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여름수련회

4강-율법의 경로

아빠와 함께 2024. 8. 3. 21:17

2024 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제4강-신명기: 율법의 경로
(강의:이근호 목사)

유연성을 지니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내가 여기 존재하고 있다라는 것에 대해서 어디로 가야 할지 난감하게 만드는 상황을 유발하시고요, 그리고 거기다가 주께서 광야에서 전쟁을 일으켜요. 전쟁을 일으키면서, 누가 신명기 7장 7절 한번 읽어보세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은 민족, 적다라는 것은 기존에 수의 좌표에서 0에, 제로에 가장 가까이 접근해요.

신명기 7장 7절. 가장 가까이 가는 거에요. 가까이 가게 되면 뭐가 줄어드느냐? 존재가 줄어들어요. “내가 없어지네. 나의 집합체가 점점 더 숫자가 없어지네. 없어지네.” 이렇게 돼요. 0에 접근하는 겁니다. 0에 접근하는데 0에 접근하면서 곧 이것은 뭐냐 하면, 이 광야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것은 없는 존재만이 또는 없음에 근접한, 근접된 민족만이 광야라는 이 죽음의 세계에서 버틸 수 있다라는 것을 알려주는거에요. 아무도 들어오려고도 하지 않고 아무도 나서지도 않는 이 광야에서 그 광야를 통과해서 약속의 땅이 있다면, 약속의 땅은 이 땅에서 존재하지 않는 땅이에요.

어디에만 있느냐? 광야와 연결된 파이프 안에서만 약속의 땅이 있는 거에요. 광야 없는 약속의 땅은 없습니다. 광야에서 무엇이 부각 되느냐? 율례와 법도가 있지 아니하면 이 세상에 어느 것도 약속의 땅이 아니라는 것을 광야를 통해서 절실하게 느끼죠. 그래서 율법과 규례가 이스라엘 자손으로 하여금 숫자를 줄여버리는 효과를 주게 되는 겁니다. 없는 존재로 만드는 거에요. 근데 없는 존재로 만들면서 유령이 유령성이라는 것은 존재, 존재인데. 앞에 있는 것은 존재1 뒤는 존재 2라면 이 사이에서 유령성이 등장하는데, 존재 1이 내려가면서 존재 2가 올라가는 거죠.

존재 2는 하나님의 존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의 존재를 의미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주님과 함께 있다면 숫자가 뭐 그리 대수겠어라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주님이 함께 있다면. 누가복음에 그런 말씀 나오죠. 적은 무리여. 두려워 말라. 하늘나라가 너희의 것이니라. 그래서 그 나라 의를 구하면 구할수록 내 쪽에서 변화가 일어나요. 그 나라 의를 구한다는 것은 주님과의 하나의 집합체가 된다는 말은 기존의 나한테 달라붙었던 숫자 많은 세상의 집합체가 여기서 균열이 일어나고 그게 빠져나가는 현상을 유발시키는거에요.

세상은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그러한 집합을 이뤘다면, 그중에서 그 나라 의를 구한다면 그 나라 의 쪽에서 집합체에 붙게 되면 이제부터는 그 사람한테는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무얼 마실까를 염려하지 말아야 해요. 그거는 이방 민족들이 원하는 거기 때문에 그래요. 그 나라 의와 단절된 민족들이나 하는 짓이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 하는거에요. 그러니까 그런 것은 이방 민족에게 맡기고 너는 그 나라 의를 구하라. 필요한 대로 주께서 그것을 채워줄 것이다. 그런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고 오늘 밤을 잘 넘겨야 돼요.

밤이라는 것은 낮의 끝을 의미하잖아요. 낮의 존재는 밤 되면 사라져야 되고 밤의 존재가 나타나야 되죠. 성좌는 어두워야 나타나죠. 밤이 되어야 나타나는 게 별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늘의 별처럼 할 때는 이게 보여야 돼요. 이게 밤이 되어야 됩니다. 밤은 모든 인간의 활동이 소용없는 시기에요. 밤은. 인간은 낮에 활동하거든요. 그래서 여호와의 밤을 몰고 가요. 끌고 다니는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시간적으로. 그러면 공간을 또 새롭게 형성하는데 그 공간은 신명기 6장 16절.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 여기 ‘맛사’라는 용어가 등장합니다.

