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제5강-신명기: 어린 양과 동행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교재 1페이지 위에서 14번째 줄에 이런 내용이 나와요. “나는 늘 비 본래적이기에 스스로 극복할 대상조차 의미 없다, 대상조차 아니다”라는 뜻이에요. “내가 지금의 나는 원래 있는 나가 아니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 나는 나의 편을 들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고통과 죽음에 취약하기 때문에. 나는 내가 잘되고 싶은데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과 고통이 특히 죽음에 대해서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이게 창세기 3장 19절에 보게 되면, “너는 필경은 흙으로 실컷 고생하다가 너는 얼굴에 땀을 흘리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네가 그 속에서 취함을 입었으리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네가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가야 된다. 여기에 대해서 불신자, 성경을 안 믿는 사람에게 제가 대꾸하고 싶은 것은 “인간이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데 무슨 대안이 있느냐? 대안을 제시해봐. 성경은 엉터리고 안 봐도 되고 밀어붙이는데 그러면 인간인 네가 흙으로 돌아가는데 있어서의 네가 흙으로 돌아가지 않는 대안이 뭐 있느냐?” 그럼 그쪽에서 하는 말이 “죽고 난 뒤에는 모르겠다. 그거는 죽으면 그만이지, 끝이지. 내가 거기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나?” 이렇게 나올 거에요. 그러면 그 소세지는 어떻게 할 거에요? 이스라엘 나라의 존재의 현실성.
지금 신명기에서 이스라엘 나오니까 이게 성경이라는 소설책에 가상 민족으로 이스라엘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그러나 실제로 지금 이스라엘이 파리 올림픽에 선수단으로 참석하고 있습니다. 그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토대. 그것 취소, 무효화시킬 수 있을까요? “네 나라는 없는 나라야. 네 나라는 없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들의 뿌리를 우리가 못 본 채 할 수 있을까요? 이스라엘 민족은 다른 민족하고 달라요.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이 만들어낸 현실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외에 모든 민족은 하나님과의 언약 없이 만들어진 민족이에요. 따라서 단순히 성경이 성경책 안에서만 맴도는 픽션이 아니고, 가상 만들어낸 소설이 아니라 실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이고 이 현실 속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언약, 창세기 3장 19절에 준해서 우리는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대안은 없습니다. 지금 좀 있다가는 사람도 있고, 이 자리에. 조금 살다 갈 것 같은 사람도 있는데, 어쨌든 한 방향으로 가고 있죠.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창세기 3장 20절에 “아담은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여기 갑자기 하와라는 뜻은 생명이에요. 분명히 남편 아담한테는 “흙으로 돌아간다.” 분명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 속에서 여자에 대해서는 “생명으로 돌아간다”라는 뉘앙스를 줍니다. 생명과 관련되어져서 너에게 내가 조치를 하겠다. 그 조치가 바로 가죽옷을 입히는 거에요. 가죽옷을 입히는 것은 남자의 기능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 여자의 기능은 같이 흙으로 돌아가기는 가는데 여자의 속에서 생명의 징후를 보여주기 위한 용도로 가죽옷과 결합시켜서 이제 이야기가 시작되죠.
그러면 여기 창세기 3장 19절에 남자가, 아담이 모든 인간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저주. 여자에게 특별히 어떤 징후가 등장하는 것은 생명. 그러면 여기서 ■선악과 따먹고 저주받는 것, 생명 나무 때문에 생명이 주어지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약속으로 이미 창세기에 모세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메시아는 남자의 후손이 아니고 여자의 계통, 여자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내가 죽는 것은 분명한 사실, 여러분도 분명한 사실인데 여자의 후손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생명 되시는 메시아가 오는 것도 동일하게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 분명한 사실이에요. 교회 생각하지 말고 현실을 생각해야 돼요. 교회는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없어지고 그게 교횐데 지금 교회 어떻게 다니고 교회 어떻게 섬기고 이거 하려고 성경 보는 것 아니에요. 어떻게 교회가 가로막은 현실을 교회를 치우고 바로 현실 속을 바로 볼 수 있느냐. 그것은 저의 문제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문제고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신명기 12장에 그 여자의 후손, 언약을 주신 가죽옷과 더불어 이어지는 생명이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주었다는 이야기했습니다. 했는데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언약과 동행해서 가게 했는데 신명기 1장에서 보았듯이 어디로 가는지를 몰라요. 어디로 갑니까? ■도대체 우리가 어디로 가야됩니까?
