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여름수련회

8강-복의 다면체

아빠와 함께 2024. 8. 3. 21:22

2024 여름수련회 신명기강해 제 8강 : 복의 다면체 - 이 근호 목사


모세는 약속의 땅에 못갑니다. 비록 못 가지만 모세는, 약속의 땅에 열두 지파가 들어갔을 때에 열두 지파가 약속의 땅에서 어떤 식으로 복을 받아야 하는지 그들의 미래에 대해서 신명기 33장에서 그들에게 복을 이야기합니다. 이 복이라 하는 것은 완전에서 나왔어요. 완전에서.

‘하나님께서 명령하니까 이제는 너희들이 열심히 제대로 한번 해봐라. 기회 줬는데 실패했지만 삼세판이니까 다시 한 번 제대로 해라.’ 이렇게 한 것이 아니고, 백 번 기회를 줘도 백 번 실패한다는 것이 인간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그 인간성에 대해서 이스라엘을 샘플로 해서 충분히 보여줬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복이라 하는 것은 그냥 주시는 복이에요, 그냥. 그냥 주시는 복인데 이 복을 주시는 주체는 바로 환경을 통해서 줘요. 환경. 아, 이거 어려운 문제죠. 환경이라는 것은 인간을 둘러싼 거예요. 환경에서 인간은 변화하는데 환경의 온전함, 완전함이 주어지게 되면 어설픈 인간도 온전함이 되고 완전함이 되는 그러한 시스템을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신 겁니다.

‘내가 어떻게 행하냐’가 아니라 ‘무엇이 지금 은혜로 퍼부어지는 그 공간 안에 놓여 있는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마지막 주신 축복의 구조가 돼요. 바깥에 햇빛이 따사로울 때, 그냥 햇빛 받으면 돼요. 비타민D도 생성되고 그냥 받으면 되는데, ‘어이, 해 온도 좀 낮춰. 해 좀 저리 가.’ 우리가 환경에 지시하거나 명령할 수 없어요. 그냥 환경 속에 우리가 놓여있어서 환경의 온전함이 생산하는 자식이 되면 되니까요. 환경의 열매가 되면 되니까요.

그게 바로 33장 축복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아까 32장에서 처참할 정도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종말의 마지막 모습이 불신자의 모습이라고 그렇게 확정적으로 해놓고 여기 와서 갑자기 복을 줘버리는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나는가?

그것은 하나님 자체의 단절을 생성하고 그 단절을 하나님에 의해서 극복하는 그러한 시스템이 하나님 율법 안에 작동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자체가 단절돼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주께서 하신 말씀,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 저를 버리시나이까”가 있어야 돼요. 이것은 끊어진 거예요. 버림받은 거예요.

로마서에서는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아들을 내어주셨다. 죄인을 위해서. 그것도 의인을 위해서가 아니고요. 의인은 없어요. 의인은 없습니다. 죄인을 위해서, 죄인+내어줌이 결합되면 온전함이 되는 거예요. 행동을 바르게 하는 게 온전함이 아니고, 죄인은 돌이킬 수 없는 죄인 됨을 파악할 수 있는 온전함, 그 온전함이 우리에게 해당되는 온전함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의 죄 사함의 온전한 효력, 온전한 권능이 마귀를 이기고 모든 죽음을 이기고 영광스러운 부활로 나오는 그 온전함이 결합되면서 자체적인 원칙, 법칙을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이미 수립하실 계획에 있어요.

그래서 신명기 33장에 나오는 그냥 주시는 축복, 이 축복을 위해서 우리는 열두 지파에서 다양하게 일어나는 그 축복을 봐야 돼요. 축복을 보면서 하나가 12가 되는 그 축복의 경우를 다시 한 번 찾아가봐야 되는 겁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다. 그런데 천하의 죄인인 우리는 구원받았다.” “어떻게?” “아이, 그건 뭐 몰라도 되지. 그냥 믿으면 돼.” 이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야곱이 있다. 그런데 어떻게 야곱이 아닌 야곱의 열두 지파가 야곱의 복을 그대로 인수받는가? 여기에 무슨 원리가 있을 거예요. 그 원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원리를 바탕으로 해서 십자가에 그대로 적용되는 겁니다. 남이거든요. 남. 남인데 남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이것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바로 ‘질적 일의성의 다양성’이에요. 그걸 좀 더 어려운 표현으로 하면, 다면체.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다이아몬드. 하나의 다이아몬드가 삭도가 형성한 각에 의해서 옆의 면하고 나하고 차이 나게 되어 있죠. 달라요.