맛사라는 것은 “하나님께 시험했다 또는 원망했다, 다퉜다” 그런 내용인 거에요. 그러면 맛사라는 공간은 없는 공간인데 무슨 사건이 터지고 난 뒤에 맛사라는 공간이 주어졌습니다. 이 맛사라는 공간을 설명하기 전에 사사기 15장 19절을 먼저 우리가 한번 볼 필요가 있어요. “하나님이 레히에 한 우묵한 곳을 터치시니 물이 거기서 솟아 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은 엔학고레라 이 샘이 레히에 오늘까지 있더라” 이 엔학고레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는 공간의 등장은 사건이 있어야 되고 그 사건은 여기 삼손이 목마르다, 이 일이 “삼손이 목마르다.” 그럼 삼손 니가 뭔데 니 목 마른 것 하고 내 공간의 지명이 새롭게 돌출 되어야 되는 것 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

삼손은 성신 받은 하나님의 그 당시의 사사입니다. 나실인이에요. 하나님과 유일하게 통하는 사람이 삼손이었습니다. 그리고 삼손이라는 개인적인 사건 안에 하나님의 특수한 일이 그 안에 담겼다는 이야기고요. 하나님의 특수한 일이 거기서 새로운 공간이라는 흔적을 남겨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공간을 통해서 공간에 들어있는 새로운 현실을 이 지상에 새기면서 자신의 현실성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어요.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미싱을 가지고 재봉틀 운용할 때 그 평평한 섬유 아닙니까? 천에다가 전기 넣어서 두두두 이렇게 하니까 그쪽에 무슨 자국이 박힙니까? 공룡 발자국은 아니고 바늘 발자국이 찍히죠. 그 공간을 의미하는거에요. 그 공간의 연속이 뭐냐? 하나님의 이스라엘 속에 있는 언약의 경로에요. 보이지 않는 언약. 보이지 않는 언약이 이스라엘 백성과 상대하면서 그들이 하나님께 언약에 대들었다는 그 발자국들을 남기면서 그게 특수한 공간의 이름을 받게 되는 겁니다.

신명기 1장 20절에 보게 되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모리 족속의 산지에 너희가 이르렀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대로 올라가서 얻으라 두려워 말라 주저하지 말라 한즉” 그렇게 이야기하죠. 그런데 43절에 보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여호와의 명을 거역하고 천자히(함부로) 산지로 올라가매 그 산지에 거하는 아모리 족속이 너희를 마주 나와서 벌떼 같이 너희를 쫓아 세일산에서 쳐서 호르마까지 미친지라” 이게 뭐냐 하면 산지는 이미 기존에 민족들이 거주지로 삼고 있어요. 거주지로 삼고 있다는 말은 거기가 오아시스처럼 그렇게 된거에요.

그러니까 이거는 광야가 아니에요. 애굽에 살던 식으로 살면 얼추 살 수 있는 장소에요. 자연히 허기진 이스라엘 백성은 뭘 탐을 내겠습니까? 이미 사람들이 거주지에 들어가서 인테리어나 바꾸고 그러면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마련이죠. 하나님께서는 “그러지 말고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가라.” 하고 명령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기존의 이스라엘 나라하고 다른 이방 민족이 군데군데 공간에 붙어있다는 것은 일본 게임의 빠친코 같아서 구슬이 내려와서 그걸 충돌하고 빈자리로 빠지기 위해서 하나의 막대기 역할을 하는 것이 이방 민족이에요.

철저하게 광야로 가서 광야는 뭐가 없느냐 하면 살 땅이 없죠. 살 땅. 살 땅이 없다. 다른 말로 하면 머물 곳이 없다가 돼요. 광야를 통해서 다시 이제는 약속의 땅에 가면 산지를 공격하게 되는데 이것은 뭐냐? 머무른다. 약속의 땅은 탈취해야 얻을 수 있는 땅이다. 뺏어 버려야, 탈취하는 거에요. 전쟁에서. 그러면 약속의 땅은 없어요. 약속의 땅이 없는데 약속의 땅이 없는 대신 뭐가 있느냐? 약속의 땅에 적용될 원칙은 있어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더불어서 원칙을 갖추게 되면, 그 원칙이 뭐냐? 뺏는 거죠. 그 뺏는 일은 여기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의 그 차이점을 분명히 해주는거에요. 이 차이점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이걸 가지고 레위기, 민수기, 출애굽기, 신명기에 나오는 이걸 뭐라고 하느냐? 이걸 ‘거룩’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거룩이란 이스라엘이란 존재와 여타의 언약이 없는 이방 민족의 존재. 그 차이가 거룩이에요. 거룩이 성립되려면 이스라엘은 항상 하나님의 언약 없이 살아가는 것과의 그 대립, 비교를 비교하는 환경 속에서만 거룩이 나와요. 신약에서는 뭐냐 하면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의 그 차이가 거룩인데 신약에서는 이방 민족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 불신자로 바뀌어요. 그런데 이 세상에는 불신자라는 게 없습니다. 이 세상엔 불신자가 없어요. 왜냐하면 이 세상은 다 신앙인이에요. 누굴 믿을까요? 자기 자신에 자기 종교의 자기가 신도입니다. 어떤 경우도 배신하지 않는 유일한 충실한 충성하는 순종. “충성”. 이것 누구한테 경례합니까? 아침에 거울 보고 자기 자신한테 경례하죠. 자기가 자기를 믿는 충실한 신앙인이기 때문에 우리가 성도가 된다는 것은 개종 차원이에요. 종교를 바꾸는 거에요. 나 믿다가 나 안 믿는 것. 그게 신앙이거든요.

