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만들기
2024년 6월 30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3:16-22
(23:16)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23:17)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23:18)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뇨
(23:19) 보라 나 여호와의 노가 발하여 폭풍과 회리바람처럼 악인의 머리를 칠 것이라
(23:20) 나 여호와의 노는 내 마음의 뜻하는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쉬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말일에 그것을 완전히 깨달으리라
(23:21)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23:22)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예하였더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
‘천상회의’라는 것을 따로 할 필요가 있겠어요? 하나님께서 인간하고 상대하시기 전에 이미 인간 세계의 사정에 대한 조치를 다 취할 것임을 천상회를 통해서 결정하셨습니다. 이제 문제는 도대체 이 인간 세계에서 무슨 엉터리 이야기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쏟아놓고 있는 지를 아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천상회의에 참여 시켜서 그 천상회의에서 결정된 것을 그대로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는 바로 하나님의 진노요 격노입니다. 하나님께 화를 돋우는 말들을 천상회의 참여하지 않는 거짓 선지자들이 남발하면서 사람들 위에 정신적으로 군림하려 합니다.
반면에 천상회의 실제로 참여한 선지자들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파괴 작업에 기꺼이 자신도 수긍하고 순순히 받아들입니다. 즉 참된 선지자는 자기 파괴를 곱게 수용합니다. 자기를 지키는 식으로 말씀을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 특히 열왕기상 22장에 나오는 미가야 선지자는 악한 영을 천상회의에서 보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아합을 꾀어 저로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저를 꾀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가로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꾀이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이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게 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왕상 22:20-
23)
구약이 지나고 신약 시대가 되면 천상회의는 예수님 중심으로 상설화됩니다. 한 번 열리고 그만인 것이 아닙니다. 늘 유지됩니다. 이 말은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거짓 선지자들이 계속 그 정체를 노골화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예레미야 본문에서 거짓 선지자들의 상투적인 발언은 이런 겁니다.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렘 23:17) 즉 거짓 선지자들은 평안과 ‘재앙 임하지 않음’을 한결같이 어필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뭘까요? 인간들은 선지자 본인부터 시작하고 일반인 전체가 자꾸만 살고 싶어하고 파괴되지 않는 인생이고 싶어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신을 만들어’ 냅니다. 자기를 지켜주는 신을 제작합니다. 당연히 거짓 선지자들이 이런 일반 백성들을 후원합니다.
그렇다면 참된 선지자는 인간의 이런 한계를 어떤 식으로 끄집어낼까요? 일반인들의 나름대로 경건생활은 그 바탕에 어쨌든 간에 본인이 살고 싶어하는 마음이 깔려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적으로 반듯하고 살고 싶어도 세상의 권력은 이런 어설픈 경건을 쉽게 압도하게 됩니다. 그 예가 엘리야 시대에 나옵니다.
“오바댜가 길에 있을 때에 엘리야가 저를 만난지라 저가 알아보고 엎드려 말하되 내 주 엘리야여 당신이시니이까 대답하되 그러하다 가서 네 주에게 고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가로되 내가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 당신이 당신의 종을 아합의 손에 붙여 죽이게 하려 하시나이까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주께서 사람을 보내어 당신을 찾지 아니한 족속이나 나라가 없었는데 저희가 말하기를 엘리야가 없다 하면 그 나라와 그 족속으로 당신을 보지 못하였다는 맹세를 하게 하였거늘 이제 당신의 말씀이 가서 네 주에게 고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하시니
내가 당신을 떠나간 후에 여호와의 신이 나의 알지 못하는 곳으로 당신을 이끌어 가시리니 내가 가서 아합에게 고하였다가 저가 당신을 찾지 못하면 내가 죽임을 당하리이다 당신의 종은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일 때에 내가 여호와의 선지자 중에 일백 인을 오십 인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로 먹인 일이 내 주께 들리지 아니하였나이까”(왕상 18: 7-13)
경건한 궁내대신을 권력에 겁을 집어먹고 있습니다. 여호와 선지자 말살 정책에 대해서 인위적으로 대항할 수 없는 처지를 비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참된 선지자입니다. 엘리야는 세상의 한계와 악의 한계를 압니다. 선지자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모세는 시내산 속으로 들어가서 40일 동안 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산다, 죽는다 라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천상회의에서 결정된 진리 뿐입니다. 오늘날 신약 시대의 성도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를 뜻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쫄딱 망한 분입니다. 그분을 따른다는 것은 이 세상 삶에서는 살고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늘나라에서 확정된 그 진리, 곧 복음으로 충분합니다. 복음 안에 생명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안다는 것은 이미 생명을 받고 그 생명 안에 사는 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남은 인생이란 곧 ‘연장근무’하는 겁니다. 선지자로서의 연장근무입니다. 매일같이 자신의 의미가 삭제되는 즐거움을 느낍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죽음이 주는 추진력입니다. 이 세상은 전부 이 죽음의 역학 속에 있습니다. 오늘날 성도는 연장근무하면서 ‘무엇이 다른 복음’인지를 아는 자들입니다. 자기 파괴를 피하는 자들이 ‘다른 복음’을 찾는 자들요 외치는 자들입니다. 천상회의에 의할 것 같으면 악한 영이 이 세상을 그냥 가만 두지 않음을 알려줍니다.
