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여름수련회 신명기강해 제 7강 : 복과 저주 - 이 근호 목사
유월절의 어린 양의 취지를 하나님의 시간, 이스라엘 시간이죠, 하나님의 시간 속에 확장함으로써 여기서 뭐가 나오는가? 유월절의 어린 양은 이미 죽었습니다. 이미 죽었잖아요. 유월절 출애굽 때 죽었습니다. 죽은 것을 확장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미 죽었는데, 죽은 것이 죽음 자체가 살아있는 양상이 되어버렸으니까 이것이 바로 ‘유령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령성이 되어버리면 하나님 하신 일을 시리즈1, 시리즈2로 나눌 수 있어요.
인간을 상대로 해서 저주가 주어지고 이 저주에 대해서 유월절 양의 취지가 동반해서 올라가버리면 인간 이스라엘은 죽지 못하는 존재가 되죠. 죽지 못하는 존재란, 인간은 분명히 죽었는데 인간의 죽음에 섞여있는 율법의 취지는 네가 죽었다고 네가 네 마음대로 멈출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게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의 특수성이에요.
힘들면 죽으면 돼요. 힘들면. 정 힘들면 자살하면 그만이라고요. 그러나 그것이 율법과 같이 만나면서, 누구 마음대로? 그건 네 마음대로 안돼요. 너는 죽어도 죽지 못하는 존재로 인간이 탈바꿈됩니다, 율법 안에서. 이것이 바로 인간의 말의 세계와 말씀의 세계의 차이점이에요.
사람이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네가 무덤 속에서 내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요5:28)”라고 되어 있어요. 아, 끈질기다. 끈질겨요. 죽으면 죽은 걸로 그만 우리 관계 좀 끝내주면 되는데… 누구 마음대로? 유월절 양이 죽음으로써 끝나는 게 아니고 유령성을 지니는 것처럼 그 양태를 모든 인간에게 다 적용시키는 거예요, 요한복음 5장에서.
그 대목을 다시 한번 보게 되면, 인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상상 못한 개념으로 성경에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성경도 이걸 알아요. 하나님도 이게 얼마나 기이한 일인지를 아시고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5:28-29)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나와!’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나와!
‘그냥 우리 관계 여기서 끝냅시다.’라는 것은 인간적 생각이고, 그건 네 마음대로 끝나질 않아. 왜냐하면, 이건 중요해서 빨간색으로 쓰겠어요, ‘하나님의 율법 해석의 적용에 해당되기 때문’. 하나님의 율법 해석의 적용에 해당이 되어버려요. 이게 뭐냐? 시리즈2에요. 죽지 않는 존재를 만들어놓고 여기 유월절 양에 입각한 율법이 추가되게 되면 여기서 복과 저주로 나누어집니다.
우리는 아무리 복이 좋아도 저주가 들어있는 건 우리가 싫어요. 싫습니다. 저주가 있을 바에는 차라리 복도 없고 저주도 없는 그걸로 족해요. 그리고 더한 우리의 소원은 인생 힘들지만 살다가 여기서 끝났을 때, 하나님하고도 바이바이하고 싶어요, 인간은. 인간의 본심입니다. 저의 본심이 아니고 성경에 나오는 본심이니까요.
신명기 28장에 보면 자꾸 옛날 생각이 나요. 옛날에 부교역자로 교회에 있으면서 담임 목사님이 자꾸 심방을 부탁했는데, 저는 담임 목사가 심방할 때 어떤 본문을 하는지 봤다고요. 특히 대심방할 때. 4월과 선선한 9월에 대심방을 가요. 이유는 단 하나, 선선하기 때문인데요. 돌아다니기 힘드니까요. 수행원으로 권사님들 쭉 데리고 갔습니다. 이게 옛날 이야기에요. 요새 권사님들은 직장 생활하기 때문에 그게 안 되는데 옛날에는 할 짓이 없어서 교회에 몸담아야 구원이 된다고 생각해서 데리고 갑니다. 대심방할 때 목사님이 각 가정마다 거의 동일한 말씀가지고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 대목이 신명기 28장이에요.
그런데 이상스럽게 신명기 28장 13절에서 멈추고 14절로 넘어가질 않아요. 제가 알기로는 신명기 28장이 14절부터 68절까지 갑니다. 이렇게 가는데 이상하게 13절까지만 해요. 13절까지 내용이 뭐냐? 네가 내가 전하는 이 말씀을 지키면,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다는 거예요.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다.(28:6) 특히 자식들 있는 사람들은 이런 대목에서 아주 결정적이죠. 네 새끼(자식)가 복을 받는데, 네가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안 된다.(28:13) 야, 이거…. 서수에서 기수가 되면서 그다음에 뭐가 나온다 했어요? 위계질서가 성립되죠. 계급.