신명기 1장에 30절 31절에서 주께서 앞서서 이끄실 것이다. 그곳이 어딘데요? 그곳이 신명기 12장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이제 멈추는 곳.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끌고 이끌다가 멈추는 곳이 있을 것이다. 그곳이 뭐냐?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가서”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파 중에서, 열두지파죠. 지파 중에서 다가 아니고 ■한 지파를 통해서 주님의 자신의 이름을 거할 곳을 지정하게 됩니다. 그게 유다 지파를 통해서 지정된 곳, 솔로몬의 성전입니다. 솔로몬의 성전.
솔로몬은 열두지파 가운데 유다 지파에 속합니다. 그동안 있었던 모세 지파는 레위 지파인데 레위 지파가 그 유다 지파의 주의 이름이 도착할 때까지의 백성들을 이끄는 중간 역할을 충실히 했습니다. 바르게 했다는 뜻은 아니고 충실히 했습니다. 레위 지파가 했던 그 일을 이제 다윗이 나와서 레위 지파의 허점과 한계를 넘어서서 그 유다 지파가 하나님의 성전을 짓게 됩니다. 그럼 성전을 계획하신 것은 다윗이고 실제로 현실적으로 성전이 등장한 것은 솔로몬인데 그 현실적으로 등장한 그 솔로몬 성전, 그것 나중에 불타버립니다. 없어지죠.
그것은 아직도 율법이 솔로몬에서 멈춰서는 안 된다는 뜻이에요.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른 게 또 있는 거에요. 그러면 이 하나님의 이름이 자기 이름에 두시는 그 성전을 둠으로써 이렇게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 하는 것은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가 됩니다.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릴게. 주님께서 약속의 땅에 먼저 가서 기다리겠다는 겁니다. 그 지정된 이름으로. 그 장소, 그 장소가 이렇게 있는데 그 장소에 모든 율법이 여기다가 다 집결됩니다. 여기다 집결되면서 완성이 돼요. 집결. 집결되고 성전에서 완성이 되면서 성전이 불타게 되게 되면 이 모든 율법도 같이 뿅 하고 다 불타고 사라지게 됩니다. 율법이 사라지게 되면, 율법이 사라지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은 이제 인간하고 상대 안 한다.
여러분 이게 하나님이 이제 인간하고 상대 안 하는거에요. 상대하기 위해서 율법을 줬는데 그 율법을 통해서 인간은 저주의 대상에 불과한 것이 들추어졌을 때 하나님은 이제 인간하고 상대하지 않습니다. 이걸 가지고 신약에서는 네 자로 이렇게 그걸 ‘기쁜 소식’이라고 해요. 상당히 역설적이에요. 하나님이 나 같은 것하고 상대해 주지 않음으로써 우리를 일방적으로 구원하십니다.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을 상대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요소와 내 안에 하나님의 요소가 연결되어있는 곳으로 자신의 존재의 가치와 의미를 붙잡으려고 하는 거에요. “뭐 어떻게 하면 돼요? 뭐 어떻게 해 드리게 되면 기쁘시게 하겠습니까?” 이게 계속 남아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나와 계속 상대해서 “상대한 나는 구원하고 상대 안 한 저 불신자들은 그만 지옥으로 가든 말든 난 모르겠고 저는 꼭 챙겨주셔야 됩니다”라는 생각을 우리가 강하게 갖고 있어요. 근데 일절 모든 인간하고 상대하지 아니하면 그다음부터는 우리 쪽에서 애 쓸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은 없습니다. 막혀있습니다.
이 성전의 장소는 이스라엘의 열두지파 가운데서 오직 한 지파가 대표, 유다 지파가 대표로 주어져서 성전 만들었어요. 이 ■유다 지파가 대표해서 열두지파를 대표해서 나서는 이 언약을 가지고 무슨 언약이냐? 다윗 언약이라고 합니다. “나는 다윗하고만 이야기한다.”
㉮전에는 “나는 열두지파 모두하고 이야기할게. 율법으로.”
㉯이다음에는, “난 다윗하고 언약한다.”
