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악의 상대성

아빠와 함께 2024. 8. 18. 18:46

악의 상대성 

2024년 8월 18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6:1-3

(26:1)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의 즉위 초에 여호와께로서 이 말씀이 임하니라 가라사대
(26:2) 나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여호와의 집 뜰에 서서 유다 모든 성읍에서 여호와의 집에 와서 경배하는 자에게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게 한 모든 말을 고하되 한 말도 감하지 말라
(26:3) 그들이 듣고 혹시 각각 그 악한 길에서 떠나리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의 악행으로 인하여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려 하던 뜻을 돌이키리라

하나님의 집에서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집이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회막이었고 그 이후에는 성전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악에서 돌아서라”는 겁니다. 악이 뭔데요? 인간들이 악이 뭔지를 모르는 이유는 아직 자신들이 살만하기 때문에 자기 것을 지키는데 급급하다 보니 악을 자기 여건과 연관시켜 이해하게 됩니다.

즉 자신의 삶이 불편해지는 것을 악이라고 여기고 자기 삶이 여유가 생기고 만족스러므로 선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선악 인식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인간이 한계라면 하나님께서 진정한 선과 악을 가르치기 위해 언약을 위한 자의 환경을 광야로 만들어 버립니다. 모세 때는 집단적으로 이스라엘이 전부 광야로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이미 약속의 땅에 들어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다윗을 광야로 보내버립니다. “ [다윗의 시, 유다 광야에 있을 때에]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시 63:1)

왜 하나님께서 다윗을 광야로 보냅니까? 그것은 광야에서 비로소 인간은 ‘자기를 위한 삶’ 자체가 그 끝장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더는 나를 위한 삶’이란 애초에 없었음을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질문이 바뀝니다. “하나님, 저 어떻게 하면 살아요?”에서 “하나님, 저를 아직 살려두십니까?”로 말입니다.

언약을 받게 되는 인물을 젖과 꿀이 흐르는 풍족한 환경이 아니라 다른 환경으로 바뀌는 것은 선과 악에 대해서 새로운 개념 기준을 잡아주기 위함입니다. 수학에서는 벡터와 스칼라라는 두 종류의 물리량이 있습니다. 이 둘의 차이점은, 좌표에 따라 변하는 것은 벡터이지만 좌표가 바꿔도 바뀌지 않는 물리량이 스칼라입니다.

곧 스칼라는 절대적이라는 겁니다. 환경 따라 바뀌는 약한 인간의 처신 모습과는 전혀 다릅니다. 광야에서, 즉 인간이 스스로 살 형편에 못되는데서 절대적인 선과 악의 기준이 나타납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이나 세례 요한도 광야에 나가신 적이 있습니다. 수시로 변하고 날마다 변하는 인간을 상대하기 위한 일이 예수님의 일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바뀌지 않는 악마를 상대로 하시는 일이 예수님의 일이요 그 일의 완성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예수님 “다 이루었다”고 외쳤습니다.(요 19:30) 따라서 광야가 아니라 살만한 환경에서 인간들은 나름대로 선과 악에 대해서 신경을 쓰는 이유는, 결코 하나님을 위함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을 살려내고자 하는 벡터적인 시도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이러한 시도가 결국 예수님의 영원한 선, “다 이루었다‘를 가리는 결과를 낳습니다.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공간 속에서의 이동속도와 시간 속에서의 이동속도의 합인 빛의 속도가 일정하므로 두 덧셈항의 한쪽이 커지면 다른 한쪽은 작아지게 된다. 가령 한 곳에 정지해 있는 물체는 ’공간 속에서의 이동속도‘가 0이므로 남은 ’시간 속에서의 이동속도‘가 빛의 속도와 같아집니다.

반면 움직이는 물체는 ’공간 속에서의 이동 속도‘가 0보다 크므로 그만큼 ’시간 속에서의 이동 속도‘는 빛의 속도보다 느려지게 됩니다. 그래서 정지 상태에 있는 우리가 보기에 움직이고 있는 시계는 정지해 있는 시계보다 느리게 됩니다. 더 나아가 ’공간 속에서의 물체의 이동속도‘기 빛의 속도와 같아지면, ’시간 속의 이동속도‘는 0이 되어 우리가 보기에 그 물체의 시간은 멈추게 됩니다.