그다음에 6절에 보면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복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요, 이건. 롯데 백화점 가면 롯데 백화점 안에서 복을 받을 것이고. 복을 끌고 다녀요. 아파트 청약하면 거기 가서도 복을 받을 것이다. 놀러가도 복을 받을 것이고, 대한항공 타도 항상 비상구 좋은 자리, 복을 받을 것이고. 만약에 자녀가 군 입대 했다? 복을 받을 것이다. 전방에 가지 않고 후방으로 빠지고. 그것도 훈련하는 부대가 아니고 병과를 좋은 거 받아서, 병원 있잖아요, 마산통합병원 이런 데.
여기 13절에 보면, 네가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걸 길게 할 수도 있어요. 어떤 집에서는 길게 하고 어떤 집에서는 짧게 하면서 이렇게 한 일곱 집을 돌아다녀요. 뭐 이제 끝나고 나면 봉투 들어오죠. 왜냐하면 주의 사자가 복을 빌고 갔는데 입 닦는다는 게(실컷 이득을 취하고 나 몰라라 함)…. 대범한 용기 아니면 입을 못 닦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생각하는 것이, 처음에 유월절 양으로 죽었는데 죽지 않고 살아있는 유령성이 이스라엘 사람과 동행을 할 때 이 저주성을 그들은 몰랐죠.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복이 된다고 생각했죠. 설마 복과 저주가 동반한다는 생각을 못한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신명기 28장을 보고 여러분들이 지금 그런 심방을 받는다면 여러분들은 1번-좋다, 2번-싫다, 몇 번이겠어요? 항상 항목이 두 개인데도 불구하고….
출애굽기 17장 7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광야에 갔을 때 인간의 근원적인 본성이 거기서 노출되게 되어 있어요. 17장 7절에 보면 “맛사”는 시험이란 뜻이고, “므리바”는 다툼이란 뜻이거든요. 여기 뭐라고 되어 있는지 적어볼게요.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복과 저주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1번-계시다, 2번-아니 계시다, 여기에 인간의 마음이 고정되어 있는 겁니다. 복을 주고 저주를 준다는 것은 하나님 쪽의 이야기고, 우리는 그것을 수용하기 전에 먼저 우리의 마음 자체가 ‘하나님이 계신가, 아니 계신가부터 먼저 대화 주제를 삼고 회의합시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하나님이 계신지 아니 계신지.
‘하나님이 계신 것은 기정사실이고 그다음에 기정사실인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한테 의논도 없이 복과 저주, 저주와 복을 두 개 다 제시했다.’라는 것이 하나님 생각이라면, 인간세상은 ‘아, 그건 하나님 너무 성급한 문제고요. 먼저 이 문제부터 따집시다. 하나님이 계신지 아니 계신지 확인할 수 있는 권한을 우리에게 넘겨주세요.’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을 필요도 없이 다 알지만 그냥 ‘왜?’라고 물으면,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살 용의가 되어 있는 거예요,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 없이 살 용의가 되어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복 주는 것도 귀찮아요. 우리는 스스로 살고 싶어요. 스스로.
‘물론 계시다면 마다하진 않겠습니다만, 먼저 확인 작업부터 우리 쪽에서 실시하고 싶습니다.’라는 거예요. 확인 작업부터. 그 확인 작업을 어떻게 하느냐? 우리 인간 방식대로 하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것, 내가 기도하는 대로 응답이 되면 하나님이 계시고, 그렇지 않으면 복과 저주를 제시한다는 하나님의 제안 자체를 원천적으로, 내 쪽에서 하나님이 안 계시기 때문에 그것을 우리는 강력하게 밀어내겠습니다.’라는 것이 우리의 본심이에요. 우리의 본심. 그럼 여기서 의견충돌 났죠? 말의 세계와 말씀의 세계 의견충돌 났죠.
그러면 다시 신명기 28장을 보겠습니다. 제가 여러분한테 심방을 갑니다. 저는 심방을 할 때 15절부터 봅니다. 16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라는 본문을 심방 가서 전하면서 “오케이? 콜?” 묻습니다. ‘저주받을 용의가 되어 있습니까?’ 묻는 거예요.
