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제6강-신명기: 말의 세계와 말씀의 세계
(강의:이근호 목사)
교재 5페이지 밑에서 3번째 줄에, “이에 그들이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한다.” 이 말씀을 제가 한번 적어보겠습니다.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나의 아버지, 예수님의 아버지도 알지 못한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했거든요. 요한복음 8장 19절에서. 자, 이 말을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하게 되면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반발을 나올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반발을 한번 뭔지 생각해보세요. 반발을 생각해야 될 이유가요, “예수님 말씀은 그냥 믿으면 되지 왜 반발을 해?”하는데 우리는 말의 세계에요. 말씀의 세계가 아니라 말의 세계입니다.
말이라는 것은 우리 의미를 포기하지 않고 유지되고 있는 세계가 말의 세계고 예수님의 말씀의 세계는 그런 인간에게 자기 의미를 붙들고 있는 인간에게 맞아 죽은 분의 세계에요. 그게 말씀의 세계에요. 이미 틀어졌어요. 이게 연결이 안 되는 걸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이게 확정이 되어 있는 겁니다. 인간에게 어리석다는 것이 이게 구원의 능력이에요.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어리석다는 인간의 지혜보다 어리석게 보이는 십자가가 유일한 구원의 지혜요 구원의 능력이 된다는 겁니다. 이걸 뭐냐? 말로 구성되는 현실과 말씀으로 구성되는 현실이 대치 관계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걸 그대로 적용시키면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나의 아버지도 알지 못한다고 예수님이 했을 때 그 당시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서기관들은 이렇게 반발하는 거에요. “내가,”인간입니다. “안다, 모른다에 기준을 왜 예수 당신이 정하냐?” 이 말이에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왜 남에 대해서 함부로 평하냐 이 말입니다. 나는 나름대로의 심사숙고해서 안다, 모른다를 냈는데 그러면 예수 당신이 너는 알아도 안게 아니고 너는 네가 모르는 게 당연하다는 어떤 기준을 당신 쪽에서 먼저 제시하고 그 제시된 기준, “아, 이것 보니까 모르는 게 맞네.”라고 이야기해 줘야 그다음에 나는 예수님 당신이 하는 말에 대해서 수긍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거에요. 인간의 논리가.
지금 기준 문제거든요. 말의 세계와 말씀의 세계가 서로 일방적인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는 거에요.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러면 너희가 알지 못하고 하나님도 알지 못한다. 이것이 정당하다면 이게 정당한 기준을 제시 해야돼요. 이 기준은 어떤 기준이냐 하면, 모든 역사를 끝까지 지적할 수 있는 기준이어야 돼요. 모든 역사를 끝까지 지적할 수 있어야 돼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5년 전에 은혜받아서 기도원에서 기도하다 은혜받아서 나는 십자가를 알게 되었다. 따라서 십자가 이후의 십자가 알게 된 나의 동질성, 십자가로 인하여 완전히 달라진 나는 이제는 구원받은 나이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이 어떤 말을, 기준을 해도 그 기준은 나한테 유효하기 때문에 앞으로 지금부터 하는 내 기준은 하나님 보시기에 예수님 보시기에 옳다.”라고 주장한다면 그거는 뭐를 지금 놓친 게 되느냐 하면 그 기준이 끝까지 역사 끝날 때까지 내 육신이 죽을 때까지 지적한다는 사실을 놓친거에요.
5년 전에 은혜받은 것이 지금까지 유효합니까? 유효 안 하죠. “이제 구원받았으니까 남은 것은 성화다.” 그렇게 밀어 부칠려고 나가는 거에요? 처음에 구원 받을 때 “하나님이 너하고 상대하지 않는다.” 얼마나 고마웠습니까? 근데 구원받고 난 뒤에 이제는 주님과 마음 놓고 영광 돌리고 찬양하고 헌금하고 봉사하겠습니다. 뭔가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지가 캥기는 게 있는 거에요. 찝찝하잖아요. 그때 갖다 붙이는 말이 ‘성령으로’. “성령으로 하겠습니다.” 그것 갖다 붙이면 그게 성령으로 하는 일이 돼요? 더 나아가서 어떻게 내가 구원받는 것 조차도 죄가 되느냐? 그렇게 반문하는데 ‘너’가 개입되기 때문에 죄가 되는거에요. 구원에서 뭘 빼야 되느냐 하면, 너를 빼고 주께서 마련한 새로운 피조물을 니가 있던 자리에 그걸 교체해서 들어가야 그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교체해서 들어가는 그 나는 지금의 너를 말하는 게 아니고 예수 안에 있는 너에요.