이는 곧 자기가 자기를 살리겠다는 설쳐대는 그 행위들이 예수님 ”다 이루심“을 모독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그 일을 하는 이유는 뭘까요? 현대 과학은 과거 인류가 상상도 못했던 기묘하고 놀라운 것들을 우주에게 발견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블랙홀이다. 극단적인 중력붕괴의 과정을 거쳐 형성된 블랙홀은 기능이나 작용에서도 다른 천체들과 크게 다르다. 빛조차 빠져나오지 못해 우주에서 가장 어두운 블랙홀은 역설적이게도 우주에서 가장 밝은 빛의 원인이 됩니다.

궤이사 (블랙홀이 주변 물질을 집어삼키는 에너지에 의해 형성되는 거대 발광체로서 '준성(準星)'이라고도 하며 지구에서 관측할 수 있는 가장 먼 거리에 있는 천체이다)는 태양보다 1조 배 밝은 데 중심에 큰 블랙홀이 있기 때문입니다. 블랙홀의 강한 중력 때문에 주의 물질들이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소용돌이치면서 블랙홀로 흡수되어 마찰로 엄청나게 뜨거워져 격렬하게 빛나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 속에서 인간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지옥으로 끌어당기는 악마의 힘이 있기에 여기서 인간들은 자신이 망가지지 않기 위한 불안과 걱정으로 더욱더 착하고 바르게 살아서 기어이 천국에 들어가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의 ”다 이루심“은 안전에도 없고 열심 내는 자신의 종교 성과에 전생을 겁니다.

이처럼 인간은 스스로 악에서 돌아설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근원적인 악이 있음을 가리는 방식이 ’옷‘입니다. 창세기 27:15에 보면, “리브가가 집 안 자기 처소에 있는 맏아들 에서의 좋은 의복을 취하여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히고” 즉 아버지 이삭이 복을 주는 자리에서 리브가는 옷을 가지고 아들의 변장시키면서 리브가 자신의 본심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요나 3:5-8,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가로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옷이란 자기 속에의 자기를 힘들게 하는 괴물의 잡아 당김을 감추기 위한 용도로 입는 겁니다. 창세기 3:7의 그 취지가 요나서에 나오는 니느웨성 사람에게는 반대로 작용합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이미 자신이 이미 심판받아 죽은 자임을 인정하는 옷으로 전 니느웨 성 사람들이 실시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내릴 재앙을 거두십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주신 내용도 바로 그것입니다. ’악에서 돌리키면 재앙도 거두어 들이겠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은 간단합니다. “죽여버리겠다’입니다. 이로서 이들은 자신들이 살겠다는 것이 곧 악임이 밝혀집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지옥같은 세상에 살면서 더불어 살 생각말고 십자가 복음에 감사하고 즐거워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16강-예레미야 26장 1~3절(악의 상대성)240818-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6장 1~3절입니다. 구약성경 1079페이지입니다.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의 즉위 초에 여호와께로서 이 말씀이 임하니라 가라사대, 나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여호와의 집 뜰에 서서 유다 모든 성읍에서 여호와의 집에 와서 경배하는 자에게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게 한 모든 말을 고하되 한 말도 감하지 말라, 그들이 듣고 혹시 각각 그 악한 길에서 떠나리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의 악행으로 인하여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려 하던 뜻을 돌이키리라”

하나님과 사람의 만남의 장소로써 하나님에 의해서 지정된 장소가 옛날에는 회막(會幕)이었고, 예레미야 당시에는 성전이었습니다. 하나님 쪽에서 인간을 만나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만남이 성사되는 조건도 이거는 사람이 정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서 제공된 겁니다. 그러면 그 조건이 뭐냐. “악을 가지고서는 인간이 나를 만날 수가 없다”라는 겁니다. 악함을 가지고는.