그러면 교회 가면 주로 누가 많아요? 자기한테 신앙 가진 사람들이 교회 다 모여있어요. 희한해요. 목사들은 거기다가 입맛 맞춰서 박수 쳐주고. “하면 됩니다. 믿습니까?” 이런 식으로. “여러분 자신을 포기하지 마세요. 주께서 도와주실 겁니다.” 뭐 이런 식으로. 모든 성경 귀절 다 동원 시키죠. 그러니까 굳이 신앙 바꿔가면서 교회 다녀야 할 이유가 없어요. 있는 교회에 그냥 옷만 바꿔입고 그냥 소스만 바꿔서, 양념치킨에 소스만 이렇게 다른 소스만 바르면 돼요. 칠리소스로 바꾸면 돼요. 그것만 바꾸면 교회에서 그걸 신자라고 해줘요. 본인이 신앙이거든요. 본인이 수 적 일의성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 곳에 가서 “어떻게 하면 신자가 될 수 있습니까?” 거기는 신자 되는 곳이 아닙니다. 신자 되는 것은 탈취해야 돼요. 탈취. 어떻게? 이질성을 가지고. 이질성을 확인하게 되면 신자 됩니다. 굉장히 쉽죠? 굉장히 쉬운거에요. 교회 나가서 교인 안되면 신자 되는 겁니다. 교회 나와서 교회를 안 믿으면 신자 되는거에요. 교회 믿으면 불신자 되고. 왜냐하면 교회는 부동산이고요. 부동산은 자기가 과거에 뒷돈이 들어갔기 때문에 그래요. 돈이.

교회에 예배당 없으면 굉장히 괜찮은데 문제는 자꾸 이게 집합이 숫자가 늘어나게 되면 예배당을 만들어요.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교회의 임무는 뭐냐? 부동산의 가격을 유지하는 게 모든 목회자의 주 임무가 그거에요. 어떻게 하면 부동산 가격을 유지할 수 있는가? 뭐 데모를 하든지 400억 뽑아내든지 하여튼 있잖아요. 교회는 오직 부동산이에요. 부동산 건물들이에요. 처음에는 뭣도 모르고 “야, 돈 안 내도 되겠다.” 왔다가, 어디 뭐 교회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입 니까? 교회 유지비용은 누가 내는데요? “그거 뭐 장로님이 대겠지” 장로들이 화를 내죠. “내가 옛날에 많이 했는데 이제 너희 차례인데? 나 70대 때 집 바쳤어. 지금 50대 뭐해?”

“애들 교육을 강남에 맡길 거야 아니면 교회에 맡길 거야? 다 불신자 만들려고? 불신자 만들어서 지옥 안 보내려면 교회 교육 기관에 투자해.” 이렇게 나오죠. 그 투자가 뭡니까? 역시 부동산 구입이에요. 부동산 구입입니다. 부목사 들이면 부목사 사택 둬야 되죠. 부동산 아닙니까? 교회를 부동산으로 보게 되면 이해 안 되는 게 하나도 없어요. 모든 광고 시간이 부동산이에요. 그러면 다 이해가 돼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광야에서 그냥 조용하게 보내지 않고 다툼이 일어나고 충돌이 일어납니다. 먼저 그 다툼은 여기에 공간을 마련해요.

어떤 공간이냐? 하나님이 정말 우리의 속삭임도 다 들으시는 식으로 계시다. 또는 인도하신다는 것. 이 점을 그들은 하나님께 원망하면서 그것을 파악하도록 주께서 그렇게 유도하셨던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가 이제 남은 인생 동안에 할 일이 여기서 이미 확정되었어요. 우리는 하나님께 뭐하면 돼요? 답 다 가르쳐 줬어요. 여기. 하나님께 뭐하면 됩니까? 그걸 제 입으로 이야기 해야 돼요? 불신자 말고 성도의 남은 일이 할게 뭡니까? 앉으나 서나 하나님께 원망하면 돼요.