이름이 바뀐거에요.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뀐거에요. 바뀐 이름은 주도권은 누가 있느냐? 바뀐 내가, 야곱이 쥐고 있는 이스라엘은 없어요. 주님이 쥐고 있는 이스라엘로 바뀌는 겁니다. 바뀌다 보면 내 안에서 로마서 7장이 맨날 투쟁이 벌어지는 거에요. 내가 원하는 것은 악마가 원하는데 그 내가 원하는 악과 더불어서 그로 인하여 주님이 준비한 구원의 나를 그때마다 들이대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이해가 될 것 같으면 제가 말을 안 하죠. 그래서 여기 요한복음 8장에서 5페이지에 제목이 뭐냐? 예수님의 부재 증명이에요. 예수님은 여기 없음을 증명하는 거에요. 예수님은 나에게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내가, 나라는 육신이 아직도 유효하게 내가 느껴야 되고 감지해야 되고 이 육신 붙들고 살아야 됩니다. 왜? 육신은 철저하게 육신적이어야 하니까. 나는 이기주의, 나 밖에 몰라야 하니까. 어떤 인생에 대해서 나는 반항 외에는 할 줄 아는게 없어야 하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줘도 나는 내가 원하는 인생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늘 부루퉁하고 입 튀어나오고 대들고, 삐짐. 맨날 삐지고 반항하고 변명하고, 궁시렁 궁시렁 불만을 토로하고 그런 육신을 주께서 계속해서 견지하시는 이유가 너의 구원이 아니고 네 속에 말씀이 완성되었음을 주께서는 계속해서 건지시는거에요. 못난 너를 통해서 내가 하는 일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가를 못난 너를 통해서야 그게 드러나는거에요.
제가 주일날 설교하면서 예수님 십자가 이전에 모든 제자들과 만났던 모든 사람들이 초보라 했습니다. 어떤 행실이 안 좋다는 여인이 눈물 흘리면서 예수님께 향수 뿌리면서 발을 이렇게 씻었습니다. 여기에 대한 질문은 그거에요. 그 여자가 구원받았습니까? 안 받았습니까? 뭐든지 온전함이 없으면 구원이 아닙니다. 온전함.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함이 아니면 구원이 아니고 온전함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가 들어가야 그것만이 보탤 필요 없이 온전해 지는거에요. 그런데 남들 보기에 그 여자는 “참 훌륭하다, 착하다, 겸손하다. 어떻게 자기를 낮출수가 있느냐? 자기를 비웠구나.” 이런 것 다 끌어 모아봐야 그게 구원의 토대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 백부장도 마찬가지고,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야, 너 같은 믿음. 네가 바로 천국에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한테는 십자가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했습니다. 엘리야는 여러분들이 죽지 않고 불수레 타고 하늘로 올라간 사람이고, 모세는 아예 하나님과 함께 있다가 잠시 왔다가 도로 갔던 사람이에요. 두 사람의 특징이 뭐냐? 두 사람 다 시체를 지상에서 찾을 수 없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보면 누가 보기에도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 맞아요. 구원받은 사람이 맞는데 왜 그들 입에서 “예수님 언제 별세하십니까?” 그 이야기가 왜 나오느냐 하면 본인 구원 챙겼으면 됐잖아요. 자기가 구원받고 싶어서 환장했는데 하나님이 구원해 주셨으니까 “더 이상 뭐 예수님이 어떻게 하든 뭐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든 나는 이미 구원받았으니 됐지.”라고 하면 될 텐데, 왜 그 둘 하고 예수님하고 세분이 “예수님 언제 우리 위해서 별세 하셔야 돼요. 언제 십자가에 돌아가셔야 합니까?” 그 이야기를 그 변화산 위에서 하늘나라 식탁에서 왜 그 이야기를 끄집어냅니까?
내 구원이 내 존재의 최종의미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의 어떤 기준 때문에 나를 이용했는가를 그 최종 기준과 연계해서 파악을 해줘야 돼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구원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이에요. 인간이 구원받는 것은 예수 안이라는 새로운 부활의 세계를 형성할 권한이 없어요.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만이 예수 안이라는 천국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자격자입니다. 우리는 내 구원 안에 살기 위해서 예수 믿는게 아니에요. 예수 안에 들어간 상태에서 구원되는 겁니다. 그러면 철저하게 우리는 내 주위의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예수님의 공로로 둘러싸야 되고 예수님의 공로가 드러나려면 내가 구원받고 난 뒤에 일어난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예수님의 공로를 드러내는 죄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논리가 그렇게 되는거에요. 논리가. 그래서 내가 만약에 의식되게 되면 자연적으로 주님의 존재함이 가리워지고 주님이 의식되고 주님의 활동성이 강하게 되면 나라는 것이 별 의미가 없이 되는거에요. 그러한 육신 안에서, 아래 위로 아래 위로, 그것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겁니다. 사이클을 형성해요. 사이클을. 은혜받았다가 삐지고, 삐졌는데 십자가 생각하니까 다시 감사하고. 감사하는데 그것 3분 가서 또 삐지고 그다음에 하고 난 뒤에 1분 50초 가서 또 삐지고, 이 계속해서 육신이 남아 있는 한 그것을 뺑뺑이 돌리면서 거기서 나오는 것은 하나님의 십자가의 공로라는 뻥튀기가 뻥, 뻥. 장날이에요 장날. 계속 육신 집어넣었는데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가 계속 살아나니까 그걸 가지고 “성령이 임하면 예수의 증인이 되리라” 밑천은 우리가 천하의 죄인 가지고. 죄인을 가지고 예수의 증인되는 것. 얼마나 그게 맛있게요? 얼마나 신기한 일입니까?