그러면 이 이야기를 듣고 ‘우리가 악하지 않으면 되지. 악하지 않다면, 우리가 악이 없다면 언제든지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네’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악한 인간이 생각하는 그 악이 진짜 악이 아니고 거짓된 악이라는 겁니다. 뭐냐 하면 본인이 악하다는 생각을 인간은 하지 않고 악한 조건에 의해서 내가 악해졌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악한 조건을 어떻게 인간이 아느냐. 내가 사는 게 악한 것이고 편리하면 악하지 않다는 의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악에서 돌아서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데 도무지 악이 뭔지를 모르는 거예요. 그거는 왜 그러냐 하면, 우리가 아직도 여유 있는 환경 속에 있어서, 항상 그 환경에서 사는 버릇 때문에, 살만하면 인간은 그다지 자신을 악하다고 여기지 않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래서 제가 하는 취지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 시편 63편 1절을 보겠습니다. 1절 위에 “다윗의 시, 유다 광야에 있을 때에”라고 되어있어요. 지난 수련회 때 했는데, 모세는 광야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부터는 약속의 땅에 가면 광야의 환경을 떠난 걸로 우리가 알고 있는데, 다윗은 약속의 땅에 왔는데 광야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이제는 약속의 땅이기 때문에 광야를 기피하고 이제는 광야의 삶이 끝났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약속의 땅에 있는 광야로 보내버리는 그런 인생을 살도록 만들어버려요. 그다음 광야가 뭐냐 하면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과 세례요한 빼놓고 나머지 사람들은 광야 아닌 젖과 꿀이 흐르는 목축지에서 사는데, 하나님께서는 이 세례요한과 예수님을 의도적으로 광야로 보내버려요.

왜냐 하면 광야에 가야, 과연 살만한 이유가 내 쪽에 있지 않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지금 여기 존재하는 거, 내가 사는 이유가 광야에 딱 오니까 그때부터 질문이 뭐냐. ‘하나님, 살려주세요’가 아니라 ‘이 광야에서, 모든 게 죽은 땅에서 왜 아직도 나는 살아있지? 이거 이상한 일 아니야? 참 이상한데...내가 왜 살아있지?’

노골적으로 더 쉽게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킨다면, 세상 모두가 복음을 몰라요. 다 복음을 모르면 저와 여러분도 복음을 몰라야 해요. 복음을 몰라야 하는데 왜 이 지옥 세계에서, 다들 모르고 있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 이 복음을 왜 굳이 우리가 지금 알게 되었습니까? 아, 이거 지금 ‘우리가 지금 알게 되었습니까?’라는 이 질문을 황공스럽고 유감스러워서 함부로 말을 못하겠는 거예요.

어쨌든 복음 안다고 치고, ‘모르는 게 정상인데 왜 우리는 복음을 알아야 합니까?’라고 물으면, 그래야 네가 광야에 있던 다윗과 동일한 안목으로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과 동행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알 리가 없죠. 저는 여러분 인생을 모르니까. 어쨌든 간에 이제부터는 ‘왜 우리가 삽니까?’라는 것이 아니라, ‘왜 내가 복음을 알아야 합니까? 이 복음 좀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가면 안 되겠습니까? 안 되겠죠?’

복음이 내 속에서 떨어져 나갔을 때,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해 보세요. 그것을 왜 생각해야 되는가. 비로소 복음이 떨어져 나갔을 때, 복음이 있을 때와 떨어져 나갔을 때의 차이점이 다윗이 광야에 있음으로써 비로소 악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예수님이 알고 있는 악, 마귀가 알고 있는 악, 세례요한이 알고 있는 악, 이것은 그동안 내가 살고자 하기 때문에 가려졌던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뭐 돈푼이나 있고 살만 하지만, 이 세상이 점차 점차 복음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세계예요. 그냥 돈만 아는 세계입니다. 복음은 인기 없어요. 환영받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면 이것을 인간은 수학적으로 ‘변화량(deriviate)’이라고 합니다. 변화량을 수학에서 벡터(Vector)라고 이야기해요. 여러분도 고등학교 때 배웠을 텐데, 세월이 많이 지났지요.