“또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에 곰팡이 피는 거예요. “네 몸의 소생(자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자식이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자식이 집구석 나가도 저주를 받고. 낮에는 50살 먹은 아줌마고, 밤에는 미진이라는 애가 되고. 고양이한테 저주받았거든요. 드라마 이야기입니다.
그다음부터 온갖 동네 전염병은 다 동원해서 들어오죠. 22절에 “여호와께서 폐병과 열병과 상한(傷寒)과 학질과 한재와 풍재와 썩는 재앙으로 너를 치시리니” 그다음에 네가 꼬리가 될지언정 머리가 되지 못한다. 공기소총 본선 올라갔는데 1등은 따로 있고 자기는 8등 했어요. 뭘 해도 항상 꼴찌. 떨어지는 거. “이거 받아들이겠는가?” 인간 쪽에서 그러겠죠. “왜요?” “하나님이 살아계시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방식이 복 주는 방식으로 살아계시면 좋겠다는 건 인간의 생각이고, 내가 생각지도 않는 저주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저주를 주든 뭘 주든 하나님이 나 이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나의 기쁨’이라고 네가 받아들일 용의가 되어 있느냐고 우리에게 묻는 겁니다. 어지간한 용기 없이는 봉투 안 나옵니다. 심방 이렇게 했는데 무슨 봉투가 나와요. 심방을 이렇게 했는데.
다시 말해서, 당신이 하나님께 복 받는 것, 그게 우선이 아니고요. 인간의 심보상 인간의 마음상 인간은 항상 인간들만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지, 인간 외에 다른 존재가 없다고 이미 태어날 때부터 그리고 초등학교 때부터 교육을 받아온 우리는 교회 50년 다녀도 소용없어요. 그런 우리에게 항상 의문점으로 다가오는 것은, 과연 있다는데, 어떤 사람은 간증했다는데, 어떤 사람은 간암 말기 나았다는데, 그래도 여전히 찜찜하게 남는 것은 ‘과연 계실까’하는 문제에요. 내가 있는 건 분명하지만 내가 있는 존재만큼이나 분명하게 하나님이 계실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내(하나님)가 있는지 없는지 네가 시험하기 전에 벌써 그 자체가 나에 대한 시험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뭐냐? 너희 인간들이 나를 시험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항상 동행하는 시험을 인간에게 이미 실시해오셨습니다.
그렇게 여러분들이 생각하시면서 시리즈1을 마감해주시기 바랍니다. 시리즈1에서 하나님은 저주를 언급했지만 그건 하나님 계획이고, 우리는 계신지 아니 계신지로 시리즈1 끝까지 계속 가는 거예요. 그리고 유월절 양에 대해서는 ‘제사는 형식적으로 정기적으로 드리겠습니다만, 유월절 양의 의미는 이미 출애굽으로 끝났고 유월절 양이 고마운 건 알겠는데 우리는 우리가 여기 존재하는 것, 그건 분명하니까 우린 그것만 알겠습니다.’ 하는 거예요.
유월절 양이 계속 이어져서 우리에게 내가 원치 않는 저주를 줬다는 말에 우리는 삐쳐서, “저주 주려면 복도 가져가세요.” 그게 우리 취향에 맞아요. 뭐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다고… 그 정도는 내 손으로 내가 해결할 수 있는데 굳이 우리가 하나님까지 기대가면서 복 받으려고 애쓸 정도로 우리는 그렇게 찌질이가 아니라는 거예요. 가져가세요. 가져가. 복 가져가세요. 아예 저주도 가져가고.
그래서 결국 이렇게 하면서 마지막에 신명기 30장, 31장에 가면 하나님께서 결국 이야기하고 싶은 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율법 해석에서 어느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율법 해석에서. 그래서 너희는 죽고 싶어도 유월절 양의 유령성에 포함이 되었기 때문에 죽고 싶어도 못 죽어요, 우리가. 이제는 빼도 박도 못 해요. 빼도 박도.
이거는 신자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닙니다. 불신자에게도 공히 해당돼요. 그들이 뭐 화장을 하든 매장을 하든 수목장을 하든. 수목장해서 아버지의 모든 뼛가루를 나무 밑에 비료로 뿌려서 나무가 자라남으로써 아버지는 죽지 않고 영원한 나라에 살아있다는 것을 보고 싶어하는 후손들의 심리가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죽은 고인 가족의 바람이고 업자 입장에서는 나무 뽑아버립니다. 그거 몰랐죠? 토지가 제한돼서 그걸 뽑아서 또 다른 걸 받아야 계속 이 일을 하는 거예요. 나중에는 우리 아버지 나무 없어요. 있으려고 하면 돈 더 주고 새로 뿌리던지 뭘 해야 돼요. 업자들끼리의 비밀입니다. 토지가 제한됐는데 수목장 그렇게 해서 되겠어요? 뽑아버리죠.
