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제2강-신명기: 확정된 저주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언약이 주어진 환경을 광야라고 하는데 언약이 주어졌다고 해서 언약이 완성되는 건 아니에요. 주어진 언약이 완성 상태로 생겨나는 환경이 바로 광야입니다. 어떻게 언약이 스스로 자기 완성의 모습을 드러내는지 그거는 인간 속에 상처를 심어놓고 그 상처를 하나님이 찾아오는 그러한 방식으로 합니다.
인간 속의 상처라는 것은 쉽게 하면, ‘내가 어디 있지?’ 내가 지금 어디 있는 거야? 그러니까 이 광야는 내가 원했던 장소가 아니고 여러분 인생이 여러분 원하던 인생이던가요? 아니잖아요. 내가 있을 곳이 아닌데 내가 왜 있지? 또는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닌데 내가 왜 이런 인생을 살지?
여기서 뭐냐 하면 상처를 받게 됩니다. 상처를 받으면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범죄 한 인간을 자기 조건을 이루는 환경 속에 주님께서 잡아당겨요. 이걸 포획합니다. 가져와요. 가져와서 인간 속에 상처를 심어놓고, 상처를 남기는 방식으로 주께서는 인간을 몰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인간 속에는 뭐가 생기느냐 하면 낯섦이 생기죠. 이건 내가 원하는 인생이 아닌데, 내 인생 이래 되면 안 되는데, 라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인간 속에 불편함, 그리고 서글픔, 내 뜻이 엎어지는 그 좌절감, 이런 것들을 하나님께서 자꾸 조성해나가요. 조성해나가면서 인간들로 하여금 이건 내 뜻이 아닌데 나는 이런 인생이 아니고 싶은데, 라고 자기 자신을 피신시키는 동작을 유발해요. 그렇게 되면 인간은, 어려운 용어는 빼놓고요. 인간은 존재가 힘드니까 고통 없는 존재로 이동하고 싶은데 주님께서는 여기 존재에다가 자꾸 사건을 집어넣어요. 내가 원하지 않는 사건에 합류하는 그걸 포함하는 인생으로 살게 만듭니다.
그게 신명기에서는 어떻게 하느냐?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숫자는 적은데 이상하게 전쟁에 승리한다든지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만들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뭔가 내가 나쁜 짓을 했는데 하나님께서 보너스다 하고 25억 던져주는 것, 이게 낯선 사건이에요. 내가 원하는 식으로 인생을 끌고 가는 게 아니고 어떤 특이 사건이 자꾸 나로 하여금 내 한계를 내가 쥐고 있을 수 없도록 내 한계를 파괴되도록 주께서 끌고 가는 상황을 만들어내시는 겁니다.
이게 레위기 말고 출애굽기, 민수기, 그다음에 신명기에서 끊임없이 무슨 사건들이 자꾸 일어나요. 그 사건을 신명기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이걸 ‘전쟁’이라고 합니다. 자꾸 전쟁이 일어나거든요. 전쟁이 일어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이 전쟁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악을 처벌한다고. 명분이 뭐냐? 악을 처벌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앞장세워서 내가 악을 처벌하겠다. 이 땅에서 악을 없애겠다, 라고 하면서 악한 이스라엘을 사용합니다.
그러니 모든 전쟁의 승리에 대해서 누가 부끄러움의 몫이 되느냐? 이스라엘이, 승리한 자가 이상하게 부끄러워지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전쟁의 승리를 원한 게 아닙니다. 아예 전쟁이 없기를 원해요, 인간은. 인간은 조용하게 살고 싶어요. 싸워서 이기는 것, 그것도 짜증나, 귀찮아. 그냥 조용하게 날 좀 건드리지 마라. 날 안 건드리고 살고 싶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전쟁할 때 적은 숫자를 의도적으로 많은 숫자와 대결하게 만들었습니다. 한 가지를 예를 들면 이건 신명기가 아닌데 약속의 땅에 들어가고 난 뒤의 일인데, 열왕기하 13장, 엘리사 이야기에요. 엘리사가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그러니까 요아스 왕이 엘리사 선생이 죽으면, 일종에 제갈 공명처럼 생각한 거예요.
대단한 참모로 생각해서 엘리사 죽으면 이 나라 누가 지킵니까? 하나님께 기도할 사람도 없는데 우리가 선지자를 얼마나 좋아하고 선지자를 위해서 사는 것 아시면서 이렇게 돌아가시면 안 되는데, 라고 하면서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14절)라고 해요. 우리의 최고의 무기는 엘리사 당신입니다, 라고 하면서 죽지 말라고 빌고 있습니다.
