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여름수련회

3강-질적 일의성

아빠와 함께 2024. 8. 3. 09:45

2024 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제3강-신명기: 질적 일의성
(강의:이근호 목사)


세 번째 강의는 유월절 어린양에 대해서 출애굽에 나오는 그 요소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신명기는 출애굽하고 난 뒤에 율법을 준 것을 나중에 모세가 마지막 경계선, 광야와 약속의 땅의 경계선에 서서 지난날에 있었던 율법과 인간의 만남에 있었던 모든 사건을 재해석하면서 언급한 것이 신명기거든요.

지금 내가 말하는 그것은 옛날에 말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지금 너희와 언약을 맺었다. 신명기 5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언약은 우리 열조와 세운 것이 아니고 오늘날 여기 살아 있는 우리와 세우신 것이다, 해서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율법이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현재 우리가 있다는 뜻이에요.

우리의 지속이 문제가 아니고 율법이 그 완성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여정 속에 당신은 초대되었습니다. 율법은 당신들이 요청한 것이 아니고 율법이 당신들을 요청했다는 그런 관점에서 해석하면서 신명기가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누구냐?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이냐, 아니면 유월절 어린양이 하나의 요소로서 내포된 그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인가를 분명히 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만약에 우리라고 한다면 이스라엘은 도중에 탈락자가 없어야 돼요. 광야에서 그들을 다 살려야 돼요. 그런데 홍해 건너온 사람들이 다 죽었다는 말은, 하나님이 정작 살리고자 하는 것은 따로 있는 거예요. 율법과 다이렉트로 연결되는 것은 유월절의 어린양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을 살리기 위해서 율법과 더불어 이스라엘을 찾아온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 합당한가, 그들이 부합되는 인간이 될 경우에만 율법의 백성, 여호와의 백성이 된다는 조건을 주께서 거신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둘로 나눠질 수밖에 없는데 우리에서 우리로 갈 때는 중간에 뭐가 삽입돼야 하느냐 하면 유월절의 어린양의 요소가 우리에서 우리로 나와야 되는 겁니다. 이 우리라는 것이 뭐냐? 지난 시간에 한 걸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우리라는 것이 순서, 그러니까 인간의 문명 초기에서 운동의 순서에요. 운동의 순서가 계속 결과를 맺으려면 그다음 순서, 그다음 순서로 계속 이어져가는 거예요. 결과를 낳고, 결과를 낳고 계속 화살표가 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새가 둥지를 만드는 것처럼 하나의 결국은 구심점을 형성하는데 그게 둥지지요. 새들이 여기저기서 운동하면서 활동하면서 나뭇가지를 뜯어 와요. 나무에 붙어있는 에너지를 차용해서 자기 에너지로 집합시키는 그것이 하나의 원인과 결과의 연결고리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제가 서수라 했죠. 서수는 B.C.3500년경에 처음으로 만들어진 겁니다. 3500년 후에 기수가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기수라는 것은 어떻게 가느냐 하면 그 원인과 결과, 원인과 결과 그것이 점점 원형으로 맺어지면서 어떤 집약이 되는데 이 집약 자체가 비어있는 공백이라고 했습니다. n, 그다음에 n+1, 그다음에 계속해서 공백이지요. 이 공백의 빈자리를 인간들은 뭐로 채우느냐 하면 운동에서 그다음에 정지로 나서면서 이 전체 순서를 1로 쳐버리는 거예요. 1로 하면 여기서 빈자리를 서수가 있던 그곳에 기수가 여기에 등장하는 겁니다.

이것을 뭐로 보느냐? 이 전체를 하나로 보자는 거예요. 집합적 의식을 가지고 하나로 보자는 거예요. 하나로 봐서 여기서 나가 되는 거예요.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동영상이 지금의 나를 만들기 위해서 이때까지 이러한 운동들과 변화가 일어났다는 의식을 숫자를 생각하면서 드디어 하나가 딱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가 되면 정지돼 있는 거죠.

사과가 있다면 사과를 어디서 따왔느냐는 서수에 관한 문제지만 여기 사과가 세 개가 있다는 것은 한 개 있고, 한 개 있고, 한 개가 있는 겁니다. 이것 단일체, 이것 단일체, 이것 단일체. 1+1+1 하면 뭐가 되지요? 3이죠. 3도 또 하나의 이 전체를 동그라미 치면 3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1과 3은 연결이 없어요. 그냥 전체, 전체, 전체를 보는 관점이 1과 3을 만드는 겁니다.