벡터양의 반대말이 스칼라(scalar)양인데, 수학 시간이나 물리 시간에 벡터나 스칼라는 어떻게 정의 내리느냐 하면, 좌표가 바뀔 때 물리량이 같이 바뀌는 것을 벡터양이라고 하고, 좌표가 바뀔 때 변하지 않는 것을 스칼라양이라고 합니다. 그걸 절대량이라고 합니다. 내가 나이가 들고 환경이 바뀌어도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이 내 안에 꽂혀 있을 때, 그게 바로 복음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광야에 있을 때는 편한 것을 원하고, 편할 때는 광야에 안 들어가려고 애쓴다는 것은 이건 절대량이 아니고 이건 자기 자신이 절대자이고 신(神)인 것처럼 깝쭉대고 있는 모습인 거죠. 그러니까 악이라는 것은 내가 불편하면 악이고 내가 잘되면 이건 선한 것이고, 이렇게 오해를 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다들 여호와의 집으로 오라고 해.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그 집에서 내가 이야기할게”라고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줬습니다.

“너는 악에게서 돌아서”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중요한 것은, 이 말을 예레미야 26장에서 했을 때, 그때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들었을까요, 안 들었을까요? 26절 그 뒤에 보면 ‘예레미야 죽여버릴래’라고 이렇게 나온 거예요. ‘우리가 예레미야 죽이자’ 우리를 정신적으로 불편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사람이 긍정적이어야 하지 그렇게 불편하게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 사람들이 또 뭘 모르느냐 하면 블랙홀을 몰라요. 아직 그 당시는 과학이 발달을 안 했으니까도 모르지만. 블랙홀(black hole)이라는 하는 것은 이런 겁니다. 퀘이사(Quasar)는 태양보다 1조 배 밝은 데 중심에 큰 블랙홀이 있기 때문입니다. 블랙홀이 어떤 것이냐 하면, 별이든 뭐든 물질이 있는 것은 모조리 끌어당겨서 구멍 속으로 집어넣는 거예요. 강력한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 것이 블랙홀이에요.

세상에 있는 모든 그 근처에 있는 물질이 거대한 구멍 속으로 끌려가면서 마찰하는 에너지, 거기서 불빛이 나와요. 철사를 벽에다 긁으면 불꽃이 튀는 것처럼, 그렇게 안 끌려가려고 버티면서, 버티는 그것이 빛인데 그게 태양의 1조 배예요. 그러니까 정리하면 블랙홀의 강한 중력 때문에 주의 물질들이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소용돌이치면서 블랙홀로 흡수되어 마찰로 엄청나게 뜨거워져 격렬하게 빛나는 겁니다. 그 별들은 긁히지만 결국 모든 물질은 검은 별 속에 고요히 잠깁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빛이 나오는 별이 있다는 말은 이 우주에서 가장 큰 블랙홀이 있다는 뜻이에요. 악이 있기에 사람들은 악을 배경으로 해서 검은 악을 감추는 용도로써 인간은 빛을 찾는 척하고 있는 겁니다. 너무나 강력한 악마의 힘이 인간 속에 있기에 인간은 기껏 ‘착하게 살면 복 받겠지’라는 말이 나오는 거예요.

예수 믿는 착한 일에다가, 그것 가지고는 모자라고 하늘나라 상급이 있으니까 교회 다니면서 더 착한 일 해야 한다는 거예요. 오늘 10시에 보니까 저에게 어떤 분이 전화했어요. 어떤 사람이 하늘나라에 상급이 있다는데, 너는 왜 그렇게 사냐고 자기에게 나무라듯이 전화했는데 어떻게 답변하면 되느냐고 전화했어요. 전화기를 안 가져가서 나중에 봤는데, 그런 내용이 있어서 통화를 했어요.