“주여, 언제 데려가실 거에요?” “너에게 남은 죄는 아직도 있느니라. 좀 재촉 하지마. 좀 기다려라. 치매 걸려서 데려갈테니까 좀 기다려봐. 치매 걸릴 때 무슨 소리가 나오는지 좀 기다려봐.” “믿습니다.” 그걸 우리는 주께서 이 육신은 내 것 아니니까 알아서 죄를 유발하고 생산하실 거에요. 그런 주님이 하는 일에 감격하면서 의지하면 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이러한, 방금 신약을 언급했잖아요. 그러면 지금 우리가 해야 될 것은 뭐냐? 신명기와 신약은 어떤 해석으로 연결되는가? 달리 말해서 신약성경에서 신명기를 어떻게 해석했는가? 이걸 보게 되면 신명기가 어떻게 완성되는가를 알 수 있겠죠.
미리 정답을 말씀드리면 아까도,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모든 율법은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통한다. 모든 율법은, 신명기뿐만 아니라 모든 율법은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통한다 했어요. 그런데 이 율법은 뭘 전달하냐면 복과 저주가 주어지지요. 전에 설교 시간에 한 이야긴데 여러분들이 꼭 다시 알아야 될 것 같아서 이 자리에서 다시 언급합니다. 시편 2편 7절, 이게 히브리서 할 때 히브리서 본문에 나온 대목인데 시편 2편 7절,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너를 낳았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아니, 사람들이 없어서 또 애 하나 아들 하나 더 낳게 합니까? 아니에요. 모든 인간의 가치가 하나님과 끊어져 있기 때문에 선악과로 끊어져 있기 때문에 생명 나무의 연장선에서 아들 안에 생명 나무가 담긴채 태어난 아들이 하나님께서 계획에 의해서 이렇게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이 아들이 하실 일은 뭐냐? 율법을 이룰 수 없는 그것을 이 아드님이 자기 몸으로 그걸 다 이뤄버려요. 그러면 이 말은 뭐냐? 예수님 몸 안에 신, 구약이 다 들어있기 때문에 굳이 우리가 구약의 율법적 인식, 우리가 지켜야 된다는 인식에서 구약을 율법과 상관없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에 의해서 죄가 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 의해서 죄가 되는 육신을 우리가 갖고 있는 거에요. 십자가에 의해서. 그러면 율법에서 죄가 되게 되면 우리는 변명의 소지가 있어요. “남을 구제하는 것, 하나님 이것은 착한 일 맞죠? 십일조하는 것, 착한 일 맞죠? 금식하는 것 착한 일 맞죠?” 이거는 “율법적 차원에서 이게 죄다, 이건 죄가 아니고 의다”하는데, 십자가 사건에서는 뭐냐? 구제도 죄고 구원받는 것도 죄고 설교하는 것도 죄고 앉아서 자버리고 있는 것도 죄고 모든게 죄 아닌 게 없는 거에요. 죄 아닌 게.
이 점을 여러분들이 염두에 둔다면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는 말이 그 사도바울이 얼마나 신나게 당당하게 고백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 내가 죄인 중의 괴수다. 그런데 하나님이 창세전의 은혜로 인하여 이 괴수를 하나님께서 은혜로 구원하기로 작정했다. 됐냐? 됐어?” 사도의 취지가 뭐냐 하면 내가 나인 것이 아니라 나는 주님의 하신 일을 증거하기 위해서 부수적으로 보조자로 나를 이렇게 하나님께서 택해서 일 시켰다. 됐냐?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럼 어떤 경우에도, 뭐 사도바울이 육신이 있으니까 자기한테 병이 있으니까, “하나님 이 병을 어떻게 좀 건강하게 해주면 안 되겠습니까? 병 낫게 되면 주의 일 더 할텐데.” 이렇게 하니까.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이 “사탄의 가시를 내가 집어 넣었는데, 됐네 이 사람아.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 그것을 품어야 은혜가 은혜답게 나온다.”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따라서 가시가 없었으면 몰랐던 은혜를 사탄의 가시가 옴으로써 추가적인 은혜를 사도바울이 뿜어낼 수가 있었던 겁니다. 그것마저 주께서도 활용하고 계신거에요. 자, 여기서 이제 신약에 나오는 구약의 신명기를 어떤 식으로 활용했는지를 보겠습니다. 첫째. 로마서 10장 6절,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이렇게 되어있어요. 여기서 믿음은 인간 믿음 아닙니다. 주님이 주신 믿음이에요. 성령을 통해서 주님의 자기 믿음을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주실 때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라고 되어있어요.