이 의식이 왜 중요하냐 하면 유월절의 어린양이 새로운 단일체 1의 기수로 등장하는 거예요. 양을 잡음으로서 양이 모든 인간들의 마지막 기수 자리 1에다가 무엇이 개입되느냐 하면 유월절의 어린양의 피가 개입돼버려요. 개입되게 되면 비로소 인간의 이스라엘은 기수적 단일체에서 질적 일의적 단체가 돼요. 질적으로 질을 포함해서, 숫자는 질이 없어요. 질적으로 뭔가 하나의 의미를 갖는 단일체로 전환됩니다.

그 상태는 질적이 없어요. 자기 운동밖에 없기 때문에 고정된 확정된 정지된 질적인 것이 없는데 인간들은 대책이 없이 살아온 그것을 나라고 내가 나한테 규정해버린 거예요. 내가 나한테 규정한다는 것은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이 존재가 있으면 이 존재 자체를 확인하기 위해서 어느 층으로 올라간다 했어요? 의미로 와서 그 의미를 다시 존재로 다시 끌어당기는 식으로 자기 존재의 가치와 의미를 챙기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올라가고 내려오면서 이거는 ■수적 일의적 개체가 되지요. 질적이 아니고 내가 수적으로 계산해서 하나의 의미로 내가 단일체로 자부하고 있는 것, 이것을 쉬운 말로 개인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 개인이 사회와 만나면 주체가 되는데 아직까지 사회는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라는 의미는 16세기 들어와서 사회 주체가 생기기 때문에 그때는 그냥 개인이에요.

개인은 밥이지요. 왜? 이런 하나의 수적 일의적으로 갖고 있는 인간들의 본래 의미는 유월절 어린양 하기 이전에 이미 인간들 사이에서 그것이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만드는지 사회가 복잡하고 인구가 늘어나니까 그게 수적 일의적, 하나의 단일체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의외로 간단합니다. 지난 시간에 여러분들이 피곤해서 못 들은 그걸 메우겠습니다.

‘내가 생각한다. 내가 여기 존재한다.’ 이것은 내가 말을 하게 되면서 나오는 후차적 의미에요. ‘내가 참 생각했지, 내가 존재하지.’ 이거는 내가 말을 하면서 하는 거고, 이 말이라는 것이 왜 무슨 권리로 먼저가 되느냐 하면 어린애가 있을 때 어린애 주변에 무슨 환경이 돼 있느냐 하면 말하는 환경이 어린애의 존재보다 먼저 우선돼 있습니다. 아빠, 엄마란 가족이.

그래서 아빠, 엄마란 가족은 애를 하나로 수적 일의적으로 쳐줘요. 뭐냐 하면 아빠 1, 그다음에 엄마 1이니까 이걸 집합으로 묶어버리면 뭐냐? {1.1}={2}가 되는 거예요. 애 하나 태어났잖아요. 그러면 {1.1.1}={3}, 집합 3이 되는 거예요. 이 3을 뭐라고 하느냐? 이걸 가족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1 속에 아빠가 살아온 동영상이 들어있어요. 지난 운동이 순서적으로 들어있어요. 이걸 또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이렇게 순서, 순서, 순서 하는데 항상 뭐냐? 미지의 여백이 남아있어요. 마저 채울 수 없는 게 있다고요. 마저 채울 수 없는 것을 뭐로 채우느냐? 지나온 살아온 모든 인생을 이걸 하나로 치자는 거예요. 의미가 그래야 무심코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고 다 나 잘되기 위해서 살아온 인생이라는 단일 의미가 발생되는 거예요. 단일 의미를 일의적 하나의 의미체가 되지요.

아빠 있고 아빠가 여기 환경에 개입하고, 엄마가 환경에 개입하고. 아기 태어나기 전에 아빠, 엄마는 두 명인데 가족이 아니고 부부라 하지요. 부부가 형성돼 있는 겁니다. {2}로 형성돼 있는 것을 또 하나의 집합으로 묶어버리면{{2}} 2는 뭐가 되느냐? 새로운 단일적 1, 우리는 하나의 가족이다. ‘우리가 남이가’ 뭐 이런 거요. 우리는 한 몸이다. 2인데 하나가 돼버렸어요. 뭔가 이상하게 반칙 같은 느낌이 들어요.

여기서 애가 태어났다. 아빠, 엄마가 말을 합니다. 어떤 말을 하느냐? 1과 1이 2가 되었다는({1.1}={2}) 동영상을 언어로 담아서 애한테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는 아빠고 너는 아기인데, 나는 엄마고 너는 아기인데 너는 어디 속하느냐? 내가 지속적인 단일적인 의미를 추구하기 위해서 너는 내게 포함이 되었다고 하는 거예요. 포함이 되면서 뭘 붙여주느냐? 아기를 1을 만들면서 붙여주는 게 바로 name이름입니다, 이름. 이름이 붙여져요. 이름값을 하라는 거예요. 네 소속이 우리 가족이란 걸 잊지 마라.

