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언약의 방충망

아빠와 함께 2024. 7. 30. 19:23

언약의 방충망   

2024년 7월 28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5:12-14

(25:1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칠십 년이 마치면 내가 바벨론 왕과 그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인하여 벌하여 영영히 황무케 하되

(25:13) 내가 그 땅에 대하여 선고한 바 곧 예레미야가 열방에 대하여 예언하고 이 책에 기록한 나의 모든 말을 그 땅에 임하게 하리니

(25:14) 여러 나라와 큰 왕들이 그들로 자기 역군을 삼으리라 내가 그들의 행위와 그들의 손의 행한 대로 보응하리라 하시니라

‘70년을 마치면’. 그렇다면 70년 이후의 역사는 과연 역사일까요? 70년은 이스라엘이 필히 멸망하기로 작정지은 기간입니다. 따라서 70년 이후에는 역사가 아닙니다. 묵시 혹은 언약이 완성입니다. 그리고 그 상황의 펼침입니다. 멸망하는 이스라엘 입장에서 자신의 조국의 멸망을 기뻐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진정 언약의 나라의 완성을 축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언약은 그 안에 역사와 묵시 양면을 다 품고 그동안 작용해 왔던 겁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32장에 나오는 얍복강에서 일어난 일을 봅시다. 야곱에게 있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나 인물은 얍복강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본인은 어디까지나 야곱이며 이 세상 야곱 외에는 다른 야곱이 없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밤에 야곱에게 찾아와 야곱의 자존성을 무너뜨립니다. 이때부터 야곱은 스스로 설려는 자생력이 소용없고 지팡이에 의지해서 움직여야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장애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은 사라지고 이스라엘로 바뀐 채 살아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실은 야곱도 살아있고 이스라엘도 살아있는 겁니다. 몸은 하나인데 이름은 둘입니다. 즉 두 세계가 육체 안에 공존하는 겁니다. 그리고 야곱과 이스라엘은 동일 인물입니다. 야곱의 세계와 이스라엘 세계는 따로입니다.

이 따로된 세계가 한 육체 안에 같이 중첩되어 있는 겁니다.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이 신기함이 역사 속한 인물을 역사 밖으로 구원해냅니다. 언약의 위력과 능력이 이러합니다. 신약에 와서 보면 더 신기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 6:5)

쉽게 말씀드려서, 분명 십자가 지신 분도 예수님 홀로이며 사흘만에 부활하신 분도 예수님 혼자이십니다. 그런데 사도는 외칩니다. 예수님 십자가 죽었을 때 우리 성도도 같이 죽었고 예수님 부활 될 때, 우리 성도도 같이 부활되었다고 말입니다. 에베소서 2:5-에 나오는 말씀이 그 내용입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5-6) 오늘 본문에 나오는 ‘70년 마치고’라는 내용은 그 뒤에 또 다른 역사가 진행된다는 것이 아님을 성도인 자들만 안다는 겁니다.

70년 만이 이스라엘이 망했으면 이스라엘은 그냥 정한 날에 망한 겁니다. 또 다시 이스라엘에 대해서 미련두면 안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망한 것이 언약에 의해서 망했기에 이 망함에 개입된 언약 내부 구조에 눈 여겨봐야 합니다.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자신이 다시 회생한 약속에 눈독 들이지 말고 말입니다.

망한 민족이 망해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겁니다. 야곱은 야곱으로 끝난 겁니다. 또다시 야곱의 회이나 회복을 고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에 바꿨다고 해서 야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이라는 역사와 이스라엘이라는 묵시가 중첩, 혹은 공존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20장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우가 나옵니다. “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천 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계 20:5-7)

왜 이 본문에서 첫 번 사망과 두 번째 사망, 첫 째 부활과 둘 째 부활이 나올까요? 그것은 역사에 속한 세계와 역사 밖의 세계가 언약이 완성되면서 적용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겁니다. 그 예가 바로 ‘천년이 차매’라는 표현입니다. 천년 다음에 또 역사가 진척이 될까요? 성도 입장에서는 그것을 남은 역사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벌레가 많이 끓는 야외에서 얼굴에 방충망이 달린 모자를 쓰고 일하게 됩니다. 이때 방충망 너머로 바깥 세계가 그대로 다 보입니다. 역사가 계속 진척되는 것으로 보일겁니다. 하지만 그 역사의 세계는 실은 언약의 의미가 완료되었음을 드러내는 세계입니다. 즉 사망과 생명이 중첩된 세계로 확립된 겁니다.

