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여름수련회

1강-한계 뚫기

아빠와 함께 2024. 8. 3. 09:28

2024 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제1강-신명기: 한계 뚫기
(강의:이근호 목사)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절로 아는 것으로 인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우리가 무엇을 몰랐는가를 알 수 있는 그런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신명기를 하는데 신명기에서 여러분들이 다 읽어보겠지요. 물론 성경에 나오니까. 신명기를 끝까지 읽어보면 전체 내용을 말로 하기보다는 제가 뭘 하나 갖고 왔으니까 이걸로 설명해보겠습니다. 제가 빵을 하나 갖고 왔고, 여기 소시지를 햄이죠. 햄을 이렇게 넣었습니다. 신명기를 보게 되면 거기 역사라고 돼 있거든요. 역사라고 한다면 이런 빵이 돼요. 역사라는 것은 겉모습만 보게 돼요.

그런데 신명기는 안에 소시지가 들어있고, 이 소시지를 분리시켜요.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과 그리고 여기 있는 빵과 약속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 침투해서 빠져나와 버리면 이스라엘 안에는 뭐냐 하면 빈 공백이 돼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아요. 그래서 지금 이 언약, 소시지와 역사를 둘로 분리를 시킵니다. 둘로 분리시켜서 따로 이해를 해야 돼요. 이걸 분리시키지 않고 같이 합쳐버리면 인간은 역사와 해석을 설명할 수 있는 재주가 없어요.

역사와 나를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따로 역사를 설명할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이 인간 속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역사 속에 내가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어떻게 역사를 보느냐 하면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잖아요. 영화를 본다는 것은 어두운 데서 밝은 데를 보는 거예요. 이거는 반칙이죠. 왜 그러냐 하면 본인을 어두운 곳에 숨겨놓고 화면에 비친 것을 본다는 것은 그것을 일방적으로 해석을 해버리고 자기 자신은 그 해석에 끼어들지 않고 빠져버리는 거예요. 자기를 안 다친다 이 말이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들이 자기는 숨겨놓고 바깥에 흐르는 이 세상에 대해서 평가하는데 결국 이거는 뭐냐 하면 평가의 한계를 뚫어야 한다. 신명기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은, 내가 하는 평가의 한계를 뚫어야 하는 거예요. 성적이 몇 점 나왔느냐? 나는 만약에 수학 30점 나왔다. 그러면 안 되지. 백 점 맞아야 되는데 30점밖에 안 나왔어요.

백 점 맞겠다는 그것이 자기가 설정한 자기의 평가의 한계잖아요. 왜 백 점 맞아야 되지? 백 점이 다인가, 그게 선인가, 좋은 것인가? 백 점 맞아야 되겠다는 것은 자기가 자기한테 굴레를 씌우는 겁니다. 그 한계를 벗어나지를 못해요. 그냥 뚫고 나가야 돼요. 뚫고 나갈 때 누가 도와주느냐? 바로 이게(소시지) 도와줍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우리가 스스로 한계를 뚫지 못하는 것, 이것이 우리 내부에 침투해서 그것을 바깥으로 나가면서 우리가 갖고 있던 모든 인식과 한계를 다 긁어내지요. 긁어내면서 남는 것은 소시지 없는 그냥 맛없는 빵이죠. 이건 어떻게 하느냐? 이거는 버려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신명기에 나오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기 위해서 찾아오신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을 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버리는 이유는 뭐냐? 이스라엘은 너 자체의 한계를 스스로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겁니다. 왜? 그들은 애굽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애굽 사람의 연장이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나’라 하는 것은 방금 말했잖아요. 애굽 사람으로 치환하는 겁니다.

애굽 사람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살다 나왔기 때문에 애굽 사람입니다. 애굽 사람은 내가 여기 있으면 환경이 애굽 환경이에요. 애굽 환경에 의해서 내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내가 가는 곳에는 이 환경도 같이 따라오게 마련이에요. 따라오기 때문에 이 하나님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굉장히 낯설지요.