그런데 사회가 되면서 이 가족 있잖아요. 가족 하나, 수적 단일체를 포획하는 단체가 등장합니다. 모든 가족들을 전체 집합으로 묶어서 하나로 만든 이것이 뭐냐 하면 국가의 등장이에요. 가족은 반항하지요. 내 행복이 우선이니까. 그래서 가족은 도피하고 국가는 따라오면서 포획하고. 비 올 때 다리 놔줄까? 그러면 우리 마을은 정말 좋은 마을 되겠지요. “그래. 다리 놔줄게. 그런데 세금은 내야 돼.”

그러니까 이게 서수…, 순서가 있고 전체잡기, 그다음에 위계질서 이렇게 되는 거예요. 순서는 서수지만 전체잡기에서 기수가 되고, 기수에서 더 큰 넓은 기수, 집합적으로 많은 기수로서 수적인 하나의 의미니까 일의체의 등장이 되는 겁니다. 수적인 일의체에요. 왜 질적은 안 되느냐? 질적은 처음에 순서 지을 때 여기에 공백, 아무런 질이 없어요. 그냥 운동을 위에서 내려다봐서 1로 그렇게 나는 이것을 내 인생이라고 여긴다, 라고 본인의 일방적인 해석이 가미되었기 때문에 이거는 수적으로만 이야기할 뿐이지 질적은 없어요.

그 질은 누가 부여하는가? 그 질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부여해버리는 겁니다. 이게 등장한 게 이스라엘이에요. 이걸 그림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우리 가정의 기수, 우리 가정의 아들로서 전체잡기, 기수가 되지요. 위계질서가 되기 위해서 이 가정에 태어난 아기를 뭘 해야 위계질서, 너 높은 레벨의 기수에 오를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되겠어요? 학원을 다녀야 돼요. 강남에 있는 학원을 다녀야 돼요. 그런데 누구 좋으라고? 가족이라는 집합체 좋으라고.

그런데 강남에서 학원을 하는데 국가에서 킬러문항 제거하라는 지시가 내려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고액과외를 하기 위해서 피신해버리죠. 피신할 때 여기에 검찰과 경찰을 동원해서 고액과외 수사에 나섭니다. 그게 뭡니까? 피신에 대한 뭐예요? 포획이에요, 포획. 지금 이 모습을 인생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서수, 기수로 설명이 다 돼버려요. 집합으로 다 묶어버리는 겁니다. 이걸로 설명 안 되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유월절 집어넣는 것은 이렇습니다. 계단이 있잖아요. 계단 제일 위에서 유월절 어린양의 질적 일의적 질적으로 하나의 의미로 굳어진 그 기수가 여기서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발라버리면 이 피는 계단을 타고서 흘러 내려오겠지요. 흘러 내려와서 전체 이스라엘을 적셔줍니다. 초코파이 만들 때 공장에 빵부터 만들고 뭐로 그걸 촉촉하게 적셔주지요? 초콜릿으로 적셔주지요. 어린양의 피로 다 적셔줄 때 이것을 이스라엘의 탄생, 이스라엘이 그렇게 만들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왜 굳이 이걸 애굽에 하느냐? 애굽은 국가입니다. 수적인 일의성이에요. 수적인 하나의 단체, 수적으로 1이라고 칭함으로서 무조건 복종을 강요하는 그러한 단체가 등장하지요. 처음에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국가에 예속하기 싫지만 여기서 수적인 단일체, 많은 가족1, 가족2, 가족3 각종 가정들이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이 전체를 묶은 게 국가인데 다른 나라 국가, 일본이라든지 필리핀, 레바논, 이스라엘 저들 나름대로 규칙이 있잖아요. 그 자체를 단일체, 수적인 단일체로 만들 때 여기서 뭘 하느냐? 여기서 전쟁이 일어나요. 왜 전쟁이 일어나는가? 닫혀있는 집합을 더 확산시키기 위해서 그걸 포함시키기 위해서 이걸 제국주의 의식이죠. 조선을 삼키겠다는.

이걸 해버리면 전쟁해서 수적인 일의성이 어떻게 나름대로 질적인 일의성을 하느냐? 전쟁하는 것은 뭐냐? 선이 뭘 징벌한다? 악을 징벌한다는 명분하에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여기서 선한 의는 어디서 생깁니까? 둘 중에 누가 착하지요? 둘이 축구 한 번 할까요, 양궁해서 결정할까요? 뭐로 합니까? 전쟁이 일어나는 거예요. 전쟁이라 하는 것은 선이 뭘 징벌하기 위해서? 악을 징벌하기 위해서 일어나는 거예요.