그래서 아까 저주 보셨잖아요. 세상에 있는 온갖 저주는 다 받아요. 모든 저주는 다 받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유월절 양이 없으면 너희들은 창세기 3장이 되어버려요. 창세기 3장이 되면 생명나무와 단절된 존재로서 인간을 만들었기 때문에 너희들은 이미 저주 받는 것이 운명입니다. 저주가 새삼스럽지 않아요. 마땅한 우리의 팔자이고 운명입니다.
그런데 유월절 양이 너희들 이스라엘에게 들어왔다는 말은 결국, 의외의 것이에요. 이것은 여분의 것이에요. 뭔가 없어야 마땅한데 뭐가 등장합니까? 복이 등장하죠. 시리즈1에서 죽지 못하는 존재가 되지만, 복이 등장하면서 시리즈2에 가면 어떤 특징이 있는가? 유월절 양에게 하나님의 율법 해석이 추가되기 때문에 여기서 이 복과 저주의 마지막 모습에 대해서는 우리가 손을 떼는 입장에 있어요. 아, 이거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내 식대로 살고 싶다는 그것으로 죽은 상태로 마감 되고, 죽은 상태가 유월절 양이라는 것과 같이 동반하면서 죽지 못하는 존재인데 그러면서 이 존재에 주님의 율법 해석이 작용해서 일방적으로 천국 갈 자는 천국 가고 지옥 갈 자는 지옥 가는 어떤 여분의 혜택이 주어지는 거예요. 여분의 혜택이.
그래서 지옥 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이건 섭섭해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면 뭐냐? 천국 가거든 “야호!” 기뻐하라 이 말입니다. 이걸 기뻐하라 이 말이에요. 손을 뗀다는 이 대목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럼 손을 뗄 때 어떻게 떼느냐 하면 인간 시간의 한계를 넘어서서 손을 떼게 하는 거죠.
신명기 후반 29장, 30장, 31장, 32장, 33장까지, 특히 31장, 32장에 보면, 네가 경험하지 않은 네 미래의 모습, 종말의 모습을 내가 일방적으로 너희에게 너는 이런 인간이 된다고 그 미래의 모습을 단정 짓고 미리 확정적으로 예언해버렸어요. 그것은 뭐냐? 너는 나를 버릴 것이라는 거예요.
이제 신명기 구조가 이렇게 짜여진 내막을 알겠죠? 너는 어떻게 해도 나를 버릴 것이다. 너는 귀신을 섬길 것이며, 아무리 내가 너희에게 해줘도 너희는 나를 찾지 않을 것이며, 너희는 이방신을 따라갈 것이다. 이것은 확정된 것으로 네가 모르는 너의 미래 모습이기 때문에 일찌감치 손 떼라. 네 인생, 네 미래에 대해서 손을 떼버려라.
그러면 ‘손 못 떼겠습니다’ 하는 것은 아직도 내가 내 미래에 대해서 율법 해석에 대해서 내가 적용해보려고 시도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시리즈2에서는 적용을 못하도록 ‘그들은 결국 하나님을 버렸다’는 시나리오, 각본을 주께서 미리 작성해버립니다. 내가 아무리 너희에게 사랑을 외치고 말씀을 외쳐도 너희들은 나를 버리게 되어 있고 이방신들을 음란히 섬길 것이다. 신명기 31장 16절. 바로 이런 걸 심방 구절로 뽑아야 돼요, 이런 걸.
“아이고, 권사님 잘 계십니까? 찾아왔습니다. 오늘 심방하는 거 미리 광고해서 아시죠?” “아이고, 목사님 오신다고 미숫가루 해놨습니다.” “감사합니다. 잠시 예배드리고 아이들은 잘 있는지 건강 어떠신지 물어보겠습니다. 자, 본문은 신명기 31장 16절, 찾겠습니다. 우리 권사님 같이 한번 봅시다. ‘결국은 너희들이 나를 버리고 너희들이 내 약속을 어길 것이다.’ 믿습니까?