자, 이제 신명기를 볼 텐데 신명기 30장 12절, 14절을 볼 텐데요. 미리 말씀드립니다마는 여기에 말씀 자체가, 우리는 육신이니까, 우리는 죄인이니까 별 쓸모도 없어요. 근데 쓸모없는 우리 안에 신명기 말씀 자체가 펄펄 살았어요. 신명기 말씀, 율법은 있는데 그걸 인간들은 지킬 재주는 없고.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 예수님께서 신명기 말씀을 지킬 재주가 없는 우리 안에서 이미 다 지켰음, 그래서 펄펄 정력이 살아 있음을 증거하는 식으로 너희의 육신을 장소로 활용한다는 거에요.
이게 바로 신명기와 로마서의 만남입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내 안에 말씀 있다.”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살아있다. 말씀이 살아있기에 내가 매일같이 살려냄을 당한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더 이상 효용 가치가 없다면 주께서 오늘이라도 날 죽일거야.”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러면 그 말씀 앞에서 우리는 말씀을 못 지킨 존재로서 계속 확인 될 수 있겠죠. 그럼 결국 뭐냐 하면 “너는 요즘 어떻게 살아야 돼?” “나는 말씀 못 지키는 재미로 살아.” “말씀 네가 매일같이 보는데 어느 대목에서 내가 오늘도 말씀을 못 지키고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성경 말씀 보는거야.” 그렇게 되는 거에요. 자유입니다.
마귀와 사탄과 율법에서의 자유가 이런 모습이에요. 이런 관계에요. 그럼 신명기 한번 봅시다. 신명기 30장 12절에서 14절, 이게 왜 충격적이냐 하면요, “하나님을 보면 믿겠습니다, 지키겠습니다.” 이렇게 할 때 12절부터 보면 뭐 “이르기를 누가 하늘로 올라가자.” 이렇게 하잖아요. 보겠다는거에요. 우리의 시선을 살리는 쪽으로 보겠다는거에요. 왜? 우리의 시선은 내 육신에 속했고 육신은 보면서 판단할 수 있고 그걸 평가 할 수 있는 그러한 권한이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가 첫째 시간에 했죠? 그거는 한계가 있다고요. 죄짓고 난 뒤에 우리는 우리의 평가 기준은 한계 안에 우리가 스스로 갇혀있는 꼴이 돼요.
그러할 때 주께서 율법으로 그 한계 넘어서 있는 이야기를 해버려요. 여기 뭐라고 되어있느냐 하면, 14절에,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행할 수 있느니라. 행할 수 있다면 복 받을 가능성이 이 육신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거든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굳이 시편 2장 7절에서 한 아들을 이 땅에 마리아를 통해서 보낼 이유가 있어요 없어요? 없죠? 그러니까 배후에 악마가 있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과 장로들이 이 신명기 이 말씀 가지고 예수님이 하는 일을 못 알아먹는거에요. 내가 있는 이 말의 의미의 세계에서는 율법까지 철저히 챙겼기 때문에 우리가 지킬 수 있는 말씀으로 “우리는 믿습니다. 믿고 이 신명기를, 쉐마. 들으라 들으라 하면서 이 말씀을 지키면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는 쪽으로 그냥 밀어붙이는 거에요.
어떻습니까? 이게 이런 아이디어가 있는 거에요. 뭐냐 하면 “전에 우리는 육신의 죄가 많아서 우리는 신명기 율법을 못 지켰는데 이제 예수님 십자가 지고 난 뒤에 우리에게 성령이 왔기 때문에 우리는 신명기의 이 30장 14절의 말씀대로 우리는 열심히 성화하고 행하면 거룩해 질 수 있습니다”라는 논리가 나오겠어요, 안 나오겠어요? 나오겠죠. 아직도 자기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 미련을 갖고있는 거에요. 그게 바로 성령을 빙자한 악령의 사람입니다. 성령 받은 척을 하고 있는거에요.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온갖 은혜로운 이야기를 다 끄집어내요.