주님에 의해서 각자 다 다른 이유는 어떤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믿음을 전수할 수 없게 하기 위함입니다. 다이아몬드의 A라는 면이 B라는 면에게 다이아몬드가 어떤 영향력을 안에서 행사할 수 없어요. 다이아몬드 자체에서 파생된 면이기 때문에 A면과 B면, C면과 D면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권한은 없습니다.

중보기도, 없습니다. 중보기도는 없어요. 중보기도는 이미 예수님이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같은 식구라고 해서 같은 가족이라고 해서 기도는 되는데 여기 ‘중보’라는 이름으로 기도할 권한은 없습니다. 기도는 돼요. 기도는 되지만, 중보기도를 할 수 있는 권한이 인간에게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제 사람들은 많이 섭섭해 해요. 섭섭해 하면서 ‘그럴 거 같으면 불교가 낫다’ 뭐 이렇게 나오죠. 천주교가 낫네. 천주교는 인간의 심성이죠. 불교가 천상천하 유아독존 아닙니까. 이미 나는 신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네가 부처인데 무슨 부처를 믿느냐. 믿지 말고 네가 부처가 되면 된다는 게 불교 교리란 말이죠. 누구나 부처의 본성을 다 내장하고 있는데 욕심으로 인해 가리워졌기 때문에 가리는 욕심을 치워버리면 누구나 부처가 될 자질이 잠재적으로 갖춰져 있다는 거예요.

불교의 모습이 인간 곧 마귀의 본성이니까, 천주교에서는 껍데긴 성경인데 안쪽에는 불교가 들어있어요. 그게 연도(煉禱, 연옥에 있는 이를 위하여 하는 기도)라는 거예요. 죽은 조상이 지옥 갔다 싶으면 신심이 있는 후손들이 연도를 넣어요, 성당에.

성당에 연도를 넣는다는 말은 돈 준다는 말입니다. 말을 뭐 빙빙 돌릴 필요 없어요. 뭔가 이야기만 꺼내면 전부다 돈이에요. 돈. 수녀들 용돈 줘야 될 거 아닙니까. 수녀들 월급은 얼마 안 되니까 용돈 주고 또 신부들 골프 좀 쳐야죠, 신세대. 술도 좀 마셔야 되고. 다 필요하다고요. 그걸 해야 능력 있는 신부가 돼서 중앙지로 전근이 돼요. 그렇지 않으면 저 촌으로 인사이동 발령이 내려집니다.

그래서 천주교는 이거에요. 등록만 하세요. 나머지 문제는 우리가 보람상조에서 책임지고 가시는 길 고이 보내드리겠다는 겁니다. 등록만 하세요. 등록만. 영세만 받으면 나머지는 우리가 책임지겠다. 돈만 넣으면 우리가 모르는 사람도 대신 기도를 해주는데 기도할 때 어떻게 하느냐 하면 돈을 좀 많이 넣어야 속도가 빨라져요. 연옥에 간 자기 조상들을 위쪽으로 빨리 퇴직할 수 있도록, 제대할 수 있도록 조치해주겠다는 겁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천주교의 시작은 전 국민의 신자화에서 시작돼요. 전 국민의 신자화. 로마가 기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전 국민이 신자화 되게 했어요. 그러기 위해서 어떤 특정 문구와 문장을 전 국민에게 외우도록 하고 그것을 기억하도록 하면 돼요. 그 문장이 뭐냐? 삼위일체와 관련된 문장을 그들에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삼위일체 못 외운다든지 이해 못하면 이건 이단이고. 삼위일체가 정통이니까 정통되는 문구를 외우는 거예요. 그게 무슨 세계? 말의 세계에요, 말의 세계.

말의 세계의 특징은 뭐냐? 자기 부정이 있을 수 없어요. 현재 있는 것이 모자랄 뿐이고 무식했을 뿐이고 결핍될 뿐이지, 보충만 하게 되면 언제든지 새 사람으로 탈피할 수 있는 여지를 우리 천주교에서 보장해드리겠습니다. 이슬람도 마찬가지고요. 불교도 마찬가지고 천주교도 마찬가지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죽은 조상, 연옥에 간 조상도 어떻게 빼내서 빽 써가지고 천국으로 들어가게 할 수 있느냐? 거기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마리아를 준비했어요. 마리아. 마리아가 누구냐 하면 예수님의 엄마에요. 천주교에서는 한 번 엄마는 영원한 엄마가 돼요.

그런데 마리아하고 예수님은 엄마, 자식 사이기 때문에 여기에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모성애가 작동하는 거예요. 왜? 인간은 엄마가 자식을 낳기 때문에 저절로 모성애가 생겨요. 물론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여럿 있어요. 나는 모성애 없습니다, 하고 아주 마음을 낮춰서 말하는 사람들이 여러 명 있는데 난 믿지 않습니다.