“우크라이나 동쪽 부분은 국민들 자체가 러시아 성향을 갖고 있는데 왜 우크라이나가 남의 땅을 역사를 조작해서 러시아 땅을 쥐고 있느냐? 흑해로 진출하겠다.” 그래서 러시아는 침범할 수 있는 명분을 가졌다고 푸틴이 그렇게 했잖아요. 푸틴이 나름대로 대외적으로 자기가 정의롭다고 이야기하지요.

이게 수적으로 그냥 존재할 때는 수적인데 여기서 갑자기 뭐가 나왔습니까? 정의롭다고 나오면 수적이 뭐로 바뀌지요? 질적으로 바뀌지요. 그러면 전쟁을 통해서 전쟁의 정의로움, 진짜 의로움은 어떻게 발생됩니까? 어떻게 나오겠지요? 둘 다 가족 존재하고 있는 입장에서 수적인 일의성 있는 입장에서 정의는 어디서 나옵니까? 전쟁에서 뭐하면 돼요? 승리. 승리가 정의를 결정짓는 겁니다. 무조건 이기고 봐야 되는 거예요. 지면 악한 것이고, 이기면 정의롭고 선한 거예요.

이쪽 나라에 신이 있지요. 이쪽 나라에도 신이 있잖아요. 하나님이라는 것은 자기 존재의 의미를 최종적으로 보증하기 위해서 빈자리에 들어가는 게 신이에요. 내가 그냥 산 것이 아니고 의롭고 바르게 살았다는 것을 보증해줄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서수의 마지막 빈자리에 신을 요청을 하고 초대를 해서 거기다 박아 넣으면 그 신의 기수에 의해서 단일 의미에 의해서 내가 거기에 예속되었다고 자부하면서 나는 의로운 자가 되는 거예요.

이게 모든 민족이나 모든 가정이나 다 그러니까 이게 통합적인 정의로움은 보장이 안 되거든요. 그럴 때 그냥 붙어보는 거예요. 전쟁해서 승리자가 될 때 이것은 뭐냐? 우리 민족의 하나님을 누굴 지켜준다? 우리를 어떻게 복 된 민족으로 정의로운 민족으로 지켜줬다는 그 현실성이 뭐냐? 승리로 나타나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면 우리는 승리한다. 옛날에 영국 국가(國歌) 이름이 뭐냐? ‘하나님이여, 여왕을 지켜주소서’(God Save the Queen) 지금은 여왕이 없고 왕으로 바뀌었지만 그랬어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닮도록, 그건 자연이죠. 자연은 혼란스러워 안 돼요. 이거는 자연을 묶어주는 기수의 역할을 해야 돼요. 하나님도 아니에요. 하느님이 보우하사. 이게 하나님이냐, 하느님이냐 이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모든 가정마다 자기 가정의 정당성을 보장하는 그 빈자리에 하나님이 요청하고 싶은 것은 너나 나나 마찬가지 마음이잖아. 그걸 동의하고 있지? 그러니까 애국가로 지정하자. 하나님 집어넣자. 절에 가도 애국가는 부르자.

그래서 어떻게 해요? 하나님 있으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이게 현실화돼야지요. 현실화되는 방법은 뭐겠습니까? 내가 교회 나와서 하나님 믿었더니만 만사형통하고, 자식 공부 잘하고, 건강하고, 가정이 화목하고, 늘 수입이 날마다 늘어나고. 그때는 뭡니까? 우리는 다른 가족과 비교해서 승리감에 빠지는 겁니다.

승리감에 빠지면 자, 기수가 정해졌어요. 그다음에 아직까지 할 일이 남아있지요. 기수가 정해졌으면 그다음 할 일이 뭡니까? 위계질서로 더욱 높은 단계로 출세해야 되겠지요. 그러니까 아직 새벽제단 해서 기도할 제목이 계속 생기는 거예요. 우리애가 공부 잘해서 검사 됐는데 그게 기수지요. 검사 되면 끝납니까? 검사장 돼야지요. 그래서 국회 나가야지요. 위계질서를 잡는 거예요. 이게 바로 세상입니다. 이게 현상이고.