빌립보서 3:10-20에 보면,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의미는 땅 자체에서 이미 철수되었습니다.

모든 땅의 의미는 하늘에 의해서 제공되어집니다. 오늘날 성도가 이런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천상회의를 참여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중의 세계를 품고 있습니다. 그는 미리 세상의 끝을 알게 된 사람입니다. 이점에 있어 성도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앞두고 그것을 역사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없는 사람입니다.

방충망, 즉 ‘예수 안’에서 마음껏 세상 역사에게 일어나는 느긋하게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 되어진 모든 일은 이미 인간 손을 떠나고 하나님에게 넘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세상이 언약대로만 진행될 뿐입니다. 골로서새 3:3에서는 성도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3-4) 검찰청이 압수 수색 영장을 법원으로 받아내면서 본격적으로 그 어느 단체라고 수색할 수 있습니다.

이때 검찰직원들이 하는 말은 이것입니다. “모두들 가만 있으세요!” 맞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우리가 새삼 의미를 가마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예수 안에서 살면서 우리에게 달려드는 모든 악한 것들의 최후 발악을 경험하면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도 예수님처럼 두 세상의 경험을 파악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13강-예레미야 25장 12~14절(언약의 방충망)240728-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5장 12~14절입니다. 구약성경 1079페이지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칠십 년이 마치면 내가 바벨론 왕과 그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인하여 벌하여 영영히 황무케 하되, 내가 그 땅에 대하여 선고한바 곧 예레미야가 열방에 대하여 예언하고 이 책에 기록한 나의 모든 말을 그 땅에 임하게 하리니, 여러 나라와 큰 왕들이 그들로 자기 역군을 삼으리라 내가 그들의 행위와 그들의 손의 행한대로 보응하리라 하시니라”

여기 본문에 보면 “칠십 년이 마치면”이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 칠십 년은 이스라엘 나라가 멸망하는 것에 하나님께서 지정하고 확정 지은 기간입니다. 그런데 70년을 마친다고 표현된 것은 이스라엘 멸망 그다음에, 하나님께서 또 일을 벌이시는 것처럼, 그렇게 보이지요. 그러나 70년 마치고 일어나는 이 일은 이방 나라에 관한 일이기 때문에, 중요한 포인트는 이스라엘 멸망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멸망과 함께 무너지게 되면 다른 것은 저절로 무너지게 되어 있지요. 큰 빌딩이 있는데 빌딩이 기초가 약해서 무너졌다면, 그 빌딩 옆에 있던 조그만 방들은 이것이 무너지면, 이것은 깔려서 같이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성경 말씀은 어디를 봐야 하느냐면 이스라엘이 칠십 년으로 끝났고 망했다는 것을 봐야 합니다.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의 언약이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망했다는 것은 드디어 하나님께서 언약을 다 이루었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망하고 언약은 완성되고, 그것이 하나님이 추진해 왔던 일관된 원칙이었습니다. 야곱은 죽고, 이스라엘은 없는 데서 새로 생겨나고, 멋지지 않습니까? 야곱이 있으면 이스라엘은 없어요.

야곱은 야곱이 본인이라는 생각을 하고요, 하나님이 야곱에게 언약을 줄 때는 이스라엘을 내다보며 줬는데, 그동안 야곱이 너무 설쳐대는 겁니다. ‘하나님, 저 복 받았지요? 복 받았지요?...’라고 계속해서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것은 야곱의 자기 환경을 야곱이 조성할 때, 자기가 상실하지 않는 조건 하에, 전쟁 때 군인들 진지(토치카) 만들 듯이, 야곱은 본인을 위해서 진지 구성을 하듯이 언약을 이용했던 겁니다. 내가 상실하지 않은 조건 하에.

