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인류의 마감

아빠와 함께 2024. 7. 21. 17:05

인류의 마감

2024년 7월 21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5:9-11

(25:9) 보라 내가 보내어 북방 모든 족속과 내 종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불러다가 이 땅과 그 거민과 사방 모든 나라를 쳐서 진멸하여 그들로 놀램과 치소거리가 되게 하며 땅으로 영영한 황무지가 되게 할 것이라

(25:10) 내가 그들 중에서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와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와 맷돌소리와 등불 빛이 끊쳐지게 하리니

(25:11) 이 온 땅이 황폐하여 놀램이 될 것이며 이 나라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약속의 땅은 번영과 풍족을 보장한 땅처럼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약속의 땅 자체가 이스라엘의 지상 행복을 계속 유지시킬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습니다. 이런 희망을 가지는 것을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사랑이라고 이해합니다. 따라서 이 희망을 토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줄곧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이 당연시 여기는 것에 초를 칩니다. 기간까지 확정해서 멸망을 선언해 버립니다. 늘 좋은 땅이라고 여겼던 이곳에 도저히 사람 살 수 없는 땅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변모될 것이라는 겁니다. 이를 통해서 인간이 기대하는 것과 하나님의 단정지은 뜻이 다르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확정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인간 치고 하나님을 믿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벌써 믿음의 주체와 대상을 일방적으로 정해놓고 삽니다. 그것은 자기가 자신을 믿는 겁니다. 요지부동입니다. 아무리 신을 믿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가 자기를 믿는우회로에 불과합니다. 구색에 불과합니다.

자기를 떠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믿음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의 자기 믿음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훼방하는지 그리고 막아서고 방해하는지를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겁니다. 이미 시편 82:6-7에서는 인간의 처지와 운명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너희는 범인 같이 죽으며 방백의 하나 같이 엎더지리로다”

인간 치고 하나님 앞에서 안 엎어질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원수로서 출현된 존재이니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마땅한 처우를 제대로 받는 겁니다. 이러한 인간 처리의 기준으로 하나님께서 새로운 인간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시편 2:7입니다.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이 예수님은 출생부터가 인간하고 다르십니다. 성령으로 출생하셨습니다. 혈통으로 난 보통 인간과 다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별개의 인간을 준비해 두신 이유는, 인간 손이 아니라 예수님 손에 의해서 아버지의 뜻을 달성해내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존재를 통해서 인간은 애시당초 자신은 하나님을 믿거나 아는 자가 아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누가복음 2:28-30에 보면,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시므온 성령이 함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눅 2:25) 그는 자신과 예수님이 바꾸어져야 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됨을 아는 겁니다. 이로서 참된 성령받은 성도는 자신의 행복이나 이익이나 생존을 위하여 하나님께 일하지 않음을 아는 겁니다. 성도는 자신의 육신과 몸이 어디에 매료됨을 잘 압니다. 인간은 공간 속에 있는 몸입니다. 이스라엘도 ‘약속의 땅’이라는 공간과 더불어 자신을 파악하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이제 예레미야를 통해서 ‘공간 속의 몸’이 아니라 ‘시간 속의 몸’으로 바뀌어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인간 세계의 멸망은 70년으로 굳혀 놓으셨습니다. 70년이 인류의 마감 기간입니다. 70년 지나면 인류도 없습니다. 이처럼 인류를 마감짓게 하는 시간에 관한 예언은 예수님에 의해서 달성될 겁니다. 어떤 식으로요?

다니엘 9:2에 보면,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년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 년만에 마치리라 하신 것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다니엘은 예레미야가 전에 이야기했던 70년의 내막을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기뻐야 하지요? 세상의 멸망이 확정된 게 그렇게 기뻐요? 자신은 안 망하게 되어서 기뻐요? 아닙니다. 인류의 망함에 예외가 없습니다. 모든 자는 다 망합니다. 그런데 성령받은 시므온과 오늘날 성도는 왜 그리 기쁘고 감사하는 겁니까? 그것은 자신의 이익차원이 아니라 말씀 차원에서 완성에 합류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용한 의사가 어느 말기암 환자를 보면서 다음과 같이 장담합니다. “이 환자는 6개월 지나면 반드시 죽습니다” 과연 6개월 되는 날에 그 환자가 죽었습니다. 이 일을 통해서 이 용한 의사 혼자 신나합니다. 자신의 예언이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의사는 환자의 죽은 날을 기억할 정도로 자기 세계에서는 대단한 성과가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예언대로 이스라엘이 망해서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므로서 하나님의 예언은 분명 성취됨을 나타나 보이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스라엘 죄성을 버리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는 말씀 성과의 증거로 하늘나라에 걸어두는 겁니다. 필히 이스라엘이 망하고 필히 인류가 망하는 이 작업에 예수님께서 관여하십니다.

