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무화과
2024년 7월 14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4:1-3
(24:1)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와 유다 방백들과 목공들과 철공들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옮긴 후에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전 앞에 놓인 무화과 두 광주리로 내게 보이셨는데
(24:2) 한 광주리에는 처음 익은 듯한 극히 좋은 무화과가 있고 한 광주리에는 악하여 먹을 수 없는 극히 악한 무화과가 있더라
(24:3)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무화과이온데 그 좋은 무화과는 극히 좋고 그 악한 것은 극히 악하여 먹을 수 없게 악하니라
사람이란 한 번 터잡은 곳에서는 좀처럼 떠나지 않을려고 합니다. 그만큼 정들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과거와 정들었습니다. 과거에서 깔린 선로 위에서 지금의 자기를 구성합니다. 따라서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자신의 뿌리가 뽑히는 것과 같습니다. 바로 이 관점으로 단단히 기초를 다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무화과 나무를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에 견줍니다. 여기서 인간들의 오해는 번집니다. 약속의 땅에는 하나님의 복된 약속을 증명이라고 한 듯이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가 만발합니다. 이처럼 이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이나 유대민족이 줄곧 번창하기를 그들은 고대했습니다.
자기네들 말고 약속의 무화과 나무 같은 존재는 따로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왜곡된 견해를 그냥 지켜 보지 않고 선지자를 보내어 질책하십니다. 즉 “너희들은 반대로 생각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무화과 나무로 연결시켜 설명하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무화과 나무는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둘로 나뉘어진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그냥 무화과 나무 통으로 이스라엘이고 유대민족이기를 원합니다. ‘좋다, 나쁘다’를 개입했을 경우, 그 기준은 본인들이 제시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안목과 관점으로 주입시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근원적으로 계시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보임을 말해줍니다.
‘잘못된 견해’란 자기를 좋게 보는 견해를 말합니다. 자신이 자신을 나쁘게 볼 근거를 젼혀 지니고 있지 않음을 나타내 보이는 겁니다. 자기의 문제점을 모르게 되면 자신은 마땅히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오인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허점을 바로 지적해 주시는 것이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왜 인간들을 매사에 하나님에 대드는 것으로 살아가는 걸까요? 요한복음 13:2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가룟 유다는 자신의 생각은 어디까지나 자신에 의해서 실시된다고 여깁니다. 가룟 유다는 죽을 때까지 자신을 악마가 일방적으로 통제한다는 생각을 못합니다.
이것은 가룟 유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다 그러합니다. 생각이나 의지나 행동을 인간 본인의 결심에 의해서 생성해 낸다고 여깁니다. 그래야지만 자기 행위에 대해서 윤리적 책임성이 주어진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행동해놓고서 “내가 안 했고 악마가 했다”가 우기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악마가 인간의 생각을 조종하면서 어떤 결과를 노리는 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팔 생각’입니다. 즉 예수님을 피해서 살고 상관없이 살도록 부추깁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백성을 좋은 무화과와 나쁜 무화과로 나누시는 이유가 나타납니다.
자연은 언약에 추종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악마에 추종합니다. 무화과 나무는 자연물이다. 식물입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기르시는대로 자라서 열매 맺히게 하신다면 그냥 열매 맺혀서 하나님의 것으로 돌려드립니다. 바로 이러한 취지가 약속의 땅에서 자라나는 식물이나 동물들에게 적용됩니다.
그런데 인간들만큼은 기어이 하나님에게 대듭니다. 반항하고 반발합니다. 이는 자기만의 삶을 따로 추구합니다. 그 누구의 지시나 명령을 거부하면서 말입니다. 예를 들면, 높은 절벽 끝에서 휴대폰으로 인증 사진을 남기려는 자가 욕심이 내어 절벽 끝지점에서 미끌어져 떨어져 죽었을 때에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 사람은 죽었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자연 관점으로 말해서는 ‘중력이 살아 있다’가 됩니다. 중력 가속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G= 입니다. 인간은 죽더라도 자연은 살아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반복해서 죽어나가더라도 언약 법칙은 한결 같습니다. 출애굽의 원칙입니다.