㉰그다음에 다윗 언약 성전 불타고, “나는 누구하고도 이야기 안 한다.” 나는 누구하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전에 율법을 준 취지는 어떻게 되고 다윗에게 이야기한다는 이 취지는 그러면 하나님께서 괜한 말을 하신 건가? 이 취지는 어디서 살릴 것인가? 여기에 대한 해답은 이렇습니다. ㉱“나는 다윗의 자손하고만 이야기하겠다.” 그러면 다윗의 자손이 그것도 인간이니까 인간하고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과 틀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대화상대가 되는 다윗의 자손은 인간의 육의 혈통 계통으로 오는 게 아니에요. 성령으로 마리아에게 임신해서 인간인데 전혀 인간이 있는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잉태시키고 잉태된 자만 이야기하면서 ■새 언약을 이루어 버려요. 그러니까 이걸 가지고 로마서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서는 그걸 뭐라고 하느냐? 기쁜 소식. 이걸 복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나하고 상대하지 않아 주셔서 너무 기쁩니다.”하는 거에요. 그러면 나하고는 상대 안 했는데 예수님하고 상대한 것이 나랑 무슨 상관이, 무슨 상관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럼 나는 무슨 상관이 있느냐? 바로 하나님은 너하고는 상대하지 않고 따로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에게 잉태한 그분과 상대하는 것을 믿어라.” 이러는 거에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는거에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겁니다. 그러면 그 전제 조건이 뭐냐? 하나님은 나하고 상종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깔아야 되죠. 이게 얼마나 기쁜 소식이에요?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짐이 되거든요. 이 덩어리. 어떤 사람은 몸무게가 61kg 나간다는데. 61kg 나가는 덩어리.
저는 72kg 굳이 알릴 필요는 없지만... 이 덩어리. 맨날 몸무게 저울질 해가지고 불었는지 줄었는지, 불어도 걱정 줄어도 걱정. 이 짐을 계속 지고 가는거에요. 언제 이 짐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벗을겁니까? 복음 안에서 그것이 이미 해소되었다는 사실을 후차적으로, 사후적으로 일이 끝나고 난 뒤에 차후적으로 우리는 수용되게 됩니다. 이거는 우리가 믿는 믿음이 아니고 주께서 에베소서 2장 8절에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그 안에서 선물로 온 믿음 안에서 다했네, 다했어. 그렇게 되죠. 그 선물이 오면서 왜 우리는 율법을 못 지키고 왜 다윗에게 언약도 성전 하나 예배당 하나 제대로 관리 못 해야 되느냐는 것을 한꺼번에 우리는 성경 구약성경 신약성경 다 같이 밀려옵니다. 주께서 다 하셨다는 그 토대 위에 다 밀려와요.
그래서 이 신명기에서는 바로 그 점을 여러분 생각하신다면 ■하나님의 자기 이름을 두시려는 이 자리는 결국 다윗에게도 실패하고 다윗의 자손, 다윗에서 나온 다윗의 자손에게 자기 이름을 두시고 그게 영원한 성전이고 생명이라는 사실. 그게 하와, 여자의 후손에 의해서 완성되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신명기에서부터 그 흔적을 그림자를 찾아볼 수가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때까지 우리가 어떻게 버텨야 되는가?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는데 어떻게 버텨야 되는가? 그러면 구약 성전은 모조리 다 지옥가는구나. 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제가 이 신명기에서 한번 뽑아봤어요. 뭘 뽑아봤느냐 하면, “죽여”를 뽑았습니다. 이런 짓 한 자는 아예 죽여버려라. 그 대목을 쭉 한번 뽑아 봤습니다.
그 근거가 모세 언약에서 나왔기 때문에 여러분 이것 찾으면 팔 아프니까 제가 알아서 대표로 찾고 여러분 듣기만 하세요. 출애굽기 21장 14절, “사람이 그 이웃을 짐짓 모살하였으면 너는 그를 내 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찌니라”
15절,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찌니라”
16절, “사람을 후린(유괴) 자가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 수하에 두었든지 그를 반드시 죽일찌니라”
17절,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찌니라” 그다음에 32절, 이건 소에 관한 거고요.
출애굽기 31장 15절,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제 칠일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무릇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반드시 죽일찌니라” 안식일에 일하는 사람. 이것 죽이고 저것 다 죽이고... 뭐 남는 사람이 없겠네요. 다 죽이고요.
레위기 24장, 출애굽기 다음 레위기죠. 24장 16절,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찌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라 외국인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죽일찌니라”
레위기 27장 29절, “아주 바친 그 사람은 다시 속하지 못하나니 반드시 죽일찌니라” 하나님께 바친 물건을 팔거나 한 사람들은 속함도 사함도 받지 못하고 반드시 죽일찌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민수기 3장 38절, “장막 앞 동편 곧 회막 앞 해 돋는 편에는 모세와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이 진을 치고 이스라엘 자손의 직무를 대신하여 성소의 직무를 지킬 것이며 외인이 가까이 하면 죽일찌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여기 근거해서 드디어 신명기가 쭉 됩니다. 신명기 13장부터, 그러니까 신명기 12장에 택한 여호와께서 인도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도착하는 그 택한 경로에 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제거 대상자들을 이렇게 반드시 죽이리라고 되어있어요.