그 야곱의 모습은 오늘날 모든 인간의 일상 모습을 그대로 반영해 주고 있습니다. ‘나 안 망하죠? 그죠? 하나님, 나 망할 일 없죠? 그죠?’라고 하면서 ‘하나님, 하나님’ 이름을 부르고 예수님을 찾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께서 70년이라는 언약, 약속, 이 약속을 그냥 이스라엘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들이대는 겁니다. “70년 끝나고 너는 망해”

이걸 쉽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검찰에서 발급한 압수수색영장, 검찰에서 병원을 수색하는데, 이름이 ‘화동 병원’이에요. 화동 병원 들어 봤습니까? 그런 병원 있어요. 드라마 속에. ‘낮과 밤이 다른 그녀’라는 드라마에 보면 화동 병원에 압수수색영장을 발급받아서 수색하는데, 거기에서 일개 직원이 검사도 아니면서 아주 의기 당당하게 사무실로 들어가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말에 굉장히 은혜를 받았는데, ‘그냥 가만 계세요. 그냥 가만 계세요’ 야~~~그 대사가 칼날처럼 꽂히는 거예요. 그냥 가만 계세요. 당신들이 어떻게 사무를 보든, 어떻게 한평생 살아왔던, 당신 가정이 어떻든, 직장도 관계없이, 그냥 가만 계세요. 수색은 우리가 합니다. 그냥 그 자리에 가만히 계세요. 검사가 아니라, 일개 직원이 그 소리를 해서 속으로 굉장히 웃었는데. 지가 뭐라고? 지도 검찰청 직원이라고 그런 것 같아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언약에서 요구하는 언약의 완성은 수색영장입니다. 그냥 가만 계세요. 기침하든 말든. 평가는 주님이 내립니다. 그렇다면 수색을 당하는 그 사람의 평생 살아온 의미는 뭐냐. 이중성에 있어요. 그러니까 야곱이 설쳐서 문제인 거예요. 야곱이 설치니까 하나님의 사자가 얍복강가에 밤에 와서 야곱의 힘을 쪽 빼놓죠.

그래서 이후로 야곱은 지팡이 들고 다니는데, 나중에 요셉을 축복할 때도 지팡이를 앞장세웠어요. ‘나처럼 되어야 복 받는다. 나처럼 무너져야 네가 복 받는 거야’ 그 지팡이를 야곱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놓칠 리가 없어요. 야곱은 그 지팡이를 떠나지 않습니다. 지팡이가 나를 망하게 했고, 그 지팡이 때문에 내가 망한 다음에 주께서 내 뒤에 겹쳐서, 나로 가렸었던 진짜 나로 구원하시는 겁니다.

이름이 바뀌지요.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지금 그 작업을 하늘나라 검찰청 검사들이 와서 성령님 앞장세워서 그 일을 저와 여러분에게 해주시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성경이 그다음부터 무지무지하게 어렵게 되는 거예요. 70년 마치고, 70년 후가 되면, 70년 후는 역사에 속할까, 역사에 속하지 않을까.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70년 후가 역사에 속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이스라엘 본인이 망했기 때문에, 본인과 상관없는 역사의 진해이죠. 70년 후라는 이 내용이 얼마나 난해한지, 요한계시록 20장 끝부분에 보면 비슷한 게 나옵니다. 20장 6절에 보면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이 어려운 이야기를 이제부터 슬슬 시작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중첩되어 있음을 생각해 보세요.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 이 말도 어렵지만 더 어려운 것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은 70년으로 말미암아 망함으로써 망했다는 거예요. 오늘 본문 예레미야에서는 망한 거예요. 요한계시록에서는 뭐라고 하느냐면 여기 성도들은 이미 다 살았다는 겁니다.