그럴 때 엘리사가 창문을 좀 열어보세요. 왕의 손으로 활을 잡으시고 동편 창을 여세요. 쏘세요. 그래서 쐈거든요. 또 쏘세요. 또 쐈어요. 또 화살들을 취해서 땅을 치세요. 할 때 요아스 왕이 땅을 세 번 칩니다. 세 번을 치는 걸 보고 죽어가는 엘리사가 화를 내면서 왜 세 번만 쳤습니까? 대여섯 번 쳤으면 완전하게 아람군대 이길 수 있는데 왜 세 번만 쳤습니까, 라고 이야기했어요.
이게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지금 왕이 자기 한계를 못 벗어나고 있어요. 뭐냐 하면 엘리사 살아 있으면 우리나라 이기고 하나님이 우리 편이고 승리한다, 라는 이 한계는 내가 존재하는 한 이 한계도 같이 있는 거예요. 내가 이 한계,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준다는 한계에 있으면 문제가 되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여전히 안 다칠 수 있다는 자기 한계에 그냥 잠식돼 있는 상태에요.
그래서 온갖 아부를 하면서 주의 종이 함께 있을때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이게 자기 딴에 믿음이라 우기는데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지켜줄 겁니다. 그럴 때 엘리사가 하는 이야기는 그거에요. 지금 당신은 그렇게 돼버리면 이 승리가 당신 승리로 돌아가기 때문에 당신은 한계에 그냥 머물러 있게 된다는 거예요. 한계를 못 벗어나고. 결코 나의 승리가 안 되려면 승리는 당신의 패배를 기정사실화시키는 그 토대 위해서 그다음에 하나님께서 승리를 줘야 돼요.
그래서 엘리사가 이렇게 합니다. 왜 대여섯 번 치지 않고 세 번만 쳤냐고 말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 현장에 여러분이 있으면 엘리사한테 어떤 말을 하고 싶어요? 진즉에 이야기하지 진즉에. 진즉에 대여섯 번 치라고 하면 안 할 내가 아니라고요. 만약에 왕이 일곱 번 쳤으면 엘리사는 또 화를 냅니다. 왜 열 번을 못 채우고 일곱 번만 쳤습니까, 이런 거예요.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지금 아람군대가 북이스라엘을 쳐들어온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한 거예요.
아까 첫째 시간에 한 걸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의 모든 의미는 그 바탕이 어디서 나오는가? 그 바탕이 나의 단단한 존재에서 나왔어요. 이 존재를 지키기 위해서 의미가 나왔단 말이죠. 그러면 이 존재가 신을 믿는다, 예수를 믿는다, 뭐 천국을 믿고 재림을 믿는다, 십자가를 믿는다고 해버리면 이거는 어디서 나온 거예요?
이 의미가 신을 믿으면 우리에게 예수 이름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로마서 10장에 나오는 이 말씀이 그게 의미 있다고 여기는 것은 그 밑바닥에 뭐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내가 지금 안 깨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은혜 받았습니다.’ 은혜를 왜 받아요? 은혜 받아서 뭐할 건데요? 은혜는 받는 게 아닙니다. 은혜는 나를 제거하는 게 은혜에요.
지금 제일 골치 아픈 게 뭐냐? 이 골칫거리인 내가 제거당하지 않아서 제일 골칫거리에요. 떠나야 되는데 안 떠나고 있는 거예요. 이 세상이 좋다고. 주께서는 친절하게 광야까지 마련해서 떠나라고 했는데 도대체 그 의미도 몰라요. 광야에서 사는 방법, 일단 절약하자. 남에게 구제하고 선교하면 복을 받으리라. 뭐 이런 식이에요.
나의 존재에서 의미가 나왔고 이건 나에게 확고하게 결부되었기 때문에 의미를 못 벗어나잖아요. 중간에 여기서 전쟁을 집어넣습니다. 이 의미와 나의 존재를 떼어놓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아람나라로 이스라엘을 포위하게 만들었지요. 이게 뭐냐? 요아스 이스라엘 왕에게는 상처가 되는 거예요.