신명기 13장 5절, 여기 보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행하라 명하신 도에서 너를 꾀어내려고 말하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찌니라”
13장 9절, “다른 신을 섬기자 한 자는 너는 용서 없이 그를 죽이되 죽일 때에 네가 먼저 그에게 손을 대고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대라” 그리고
10절, “그는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너를 꾀어 떠나게 하려한 자니 너는 돌로 쳐 죽이라” 돌로 쳐죽이는 것은 상당히 현실성, 실감나게 만드는거에요. 사람이 돌을 쥐고 있다는 것은 자기가 거기에 아주 절실하게 관여하고 있다는거죠. 스데반 집사님이 죽을 때 사람들은 돌로 쳐 죽였습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할 때 사람들은 돌을 들고 왔어요. 여인 있고 돌을 갖고, 그다음에 남은 것은 돌로 치게 되면 바로 신명기 율법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신명기 13장 15절, 어떤 집단 마을 전체가 하나님외 다른 신을 섬기자고 같이 편승하거나 동조되어있다면 그 성읍 자체의 모든 거주민들을 다 죽여버려라.
17장 5절, “어떤 남자나 여자가 하나님의 목전에서 언약을 어기고 다른 신을 섬기거든, 그다음에, 성문에서 끌어내어 돌로 그 남자와 여자를 쳐 죽이라.” 성문이라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택한 그 자리죠. 성문에서 죽이라. 그다음에
17장 12절, “사람이 만일 천자히(함부로) 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서서 섬기는 제사장이나 재판장을 듣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하여 버리라” 완전히 제사장과 재판장은 007 살인면허를 갖고 있습니다.
신명기 19장 16절~19절, “만일 위증하는 자가 있거든 이런 자들은 악을 제하여 버려라.” 이게 죽인다는 이야기에요. 그다음에
신명기 21장 21절, “자식이 집에서 말을 안 듣거든 동네에 끌어다가 동네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돌로 쳐 죽이라.” 자식 그동안 1억 들여서 잘 키워놨는데 19살 돼 가지고 말을 안 듣는다. 돌로 쳐 죽이라.
신명기 22장 21절, “누구든지 처녀가 아닌데도 처녀라고 속이고 결혼하거든 그 처녀를 돌에 쳐 죽여라.” 가뜩이나 애기 못 낳아서 지금 인구수 줄 판인데, 이래 죽이고 저래 다 죽이고 좀 남는 사람이, 살아 남는게 희한해요. 아까 우리 십자가 마을 전문 사진가가 사진 찍었잖아요. “서로 웃으세요”하고 찍었는데 과연 누가 살아 남을지... 아, 이거 신명기 들이대면 참담합니다.
22절, “남자가 유부녀와 통간하는 것 보면 쳐 죽어라.”
신명기 24장 7절, “사람이 자기 형제 곧 이스라엘 자손 중 한 사람을 후려(유괴)다가 그를 부리거나 판 것이 발견되거든 그 후린 자를 죽일찌니”
신명기 18장 20절, “만일 어떤 선지자도 아닌게 선지자 흉내를 내거든 돌로 쳐 죽이라.”
19장 12절, 이제는 목사가 쳐죽을 판이에요. 교인이 목사 고소하고 교회 분위기 참... 겁나서 설교를 못하겠어요. “쳐 죽여버려라”. 19장 12절, “만일 어떤 사람이 생명을 상하게 하고 죽게 하거든 그 사람은 아주 불쌍히 여기지 말고 쳐 죽여버려라.” 신명기 20장 13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네 손에 붙이시거든 너는 칼날로 그 속의 남자를 다 쳐 죽여라.”
신명기 25장 12절 “만약에 자기 부부가 만났는데 남편이 남편끼리 싸우는데 여자가 아내가 자기 남편의 편을 들기 위해서 힘을 보태기 위해서 상대방의 남자의 음낭을 잡거든 그는 그 여인을 불쌍히 여기지 말고 너는 죽여버려라.”