마음을 낮추고 마음을 비우고... 어디서 많이 들었겠죠, 해가지고 다 이야기해서 “주께 영광 돌릴수 있도록 육신을 줬기 때문에 영광 돌리자.” 어떻게? “이제 구원받았으니 싸가지 같이 굴지 말고 제대로 은혜받은 사람 티를 내어서 구제하고 어려운 사람 해가지고 사도바울의 편지에 봐라. 하라, 하라, 명령이 있잖아. 하라던 명령을 하게 되면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처럼 본받아서 우리 거룩하게 되었다. 밀어붙이자.”라고 교회에서 목사가 교인들에게 설득하고 협박을 하는 겁니다. 그 모든 말은 딱 이 세 마디로 요약이 돼요. 돈 내라. 이거 뭐 단순한 이야기를 왜 둘러서 이야기하는지 모르겠어요. 왜. 돈 내라는 이야기를 성경을 통해 빙빙 둘러서 이야기해요.
딱 본심은 이건데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없으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안되죠. 교회가 형광등 전기 값도 돈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요한계시록 일곱교회 다 없어요. 교회는 없어지라고 있는 겁니다. 그 방식은 바로 이 오늘날의 악령이 천사의 탈을 쓰고 성령의 탈을 써가지고 다른복음 다른 성령 다른 예수그리스도를 전하면서 결국은 자기 존재 의미가 성령에 의해서 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티를 내는거에요. 우리가, 우리의 자아는 꼭 필요해요. 왜? 뭐하기 위해서? 남은 죄를 짓기 위해서. 아까 했죠? 백부장이 자기 행함으로 구원받는게 아니라고요. 백부장 은혜받고 바르게 산다고 구원되는게 아닙니다. 엘리야가 그렇게 해서 구원 되는게 아니에요. 모세가 그렇게 해서 구원되는게 아닙니다. 열두 제자가 예수님을 위해서 희생했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에요.
열두 제자는, 베드로 같은 사람은 끝까지 그 사람은 보배로운 예수님의 피만 증거 하기 위해서 본인이 원치 않는 그 길을 주님에 의해서 강제로 끌려가면서 살다가 십자가 죽었습니다. 베드로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그 죽음 그것을 순교로 근거로 해서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왜? 순교 자체도 인간이 이미 우리가 죽은 자가 되면 뭐도 죽냐? 그동안 나를 살려내던 그 기억의 구성요건까지 같이 부정당하는 식으로 우리는 주님 앞에 십자가 앞에 죄인이 되는 거에요. 나를 그동안 나를 어떻든 이렇게 붙잡아 보려는 내 지혜과 기억으로 조작된 그 나만의 사적인 구성요소까지 우리는 말살당해야 마땅합니다.
사람들이 종교계에서 스스로 자기 자신이 세상과 격리됐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불교에서는 남자나 특히 여자도 머리를 홀라당 깎아요. 깎는 이유가,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깎는 이유가 뭐냐? 절에서 머리를 깎는다는 것은 “나를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해주세요.”라는 뜻이에요. 머리 깎고 어디 갑니까? 자기들끼리의 의미 단체에 가죠. 수학에서 말하는 집합. 자기들끼리의 의기투합이 된 단체에 갑니다. 그게 뭐냐? 절이죠. 절에 가게 되면 그다음부터 영화나 드라마가 시작됩니다. 아내가 출가해서 절에 갈 때 남편이 애 다 키워가지고 절에 찾아가서 “여보, 이제 돌아와.” 이래야 드라마가 되는거에요. “자식을 생각해서 돌아와.” 그러면, “당신 나 알잖아. 내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길에 있다는 것을.” 해놓고 남편 보내고 난 뒤에 그 사람은 어디 가느냐? 바로 새벽 제단 서고 거기서 웁니다.
거기서 나온 노래 가사가 "수덕사의 여승"입니다. 참 옛날 노래다, 옛날 노래. 벌써 몇십년이... 수덕사의 여승. 도피입니다. 자아는 자기 집합을 자기 의미체계를 붙들고 피신하고 도망치고있는거에요 인간은. 하다 안되면 자살이고... 돈, 교회, 부동산 여기에 인간의 돈, 헌금하고 돈 냈던 그 기억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를 부정한다’라는 것은 내 기억조차도 주님 앞에서 십자가를 가리는 것이 되는 거에요. 인간은 뭘 기억하느냐? 자기가 행했다는 것만 기억해요. 기억하세요. 하는데 그것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를 가리는 행위로서 주님의 의미를 실어서 우리가 간직하면 되는거에요.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그리고 매일같이 나는 이 배설물, 제습기에 쌓아놓은 물을 게워내듯이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게워낼 때 그 시원함에 대해서 우리는 또다시 주께 감사하시고 아무것도 아닌 나를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것.