포로 잡혀 있는 상태에서 자력으로 구출이 못되는 자들을 주님의 자기 희생으로 그들로 하여금 약속의 땅에 들어서게 했습니다. 바로 이 취지가 지속적으로 지켜지고 유지되는 땅이 바로 ‘약속의 땅’입니다. 아가서 2:3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 무화과 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즉 무화과 나무가 하나님의 솜씨에 의해서 번창하는 것처럼 그런 낙원에 사는 인간들도 이 무화과 나무와 같은 자세로 임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제국에 잡혀 가서 다시 모든 자율권과 주도권을 상실한 바로 그들이 ‘좋은 무화과 나무’라는 겁니다.
반면에 이 약속의 땅을 마치 자기 소유의 땅인 양 우기면서 붙들고 결코 떠나지 않으려는 자들이 바로 ‘악한 무화과 나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원칙은 처음 출애굽 당시의 첫 사랑을 원하시는 겁니다. 그 때는 결코 자기 의사나 노고가 끼어들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에게 주도권이 없었습니다.
신약에 들어와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눅 16:20-21) 이 본문에 보면, 이 거지 나사로는 개보다도 못한 취급을 이 세상에서 받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 거짓 나사로가 낙원으로 들어가는 구원받은 자입니다. 그는 자기 몸도 가눌 길 없습니다. 스스로 내세울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거지 나사로가 내놓은 열매는 결코 자신의 애씀과 노고가 아닙니다. 그는 그냥 그 나라와 의를 구할 뿐입니다. 이게 바로 사랑이라는 겁니다.
사랑이란 사랑하시는 분과 시선을 마주하는 겁니다. 시선을 연결하는 겁니다. 이 시선 외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죄 많은 우리를 예수님과 같이 해서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게 하십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롬 15:16)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우리가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음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11강-예레미야 24장 1~3절(좋은 무화과)240714-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4장 1~3절입니다. 구약성경 1078페이지입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와 유다 방백들과 목공들과 철공들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옮긴 후에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전 앞에 놓인 무화과 두 광주리로 내게 보이셨는데, 한 광주리에는 처음 익은듯한 극히 좋은 무화과가 있고 한 광주리에는 악하여 먹을 수 없는 극히 악한 무화과가 있더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무화과이온데 그 좋은 무화과는 극히 좋고 그 악한 것은 극히 악하여 먹을 수 없게 악하니이다”
‘좋다, 나쁘다’라는 거, 특히 과일같은 경우에는 먹는 자의 입맛을 돋우면 좋은 과일이고, 아무 맛도 없으면 이건 안 먹고 버릴 과일입니다. 약속의 땅에 무화과나무 심었습니다. 누가 먹느냐? 이스라엘 백성이 먹는다고 생각하시면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이 자기의 역사에 대해서 뭔가 잘못 생각한 겁니다.
인간 자체가 편중되어 있고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오게 되면 여기서 어두움이 발생됩니다. 빛을 빛으로 보지 못하고 인간들이 자기 내부의 악에 도달해서, 잘못되게 자기와 세상과 하나님을 이해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무화과나무의 예를 들면서, 이 약속의 땅에 삶이 너에게 좋은 건지, 하나님 나에게 좋은 건지 묻는 장면이에요.
약속의 땅에 들어왔습니다. 얼마나 힘들게 들어온 땅입니까? 이 부동산, 젖과 꿀이 흐르는 땅, 토지가 좋다는 거. 그러나 이 약속의 땅에서 나는 결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을 떠나지 않겠다고 이야기한다면 이게 바로 나쁜 무화과입니다. 우리는 이 약속의 땅에서 살 자격도 없다고 하는 무화과가 참 좋은 무화과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분명히 하나님의 진리를 전했는데, 인간들이 받아들이면서 일방적으로 잘못되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예레미야를 보내게 되었고 이걸 반대로 뒤집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길어서 다 읽지는 않았지만, 5절 같은데 보면 좋은 무화과나무는 바벨론 나라에 포로 잡혀가는 백성, 포로가 되어서 가는 그 백성들이 참 질이 좋은 무화과나무라는 거예요.