<범죄도시4>에 나오는 마동석 말고 마동석이 맨날 불러내는 사람 있잖아요. 장이수. 장이수가 마동석에게 왜 자꾸 나를 찾아와서 괴롭히느냐는 거예요(“또 못살게 구네!” “또, 또 사람 못살게 굴려고 또.” “아 진짜 또 못살게 구네!” “나만 못살게 굴어 왜!”). 그게 나한테 뭐가 된다? 상처가 되는 거예요. 아픈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나한테 상처 되는 하나님 말고, 상처 안 되는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거예요. 상처 안 되는 하나님으로서 사이좋게 평화롭게 온유하고, 성경에 나오는 그런 것 있잖아요. ‘내게 강 같은 평화~~’ 이런 좋은 신앙생활, 종교생활을 하고 싶은 거예요. 상처가 없기를 바라는 겁니다. 내 뜻대로 되는 것까진 욕심내긴 싫고 그나마 제발 나를 안 건드렸으면 좋겠다는 것, 내 하는 식대로 그냥 봐주기만 해도 나는 고맙겠다, 이러는데.
주께서는 상처를 여기다 가져다줍니다. 그러면 그 요아스는 상처에 파묻히겠지요. 여기서 엘리사와 그의 하나님에 대한 반발과 반항이 나오지요. 반발과 반항, 이게 진즉에 나와야 돼요. 이게 초장에 나왔어야 되는데 교회 오십 년 다니고 나오면 안 돼요. 교회 한 1년 다니고 이게 나와야 돼요. ‘나 이제부터 하나님 믿으면 개다.’ 이게 나와야 돼요. ‘내가 두 번 다시 예수 믿는가 봐라.’ 이게 진즉에 나와야 된다고요.
이것을 고발하는 2022년도의 영화가 있어요. 이건 국내에서 개봉 안 된 영화인데 영화제목이 이렇습니다. ‘모든 인간이 불타버릴 것이다.’ 제목이 그래요. 이 내용에 의하면 성경의 예언대로 이 세상 불타기 위해서 그들이 왔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그들이 저벅저벅 왔다는 거예요.
이 영화의 내용은 뭐냐? 이미 모든 것을 불태우기 위해서 그들이 왔다면 여기에 대항해서 자기 마을을 지키기 위한 인간들의 분투노력은 아무짝도 소용없습니다. 영화 끝. 그래서 이 영화를 보게 되면 하나님이 이미 신명기에서 모든 인간은 저주 내리기로 확정된 이상 교회 오십 년, 육십 년 다니고 철야하고 성경 읽고, 성경 쓰고 무슨 난리를 쳐도 이게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왜 못 믿느냐는 겁니다. 그걸 왜 못 믿어? 수련회 참석하고 어떻고, 간식 챙기고 그게 아무짝도 소용없는 거예요. 게임 끝났어요.
그들이 누구냐 하면 성령이거든요. 성령님과 예수님, 그들이에요. 왜? 인간 쪽이 아니니까.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저쪽 세계에 살던 분, 성령과 주님이 Everyone Will Burn, 모든 인간은 반드시 불타버릴 것이다. 할 말 있어? 인터뷰할 것 있어? 없어요. 끝나요.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어요. 감사할까요? 하나는 그냥 재림할 때 불탈 것인지, 아니면 니가 알아서 죽어서 지옥 갈 것인지, 두 가지. 감사해야 돼, 감사해야 돼.
그래서 신명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건 그거에요. 왜 우리는 이단인가? 왜 우리는 거짓인가? 자체적으로 자기를 부정하지 않는 성경해석은 다 거짓말입니다. 겉핥기식 성경해석이에요. 그 예가 바로 아까 화살이야기에요. 모든 환경과 상황이 벌어지면서 이스라엘이 뭐가 문제인줄 모르고 그저 엘리사한테 애걸복걸하고 제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달라고 할 때 엘리사는 뭐냐 하면 이번 차에 네가 네 자신의 한계를 못 벗어나는 것을 아는 멋진 기회로 삼아라, 하고 본인은 죽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반전이 있어요. 엘리사가 그렇게 죽었잖아요. 열왕기하 13장 21절, 누구 크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마침 사람을 장사하는 자들이 그 적당을 보고 그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들이던지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섰더라” 와아 엘리사는 죽었어요.
중풍병자는 자기 병 고쳐달라고 왔는데 예수님이 이야기한 것은, “네 죄는 내가 사해줄게” 이래 됐단 말이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는 게 아니고 진짜로 우리가 원해야 되는 것을 주께서는 우리에게 우리의 의사를 묻지 않고 그냥 일방적으로 공짜로 주신 거예요. 그러니까 이 나라를 어떻게 지킵니까, 하는 엘리사의 용도를 우리나라 지키는 그러한 용도로 생각했던 그 이스라엘에게 엘리사가 죽었을 때 얼마나 절망적이겠어요.