몇 분 안 갑니다. 기대하지 마세요. 인간의 육신은, 육신은 시간의 적용을 받습니다. 시간은 과거로부터 현재에서 미래로 가죠.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이걸 중간을 끊어줘요. 순간. 탁 탁 끊어집니다. 이게 뭐냐? 희년이고 이게 바로 안식년이에요. 과거의 기억을 끊음으로써 “나는 너를 종으로 부리지 않았다. 해방이다. 나는 너를 돈 없다고 담보로 너를 노예로 삼았는데 주께서 그걸, 그 관계를 그 기억을 끊어버렸다. 이제는 너나 나나 동등한 자유인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시간이 신명기에서 희년이라는 제도를 가지고 그 간에 끊어주는거에요. 그 제도에 신명기 제도가 누가복음 4장에 보면, “내가 희년을 선포하러 왔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이사야 펴놓고.
그러니 예수님도 신명기를 염두에 두고 하는거죠. 여기서 니가 행할 수 있다는 말은 로마서에 보게 되면 뭐냐 하면 내가 주께서 행하고 있음을 니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했다는 거에요. 이 말씀을 성취자가 따로 있음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된 거에요. 왜? 자기는 하도 못났으니까. 예수님이 왜 따로 우리 안에 들어오신 이유를 이제 아는거에요. 그래서 지난 낮 설교가 뭐냐? 낮 설교 초반에 예수님이 인간세계에 개입했다 했잖아요. 그 개입한 이유가 뭐겠어요? “난 너하고 상대 안 한다.” 그게 너가 못난 인간이라는 뜻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개입을 했다는 거에요. 주님의 개입을 잊어버리면 곧장 누가 잘나요? 내가 잘난 사람 돼요. 어떻게 압니까? 타인하고 비교하면서 파악하는 거에요. “하, 그거밖에 못 하나.”
“나라도 금메달 쏘겠다.” 그렇게 신명기에 보시면 됩니다. 그다음에 고린도전서 9장 9절,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 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이렇게 하면서 뭐냐 하면 “제단을 나누는 사람과 함께 하라.” 그 뜻으로 넘어가는 거에요. 그게 9장 6절에 보면,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라고 앞에 그게 배치되어있죠. 이게 뭐냐 하면 영적 일을 하는 사람, 영적 일을 하는 사람을 계속 일이 나올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여러 가지 재정적인 것을 여러분 도와주도록 만남이 이루어졌다는 거에요.
그런데 그 놀라운 사실은 그 이야기만 사도바울이 하고 그다음에 뭐라 했느냐 하면, “여러분 알았죠? 여러분만 밥 먹고 살기 위해서 한 게 아니고 여러분에게 영적인 소식을 전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잘 알았죠?” 해놓고는 “나는 그러한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권리를 여러분에게 이 권리를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게 16절에 나와요. “내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러한 나한테 재정적인 기대를 은근히 기대하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뭐라고 하냐? “부득불 한다.” 이 말은 다시 말해서 “나는 당신과 만나고 관계하기 이전에 나는 먼저 주님과의 늘 만나고 지시받고 있는 입장에 있습니다”는 뜻이에요. 그게 바로 영적인 실체라면 여러분들이 “우리 목사님 도와줘야 돼.”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주께서 시키거든 도와주세요라는 그걸로 정리 정돈이 되는 겁니다.
그래야 인간 대 인간의, 교인과 목사의 만남이 성사가 안 되기 때문에. 주님을 경유해서 주님의 지시가 되거든 주세요. 하세요. “목사님 어젯밤에 주의 계시가 왔는데 주님 앞에 20억짜리 아파트 한 대 사주려고 했습니다. 받아주세요.” “형제는 지금 저한테 그렇게 압박을 가하는데 가만있어보세요. 주님한테 제가 지시를 받겠습니다. 주님이여 제가 받을까요, 말까요?” 부채 도사한테 물어봐야 되는데... “받을까, 말까?” 고민할 때, 옆에서 확정을 지은 분이 등장하죠. 아내. “줄 때 받아. 아이 생각해봐. 뭘 고민해? 내 전화할게. 주의 계시에 도달했답니다. 점괘 나왔습니다. 받으래요.” 그래서 모든 일이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처럼,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 찌라도” 뭐가 없으면? “사랑이 없으면...” 사랑이라는 것은 타인을 보지 않고 주님의 사랑에 먼저 정립해 있는 거에요.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저 사람에게 주게 되면 나한테 어떻게 해줄 것인가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냥 주는 거에요. 또 이렇게 될 수가 있어요. “목사님, 주님의 계시를 받았는데 목사님한테 한 푼도 주지 말라는 계시가 왔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잠깐 기다려보세요.” 또 묻죠. 그러면 누가 또 확답을 가진 분이, 가까운 분이 있죠. “그 사람 교회 나가라 해.” 깔끔하게 정리되죠. 아내를 붙여준 이유를 아시겠죠? 내 속에 있는 육신의 발현체에요. 아내는 믿음이 없고 있다가 아니라, 내 속의 믿음 없음을 보여 주는거에요. 20억 받고 어떻게 되겠어요? 그날 밤에 죽었겠습니까? 한 10년간 잘 살았겠습니까? 10년간 잘 살았죠. 어디서? 지옥에서.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앞으로 지옥에서 살 마음이 있거든, 줄 때 챙기세요. 사도바울의 소망은 빨리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협박도 아니고 뭐에요 도대체?
