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기적은 재앙이다

아빠와 함께 2024. 6. 23. 16:30

기적은 재앙이다


2024년 6월 23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3:9-12

(23:9) 선지자들에 대한 말씀이라 내 중심이 상하며 내 모든 뼈가 떨리며 내가 취한 사람 같으며 포도주에 잡힌 사람 같으니 이는 여호와와 그 거룩한 말씀을 인함이라
(23:10) 이 땅에 행음하는 자가 가득하도다 저주로 인하여 땅이 슬퍼하며 광야의 초장들이 마르나니 그들의 행위가 악하고 힘쓰는 것이 정직하지 못함이로다
(23: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선지자와 제사장이 다 사특한지라 내가 내 집에서도 그들의 악을 발견하였노라
(23:12) 그러므로 그들의 길이 그들에게 흑암 중에 미끄러운 곳과 같이 되고 그들이 밀침을 받아 그 길에 엎드러질 것이라 그들을 벌하는 해에 내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굳이 술 취한 사람과 같이 아니하면 예언을 전할 수 없는 걸까요? 하나님의 영이 임한 자는 자신의 견해가 일체 스며들지 않는 상태로 돌입되어야 합니다. 그만큼 선지자 개인의 사견도 일반인의 점치는 방식의 일부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나름대로 점을 칩니다.

점을 치는 이유는 일상 생활에서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은 쉴새없이 목표 세우고 기대를 하고 소원을 갖습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내다보면서 살려고 합니다. 그래야 보람을 느낍니다. 이렇게 사는 이유는 현재의 삶이 늘 자기 내부의 욕망이 쫓기면서 살기 때문입니다.

‘이만하면 됐다’고 자족하고 싶어도 나의 욕망은 어느새 커져 있습니다. 빈 공간이 생긴 겁니다. 마저 채우라고 독촉합니다. 자기가 자신을 괴롭힙니다. 그래서 새로운 계획이라도 수립해 놔야 다소 위로가 됩니다. 문제는 계획은 세워놓았지만 과연 소원대로 이루어질까요? 실패했을 때는 감안하면 중압감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래서 미래를 미리 앞당겨 알고 싶어합니다. 점을 쳐보는 겁니다. 징조술, 제비뽑기, 복점, 즉흥적 점술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징조술은 ‘∼되면 그러면  ∼ 되는 징조다’라는 식입니다.  예를 들면 “만약 성읍이 언덕 위에 있다면 그것은 그 성읍에 거주하는 이들에게 좋지 않을 것이다”는 식입니다. 철저하게 수동적입니다. 다.

제비뽑기는 능동적입니다. 이것은 ‘예, 아니오’로 판가름 납니다. 대나무 젓가락이나 나뭇잎 뜯기 같은 것이 있습니다. 복점은 말없는 신들에게서 훨씬 더 많은 정보를 예견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예를 들면, 무릎 위에 놓인 물그릇에 기름을 부으며, 기름이 수면이나 그릇 가장자리와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보며 평화나 번영, 건강이나 질병에 관한 신의 뜻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기름의 특정한 모양과 근접성은 신들이 결정하고 행동하는 모습을 점술자가 일방적으로 해석하는 식이 됩니다. 기름에 국한되지 않고, 점술가의 무릎에 놓인 향로의 향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의 움직임이나 물 위에 떨어뜨린 뜨거운 촛농의 모양, 무심코 만들어지는 점들의 모양, 재가 만드는 모양들이나 모형들, 그리고 동물 희생 제물들도 쓰였습니다.

즉흥적 점술은 예를 들면, 막연하게 관심거리를 생각하여 거닐다가 갑자기 이어져 있는 방바닥에 시선을 던진다고 칩시다. 바닥에 끝이 몇가닥으로 갈라져 있는 한 개의 전선이 있습니다. 이 모양을 보면서 나의 문젯거리를 여러 가지 상이하고 분명하지 않는 증거를 한데 묶으려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식입니다. 

따라서 술먹는 자들이 술에 취하므로서 현행 고민거리를 신의 뜻을 도입하여 해결된 것처럼 여기는 것과 같이 현재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자신의 기대성을 철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취함’에 두 가지 방식이 있다고 신약 성경에 나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 5:18-20) 즉 성령에 취한 모습은 ‘범사에 예수님의 이름 하에 하나님께서 감사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바로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런 식으로 술취하듯이 성신에 취하여 예언했습니다.