자, 이제 질문 나갑니다. 이렇게 신명기에서 이것 죽이고 저것 쳐 죽이고 다 쳐죽이고 이렇게 할 때 거기에 대한 이스라엘 역사 속에 사람들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은 뭡니까? 뭐가 되겠어요? 반항이죠. 반항입니다. 해도 해도 너무했다는 겁니다. 신명기 13장 6절에 보게 되면, “네 동복 형제나 네 자녀나 네 품의 아내나 너와 생명을 함께하는 친구가 가만히 너를 꾀어 이르기를 너와 네 열조가 알지 못하던 다른 민족의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할찌라도 너는 그를 좇지 말며 듣지 말며 긍휼히 보지 말며 애석히 여기지 말며 덮어 숨기지 말고 네가 먼저 손을 얹고 난 뒤에 죽여라” 그러니까 “여보 어디 같이 좀 가자. 당신 어제 이 여호와보다 괜찮은 신이 있던데 당신 한번 믿어볼래? 네 어젯밤에 새벽 2시 46분에 이야기했잖아. 어디 갈래?” 가가지고 마을광장에서 안수하고 쳐 죽여버려라. 아내. 아내하고 헤어지는 방법도 괜찮은 방법이에요. 아예 율법을 동원해서 사적인 소망을 이룰 수도 있는 문제죠.
■왜 이렇게 하시는가? 왜 이렇게까지 하나님께서 하시는가? 심지어 가족인데요. 참 이것을 위해서 여러분들이 어려운 용어를 했습니다. 수적 일의성, 이 구조에 질적인 일의성 구조. 구조라는 말은 현실. 현실이 계단에서 내려오는, 계단에서 계속해서 어린양의 피가 넘어오면서 이스라엘 전체까지 확산이 되면서 벌어지는 상황은 이 율법이 사적인 일까지, 사사로운 일까지 개인적인 일까지 가정의 일까지 모두 이스라엘 전체 일에 속속들이 들어왔을 때 여기에 모든 관계성을 율법을 집어넣어서 절단시키는거에요. 죽여버려. 죽여버려. 죽여버려. 하는 식으로 절단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수적 일의성, 수적으로 내 존재를 지키려는 의미에서 어린양의 피의 의미로 넘어오는 그러한 새로운 집단을 구성하는 방식에서 신명기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이걸 생각해야 돼요. 창세기 3장 19절에서 어차피 우리는 흙으로 와서 흙으로 죽는 거에요.
죽는데 그러면 생명은 어떻게 되는가? 생명은 저주 받은자 + 언약, 모세율법 하게 되면 여기서 뭐가 나온다? 생명이 나오는 공식. 이 방정식을 하나님께서는 성취하려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결국은 인간을, 어차피 죽을 인간을 이용해서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생명의 생명 나무의 현실성을 구현하고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찾아오는거에요. 그러면서 하나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사랑의 하나님이고 너희들을 긍휼히 여기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여기서 반드시 내가 언약을 준 너희와 언약이 없는 다른 민족과 극단적으로 차별화시킨 것이다.” 그 차별화시킨 것을 신명기 4장 5장 계속 보면,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이게 출애굽기 십계명에도 나와요.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내가 준 사랑의 대상체를 지키기 위해서 나는 사랑 is 뭔들. 사랑을 위해서 내가 뭔들 못하리. 질투하면서 제거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뭔지를 알리기 위해서.
제거될 자는 제발 좀 죽여줘. 죽어 나가 제발. 어차피 너는 죽잖아. 저주받아 죽잖아. 이게 바로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지금까지는 뭐냐? 제거 대상이죠. 그럼 제거 대상만 있느냐? 제거 대상만 있는 게 아니에요. 신명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챙기는 사람도 있어요. 하나님께서 이런 이런 자를 챙기라는 겁니다. 그 챙기는 대상자가 누구냐? 바로 레위 지파에요. 레위 지파의 특징은 뭐냐? 땅이 없어요. 땅이 없다. 따라서 레위 지파의 같은 류. 같은 부류에 속하는 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땅 없는 자, 땅 없는 자가 누구죠? 나그네. 그다음에 고아. 그다음에 과부. 이 고아와 과부, 나그네. 이거는 외국 이주민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한국에 취직하려고 캄보디아에서 오고 이걸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그건 글로벌한 세계에서 자기 나라 네팔에서 버는 돈보다 한국에서 버는 돈이 한 달만 해도 일년치 다 버니까 그걸 노리고 오는 것은 그건 이주민이에요. 그건 난민이고. 여기서 말하는 이거는 이스라엘 내의 이야기에요. 이스라엘 내. 직통하는 하나님이니까 언약을 주신 자기 이스라엘 동포와 동족에 관한 문제에요. 이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 이들이 레위 지파는 원래 하나님께서 땅을 허락하지 않았어요. 부동산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근데 부동산 허락한 예외는 있어요. 뭐냐? 지방 제사장들. 지방 근무하는 제사장들은 특별히 그들에게 중앙 성소, 서울에서 근무하는 것과 지방, 대구에서 근무하는 것 하고 달리 처리해줬어요. 역시 중앙에서 해야 먹을게 많이 나오죠.