모성애가 있다는 것은 하늘나라에 모성애가 이미 대기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범죄 한 거 맞고 타락한 거 맞는데 모성애는 건들지 않고 그대로 살아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왜 모성애가 있느냐? 아무리 타락해도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인간이 갖고 있는 모성애를 자극하게 되면 아무리 지옥 갈 인간이라도 그 모성애를 통해서 하늘의 모성애와 접촉이 되면 그 사람은 마리아 빽으로 아들에게 압력을 넣어서 구원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설득력 있고 납득 되지요? 아, 하나님은 결국 인간을 버린 게 아니구나. 인간을 버린 게 아니구나, 이렇게 돼요.

방금 제가 무슨 종교 이야기했어요? 천주교 이야기했죠. 기독교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신학생들 신학교에서 개혁주의 신학 배우면 나오는 게 있어요. 공유적 속성. 공유적 속성이에요. 하나님과 인간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속성이 있다는 거예요.

비-공유적 속성도 있는데 인간이 연약해서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볼 때, 인간은 타락해도 아주 타락한 것은 아니다. 그 공유적 속성이 뭐냐?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형상에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임하게 되면 죽었던 하나님의 형상이 살아나면서 그 사람은 구원될 수 있다는 거예요. 상당히 매력적이죠.

오래된 엔틱 가구, 창고에 넣어뒀던 가구를 사용하려면 뭐부터 털어야 되죠? 먼지부터 털죠. 먼지 털 때, 기도와 헌신과 구제와 봉사로 먼지를 털어나가면 그때, 나한테 이렇게 착한 면이? 세상에, 깜놀! 내 자신이 이렇게 훌륭할 수가. 깜놀! 그걸 찾아내면 그것이 구원의 시작이 된다는 거예요.

인간이 아무리 범죄 해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을 주신 것은, 인간이 범죄 하지만 인간 속에 희미하나마 남아있는 게 있다는 거예요. 말씀에 대해서 무슨 소리인지 알아먹고 ‘믿습니다’는 말만 하면 돼요. 손들고 나오면 돼요. ‘믿습니까?’ ‘믿습니다.’ 믿습니다, 나오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교재 p.6 밑에서 세 번째 줄에, 제가 질문을 하나 할 테니까 준비해두세요. 교재 p.6 밑에 나오는 말씀을 읽고 제가 질문을 할 테니까요. 질문은 두 문항밖에 안돼요. 둘 중에 아무거나 찍어도 돼요.【“저희가 능히 믿지 못하는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요 12:38-40)”】

자, 질문 들어갑니다. 인간은 주의 말씀을 못 알아듣는 겁니까, 거부합니까? 몇 번입니까? 둘 중에 하나인데…. 이것이 예수님께서 인간보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인간 배후에 악마보고 이야기한 거예요. 로마서 5장에 보면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하나님의 원수기 때문에 못 알아보는 게 아니에요. 알고서 거부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인간은 몰라도 귀신은 예수님이 왔을 때 알아봤어요. “예수여, 우리가 지금 멸망할 때가 안 되었는데 왜 미리 와서 멸망합니까? 그럼 우리가 어디로 들어갈까요?” “돼지” “네. 가겠습니다.” 이런 대화가 있어요. 어느 인간도 예수를 못 알아봤지만 악마는 알아봤어요.

그래서 불신자들이 지식이 모자라고 공부를 못해서 못 알아본 게 아니고, 성경쓰기를 게을리 해서 못 알아본 게 아니고, 불신자 속에는 근본적으로 예수님에 대해서 거부하는 본능이 작동합니다. 거부하는 본능이 작동하면, 또 문제 나갑니다. 1-예수를 안 믿는다, 2-예수를 만들어낸다. 몇 번입니까? 만들어내죠.

내가 믿고 싶은 예수와 성령과 복음을 내가 만들어내요. 내가 만들어낸다고요. 그러니까 그 만들어진 복음에는 뭐가 없어요? 나는 어떤 식으로든 주님과의 접촉이 가능하지 않은 존재라는 부정적 요소가 거기 빠져있어요.

그걸 두 자로 ‘신학’이라 합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을. 그게 신학이에요. 신학은 교회를 위해서 있는 거예요. 진리를 위해서 있는 게 아니고, 교회 부흥을 위해서 조직신학, 성경신학이 존재하는 겁니다. 그거 배우기 위해서 신학생들이 3년 내지 긴 사람은 7년. 대학 졸업하면 3년, 강도사 떨어지면 1년 꿇어서 한 번 더 공부. 그거 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 말씀 전혀 몰라요. 모르는 게 아니라, 알지만 거부해요.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이들이 이 말을 거부 못합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거부를 못하는데 왜 속으로는 거부하고 싶고, 안 들었다, 이렇게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러면 교회가 안돼요.