그다음에 신명기 24장 3절, 항상 성경 해설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안에서 해석이 되어야 돼요.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처녀가 아니었다는 뜻이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되어 있죠. 이 구약적 시대에 있어서의 율법의 특징은 뭐냐? 사람이 얼추 행하면 행할 수 있는 내용처럼 다가온다는 거에요. 이혼 증서 써주는 것, 팔이 약간 아프지만 써주면 되잖아요. 나가라 할 때는 세 자 “나가라” 이러면 되잖아요.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요. 할 수 있는 걸로 뭘 이뤘다? 주님의 율법을 이루었다가 되는 그런 환경이 구약 환경처럼, ‘처럼’이란 말은 그게 아닌데 마치 인간들의 말의 세계에 있다 보니까 그렇게 가능한 것처럼 as if죠. 그렇게 되는 것처럼.
마치 그게 맞는 것처럼 건전한 것처럼 그렇게 오해를 하는 거에요. 인간들은. 그런데 마태복음 6장에 한번 봅시다. 여러분 잘 아는거죠. 마태복음 5장. 산상설교. 여기 31절,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이렇게 되어있어요. 여러분 이혼이 안됩니다. 왜냐하면 결혼한 적이 없기 때문에. 인간은 결혼한 적이 없습니다. 신약에 보면 결혼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결혼이라는 것은 율법에 의하면 이게 한 몸이 되어야 돼요. 근데 인간치고 한 몸이 된 자가 없어요. 그래서 신약에는 신랑 되신 예수님과 교회의 신부가 유일하게 한 몸이에요. 그렇게 새로운 부부가 성립되면서 세상적인 육신적인 결혼은 하나님의 율법의 취지에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그 원인이 뭐냐? 인간이 마음에 할례를 못 행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마음의 터널을 뚫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있는 자리를 내가 긁어 낼 수 없기 때문에 긁어 낼 수 없는 내가 건재한 입장에서 어떤 율법을 지켜버리면 인간의 두뇌 자체의 세포의 기능이 어떻게 두뇌에서 세포가 움직이느냐 하면 들어가는 비용과 소득을 균형 맞추면서 뉴런, 두뇌 세포가 활동한다는 거에요. 자동적으로, 두뇌가 자동적으로 에너지를 제일 적게 사용하는 것, 에너지 효율성을 가지고 인간의 신체를 움직입니다. 인간의 신체는 물리적으로 뭡니까? 세포 덩어리잖아요. 세포는 뭘로 되어있어요? 원자핵과 전자, 양자 이런 걸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양자, 전자는 뭐로 구성되어있느냐? 에너지 파동이죠. 에너지 파동이 뭉쳐지면 입자가 되죠. 그 입자 되는 에너지 파동이 어떻게 움직이는가? 에너지의 효율의 법칙에 의해서, 에너지 보존 법칙에 의해서 움직이는 겁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에너지를 적게 하는 것. 그게 자연이고 그 자연의 일부가 인간이고 인간의 두뇌가 인간의 일부입니다.
세포는 자연의 물리적 현상을 따르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여기서 방금 이야기한 뭐가 빠져있죠? 마음이 빠져있죠. 마음. 마음은 어디서 온 거냐 이 말이죠. 과학자들의 한계가 그거에요. 분석하고 다 하는데 그 분석하고 측정할 때 뭐를 빼놓느냐 하면 내가 측정하고 분석하겠다는 이 마음이 측정 결과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인간은 그걸 빼질 못해요. 빼질 못하니까 진리가 아니고 그냥 나를, 나라는 에너지를 유지하기 위해서 대상자를 이용할 뿐이에요. 자연법칙, 과학 법칙은 전부 다 인간을 인간이 유리하도록 이용하는 거에요. 진리가 아닙니다. 지식이에요 그냥. 결국 남는 것은 인간에게 의미가 주어질 뿐이에요. 지구가 몇 억년이고... 그것도 다 마찬가지, 다 측정해서 나오는데 이 측정하고자 하는 그 마음이 우주 전체에 에너지 파동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그걸 어느 과학자가 아직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들여다보는 이것이 진리를 훼손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간은 몰라요.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창조 과학회는 창조 과학회가 맨날 하는 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을 자연현상에서 찾아내겠다는데, 찾아내겠다는 그 행위 자체가 창조했다는 것을 마치 한 것처럼 찾아내지만, 십자가가 빠져있어요. 십자가가 빠져있다는 말은 말씀의 세계에 대해서 말의 세계가 감히 도전장을 낸 것 밖에 안돼요. 이게 창조 과학회의 한계입니다. 아무리 연구해도 결국 남는 것은 “이 연구해서 뭐할껀데?” “나 천당 가려고.” 이게 계속 남아 있는거에요. 자기 자신을, “천당 가서 왜 이익인데?” “그게 내 에너지 덩어리의, 나의 소득이야. 내가 평생 고생한 이 상급이고 보람이야.” 이렇게 되어버리는 거에요.
