 없겠죠. 그래서, 그 사람이 아무리 악한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이미 죽었으니까, 하나님께 벌을 받았으니까, 우리가 또 그 사람을 미워할 추가적인 것은 없고 장래나 잘 치르는 것으로 그 사람에 대한 우리의 마지막 예의는 그렇게 다 하는 거죠.
이게 바로 장례문화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얼마나 성격이 급했던지, 그 장례문화를 인간들의 기본적인 인간성마저도 삭제시키기 위해서, 급하게 약속의 땅에 있는 백성들을 다 멸망시켜 버렸습니다. 염해주려면 누구 하나 살아있어야 하는데, 누구 살아있는 사람 자체가 없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은 날짐승밖에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기 때문에, 짐승의 밥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조치하신 겁니다.
이런 예언을 미리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나쁜가? 우리가 못난 건 스스로 인정하겠는데, 우리가 품위 있는 마지막 모습을 갖추지 못할 정도로, 우리가 그토록 악했어? 그 정도로 나빴어?’라고 불만을 드러내고, 또 선지자 보고 원망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창세기 3장을 벌써 잊어버린 사람이에요.
창세기 3장에서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딱 접합되게 되면 “너는 흙이니, 반드시 필히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라는 이것은 요지부동입니다. ‘이건 안 됩니다’라고 하면 안 돼요. 그냥 그런 거예요. 내가 나를 어떻게 수습하고, 처리하고, 그런 건 안 됩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처리하고 그런 거 안 됩니다. 그냥 타인이 손 대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손대서 흙이니까 흙으로 돌아갑니다.
장례를 치르든 안 치르든 그건 별로 중요하지도 않아요. 장례를 치른 것도 흙이고, 안 치른 것도 흙이고, 결국 마지막 모습은 흙인 거예요. “그 마지막 모습을 마지막이 되기 전에 좀 미리 간직하면 안 되겠니?”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쉽지요. 네가 흙이 되기 전에 ‘나는 흙입니다’라고 하면서 돌아다니면 안 되겠니? 그걸 하나님이 요구하는 겁니다.
‘내가 아직 흙이 되진 않았지만, 내가 흙이라고 생각하며 삶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쪽에서 이익된 것은 뭐가 있습니까?’라고 따질 수가 있어요. ‘좋습니다. 내가 흙입니다. 그런데 내가 흙이라고 해서 하나님께 돌아갈 이익은 뭡니까? 도대체 이런 고백이 하나님께 무슨 도움이 됩니까?’라고 생각하거든요. 정답은 이거예요. 사람이 죽어야 거기서 새로운 것이 나와요.
이게 바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부활의 권능이고 부활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부활의 능력으로는 예수님 돌아가시고 부활의 능력으로 오신다고 흔히들 다 알고 있지요. 그런데 이게 예수님만 그렇게 되는 게 아니에요. 성도도 내가 죽었다고 칠 때만 성도가 성도다운 능력이 나와요. 물론 그 능력은 이미 본인이 죽었기 때문에 자기 능력은 아니고요, 주님의 능력입니다.
이걸 간단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래요. ‘내가 죄인이 되었으면 못 할 게 없다’라는 이 말이에요, 우리가 ‘이건 안 해, 안 돼, 안 해, 못 해, 이건 때려죽여도 못해’라고 멈칫멈칫하는 것은 내가 아직도 쓸만한 가치가 나에게 남아 있다고 하니까 주춤하고 있는 거예요. 사람들은 전쟁이 일어나지 아니하면, 항상 자기 것을 지킬 게 있다고 여깁니다.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뒷배’라고 합니다. 뒷배. 자기에게 아직도 배가 열두 척 남은 겁니다. 뒷배가 남아 있어요. 사람들의 모든 행동은 어디서 나오는가. 뒷배 믿고 나온 행동들이에요. ‘내가 참 더러워서, 내가 네 말 안 듣지. 나는 다 뒷배가 있어. 이번 일 성사 안 돼도 나는 밥 먹고 살아, 인간아’라는 식으로 나오죠.