예를 들면, 내가 이 복음을 전해서 어느 동네에 개척교회를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자기 동네에 진짜 성령 오셔서 이 말을 기뻐하는 사람이 한 열 명 있으면 교인 10명이 되겠는데, 만약인데요, 이게 하나님이 시험하는 겁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10명이 아니 계시게 한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10명도 없고 단 한 명도 없다면 뭐를 접어야 돼요? 교회를 접어야 되죠. 교회를 접으면 자기가 살아온 모든 존재 의미가 사망이죠. 삭제되는 겁니다. 자기 희망이라든지 모든 게 꺾여버리죠. 그러면 자기가 부정당하겠죠.

결국은 뭐냐? 나는 나를 지키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이러지 않는 목사 있어요, 없어요? 다 그래요. 그러니까 바른 복음을 전하면 바른 목사가 아니라, 진짜 목사는 이 말씀에 대해서 나부터 부정당하는 대상이라는 것을 알고 그걸 강대상에서 전하는 자가 진짜 복음 설교자입니다. 바른 목사, 바른 복음 전하는 사람이 우리나라에 수백 명이 넘어요. 유튜브에 쫙 깔렸습니다. 자랑질한다고.

그런데, 그래서 우리는 이단이라는 말을 못해요. 우리는 충분히 이단이 되어야 돼요, 충분히. 왜? 이단이기 때문에. 그게 무슨 깊은 논리가 필요합니까? 이단의 다면체. 다이아몬드 안에는 중심이 있고 이단 때문에 돌아가신 분이 중심에 자리 잡았기 때문에 그 중심의 단일적인 의미를 뽑아내기 위해서는 그 다면체는 모두 이단으로 장식되어야 돼요.

그래서 이단의 개념이 어떻게 됩니까? 주님의 십자가와 관련된 이단과 주님의 십자가가 빠져버린 자기를 긍정하는 이단이 등장하겠죠. 이러나 저러나 전부 다 이단이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인간으로 태어난 자체가 저주를 보여주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그 원칙에는 부합되는 겁니다.

이렇게 뭔가 딴소리하는 것처럼 길게 했는데 왜 길게 했는가? 바로 야곱과 열두 지파의 관계에서 이 원칙이 그대로 적용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적용되었던 거예요. 그것이 바로 시편 105편에 나옵니다. 시편 105편 15절부터 보게 되면 야곱의 축복이 열두 아들 앞에 다양하게 다면체로 분산되어 전달됩니다.

그냥 전달되느냐? 여기에 장애요소가 발생됩니다. 그 장애요소가 야곱의 장애요소에요. 이런 것은 정말 중요한 건데요. 야곱이 이스라엘 되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보기엔 ‘야곱은 이제 좋겠다. 하나님께 복 받았으니까.’ 그렇지만, 야곱이 예수님은 아니거든요. 야곱의 언약 원칙이 예수님 오실 때까지 계속 이어져야 돼요.

야곱에겐 자식 열두 명이 있습니다. 열둘이 있으면 열두 명 안에 뭐가 전수되느냐? 로마서 5장에 아담의 죄가 후손에게 미치는 것처럼 야곱의 육신의 혈통에 의해서 야곱 내부의 그 죄성이 열두 아들에게 파급이 돼요. 유명한 디나 사건부터 해서. 그야말로 시므온과 레위가 자기 누이동생 강간당했다고 어떻게 했습니까? 그 마을 남자들 전부 다 죽여 버렸어요. 다 죽였다고요. 얼마나 잔인합니까. 아주 잔인하게 해버린 거예요. 잔인하게.

이게 누구 본성이냐? 야곱의 본성이에요. 야곱의 본성은 죽으면 죽었지, 남한테 지기 싫어하는 거예요. 그 본성을 천사가 이용해서 야곱에게 지는 척하면서 결정적으로 야곱에게서 나왔던 힘의 원천을 박살냈습니다. 그때부터 야곱은 김대중처럼 지팡이를 의지하죠.