그 최고의 자리에 왕이 있는 거예요. 왕은 수적 일의성이기 때문에 그냥 빈 공간에 하나로 등장했기 때문에 왕은 뭘 따지지 않습니까? 질적을 따지지 않아요. 왕의 인품, 왕의 성격, 왕의 집안, 왕의 사생활 묻거나 따질 필요 없어요. 그냥 너는 거기 있으면 돼. 왕을 문제 삼고 왕비를 문제 삼는 것은 뭐냐 하면 국민들이 백성들이 ‘너만 왕이냐, 나도 왕이다. 너만 기수야? 나도 기수가 될 수 있어’ 할 때 혁명이 일어나는 거예요.

북한의 김정은 사생활 문제, 기쁨조 그게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아요. 북한 인민민주주의공화국을 하나로 묶기 위해서는 어떤 뚱댕이든 뭐든지 간에 그게 박혀 있어야 돼요. 안 그러면 이게 단일 집합이 되지 않고 각자 집합이 되어 함경도 왕, 평안도 왕 따로 생겨서 나라꼴이 안 돼요. 그러면 집합의 숫자가 줄어들고 힘이 약하게 되면 이건 다른 국가에 포획 상태가 돼요. 중화인민공화국에 포획 상태가 되고 러시아한테 포획 상태가 된다고요. 이게 세상이고 이게 인생입니다.

아무 질적인 내용은 없어요. 내가 여기 있음에 끝이에요. 그런데 거기에다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질적인 내용을 뭐로 채워줬습니까? 마지막에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채워줬습니다. 유월절의 어린 사람이 아니고 유월절의 어린양이죠. 짐승이죠. 짐승이니까 짐승이 어떻게 인간세계의 대표가 될 수 있는가? 그 경로, 그 내력이 율법이 자기 백성에 관여하면서 서서히 밝혀질 거예요. 신약 때까지. 그때까지 율법의 발전은 멈추지 않습니다.

지금 기수의 특징은 정지상태에요. 스톱돼 있어요. 모든 운동의 마감이에요. 포도주 병에 마개가 있지요. 안의 포도주는 그 분자들이 활발하게 운동을 합니다. 발효가 되지요. 그런데 그걸 막고 있는 코르크 마개는 운동합니까, 운동 안 합니까? 거의 죽은 세포니까 운동을 안 하지요. 운동하지 않는 것이 모든 운동을 막아놓으면 그것은 하나의 수적인 단일체가 형성되는 거예요. 죽은 자가 산 자를 하나로 만들기 위해서 죽은 자의 조상이 필요한 겁니다.

그래서 옛날 시대 때 유교집안에 뭘 드리죠? 제사 드리죠. “15대 우리 선조가 임금과 같이 사우나 하고, 밥 먹고, 조선시대 때 우리 선조는 그렇게 놀았어, 마. 너는 우리 족보의 이름으로 살아야 돼요. 우리 가문에 먹칠하면 안 돼.” 이게 단일 집합으로 그렇게 구성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위대한 사람, 훌륭한 이순신 장군 15대손 하면 굉장히 자랑스럽잖아요.

그런데 그걸 생각하세요. 이순신 장군의 15대손이 원균의 15대손에게 상처를 준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어요? 이걸 미리 이야기합니다만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 남에게 피해를 줘요. 가만있으면 되잖아, 하지만 가만있어도 피해를 줘요. 인간은 죄를 빨아 당기는 가습기입니다. 내가 가만있어도 죄가 돼요.

“내가 네 꼬라지 보면, 참. 좀 꺼져줄래? 좀 나가. 퇴직했다고 집구석 앉아있지 말고. 전에 직장 다니는 것처럼 나가 줄래? 이 가정이라는 게 내 나와버리거든. 그냥 저녁 때 들어와. 어디 골프 치든지 네 마음대로 하는 건 좋은데 내 나와버리에 쓸데없이 삼식이처럼 밥 세 끼씩 챙기지 말고 좀 나가. 평생 일군 내 터전이야.” 곧 다가와요. 벌써 넘어선 사람도 있고.

집합체가 중간에 서서히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갑자기 우리는 한 몸이라 하더니 이게 한 몸이 아니었던 거예요. 자기 동영상을 따로 갖고 있었던 거예요. 사우디 가서 낮 기온이 50도 되는 열사에서 돈 벌어주니 아내는 그 돈으로 허비했을 때 동영상이 다르잖아요.