결국 그 뒷배가 뭐냐. ‘OOO를 하지 않더라도, 나는 밥 먹고 살아’라는 이 ‘밥 먹고 살아’라는 게 치졸한 마지막 뒷배가 그겁니다. 그게 뒷배예요. ‘네가 나를 버려? 그렇다면 나에게 천이백 줘. 나 혼자 살게’ 이런 거죠. 그럼 천이백은 왜 달라고 하는 거죠? 그게 나의 뒷배가 되기 때문이죠. 나의 품위, 나이 가치가 계속 살아남는 거예요. 그 뒷배가 있으면.
그러면 뒷배는 뭘 방해하는가. 내가 이미 흙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방해하는 것이 내 뒷배에 대한 의존감이에요. 그게 바로 우리가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이 그거예요. 우리는 이미 믿는 자예요. 그래서 개종이 안 돼요.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 뒷배를 믿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뭐, 예수 믿다가 안 되면 내가 숨겨놓은 뒷배 믿으면 되지.’
그걸로 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 뒷배마저 처리하는 것이 주님의 몫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뒷배라는 거, 너의 든든한 마지막까지 의지하는 그거? 그거 내가 치워 줄게. 배가 열두 척 남아 있다고? 내가 다 없애 줄게” 그게 바로 오늘 본문 선지자 예레미야가 우리에게 하는 거예요. ‘마지막도 품위 있게, 나는 죽을 때도 품위 있다’라고 하는 그 품위? 너를 염하는 사람이 없도록 해줄게.
선지자가 예언했거든요. 그 예언이 실제 이루어지는 게 뭐냐. 마태복음 8장입니다. 예수님께서 일단 뒷배는 없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자신의 뒷배가 없어요. 예수님은 이 땅에 다녀가시는 것이지 살려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살려고 온 분이 아니기 때문에, 이 땅에서 자기 부동산을 가질 이유가 없지요. 그냥 왔다가 가시면 되니까.
이 말도 듣기에 따라 굉장히 쉬운 말처럼 하지만, 굉장히 난해한 말씀입니다. 왜냐 하면 여기 살려고 오신 분이 아니고, 오셨다가 가셨다고 할 때, 예수님의 이름이 임마누엘이거든요. 지금 좀 어렵지만 설명해 드릴게요. 임마누엘 자체가 예수님인데, 우리와 함께 있다는 뜻인데, 이걸 누가 싫어하냐 하면 인간 쪽에서 싫어해요. 왜냐면 인간은 본인이 유한 한 걸 알아요.
그런데 유한한 것이 무한한 것과 같이 산다? 감당이 안 돼요. 만약 제가 사는 빌라 옆에 벤츠 전기차 들어오면 감당 안 돼요. 불나면 나의 마지막 뒷배가 불에 탈 수가 있어요. ‘주제 파악해서, 여기까지는 내가 뒷배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마저 쥐가 와서 갉아내기를 저는 거부합니다. 이렇게 살도록 그냥 내버려 두세요, 하나님. 이것도 최소한도로 내가 많이 낮춘 건데, 진짜 이거 가져가면 정말 나는 믿음 없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나를 믿어라”라고 하시죠. ‘아니, 믿음 없다니까요’, “나를 믿으라니까” ‘뒷배도 안 주는데 어떻게 믿습니까?’ “그럼 뒷배 주면 믿나?” ‘아멘, 믿습니다’ 이건 무슨 거래도 아니고.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8장 20~22절에 하는 말이,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예수님은 여우보다 못해요,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새보다도 못해요,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머리 둘 곳도 없으세요.