그러니까 야곱이 아무리 구원 받았더라도, 야곱의 본성은 망가지는 겁니다. 망가질 수밖에 없는 요소가 열두 아들에게 그대로 전수된 거예요. 열두 아들에게 전수되었으면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장애요소는 되지만 언약의 장애요소는 아니고, 언약은 그것을 도리어 의도적으로 유발하는 겁니다. 야곱은 아들 중에서 오직 한 아들만 사랑했어요. 요셉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 놔두고 독생자 이삭을 바치라 했죠.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자를 주께서 건드려버려요. 그다음에 이삭은 누구를 사랑했습니까? 야곱을 사랑한 게 아니에요. 취향에 안 맞아요. 에서를 사랑해요. 에서는 남성답고 사나이처럼 밖에 돌아다니는데, 조용하게 음흉하게 있는 자가 야곱이다. 호시탐탐 뭘 노리는. 그런데 에서가 저주가 됐어요. 아버지 이삭은 야곱에게 기꺼이 축복을 주고, 자기가 좋아하는 자식에게 저주를 기꺼이 줘버립니다.

왜? 하나님이 살아계시니까요. 그전까지는 내가 주인공으로서 내가 살아있었는데 주께서 장애요소를 유발시킴으로서 하나님이 나보다 더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것,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있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언약대로 주어진 사태대로 그냥 가버립니다.

열두 아들, 야곱 다 움직이죠. 움직입니다. 움직이는데 야곱은 자기 본성대로 요셉을 되게 사랑했어요. 요셉에겐 특별히 사제 옷을 입히고 고급 디자인 옷, 채색 옷을 입혔어요. 비싼 옷을 입히면서 노골적으로 사랑을 드러냈습니다. 왜 야곱이 이런 일을 합니까? 왜 요셉만 특별히 사랑했습니까? 이유는 간단해요. 그냥 좋아서. 그냥 좋은 거예요. 너무나 인간적이에요. 그냥 좋은 거예요. 좋아서, 귀해서 하는 거예요.

그 귀한 것에 꿈이 주어지고 나머지 열 아들, 동생은 놔두고 열 아들이 여기에 달려듭니다. 달려들어서 꿈꾼 자를 죽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죽입니다. 아버지는 요셉이 죽은 줄로 알았어요. 죽은 줄로 알고 좌절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편 한번 봅시다. 하나님은 이걸 어떻게 해석하느냐? 항상 하나님의 말씀 해석이 인간의 말의 해석을 능가해요.

시편 105편 17절에,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우리 보기에는 요셉이 종으로 팔렸죠. 그런데 요셉이 종으로 팔린 그 자체가 말씀이 응할 때까지 말씀이 저를 연단했다는 거예요.(“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연단하였도다”) 요셉이 살아있는 모습이지만 보이지 않는 말씀이 요셉과 함께 있으면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 언약이 언약 자체적으로 언약을 이루어나갑니다.

그런데 그 바깥에 드러나는 모습은 희생자에요. 희생자의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그 다음부터는 제가 말하지 않더라도 여러분이 아실 거예요. 요셉이 형제들을 다 용서하고. 요셉이 뭐 용서할 것도 없어요. 요셉이 형제들에게 알렸습니다. “내가 이렇게 팔린 것은 형들이 나를 미워했던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장차 다가올 종말을 미리 아시고 나를 통해서 우리 형들을 야곱의 하나님 언약대로 구원하시기 위해서 나를 앞서 보냈습니다.”라는 말을 해요.

그러니까 형들은 거기에 휘말린 것이고, 인간의 본성, 우리 인간의 죄성은 휘말린 것이고 인간이 죄를 어떻게 짓든 어떻게 방해하든 상관없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원칙을 따라서 미리 그 과정에 전달되었고 실시된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 중에 눈치 빠른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망한 게 아니란 말입니까?’ 아니에요! 그게 어디 나오는가? 신명기에 나옵니다. 신명기 30장 3절부터 보게 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네 포로를 돌리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너의 쫓겨간 자들이 하늘 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어떻게 됩니까? “(끌어)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 5절 “…너로 네 열조보다 더 번성케 하실 것이며”, 6절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그다음에 뭡니까? “얻게 하실 것이며”