왜 그러냐 하면 십일조가 중앙에 다 모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땅은 없는 대신 여기 뭐냐? 다른 열두 지파에서 짬짬이 냈던 그 십일조를 레위 지파와 거의 같은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에게 주는 겁니다. 그러면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는 원래 레위 지파가 아니고 이거는 다른 지파의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거든요. 근데 원래 뭐가 있습니까? 땅이 없었던 게 아니고 땅이 있는 자들이에요. 땅이 있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땅을 빼앗든지 아니면 땅을 개간해서 생산물을 낼 수 있는 가장을 하나님께서 빼앗아 버려요. 그러니까 가장이 남자잖아요. 남자를 죽여버려요. 여기서. 과부, 아빠 엄마 다 죽이죠. 나그네는 땅을 빼앗기게 되죠. 땅을 빼앗기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빚을 졌을 경우입니다.
이들을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이걸 만들어내요. 의도적으로. 왜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느냐 하면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 이들이 출애굽의 취지를 계속 실어나르는 화물 객차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화물 객차. 출애굽 때에 “이젠 출애굽 끝났어. 끝났어. 우리는 홍해 건너왔어. 이제는 약속의 땅에서 우리끼리 살면 돼.” 이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거에요. 인간들은. 이게 뭐냐? 인간의 기억이에요. 인간의 기억은 시간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은 늘 누구하고 대화하느냐? 과거의 나랑 대화해요. 인간은 늘 과거의 자신과 대화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혼자서 중얼중얼하든지 아니면 누굴 친구를 만나도 그 친구하고 대화하기 싫어요. 친구니까. 친구와 전에 좋았던 그 시절을 친구에게서 뽑아내려고 하는 겁니다. “우리 옛날 잘했던 것 있잖아. 축구 한번 할까?” 이렇게. “우리 옛날 전에 만났던 그 우리가 연애할 때 갔던 그 앞산에 가볼까?” 이런 것. 과거를 기억을 유지함으로써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가 한결같이 동질성을 갖고 있다고, 동질성 자기 스토리를 이야기를 유지하는 것이 인간이 평소에 대화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그걸 어떻게 장담하는가? 여러분 꿈에 보세요.
제대한지 40년 돼도 군대이야기 나옵니다. 꿈은 속일 수가 없어요. 의식적으로 못 숨깁니다. 왜 군대 생활이 남자한테 그렇게 계속되느냐 하면, 꿈에는 군대 생활은 나를 지키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 한거에요. 얼마 전에 군에 제대한 사람도 있지만... 자칫하면 나를 잃어버릴 뻔한 시기에요. 그래서 남자는 군대를 갔다 와야 된다는 말이 그거에요. 방위 출신은 넣어주지 않습니다. 나를 잃을 뻔 했을 경우에 그 잃을 뻔했던 아픈 상처를 지금의 나를 긍정하는 재료로서 꼭 필요한 거에요. “아, 그때 군에가서 갈뻔했다.”라는 그것으로서 열심히 살자 우리야. 우리 열심히 살자. 과거의 기억을 계속 유지해나가자.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만들어 나가는 영화감독입니다.
하나하나가 지난 모든 것이 자기가 만든 작품이에요. 그 동질성을 모아서 타인에게 대화하면서 다른 사람의 동질성을 연결하는 거에요. 근데 이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는 뭐 없어요 없어. 누가 없앴느냐? 전쟁을 일으켜서 고아와 과부, 아빠 엄마. 전부 다 전쟁 나가서 전사하게 만들어버렸어요. 졸지에 뭐냐? 자식들은 고아가 되니까. 땅이 있어도 친척들이 다 가져갈 수 밖에 없고 못 먹고 사니까 땅을 담보로 해서 빚을 냈는데 빚에 이자가 있으니까 결국은 이거는 자기 있는 땅까지 자기 자본까지 다 날리는 거죠. 과부도 마찬가지고 나그네도 마찬가지고.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십일조 거둬서 3년 만에 있는 십일조를 이들 제사장도 먹지만 이들도 다 줘버려라. 그리고 땅 가진 자가 이들에게 혜택을 베풀어라. 땅 가질 때에 야무지게 쌀 한 톨까지 청소기 가지고 윙 하고 딱 뽑아내지 말고 대충하고 나머지는 땅에 이렇게 주워가세요. 가져가세요”하고 시혜를 베푸는 일을 하라는 거에요. 그리고 어려운 사람일 때 네가 손을 놓치 말고 구제하라는 겁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이 이점을 꼭 아셔야 돼요. 어떤 점이냐 하면 인간에게 인간이 평소에 가장 큰 부채. 빚이 뭔 줄 알겠어요? 인생에 있어 가장 큰 부채. 부채라 하는 것은 짐입니다. 부채 도사 이것 말하는 게 아닙니다. 가장 큰 짐은 뭐냐 하면 구제당함이에요. 거저 얻어먹는 것.