망함이 아니고, 망함의 반대말인 이미 하늘에 앉혔고, 이미 다 살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뒤에 역사는 이미 다 구원받은 사람, 성도에게는 역사가 없어요. 성도 입장에서는 역사가 없습니다. 그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면 7~8절에 “천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

그러니까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 하고 천년이 차매, 천년이 끝나고 난 뒤에 사탄이 무저갱 옥에서 풀려나온다는 거예요. 여기서 똑같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천년이 끝나고 난 뒤에 다시 무저갱에서 잠시 풀려나왔던 그 뒤에 역사는 역사인가, 아닌가? 역사인가, 아닌가. 이게 만약에 역사라면요, “다 이루었다가”가 소용이 없어요. 재림까지 못 견디면 잘리는 거예요.

그러나 이게 역사가 아니라면 예수님의 십자가로 다 끝난 거예요. 구원이 끝나버린 겁니다. ‘재림까지 가보고요’라는 그런 말 하면 안 됩니다. 십자가로써 다 이룬 거예요. 이 말을 사도바울의 로마서 6장 5절에서는 어려운 정도가 아니고, 어려운 것보다 훨씬 더 어렵게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이 살아날 때, 성도도 같이 살아났다”(“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예수님 한 분이 십자가 죽고 난 뒤에, 그 한 분이 사흘 만에 십자가에서 부활했잖아요. 이건 누가 봐도 본인만 부활한 거예요. 어느 입장에서. 인간 속에 살아있는 인간 역사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 혼자 죽었다가 혼자 사신 거예요. 모노드라마(monodrama)예요. 혼자 주인공이 된 모노드라마. 그런데 혼자 한 일인 줄 알았는데, 해석을 이렇게 붙입니다.

로마서 6장에서 사도바울은 ‘예수님이 살아난 거 너희들 알지?’ ‘알아요’ ‘그분이 살아날 때 자기 백성도 살아났다’ 자기 백성이 함께 살아났데요. 그 살아난 백성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막 묻고 싶지 않겠습니까? 에베소서 2장 6절에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미 하늘에 앉아 있다는 거예요.

뭐 할 때? 예수 안에 있는 자만이 이 말이 실제 역사의 종결로 현재 그 자체로 적용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인식하고 알고 있다는 거예요.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러면 재림까지 역사가 남아있느냐. 70년 이후가 역사에 남아있느냐. 천년 후에 역사는 어떻게 설명하는가. 제가 아침마다 팔공산 터널 쪽으로 다니며 운동하면서 설교 준비하고 메모하고 하는데, 제일 귀찮은 것이 뭐냐 하면, 자기 동네를 장악하고 있는 날파리들이 있어요.

자기 구역 지나갈 때마다 그냥 날라와요. 뭐 먹을 게 있다고 그냥 달려드는데, 메모는 해야겠지, 이것들은 달려들지, 앞으로 계속 걸어가기는 해야지, 힘든 거예요. 부채질도 해 보고, 이것저것 다 해봤는데 해결책이 안 나서 제가 생각을 했습니다. ‘이건 예수님 재림 때까지 해결 안 된다. 날파리를 떨어낼 방법은 없다’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제 아내가 벌통을 다루는 양봉하시는 분이 쓰는 방충망 달린 챙이 큰 모자를 2개 사 왔어요.

서문시장에서 한 개에 5천 원, 그러니까 2개에 만 원 주고 사 왔어요. 망을 딱 하고 나니까, 나는 망 안에 존재해요. 예수 안이 존재하는 거예요. 망 안이 존재하니까 내 세계와 저쪽 세계가 따로 놀아요. 그리고 저쪽 세계가 다 보여요. 오늘은 일곱 마리, 저쪽은 다섯 마리, 와글와글 달려들어도 망이 있으니까 침범하지 않아요. 여기서 중첩이에요.