그 선지자 중의 모세의 경우를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선지자의 대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더라”(신 34:10-12)

여기서 우리는 이적과 기사와 권능이라는 표현을 주목해 봅시다. 즉 선지자 모세는 단순히 말만 한 자가 아니라 그 말과 더불어 하나님의 이적과 기사와 권능이 함께 나타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들이 기대하는 기적과 다르다는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내려주시는 기적은 곧 ‘재앙’입니다.

출애굽기 4:21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그가 백성을 놓지 아니하리니” 즉 기적을 베훌었지만 바로왕은 그것을 기적으로 여기지 않고 재앙으로 느꼈다는 겁니다.

이는 바로왕은 하나님의 계획과 목표와 목적에 자신이 포함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 자신의 계획이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런 하나님과 인간의 건해 차이가 인간에게는 재앙으로 떨어지는 겁니다. 인간들이 자기 만사 뜻대로 되기를 소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은 안중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왕 뿐만 아니라 모세의 동족인 히브리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와 아론을 통해서 주어진 기적이 자신들에게 자신들의 사정이 더욱더 참담하게 되어지는 재앙이라고 여겼던 겁니다. “그들이 바로를 떠나 나올 때에 모세와 아론이 길에 선 것을 만나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감찰하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출 5:20-21)

모세와 아론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갈수록 자신들이 사정이 악화되어 망해가게 되었다고 여깁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이처럼 인간들에게 환영받지 못합니다. 인간들은 이처럼 그저 자신의 계획과 소망이 달성되는 것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기적을 이해합니다. 신약에 오면 인간들의 이러한 견해는 용서받지 못합니다.

마태복음 12:30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따라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참다운 기적과 권능은 다음과 같은 원칙 하에 일관되게 주어집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즉 인간 홀로 신기한 행운을 거머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관된 일하심에 자기를 잃어버리는 신나는 경우가 기적 속에서 피어나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책하지 않고 범사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108강-예레미야 23장 9~12절(기적은 재양이다)240623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3장 9~12절입니다. 구약성경 1086페이지입니다.

“선지자들에 대한 말씀이라, 내 중심이 상하며 내 모든 뼈가 떨리며 내가 취한 사람 같으며 포도주에 잡힌 사람 같으니 이는 여호와와 그 거룩한 말씀을 인함이라, 이 땅에 행음하는 자가 가득하도다 저주로 인하여 땅이 슬퍼하며 광야의 초장들이 마르나니 그들의 행위가 악하고 힘쓰는 것이 정직하지 못함이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선지자와 제사장이 다 사특한지라 내가 내 집에서도 그들의 악을 발견하였노라, 그러므로 그들의 길이 그들에게 흑암 중에 미끄러운 곳과 같이 되고 그들이 밀침을 받아 그 길에 엎드러질 것이라 그들을 벌하는 해에 내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기에서 예레미야가 스스로 자기에게 이야기하기를 “내가 취한 사람 같으며 포도주에 잡힌 사람 같으니”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그 현상에서, 그 시점에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자신의 의견이 스며들지 않도록 그리고 개입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계속 조종하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전하라고 하면서 선지자의 사사로운 개인의 의견은 전하면 안 된다는 것을 병행해서 하나님께서 일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그 의견을 술 취하듯이, 포도주에 잡히듯이, 내가 그렇게 되었다는 말을 왜 굳이 해야 하는가. 그것은 술 취한 사람들의 특징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술 취한 사람들은 술에 찌들어서 그 순간만큼은 세상 전체를 하나로 파악하게 됩니다. ‘더는 세상에 대해 궁금한 것이 없다. 이게 다다’ 여러분은 술은 입에도 안 대잖아요. 삼키는 것은 고사하고 입술에도 안 대잖아요.