전에는 뭡니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겨라”가 되잖아요. 그런데 쫓겨나고 난 뒤에는 내(하나님)가 준 말씀을 친히 하나님 자신이 그렇게 말씀을 이루고 그 성과를 너희에게 적용시켜서 너는 말씀의 생성물이 될 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요한복음 1장 14절에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뭐가 됐습니까,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뭐가 되었다? 말씀이 사람이 된 게 아니에요 the Word became flesh, and dwelt among us . 말씀이 육신이 된 거예요. 인간은 없고 모조리 다 죄 짓는 육신만 있기 때문에. 그 죄 속까지 주의 말씀이 침투해서 들어오신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신명기 초반의 원리를 그대로 그들에게 전달하죠. 초반에. 산상설교에서 “똑바로 살아. 이렇게 하는 게 하나님 뜻이야.” 해놓고 제자들이 “열심히 할게요. 할게요.” 해도 소용없어요. 그런데 나중에 보면 “너희가 나를 버릴지라도 나는 너희를 끝까지 사랑한다.” 요한복음 마지막에 가면 너희가 나를 버리는 것은 기정사실이고, 내가 버린 너를 찾아가 구하는 것도 기정사실화시키는 것입니다. 그중 한 사람 가룟 유다는 배제되고요.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 것같이 너도 서로 사랑하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의 사랑은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지 못하고 어디를 경유해야 돼요? 우리가 주님을 배신하고 미워하고 싫어하고 말씀을 버린 그 경로를 따라오다 보면 그게 이웃사랑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배신하고 죄인이고 나밖에 모르는 경로를 계속 들어가다 보면 순환 루트, 사이클을 돌다 보면 중간에 뭐를 만나게 되겠어요? 단절을 만나고 그다음에 그 단절 자체가 바로 새로운 영생의 길이라는 것을 만나게 되겠죠. 죄인인데 주께서 값없이 구원한 것을 만나게 되겠죠. 그게 사도 바울의 복음이라 하잖아요.

만나게 되면 이미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은 이 세상에서 뭐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죄인이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어요. 우리가 자꾸 주저하는 것은 아직도 자기에게 남아있는 의가 있기 때문에 주저하는 거예요. 그거 하나 지키려고. 그러나 죄인이라면 여러분들이 어떤 짓도 다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짓도.

남한테 ‘미안합니다.’하고 사과하는 전화, 여러분들이 그거 하기 힘들어요. 주의 성령의 기적 아니면 못합니다. ‘지가 뭔데 내가 사과해. 내가 지보다 못한 게 뭐가 있어?’ 이게 인간이거든요. 이게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말도 안 듣는 게 인간 말 들을까요? 안 듣습니다. 아이고, 셉니다. 그야말로 강성이에요. 강성.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강성 노조에요.

하나님께서 신명기 30장에서 미래의 스케줄까지, 미래 계획까지 다 준비하셨어요. 이제 충분히 아셨다 치고 33장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33장 딱 오게 되면 여기에 대한 축복은 뭐를 경유한 축복입니까? 하나님께서 작동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다 이룬 상태에서 그냥 배당해주는 축복이죠. 그냥 배당해줘요. 그것도 똑같은 걸 주는 게 아닙니다. 다면체니까. 다양체 또는 다면체니까요.

이것은 좀 많이 어려운 이야기인데요. 제가 표현을 해보겠습니다. 흑인하고 흑인 되기가 달라요. 흑인은 때려죽여도 흑인 되기를 못해요. 왜냐하면 흑인은 목표가 백인처럼 사는 것이기 때문에. 안돼요. 여자는 여자 되기가 안돼요. 왜냐하면 여자는 남자가 인식하는 그 여자 되기에 몰두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흑인과 흑인 되기, 여자와 여자 되기는 단절되어 있어요. 흑인≁흑인 되기. 여자≁여자 되기.

아이는 아이 되기를 못합니다. 아이≁아이 되기. 아이들이 주로 보는 게 뭐죠? 만화죠. 만화가 아이들의 욕망을 그대로 보여주는데, 그 만화의 주테마가 뭐냐 하면 어른이 못하는 것을 내가 하는 영웅들의 이야기에요. 지구를 누가 지킵니까? 지구는 독수리5형제가 지키는 거예요. 아이들이 지키는 거예요. 지혜로운 아이들이 지키는 거예요. 가제트 형사 범죄 해결 누가 합니까? 가제트 형사가 해요, 안 그러면 조카 어린애가 합니까? 어린애가 하는 거예요. 아이들의 세계에서는 아이들이 주인공입니다.

5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어린이날을 지정해서 속에 들었던 조급한 어른 되기를 그때 국가적으로 잠시 행사해주는 거예요. 그때는 나무랄 것도 안 나무라고 성격 나쁜 것도 잔소리 안하고 그저 놀이동산 가서 실컷 고생만 하고 돌아오는 거예요.

그러면 이걸 그대로 적용해보겠습니다. 성도 또는 주의 백성 되기는 성도가 못합니다. 성도≁성도 되기. 단절을 성도가 이끌어낼 수 없고, 흑인은 진짜로 흑인 되기를 못하고요. 여자가 진짜 나 같은 여자가 못돼요. 남자도 그렇지만, 여자는 내가 누군지를 모르기 때문이에요. 남이 원하는 대로 그들의 시선과 그들의 요구사항에 따라주기 바쁘지, 진정한 나를 인간은 죽을 때까지 내가 몰라요.