그런데 죽고 난 뒤에 희한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떤 사람의 죽은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부활했어요. 다시 소생했습니다. (왕하13:20-21) 이거는 생각하지 못한 보너스에요. 이게 무슨 뜻일까요? “살아서 네 나라 지킬래, 아니면 죽어서도 또 살래, 어느 쪽 할래?” 이런 식이거든요. 일단 네가 죽었다는 말은, 네가 예상하고 기대하고 이렇게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라는 그 입 다물라고 죽이는 거예요.
그런데 살아 있으면서 입이 다물어집니까? 계속해서 하나님 기도합니다, 이렇게 나오잖아요. “죽여줘야 속이 시원하냐?”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가만있을 수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을 하겠습니다.” “제발 좀 입 안 다물래?” 누가 보답하랬어요? 보답을 왜 하려고 하는 거예요? 아직도 살아 있는 나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한 거죠. 자기 존재와 관련된 의미가 존재와 분리되지 않는 상태에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이스라엘을 샘플로 해서 인간이 무엇을 요구하던 무슨 짓을 하던 간에 멸망할 자는 반드시 멸망하고, 살려줄 부활될 자는 그가 어떤 행동을 하던 상관없이 반드시 부활하시는데 그 토대가 뭐냐? 그 토대가 사람들에게 밉상 받았던 바로 메시아의 대실패를 근거로 하나님께서는 부활의 은혜를 주십니다. 아무도 실패할 생각을 안 하니까 주님이 먼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자들 다 도망갔습니다. 주님 십자가 달릴 때 다 피신하기 바빴어요.
그러면 예수님 십자가 죽을 때 다 도망쳤고 숨어서 그냥 비겁하게 그 추이를 살폈다는 말은, 이것은 아까 한 것처럼 예수님에 대해서 자기 존재가 있으니까 예수님이 존재해도 자기 존재에서 나왔던 의미를 일방적으로 자기가 회수한 게 돼요. 주님은 바로 이러한 스승을 버린 이곳에 존재에다가 예수님의 자기 상처를 심어놓고 그걸 회수하면서 이 상처받은 자를 구원해내십니다.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거예요. 멋지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계획이.
실컷 약 올려놓고 실컷 삐지게 만들어놓고 ‘나, 주님과 안 놀아’ 해놓고 네가 그러한 낯선 사건 속에, 특이 사건이거든요. 어떤 사람은 순수 사건이라 하는데 그건 어렵고, 특이 사건 속에 휘말리게 해놓고 그 사건을 몽땅 주님의 자기 일로 가져오면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별로 좋아하고 기뻐할 생각도 없네.
따라서 주님한테 뭐가 필수적이냐? 너희들은 Everyone Will Burn, 다 불탈 것이다. 이것이 주께선 어쩔 수 없는 가장 친절 중에 제일 좋은 친절이 이 친절이에요. 내가 필히 죽여주마. 불로써 죽여주마. 그 불에서 나온 게 뭐냐? 신명기 4장, 5장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 이거에요. 율법이 어디서 나왔는가? 불에서 나왔다. 율법이 불에서 나왔다는 말은, 모든 율법의 기호와 문자의 배후에 불이 거기에 깔려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주께서 이들로 하여금 불타게 만들기 위한 미끼로 율법을 준 거예요. 더 놀라운 사실은 뭐냐 하면 이 율법 기호가 불타버립니다. 불에서 나와서 기호가 되고 이 기호가 다시 불속으로 사라져요. 신명기에서. 이걸 위해서 모세가 불타는 산에 가서 거기서 모세가 나올 때에 빈손으로 보내지 않고 율법을 손에 들고 옴으로 말미암아 이 율법을 위반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냥 있지 않고 불로써 심판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처음에 모세가 하나님께 부름 받을 때 떨기나무 있었잖아요. 기억하십니까? 그 떨기나무가 말짱한 떨기나무였습니까? 불타는 떨기나무죠. 그 불타는 떨기나무가 모세로 바뀌면 불타는 모세가 되죠. ‘불타는 모세’ 꼭 영화제목 같다. 모세가 불속에서 나왔어요.