원망을 안 하면 사람이 점잖은 사람이 되어서 음흉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원망하라고 지금 우리 생존을 유지하고 있는거에요. 원망하라고. 뭐 기쁨 감사? 진짜 웃을 일입니다, 그거. 점잖은 양반, 또는 숙녀. 점잖은 양반을 주께서는 원망이 나오도록 유도하지요. 처음에는 너무 점잖기 때문에 원망 안 해요. 그 대신 감사 헌금으로 보답해서 내가 스스로 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한답시고 극복을 시도해보지만 다 헛짓입니다. 결국은 “이렇게요? 이렇게요?” “너무 심하게 조지신 것 아닌지... 하나님 이거는 그쪽에 돈 좀 드렸잖아요 근데 이렇게 심하게 나올 줄 몰랐습니다. 수련회까지 참석하는데 이렇게 심하게 나오면 저 더 이상 어쩌란 말입니까?” 해가지고 이제 원망이 나와요. ■원망이 나오면서 나의 삶의 터전을 맛사로 만들어요.

하나님께 원망했다, 하나님께 시험했다는 공간으로 만들 때 나는 뭐다? “나는 광야다”가 됩니다. 광야에서 우리는 유령같이 다루어지니까요. 그러니까 이거는 나의 삶에서 맛사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는데 이 맛사가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므리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나는 나를 늘 시험하면서 살아간다.” 이게 모든 인간의 공통점입니다. 한시도 시험하지 않을 때가 없어요. 늘 시험합니다. 맛사, “하나님을 시험한다.” 므리바, 또는 다투다.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이 말은 내 쪽에는 문제가 없는데 하나님 쪽에서 관리 소홀이 아닌가 하는 생각. 나의 가치를 영 무시하고 나를 하나님이 나를 너무 얕잡아 보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

다시 말해 내가 어느 정도까지 내 존재가 하나님께 인정받을 위치에 있는가를 수시로 우리는 시험하는 그 현실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그 현실이 우선 있고 난 뒤에 거기서 뽑아져 나가는 하나님이 계신 현실과 내가 나의 현실과 어떠한 존재와 공간과 공간의 그 차이성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우리의 거룩이죠. 거룩이라는 것을 우리가 체험할 때 그때 우리는 감사와 고마움과 기쁨이 생깁니다. “아, 이용하고 있구나.” 그 이용당하는 즐거움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이용당하는 즐거움. 하나님의 자기 즐거움에 말려 들어가는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대해서 하나님께 찬양해야돼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이걸 계속 만드는거에요. 그걸 가지고 그리스 신화적으로 이야기하면 이걸 에코라고 합니다. 에코는 메아리. 다른 말로 하면 반복성. 나르시시즘에서 자기만 쳐다보다가 공간의 들려오는 그 소리, 공간의 소리로 말미암아 나르시시즘에서 잊어버리는 것. 그러면 이쯤 했으면 여러분들이 “아, 신명기가 어떻게 진척되는가”가 여러분들이 감을 잡을거에요.

이것이 방금 제가 이야기 한 것이 그들이 굳이 광야를 통과해야 될 이유입니다. 그런데 아까 질문을 제가 답변을 안 했어요. 뭐냐하면, “어디로 가십니까?” 우리가 어디로 가십니까? 베드로가 예수님보고 “어디로 가십니까?” 할 때 주께서 이야기하는 것은 어디로 가는 그 목적지를 하나님이 어디에다가 그걸 감추어 놓았느냐 하면 율례와 법도 속에 감추어 놓았어요. 율례와 법도 속에 “어디로 가십니까?” 목적지가 있어요. 목적지. 이 목적지는 바로 제사드리는 장소에요. 이게 신명기 12장에 나옵니다. 신명기 12장에 보면, 그걸 먼저 선점해서 백성을 기다리는 식으로 거기에 계신 분이 있어요. 12장에 보면, 12장의 핵심은 뭐냐? 하나님의 이름이 계신 곳. 이 계신 곳이 바로 뭐냐? 공백이에요. 빈자리. 하나님의 자리는 빈자리입니다. 이 공백을 확대해 나간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성전이에요. 성전.