이렇게 하시고 제자 중 하나가 와요. 21절에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하니까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22절에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다시 말해서 “나를 따르는 데 있어서, 네 쪽의 조건이나 주저할 수 있는 어떤 뒷배는 나를 따르는 것에 있어서 모든 것이 방해가 되고 장애가 된다”라고 하십니다.
인간은 보통은 성경에서 죄인이라고 하잖아요. 인간이 죄인이라고 하는데 그 죄가 무슨 죄냐 하면, 업무 방해죕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업무방해죄에서 가장 흔한 것이 뭐냐? 컨닝(cheating)이에요. 수능에서 컨닝하다가 걸리면 업무방해죄로 걸립니다. 왜냐 하면 다 같이 컨닝하지 않고, 자기 아는 지식으로만 공평하게 수능을 치러야 할 그 공적제도에 대해서, 그걸 거부하고 자기가 몰래 컨닝을 한다면 국가가 하는 업무에 대해 방해죄가 되는 겁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임마누엘’이라는 작업을 하러 왔어요. 유한한데 무한이 들어올 수 있는, 매치 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 왔습니다. 우리는 지레짐작 겁을 내요. ‘안 됩니다. 제 유한함도 감당 안 되는데 무한한 분이 유한한 내 속에 함께 들어오신다니, 저 그렇게 대단한 사람 아니에요, 하나님’ 이런 식으로 슬슬 내빼죠. 업무방해 혐의에 해당합니다.
업무방해 혐의에 해당한다고 해서 주님이 자기 백성을 방치하지는 않아요. 주님께서는 반드시 임마누엘 하도록, 주님이 그 사람 속에 들어가도록 조치하는데, 그 조치 방법이 뭐냐. 조치 방법은 그 인간의 유한성을 주님께서는 죽은 것으로 인정해 버려요. 죽게 하는 사태가 계속 일어납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그 인간이 죽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그 사람 속에서, 그 사람을 통해서 새로운 것들이 계속 해서 발산되고 터져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업무방해죄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해도, 항상 내 추억과 내 기억이 주님께서 마련한 새로움이 있는 현장을 가로막고 있어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제가 어릴 때, 방학 되면 반드시 갔던 코스가 있어요. 그곳은 경산시 남천면에 있는 우리 어머니 친정집인 저희 외갓집에 갔어요. 그 외갓집에 외숙모께서 반갑다고 수제비를 해주시는데, 그 수제비를 어떻게 하느냐 하면, 아주 큰 가마솥에 땔감도 그 근처에 소나무 마른 가지를 다 주워 와서 그걸로 불을 지펴요. 그리고 누~런 밀가루로 반죽하고 솥에 감자, 멸치 다시다 확~~풀어서 한 솥에 끓여요.
나 혼자만 외갓집에 간 것이 아니에요. 여기저기서 사촌들이 총집합을 해요. 장기 잘 두는 사촌도 와있고, 사촌들이 떼로 오게 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수제비를 해주는데, 그 수제비 맛과 모락모락 올라가는 연기 맛이 섞여서 오묘한 맛이 나요. 이 세상에서 그런 수제비는 없었다. 지금까지 이런 맛을 내는 수제비는 없었다. 그 촌에 있는 연기 맛이 국물 속에 담겨서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수제비예요.
그 숙모가 4년 전에 100세 나이로 돌아가셨습니다. 이제는 그 수제비 맛 끝났어요. 그럴 때 어린 마음에, 외갓집에 가면서 기대하는 것이 있어요. ‘빨리 가서 수제비 먹어야지’ 집에서 먹는 엄마가 해주시는 수제비는 그 맛이 안 나요. 그건 누가 와서 해도 그 맛이 안 나요. 그런데 그게 뭐냐? 나에게 준 새로움을 내가 새롭게 받질 않아요.