회사 일궈서 기러기 아빠처럼 미국에다 자기 아내와 자식 보내서 공부 다 시켜놓았더니만 아내가 미국 한인교회에서 좋은 남자 만났어. 이제 그만 갈라서자, 했는데 그 순간에 남편 회사가 상장하게 되어 주식이 열 배나 뛰었을 때 이거는 <굿파트너>의 변호사가 와서 개입을 해줘야 돼요. 갑자기 우리 합치자, 이래 나오는 거예요. 니 동영상과 내 동영상, 살아온 동영상이 달라요. 별 볼일 없다고 여겼는데 상장이 되니까 갑자기 볼일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짐승에서 인간에 대한 구원자지요. 유월절 어린양, 새로운 질적이 되면서 주님께서는 이 이스라엘을 짐승이 되기 위해서 뭐로 바꾸느냐 하면 짐승과 합일하기 위해서 광야로 보내버립니다. 광야로 보내면 이스라엘은 두 가지의 새로운 국가가 등장하는데 유월절 어린양의 정체와 관련된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공간이 생깁니다. 시간은 시간을 몰고 다니는 집단, 출애굽기 12장 2절,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라”

따로 시간을 갖는 집단의 등장해요. 기존에 애굽에서의 단체로 하나의 집합체로 적용되는 시간 말고 따로 뽑아낸 새로운 질적 일의적 단일, 하나의 의미로 통합이 된, 하나의 집합 안에 들어온 새로운 이스라엘로 가면서 그들은 기존의 인간들, 이런 어린양의 언약이 포함되지 않는 세상과 다른 시간을 형성하게 돼요. 시간을 몰고 다니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이 짊어진 새로운 시간의 의미는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그건 밤이에요. 그날이 무슨 밤이냐? 42절에 보면, 그날이 무슨 밤입니까? “여호와의 밤”이에요. 이스라엘의 조상은 야곱이에요.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뀔 때 여기에 새로운 시간의 의미가 주어지는데 이것은 밤중에 천사를 얍복 강에서 만났거든요. 그 밤의 요소를 집어넣어서 야곱에게 개인적으로 일어난 일을 그걸 집단화시킵니다. 이스라엘 전체로 질적으로 계단을 통해서 흘려보내지요. 밤을 몰고 다녀요.

밤을 몰고 다니면 이스라엘은 뭐가 되느냐? 이스라엘은 유령성을 띠게 됩니다. 사람이야, 사람이 아니야? 인간이야, 인간 아니야? 새로운 유령성을 띠게 되는 거예요. 유령성이라는 것은 어느 존재와 존재에 박혀서 어느 존재에도 속하지 않는 새롭게 출현된 이 사이에서 나온 것이 뭐냐? 유령이에요.

제자들이 예수님 만날 때 자기와 같은 수적 일의성을 갖고 있는 인간으로 본 거예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봤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여 없앴던 겁니다. “너나 나나 똑같은 인간인데 뭐가 메시아야.”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뭘 보여주느냐? 갈릴리 바다에서 밤에 그냥 걸어왔어요. 지금은 마법사들이 그걸 속임수로 해내지만.

밤에 걸어올 때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한 게 있습니다. 저거는 유령이다, 유령. 유령인 거예요. 주의 이름은 유령에 붙어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예수님만 유령입니까? 그래선 안 되지요. 우리 모든 백성도 이 세상에서 유령 같은 대우, 유령 같은 인식, 유령 같은 의미를 부여받는 작업에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율법으로 개입하기 시작합니다.

율법은 어디서 생기는가? 다시 이야기하면 존재와 존재 사이에서 율법이 생깁니다. 존재라 하는 것은 기존에 애굽에 있던 사람들, 애굽에 있던 국가란 집합체, 단일체의 하나, 개인으로 있어요. 숫자가 몇 명이냐 의미 없어요. 전부 다 옆 사람도 나와 숫자가 하나, 하나기 때문에 7이라는 것은, 1+1+1+1+1+1+1이 모여서 7이라는 또 하나의 1을 만드는 거예요. 7 속에 7이 없어요. 1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7과 1은 아무 관계가 없어요.

7이 말하기를 너는 내 소속이다. 내 말 들으라. 이건 안 돼요. 1은 나의 말을 들어요. 국가를 이용할 뿐이지 국가의 말을 들을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끝까지 1로 가는 거예요. 이게 존재입니다. 존재는 그동안 살아왔던 모든 의미는 존재 하나를 1로 간주하기 위해서 살아온 거예요. 살아온 자기 동영상이 있는 겁니다.

자식이라고 부모 시킨 대로 하는 것은 자식이 크면 그걸 못해요. 세 식구다. 1+1+1은 세 식구다. 그런데 1+1로 이해하지 않고 아빠, 엄마는 이걸 3으로 이해하는 거예요. 3 속에 1이 포함됐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여기 자식은 절대로 3 속에 포함되지 않았어요. 그냥 내 속에 3이라는 환경이 있을 뿐이죠. 이용하면 되지 가족이라는 명분으로 내가 희생할 이유는 전혀 없는 겁니다. 이건 부부도 마찬가지고요. 누가 부부를 한 몸이라 했습니까? 그런 것은 수적 일의체에선 없습니다. 결혼이란 동업이지 결혼생활은 아니에요.