그래서 우리는 순서를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 애굽 사람인 경우에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것부터 순서가 먼저고, 그다음에 두 번째, 이 인간들이 하나님의 생각을 어떻게 반대하느냐, 이걸 두 번째 생각하게 되면 문제가 서서히 풀리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애굽 사람들이 생각하는 보통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이게 교재에 힌트가 나와 있어요. 여러분 교재 다 보시고 오셨지요. 제가 두 달 전에 올렸으니까 다 보셨지요.

교재에 보면 꿈은, 여기 꿈이 나오는데 왜 꿈을 꾸느냐, 이건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왜 꿈을 깨느냐, 하는 거예요. 왜 꿈을 깨지? 꿈을 왜 깨지? 꿈에서 깨어나면 잃어버리는 것이 있습니다. 꿈에서 깨어나서 잃어버리는 것을 인간은 어떻게 보충하느냐 하면 꿈을 설명하면서 억지를 부리면서 그걸 메워요. 본인이 꾼 꿈이 기억이 안 나니까 대충 생각나는 대로 꿈의 해석을 꿈에다가 보태버립니다. 왜 그런 짓을 하느냐? 지금은 꿈꾼 상태가 아니고 내가 깨어났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그래서 애굽 사람들의 특징은 신으로부터(중요한 겁니다) 벗어나기 위해서 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이것이 바로 애굽 사람들의 신의 관점이에요. 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신에 대해서 말을 하는 겁니다. 이게 아까 꿈 이야기하면서 그런 겁니다. 꿈이 뭔지를 꿈속에 있었던 적이 있는 꿈이 뭔지 몰라서 꿈이 이럴 거라고 자기가 꾼 꿈을 깨고 난 뒤에 원래 꿈인 줄 알고 갖다 붙여버리지요. 억지를 부리면서.

그래서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나를 알기 위해서 신을 우회로 사용하는 거예요. 내가 모르는 나를 알기 위해서 정립하기 위해서 신을 우회로, 신을 거쳐서 나는 이렇다고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이 방법을 가지고 사람들이 성경을 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도 말씀을 들었으니까 말씀을 보게 되면 이렇게 됩니다.

생명나무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그것을 하나님이 알고 계실 거야, 라고 이야기합니다. 중요한 것 나올 때는 빨간 테두리를 치겠습니다. “생명나무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을 하나님이 알고 계실 거야.” 이 생명나무에다 그다음에 뭐로 바꾸느냐? ‘선악과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을 하나님이 아실 거야.’ 여기다 뭘 바꾸느냐? ‘천지창조에 대해서, 십자가에 대해서, 구원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을 하나님이 알고 계실 거야.’ 그렇게 넘어가는 거예요, 전부 다. 엇갈림이죠. 영원한 엇갈림입니다.

계속해서 내가 하는 목적은 빵이에요, 빵. 나라는 빵. 이것은 버릴 수가 없어요. 왜? 이거는 내가 빵이니까 어떻게 나를 버립니까? 내가 나를 못 버리는 이상은 뭘 버려야 되느냐 하면 내가 빵이고, 나는 나에 대해서 잘 안다는 것에 대해서 거추장스럽고 장애되는 모든 것은 다 빼면 되는 거예요. 내가 필요한 것만 챙기고 나머지는 다 제거하면 된다 이 말이죠.

제거할 때 그냥 제거하면 남들이 욕하잖아요. 그럼 어떻게 제거하느냐? ‘내가 알고 있는 것을 하나님이 알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를 알고 계신다.’ 공식이 이렇게 되는 겁니다. 내가 아는 것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다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전지전능한 하나님을 내가 안다는 것은 이제는 하나님이 나를 알아주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소중하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애굽에서 믿던 인간들의 하나님이에요.