신명기에 보면 모세는 물도 마시지 않고 떡도 먹지 않고 사십 일 동안 있었어요. 뭐 그런 인간이 다 있습니까? 그래도 물은 먹어야 연명할 건데 물도 마시지 않고 떡도 먹지 않고 사십 일 동안 있었는데 얼굴이 너무 좋아. 얼굴이 막 빛이 나요. 오늘 아침에 그걸 미용의 권능이라 했는데 얼굴에 손도 안 댔는데 얼굴에 빛이 나요. 문제는 아무도 그 모세를 부러워하거나 탐을 내지 않았다는 사실, 아무도. 그 누구도 자기 한계를 벗어날 자가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이래 생각하면 제일 좋아요. 벗어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그냥 사시면 주님께서 말씀과 율법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상처를 일으키고 그 상처가 우리 안에 들어있는 특이 사건으로 자리 잡게 됨으로써 우리의 존재의 뿌리가 썩은 이빨처럼 자꾸 흔들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어요.
‘누구냐 너?’ 내가 나보고 묻는 거예요. 내가 거울보고 이야기하면 돼. ‘누구야, 너? 너는 왜 그렇게 매일같이 달라져?’ 다른 사람이 돼 가는 거예요. 그거는 특이 사건이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으로 바뀌게 만드는 겁니다. 그 방법은 상당히 우리 보기에 잔인한데요. 신명기에 보면 율법을 통해서 두 가지가 나와요. 하나는 복이 나오고, 하나는 저주가 나옵니다. ‘감사합시다’에서 감사의 결과는 선택지가 둘밖에 없어요. 복이냐, 감사냐(저주냐?).
율법은 가만있지 않고 활동을 해요. 율법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율법에 의해서 주어진 환경 속에 거해야 돼요. 복과 저주를 주고, 시내 산 밑에 이스라엘 전체에게 전부 다 확산이 돼요. 복과 저주가 확산이 되면서 그들은 결국 율법에 대해서 저주하지요. 저주하는 결과가 뭐냐? 신명기 끝에 나옵니다. 나는 율법이 없는 하나님을 믿겠다, 언약이 없는 하나님을 믿겠다. 그런 선택을. 율법 자체가 없는 불에서 나온 게 없는 것을 믿기로 작정하지요. 이게 바로 반발심이고 반항심입니다. 저주가 나오지요. 복은 없지요. 복 받을 사람 아무도 없어요.
율법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저주가 내려오게 되면 이스라엘에게 어떤 혜택이 주어지느냐 하면 이스라엘 자체가 저주를 받음으로 이스라엘 자체가 율법의 활동의 증거물이 되는 증거물로 참여하는 그런 특혜를 입게 됩니다. 저주는 받는데 이 저주가 어디서 출발한 저주인가를 몸에 둘둘 감을 수 있는 찬스가 온 거예요.
이게 어디 나오느냐, 이걸 누가 알았느냐? 이 사실을 누가 알았을까요? 사도 바울이 알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걸 알고 가만있겠어요? 주의 성령에 의해서 글로 남겼지요. 그 글이 뭐냐? 로마서 7장입니다.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것은, ‘자꾸 나는 죄만 짓는가’에요. 나는 선을 원하는데 나는 복을 원하는데 왜 나는 저주받는 쪽으로 자꾸 기울어지고 그쪽으로 가는가?
하나님이 하지 말라 했으면 나도 할 건데 하나님의 율법이 없었으면 나는 언제든지 하는데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순간, 나는 그다음부터 안 해. 고집도 이런 고집이. 하나님이 하라 하면 안 하는데 하나님이 하지 마라 하면 안 해요. 왜냐하면 내 역할이 그 역할이니까. 여러분 가운데 이것보다 자기에 대해서 더 긍정적인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요. 부럽지 않습니까? 자기 자신을 설명할 때 ‘나는 하나님이 하라 하면 절대로 안 해. 그래서 나는 너무 기뻐.’ 왜? 내 자신의 한계를 아는 즐거움을 매일 느끼니까.
오늘 분위기 왜 이런지 모르겠어. 침묵 시간이에요? 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아무리 해도 맨날 성경을 백독 봐도 모르는 이야기인데 자꾸 성경을 보면 볼수록 일곱 귀신이 와서 “성경 어떻게 봤어?” “그냥 봤습니다.” “꿇어앉아서 봐야지. 신령한 말씀을. 자세 꼬라지하고는, 그게 뭐야. 너 오늘 몇 장 봤어?” “다섯 장 봤습니다.” “주일 날 되면 곱빼기로 열 장은 봐야 주일 지키는 거지, 그게 뭐야. 너 그러고도 나중에 천국 가겠어?”