성전 안에 뭐가 있느냐? 없어요. 성전 안에 없어야 돼요. 없다. “성전에 법궤 있잖아” 법궤 안에 없어요. “법궤 안에 아론의 싹난 지팡이 그 다음에 만나, 그리고 깨진 돌판을 대신하는 돌판. 그 돌판 있잖아요.”하는데 그 돌판의 있음은 그 언약궤 뚜껑에 있는 그 피, 피 흘린 분의 없음과 대비하기 위해서 인간의 반항심과 인간의 배신과 인간의 대한 반발의 있음이 언약궤 안에 담긴 거에요. 언약궤는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는데 있는 것은 뭐냐? 그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께 대들었던 증거물이 바로 이 언약궤 안에 있습니다. 그 언약궤가 있다는 말은 언약궤는 그 안에 있음으로서 이게 최종 도착지점이기 때문에 이거는 그 언약궤는 자체적으로 목적이 종결되었어요. 종결되었는데 이 언약궤가 자꾸 옮겨져요. 약속의 땅으로. 약속의 땅은 가나안 땅이 약속의 땅이 아닙니다.

율법과 언약이 완성되는 그곳이 약속의 땅이에요. 언약궤가 종결되면서 이거는 무슨 스타 마술 쇼도 아니고 분명히 언약궤가 있었는데 갑자기 뭐 검은 천 하나 딱 해가지고 해놓고 “자, 보세요.”하고 천을 확 거두니까 거기에 언약궤가 없어졌어요. 언약궤가 없어지고 성전도 없고. 없어요. 그냥 없어요. 분명히 하나님의 율법과 제사가 있었는데 그 현장에 아무것도 없어요. 그건 뭐냐? 약속의 땅이 지상에 없고 이게 하늘로 올라가는 겁니다. 지상에 분명히 있었는데 없어지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는 그 경로가 이 구약 역사거든요 이스라엘 역사. 그러면 이제 이스라엘 역사가 이렇게 펼쳐지잖아요. 출애굽 해서 이렇게 온다 이 말이죠. 이 모든 역사가 여기 전봇대 하나 있어요. 커다란 전봇대. 전봇댄데 십자가 비슷하게 생겼죠.

전봇대의 긴긴 그림자였던 겁니다. 그림자고, 전봇대, 십자가가 실체고.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있었는데 있던 예수님이 어디로 갔습니까? 지금은 보이지 않죠? 없죠. 보이지 않고, 없고 주어진 것은 보이스, 음성. 우리 내면의 음성으로 주어집니다. 말씀에 담겨서 음성으로 주어지는거에요. 그래서 구원은 들음으로 구원을 받아요. 보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들음으로써 구원받아요. 그것도 마음의 소리로 들음으로써 구원받는 겁니다. 참, 이게 보고 믿었으면 참 좋겠는데 들음으로 올 때 답답하죠. 근데 이 답답함을 누구도 경험했는가? 바로 예수님도 이 땅에 아버지의 명을 받고 이 땅을 살면서 예수님도 똑같이 그런 경험 했어요.

주님의 지시와 음성을 듣고 성령 안에서 음성을 들으면서 예수님은 자기의 가야 될 길을 한 걸음 두 걸음 옮겨갔습니다. 옮겨갈 때마다 “이렇게 된 것은 다 말씀에 응하게 함이라.” 말씀에 응하게 함이라. “말씀만 살아있다면 저는 그 말씀 속에 제가 죽겠나이다.” 그쪽으로 끌려간 거에요. 신명기에 나타났던 이 실제적인 현실적인 공간과 시간, 이거는 어디에 속합니까? 그림자에 속하죠. 보통 그림자는 어떻습니까? 색깔이 검은 그림자죠. 왜냐하면 고유의 사물의 색채가 없어지니까 검게 보여지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이 검은 그림자를 생각하지 않고 이걸 하얀 그림자로 바꿔도 괜찮다고 봐요. 하얀 그림자. 역시 색깔 없는 건 마찬가진데, 빛으로 오신 분의 긴 그림자기 때문에 하얀 그림자라서, 비록 우리가 내 실체가 없고 그림자로 다뤄진다 할찌라도 우리는 감사하고 기뻐하면 된다는 그런 차원에서 그렇게 표현해 봤습니다.

자, 어디로 갑니까? 해답이 신명기 1장 30절에 있습니다. 신명기 1장 30절에, “어디로 가십니까?” 자, 이런 것들은 보지 마시고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답변해야겠습니까? 어디로 가십니까? 1번 약속의 땅으로. 어디로 가십니까 할 때 답변이 30절에 뭐라고 되어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앞서가신다고 되어 있는거에요.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돼요? 하나님께로 가면 되죠? 내가 어디로 갈까를 내가 알 이유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 뜻은. 그래서 이걸 가지고 뭐냐? 갈 바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갈 바를 알지 못해요. 그러면서도 어디로 가야되는지를 우리가 미리 확보할 수 없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이끄실 겁니다.