평생을 살면서 교회 다녔다. 왜? 하나님 믿기 위해서. 하나님을 왜 믿는데? 내가 누군지를 알고 나한테는 내가 제일 소중하기 때문에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서 나는 교회 다녀서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안다. 선악과, 생명나무, 구원, 율법, 성경에 나오는 모든 개념을 내가 안다는 것은 하나님도 그런 점에서 날 알아준다,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을 방금 이 논리를 아주 박살을 낸 사람이 있어요. 이 논리를, 인간들이 하는 이 수작을. 첫째 작살을 낸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어디에 초점을 맞추었느냐? 이게 오늘 첫 시간과 관련이 있어서 제가 소개해드립니다. 문장을 하나 쓸 텐데 여러분이 많이 듣던 문장이에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가 이 이야기를 할 때 그 사람이(라캉) 어디서 이 문제의 허점을 발견했느냐 하면, 내가 생각한다, 라고 내가 말함으로써 비로소 나는 내가 존재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 존재, 내 생각보다 숨어있는 게 뭐냐 하면 ‘나는 말한다’에요. 순서가 ‘말한다’가 먼저고, 그다음에 ‘나는 생각한다’, 그다음에 ‘나는 존재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말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의미가 있다는 거예요. 나의 의미가 먼저고 그다음에 나의 존재는 뒤에 오기 때문에 나는 의미를 얻기 위해서 내 존재까지 이용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내가 말하는 것은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고, 이런 게 있기 때문에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까지 끌어당겼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라캉이죠. 이 사람은 그걸 지적하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처음에 인간이 이 땅에 태어나기 전에 인간 주변에 돌아다니는 말이 먼저였다는 겁니다. 그게 교재에 나오지요. 교재에 못 알아먹게 돼 있고, 사람은 자기를 낳은 근원을 후차적으로 조성한다. 나는 어디서 태어났을까를 후차적으로 해요.

처음에는 내가 어디서 태어났는지 관심이 없다가 ‘엄마, 아빠라고 해’ 이렇게 하면서 나는 엄마, 아빠라고 부르는 그 사람 때문에 내가 태어났다는 것을 자기가 후차적으로 그걸 안다 이 말이죠. 어떻게 아는가? 그것도 의미 있게 아는 거예요. 결국 남는 것은 뭐냐 하면 지금의 나를 조성하기 위해서 세상 만물 하나님이고 부모고 간에 모든 것은 지금의 내가 있기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 관점에서 신명기를 보니까 신명기가 해석이 될 이유가 없지요. 해석이 안 됩니다. 왜? 신명기 여러분 다 읽어봤겠지만 신명기 마지막은 뭐로 끝나든가요? ‘너희들 저주받았어’ 그걸로 끝나요. 끝까지 여러분 신명기 1장에서 34장까지 참을 수 없거든요. 중간에 붕 떠서 마지막에 보세요. “너희 귀신 섬길 거야. 너희 망할 거야. 너희 내 손에 죽어” 이게 신명기의 마지막이에요.

왜? 너의 하나님 해석과 하나님이 충돌되기 때문에 그래요. 네가 생각하는 하나님과 진짜 하나님이 충돌되는 그 진리 현장을 고맙게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줬습니다. 멸망받기 위해서 하나님은 인간을 찾아왔고, 그것을 멸망받기 좋아할 사람 아무도 없지요. 좋든 말든 상관없이 이스라엘은 말씀대로 필연적으로 망한 겁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어요. 사람은 꿈을 왜 꿉니까? 그러면 꿈이 꿔지니까 꾼다. 심지어 어떤 과학자들은 꿈을 왜 꾸느냐 하니까 지구가 자전해서 꾼다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요. 지구가 자전을 한다는 것은 밤낮이 바뀐다는 것이고, 밤낮이 바뀌면 인간의 두뇌 가운데서 청각, 시각, 촉각, 감각이 있는데 인간의 두뇌는 각자 자기 영역 싸움에 열중하기 때문에 자기 영역이 만약에 활동성이 줄어버리면 옆의 영역이 자기 영역을 침범해요.