더더더더, 음주 측정하듯이 마귀가 일곱 귀신을 계속 부추기고 있어. “너 옆에 김 집사하는 것 봤지. 반만 따라가, 반만. 그것도 신앙이라고 신앙 꼬라지하고는 이게 뭐야.” “바쁘다 보니까.” 핑계대기는. 제가 참 착하니까 일곱 귀신이지 사실은 칠십에 칠, 사백구십 귀신입니다. 이거는 번갈아가면서 순차적으로 찾아와서 귀신이 자꾸 독촉해요. 네 존재가 구원받겠느냐고 계속해서 독촉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십일조 왜 건너뛰었어, 이런 것. 교회가 교육관 짓는데 왜 외면했어, 이런 것. 그 광고할 때 참석 안 했습니다. 핑계대지 마.
인간은 자기에게 낯선 게 들어왔을 때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상처가 돼요. 상처가 뭐냐? 이질적인 것, 낯선 것. 이게 뭐냐 하면 상처는 낯선 의미, 낯선 단어, 낯선 개념, 낯선 문장 이게 들어올 때 우리에게는 가만있어도 이미 상처가 돼버려요. ‘저리 안 가나. 저리가, 저리가.’ 밀어내지요.
그 밀어내는 것을 누가 이용하느냐? 하나님이 이용하신 거예요. 율법이 갖고 있는 저주의 기능에 딱 적합한 최적화된 존재,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사람의 반항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율법과 더불어 있는 백성,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입니다. 여러분, 그 특혜는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이스라엘 나라 어떻게 됐습니까?’ 그렇게 묻고 싶지요. 그거는 제가 답할 게 아니고 에베소서 2장에서 답할 문제에요. 그 자부심, 하나님의 율법이 있다는, 하나님을 독대한 사람이 준 율법을 우리 민족만 받았다는 자부심이 대단하지요. 그 자부심을 가진 이스라엘은 어떻게 됐느냐? 에베소서 2장에 나옵니다. 2장 12절, 제가 읽을게요.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방민족보고 이야기해요. 오늘날 우리 같은 단군의 자손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거 설명해야 돼요.
하나님은 약속을 약속되기 위해서 이방민족을 제치고 오직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율법, 언약을 줌으로써 약속이 약속대로 성취가 어떻게 되는가를 특혜를 준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이에요. 이스라엘 민족이 망하고, 이스라엘 민족이 저주받음으로써 그들은 저주받고 율법은 살아나는 그러한 하나님의 손댐, 진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업적이 이스라엘 백성에 고스란히 남아있어요. 거기에 대한 그들의 자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민족은 맨날 뭐하느냐? 맨날 회개에요. 이사야의 말씀을 어겼습니다. 예레미야의 말씀을 어겼습니다. 우리는 이미 역사를 통해서 교훈을 배우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잘못을 두 번 다시 하지 않겠습니다. 이사야가 말하기를 네가 안식일에 뛰놀고 파티 열었고, 회개하지 않았고, 금식하지 않았고, 구제하지 않았다고 우리는 그것을 익히 알기 때문에 우리는 안식일에 구제하고 십일조하고 금식하고 회개하면서 오는 메시아에게 보란 듯이 당당하게 기다리겠습니다.
이것 누가복음 18장에서 누가 이야기했습니까? 바리새인이 이야기한 거예요. 그게 바리새인의 한계입니다. 율법을 줬는데 자기 존재가 율법에 안 들어왔어요. 율법 앞에서 스톱했어요. 근데 자기 존재 안까지 저주가 들어온 사람이 누구 게요? 아까 이야기했어요. 로마서 7장에서 누구죠? 사도 바울이죠. 여러분, 사도 바울이 부럽지 않습니까? 당당하게 나는 저주받아야 합당합니다.
왜? 내 안에 나의 주인 노릇하고 있는 악이 있으니까. 악을 찾아서 수만 리. 내가 모르는 나의 주인을 찾아서 친절하신 하나님께서 율법을 우리한테 내 속까지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나의 의미 자체가 저주를 유발하는 의미로 가득 찼다는 이제야 마음껏 부담 없이 주저하지 않고 고백하는 이 자유, 성령이 주신 자유입니다. 나쁜 짓해서 벌 받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주께 영광 돌리겠다는 그것이 바로 마귀가 나한테 시킨 일이란 것을 발견하는 그 기쁨이에요.
우리는 차마 그것까지는 근접하지 못했거든요. 끝까지 나를 지키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했을 뿐이고 그것도 모자란다면 그 모자란 부분에 대해서만 긍휼히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우린 이런 식으로 주와 거래했지요. 언약은 거래가 아닙니다. 끝까지 Everyone Will Burn, 모든 인간은 이미 확정 났어요. 지옥 가기로 확정 났습니다. 인간이냐? 그러면 지옥입니다.