역사와 묵시 세계의 중첩, 중첩으로 존재하는 자가 성도이고, 그 성도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육신으로 경험했던 경험에 재탕이 되는 겁니다. 성령 안에서 그걸 재탕하게 하는 거예요. 그걸 이렇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여기 있으면 저기 없어요. 공간적으로 보면. 만약에 여러분들이 지갑을 잃어버렸다. 그런데 지갑을 찾았다. 그러면 지갑이 생각한 장소에 없으면 다른 곳에 있겠지요.

동유럽 다녀와서 선물 하나를 샀는데, 그 선물이 아무리 찾아도 없었어요. 아무리 찾아도 없는 거예요. 오늘 아침에 찾았어요. 신발 안에서. 그걸 보면서 제가 느낀 것은 이 세상에서는, 역사에서는, 그리고 역사의 지평에 놓인 인간에게는 여기 있으면 저기 없고, 저기 없으면 여기 있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 안에서는 여기 있어도 저기 있어요. 왜? 우리 시민권은 하늘에 있으니까요. 이게 중첩입니다.

예수 안이라는 말씀이 그렇게 했고, 예수님이 혼자서 단독자로서 죽었다가 부활했단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 시대와 지금 시대의 역사라는 갭을 그냥 멍청하게 쳐다보면서 ‘좋겠다. 주님 저도 나중에 죽으면 부활 되겠죠? 그래 기다려야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다 보니까, ‘기다려야지, 기다려야지, 기다리는 것을 나는 알고 있어, 나는 기다려야지, 기다리는 것이 믿음이야’라고 하는 그것이 언제 한계에 부딪히느냐 하면 치매 걸릴 때.

‘기다려야지, 기다려야지, 기다려야지...’라고 하다 나중에 치매 걸리면 ‘뭘 기다려야지?’라고 다 잊어버려요. 감히 야곱이 육신을 가지고, 감히 이스라엘 역사를 쥐려고 하는 자체가 애초부터 실패였던 겁니다. 내 믿음으로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받겠다는 자체가 애초부터 실패였던 거예요. 중첩을 모르기 때문에,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 육신의 능력으로 성령의 흉내를, 믿는 자의 흉내를 내기 때문에, 이런 오류에 빠진 겁니다.

역사가 남아있으면, 우리는 계속 기대와 목표와 목적도 계속 내 속에 살아있어요. 그러면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은 뭐냐. 결핍증밖에 없습니다. 제가 오늘 아침에 산책하고 있는데, 전에 말씀드렸던 낚시 모텔 그 앞에 버스 정류장이 있어요. 새벽 5시 30분이 되었어요. 새벽인데, 말쑥하게 차려입은 50대 아줌마가 버스 탈 시간도 없이 바쁘게 뭘 하고 있느냐. 말을 하고 싶어서 아무도 없는데, 버스 오지도 않는데, ‘내가 그렇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네가 그런 말을 하고...’라고 중얼중얼 계속 해서 말을 해요.

제가 걸어가는데, 지나쳐서 멀찍이 가도 계속 들려와요. 아마 내가 오기 전부터 몇십 분 동안 계속했을 거예요. 그게 일종의 정신병이죠. 그 사람이 남에게 해코지하고 그러지 않아요. 말하다가 사람 만나면 가만히 있어요. 그리고 사람 없으면 또 이야기해요. 뭐냐 하면, 평소에 하고 싶은 말을 꾹꾹 눌렀다가, 이걸 안 터트리면 진짜 화병 날 것 같아서 새벽에 일어나서 버스 정류장 앞에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증세를 보니까 예레미야를 닮았어요. 쉽게 말해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임금님 벌거벗었다~~’라는 말을 참을 수가 없어요. 두 개의 세계를 다 아니까, 선지자 예레미야는 천상회의를 참석했어요. 그래서 남들 보기에는 정신병자 같아요. 사람들은 예수님을 귀신 들렸다고 이야기했어요. 그 말 맞지요. 귀신 들린 거 맞아요. 그런데 참을 수가 없어요. 이 진리를.