70년을 다니엘 9장에서 70이레로 세분화됩니다.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육십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페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단 9:25-27)

70이레로 말미암아 이제는 70년의 이스라엘의 멸망 모델에 모든 민족이 다 적용을 받게 다같이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이방민족이 이 예언에 관여하게 하시고 예수님도 이 일에 관여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70년, 즉 70이레의 의미가 함축된 존재로서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이것은 ‘공간의 몸’에서 ‘시간의 몸’으로, 이제는 ‘예수 몸 안의 몸’으로 새로운 몸이 생겨나게 됩니다. 당연히 말씀 완성, 예언 완성이 취지가 살아있는 몸으로 말입니다. 예수님의 몸의 연장과 지체로서 나타난 성도의 몸입니다. 이 몸은 곧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새겨지는 말씀 판이요 캔바스(화폭)가 됩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생산과 소비로 가득찬 세계 안에서 종말을 나타내는 예수님 안의 몸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12강-예레미야 25장 9~11절(인류의 마감)240721-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5장 9~11절입니다. 구약성경 1079페이지입니다.

“보라 내가 보내어 북방 모든 족속과 내 종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불러다가 이 땅과 그 거민과 사방 모든 나라를 쳐서 진멸하여 그들로 놀램과 치소거리가 되게 하며 땅으로 영영한 황무지가 되게 할 것이라, 내가 그들 중에서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와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와 맷돌소리와 등불 빛이 끊쳐지게 하리니, 이 온 땅이 황폐하여 놀램이 될 것이며 이 나라들은 칠십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예언자 예레미야가 예언한 겁니다. 예레미야가 좋아서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자신의 뜻을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이 말씀에, 이 예언 속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거예요. 예언이 우리를 지배함으로써, 내가 우선이냐, 아니면 예언이 우선이냐를 분명하게 파악하라는 겁니다. 세상은 주의 말씀대로 되지, 내 뜻대로 되지는 않습니다.

내 뜻대로 되는 것을 우리는 뭐라고 하냐면 ‘내가 나를 믿는다’라고 이야기해요. 내가 나를 믿는 것은 어디에 쓸모 있느냐 하면, 세상에 나가서 경제활동 할 때 이게 필요해요. 대인관계에 있어서, ‘내가 장담하는데, 내가 아버지 이름을 걸고 분명히 말한다’라고 할 때는 남과 계약할 때나 누구와 사귈 때 그러죠. ‘나는 너와 결혼하면 네 손에 물 안 묻힐게’ 이런 건 수해 들지 않을 집을 지어줘야 가능하겠죠.

이런 장담, 객기, 허세이고 그럴 때 항상 달라붙는 게 뭐냐 하면 ‘너는 나를 믿어. 나를 믿으란 말이야’라고 타인에게 이야기하는데, 그 말은 평소에 결국 나는 나를 믿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초로 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에게 그걸 문제점으로 해서 말하면 ‘세상은 당신 뜻대로 되는 게 아니고, 세상은 당신 원대로 되는 게 아니다’라고 이야기하게 되면, 뭐라고 반발하느냐 하면, ‘아니, 그럼 내가 나를 믿지, 안 그러면 누구를 믿느냐. 궁극적으로 나는 나를 믿을 수밖에 없게 되어 있지. 나 말고 과연 그렇게 믿을 만 한 사람이 있냐?’라고 따집니다.

그러면 소위 교회 다니는 사람은 말하죠. ‘그러면 당신 믿지 말고 하나님 믿으란 말이다’라고 이야기하면, 그들은 준비했다는 듯이 뭐라고 대꾸하느냐면, ‘하나님 믿으면 내 원대로 해주냐?’라고 나와요. 하나님을 믿으라고 이야기했는데, 하나님을 믿으란 말은 이제 죽었으니까 너는 너를 포기하란 뜻인데, 그 말을 잘 이해를 못해서 ‘이제 내 원대로 해주냐?’라고 이야기해요.