사람이 왜 교회 다니는 착한 일, 그리고 예수 믿는 착한 일, 그리고 성경에 나온 대로 바르게 사는 착한 일을 하는가. 안에 블랙홀, 악마가 들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악마가 그것을 시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착한 일 하지 않으면 지금 사는 생활이 전보다 더 불편해질 것 같아서 무서운 거예요. 공포예요. 그 무서움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바르게 살면 약간의 위로가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의 해결책은 뭐냐. 주님의 해결책은 좌표가 바뀌었다는 겁니다. 인간 중심의 악마가 설정한 그 (X,Y) 좌표가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좌표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성경에서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바뀌었는가. 예수님의 죄사함을 위해서 너는 살아가면서 계속 숨어있는 죄가 나와야 하는데, 그 죄중에 뭐냐. 교회 다니면서 바른 사람 되고, 행복한 사람 되고, 착한 사람 되어서 천국에 도달한다는 그 죄도 바로 십자가를 가리는 죄가 된다는 것을 들춰내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요구하는 것은 뭐냐. 내가 다 이루었기 때문에 너는 아무것도 할 필요 없이, 십자가의 권능이 인도하는 대로, 말씀이 인도하는 대로, 어떤 말씀을 봐도 우리는 이 말씀을 못 지키고, 오히려 말씀에 대해서 화내고 있는 그러한 남은 육신을 지니고 있음을, 우리 삶의 환경을 통해서 이걸 드러내면 되는 겁니다. 그것도 웃으면서. 이건 찡그리면 성령 못 받은 거예요.

이걸 긴장하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긴장하는 것도 성령 못 받은 거예요. 이걸 즐겁고 편하게 가벼운 마음으로, 전혀 공포심 없이, ‘내 주제에 그게 그렇지. 나에게서 뭐 좋은 것이 나올 수 있느냐’라는 식으로 살아가는 그 자유, 그게 우리 안에 성령이 들어있다는, 십자가 들어있다는 증거입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이 다 아는 이야기, 학교 다니면서 다 배워서 다 아는 이야기를 할게요.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1879년~1955년,독일 태생의 이론물리학자)의 상대성원리가 뭐냐면 공간 속에서의 이동 속도와 시간 속에서의 이동 속도의 합인 빛의 속도가 일정하므로 두 덧셈항의 한쪽이 커지면 다른 한쪽은 작아지게 된다는 이론입니다. 다~~아는 이야기죠.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공간 속에서의 이동 속도와 시간 속에서의 이동 속도의 합인 빛의 속도가 일정하므로 두 덧셈항의 한쪽이 커지면 다른 한쪽은 작아지게 된다’

가령 한 곳에 정지해 있는 물체는 ‘공간 속에서의 이동속도’가 0이므로 남은 ‘시간 속에서의 이동속도’가 빛의 속도와 같아집니다. 공간 속의 물체가 이동하게 되면 그만큼 빛의 속도가 마치 느려지는 것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움직이는 물체는 ‘공간 속에서의 이동 속도’가 0보다 이로 그만큼 ‘시간 속에서의 이동 속도’는 빛의 속도보다 느려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정지 상태에 있는 우리가 보기에 움직이고 있는 시계는 정지해 있는 시계보다 느리게 됩니다. 더 나아가 ‘공간 속에서의 물체의 이동속도’기 빛의 속도와 같아지면, ‘시간 속의 이동속도’는 0이 되어 우리가 보기에 그 물체의 시간은 멈추게 됩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이 싸대면 십자가가 안 보인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설쳐대면 십자가는 점점 더 멀어지는 거예요.

왜? 절대적이니까. 다 이루었으니까. 확정되었으니까. 악은 뭐냐. 악은 십자가를 가리는 것이 악이에요. 그 악을 누가 도모하느냐. 우리가 도모하지요.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과 이미 계약이 끝났는데, 우리가 마귀에게 속아서 자꾸 ‘내가 이러다가 망하는 것이 아닌가. 이러다가 내 인생이 완전히 무너지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살다가 내가 죽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살면 내 인생 건질 게 없는 것이 아닌가’라는 식으로,

맨날 우리가 걱정 근심이 늘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을 안 무너지기 위해서 누구를 찾는가. 같은 인간들에게 찾는 거예요. 그들은 안 움직입니까? 그들의 움직임은 우리의 움직임을 이용하려고 하는데요. 윤석렬, 이재명, 그런 사람들이 왜 활동합니까? 대한민국 국민이 어떻게 살려고 애쓰는가를 보고 그것을 이용해서 자기들이 살려고 하는 거예요.