이것을 우리 인간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죠. 자기 본토, 자기 고향을 놔두고 남의 나라 포로 잡혀가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야, 너 참, 인생 이렇게 잘 풀릴 줄 몰랐지? 그지?”라고 하신단 말이죠. 내 것이 없어져 버렸는데, 내가 그동안 저축한 그것이 한꺼번에 다 날아가 버렸습니다. 출애굽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가 모아놓은 것뿐만 아니고, 이웃에 있는 애굽의 물품까지 덤으로 얻어서 그들은 빠져나왔어요.
그런데 여기 있는 예레미야의 약속의 백성들은 자기 것을 잃은 것은 너무 당연하고, 이제는 빈털터리 되어서, 남의 것이 없으면 못사는 노예로 팔려가 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못 먹어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으면 버틸 수 있는데, 좋은 무화과나무는 어떤 사람이냐 하면, 그 자존심마저도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는 사람, 이게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참 좋은 하나님의 무화과나무이고 나의 진정한 열매라는 거예요.
도대체 어디까지 망가져야 하죠? 우리가 예상하는 망가짐, 그 바닥, 그리고 바닥, 지하실로 또 내려가야 하는데. 성경을 보면서 우리는 진짜 골라서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지는 않은지. 그러나 진짜 성경을 보게 되면, 우리가 겁나서 후딱 지나가 버린 그런 것들을 우리가 의도적으로 놓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예수님께서 거지와 나사로의 비유를 이야기하셨는데, 21절에 보면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개들이, 그러니까 개가 사람을 개만도 못한 취급을 해주고 계시더란 말이죠. 개가. 개가 핥았다고 했어요. 그러면 움직이는 쪽은 개고, 핥는 것조차도 반항 못 하고 골병들어 누워있는 것은 같은 종류의 개가 아니라, 그것은 사람인 거지 나사로였습니다.
굳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렇게, 거지 정도가 아니고, 거지에다 더하기 병들기 정도가 아니고, 거기에다 개가 와서 놀리는 조건 하나가 더 추가로 들어갑니다. 어느 홈쇼핑에도 이런 구성은 없어요. 이렇게 아주 처연(凄然)한, 처절한 인생으로 굳이 이렇게 망가뜨려야, 그래야만 천국이 표현되는 겁니까? 도대체 인간이 어느 정도로 인식이 잘못되었으면, 인간이 제일 처하기 싫고 당하기 싫은 상황, 제일 마다하고 망가진 인생인 그런 모습으로 주께서는 천국 가는 백성을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도 너 천국 갈래? 이렇게 만들어줘도 너는 천국 갈래?”라고 묻는 거 같아요. 오늘 무화과나무 나옵니다. 무화과나무 단계는 이렇습니다. 인간과 무화과나무 차이를 보라는 겁니다. 무화과나무는 자연물입니다. 주께서 시키는 대로 그냥 열매가 있고, 열매가 없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인간은 자연물보다 더 못한 존재입니다.
왜냐 하면 대들거든요. 반항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자기 마음대로, 자기 욕망대로 왜곡해서 자기에게 가져다 붙입니다. 그러니 인간을 설명하면서, 군소리 안 하고 그냥 자라나는 무화과나무와 대비해서 너는 그것보다 더 못하다는 지경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식물보다 못하다는 것은 주님 입장에서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식물은 그냥 시키는 대로 열매 맺어서, 열매를 맺게 한 분에게 아주 곱게 열매를 가져다 바치잖아. 너희는 뭐야? 너희는 하찮은 식물보다도 못하나? 하나님께 곱게 가져다 바치면 될 인생을, 기어이 내 인생은 내가 빛내겠다고, 하여튼 신앙생활하면서 제일 미운 것이 뭐냐 하면 요령 부리는 겁니다. 얍삽하게 요령을 부리는데, 예를 들면 이런 거죠.