불도가 심한 집안에 어떤 교회 다니는 여자가 시집을 갔습니다. 그러면 그 며느리의 불만을 이렇게 핑계 대면서, 시집에서 핍박을 하죠. ‘네가 교회 나간다고 하나님이 우리 집에 뭐 보태준 거 있냐? 우리 집안에 뭐 보내 준 거 있어? 한번 따져보자. 네가 교회 나간 뒤에 너의 가정이나 우리 가정에 잘 된 게 하나~~라도 있거든 가져와 봐. 없잖아. 믿지 마라. 그거 믿지 마. 이왕 가려거든 나를 위해 기도 좀 해라’라는 식으로 타협하죠.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성경은 말합니다. 인간치고, 하나님 믿었던 사람도 없고 믿는 사람도 없어요. 인간치고 하나님을 못 믿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믿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시편 82편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6~7절에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너희는 범인 같이(보통 사람같이) 죽으며 방백의 하나 같이 엎더지리로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을 이스라엘 백성이 믿어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강제로 끌고 나왔죠. 이게 팩트(사실)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에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닙니다. 강제로 하나님이 불러냈지요. 우리 분명히 합시다. 분명히 해야 해요. 인간치고 하나님을 안 믿습니다. 왜냐 하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마와 한패이고 악마에 의해 물들어서 자기 자신만 믿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너를 죽여줄게. 내가 너를 심판해 줄게”라는 그것을 믿는 거예요. 시편 104편 35절에 “죄인을 땅에서 소멸하시며 악인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실찌로다” 악인을 있지 못 하게 하심을, 필히 죄인을 저주하시고 심판하심을 믿는 거예요. 그걸 믿는 거예요. 그 속에 우리를 필히 집어넣어야 해요.

우리는 언제고 하나님을 믿은 적이 없기 때문에. 왜? 우리는 나를 믿는데 충실했기 때문에 그래요. 대인관계 있어서나, 교회 나와서나, 나는 나를 믿는 거예요. 어떤 행동 하나, 어떤 판단 하나, 우리가 하나님의 지시에 따른 적이 있습니까? ‘나 교회 안 나간다. 나 교회 나간다’라고 그걸 누가 판단한 거예요. 본인이 한 거예요. 하나님이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 본인의 결정에 의해 내려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엉터리 믿음이며, 그것은 믿음도 아닌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직접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겁니다. 찾아오실 때, 하나님이 그냥 나무라고 그냥 책망하려고 찾아오는 게 아니에요. 따로 무슨 일을 하시면서 찾아오십니다. 그 일이 시편 2편 7절에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아까 시편 82편에서 모든 인간이 있는데 그걸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아요. 왜? 다 죽으니까. 죽는 이유도 모르고 죽어요. 죽는데, 시편 2편 7절에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다 죽은 인간 속에 하나님이 자기 새로운 아들을, 유일한 아들을 거기에서 태어나게 만들었습니다. 이 아들은 남자 없이 여자 홀로 임신하는 방식으로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벌써 보통 사람과 다르지요.

보통 아담의 자손들과 다르잖아요. 남녀의 생식능력에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육적인 혈통으로 태어난 게 아니에요. 성령으로 태어났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안 믿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믿고 있기 때문에 유일하게 믿는 분을 이 땅에 따로 보냈습니다. 그래서 안 믿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뽑아서 천국에 넣어주기로,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이 계획을 다 했어요.

그 계획한 것이 영원한 언약이라는 겁니다. 이제 사태가 파악되십니까? 구원이 우리가 믿어서 되는 게 아니에요. 구원받는 이유는 우리가 안 믿는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구원받는 겁니다. 어떤 경우라도 우리는 내 일은 내가 결정하는 거예요. 이 말은, 사람들에게 어떤 호소를 해봐야 소용없다는 거예요. 설교해 봐야 소용없다는 겁니다. 성경 공부해도 소용없다는 거예요.

주님이 직접 그 사람에게, ‘너는 아니거든’이라고 하시는 거죠. 너는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아니라는 거예요. ‘이리 오너라~ 앞을 보자. 저리 가거라~ 뒤태를 보자’ 이리 보아도 아니고, 저리 보아도 이건 백성이 아니에요. 그것을 누가 하느냐. 예수님이 하시는 거예요. 왜? 본인은 신자이기 때문에. 본인은 이미 확정된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본인은 성령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저 인간들은 육으로 태어난 거예요.