여러분은 모르겠지만, 친구에게 주스라고 속임수를 당해서 행여나 술을 먹어보신 분들은 술에 취해있는 순간 자기를 잊어버리고, 세상은 이 순간이 세상 전체가 되는 겁니다. 그 순간이. 더 궁금한 것도 없고, 더 기대하는 것도 없고, 원하는 것도 없고, 목표도 없고, ‘나는 이 순간이 좋아요’라는 그것이 술 취하는 순간입니다. 비슷한 예로 마약에 취하는 순간이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본문을 보면서 예레미야의 경우는 술 취한 것 ‘같다고’ 말했는데, 또 이 본문을 왜곡해서 술 취하면 또 하나님의 세계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착각해서 또 술 잡수시는 분이 있을 수 있는데요. 에베소서 5장에 보면 이런 말씀 있습니다. 18절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예레미야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취해서 흐느적거리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이 지배하고 경건의 순간이지만, 그냥 세상의 술에 취하는 것은 방탕한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면 예레미야가 술 취하는 이 기분을 오늘날 신약에서는 어떻게 동일하게 경험할 수 있는가. 에베소서 5장 18절에 끝부분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그리고 19~20절에 더 보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라고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이 말이 뭐냐 하면, ‘모든 일에 감사하십니까? 그러면 흠뻑 취한 겁니다’ 물론 방탕하게 술에 취한 것은 아니지만, 성령에 취하면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특징이 뭐냐. 취하는 특징을 갖고 있어요. 취하는 특징이 뭐냐. 자기의 개인적인 목표와 기대와 목적이 날아가 버려요. 최고의 순간이죠.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기대, 목적, 목표가 날아갈 때입니다.

아내가 되어서 남편에게 뭔가 기대한 것이 있을 수 있겠어요. ‘당신은 이런 남자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성령이 임했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어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니 맘대로 하세요. 아무것도 개의치 않으니까’ 이게 바로 성령에 취한 상태입니다. 좀 취하고 싶지요? 사람이 스트레스를 받는 이유가 목표와 목적 때문이에요. 기대하는 바가 있어서, 지금보다 나아지고 향상되는 계획을 세울 때, 그것은 스스로 고질병에 빠지는 순간입니다.

바짝 긴장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무슨 프로젝트(Project)를 하거나 스트레스받을 때, 꼭 끝나고 나서 한잔합니다. 한 잔만 하면 괜찮은데, 여러 잔 하지요. 술에 취해서 자기가 소모된 그 모든 원기를 술과 해장국으로 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성령에 취한다는 거, 이것이 오늘 예레미야 본문대로 한다면, 이것은 그 당시 선지자에게 주어지는 혜택이 아니고, 오늘날 성령 받은 모든 성도가 동일하게 이런 혜택을 받습니다.

취하고 싶다. 성령에 취하고 싶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 범사에 감사하면 됩니다. 그러면 ‘감사, 감사, 감사,...’ 이러면 성령에 취합니까? 그거는 자꾸 억지를 부리는 것이고, 그것은 방탕한 겁니다. 그게 아니고 성령에 취하면, 모든 매사가 감사가 됩니다. 그러면 모든 매사가 감사가 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이게 이제 문제가 되는데요.

감사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낮추고, 어떤 일이 있어도 마음을 낮추게 되면 그 결과에 대해서는 고맙게 수긍할 수 있다. 이런 계획이 바로 목적이 됩니다. 목표가 됩니다. 그것도 수작을 부리는 거예요.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된다. 그래서 오늘은 여러분들에게 옛날부터 여러분 속에 나타난 네 종류의 점술(占術)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가 징조술(徵兆術), 두 번째가 제비뽑기, 세 번째가 복점(卜占), 네 번째가 즉흥적 점술, 이렇게 네 개로 나눕니다.

징조술이라 하는 것은 그냥 물에 기름을 띄우거나 일부러 우연을 조작해요. 안 그러면 콩을 테이블 위에 확 뿌려서, 콩들이 두 개, 네 개, 다섯 개, 일곱 개, 이런 식으로 무작위로 흩어져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걸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오른쪽은 일곱 개인데, 왼쪽은 다섯 개잖아요. 그러니까 당신이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일은 왼쪽 집을 사지 말고 오른쪽 집을 사면 집값 오릅니다’라는 이런 거.