그러면 따박따박 따라가면 되지 않겠는가? 중간에 다 샙니다. 아무도 안 따라가요. 아무도 따라가지 않습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지금 따라가면서, 아까 수식 도표에서 이게 없어지면서 점점 내 존재감이 없어져서 이게 제로가 되어야 되거든요. 삼손 같은 경우에 따라가면서 결국은 못 따라갔어요. 그런데 주께서는 삼손이 따라가야 할 때는 반드시 어떻게 해야 하느냐? 삼손을 눈 빼죠. 눈 빼고 머리카락 잘라서 다시 말해서 삼손이라는 것은 더는 없게 만들면서 삼손이게 하신 분이 이스라엘을 구원하도록 삼손은 자기가 점점 더 소실되고 소멸하는 그러한 인생을 보냈습니다. 그게 바로 나실인이에요. 나실인이라는 것은 다 바친다. 그러니까 주께서는 삼손을 자기 쪽으로 그림자니까, 삼손은 예수님이 실체니까 실체답게 그림자를 자기 속으로 빨아 당긴거에요.

갈 바를 알지 못한다. 네가 알 필요 없죠. 주께서 빨려 들어가게 할 거에요. 어느 장소로? 죽음의 장소로. 빨려 들어가게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하나님 이러한 말씀 믿고 하나님 따르겠다고 다짐을 하죠.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정탐꾼을 보내요. 신명기 1장 23절 24절, 정탐꾼 보낸 것에 대해서 모세가 동의했기 때문에 모세도 약속의 땅에 못 갑니다. 아, 이거는 신명기에서 정말 반전이에요. 분명히 “시내 산에서 40일 동안 물도 마시지 않고 떡도 먹지 않고 살아본 사람이 누구는 못 들어가도 약속의 땅은 눈으로 목격할 수 있는 자격이 된다.”라고 생각하겠죠. 근데 못 갑니다. 한국 선수단 기수가 되어서 기순데 못가요. 한국 선수의 감독인데 감독 못 오게 만들고 인도로... 인도 양궁 대표 선수는 참석도 못 하고 소환되어버렸어요. 왜 그러느냐? 빈자리가 있어야 하거든요. 사람이 사람을 이끄는 게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있는 게 아니고 언약이 살아있기 때문에 언약을 가리웠다는 그 아주 사소한 문제 때문에 삼손을 최후의 진격 조에서 빼버리죠. 그러면 그 자리에 누가 들어가느냐? 여호수아? 아닙니다. 언약이 들어갑니다. 여호수아가 뭐 대장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여호수아가 아니라고 하느냐? 이게 여호수아 5장에 나옵니다. 여호수아가, 5장 13절,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왔을 때에 눈을 들어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이렇게 했죠. 그러니까 15절에,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이 땅이 네 땅이냐 내 땅이냐” 이것하고 똑같은 거에요. 지금 언약을 하나님이 있어야 할 땅. 하나님의 성전이 있어야 할 땅, 그 땅이 약속의 땅인데 지금 여호수아는 과거의 인물이 과거의 체험으로 다져진 인물이기 때문에, 인간은 누구나 다 마찬가지겠지만, 미래에선 몰라요.

그냥 우리가 들어가서 생존하고 살면 된다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그냥 천사가 와서 “어서 오세요. 안 그래도 하나님한테 이야기했으니까 우리 협조합시다.” 이런 것이 아니고 칼을 빼 들고 막아서고 있습니다. 막아서니까 적인 줄 알고 우리 편이냐 적이냐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이 대화가 왜 필요하냐 이 말이죠. 이 대화가. 그것은 바로 거룩한 곳입니다. 거룩한 곳이라는 것은 더러운 것, 인간 것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그 차이를 드러내는 것.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차이를 드러내는 공간이 약속의 땅이에요. 따라서 속된 것만 있으면 안 되고 거룩한 것도 같이 있어야 하는데 거룩은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거룩은 누군가 보이지 않는 예수님과 하나님과 천군 천사가 함께 있는 이 땅, 이 땅에 우리 성도로서 우리는 지금 발생 된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인간만 보지만, 우리는 성령이 접수한 이 세상에서 주님의 활동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자, 여기서 여러분들이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언약이, 이 모세 언약, 신명기 언약이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을 먼저 말씀드리면 새 언약이 와서 이 율법은 여기서 스톱이 되어버립니다. 율법도 불타버려요. 율법도 불타버립니다. 율법이 불탄다는 것은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히브리서 10장에 보면 율법을 폐한다고 되어있어요. 폐한다. 율법을 없애버린거에요.