이리 봐도 죄인이고, 저리 봐도 죄인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 위해 언약을 줬다고 했잖아요. 그 언약 중 하나가 모세 언약이고, 모세 언약을 받아서 시작한 나라가 바로 오늘 예레미야가 속해 있는 나라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끝, 인류의 마감, 그것도 새 인류 아니고 구(舊) 인류의 마감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언약을 주어서 그들이 몽땅 다 망하도록 했습니다.

그 역사가 바로 구약, 옛날 언약의 역사입니다. 그 망하는 구약을 보면서 그들이 망하게 된 이유를 인간적 관점이 아니고, 언약적 관점에서 발굴해 내는 겁니다. 그들 이스라엘을 마감하는 것이, 곧 인류의 마감 이유와 동일한 이유가 됩니다. 망하기는 망하는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복음이 숫자로 개입되어 있어요.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예레미야 25장 11절에 나옵니다.

“이 온 땅이 황폐하여 놀램이 될 것이며 이 나라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70년이라는 겁니다. 70년. 왜 71년도 아니고 69년도 아니고 70년이냐. 그 70년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망해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인류를 대표해서 언약을 받은 민족입니다. 언약을 받은 민족이 인류를 대표해서 망했다는 것은 인간은 몽땅 망한 거예요.

그런데 그 70년이라는 마감이, 그 일이 있고 난 뒤에, 인간을 망하게 했다는 그 사실, 바로 그 내용이 그대로 하늘나라로 올라가요. 지금 저만 신기한가요? ‘망했다. 망했다. 망했어’라는 것이 그대로 하늘나라에 올라가면 그 나라가 천국이 되는 겁니다. 망했는데 왜 지옥이 아니고, 천국이냐. 예언에 의해서, 말씀에 의해서 망함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이스라엘은 망했지만, 이스라엘을 망하게 한다는 그 말씀은 망한 것이 아니고 완성을 보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쉽지만 좀 극한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의사가 말기 암 환자에게 와서 ‘당신은 6개월밖에 못 살아요. 달력에 표시해 놓아요. 6개월. 내 말이 맞아요’라고 합니다. 그런데 5개월 하고 30일 되어도 멀쩡한 거예요. 아무렇지도 않고. 당구 치고 다니고 멀쩡해요. 5개월 31일 마지막 날, 꼴까닥 죽어버렸어요. 그때 누가 신났느냐 하면 의사 혼자 신난 거예요. ‘봤지? 내 말 맞지? 이 환자 죽은 것이 내 나라 기념물이다. 내 나라에 꽂아놓아야지. 얘는 내 말씀이 말씀대로 정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물로써 나(의사)의 방에 꽂아놓아야지’

만약 그 의사가 예수님이라면 그 사람은 예수님 나라에 영원히 박힌, 천국 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인간 존재보다 뭐가 우선이냐. 언약이 우선이고 말씀이 우선인 거예요. 이걸 제가 좀 극단적으로 예를 들었는데 이걸 순하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황폐하잖아요. 약속의 땅이 황무지가 된다는 겁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황무지가 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뭐냐 하면, 황무지 속에 몸이었던 겁니다. 공간 속에 몸이에요. 공간 속에 몸을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씀을 통해서 이걸 어디에 옮겼느냐 하면, 시간 속에 몸으로 옮겨요. 그 시간이 70년입니다. 70년 속의 몸으로 옮깁니다. 이쪽 공간은 지금 땡벌(땅벌)도 같이 온 겁니다. 우리를 멸망시키러 온 땡벌이죠. 이미 시한부를 당했어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 죽을 때, 모든 인간은 묵시 세계에 놓입니다. 묵시의 세계라는 것은 뭐냐. 이미 무덤이고 오직 우리는 당하기만 하는 세계, 더 이상 희망을 절대로 품어서는 안 되는 세계, 인간의 모든 단결과 협동이 무용지물인 세계, 인간의 지혜가 아무리 발달해도 다 허망하고 허무함으로 끝나는 세계, 이 땅에서는 어떤 인생 스케줄과 계획과 희망도 하나님에 의해서 좌절되게 되는 공간 속에,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여러분은 이게 감사합니까, 슬픕니까? 누가복음 2장에 이걸 다행스럽게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말 이 말씀은, 제가 지금 소개하는 이 말씀은 하도 좋아서 제가 여러 번 합니다만, 29절에 보면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 여기서 좀 길게 끌어야 해요,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여러분 별로 안 평안하죠? 그러면 좀 더 끌어 볼까요? “이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 군요”