그럼 목사님, 천국 사람은? 그거는 인간이 아니무니다. 그 사람은 인간이 아니지요. 그 사람을 영의 사람이라고 이야기하지요. 그건 인간이 아닙니다.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고린도후서 5장 17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다.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서 모든 인간은 이미 죽었다. 이거는 신명기에서 확정된 거예요. 말씀에서 확정되어 인간은 이미 죽은 거로 간주하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말씀이 신명기로 끝나면 큰일 나죠. 신명기에서 끝나는 게 아니고 신명기를 토대로 해서 계속 확장되면서 어디까지 오는가? 신약까지 넘어오는 거예요. 그래서 율법이란 모세언약을 넘어서 타넘고 새 언약까지 왔을 때 모든 언약을 마감이 되는 겁니다. 새 언약은 신명기언약, 모세언약이 토대에요. 다 죽인다. 다 죽여 버릴 거야.
이게 토대가 되니까 새 언약 안에서 도로 신명기로 갈 수는 없어요. 왜냐하면 신명기에선 몰랐는데 새 언약에 오니까 우리가 바르게 살자는 자체가 애초에 성립이 안 되는 존재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게 우리가 말씀 지키는 것은 안 된다. 왜? 우리는 이사야 40장 8절에 의하면 풀 같은 존재라서 말씀을 못 지켜요.
그래서 말씀은 말씀 스스로 말씀을 지켜내는 작업장으로 우리를 활용해주시는 겁니다. 음악가한테는 스튜디오고, 미술가에게는 그림 그리는 공간이 되겠지요. 조각가는 작업하는 공간이 되고. 그래서 그 공간에서 삐져나온 것이 뭐냐? 하나님 형상이에요. 그러면 하나님 형상 앞에서 우리는 뭐냐? 마귀 형상이죠. 그냥 마귀 형상이에요. 하나님의 형상은 예수님만 하나님 형상이라 해요. 골로새서 1장에 의해서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에요.
제가 지금 강의를 준비하고 있는 절차는 뭐냐 하면 신명기 가기 전에 출애굽기부터 시작을 하는 겁니다. 출애굽기부터 시동을 거는 거예요. 여기 출애굽기에 다른 시공간, 시간과 공간이 여기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밤중에 나올 때 그때부터 하루를 카운트로 치는 거예요. 계산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계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카운트, 수를 세는 것 이걸 기수라 하고, 인간의 모든 문명에서 인간이 셈을 하는 이것은 서수에요. 수학에는 기수와 서수가 있는데 서수부터 먼저. 서수는 순서가 있는 것,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이렇게 연결시키는 겁니다. 왜 이렇게 연결했느냐? 첫 번째가 있어야 두 번째 결과를 낳고, 두 번째가 있어야 세 번째란 결과를 낳으니까요.
그러니까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인간의 모든 문명은 바깥에서부터 뱅뱅 돌아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n번째 해서 안에 구심, 구 형상으로 집약돼요. 응축이 돼요. 근데 인간의 약점은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계속 나오기 때문에 끝 번째가 없어요. 그러니까 인간의 구심점은 뭐 있어요? 항상 비어있습니다. 비어있다? 이건 뭐냐 하면 인간의 욕망의 결핍을 자극하는 거예요.
욕망을 절대로 달성되면 안 됩니다. 욕망이 달성되면 욕망이 없어지면 인간은 죽어요. 인간은 희망 때문에 사는 거예요. 이루어지지 않는 그 욕망이 인간의 희망으로 자리 잡는 겁니다. Boys, Be Ambitious. 인간의 모든 문화와 문명의 발전은 중간에 항상 점점 비어있어요. 이거는 더 지혜로운 후손들이 해야 되고, 이건 누가 해야 되는가? 정신 차려서 AI, 인공지능이 해야 될 문제. 항상 남겨둬요. 남겨둔 것을 그다음 순서 n+1번째를 하는 이 보람으로 자기 존재의 의미와 이유가 여기서 나오는 겁니다.
엄마가 말기 암일 때 자식이 엄마에게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해요. “엄마, 죽으면 안 돼. 내가 아직 시집을 안 갔잖아. 나 시집갈 때 엄마, 아빠가 참석을 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엄마 용기를 내라고.” 그럼 엄마가 또 한다고요. “그래. 네 말대로 네 결혼식 보고 눈 감으마. 의사는 2개월밖에 못 산다는데 네가 남자도 없이 무슨 수로 하겠어.” 그럴 때 엄마를 살리는 이유로 아르바이트하는 청년에게 내 남편이라고 해주면 돈 이십만 원 줄게. 이게 뭐냐 하면 <마지막 잎새>에요. 창가에 나뭇잎이 다 떨어지면 죽는데 안 떨어져, 질겨요. 왜? 스카치테이프로 붙여놨으니 떨어질 리가 없지요. 이게 인생의 억지입니다.