‘교회 가려고 했는데, 교회 나오고 싶어 하고 교회 나오려고 했는데, 남편이 나가지 말라고 하네요’ 무화과나무 같으면 이런 소리 안 합니다. 공중에 나는 참새로 그런 소리 안 해요. 들에 핀 들풀도 그런 소리 안 합니다. 무슨 변명과 핑계가 그리 많은지. ‘교회 나와서 하나님 믿으려고 했는데, 우리 얘기 아빠가 싫어하네요’ 당연히 싫어하지, 이 지옥에서 예수 믿게 하겠어요? 지옥인데.
그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딱 한 가지입니다. ‘지옥 싫으시죠?’ ‘그럼요. 지옥 싫지요. 우리 가정이 지옥 되는 거 싫어요’ ‘그 지옥에 천국이 있습니다. 지옥에 안 들어가면 천국 못 들어갑니다’ 지옥으로 뚫고 들어가야 해요. 약속의 땅에 가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도인 것처럼 흉내 냈고,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으스대고 자랑질했지요.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준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말합니다. “네가 맛이 갔구나. 네가 첫사랑을 잃어버렸어. 애굽 생활, 노예 생활할 때, 아무 소리 안 하고 하나님이 하신 방식대로 그냥 식물, 동물 정도가 아니고, 그냥 곱게 따라왔던 그때 그 사랑을 잊어버렸다. 너는 다시 맛봐야 한다. 너는 다시 바벨론으로 가. 출애굽 취소, 은혜 준 거 취소”
은혜 준 것을 취소할 때, 여기서 정말 중요한 복음의 핵심이 나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정말 구원받은 사람은 은혜받은 것을 취소할 때, ‘그래, 이게 내 본 모습이야. 이게 마땅하지’라고 나오면 성도예요. 그런데 은혜를 취소하고, 복음을 취소하면, 대부분 사람은 더 악랄해져요. 그런 악랄함이 있었나 의아할 정도로 악랄해져요. 전에보다 배나 주님을 핍박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주님에게 못할 짓한 것이 뭐가 있는데? 내가 주님을 섭섭하게 한 것이 뭐가 있는데? 내가 주님 믿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그런데 주님 쪽에서 나에게 해준 것이 뭐가 있는데. 열심히 했으면 뭔가 협조 정도는 해서,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말아야지. 주님이 뭐 해줬는데? 아무것도 안 해줬잖아. 전부다 교회 생활도 내가 알아서 결정했잖아.
그래서, 주님, 저는 마음 정했습니다. 교회 다니고 안 다니고는 내가 편한 대로 내가 알아서 할게요. 교회 다니고 예수 믿는 거, 내가 알아서 내가 할게요. 그동안 주님이 나에게 해준 거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나라도 나서서 열심을 내야지 어쩌겠어요. 그러니까 그런 사람에게 개가 와서 핥고 돈도 한 푼 없고, 운신(運身)도 못 할 정도로 고질병 걸리고, 이런 것은 나는 아니래요.
나는 그런 대상이 아니래요. 근거는? 그게 아닌 근거가 뭐냐? 근거는 없어요. 주께서 무화과나무라는 표현을 해줄 때는 그냥 더도 덜도 말고 무화과나무만 같아라. 마치 추석날 보름달처럼. 더도 덜도 말고 추석날 보름달처럼, 무화과나무 정도만 되어도, 내가 너에게서 열매 딸게. 이게 주의 뜻입니다. 하여튼 인간은 지독스럽게 말을 안 들어요.
은혜 줬으면 은혜 준 만큼만 하면 되는데, 은혜 준 것도 다 갖다 버려요. 내가 나서서 안 했다고 은혜 다 갖다 버립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되고 싶은 내가, 그럴싸한 내가 있는 거예요. 내가 좋아하는 무화과나무 따로 있어요. 인간은 좋은 말씀만 자기에게 비유로 연결시키고자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약속의 땅에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에요.