그래서 밤이 되면 보이질 않으니까 시각적 영역이 자기 활동할 게 없어요. 없으니까 자기 영역을 지키기 위해서 인간의 두뇌 가운데서 잠자고 있을 때 시각적인 능력이 발휘되어서 뇌간으로부터 후피질까지 밤새도록은 아니겠지만 왕복하면서 자고 있으면서도 드라마는 이뤄질 때 아침에 나는 내 영역을 무사히 오늘도 지켰다. 따라서 꿈은 지구 자전 때문에. 이상하게 일리 있게 들리지 않습니까?

제가 묻는 게 그게 아니고 그런 논리를 말하는 게 아니고 꿈이 왜 있느냐는 말은, 꿈이 왜 있느냐고 제가 질문하는 것은 꿈과 우리가 아무 상관도 없는데 꿈이 왜 있느냐는 그 질문이 어느새 나한테 상관있는 질문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왜 그런 질문이 상관있다고 생각하느냐 하면 우리는 말이 내 존재보다 먼저기 때문에 자꾸 말을 해야 돼요. 그래야 내가 살아 있는 겁니다.

만약에 여러분 주위에 말할 상대자도 없고 말할 대상이 없다면 이거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권사님들 기도하는 이유가 자꾸 말하고 싶어서 한다는. 말하면서 내가 비로소 살아 있는 거예요. 입 다물면 이거는 송장과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전화할 때 짧게 하면 30분, 보통은 한 시간 반, 좀 길게 한다 싶으면 세 시간 가는. 팔 아프면 이쪽에서 이쪽 팔로 옮기면서 전화하잖아요. 그게 살아 있는 거예요. 말을 하는 겁니다.

뭘 닮았느냐 하면 하나님을 닮았어요. 하나님은 말씀이에요. 하나님은 말씀으로 오거든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애굽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나타났을 때에 제일 충격적인 것은 뭐냐 하면 거기 왜 있습니까, 하는 거예요. 여기 하나 붙인다면, 그들이 거기에 왜 있지요? 당신이 거기에 왜 있습니까?

모세가 애굽에 찾아갈 때 모세와 아론, 당신이 왜 거기 있느냐 말이죠. 왜, 왜? 왜 애굽에 찾아왔지? 거기에 답변을 해야 돼요. 우리가 여호와를 보냈다는 겁니다. 애굽에 있던 히브리인들은 여호와를 요청한 적이 없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요청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요청하지도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우리 허락 없이 거기 왜 있느냐는 겁니다. 열왕기하 6장을 보겠습니다. 이게 상당히 중요한 문제에요.

열왕기하 6장에 아람군대가 엘리사 있는 곳을 포위했어요. 그래서 엘리사 때문에 이스라엘을 점령하지 못한다는 생각 하에 엘리사 있는 곳에 군대를 보내고 말과 병거를 보내서 포위를 했어요. 포위를 하니까 엘리사의 매니저가 겁이 나서 “우린 죽었다. 선생님 우리 죽었습니다. 끝났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때에 엘리사가,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16, 17절) 눈을 열어서 보게 하니까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 말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이 말이거든요.

여기서 제가 질문하는 것은, 천사들이 거기에 왜 있느냐는 거예요. 이게 아람군대를 공격하기 위함입니까, 아니면 게하시를 공격하기 위함입니까? 어느 쪽이에요? 항상 객관식 할 땐 문항이 두 개밖에 안 되거든요. 어느 쪽이에요? 게하시의 한계거든요, 한계. 아까 제가 뭐라고 썼어요? 평가의 한계를 뚫어야 한다. 내가 나 자신을 보는 평가, 내가 나 자신을 판단하는 그 평가. 이 평가는 우리가 뚫을 수가 없는데 누군가 거기에 나타나 있는 거예요. “당신들 뭐야? 당신들 뭔데 거기 왜 있는데?”