더 이상 율법의 지도를 따를 하등의 이유가 없게 된 거에요. 신약에서는. 율법이 그동안 이스라엘 역사의 잔재였어요. 율법으로. 율법 안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첫째 시간에. 율법 안에 복과 저주가 있죠. 그러니까 새 언약이 있는 사람은 무엇의 대상이 안된다? 율법의 복과 저주의 그 지배에서 벗어난거에요. 그러면 새 언약 안에는 저주가 없고 뭐가 있습니까? 복이 없죠. 율법에 의해서 율법을 받았던 그 이스라엘이 율법에 의해서 멸망하고 율법에 의해서 멸망당한 그들이 이스라엘이 남은 자가 전 세계로, 주변 나라이지만, 전 세계로 다 퍼져버렸어요. 그러므로 말미암아 언약 적용이 이스라엘 경계선을 넘어서 전 세계에 다 퍼지게 되면 율법이 있는 곳에 필히 뭐가 있습니까? 저주가 있지요? 그러니까 세상 전체가 에브리원 윌 번(Everyone will burn.) 전체가 저주받는 세상으로 달라집니다. 그 속에 누가 뛰어드는가? 예수님도 끼어들죠.

예수님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하늘나라에서 지상에 왔죠. 지상은 무슨 나라? 저주가 확정된 나라. 저주가 확정된 세계이기 때문에 이 안에 뛰어든 것만으로 예수님은 뭘 받습니까? 십자가에서 저주받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도 예외가 없어요. 우리는 물론이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저주를 받아야 됩니다. 저주에서 통과해서 복 되는 것은 이것은 바로 새 언약의 개입으로만 이것이 복 저주에서 복으로 바뀌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성도는 어디에 저촉을 받느냐? 새 언약의 저촉을 받습니다. 성도는 오직 복의 대상이에요. 복의 대상이기 때문에 아낌없이 뭘 받아도 돼요? 아낌없이 죽어야 합니다. 아낌없이.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기 때문에. 죽는 것이 더 이상 우리에게 협박 거리가 안 되는 거에요. 이 말은 뭐냐? 죽이는 그것이 복의 하나의 양상이고 복의 하나의 형식이다. 우리가 죽어야 되는 게.

지난 주일 낮 설교 때 제가 그런 질문을 했어요. “이왕 죽는 것 트럭에 받혀 죽는 것을 원합니까 외제차에 받쳐 죽는 것을 원합니까?” 그런 질문을 했어요. 우리 교인들이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말해줬어요. “외제차요.” 그런 생각을 가지니까 죽어 마땅한 거에요. 아까 몇 가지 나왔죠. 앞으로 우리의 할 일은 뭐 밖에 없다? 원망. 죽어 마땅하니까. 죽어 마땅함이 얼마나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지 몰라요. 죽어 마땅함이. 이왕 죽는 것 실컷 원망하고 죽읍시다. 실컷 원망하고. 원망하라고 주께서 주심으로 말미암아 주께서 십자가, 예수 언약 안에 있는 구약과 신약의 모든 통합된 그 모든 사건이 우리에게 육신에게 주어지는 우리는 육신이 주님의 말씀의 돌판이 되는거에요.

모세가 들고 왔던 그 돌판에 주님의 율법이 있는 것처럼 그 율법이 현실화된 한 조각이 우리의 육신입니다. 비로소 우리는 주님의 언약의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어요. 내가 태어나고 죽고 하는 이 모든 것이 말씀이 말씀 되게 살아나기 위해서 우리를 활용하고 있다는 이게 바로 우리의 존재의 원인이었던 겁니다. 마땅히 우리는 내 인생에 대해서 책임질 이유도 없고 그런 권한도 없고 그런 권리도 없어요. 이름이 바뀌었으니까. 질적 일의성. 말이 어려워서... 질적인 하나밖에 없는 일, 의미, 의미성. 질적 의미성이 계단을 타고 역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흘러 넘친 이상은 수적 일의성. 내가 분명히 여기 있다는 수적 의미성에 이 질적 의미성의 현실과 수적 의미성의 현실에서 질적 의미성의 현실이 우세하고 승리할 때 이게 의고 이게 거룩이에요. 이게 선함이고, 이게 생명 나무고 그런거에요.

신명기 한번 봅시다. 참 이런 개명을 줘 놓고 이걸 지키라 하는 것은 정말 하나님이 잔인하죠. 정말 하나님은 봐주는 것 없습니다. 7장 2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찌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이렇게 되어있죠.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해야될 하나밖에 없는 반항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강의에서 제가 여러번 했습니다만, 거기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무엇이어야 정답입니까? 원망이에요. 원망입니다. 불쌍히 여기지 말라.