권사님이 교회 나와도 언제까지 나올지 장담 못합니다. 교회 나오는 거 손을 떼시기 바랍니다. 떼시고 지금까지 나온 것은 권사님의 의지나 결심이 아니었고, 그것은 주께서 발걸음을 인도했던 겁니다.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언제까지? 권사님의 속에 있는 우상적 본심,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나는 계속 측정해보겠다는 본심이 발각될 때까지요. 결국 발각될 것입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하면 권사님도 가만 안 있고 화내겠죠. “아이고, 뭐 교회 가나 안 가나 죽으면 그만이지.” “죄송합니다. 죽으면 그만이 아닙니다. 못 죽습니다.” 이게 더 절망이에요.
그래서 이런 실망할 때는 시편 73편을 같이 거론하는 게 좋죠. 그 대신 심방 설교시간은 약간 더 길어지겠죠. 자, 신명기 28장에는 저주받는 모습을 다 이야기해줬어요. 저주받는 모습을 다 이야기하니까 사람들은 어떤 태도가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을 믿지는 않지만 행여나 저주 올까 싶어서 믿는 척을 하게 되는 자기 행위의 조작, 연출을 해버려요. ‘그래. 나는 들어가도 복을 받고 싶고, 우리 자식이 꼬리 되는 건 싫어. 우리 자식이 머리가 됐으면 좋겠어. 꼬리가 되면 안 되지. 그러면 하나님이 지켜보시니까 CCTV 다 깔려있으니까 열심히 믿는… (믿는 척이라는 말을 차마 못하고 사실은 믿는 척하지만)… 믿어야지.’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그 저주를 피하려고 하는데 그 저주는 피했지만 시편 73편에 나온 저주는 피할 길이 없어요. 시편 73편의 저주. 그 저주를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무슨 이런 저주가 다 있어요. 이게 저주입니까? 신명기 28장에 나오는 저주하고 이게 내용이 안 맞죠. 신명기 28장은 작살난다는 내용인데 여기 시편 73편에 나오는 이 내용은,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자는 잠에 그냥 돌아가셔요. 식사 다하고 부축하는데 돌아가셨습니다. 그때까지 힘이 건강하고 고통도 없고 가정에 우환도 없고.
그들이 뭐라고 하냐면 11절에,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12절에, 이건 다 같이 읽어봅시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하도다” 20억이 더해요, 20억이. 와, 이거 참. ‘나 이렇게 되고 싶어. 하나님 빼놓고 다 이렇게 되고 싶어. 하나님 없이도 나 이렇게 되고 싶어.’ 이게 우리 속마음의 소원 아닙니까. 아니, 하나님 없이도 재물이 늘어나고 가정이 화평하고 고통이 없고 평안하다면 하나님을 굳이 찾을 이유가 없죠.
그런데, 14절 이것도 읽어봐야 돼요. 다 같이,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이게 뭡니까, 이게. 하나님 믿는 내가!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이게 뭐에요. 맨날 얻어맞고 꾸중당하고 지적당하고. 이게 뭡니까. 이래가지고 하나님 믿을만한 그러한 동기부여가 되겠어요?
여기에 대해서 반전이 있어야 되겠죠. 반전 없으면 안 됩니다. 악인들 생각이 저주고 내가 복이라는 것을 어디 가서 알게 되었느냐 하면 17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 내가 비로소 그들의 끝을 알게 되었다. 성소에 뭐가 기다리고 있습니까?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이 들어있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과 직거래 했던 게 문제였던 겁니다. 직거래하면 자칫 위메프 사태가 벌어져요. 직거래하는 게 문제가 된 거예요. 직거래하는 것. 당근마켓? 직거래해서 ‘저 사람은 하나님 안 믿어도 이렇게 잘 사는데, 나는 하나님 믿어도 못 산다.’ 했는데, 중간에 성소에 가니까 이것이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을 거치고 주어질 때, 하나님께서는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의 취지가 있음이 복이고, 이 언약이 빠져버리면 어떻게 잘 먹고 잘 살아도 저주라는 그것으로 모든 언약 개념이 확연하게 다 드러나죠.
내가 행복하고 고난 없는 게 복이 아니라, 복은 이미 유월절 어린 양에 일임되어 있다는 거예요. 나 대신 거기에 다 맡겨져 있다는 거예요. 이게 대리인이죠. 그걸 신약에 오면 성령의 보혜사라 합니다. 성령은 변호사라는 거예요. ‘저한테 이야기하지 말고 변호사와 이야기하세요.’ 이런 말이에요.