거기에 있다.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인간이 평가하거나 인간의 해석을 넘어선 그 누군가를 찾아라.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보물찾기하라는 겁니다. 아무것도 숨겨놓은 것도 없는데 보물찾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들은 보물찾기하면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지요. 왜? 아무것도 남겨둔 게 없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의 입장에서는 보물이 없는데 어떻게 찾습니까, 이렇게 되지요.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보물이 없는데 어떻게 찾습니까? 이거는 인간이 하나님을 발견하는 게 아니고 자기가 하나님이 마련한 어떤 낯선 환경 속에서 자기 자신이 그 환경 속에서 없는 존재인 것을 발견해야 돼요. 거기에 하나님만 계시고 하나님이 계심으로서 나는 없어야 되고, 이 말은 뭐냐? 내가 있게 되면 필히 하나님은 없어진다는 거예요. 이게 신명기의 광야의 해석이에요.

눈을 뜸으로서 잃어버린 게 현실인 거예요. 꿈속에선 꿈을 해석할 필요가 없어요. 왜? 꿈에 싸였으니까. 근데 꿈의 해석이 필요한 것은 더 이상 꿈꾸는 걸 스톱하고 현실세계로 왔을 때에 인간은 ‘어젯밤에 뭘 꿨는데?’ ‘뭐했는데?’ ‘가만있어봐. 해석해줄게.’ 해석에 들어가면 이미 그거는 그 꿈이 아니에요. 엇갈림이죠, 그게.

왜 그렇게 하나님이 하시는가? 하나님께선 인간 속에 있는 장애를 끄집어내려는 거예요. 그 장애가 뭐냐? 인간 속에 남아있는 하나님의 자기 상처를 하나님이 그 상처를 자기가 가져오기 위해서 인간에게 찾아오신 거예요. 하나님의 남아있는 자기 상처. 어디 속에? 인간 속에. 그게 뭔데요? 선악과를 너 따먹었잖아요.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그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눈이 밝아졌지요. 다시 원래의 눈이 밝지 않은 상태로 인간은 못 돌아갑니다. 그러면 눈이 밝은 상태에서 뭐하느냐? 그들은 하나님을 찾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옹호하기 위해서, 나를 절대화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어요.

내가 살기 위해서 내가 우선되기 위해서 나보다 우선되는 신은 없어야 돼요. 그래서 자기가 제일 우선되고 그다음에 나를 위해서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계속해서 자기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지 않게 됩니다. 자기에 대한 믿음을 상실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왜? 하나님이 그걸 호응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신명기 전체를 첫째 시간에 다하고 있습니다. 신명기에서 하나님께선 뭐냐? 형상을 만들지 말라 했잖아요. 십계명 제1계명이죠. 제일 우선은 형상을 만들지 말라. 왜 인간은 형상을 만들고 있었느냐? 신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신이 없기 때문에 나는 신을 필요로 하는데 신은 없단 말이죠. 그러면 나와 관련된 신을 누군가 만들어야 돼요. 누가 만들까요? 내가 만들어야지요. 나의 가치를 다치지 않는 조건 하에, 내가 저주받는 사람 아니라는 조건 하에 하나님을 만들어야지요.

어떤 성경해석을 하든 간에 너는 참 잘났고 훌륭하고 대단하고 너는 구원받을 자격이 있고 너는 천국 갈 거야, 라고 그것을 되받아서 나한테 이야기할 수 있는 그 신을 내가 만들어야지요. 뭘 보고? 성경을 참조로 해서 만들어야지요. 성경에 나오는 모든 개념들, 의미들 다 끌어 모아서 그걸 한 바구니에 담아서 그걸 내가 이성으로 조립해서 나는 성경대로 하나님을 믿습니다, 라는 그 해석을 내가 계속 유지해야 되지요.