유니세프도 가입하지 말고 아프리카에 물 판다고 돈 보내지 말고. 이웃이 죽든 말든 불신자란 이유 때문에 죽든 말든 거기에 동냥도 하지 말고 동냥 자체가 뭐고 아예 불쌍히 여기지 말라에요. 불쌍히 여기지 않으려면 누구를 불쌍히 여기지 않아야 돼요? 자기 자신을 불쌍히 여기지 않아야 돼요. 그 말씀이 그렇게 도달할 때 우리에게 본능적으로. 이거는 뭐 순간적으로 확 튀어나오는 건 뭐냐? “너무합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속이 후련했었어?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그러면 주님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가 아직도 유령이 아니고 인간이구나... 인간적 요소가 있구나. 이렇게 되는거죠.

원망이라는 것을 경유하고 거쳐야 비로소 그 때에 나로 막혀있던 주님의 본심이 그 질투하는 본심이 나오게 되어있어요. 신명기 4장 33절 보겠습니다.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었느냐?” 묻는 겁니다. 하나님께 답변해야죠. 정답은, 없더냐. 그러면 너희들은 왜 살아있지? 모르죠. 몰라요. 그 이유를 알려줄게. 이제 이번 시간 끝으로 제가 이 문제를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질적 일의성에 주인공은 누구냐 하면 짐승이에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입니다. 그런데 어린양이 투입되어버리면 어린 양이 제일 이렇게 구심력을 갖추고 마지막 단계에 어린양이란 짐승이 투입되어 버리면, 이 취지가 순서를 거꾸로 밟아서 거꾸로 흘러가게 되어있죠. 흘러가게 되면, 이 전부가 뭐가 되느냐 하면, 양과 동일한 운명의 강요당하게 되는 단체가 됩니다. 왜? 질적 의미니까. 수적 의미로 있던 그 의미에 질적 의미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투입됨으로써 이것이 흘러가게 되죠.
흘러가게 된다고요. 근데 짐승이 피를 흘릴 때면 짐승이 자살합니까? 짐승이 스스로 자살해요? 그런 짐승이 있을 순 있는데, 누가 잡아요? 인간이 짐승을 잡아야 짐승은 피가 나오게 되어있잖아요. 그러면 내가 누굴 잡아요? 내가 주님께 원망해야 그 사이에서 뭐가 출현 됩니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출현 되는 겁니다. 짐승이라 하는 것은 인간 세계에 속하지 않는 인간 세계의 바깥에 있는 천시 받는 대상이 짐승이잖아요. 그러면 짐승을 천시한다는 말은 누굴 존대하고 있다? 우리 인간들끼리 세계가 자기가 스스로 존경하기로 합의를 봤잖아요. 거기에서 짐승같이 오신 분이 투입되어서 스스로 귀족으로 여기고 점잖게 여기고 훌륭하다고 자부하는 그들에 의해서 피해를 당하는 그 코스에, 회로에 이제 이스라엘이 거기에 말려들게 될 겁니다. 계속해서.

그래서 그렇게 해서 주께서 얻고자 하는 건 뭐냐? 이득은 뭐냐? 그게 바로 율법의 완성을 보는 회로를 마련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을 떠나지 않죠. 끝까지 그들을 갈굴 거에요. 그들이 죽을 때까지 멸망할 때까지 끝까지 할겁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이 우리 내부로 유일한 질적 의미로 오게 되면 우리는 나의 존재 의미와 마주치면서 다툼이 일어나게 되죠. 맛사죠. 므리바. 다투다, 또는 시험하다. 그 의미가 구약 때 출애굽기 신명기에 있었던 그 행위가 그대로 우리한테 복제판으로 에고처럼 메아리처럼 우리에게 계속해서 반복해서 말씀이 말씀대로 우리에게 일어나게 될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살아있는 말씀 판이 되어요. 돌판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래서는 여러분들은 “그럼 어째? 나는 지옥가냐?” 이렇게 초조하거나 할 필요 없죠. 왜냐하면 우리는 어디 안에 있기 때문에? 신약시대에 율법이 모든 것이 폐기된 상태에서, 그림자로 전환된 상태에서 다 이루었다는 입장에서 느긋하게 우리 속에 작동하고 있는 주의 말씀의 현실을 우리는 맛보면 되죠. 그것은 우리가 나서서 뭐 설칠 필요가 없어요. 그냥 하는 것처럼 그냥 가만히 있어. 내가 다 해줄게. 니는 내 둥지에 그냥 참여하면 되죠. 둥지란 주님의 회로의 최종 구심점이 바로 둥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분이 모든 존재를 심판하는 그 자리에 오늘도 여러분이 참여하신 것을 영광으로 여기시면서 식사하러 가시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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