기름을 물에 띄우는 것도, 기름이 물 위에서 어떤 이미지를 형성하게 되면 ‘보세요. 지금 이 형상이 독수리 형상이죠? 이건 독수리처럼 당신 앞길이 잘 핀다는 뜻입니다. 이제 복채 내세요’라고 하는 것을 징조술이라고 합니다. 비슷한 경우로, 눈밭에서 카메라로 우연히 찰칵 찍었는데, 그 눈밭에 형성된 형상이 수염 난 예수님의 모습이 등장한 거예요. 그걸 사진으로 인화해서 걸어놓고 ‘이 집의 주인은 예수님이다’라고 걸어놓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원래 수염이 없어요. 그러니까 수염 난 예수님은 좀 이상한 징조술에 해당하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이 평소에 이 징조술에 얼마나 절어 있는지 아실 겁니다. 가는데 우연히 보니까 석양에 그림자가 둥그런 모양이 아니고 작대기로 되어있다. ‘아, 이건 내일 어떤 일이 있을 건데, 딴소리 말고 똑바로 가라는 뜻이구나’라고 지가 지 맘대로 해석해요. 이걸 징조술이라고 합니다.

이게 바로 중국에 한자가 처음 나올 때(갑골문자), 바로 짐승의 뼈나 거북이 등딱지에 갈라진 선을 가지고 점을 치는 그런 것도 징조술에 해당됩니다. 그런 것으로 점쟁이가 사람들로 하여금 신에게 전적으로 복종한다는 티를 낼 수 있는 그런 효과를 줄 수 있어요. 모압 선지자 발람같은 그런 선지자가 대표적이죠.

그다음에 제비뽑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도 점술인데, 제비뽑기라는 것이 작대기를 통에 넣고 흔들어서, ‘아무거나 뽑아’라고 하고, 딱 뽑힌 거, 그 뽑힌 것이 신의 계시라고 주장하는 거예요. 아니면 나무 잎사귀를 하나하나 뜯으면서 ‘된다, 안 된다, 된다, 안 된다,...사랑한다, 미워한다, 사랑한다, 미워한다,...’라고 하다가 마지막에 하나 남는 것이 ‘미워한다’로 나오면 그건 다시 해야 해요.

다시 또 했는데 또 ‘미워한다’로 나오면 ‘우리 헤어지자’라고 하는 거죠. 이런 것을 제비뽑기라고 합니다. 이런 점술이 뭐냐 하면 목표와 계획이 있고, 모든 기대가 있는데, 이걸 미리 당겨서 한꺼번에 다 알 수가 없을까. 왜? 알면 내가 그만큼 스트레스를 적게 받으니까요. 스트레스를 적게 받으면 내가 편해지니까 그런 점술을 동원하는 겁니다.

또 하나는 뭐냐 하면 복점 하는 거. 이 복점이라 하는 것은 희생제물을 바쳐요. 희생제물을 바쳐놓고 그 희생제물이 타오르는 연기에, 또는 튀는 피에, 또는 사체가 갈라지는 모양새, 그걸 가지고 점을 치는 거예요. 이거는 사람들에게 먹혀들어 가죠. 왜? 희생제물이니까. 기름이나 콩과는 달리, 희생제물이니까요. 희생제물에 대해서 잘 보여주는 영화가 있어요. 지금 북한에서 대유행을 하고 있는 영화인데, 파묘입니다. 파묘.

무당이 자기 얼굴에 문자도 쓰고, 시커먼 것 가지고 얼굴에 손가락으로 쫙 문대고, 북치고, 장구치고 하면서 스테레오로 분위기 띄워주거든요. 그러면 관객들에게 무당의 행동과 탈아(脫我)상태, 무당에게서 혼이 나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상대방에 엑스타시스(Ecstasis)-신과 인간이 합일 되는 것, 신이 내 속에서 내가 되고 내가 신이 되는 그 상태- 그 상태를 먼저 시범적으로 무당이 보여주는 겁니다.

무당이 보여주면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신이 여기에 임했다는 느낌을 주변서, 신이 임하게 되면 어떤 효과가 있느냐 하면 스트레스를 안 받아요. 앞으로 모든 일은 누가 하면 되니까? 모든 것을 신께서 알아서 하면 되니까 합력하여 선을 이루면 되는 거죠. 이게 바로 복점입니다. 그다음에 즉흥적 점술이라 하는 것은 인위적으로 신이 오도록 유도하는 거예요.