첫 번째 보혜사는 예수님이고 두 번째 보혜사는 성령입니다. 세 번째 보혜사는 이만희 아니에요. 없어요. 보혜사는 성령으로 마감이 되는 겁니다. 변호사가 있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고 벌써 끝났다는 거예요. 우리를 어디다 집어넣는가? 유월절 어린 양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저주가 주어졌다는 거예요.
이미 주어진 저주가 유월절 어린 양에게 갔기 때문에 그 저주-네가 경험한 저주 말고, 경험한 게 저주가 되면 나중에 잘 먹고 잘 살 때는 그걸 복이라고 착각해요- 진짜 저주, 진또배기(진짜배기) 저주는 유월절 어린 양을 통해서 보여지게 되는 겁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고자 하는 게 그거에요. 너의 현 입장의 말로(末路)는 십자가에서 보여줬다. 그게 뭐냐? 나무에 달린 자들은 저주를 받는다는 거예요.
신명기 21장에 보면 죽이는 데에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하나는 돌로 쳐 죽이는 방법이 있고, 또 하나는 나무에 매달아 죽이는 방법이 있습니다.(21:21-23) 여러분, 어느 방법을 좋아하십니까? 돌에 맞을 거예요, 나무에 매달릴 거예요? 살아있는 사람이 생각할 때 돌에 맞아서 죽는 게 편해요. 나무는 하나의 시범조로 본보기 보이듯이 시체를 매달아놓기 때문에 극악무도한 죄인에게 이렇게 한 거예요.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처형방법이 나무에 매달리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보면 예수님이 어디서 돌아가셨는지 나와요. 보통 다른 데서는 십자가라 하지만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는 십자가라 하지 않고 나무라고 되어 있어요.(“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주님께서 나무에 매달려 저주 받았습니다. 율법과 관련되어 죽지 못하게 된 존재가 마지막 가야 될 길이 이러한 극악무도한 저주입니다.
율법이 그곳까지 이끌죠. 율법이 그곳까지 이뤄야 율법은 바통을 넘깁니다. 이제 자기 할 일 다 했어요. 너는 그냥 죽는 게 아니고 나무에 매달려 전시되듯이 남한테 다 우사스럽게 극치의 수치를 보여주면서 죽어도 마땅한 죄가 율법을 통해서 이미 너에게 통보되었다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뭐라고 생각합니까? ‘어? 나무? 나는 전봇대도 무서워서 안 올라가는데 무슨. 나무에 올라간 적도 없는데?’ 그것은 십자가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에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우리의 최후의 모습을 주께서 미리 보여준 거예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어떤 혜택을 받느냐 하면 십자가를 이해하고 해석했던 하나님의 해석에 우리가 포함되어버려요. 해당대상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얼마나 자신에 찬, 자신만만한 외침입니까. “마귀야, 오라. 내가 붙어줄게.” 하는 이런 식이에요. 나? 죽었어. 또 뭐 붙어볼래?
율법은 유월절 어린 양이 저주받게 함으로써 이미 우리의 출발점을 저주부터 출발하게 하는 거예요. 출발을 저주부터 하는 증거가 신명기에 나옵니다. 신명기 27장 1-2절,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로 더불어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명령을 너희는 다 지킬지니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는 날에 큰 돌들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라”
그리고 그것을 어디에 세우느냐?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면 에발 산과 그리심 산을 만날 것인데 내가 명하는 이 율법의 돌을 어디에 세우느냐 하면 그리심 산에 세우는 게 아니고 에발 산에 세워요. (27:3-4, “이미 건넌 후에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위에 기록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네가 들어가기를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하리니 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이 돌들을 에발 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
그리심 산은 축복을 선언하는 축복 산이고 에발 산은 저주를 선포하는 저주 산이에요. 축복 산, 저주 산. 우리는 이 축복과 저주를 둘로 나누어서 다루는 그 자체가 싫어요. 그 자체가.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의 의사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면 네가 원치 않는 축복과 저주의 분리된 그 기준에 의해 네가 어느 쪽이든 속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야 율법에서 나오는 축복과 율법에서 나오는 저주가 너희를 통해 완성을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럴 때, 에발 산이 저주 산이죠. 저주 산에 하나님이 제단을 쌓아버려요. 그러면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은 저주 산에서 같이 제단과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신명기 27장에 보면 열두 지파를 둘로 나눕니다. 나누어서 여섯 지파는 축복 산에, 또 여섯 지파는 저주 산에 딱 마주보게 하는 겁니다. 마주보게 해요. 일종의 테니스장 스탠드가 양쪽에 있는 것과 비슷하죠. 딱 마주보게 했어요.