악한 영들이 활개치는 이유는, 인간들이 하나님을 도저히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것이 우리 인간을 망하고 파괴하는 쪽으로 찾아드니 인간 입장에서도 도저히 맨 정신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겁니다. 따라서 신약에서는 성령이 임하는 겁니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가 내세울 것은 예수님의 공로 뿐입니다. 이를 위하여 성도는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게 됩니다. 이로서 성도는 오늘날 참된 선지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악한 영의 활동을 염두에 두고 연장근무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09강-예레미야 23장 16~22절(신 만들기)240630-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3장 16~22절입니다. 구약성경 1078페이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예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뇨, 보라 나 여호와의 노가 발하여 폭풍과 회리바람처럼 악인의 머리를 칠 것이라, 나 여호와의 노는 내 마음의 뜻하는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쉬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말일에 그것을 완전히 깨달으리라,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예하였더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
하나님의 회의가 상설기관으로 전환됩니다. 한시적인 회의에 인간이 참여했던 것이 구약시대라면, 신약시대에는 아예 회의의 주관자가 직접 이 세상에 오셔서 회의 내용을 그대로 이 땅에 적용시켜버립니다. 그러면 남아있는 것은 무엇이냐. 남아있는 것은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19~20절에 보면 “보라 나 여호와의 노가 발하여 폭풍과 회리바람처럼 악인의 머리를 칠 것이라, 나 여호와의 노는 내 마음의 뜻하는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쉬지 아니하나니”
하나님의 재앙이 임하고 모든 인간에게 파멸이 주어지는 거, 그것은 하나님 여호와의 회의가 하늘에서 지상으로 확장되었음을 뜻하는 겁니다. 모든 것이 다 무너질 수밖에 없는 거. 파괴죠. 이 파괴를 받아들이는 사람, 그중에 한 사람이 선지자입니다. 파괴되지 않으려고, 망하지 않으려고 버티는 것은, 이것은 천상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가짜 선지자들의 한계입니다.
그리고 지상에서 정치하는 인간들의 한계이기도 하고, 그리고 세상에 사는 인간들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천상 회의의 선지자와 일반사람들의 경건 생활, 신앙생활에 한계점을 아울러 보여줍니다. 아무리 이 땅에서 경건 생활해도 선지자가 참석한 천상 회의를 모른다면 그들은 결국에 파괴를 넘어설 수 없고, 파괴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그 한 가지 예가 열왕기상 18장에 나옵니다. 열왕기상에 보면 엘리야라는 선지자가 있었는데, 엘리야가 활동할 때, 북쪽의 아합왕이 여호와 믿는 사람을 상당히 핍박해서 거의 없애버렸고, 그 대신 바알을 믿고, 바알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장려했고, 그러다 보니 이게 권력으로 작용해서 국민이 바알 신을 믿는 것을 당연한 걸로 여겼습니다. 왜? 살기 위해서.
내가 사는 것이 인간에게는 진리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옳고 그른 것을 떠나서 일단은 내가 살아남아야, 건질 것은 건졌다고 여기기 마련입니다. 선지자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보통 사람은 다 그렇게 생각해요. 선지자는 살고 죽는 것을 떠나서 천상 회의에 있었던 하나님의 진리를 이미 맛본 사람이에요. 그 선지자 중에서 위대한 선지자 모세가 바로 40일 동안이나 하늘나라에 살았죠.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없이 40일 있다가 땅에 내려왔어요.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보면 어떨까요? ‘하늘나라가 좋아요, 땅이 좋아요?’라고 그걸 묻는 자체가 잘못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시킨 대로 해야 한다는 그것이 먼저 진리로 자기에게 장착된 사람이죠. 그래서 모세에게 있어서 이방 나라가 어린아이까지 다 진멸되는 것이 그렇게 가슴 아픈 일이 아니에요.