나라는 게 없기 때문에. 남들이 우리에게 강요한 환상입니다. 나라는 게. 그래서 나는 그때그때 달라요. 나라는 것은 주변에 누가 있느냐에 따라 달라요. 그들에 비위맞추고 그들에게 아부하고. 말은 그렇게 나쁘게 했지만 좋게 말하면 그들과 조화롭게 사는 것, 평화롭게 사는 것, 거기에 스트레스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어요. 진정한 나는 없습니다. 없으니까 찾을 수가 없는 거죠.

진정한 나는 내 이름을 가져간 그분이 제2의 진정한 나로 등장하죠.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단절을 거치고 자기가 모든 성도의 모범이에요. 모범이고 표준이니까 그것을 맏아들이라 해요. 하나님의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 로마서 8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맏아들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이미 아신 자를 부르시고 의롭다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8:29-30)

우리는 뭘 닮아야 되는가? 첫 번째 아담 닮는 것은 끝났고 이제 두 번째 아담, 마지막 아담, 부활하신 아담을 본받기 위해서 우리는 새로 지음 받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거예요. 우리 안에 있는 형상은 내 형상이 아니고, 아담의 형상이 아니고, 주님의 형상이 우리 안에 무르익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신명기 33장에 나오는 약속의 땅에서 축복할 때, 여기 나온 열두 지파는 어떻게 되는가? 다양성으로 주어집니다. 이 다양성이 뭔지 본문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 33장 8절에 “레위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

아니, 레위를 보고 경건하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여기서 과연 그런지를 비교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 끝에 49장 야곱이 아들들보고 축복한 거 있죠. 거기 49장 5절을 보겠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그러니까 야곱의 뜻은 그들과 합치되지 않는다 이 말이죠. KBS에서 어떤 동영상 하나 찍고 프로그램을 방영하면서 ‘이 프로그램의 취지는 우리 KBS 취지와 다를 수 있습니다.’ 이런 거 막 나오는 거예요. 그럼 틀지 말지, 틀기는 왜 트는지.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염이 잔혹하니” 그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저주를 받을 것이요”

이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축복을 이야기하면서 저주를 왜 거기다가 섞어버려요? 이랬던 레위지파가 신명기 33장의 레위지파는 갑자기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

뭐를 경유했습니까? 레위 지파가 하나님의 언약을 경유한 결과입니다. 언약을 경유하다보니까 언약의 희생의 혜택을 입은 자로서 레위 지파가, 자기가 한 죄된 행동과 거기다가 하나님의 언약 완성이 결합되니까 개성 있는 자기만의 독특하지만 축복받는 대상으로서 약속의 땅에 살게 됩니다.

사람마다 다 다르죠. 왜? 하는 짓들이 다 달라서 그래요. 하는 짓들이 다 달라서 그래요. 인간들이 그런 죄를 짓는 것은 각자 속해있는 환경이 개성적으로 다 다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환경이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는 거예요. 살아온 환경이. 인간은 주어진 환경에 의해서 주체가 형성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론 타고난 DNA요소도 반반 정도 섞여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하죠.

그다음에 그들이 경건한 이유가 “주께서 그를 맛사에서 시험하시고 므리바 물가에서 다투셨도다”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그는 그 부모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내가 그들을 보지 못하였다 하며 그 형제들을 인정치 아니하며 그 자녀를 알지 아니한 것은 주의 말씀을 준행하고 주의 언약을 지킴을 인함이로다”

갑자기 토정비결이 좋게 나와 버린 거예요. 10월에 목성을 가진 귀인을 만날 것이다, 뭐 이런 식으로 점괘가 이상하게 자꾸 좋게 나와요. 11절에 보면 “여호와여 그 재산을 풍족케 하시고 그 손의 일을 받으소서 그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와 미워하는 자의 허리를 꺾으사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옵소서”라고 해버리는 겁니다.

자, 여기서 이제 제가 질문을 해야 될 차례입니다. 그래서 열두 지파가 되는데 다른 지파 가운데 요셉 지파를 보겠습니다. 13절, “원컨대 그 땅이 여호와께 복을 받아 하늘의 보물인 이슬과 땅 아래 저장한 물과 태양이 결실케 하는 보물과 태음이 자라게 하는 보물과” 뭐 보물이 연발이네요. “옛산의 상품물과 영원한 작은 산의 보물과 땅의 보물과 거기 충만한 것과 가시떨기나무 가운데 거하시던 자의 은혜로 인하여 복이 요셉의 머리에, 그 형제 중 구별한 자의 정수리에 임할지로다”

아, 이거는 뭐 레위지파 점괘 듣고 요셉지파 점괘 들으면 레위지파가 화 날만 하네요. 너무 차별되게 하잖아요. 자, 질문은 뭐냐? 이 요셉지파 망했습니까, 안 망했습니까, 약속의 땅에서? 홀라당 망했어요. 홀라당 망했는데 여러분들이 이제 지금까지 배웠으니까 복습하는 의미에서 얼마나 하나님의 법칙에 대해서 깊이를 가졌는지 보겠습니다.