이것이 애굽에 살던 식으로 살았던 이스라엘의 개별적 주입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를 위해서 있지 절대로 하나님을 위해서 있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나를 위한 하나님, 출애굽기 32장 8절에 나오는 거예요. 나를 위한 신을 하나님은 뭐로 규정했느냐 하면 이걸 우상으로 규정한 거예요.

하나님은 ■질적 일의성이 따로 있는데 아무런 질도 없으면서 내가 나한테 스스로 나는 하나라고 존재 규정을 한 그걸 위해서 신을 거기다가 강제로 만들어내는 것은 가짜 신으로 하나님은 간주해버려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결국 우리 모습이라 하는 것은 성경을 통해서는 우리의 모습이 밝혀지지 않습니다. 그저 남들 그렇게 사는데 나로 사는 게 뭐가 나쁘냐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인생은 끊임없는 전쟁이죠. 왜 전쟁을 합니까? 내가 얼마나 선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의미 있고 가치 있다는 것을 전쟁이라는 현실을 통해서 그것을 확인받고 싶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냅니다. 이 현실기존의 현실 이것이 전쟁이고 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현실이 하나님의 복 된 이스라엘 백성이 되는 거예요. 그 확인에 나서는 것이 전쟁입니다.

신명기에 보면 전쟁이 많이 일어나요. 의도적으로. 현실과 현실. 기수가 짜여지면 조직이 되거든요. 기존의 이방민족은 조직 안에 왕이 들어있어요. 그런데 이스라엘 조직은 안에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조직에 아무것도 없게 하느냐? 인간의 나르시시즘, 인간의 자기 찬양은 끝까지 내가 아무리 지식을 얻었다 할지라도 끝까지 자기를 중도에 떨쳐버릴 용의가 돼 있지 않습니다. 내게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나를 개입하고 싶어요.

그래서 인간의 최고의 쾌감은 뭐냐? 인간에게는 두뇌에 쾌감 중추신경이 있는데 어떤 때 쾌감이 높으냐 하면 모든 일에 나 이야기할 때 가장 쾌감이 높아요. 나한테 주도권 가질 때 가장 쾌감이 높습니다. 남과 이야기할 때 그런데 말이야 좀 끼어들게, 할 때 내가 지금 대화의 주도권을 쥐어야 쾌감이 높아져요. 그러면 이 시간이 허비되는 시간이 아니고 자기에게 보람 있는 시간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목사라는 게 얼마나 좋겠어요. ‘조용하세요. 입 다무세요. 휴대폰 끄고.’ 이런 식으로. 이거는 내가 혼자 이야기하는 시간에 여러분 듣기나 하세요, 이래 되거든요. 눈이 밝아져서 이게 싫었던 겁니다, 아담과 하와가. 왜 나만 언제까지 끌려가는 인생은 싫다. “선악과, 생명나무에 종속되는 것이 네가 싫지, 그지?” 하고 마귀가 온 거예요. “나는 벌써 탈출했거든요. 탈출해보니 신나. 너도 같이 탈출해. 방법은 선악과 따먹어.”

그럼 선악과 따먹기 이전은 뭐냐? 듣기만 했던 존재가 인간이었습니다. 그게 원형인데 광야에서 주님께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여지를 다 없애버렸어요. 그냥 너는 듣기만 해라. 듣기만 하는 그것은 율례와 법도를 지킨 것이 돼요. 율례와 법도를 너를 지배하도록 네가 허락하란 말이죠. 안 하지? 안 하면 네가 할 수 있는 요소를 다 빼버릴 거야. 네가 할 게 아무것도 없게 만들 거야.

6일 동안 네가 할 것 해봐. 7일 되면 안식일 날 모든 것을 멈춰야 되고 안식의 의미에다 그걸 포기해야 돼. 안식의 의미는 뭐냐 하면 바로 양을 잡는 날이에요. 제삿날이에요. 질적으로 종속될 때만 질적인 일의, 하나밖에 없는 의미의 단체가 되는 겁니다. 그게 이스라엘이에요.

지금 유령이 된다고 했는데 나라는 애굽의 존재, 이 존재가 뭐냐? 존재가 말은 들리는데 못 보는 존재, 그러니까 뭐와 같은 존재냐 하면 유령 같은 존재가 광야에서 이상하게 낯선 현실을 유발하고 있다는 이 점, 자꾸 없는데 들어요. 우리 인간들이 하는 말을 없는데 들어요. 들으면서 그것이 어떤 현실을 자아내요.