어차피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이 죽은 인간인데, 이스라엘 앞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그 어린아이와 젖먹이들은 이스라엘의 침공으로 모두 몰살해야 마땅하다고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상당히 잔인해 보이지만, 이것은 인간 위주가 아니고 하나님 위주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우리 자신의 한계를 알라는 뜻이에요. 천상 회의를 언급하는 것은 “너의 한계가 뭐예요?”라고 물으셨을 때, ‘제 한계는 자꾸 살고 싶은 것은 한계예요’라고 언급할 수 있어야 해요.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아합의 부인 이세벨, 아합, 이들이 여호와 믿는 사람을 핍박할 때, 아합의 궁내 대신 오바댜라는 인물이 있는데(왕18:3), 그 사람이 아주 극진하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이에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인데 핍박하니까, 몰래 여호와의 사람들 일백을 숨겨서, 몰래 오십 인씩 굴에 숨기고, 동굴 두 개에다 한쪽에 오십, 다른 한쪽에 오십, 이렇게 숨기고 난 뒤에 떡과 물을 제공했었어요.
그러니까 북한의 김정은 치하에서 기독교 신자 100명을 살렸다고 보면 됩니다. 김정은 궁에서 일하는 고위 간부가 그렇게 했다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북한 김정은에게 엘리야가 등장했다는 말이죠. 엘리야가 등장하니까 누가 겁을 내느냐 하면 오바댜가 겁을 내는 겁니다. 그 이야기가 열왕기상 18장에 나왔는데, ‘저 안 만난 것으로 해주세요’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이 땅에서 나름대로 경건하다고 하는 사람들의 한계인데, 뭐라고 하느냐면 ‘내가 엘리야와 가깝다는 것이 만약 소문이 나면, 나는 김정은에게 체포되어서 죽습니다. 내가 죽으면 선지자 백 명이 같이 몰살당하기 때문에, 저를 안 만난 걸로 해주세요’라고 하면서 열왕기상 18장 12~14절에 보면 ‘내가 엘리야 만난 것으로 인해 신분이 위태롭다’라고 그렇게 나와 있어요.
그래서 제안하는 것이 12절에 “내가 당신을 떠나간 후에 여호와의 신이 나의 알지 못하는 곳으로 당신을 이끌어 가시리니 내가 가서 아합에게 고하였다가 저가 당신을 찾지 못하면 내가 죽임을 당하리이다 당신의 종은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라고 하면서 내가 열심히 여호와를 경외한 것을 좀 감안해달라고 하죠. ‘물론 당신은 구원받겠지만 나만 죽습니다’라고 했어요.
쉽게 말해서 엘리야에게 아합을 만나지 말라고 하는 거죠. 자기가 궁내 대신이니까. ‘만나지 마세요. 당신도 죽고 나도 죽습니다’라고 말리는 거죠. 이것이 선지자와 이 땅에서 나름 경건하다고 하는 사람들의 한계입니다. 뭐가 한계인가. 하나님께 경건하면서도 자기 파괴 안 당하는 방식으로 여호와를 믿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살고 싶어서 하나님 믿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요약할 수 있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만드는 겁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믿는 겁니까? 열심히 성경 보고 교회 다니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나를 살릴 수 있는 우상 같은 하나님을 내가 제작하는 것이 아닐까요? 내가 하나님을 따로 만든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못 믿겠다는 거예요.
열심히 교회 다니고 성경 보면서 늘 그것으로 자극이 되어서 계속 나오는 것은 ‘못 믿겠다. 못 믿겠다...’라는 이 ‘못 믿겠다’가 호흡이 되었어요. 기도가 호흡이 아니라. ‘아무래도 못 믿겠다. 나만 작살나겠다. 못 믿겠다. 언제쯤 발을 뺄까. 언제쯤, 어느 타이밍에 발을 뺄까’라고 맨날 발을 뺄 생각 하고, 못 믿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래도 내가 성실하니까, 경건한 티는 내니까 교회 꾸준히 나오기는 나오지만, 나도 장담 못 한다는 식으로 교회 다니고 있는 거예요.