뭐가 사단이냐 하면 꿈에서 깬 게 사단 나버렸어. 꿈에서 왜 깨어났어요? 그냥 창세기 2장에서 꿈속에 있지 왜 선악과 따먹어서 꿈에서 깨어났느냐 말이죠. 왜 선악과 의미에서 벗어났습니까? 선악과 의미에서 벗어나서 선악과를 알고 그다음에 생명나무의 의미를 알고 따라잡겠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문제 삼는 것은 네가 나를 어떻게 아느냐가 아니라 네가 있는 자리가 원래 있던 자리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뭐냐? 원래 자리와 지금 네가 변해버린 그 자리의 차이점을 두는 거예요. 그 차이점을 두는데 그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율법을 이해하는 제일 쉬운 방법은 율법을 구조로 하는 거예요. 이렇게 그리면 되지요. 정육면체. 율법은 구조다. 구조의 특징은 뭐냐? 안에 중심이 있다. 근데 이 중심은 비어있다. 중심이 빠져있어요. 중심이 빠져있는 구조가 율법입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율법 속에 들어오게 하고 율법을 따라오게 하고 그 구조를 경험하게 하고 그 구조를 보면 아무것도 없어요. 여기에 아무것도 없다고요. 따라서 인간은 이 구조에 아무것도 없음에 본인이 나설 수가 없어요. 나서지 않으려고 합니다. 여기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여기에 만약에 중심에 아무것도 없음에 자기가 참여하게 되면 누가 아무것도 없는 자가 돼요? 내가 없어지는 자가 되지요.

그런데 이미 눈을 뜬 인간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것이 없는 뭐냐 하면 내가 없어진다는 것이 제일 상상하기 힘들어요. 천국 가도 거기 있을 것이고, 지옥 가도 거기 있을 것이고. 있는 내가 없어진다는 것은 이건 상상도 못합니다. 내가 없어지지 않고 계속 있으니까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가? 율법 구조로 가다가 중심이 있는 구조로 바뀌어요. 중심이 있는 구조는 뭐냐 하면 내가 중심을 차지하는 이러한 율법적 구조로 바뀌게 되는 겁니다.

이게 누구냐? 바로 신명기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굴 닦달 내느냐? 모세를 닦달 냅니다. “모세야. 양식 가져와. 물 가져와.” 모세에게 계속 이야기합니다. 이게 여러분들이 꼭 기억을 해주셔야 되는데 광야라는 게 뭐냐 하면 예수님이 사는 환경을 광야라 해요. 모세가 사는 환경이 광야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왜 거기 있는가? 광야가 자기 자리기 때문에 거기 있는 거예요.

제가 예수님 이야기하는 것은 구약 때는 하나님의 이름이죠.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이 광야고 모세가 사는 곳이 광야인데 이 광야를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살 수 있는 환경으로 오해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면 모세와 하나님 이름은 광야를 어떻게 보고 있느냐? 하나님 쪽에서 의견은 뭐냐? 이 차이만 알아도 여러분 첫째 시간 다 안 게 돼요.

인간은, ‘어떻게 살 것인가?’ 이 광야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물 달라, 양식 달라, 고기 달라. 하나님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어떻게 떠날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의 한계점을 알아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한계를 뚫으라고 한 거예요. 이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식으로 놔버릴 것인가? 놔두고 떠날 것인가를 위해서 광야를 준비했거든요. 광야란 척박한 환경을 준비했다고요. 어떻게 떠날 것인가?