유한한 내가 유한한 머리에서 나오는 유한한 것들을 자꾸 목표로 하고, 그걸 고대하고, ‘그러면 나는 행복하겠습니다. 그 수제비를 먹는 나는 감사하겠습니다. 고맙겠습니다’라고 계속 내 안에 세계와 내 안에 현실 속에 있고, 바깥으로 나가지를 않아요. 주께서 원하는 새로움이 안 나와요. 전부 업무방해죄입니다. 유한한 감옥에서 나름 행복하면 끝.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를 안 나와요. 자기의 과거에 쌓여있던 기억과 추억 때문에.
이건 옛날 팝송도 마찬가지예요. ‘Blue eyes crying in the rain’ 빗속에서 울고 있는 푸른 눈의 소녀, 올리비아 뉴튼 존(Olivia Newton John)이 1976년도에 부른 팝송을 들으면 그 노래만 들리는 게 아니에요. 그 노래가 들렸던 다방, 동성로, 그때의 기억이 한꺼번에 밀려오면서 그 노래가 그렇게 운치가 있는 거예요. 그 노래를 들으면 약간은 운치가 나는데, 나이 70 넘어서 운치 있으면 뭐 합니까.
그게 다 깨지는 거예요. 실망스러운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내가 지금도 계속 나와야 할 새로움이 나의 과거 인식이 훼방하고 방해 놓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 올 때 침목 도모를 하는 이유가 거기 있어요. 어릴 때 무조건 잘해주고 이뻐해 줬던 그것을, 교회가 사랑이 넘친다니까, 주님이 사랑이 기다리고 있다니까, 그 사랑을 나에게 채워서, 나로 하여금 어릴 때 있는 사랑을 좀 맛보게, 나이 70, 80 되어도 맛보게 해달라는 거죠.
그것 때문에 교회 나와서 사랑이 넘치느니, 사랑하는 형제라고 어깨동무하고, 그런 게 업무방해죄입니다. 죽어있는 인간, 죄인이 되면, 그런 수제비 맛이 안 나더라도, 집에서 아내가 해준 수제비 맛을 새롭다고 느끼려면 내가 과거와 단절되어야 해요. 죽어야 해요. 이제 어려운 용어하고 마치겠습니다. 뭐냐 하면, 일관성(一貫性)과 비일관성(非一貫性), 두 개가 있는데요.
인간은 주님이 주신 임마누엘 현실을 봐도, 주님이 살아 있어도, 주께서는 비일관성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까지 내 지식으로, 내 안에 질서 잡히지 않고 빠져있는 거, 이것은 내가 언제 가져왔고, 이건 내가 언제 느꼈고, 이건 내가 언제 배웠고, 이건 내가 언제 아는 거고, 이건 내가 익히 아는 거, 그런 것을 바구니에 담아서 이건 나의 세계라고 여겼던 것은 일관성. 나를 나 되게 만드는 질서 체제.
그런데 그 바깥에 빼놓은 무지무지한 비일관성이 있어요. 우리가 아는 사람만 만나고, 내가 친한 사람만 만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만나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준비된 비일관성의 그 새로움을 우리가 맛볼 수가 없어요. 그냥 뻔한 거예요. 인생이 아무리 살아도 뻔해요. 주께서 준비한 새로움을 맛보고 우리가 마음이 더 낮아져야 하는데, 이거 뭐 다 아는 거, 이거 뭐 다 내가 느낀 거, ‘아, 사는 거 재미없다. 그냥 콱 죽어버릴까’라는 식이죠.
본인의 일관성이 주의 말씀에 의해서 와해하고, 나는 이미 주님 앞에 흙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요. 그런데 흙이 너무 건방진 흙이 되었어요. 잘난 흙이 되어서 ‘내가 흙이 맞는데 너보다 더 잘난 흙이야’라고 되는 거예요. 이제 끝으로 ‘너는 염도 못 할 정도로, 염 대상도 아니고, 너는 염 받을 가치도 없어’라는 식으로 이렇게, 좀 이렇게 해주는 방법이 있느냐.