예수님께서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예수님 자체에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언약을 이루면 우리가 중첩된 세계인 예수 안에, 예수님과 합세가 됩니다. 예수님 홀로 이루셨던 그 죽음과 홀로 이루셨던 그 부활에, 이제는 예수님 자신에게만 단독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고, 모든 자에게, 모든 성도에게 똑같이 그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그 단일 사건으로써 이미 다 보여준 거예요.

그러니까 ‘믿음이 있다, 믿음이 있다’라고 해도 이거는 나의 멸망과 함께 내 믿음도 소멸되어야 해요. 신앙생활은 뭐냐. 내 믿음이 소멸되는 거예요. 제가 어떤 사건이 생각났는데, 연도를 찾아보니까 2005년이었어요. 11월이고. 억장이 무너지는 일을 뉴스로 보고, 제가 굉장히 분노했던 일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부산 천성산 고속도로에 터널 공사를 하는데, 어떤 여자 중(스님)이 혼자 데모(시위운동)하는 거예요.

데모하는 이유가 뭐냐. 도롱뇽이 죽는다고 데모했어요. 터널 공사하면 도롱뇽이 살길이 없어서 터널 공사를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소실된 공사비용이 145억 원이에요. 불교가 막가도 저렇게 막가요. 그 여자 중이 환경문제 생각하고 도롱뇽 생각하는 여자 중은 뭐가 문제냐 하면 그 마음에 터널이 안 뚫렸어요. 지금 언약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로 구원되어야 하는 우리가, 계속 야곱이고 싶어 하는 이것은 말씀이 와서 “너는 이미 멸망 당했다”라는 터널을 뚫어줘야 해요.

터널을 뚫어주는 것은 십자가만 한 것이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우리는 자꾸 십자가를 믿으려고 하고, 부활을 믿으려고 해요. 부활 믿고 십자가 믿는 것은 마치 우리 몸에 양념 소스 바르는 것밖에 안 돼요. 양념 반, 프라이드 반처럼. 터널 뚫리지도 않았는데 자꾸 신앙인 흉내를 내는 거예요. 속이 뚫려야 하는데. ‘네, 압니다. 부활 알고, 십자가 복음 알고’

뭐 그것만 알겠어요. 성경도 알고, 달달 외우기도 하고. 터널이 안 뚫리니까, 터널보다도 도롱뇽 생각하죠. 사실은 그 여자 중은 도롱뇽이 아니고, 그만큼 환경 생각하는 우리 불교에 신자가 많이 왔으면 좋겠다는 자기 불교 생각한 거예요. 불교. 이것이 바로 아직도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예레미야는 이중세계를 보고 온 사람이에요. 천상회의입니다.

예레미야가 외치는 이것이 뭐냐. 이스라엘은 이미 망했어요. 그다음 망할 자가 뭐냐. 바벨론, 앗수르, 이방나라, 로마, 그리고 올림픽 하는 모든 나라 전부다, 이것은 그냥 망하는 것을 복음의 방충망 안에서 그것을 신나게 보시기 바랍니다. 그걸 보면서. 채상병 뭐가 통과 하고 안 되고, 김건희 어떻게 될지, 그런 거 걱정하면서 보지 마시고, 걱정하는 척하면서 신나게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메달 몇 개 더 따야 하는데, 지금 몇 개이고, 그런걸, 방충망을 통해서 죽은 자들의 파티, 놀이문화, 나름대로 목표와 기대에 자기 청춘을 다 바치는 그 짓거리를, 우리는 예레미야의 심정에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느니라”라는 말씀의 입장에서, 골로새서 3장 같으면 우리는 이미 죽었고 우리 생명은 하늘에 있는 입장에서, 이왕 사는 거, 원 없이 방충망 쓰시고, 귀신 몇 마리, 일곱 귀신이 방충망에 붙어 있는 것을 즐기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믿는 흉내, 믿는 척하는 이런 짓을, 우리 육신이 이런 짓을 하는 것을, 이제는 이중의 세계 안에서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나라는 인간이 기껏 그것밖에 안 된다는 것을, 이미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안목을 가지고 즐길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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