그런데 인간이 그 광야를 떠나려면 애굽에서 살던 식의 삶이 아니고 물 없어도 양식 없어도 사는 그 세계의 생활방식에 준해야 그 원칙에 준해야 우리는 가뿐하게 거침없이 이 세상을 포기하고 떠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게 안 된다고 생각하니까 반발하지요. 반발할 때 누가 여기서 시편105편 12절, “때에 저희 인수가 적어 매우 영성하며 그 땅에 객이 되어 이 족속에게서 저 족속에게로, 이 나라에서 다른 민족에게로 유리하였도다”

여기 인원수가 굉장히 적다고 했지요. 거기 시편에 나오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무슨 이야기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빵과 떡과 물, 이게 필요한 게 아니고 이쪽 세계에서는 율법이 나왔던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 이 세계 말고 바로 하나님이 계시는 그 세계에 꼭 필요한 조건으로 본 거예요. 율법이에요, 율법. 그래서 율법을 준 거예요.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리기 위해서 율법을 줬는데 그 방식은 율법으로 무엇을 죽이느냐 하면 떡 달라, 밥 달라, 물 달라 이 인간들을 죽이는 절차가 필수적으로 이게 동원돼야 되는 거예요. 떡으로 만든 나, 밥으로 만든 나, 돈으로 양식으로 만든 나는 필수적으로 율법에 의해서 제거대상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얼마나 친절하시냐 이 말이에요.

시편 105편 42절, 제가 읽겠습니다. “이는 그 거룩한 말씀과 그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셨음이로다 그 백성으로 즐거이 나오게 하시며 그 택한 자로 노래하며 나오게 하시고” 자꾸 나온다는 이야기 있지요. “열방의 땅을 저희에게 주시며 민족들의 수고한 것을 소유로 취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그 율례를 지키며 그 법을 좇게 하려 하심이로다”

이제 여러분들이 신명기 어느 정도 감이 잡혔지요. 제가 첫째 시간 이야기하면서 핵심은 뭐냐 하면 인간 쪽에서 하나님을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있느냐? 그다음에 거기에 호응해서 그것을 뻔히 아시면서 하나님 쪽은 그 인간에 대해서 어떻게 다루시는가? 아주 첨예한 충돌의 현장이 바로 신명기입니다. 광야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해서 반드시 죽여줄게. 왜냐하면 네 힘으로서는 십계명을 못 지키니까, 네 힘으론 율례 법도를 못 지키니까 그 못 지키는 고질병을 내가 없애줄게,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게 신약에 와도 마찬가지에요. 중풍병자가 예수님에게 병 고치러 왔을 때에 주님께선 그 중풍병자를 어떻게 하시는가?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를 가지고 다가섰습니다.

중풍병자가 원하는 것은 자기 병이 낫는 거예요. 주님께서 원하는 것은 그 죄인을 죽여서 새 사람, 새로운 피조물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그 둘 사이에 생략을 빼버리고 둘을 연결하니까 “저 병 고치러 왔는데요?” “네 죄가 사해졌느니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문장을 두 개를 급조해서 같이 묶어버리니까 중풍병자는 병 고치러 왔는데 생뚱맞게 예수님을 네 죄를 사했느니라.

그러면 중풍병자가 자기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 안에 뭐가 포함돼 있어요? 네 병을 낫게 해달라는 그것이 죽을죄에 해당되는 거예요. “주님, 천국 가기 위해서 교회 나왔습니다.” “네 죄를 사하느니라.” 무슨 뜻이에요? 교회 나와서 예수 믿고 구원받고자 하는 그게 죄인 줄 모르는 거예요. 모든 종교에서 이야기는 그게 죄인 줄 몰라요. 모든 교회에서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그게 죄인 줄 몰라요.

놀라운 사실은 본인이 죄를 알아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을 시켜놓고 그다음에 어떤 작업에 들어가느냐 하면 어디까지가 네 한계냐를 보여주는 그런 친절을 베풀어주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그런데 죄송스럽게도 그 시범조교가 누구냐? 이스라엘 백성이에요. 원래 논산훈련소에서 시범조교는 키 크고 쫙 빠졌어요. 미남이고, 자세 좋고. 조교생활 군기 셉니다. 이스라엘 군기 대단히 셉니다.