선지자가 구약 때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물론 신약 때는 이런 일이 없지만, 구약 때니까 한계를 더불어 나타내는 거예요. 거기에 비해서 그럼 선지자는 왜 이렇게 용감하냐. 하나님의 일에 말려들었기 때문에 용감한 거예요. 말려들었기 때문에. 어떤 경찰서에 형사가 있는데, 형사가 마약 수사대에 간부로 있으면서 본인도 마약에 미쳐버렸어요.
본인이 원한 건 아니지만, 마약에 본인이 취하면서 마약 수사는 하게 되는 겁니다. 그걸 의도한 것이 아니고 그 범인들이 고등학교 동창생인데, 마치 제가 실제로 일어난 것을 말하는 것처럼 들리죠. 이게 ‘커넥션’이라는 드라마 이야기입니다. 동창생들끼리 시기 질투하면서, 마약반 형사를 납치해서 마약을 먹이고, 마약 없이는 활동 못 하게 만들었어요. 이게 자기 파괴잖아요.
선지자가 자기를 지키고 그러면서 하나님 일을 하는 그런 선지자는 없습니다. 그게 바로 천상 회의에 참석했던 선지자들은 절대 그런 짓을 안 하죠. 왜? 천상 회의에 누가 계시냐.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바로 이 선지자의 노선을 밟아서 이 땅에 죽음으로 모든 말씀을 다 진리를 이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를 지키는 것이 없어요. 선지자나 예수님이나, 자기를 지키는 하나님? 자기를 살리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은 애초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예요. 도대체. 어제 CNN방송 본부에서 미국의 11월에 있는 대선 후보자 바이든과 트럼프가 TV 공개토론을 했어요. 하는데 조건이 있습니다. 청중 불참, 원고 지참 불가. 참모들 함께 참석 못 함, 그렇게 맨몸으로 둘이 맨몸 결투처럼 TV 토론 합니다. 그러니까 권총이고 무기고 다 빼고 하는 거죠.
선지자의 육신과 몸이라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전조(前兆)현상이에요. 전조현상이라는 것은 본격적으로 나타날 현상을 앞당겨 보여주는 현상이 전조현상이거든요. 메시아 예수님이 장차 이 땅에, 그러니까 하나님 자신이 이 땅에 어떻게 나타나시는지 전조현상이 선지자가 맨몸으로 나타나요. 자기를 지킬 무기는 일체 아무것도 없습니다.
천상 회의에 참여함으로써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느냐는 그 진리, 그 진리 하나만 딱 접한 거예요.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치 오늘날 성도에게 복음 하나 달랑 주고 ‘복음 안에 생명 있다. 끝’ 그 외에 아무것도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의 의와 잘남과 훌륭함과 윤리 도덕적인 그런 거 일체 주신 적이 없어요. 왜? 파괴되는 방식으로 진리와 복음이 나오는 그 작업이 하나님의 작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열왕기상 22장에 보면 선지자 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미가야 선지자예요. 미가야 선지자에게 왕이 묻습니다. “우리 길르앗 라못 전쟁하러 가는데, 이번 전쟁이 이기겠느냐, 지겠느냐?”라고 물어봤어요. 미가야에게 물어보기 전에 다른 선지자에게 다 물어봤어요. 그러니까 400명 되는 선지자 전부 다가 “이깁니다”라고 동일하게 말한 거예요.
아까 여러분들이 예레미야에 나온 본문 보셨죠? 그들은 항상 재앙이 임하지 않고, 평안하고, 잘 되고, 만사형통하고, 염려할 것이 없다고 하죠. 그리고 자신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받은 예언이, 뜻이 그렇고, 하나님의 계시가 그렇기 때문에, 그대로 이야기한다고 하죠. ‘당신 잘될 겁니다’ 메시아도 잘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인간이 잘됩니까? 이 자체가 말이 안 되잖아요.
예수님을 믿어요? 그러면 예수님이 어떻게 살았는데요? 예수님이 망가졌어요. 그러면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당연히 망가지잖아요. 망가질 때, 다시 말해서 자기 한계가 ‘아, 이것밖에 안 되냐?’라고 할 때, 비로소 내 한계를 넘어서는 진실과 영생과 복음이 그동안 내가 못 놓고 있는 나라는 인생 자체를 이제는 편하게 놓을 수 있게 만들어줘요.