신이 안 오니까, 이래도 안 와? 하면서 신을 유도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엘리야가 850대 1로 배틀(battle)했던 갈멜산 제단에서 바알 쪽 선지자들이 한 것이 뭐냐 하면 스스로 창을 찌르고 피를 흘리면서 신에게 하소연하는 그런 모습. 여러분들은 이런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왜 그런 짓들을 하느냐고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여러분들이 그게 큰 오산입니다. 사람들이 왜 그런 짓을 하느냐가 아니고 인간들이 하는 모든 일상이 매일 그런 짓이에요. 모든 일상이. ‘401번 탈까, 급행 1번 탈까? 오늘은 기분이 뭐해서 그냥 급행 1번 타야겠다’라는 식으로 이 바로 앞에서 버스 타는 것도 그런 짓이에요. 모든 일상이 그래요. 세탁하는 거, 설거지하는 거, 모든 일상에 계속해서 선택하되, 그 선택에 노림수와 목적이 있어요.

어떻게 하면 나에게 보다 수월스레 행운이 찾아올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의 몸에 물들어있어요. 배어있는 거죠. 따라서 모든 인간은 나름대로 본인의 미래를 점치는 점쟁이 선지자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명기 34장 10~12절에 보면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더라”라고 나옵니다.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라고 되어있습니다. 이유가 뭐냐. 근거는 직접 하나님과 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러한 복술, 점술과 대비되고 그런 것이 아니라면 모든 인간이 은연중에 스스로 자기가 점쟁이가 되어서 자기 미래를 좋게 해보려고 시도하는 그것이 아니라면, 정말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뭐냐. 기적입니다. 기적. 방금 읽었던 본문에 나오거든요. 기적.

그 기적을 행함에 있어서 모세만큼 대단한 사람이 없다는 그런 뜻이거든요. 출애굽기 4장 21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 이적은 기적이죠,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그가 백성을 놓지 아니하리니” 모세는 기적을 베풉니다.

기적이 뭐냐. 기적이 재앙입니다. 이걸 우리가 빠뜨리면 안 됩니다. 기적은 행운이다. 이게 아닙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기적이 행운이죠. 기적은 재앙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재앙을, 그 모세의 손에 재앙을 준 거예요. 그 재앙을 주었을 때, 출애굽기 4장과 5장에서 이 모세의 기적에 대해서 반감을 갖고 반발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누구냐. 애굽 사람? 아니지요. 애굽에서 나와야 할 히브리인, 모세의 자기 동족이 모세가 행하는 기적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 왜냐 하면 그 기적을 하면 할수록, 자기 신세가 쪼그라들기 때문이죠. 자기 신세가 더욱더 암담하고, 참담하게 됩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렸죠. 인간에게는 계획이 있고, 목표가 있고, 기대가 있다고. 희망이 있다고요.

이것 때문에 스트레스받지만 그렇더라도 이것 없이는 못 살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기적은 뭐라고요? 그걸 잘라버려요. 자르니까 거기에 모세가 하는 그 기적이 그 당시 동족입장에서는, 자기를 애굽에서 끄집어내기 위해서 하는 기적이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그냥 내버려 둬. 원래 살던 식으로’라는 식으로 반감을 품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5장에서.

그래서 그 동족이 이렇게 이야기해요. 출애굽기 5장 20~21절에 “그들이 바로를 떠나 나올 때에 모세와 아론이 길에 선것을 만나,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준 기적입니다. 기적인데, 제가 아까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께 범사에 감사하면 되는데, 그 당시 동족들이 점점더 그들의 처지가 난처해지기 시작했어요.

‘가만히 놔두면 되는데, 너희들이 괜히 여호와 이름으로 우리 인생에 개입해서 우리 꼬라지 한번 봐라. 사는 꼴을 한번 봐. 이게 뭐야. 갈수록 미래가 참담하고, 우리 기대는 점점 더 희망이 없어진다. 책임져라’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호와는 너희를 감찰하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차라리 하나님께서 이 모세와 아론을 좀 어떻게 보내버렸으면 좋겠다는 거죠.