배드민턴 협회 회장이 안세영이를 왜 그렇게 이용하는데요? 자기가 그 자리 유지하려고 그렇게 하잖아요. 어떻게 배드민턴 협회 회장만 그렇습니까? 모든 인간이 인간을 만나는 이유가 뭔데요. 네 덕에 내가 안 무너지고 싶다는 그 이야기잖아요. 내가 안 무너지고 싶다는 거예요. 그게 교회 와서 예수님을 상대로 하는 것과 똑 마찬가지예요.

참 아인슈타인이 고마워요. 그냥 정지해 있어. 그러면 빛의 속도가 그대로 표현되는데, 만약에 내가 움직이면 그만큼 빛의 속도가 늦어져요. 빠르게 운동하는 쪽은 빛의 속도가 늦기 때문에 시간이 늦어져요. ‘주님이 누구지? 십자가가 뭐지?’ 우리가 평소에 내가 살려고 애쓸 때는요, 그 십자가나 주님이 누구인지 성경 말씀이 뭔지 그런 것들이 다 귀찮아요.

안 듣고 싶고, 안 보고 싶고, 잊고 싶어요. 내가 사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에. 그래 놓고 교회 와서 이렇게 합니다. ‘하나님, 제가 혹시, 혹~~시, 혹시 잘못한 거 있으면 이 죄를 사해주셔서 앞으로 내일부터는 내 인생을 편하게, 만사형통하게 하옵소서’라고 새벽기도 와서, 여기는 새벽기도 하지도 않죠. 와도 귀찮아요. 겨울에 괜히 기름값 나가요.

그래 놓고 악이 뭔지도 모르면서 ‘다~~내 탓이요. 내가 잘못했습니다’라고 이러고 있는 거예요. 뭐, 거래하겠다는 거예요, 흥정하겠다는 거예요? 그냥 하나님이 뭘 원하시는가, 자꾸 내가 뭘 원하는지 그런 걸로 주님 원하시는 거 가리지 마시고, 하나님이 뭘 원하시는가, 그것이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장소에서, 십자가에서 그걸 계속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뭘 원하시는가. 에베소서 4장 8절에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Therefore it says, "WHEN HE ASCENDED ON HIGH, HE LED CAPTIVE A HOST OF CAPTIVES, AND HE GAVE GIFTS TO MEN." 잡아당긴다는 이 말이죠. 하나님이 원하는 건 뭐냐. “그냥 가만히 있어. 내가 다 해줄게. 내 안에 둥지를 틀어. 틀어. 내가 다 해줄게”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둥지가 싫어요.

뭘 원하느냐. 내가 만든 내 둥지를 우리는 포기하기 싫어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께서는 말씀 특공대 보내서 내 둥지를 헐어버리죠. 그러면 우리가 죽겠다고 난리도 아니에요. ‘제가 뭘 잘못했는데 이렇게 생활이 어렵고 내 뜻대로 안 됩니까?’라고 이렇게 하는데, 그 점에 대해서 성경 두 군데 설명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27장 15절, “리브가가 집안 자기 처소에 있는 맏아들 에서의 좋은 의복을 취하여 작은아들 야곱에게 입히고” 리브가가 쌍둥이를 낳았는데, 자기는 큰아들보다 둘째 아들 야곱이 마음에 드는 거예요. 그래서 리브가는 야곱을 형 에서로 변장시키려고 큰아들 옷 중에서 좋은 옷을 골라서 작은아들 야곱에게 입힙니다. 이게 뭐냐 하면 옷은 인간 내부를 가리는 역할을 해요.