네가 말이야 시범을 보여야 되고 네가 모범이 돼야 돼, 하고 계속 정강이 쪽을 군화발로 찹니다. 왜? 이스라엘이 샘플이기 때문에. 인간은 왜 저주받아야 되고, 이스라엘은 꼭 망해야 되는가를 그것을 신명기를 통해서 보여주면서 그 까이고 까이는 그 모습을 보면서 다른 이방민족이 뒤늦게 성경 보면서 후들들 떠는 거예요. “내가 맞아야 되는데 저게 미리 맞았구나. 저 이스라엘 사람들 뭘 잘못한 것도 없는데 멸망당하네? 가만있어봐. 나도 마찬가지 아닐까?”

신명기를 통해서 인간은 근원적으로 자기가 캐낼 수 없는 한계와 문제점을 말씀을 통해서 끄집어내시는 이 친절과 이 사랑에 이번 수련회에서 우리가 푹 젖어봅시다. 한 번 젖어봐야 돼. 인간 생활에 어떤 삶의 어떤 순간, 순간 주님께서 그 죄를 끄집어내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범죄 하고 인간은 뭐다? 제습기다. 이상한데 여기 습기 없는데? 한 시간만 가동해보세요. 제습기 물통에 물 주르르 나오지요.

죄를 빨아들이는 제습기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했습니다. 많이 먹음은 자가 많이 사랑하게 돼 있어요, 주님을. 죄를 많이 먹음은 자가 쏟아내는 배설물의 그 시원함을 더 크게 느낄 수 있습니다. 남 부러워할 필요 없어요. 오늘도 저 파리에서는 금메달 따는 죄를 또 범하고, 여자 공기소총 10미터에서 또 금메달, 은메달.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면 그 금메달, 은메달은 그 선수들의 한계입니다. 인간으론 뚫을 없는 그 한계를 하나님께선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완전히 뚫어버리죠.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 이 인간을 뭐로 바꾸느냐? 죄인으로 바꿔요. 인간을 죄인으로 바꿀 때 여기에 뭐라 들어오느냐? 하나님의 율법이 들어가고 언약이 들어가면서 인간이 죄인 되지요. 죄인 되면서 인간이 있을 때는, ‘당신네들 거기 왜 있는가?’ 천사보고 이야기해도 되고 예수님보고 이야기해도 되고 모세보고 이야기해도 돼요.

거기 왜 있습니까, 라고 외쳤던 그들을 죄인의 입장에서 주님 왜 거기 계십니까, 라고 질문 자체 바뀌지요. 주님 쪽에서 안 바뀌어졌는데 뭐가 바뀌었어요? 우리 자신이 주님의 율법 작용에 의해서 내가 달라지고 바뀌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 거기 왜 있습니까, 라고 의문표 했던 것이, 여기는 거기 왜 계십니까, 라고 느낌표로 바뀌는 거예요.

주님이 벌써 거기 계셔서 작업 시작했군요, 라고 감사하게 되는 거예요. 자기가 멸망하면서 감사한다? 이것은 뭐냐 하면 꿈은 자기가 꿈에서 깬 것 말고 꿈, 비전이라고 하지요. 환상, 꿈, 비전입니다. 노래 가사에도 영어로 vision으로 돼 있어요. 꿈, 환상.

현실에 충실했던 나를 뭐에 집어넣는가? 환상 속에 집어넣는 거예요. 꿈에서 깨서 나는 자립자다, 나는 자존자다 했는데 다시 꿈속에 집어넣는 거예요. 꿈속에 집어넣으면 어떤 점이 좋냐 하면 내가 내 언어를 사용할 필요 없이 그 환경 자체가 주님이 주신 해석입니다. 꿈의 해석이에요. 꿈과 그 해석을 이미 대기하고 준비된 그 세계 속을 신명기에선 그걸 말씀의 세계라고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첫째 시간 끝내면서 이런 질문합시다. 말씀을, 율법을 왜 주셨습니까? 이 질문을 끝으로 10분 쉬고 다음 시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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