이건 완전히 도와주려는 사람이 욕을 얻어먹게 생겼어요. 따라서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고, 좋으신 분이고, 전지전능한 분이니까 우리에게 놀라운 기적을 베푸시면 우리가 갖고 있던 소박한 꿈과 희망과 기대와 목표가 쉽게 성취된다는 이러한 안일한 생각은 실제 하나님의 기적에 의하면, 그건 반대로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기적의 끝은 뭐냐. 이게 정말 중요한데요, 기적중의 기적이 뭐냐. 고린도전서 16장 22절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기적인 하나님의 재앙은 반드시 저주를 집어넣어야 해요. 저주를 집어넣고,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원칙을 하나님의 기적 안에 그 내용을 담아서 우리에게 계속 주어져 왔던 거예요.

그렇게 기적을 원했던 이스라엘은 요한복음 1장 11절에 보면 이런 평가를 받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어요. 오늘날도 예외가 아니죠. 이스라엘은 하나님 여호와를 믿어요. 기적을 원해요. 막상 기적이 왔는데 자기들의 희망과 너무 틀어져요. 그러니까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기적을 줬는데, 기적을 차버렸어요. 이 이야기는 계속 마태복음 12장에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30절을 잘 유념해서 들어보세요.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여러분, 이 말씀이 기적의 내용으로 주어졌다고 생각해 보세요. 흔쾌히 받겠습니까? 나와 함께하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

그러면 기적은 뭡니까? 주와 함께 다니면서 주님의 시킨 대로 하는 그게 기적이에요. 그게 바로 성령에 취한 겁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거예요. 왜? 도대체 나는 잘못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인간이 잘못했다는 자체가 스트레스예요. 그러나 성도에게는 잘못한 것이 없어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사람이 자꾸 잘못한 것이 생기면 그걸 개선하고 수정해서 앞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잘 해보려고 하는데, 이게 하나의 기대요, 목표요, 목적이에요. 이게. 이게 욕심이라고요. 주님은 우리에게 잘잘못을 따지지 않습니다. 내가 나름대로 어떤 기대를 만들고, 하나님 은혜 알았으니까, 은혜 알았으니까, 어느 정도는 보답해야 마땅하다는 계획을 본인이 자꾸 만들어내요.

잘 살아야 하고, 착하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그래야 영광된다고. 이건 목사도 그렇게 가르치지만, 본인 교인들도 자체가 스스로 그것을 그런 식으로 기적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기적은 “아무것도 하지 마. 내가 알아서 다 해줄게”라는 이거. 여러분 이거 모르세요? 남진(가수)의 둥지라는 가사 모르세요? “그냥 내 품에 안겨. 가만히 있어. 내가 다 해줄게”

왜 우리는 스스로 반성하고 수정하려고 합니까. 그렇다고 인간 될 줄 압니까? 인간 안 됩니다. 주께서 기적을 매일같이 주시는 이유는 잘되려는 나의 계획과 기대, 그 자체를 무산시킵니다. “너는 성령에나 취해. 범사에 감사해. 네가 보기에 너의 인생 조졌다고? 내가 보기엔 합력하여 선을 이룬 거야. 너에게 딱 맞아. 적합해. 다른 생각하지 마”

참 우리에게 이런 마음이 오래가면 좋겠어요. 오래. 백만 한 번, 백만 두 번,... 밧데리처럼 이런 식으로 오래 가고 싶지만, 주께서 살아계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런 생각이 또 얼마 안 가서 ‘푸시식~’하고 인형이 바람 빠지듯이, 밧데리가 또 방전되죠. 성령께서 또 도와주시고 또 도와주셔서 네가 스스로 네가 잘못되었다는 생각, 그 악마적 생각부터 잘라냅니다.

네가 아무리 못되어도 너는 천국이야. 천국 가려면 너는 이것보다 더 깨져야 하고, 더 망해야 하고, 네 생각 없어져야, 그게 천국 백성의 특징입니다. 내 생각이 일체 고려되지 않는 세상, 그게 바로 천국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일을 오해했습니다. 자꾸 우리 자신의 생각과 같은 줄 알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적이 와서, 뜻이 있어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 주님이기에, 주님만 곁에 있다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그 단순한 사실을 이제는 받아들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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