망했어요. 망했단 말이죠. 현실적으로 이스라엘 전체 열두 지파가 망했어요. 약속의 땅과 더불어서 멸망당했습니다. 구약에 보면 나오죠. 그런데 이게 왜 축복일까요? 이게 왜 축복이냐? 현실적 이스라엘은 망했는데 말씀 속의 이스라엘은 망함을 토대로 해서 영원하게 천국 백성이 되는 겁니다.

이중성이 등장하는 거예요. 이중성. 이스라엘이, 구약적 이스라엘신약적 예수님 십자가 안에 품어낸 숨어있는 이스라엘이 함께 거기에 스며있는 거예요. 그래서 아까 교재 p.6에 보면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고 이사야 6장에 나오는 말씀을 한 것은, 종말 이후의 그 모든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 자체적인 해석과 적용이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개입되는 식으로 천국백성이 완성되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에 의해서 방해받지 말아야 되겠죠. 그러면 인간 쪽은 배제당하고 망해야 돼요. 망할 때는 이유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너희들은 내 말을 못 알아들었다.’ 그것은 결과적인 것이고, 더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나는 너희가 알아듣지 못하게 했다.’ 누가? 하나님 쪽에서.

이걸 새삼스럽게 우리의 본질로 받아들인다면 여러분 정말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 받았어요. 행여나 행여나 내 행함으로 천국 갔다 할까 싶어서, 하나님은 인간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했는가? 미리 아시고 나서서 그걸 차단시킨 겁니다. 못 알아듣는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던 겁니다. 못 알아듣는 말씀을.

따라서 우리는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이 생각한 숨어있는 그 이스라엘을 생각 못하고, 내가 이스라엘 속에 합류할 그런 의도를 가지고 교회 다니는 거예요. 의도를 가지고. 말씀 연구하면서. 그런데 성령을 받고 보니까 내가 손에 쥔 이 모든 말씀은 내가 아무리 공부해도 못 알아듣는 말씀만 주신 거예요.

그런데 못 알아듣는 말씀을 주셨다는 것을 알아듣게 된 것은, 뒤에 알아듣는 그 대목은 내 노력이 아니고 내 행함이 아니라 성령의 선물로 말씀 성취의 차원에서 몽땅 해태종합선물로 우리에게 던져준 거죠. 그러면 뭐가 바뀌느냐? 말의 세계와 말씀의 세계가 중첩된 유령 같은 유령성을 지닌 희한한 존재가 살아가게 된 겁니다. 오늘 저녁에 끝나고 가는 사람이 있어서 내가 성질이 급해서 지금 결론 부분까지 미리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여기 신명기 33장에 나오는 열두 지파가 복 받는 대목을 보면서 뭐를 여러분들이 발견해야 되느냐 하면, 축복을 어떤 특정 지파에 몰아주지 않았다는 사실이에요. 몰아주지 않았어요.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에서 나왔던 열두 개가 반드시 하나로 집결되면서 비로소 복의 본질을 발견하도록 하게 하는 겁니다.

뭐냐 하면 ‘우리 같은 성도니까 사랑하고 바르게 삽시다.’ 이거는 안돼요. 이거는 교회 아닙니다. 이건 친목단체에요. 이거는 멤버쉽이에요. 교회가 아니라 멤버쉽이고, 반드시 뭐로 가야 돼요? 우리 여럿이 하나의 질적 일의성 구조,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새로운 현실의 전개죠, 여기 이 현실 속에서 십자가를 경유해서 다른 사람을 보게 하는 겁니다. 타인도 마찬가지에요.

십자가를 경유해서 보게 될 때 그렇다면 제가 마지막으로 얘기하는 이웃사랑이란 뭐냐? 그 이웃은 바로 예수님만이 우리의 이웃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 사랑한다 했을 때 그 하나님은 내가 생각한 하나님이 아니고 바로 예수님,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신 그분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분의 아버지가 하나님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시간 결론적으로 요한복음 17장 보고 마치겠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주도면밀하게 일해 왔는지를. 요한복음 17장 21절, 이건 기념해서 다 같이 한번 읽어봅시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아, 이거… 진정성 있게 고백해주시기 바랍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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