회사에서 나가라 하는데 내가 이 회사 사십 년 근무해서 정들었는데 그냥은 못 나갑니다. 내가 돈을 보고 안 나가는 게 아니고 나도 마지막 유종의 미를 거둬야 내 의미의 마감을 해야 나가도 나가겠습니다. 회사에선 그걸 용납 안 하지요. 책상 들고 나가. 쫓아내지요. 그러면 회사 욕하고 마지막에 종이박스 들고 나가는 장면, 나는 한 번도 못 봤는데 드라마에 나와요.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 망하고 난 뒤에 그 종이박스가 뭐냐? 유대민족이에요. 유대민족이 구약역사를 재해석해서 묵시문학적으로 해석해서 메시아가 오신다 하면서, 박스 뜯어보면 메시아가 오신다. 제3성전 만들 때 쯤 오신다. 이러고 들고 나가는 거예요. 이게 뭐냐? 순서, 서수에요.
그런데 언제부터 서수만 있어야 될 인간세계에 초월적 인물로 자청하면서 나온 니므롯 같은 인간이 이 서수를 자기 안으로 통합을 시키면서 등장한 게 뭐냐? 기수에요. 1, 2, 3, 4, 5 이런 게 기수에요. 기수는 1과 2는 따로 놀아요. 3과 4 따로 놀아요. 하나하나가 단독자입니다. 단독자끼리 모인 것을 억지로 또 하나로 만드는 이걸 무슨 제도라 하느냐 하면 민주주의제도에요. 왜? 투표권이 한 사람당 하나만 있으니까. 기수, 카운트를 해요. 기수를 한다고요.
서수가 있을 때는 서로가 서로를 손에 손 잡고 모두가 하나였어요. 서로 끊어지지 않았어요. 서수시대 때. 옛날 혈통시대 때. 우리가 몇 대 후손인 줄 알아? 죽은 귀신과 우리가 손잡고 살아가는 그 시대. 그래서 조상을 잊지 말라고 제사 지내는 그 시대에는 서수가 살아 있는 시대였어요.
그런데 근대국가가 등장하면서 무기가 발달하면서 근대국가 아닌 인간들을 제국주의 사고방식으로 점령하고 난 뒤에 너도 나도 빨리 혈통국가 벗어나서 다 같이 근대화시키는 근대국가로 전환하면서 그다음부터는 서수시대에서 기수시대가 된 겁니다. 여기에 전환하는 방법이 그 당시 기수라고 하는 왕과 왕비, 1789년 프랑스 혁명에서 앙투아네트 왕비를 처단하면서 거기서 나온 노래가 나왔지요. 프랑스 국가(La Marseillaise). 2024프랑스올림픽 개막식에서 박물관 지붕 위에서 흑인 가수(악셀 생 시렐)가 노래 부르는 것 보셨지요.
그 노래 부르고 이것을 해체시켜서 개인으로 돌아와서 개인의 권리를 서수가 아니고 단독, 너도 나도 똑같은 평등 된 단독이라 여기면서 기수의 통합체로 만들겠다는 이게 뭐냐 하면 국가 개념이에요. 바벨탑이에요. 이걸 먼저 시도한 자가 니므롯입니다. 니므롯의 고향에 세운 탑이 무슨 탑이게요? 바벨탑이에요. 인류의 역사는 기수로 왕질하는 자기가 먼저 신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그 세계에 터널을 뚫고 거기에다가 여호와 하나님의 아픔, 그러니까 창세기 4장에서 가인과 아벨 가운데서 누가 죽었습니까? 아벨이 죽었지요.
아벨이 왜 죽었습니까? 장차오실 하나님의 상처와 관련돼 있기 때문에 아벨이 피를 흘리고 죽었어요. 그 아벨의 요소가 이 세상을 초월적으로 인간세계 만들겠다는 그것과 융합하면서 언약적으로, 그 소시지에다가 바깥에 인간의 자기 역사 위주로 나오면서 같이 병행하면서 교환하면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 그게 신명기 1장부터 되는 거거든요. 그거는 주무시고 내일 아침에 하겠습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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