어떻게 하면 그런 것을 흔쾌히 수용할 수 있는 임마누엘이 될 수 있느냐. 주님만 있고 나는 없어지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느냐. 어떤 노림수가 없는 사람이 될 수 있느냐. 얼마 전에 이란 대통령이 취임했는데, 하마스 최고 지도자가 거기에 참석했어요. 하마스 자기 나라는 전쟁하고 있는데, 자기는 영국으로 차 타고 돌아다니면서 호텔에서 호화스럽게 보내다가 거기에 참석했어요.
참석했는데 죽었어요. 자기는 귀빈으로 대우받다가 귀빈 대우받는 그 방만 폭탄이 터져서 죽었어요. 문제는 폭탄이 터졌는데 아무도 어떻게 죽었는지 아는 사람이 없어요. 왜냐 하면 AI 폭탄이었어요. 인공지능으로 원격으로 조종되는 폭탄이기 때문에, 폭탄이 터지면 그 근처에 폭탄을 던지거나 설치한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그 근처에 아무것도 없어요.
비밀집회 장소인데 옆방에 있는 사람들은 멀쩡해요. 그 사람만 죽었어요. 이것이 뭐냐. 새로움을 줘야 할 하나님의 백성을 옆에 있는 같은 교인들도 모르고, 성도도 몰라요. 본인만 알아요. 말씀을 터트리면 말씀만 남기고 말씀이 나를 죽였고 내가 ‘알아서 믿는다. 알아서 말씀대로 지켜서 내가 없애겠습니다. 십자가 죽겠습니다’라는 그것도 필요 없어요.
그냥 말씀이 와서 인공지능처럼 나에게 투하하면 그 말씀이 현장에 남습니다. 너는 염 없이도 죽어야 해, 오케이! 이러면 끝날 문제예요.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간다” 창세기 3장 말씀을 내가 왜 갑자기 잊어버렸지. 오케이! 내가 원래 그래야 마땅합니다. 그 짧은 순간, 몇 초 가지도 않아요. 폭탄이 원래 몇 초 가지 않아요. 순간순간 말씀이, “좁은 길로 가라! 넓은 길로 가면 안 돼” 아, 내가 넓은 길로 갔구나...
이처럼 말씀이 순간순간 AI 폭탄을 터트려 줄 때, 이거는 내가 모르는, 내가 남아서, 내가 까불면서 아직도 이 정도 하면 안다고 여기는 그거, 그걸로 막혀있는 업무방해죄를 행함으로써 몰랐던 비일관성, 내가 못 느꼈던 세상에서 흐르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그 짧은 순간에 집약해서 아는 겁니다. ‘신유빈이 금메달 따야 해’라고 까불다가 중국에 져서 안 됐을 때, 탁구선수 신유빈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실력이 안 돼서 못 땄습니다’
내가 이야기할 것을 왜 나이 스무 살 먹은 얘가 이야기하느냔 말이죠. 그건 나이 60된 사람 이야기예요. 60 되어도 그런 이야기 안 나와요. ‘실력이 안 돼서 졌습니다’라는 그 말, 말씀이 우리에게 바로 그것을 요구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회사 가나, 가정 가나, 직장 가나, 어떤 일이 있어도 ‘실력이 안 돼서 이것도 우리에게 오감합니다’라는 말을 왜 우리는 못 합니까.
주님이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은혜의 감사를 받기 위해서예요. 그 감사를 누가 방해합니까. 업무방해죄를 누가 합니까. 우리의 완악함이 업무방해죄입니다. 말씀이 와서 투하될 때, 그것이 깨어지면서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하나님과 같이 임마누엘 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바로 성령 받은, 말씀이 와서 닿은,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고, 폭탄처럼 날아다니는 것을,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내가 말씀을 지켜야 한다고 착각했습니다. 주여, 말씀을 지키지 말게 하옵소서. 말씀이 우리를 깨게 하옵소서. 그래서 잃어버렸던 감사를 회복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