인간이 구제 대상 될 때 인간은 드디어 자존감 다 날아갔습니다. 내가 가난하다는 그 자체가 구제 대상이 되고 구제 대상을 통해서 나는 영원히 잃어버립니다. 더 이상 나라는 게 없어요. 그리고 이 구제는 갚을 길이 없습니다. 바로 우리가 예수 안에 들어갈 때 우리가 갚을 길이 없는 부채를 짊어지고 예수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거 뭐 예수 안에 들어갔을 때는 나에 대해서 주장할 수가 없어요. “뭐 제가 어떻게 십자가 은혜받았고 구원받았는데 어떻게 보답해 드릴까요?” 하면, “너 십자가 피를 네 돈으로 네가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해? 너는 원래 죽을 목숨이야. 그러나 생명의 목숨을 너를 위해서 구제하듯이 그냥 너를 구제죠. 구원이죠. 너를 구원해줬는데 그걸 네가 갚는단 말이야?” “일부라도.” “일부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걸 갚아? 차라리 못 갚는 사랑을 받았다고 증거 해버려.” 그게 바로 성도가 할 수 있는 전부에요. 그게 신약성경에 쭉 나오는 거에요.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내가 갚을 부채에 내가 완전히 덮혀버린 거에요. 여러분이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가두어두고 15년 동안 군만두 먹인다면, 여러분 복수할 거에요? “아, 군만두 너무 질렸는데... 다른 걸로 바꿔주면 안 됩니까?” 여러분 어느 쪽입니까? 여러분들이 하나 얻어먹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은혜를 주시는 것은 “앞으로 너는 입이 있고 코가 있고 눈이 있더라도 “저는요, 저는요, 나는요, 나는요.” 그 입 다물어라.” 네가 너를 키우거나 너의 가치를 지탱할 수 있는 자격이 애초부터 구제로 인하여 거저줌으로 인하여 박탈당한 상태에요. “우리가 예수님과 죽고” 할 때에,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죽고 할 때에 그 의미입니다. 일방적으로 찾아와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로 규정해버린 겁니다. 그게 왜냐? 출애굽. 그게 구원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구원의 방식이기 때문에. 다른 방식은 없어요. “내 살과 내 피의 가치를 너가 너를 구제했는데 너가 내 살과 내 피를 무슨 수로 그걸 비등하게 갚을 길이 있어?”에요. 없어요.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면 안 갚아도 됩니까?” 안 갚아도 되죠. “그러면 안 갚으면 저는 뭘 하면 됩니까?” “기다려봐 내 죽여 줄게.” 처음에는, 지금은 머리 부분이 날아갔어요. 우리가. 왜? 우리 머리를 대신 예수님의 머리가 대신했기 때문에. 그다음은 우리 가슴, 몸통, 꼬리까지 홀라당 사라질 겁니다. 이 땅에서. 미꾸라지 사라지듯 사라지죠. 자, 이렇게 볼 때에 하나님께서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어린양을 생명의 노선으로 주께서 집어넣는다는 말은 이 생명의 노선의 취지하고 맞지 않는, 다른 말로 하면 출애굽 했던 그때 그 사건 시절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자들은 전부 다 제거를 하게 되는데 그 제거하는 방식이 뭐냐? 율법이었습니다. 율법은 아까 본 것 처럼 사람을 죽이고 죽이고 악을 제하죠. 악을 제하는 이유가 너는 왜 출애굽의 거저 주시는 은혜의 취지를 잃어버리느냐? 그걸 근거로 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린양과 함께 갈 수 없는 자로 분류시켜서 제거해 버리는 것이 바로 이 신명기에 나오는 이런 말씀이에요.