주께선 뭐냐? “할례를 행하라.” 할례 하죠뭐. 생식기 끝을 잘라내면 되죠.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 어떻게? 안 돼요. 안되는 이야기를 한거에요. 이게 첫 시간에 이야기한 인간의 한계 그 바깥으로 밀어내 버리는거에요. 인간을 한계 안에 가두게 하고 주님은 말씀 줘놓고 인간의 한계 바깥으로 나가버려요. 따라 올 수가 없습니다. “주여 어디로 갑니까?” “니가 못 따라가는곳에 간다. 됐냐?” 그래서 산상설교 5장에서 뭐냐 하면, 증서 써주고, 아내보고 “집 나가. 보따리 싸고 나가.” 할 수 있어요. 할 수 있는데 뭐가 안 되느냐? 마음이죠. 5장 27절에,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간음치 말라 ~ 들었으나 여기에 대해서 인간들은 내가 이 말씀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런데 28절에,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이미 간음 했다는거에요. 이 말은 간음 함이 들었는데 여자에 의해서 그것이 자극 받아서 간음이 내 모든 행동으로 두뇌 작용으로 이게 표현이 되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여기서 여자라 하는 것은 제한적입니다. 뭐냐? 이쁘고 잘빠져 자기 마음에 드는 여자죠. 그럼 그동안 마음속으로 간음을 안 했을까요? 마음에 드는 여자가 눈앞에 띈 적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 속에 이미 간음죄가 들어있다는 것을 드러낸 기회를 찾지를 못한 겁니다. 그러면 이슬람에서 어떻게 하느냐? 남자에게 간음죄가 들어있는 줄 모르고 책임을 여자한테 지어가지고 여자보고 “얼굴 가려. 옷 다 발끝까지 안 보이게 다해. 운동선수도 다 마후라 다 해.” 이렇게 하거든요. 그런데 그 이슬람 남자들의 문제점은 가리니깐 거기에 숨겨진 것에 자기 마음속에 더 상상력이 발휘되는 더욱더 간음 할 수 밖에 없는 어떤 베일에 쌓인 여자, 키 162cm의 베일에 쌓인 여자가 나타났다면 그 여자가 베일을 가리고 옴으로 말미암아 내가 내 마음에 작동할 수 있는 자극이 더 심하게 된다 이 말이죠.
저 안에 있는 여자는 전도연, 아, 전도연은 요새 나이가 많아서... 젊은 여자 있잖아요. “그처럼 아마 그럴 거야. 아니 그래야 돼. 이뻐야 돼.” 이런 식으로. “그러면 이거 얼굴을 한번 보여드릴까요?” “하지 마세요. 하지 마세요. 율법에 나는 간음죄 짓기를 싫었습니다.” 정말 이거는 얼마나 인간이 말의 세계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위해서 타인을 모질게 정죄하는지, 이게 얼마나 악마적이에요. 자기 의롭다고 상대방보고 “옷 제대로 입어.” 이게 돼요 말이? 따라서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나에게 유혹될 모든 인간들은 죽어야 됩니다. 죽어야 돼요. 이 율법에 걸린 사람이 사울왕이었잖아요. 막상 죽이려 하는데 아말렉 가운데서 젊은 여자고 괜찮은 사람 있으니까 “내가 살려줘. 살려줘. 너가 인간미가 없어. 그러면 안돼. 인간미가 있어야 인간다운거야. 살려줘, 살려줘.”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게 뭐라고요? 에너지의 효용 법칙에 의해서 자기가 소비된 에너지보다 더 많은 양의 소득을 얻고자 하는 거에요. 거기에서 인간이 누가 자유롭습니까? 자유롭지 못하죠. “뭐 목사님, 우리보고 어떻게 살라고 하는거에요?” 그냥 사세요. 땡기는 대로. 주의 은혜입니다. 십자가의 현장이에요. 내한테, 그러니까 내한테 이익이 되냐 손해냐 하는 것은 우리 말의 세계에서는 이거는 숨길 수 없는 우리의 본심이지만 주께서, 아까 교재 1페이지에서 나온 것 처럼요. 1페이지 나왔죠. 우리가 어떤 식으로 나를 옹호 할 수 없는 이유는 나는 나를 옹호하고 싶지만, 나를 둘러싼 환경이 고통과 죽음에 우리 자신이 극히 취약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식사하러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