제대했다는 말이죠. 30절에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주의 구원을 눈으로 목격한 겁니다. 바꿔치기한다는 주의 말씀이 과연 말씀대로 이렇게 아기 예수로 나타났으니, 제가 놀라자빠지겠다는 뜻이에요. 이 시므온이는 가족이 몇 명이고 한 달 수입이 얼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공간 속의 몸이 아니고, 여호와의 말씀 속에 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씀 속의 몸으로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말씀 속의 몸은 마지막 종말에는 무엇으로 전환되느냐 하면 몸속의 몸으로 전환됩니다. 그 몸이 뭐냐 하면 ‘예수 안’이라는 겁니다. 예수 안의 몸이 되는 겁니다. 천지창조를 하는 공간 속의 몸으로 태어나서, 지금 ‘공간 속의 몸’이라는 거 여러 번 이야기 했습니다. ‘나 하나의 모습으로 태어나~ 저 바다에 누워~’

이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공간 속, 눈에 보입니다. 공간을 왜 부정해요? 눈에 보이는데. 눈에 보이잖아요. 여러분 바닷가에 놀러 가잖아요. 가면 바닷가가 눈에 보이잖아요.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어디로 가느냐. 시간 속의 세계로, 우리는 이미 마감 날짜가 있는 시한부 인생인 그 시간, 의사가 ‘이제 당신은 6개월밖에 못 산다’라는 이 세상은 망했다는 그 망함을 받아들이는 마감 속의 몸이 돼요.

그러면 그 망함을 기다리는 몸이 될 때, 그 몸은 하나님의 예언을 전달하는 증인으로서의 삶이 되는 거예요. 공간 속의 사람들이 희망을 가질 때, 우리는 전혀 부럽지 않습니다. 전혀 부럽지 않아요. 누가 벤츠 타고 다니고 테슬라 타고 다니고 해도 전혀 부럽지 않습니다. 물론 중고라도 있으면 좋긴 하죠. 차 문이 고장 나서 문을 잠그지도 못하고. 차 문 고장 안 나는 차가 있으면 좋겠네요.

그러니까 이 공간 속에서 그 벤츠 타서 뭐 할 건데요?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요? 희망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니까요. 황폐해요. 예레미야의 말씀대로 황폐하다고요. 70년으로 마감이 되는데, 그 70년이 뭐냐. 70년은 그냥 망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오셔서 망하는 절차를 다 보여주시는 그 기한이 70년입니다. 70 이레예요. 이걸 설명하려면 여러 시간 걸립니다만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다니엘에 나옵니다. 다니엘에 9장에 보면, 다니엘이 70년을 이제 알았다는 거예요. 70년 만에 다시 돌아온다는 그 말씀을 이제 알았다는 거예요. 도대체 뭘 알았는지 혼자 좋아해요. 혼자. 9장 2절에 보면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년수를 깨달았나니” 도대체 뭘 깨달았는지 혼자 알지 말고 같이 알자.

그게 70년이 아니고, 70 이레였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다니엘 9장 끝에 나옵니다. 70 이레에 나온다는 거예요. 그러면 70년은 뭐고 70 이레는 뭐냐. 70년 속에 역사가 진행되면서 이방 민족이 개입해서 70 이레로 변하는데, 이방 민족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하나님의 원수에 의해서 역사가 재촉되어서, 이제는 이스라엘만 망하는 것이 아니고 온 민족, 온 이방 나라도 같이 망하는 기간이 70 이레라는 거예요.

그러면 70 이레로 망하는데, 그냥 망한다고 하지 말고 어떤 계기, 사건이 일어나지 않느냐. 그 망해야 할 근거로써의 사건이 아들 예수님을 보내셔서 그 사건의 전조, 징조를 이미 남겼어요. 그 남긴 것이 70 이레 안에 다 들어있습니다. 영화 하나 만드는데 컷(cut)이 보통 1500~2300개 쯤 된답니다. 그런데 감독이 긴박감을 줌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빨리 집에 가야지’라는 이런 다른 생각 못 하게 만들 때는 컷이 4000개의 컷이 들어가요.