그러고 난 뒤에 그들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외치게 합니다. 외친 내용에 대해서 거기 27장에 쭉 나옵니다. 자, 문자로 된 율법이 열두 지파를 경유해서 외쳐 나오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 구조에 의해 만들어지는 새로운 현실입니다. 새로운 현실, 낯선 현실이죠. 율법이 말씀이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이게 인간들은 싫은 거예요. 왜냐하면 말씀의 현실이 침입해버리면 내가 소박하게 내가 따로 생각했던 현실은 계속 부정당하게 되기 때문이에요. 말씀에 의해서. 에덴동산은 인간 중심이 아니에요. 에덴동산은 인간 중심이 아니고 나무 중심이거든요. 에덴동산을 살리는 물이 나오는 그 중앙에 두 개의 나무가 있어요. 한 개의 나무가 아니라 두 개의 나무에요. 그럼 나무의 중심이 둘로 분리되어 있다는 뜻이거든요. 둘에서 나왔을 때, 하나는 하라. 따먹어라. 또 하나는 따먹지 말라는 나무가 있어요. 그게 선악과 나무입니다. 악마는 이게 싫었던 거예요.
자꾸 싫다 싫다 하는데, 인간이 왜 하나님을 싫어하느냐 하면 누구로부터 간섭받는 게 싫어요. 잔소리 좋아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로부터 간섭받기 싫은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믿는 척을 하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받아들였지만 이 말씀에 밀려서 ‘나 하나님 간섭 받는 거 싫어.’라는 그 본심은 마음 깊숙한 곳에 따로 점점 더 깊숙한 곳에 누적돼서 들어가게 되어 있어요, 누적돼서. 용수철은 눌리면 나중에 반발심이 더 크기 마련이에요. 그런데 이건 우리 인간들의 해석이거든요.
주님의 율법 해석에 의하면, 아무리 하나님 싫어하는 마음도 결국은 들통 내게 만드는 그런 미래를 내가 친절하게 준비해놨다는 겁니다. 신명기 31장 16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열조와 함께 자려니와 이 백성은 들어가 거할 그 땅에서 일어나서 이방신들을 음란히 좇아 나를 버리며 내가 그들과 세운 언약을 어길 것이라” ‘어길 것이다’라고 확정하죠.
32장 5절에 보면 이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는 사곡한 종류로다” 그다음 32장 15절에 보면, “그러한데 여수룬(이스라엘의 별칭)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반석이라 하는 것은 바로 ‘맛사, 므리바’ 그 반석이에요.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 멀쩡한 반석을 깼던 거예요. 하나님이 하나님을 쳐서 깬 거예요. 그 해석은 바로 고린도전서에 사도 바울의 해석입니다.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10:4) 이렇게 되어 있어요. 동일한 물을 마시기 위해서 반석은 깨져야 돼요. 반석이 깨지는 희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반석을 잊어버리고 다른 신에게로 가서 하나님의 질투심을 유발했다.
신명기 32장 27절에 보면 노골적인 게 나옵니다. 27절 보기 전에 20절부터 먼저 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하고 그들의 종말의 어떠함을 보리니” 이미 종말에 대해서 알고 계셔요. 27절에 보면 “대적을 격동할까 염려라 원수가 오해하고 말하기를 우리 수단이 높음이요 여호와의 행함이 아니라 할까 염려라 하시도다”
그러니까 그들은 ‘우리가 이만큼 인생 살아온 것이 하나님 뜻이 아니고 이것은 우리가 그렇게 행했기 때문에 살아왔다’라는 본심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은 전부 다 이미 확정된 저주의 상황을 계속해서 32장 끝까지 보여줍니다.
보여주면서 아까 얘기한 것처럼 모세도 약속의 땅에 못갑니다. 너도 잘려라. 약속의 땅에 못갑니다. 약속의 땅에 못 가는데, 그것도 사소하게, 인간 보기에 너무나 잘해왔는데 잘했다, 잘했다, 잘했다, 하나 땡. 그럼 몇 점입니까? 99점이에요. 99점인데 못 들어가요. 모세는 약속의 땅에 못갑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가고 죽은 자는 지옥 갑니까?’라는 질문이에요. ‘광야에서 죽었던, 멸망당한 그들은 지옥 갑니까?’라는 질문. 답변은 이렇게 됩니다. 우리가 마땅히 광야에서 죽을 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면 천국. 그것은 나하고 상관없다고 하면 지옥이에요.