오늘날 우리 선배들이에요. 우리보다 먼저, 우리 모습을 다 들통 내준 선배들입니다. 예레미야가 와서 ‘그게 바로 네가 나쁜 무화과다’라고 하죠. 이 약속의 땅에서 견지하고 살려고 버티는 그게 나쁜 무화과다는 거예요. 나쁜 무화과. 주님의 스케줄에 의하면, 절차에 의하면, 제대로 된 바닥, 제대로 된 저주를, 지옥을 체험해야 해요. 그리고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은, 그 체험된 지옥에서 군소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옥 체험했다고 자기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대들지 말고, 이것조차 주님의 연극의 그다음 각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해요. 그러면 신약의 성도가 되면, 그걸 알아야 하지요. 왜? 왜 우리는 무화과나무보다도 못한 그런 존재여야 하지? 왜 그래야 하는데? 요한복음 13장 2절에 참 놀라운 말씀이 나옵니다. 아무리 교회 수십 년 다녀도 내 자신에 대해서 딱 꼬집어서 이야기한 대목을 우리가 찾지 못하는데, 요한복음 13장 2절에 보면 딱 나옵니다.
맘 같으면 다 같이 제창하고 싶어요. 그러나 제가 대신 읽어드리겠습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주인이 누구냐면 마귀예요. 생각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일어나는 생각을 마귀가 주입한 거예요. 마귀가 주입할 때, 어떤 마음을 집어넣느냐 하면, ‘예수를 팔아먹어’라는 마음이 가롯유다에게 도달했을 때, 가롯유다는 이게 자기 마음인 줄 알았어요.
죽을 때까지 자기 마음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것이 자기 마음이 아니고 마귀 마음인 것을 누가 아느냐. 이 세상에 오직 예수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관점을 가롯유다는 장착하지 못했어요. 오늘날 우리 인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귀가 막으니까. 예수님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 네가 하는 생각과 매사의 활동은 뒤에서 누가 너를 조종하고 있다는 겁니다.
마귀가 어떤 목적으로 조종하는가. ‘예수를 좀 멀리 해라. 멀리 해’ 예수님과 시선 마주치지 말라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세상에서 사랑한다고 하잖아요. 어떤 것이 사랑하는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사람은 나에게 돈을 막 줘요. 이거 사랑하는 겁니까? 나에게 칭찬을 막 해줘요. 사랑하는 겁니까? 자기 것 다 가져가라고 해요. 사랑하는 겁니까?
사랑은요, 이상하게도 시선이 마주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상합니다. 기적에 속하는데요. 눈을 마주쳤는데 불편하지 않아요. 그리고 그 시선은 내가 그 사람에게 비추는 시선을 제거해 버려요. 너의 시선 필요 없어. 내 시선으로 충분해. 이걸 나에게 이야기 해주는 거 같아요. ‘당신의 눈빛만으로 족합니다’라는 뭐 이런 거죠. 그게 사랑하는 관계예요.
그 시선이 인간에게는 이렇게 낯설지요? 하지만 대자연은 하나님을 추종합니다. 대자연은 하나님의 언약을 추종해요. 인간의 신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중력은 살아있어요. 까불까불하며 휴대폰 들고, ‘경치 너무 좋다. 찍자!’라고 하면서 뒤에 절벽으로 넘어지게 되면 그다음 뒤에는 무엇이 기다리느냐 하면 중력이 기다리고 있어요. 1초마다 속도가 9.8㎧씩 가속되는 중력이 절벽 밑으로 그대로 떨어지게 해서 신체를 납작하게 만들어 버리죠.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 남자 죽었데. 휴대폰 가지고 까불다가 절벽에서 죽었데’라고. 그게 아니고 말은 제대로 해야죠. 중력이 살아있는 거죠. 왜 자기를 주인공으로 하는 안목을 유지합니까? 중력이 살아있죠. 그 절벽 뒤로 넘어가서 떨어지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왜 떨어져요?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중력이 살아있으니까. 그러니까 중력에 걸려들지 않도록 절벽에서 안쪽으로 더 당겨서 있어야죠.
인간은 이상하게 본인만 살아있는 줄 알아요. 태어날 때부터 마귀만 살아있으니까, 마귀 안목이 계속 주입식 교육을 해온 거예요. 주입식 교육. 여러분이 뉴스를 보고, 모든 것들을 보세요. 뭐, 사고만 나면 급발진이라고 하고. 왜 자꾸 본인만 살아있다는 요령과 변명을 늘어놓습니까. 왜 혼자 살아요? 누구와 시선의 마주침이 없어요. 나를 제거하는 시선이 없어요.