장면과 장면 사이를 컷(cut)이라고 합니다. 끊어버리고 장면, 또 끊어버리고 장면, 한 컷 속에 쭉 가는 것이 아니고 자꾸 끊어서 긴박감을 조성하죠. 이 70년에는 컷이 2개의 컷을 두고 있습니다. ‘7 + 62 + 1’ 이게 합쳐지면 70. 두 개의 컷을 줘요. 두 개의 컷을 줌으로써, 성전 망했다는 컷과 그리고 하나님마저 이 땅에서는 제대로 못 살고 죽임을 당했다는 컷.

그래서 하나님의 하시는 말씀은 “그래, 맞지? 이제 너희들 불심판 받아도 할 말 없지? 내 아들 죽였잖아. 그 컷 외에 다른 사건이 뭐 더 필요해. 이 세상이 절망적이라는 거, 지옥이라는 거, 다른 것이 뭐가 더 필요해?” 이 이야기를 모아서 언약이 새언약이 됩니다. 그 새언약이 십자가입니다. 예레미야의 70 이레가 십자가로서 완성이 됩니다.

아까 그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만나고 하는 말이 “이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군요” 도대체 시므온이가 아기 예수를 보면서 무엇을 배웠겠는가. 시편 131편 1절에 보면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이제 뭐 했다, 안 했다는 것도 신경 안 쓸 거예요’

그럼 뭐 할 거냐. 2절에 계속 보면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이거거든요. 젖 뗀 아이가 어미의 품에. 몸 안에 몸이에요. 그리스도가 행하신 그 몸 안에 자기가 안에 있으니까, 예수 안에 들어있는 예수님의 지체가 되는 겁니다.

벌써 시편의 이 저자는 그리고 시므온이는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몸이 되었어요. 저와 여러분은 뭘 증거합니까? 어떤 걸 증거해야 해요? 질문을 바꾸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경우를 당했을 때, 여러분은 편안히 잠들 수 있습니까? 어떤 경우가 아닐 경우에 우리는 평안히 잠들 수 있습니까? 맨날 당신 생각하다가 이제는 편안히 잠든 사람이 있어요.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하다가. 며칠 전에 편안히 잠든 사람. 현철

분명히 본인은 몰라요. 그런데 다른 사람은 ‘이제 평안히 쉬시옵소서’라고 하는데, 그 쉬는 토대가 뭡니까? 예수 안이에요? 현철의 장례식 보니까 제 눈에 띄는 것이 십자가예요. 아마 교회 다닌 거 같아요. 그러면 장례식에 아무나 참석 못 하기 때문에,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장례식은 시므온의 고백으로 가득 찬 장례식장이 되어야 해요. “이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군요”

다시 말해서 설운도가 말하는데 ‘현철 형님, 형님 가신 길이 지금 나의 가는 길이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이런 거. 그러니까 앉으나 서나 주님 생각해야 해요. 앉으나 서나 주님 생각.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앉으나 서나 세상 생각, 그리고 앉으나 서나 지옥 생각밖에 안 해요. 지금 설교 시간이라 노래를 못 부르지만,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원수인 것을, 그리고 원수인 나를, 하나님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다고 우기는 나를, 기어이 말씀으로 때려 잡아주시는 이 은혜, 그러니까 이 말씀을 보면서 안 믿는 나와, 안 믿는 나를 때려잡아서 천국에다가, “내가 말씀대로 너 때려죽인다고 했지?”라고 꽂아주시는 그 말씀까지, 그 두 개를, 내 모습과 믿지도 않는 나를 천국에 보내는 그 두 말씀 다를 우리가 같이 이해하고 해석할 때, 우리 안은 바로 말씀이 그림 그리는 캔버스가 되는 거예요.

주께서 지금도 66권의 말씀을 우리 안에다 다 그림으로 그려내는 그것을 우리는 성도의 인생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편안하게 말씀이 그리도록 내맡기는 반항하지 않는 캔버스가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앉으나 서나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정말 믿는다고 하는 것이 억지같고, 치사한 변명 같고 위선같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것을 알게 하신 분이 곧 십자가에서 나온 능력인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주일오후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쓴 잔  (0) 2024.08.04
언약의 방충망  (1) 2024.07.30
좋은 무화과  (10) 2024.07.14
신 만들기  (1) 2024.06.30
기적은 재앙이다  (0) 2024.0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