처음에 우리가 신명기 이 시간 볼 때에 “너무하시다. 너무 잔인하십니다. 뭐 어떻게 그렇게 하십니까?”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그럴 줄 알고 하나님께서 신명기 9장 4절 한번 봅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얻게 하셨다 하지 말라 실상은 이 민족들이 악함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니라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악한 자를 앞장세워서 악한 자를 처벌함으로써 악한 자에게 “나도 동일하게 악한 자였는데 왜 저들은 사랑을 받았습니까?”하는 고백이 터져 나오도록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이 현실 속에 계속 이끌어 가시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여러분들이 만약 일기를 쓴다면 오늘 7월 29일이죠. 날씨 맑음. 왜 주님을 나를 지옥으로 안 보내고 있는가? 그 다음날. 오늘은 흐림. 오늘은 소나기 온다는 소식이 있음. 왜 하나님께서는 나를 지옥으로 안 보내는가. 그다음 8월 1일... 그러니까 질문을 반대로 해야되는거에요. “왜 저를 구원하십니까?”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이라는 미국 가수가 불렀던 그 노래. Why me? 왜 하필이면 저를 이라는 노래가 있거든요.
제목 보면 굉장히 은혜로운데 가사를 보게 되면 왜 다른 사람은 안 건드리고 왜 저는 건드리십니까. 제가 무슨 장이수가 되는겁니까. 왜 자꾸 찾아와서 괴롭힙니까? 그 괴롭히는 것이 그게 바로 하나님의 관심사고 그게 사랑이에요. 계속 하나님께서 대화를 시도하고 말을 건내는 겁니다. ‘Shema!’ “내 말을 들으라. 너는 나의 포로야. 같이 가야 돼. 유월절 어린양과 같이 가야 돼. 어린양과 더불어서 같이 가야 돼.” “저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러면 주님께서, “그러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짐승은 무슨 죄가 있어서 너 대신 피를 흘렸느냐?” 이걸 이제 묻는 겁니다. 그 짐승을 인간이 잡는다에서 신약에 오게 되면 인간이 낯선 인물을 잡아요. 근데 낯선 인물이 스스로 뭐냐 하면 내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고 짐승과 예수님을 자기를 일치시켰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랍비들의 전승에 따르면, '쉐마'는 원래 신명기 6장 4절만을 가리켰으나 후에 신명기 6장 5-9절까지 포함한 것이 되었고, 더욱이 제2부분(신11:13-21)과 제3부분(민15:37-41)까지를 포함한 넓은 의미의 '쉐마'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너희는 들으라'는 뜻
세례요한이 그렇게 하늘로부터 계시받았어요.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양이 사람이 되고 어떻게 사람이 양이 되는가? 거기에는 바로 율법이라는 다리. 브릿지. 다리를 통해서 이것이 하나가 될 수 있는 여지를 신명기에서 이미 하나님께선 보여줬습니다. 이 이야기하고 이번 시간 마치겠습니다. 어떻게 신명기에 개입하느냐. 여기에 개입하는 것이 바로 레위 지파에요. 레위 지파. 레위 지파는 어떤 지파냐 하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마다 이미 자기는 죽은 자에요. 죽은 자. 땅이 있든 없든 자식, 가족이 있든 자기 아내가 있든 자식이 둘이 있든 관계없어요. 이미 자기는 죽은 자로 들어가는거에요. 죽은 자로 들어가다가 다시 일 마치면 산자로 나오는데 거기에 누가 했느냐? 바로 어린양,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내 대신 죽음으로써 진작에 죽어야 될 내가 하나님의 율법이 작동되는 조건 하에 내가 계속 살고있는 거에요. 그래서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의 뭐냐? 모터, 엔진입니다. 모터와 엔진이에요. 여러분 아시다시피
■이 레위 지파가 이 제사가 나중에 형식으로 실패하죠.
■그럼 레위 지파의 유지를 받드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왕으로 등극시키는데 다윗이었고 다윗도 그 후손들이 실패할 때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다윗의 자손이 되어서 이 모든 인간의 실패를 홀로 다 담당해서 십자가에서 뭐라고 외쳤냐? “다 이루었다.”하는 거에요. 다 이루었다. 이 다 이루었다의 의미를 위해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나는 너하고 상대하지 않는다”는 거에요. 다 이루었다가 그것만 이미 계속 십자가 성령을 통해서 살아 있다면 너는 그 안에서 너는 살아있다는 겁니다. 살아있는 채로 한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