아가에 보면 낙원을 뭐라고 보느냐 하면, 무화과나무의 천국으로 봅니다. 아가 2장 13절에 보면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여기 아가서에 나오는 초원, 낙원, 들판, 그리고 거기에서 뛰노는, 아무것도 필요 없는, 옷을 안 입으나 걸치나 상관없는, 그런 남녀같이만 되어라.
무화과나무에게 배워요. 그 자연물에게 배워요. 시키는 대로 하는, 은혜만 뿜어져서 발산하는, 향기를 뿜어내는 그것을 인간은 왜 못 되느냐 하는 겁니다. 신약에 와서 밝혀지죠. 바쳐라. 제물로 바쳐라. 현재 너는 왜 못 되느냐 하면 내 인생을 내가 붙들고 스케줄 짜고, 계획하고, 각본 시나리오 짜고, ‘나는 이렇게 해서 좋은 무화과나무 할래’라고 자꾸 그걸 짜지 말고 그냥 맡기세요.
아까 오후 기도 시간에 이야기했지만,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모든 것을 너에게 줄게. 너는 지금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24시간 그런 것들에 정신 팔려있잖아. 좋아, 내가 줄게. 주는데,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러면 하나님 관점에서 줄게. 네가 원하는 욕망의 관점에서 채워주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낚시 가게 되면 ‘문어는 잡혀야 할 텐데’라고 하는데, 잡힐 때 있고, 안 잡힐 때 있고.
‘낚시도 주의 은혜입니다’라고 하면 낚시터 가서 그 나라 의지요. 낚시터에서 보여주는 무화과나무. 그러니까 약속의 땅에 있으려고 하지 말고, 내가 나의 모든 자유가 박탈당한 포로가 된 채로 바벨론 가서, 하나님의 은혜를 새로 배우라는 겁니다. 그게 에스더에 나오는 4장 16절 “죽으면 죽으리이다” 죽는다는 말이 아니고, 죽으면 죽어도 상관없다는 겁니다.
오직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과 바벨론 가든, 낙원에 가든, 지옥에 가든, 아파서 헌데를 개들이 와서 핥든 간에, 거지 나사로는 구원의 주님과 아브라함과 시선을 마주쳤어요. 말씀과 마주쳤어요. 말씀이 나에게 들어오게 하옵소서. 말씀만 그냥 들어오게 하옵소서. ‘이거 주세요. 저거 주세요’라고 하지 말고, 그 나라 의만 구하면, 그 나라 의만 들어오면, 그것이 그 나라 의의 열매를 맺히게 하는 무화과나무로, 주께서 우리를 성도로 만들었습니다.
주께서 그 나라 의를 주셨어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표현하느냐. 현재 있는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최적의 은혜예요. 그걸 통해서 ‘주셨지요, 주님?’ 하면서 아무것도 없고 그저 열매만 맺는 포도나무 가지가 되어, 그 나라 의를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끝으로, 그러면 마귀가 시키는 것은 어떠하냐.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을 섞어서 제물로 바쳐요.
로마서 15장 16절에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성령께서는 말씀으로 우리를 책망해서 너의 것은 안 받지만, 그 책망하는 성령의 하시는 작업은 주께서 받으시니까, 그냥 허수아비처럼, 어느 강의에서 했는데 주께서 사용하는 인형처럼, 하나의 모형으로써 항상 주신 은혜에 감사하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변명과 핑계, 여러 가지 구실, 요령 부리는 거, 이제 우리 자신도 보기에 지겨울 정도입니다. 주께서 그런 것을 원하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 우리 속에 마귀가 그럴싸하게 보이라고 우리를 작용하도록 조종하고 있습니다. 주여, 더러우면 더러운 것, 죄지으면 죄지은 것, 그것조차도 주님의 의가 나타나고, 주님의 십자가가 나타나는, 은혜의 장으로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