모세 인간이잖아요. 백성들 인간입니다. 인간들이 모세한테 이야기했어요. “모세야, 이렇게 끄집어내놓고 책임질 거야, 안 질 거야. 양식 없는 것 너 알지? 물 없는 것 알지? 애굽으로 돌아가자. 이제 대장질 그만하고. 미지의 세계 그딴 것 하지 말고 현실로 따져보자. 우리는 애굽에 살던 그러한 동영상, 그런 체험밖에 없는 이 광야에서는 나는 죽는다. 그러니까 어떻게 양식 낼 재주도 없는 것 같고 물 낼 재주도 없는 것 같으니까 여기서 플랜B, 두 번째 계획은 뭐냐? 애굽으로 돌아가는 거다.”

그 이야기를 듣고 모세는 하나님께 그 이야기를 그대로 전합니다. 전하니까 없는 존재가 만나라는 현실을 자아냈어요. 그 만나는 바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말씀의 공격입니다. 그게 신명기 8장에 나와요. 너희들 보기에 그게 떡으로 보이느냐? 나는 너희에게 말씀을 주었다. 신명기 잠시 보겠습니다.

신명기 보면서 제 나름대로 제일 충격적인 것이 신명기 1장 28절이었습니다. 적어볼게요. 크게 써보겠습니다. "어디로 가나?"이게 이스라엘의 특징이에요. 이런 특징을 있어야 유령성을 가졌다 할 수 있습니다. 어디로 가나, 이거에요. 이게 지금 요한복음 13장 36절에 베드로가 예수님보고 이야기한 거예요.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성도의 특징은 내가 결정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의존적이에요. 유령한테 묻는 거예요. 없는 신에게 물으면서 없던 신이 새로운 현실을 만들기를 고대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 이미 내가 신이거든요. 내가 신인데 신은 스스로 사는 거예요. 신은 스스로 있는 거거든요. 결국 나는 내 존재가 잘되는 쪽으로 그냥 가는 거예요. 때로는 국가에 굽실거리면서 그냥 직장 상사에 굽실거리면서 위계질서 지키면서, 궁극적으로 목적은 내가 사는 거니까.

내가 살 때는 이 질문이 안 나와요. ‘어디로 가나?’ 그걸 왜 남한테 물어. 니가 너한테 물어. 내가 공무원시험 준비할 것인가, 직장 생활할 것인가, 뭐 할 것인가? 그거는 니가 너한테 물으면 되는 거지. 모든 미래는 네가 판단하기 나름이고, 운명아 비켜라 내가 개척한다. 그거잖아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금강경에 나오는 대사 한 대목입니다. 내 인생 내가 책임지고 알아서 하는 것이 가장 이성적이고 인간다운 태도, 인간의 존엄성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토대, 이걸 학교에서 배운다 이 말이죠. 그것 모르면 안 된다는 거예요. 사회 적응이 안 된다는. 그런데 이스라엘 전체가, ‘어디로 가나’ 하는 이상한 질문을 하고 있어요. 본인이 알아서 가면 될 텐데.

결국 이거는 뭐냐 하면 퇴로가 차단된 곳에 와버렸다는 거예요. 오도 가도 못하는 일종의 포로 신세가 된 거예요. 보이지 않는 유령에게 포로가 된 겁니다. 이것을 오늘날 사회에선 간단하게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무당’ 이순신 장군 귀신, 단군 귀신에 빠져있는. 무당인데 신약성경에서 무당에 빠진 상태를 물론 예수님도 이런 비난을 받았지요.

요한복음에 보면 너는 지금 귀신 들렸다고 하는데 이걸 주님은 뭐로 바꾸느냐? 일단은 천국 가려면 내가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자리에서 어디로 가지, 라고 물을 수 있는 존재로 바뀌면서 내 존재가 누구에게 의존적이고 예속적인 존재로 바뀌면서 그다음에 어디로 가느냐? 사람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늘나라 못 간다는 코스를 밟아가게 돼 있어요.

나는 무당인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성령으로 거듭나버렸어요. 이것은 바로 환경이 그렇게 조성해 가는 겁니다. 왜 그것이 가능하냐 하면 왜 이런 법칙을 하느냐? 신명기 7장 15절에, “여호와께서 또 모든 질병을 네게서 멀리하사 너희가 아는바 그 애굽의 악질이 네게 임하지 않게” 하겠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지금 애굽의 요소를 철수했습니까, 철수 안 했습니까? 철수를 안 하고 따라 죽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존재 변화를 광야라는 환경에서 시도하고 있는 겁니다. 10분 쉬고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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