왜냐하면 내 속에 말씀이 없으니까. 말씀은 내 편리를 위해서, 혹시 내게 복 주나 싶어서 믿어본 거지, 실제로는 뭐냐? 내가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시험하는 이것이 내 인생을 주도해왔던 거예요. 장악해왔던 겁니다. 계속해서 내 기도에 응답하면 하나님을 계속 믿을 용의가 되어 있고, 어느 날부터 기도 응답이 시들해지게 되면 ‘누가 뭐 답답한 거 있나? 내 힘으로 살지 뭐.’하고 버릴 용의가 되어 있는 사람이 우리들이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너는 이미 나를 필히 버리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50년 다니든 60년 다니든 버리게 되어 있을 때, 그 버림이 하나님의 율법 해석에 의해서 나는 저주받아 마땅하고 내가 버림받음에 대해서 내가 손 쓸 수 없음을 믿으면 그 사람은 모든 율법을 이룬 사람이 돼요.
제가 지난 시간에 로마서 10장하고 신명기 30장 말씀을 연관시키는 이야기했죠. 그때 신명기에서는 말씀이 가까이 있으니까 네가 ‘지킬 수 있다’고 했잖아요.(“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신30:14) 그런데 로마서 10장에서는 뭐냐? 말씀이 가까이 있으니 ‘믿을 수 있다’가 되는 거예요.(롬 10:16-18)
행할 수 있는 게 아니고 믿을 수 있다. 왜? 그 말씀이 압축된 것이 십자가고 십자가는, 너의 미래는 네가 결정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대리해서 이미 결정지었다는 그 사실이기 때문에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를 받아들이면서 이런 꼼수를 쓰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모든 일은 주께서 시켜서 했기 때문에 뭐 천국 가는 것도 주의 뜻이고 지옥 가는 것도 주의 뜻이니까 주의 뜻이 지옥 가는 거라면 지옥 가지 뭐. 왜? 난 쿨한 남자니까.’ 이거 뭐 개기는 것도 아니고 객기도 아니고. 소매 걷고 주님하고 한번 해보자는 이야긴가.
그게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주께서 제대로 일하는지 안하는지 평가는 누가 하겠다? 내가 하겠다는 거예요. 이게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평가의 한계를 말씀이 뚫어주는 거예요. 평가의 한계를. ‘주께서 결정했습니다. 천국이고 지옥이고 주께서 결정했습니다.’라는 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내가 예상 못한 의외의 그 소식에 대해서 너무나 고맙고 그걸 기뻐하게 되면 그 사람이 바로 천국 가는 사람의 모습이에요.
주도권이 ‘내가 한번 측정해볼게.’ 측정하는 내가 아니고, 주도권이 어디로 넘어갔습니까? 분명히 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도권이 말씀에 넘어가 있는 사람인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에.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주도권이 있는 사람은 신명기 28장에 그 저주 부분, 신명기 30장, 31장에 나오는 우리의 종말은 결국 나(하나님)를 버릴 것이라는 그 말씀도 신나게 성도 안에 활동하고 있습니다. 활동하고 있어요.
그럴 때 우리가 하나님께 뭐 늘 감사하지도 못하는데, 감사 시간으로 해서 24시간 중에 1분 내지 1분 50초 정도, 좀 짧은 사람은 한 2.5초 정도 감사하고 대부분은 ‘아, 오늘 참 일 안 풀리네.’ 이렇게 불만이 일어나는 거예요. 오늘 일 안 풀린다. 그 사람이 왜 나한테 그런 이야기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 사람을 누가 움직였습니까? 주님이 움직였잖아요. 주님에 대한 불만을 불만 아닌 걸로 감추면서 사람에게 그 탓을 돌리는 거죠.
그게 교재에 나와요. 교재 p.7 제일 위에【‘말씀의 세계 완성’을 이룬 해석은 ‘설명에 의한 안심’이 아니라 ‘반복적 충격에 의한 반복적 동요’로 실행된다.】반복적 충격에 의한 동요. 반복적 동요로 현실화되고 실행됩니다.
안정적인 나, 그 나를 믿으려고 하지 마세요. 우리는 나의 동요할 여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나를 불신해야 돼요. 더 심하게 말해서, 나는 나랑 헤어져야 돼요. 자꾸 나한테 신뢰 보내고 실망으로 돌아온다면, 여러분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나한테 실망할 때, ‘나 왜 믿음이 이것밖에 안돼?’ 실망할 때,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그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10분 쉬시면서 내가 늘 동요하는가 생각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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