그래서 옷을 입힘으로써 옷 입힌 자의 마음에 흡족한 대상자가 되는 겁니다. 어차피 인간은 자기 속내를 안 드러내요. 그렇다면 엄마가 아들의 마음을 고치고 자시고 할 권한도 능력도 없어요. 그럼 엄마가 자식에게 해줄 것은 뭐냐. 엄마가 자기의 성의를 표하는 겁니다. ‘오늘 꼬까옷 입자. 좋은 옷 입자. 이게 어미 마음이다’라고 하면서 좋은 옷을 입히는 거예요.

그러면 그렇게 형 옷을 입히는데 왜 하필 형 옷이냐. 형은 싫은 거예요. 큰아들 싫고 둘째 아들 좋아서, 큰아들 좋은 옷 중에서 둘째 아들 입혀서, ‘네가 딱 내 마음에 든다’라는 엄마의 심정을 아들에게 입혀놓으면 아들은 아들 자기의 본연의 것은 나타나지 못하고, 옷을 통해서 엄마의 사랑을 드러냄으로써 엄마는 그 사랑을 자기 아들을 소유 삼아서 받아내는 겁니다.

옷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그런 기능은 일반적이죠. 자기를 감추고 타인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 주는 그것이 옷입니다. 그런데 그 옷이 어떻게 되었는가. 요나서 3장 5~8절에 보면 이렇습니다.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대소 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가로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찌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그러면 이 말은 무슨 뜻이냐. 그동안 내가 내 자체를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옷을 입었던 그 자리에 옷을 뭘 입히냐 하면 죽은 자에게 입히는 베옷을 입히고, 물도 마시지 않고 밥도 먹지 않고, ‘이미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 맞습니다’라고 자기 죽은 것을 인정하는 모습을 할 때, 주님께서는 그 죽은 니느웨성에 은혜를 주셔서 그들은 다시 살려냈습니다. 심판을 철회한 거예요.

그걸 오늘 본문에서는 ‘돌이킨다’라고 하신 뜻이에요. 오늘 예레미야에서 “만약 너희가 악을 알고 떠나면 재앙을 돌이키리라”라는 이런 뜻이거든요. 오늘 본문 26장 3절에. 이미 그것은 요나가 했거든요. 쉽게 말해서 옷은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용도, 남에게 잘 보여서 나에게 이익이 오는 그런 계산 자체를 벗겨버리고, 하나님 앞에 설 때, 십자가 앞에 설 때, 우리는 진짜 내 모습이 어떠한 모습인가를 드러내는 그것을 하라는 겁니다. 어디서? 하나님의 집에서.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집은 바로 말씀이 선포되는 곳이 하나님의 집이겠지요. 말씀이 들어와야 우리가 성전이 되니까요.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뭐냐. 십자가 이야기예요. 맨날 교회 가서 잉잉 울면서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라고 그렇게 우는 것도 수상해. 우는 것도 울고 나서 뭐 달라는 뜻으로 느껴진다는 말입니다. 울 것이 아니고 속이 시원해야죠.

그동안 내가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꾸미는 위선자로서 사는 것이 이제 지긋지긋하고 스트레스받는 거예요. 우리 자아를 우리가 감당 못 하니까 십자가에 그냥 또 매답시다. ‘그냥 알아서 해주세요’라고 나를 십자가에 매달 필요도 없이 십자가가 그냥 우리 안에 들어오죠. 그것이 뭐냐. 주께서 홀로 다 이루신 그 일입니다.

그동안 그 어려운 상대성원리에 의해서 내가 속도를 너무 냈어요. 빛의 속도로 움직였어요. 그냥 절대적인, 주께서 다 이루었다는 그 시간 속도로 그냥 맡기시고 그냥 쭈그려 앉아 있으면 비로소 예수님께서 그동안 얼마나 은혜를 주고 있는지, 사랑을 주고 있는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좌표 바뀐 것도 모르고 세상이 각자 자기 위대하고 자기 성공하면 되는 세상인 줄 알았는데, 이게 바로 악한 지옥이었습니다. 언제까지 지옥에 웃고 지옥에 울 수는 없습니다. 주여, 십자가 앞에서 다시 한번 왜 세상이 지옥인 것을, 이제는 흔쾌히, 즐겁게, 기쁘고 웃으면서 세상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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