내 의미가 매일 같이 죽는 즐거움. 그것을 이 복음이 제공해 주는 겁니다. 우리 성도에게, 진작 죽어야 할 성도가 계속 인생을 꾸역꾸역 사는 것은 연장근무하고 있는 겁니다. 물론 비용은 미리 다 받았어요. 영생은 미리 다 받고 잔업 근무하고 있는 거예요. 빨리 퇴근해야 하는데, 주께서 퇴근을 안 시켜요. 그래서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파괴를 통해서 파괴를 이긴다. 그게 선지자들이 갔던 길이죠.
여기 열왕기상 22장에서 미가야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천상 회의에 참석했는데”(19절)라고 딱 이렇게 나왔어요. 예레미야와 같죠. 그런데 거기에 뭐라고 추가하느냐 하면, 거기에서 사탄을 봤다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주변에 아시는 목사님이나 아시는 분을 만나거든, 질문을 이렇게 해 보세요. ‘목사님, 복음이 뭡니까?’라고 질문하지 말고 ‘목사님, 복음이 아닌 것이 무엇입니까? 다른 복음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해 보세요.
이건 하나의 가상 문제니까, 가상의 답변을 만들어 낼 수 있죠. ‘그것은 예수 믿고 바르게 사는 겁니다’라고 대답이 나오죠. 그러면 또 질문을 하죠. ‘목사님은 매사에 바르게 사셨습니까?’라고. 여러분, 인간은 산다는 것 자체가 바르지 않습니다. 산다는 자체가 왜 바르지 않냐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는 못 사는 구조로 이 세상은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은 경쟁구조이기 때문에 내가 성공하면 누가 실패한 사람이 있어야 해요. 어떤 가정에 딸이 있다. 우리 딸이 어떤 괜찮은 남자와 결혼했다는 말은, 그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가 여러 명이었는데, 그들이 다 패배했다는 말입니다. 내가 산다는 것은 남을 힘들게 하지 않고서는 내가 살 수 없는 곳이 이 세상입니다.
또 혹시 ‘목사님, 다른 복음이 뭡니까?’라는 질문에 예상 답변이, ‘신천지가 다른 복음입니다’라고 하면 ‘목사님, 신천지에서 체계나 그들의 책이나 그들의 가르침이 뭐가 문제인지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봤지. 신천지는 이런 내용, 이런 내용이다’ 그러면 이렇게 물어보세요. ‘그러면 그 신천지와 똑같이 가르치는 우리나라의 대형교회 목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목사님은 알고 있습니까?’
그거는 같은 합동측, 장로측, 장로, 장신 같은 이런 큰 교단에 있다는 이유 때문에, 신천지의 가르침과 똑같이 가르쳐도 이단 아닌데, 신천지는 그 교단에 소속되지 않았다는 단지 그 이유 하나 때문에, 똑같은 가르침인데 이단 되었어요. 예수님 재림날짜 이야기한 것이 조용기 목사 아니었던가요? 그런데 뒤 늦게 이야기한 이장림(다미선교회 목사)만 욕 얻어먹고.
‘다른 복음 이야기해 볼게요. 헌금을 강요하는 것이 이단 목사입니다’ 촌에 가 보세요. 전부 다 그러지. 헌금 강조하지 않는 목사가 어디 있어요. 정답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내가 이단인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이단입니다. 목사가 된 것은 파괴당하기 위해서 목사 된 겁니다. ‘나는 이단이며 지옥 가야 마땅함을 목사가 되게 함으로써 주께서 알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못 지킵니다. 진리를 지킬 수가 없어요. 진리가 우리를 지키잖아요. 진리가 우리를 지키기 때문에 항상 우리를 진리 됨을 위해서 어느 부분에서, 내가 왜 일상생활 속에서, 내가 거짓이며, 가짜며, 진리가 아닌가를 파악하는 거, 그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 천상 회의에 주재자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만이 고백할 수 있는 겁니다.
내가 뭘 해서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결과 때문에 구원 받는 거예요. 결과에 들어갔느냐, 안 갔느냐를 어떻게 압니까? 바로 이 세상이 지옥불 속에 있다는 거, 왜 모든 인간이 스스로 힘으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는 거예요. 세상이 뭐 지구온난화니, 세상이 멸망하니 하는 이런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기쁜 소식이에요. 그게.
사는 게 이상하지요. 안 살도록 만들어놨는데, 산다고 자랑질하니까, 이건 뭐가 다른 복음이 개입되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여러분들 지금 매일같이 죽어가고 있지요? 조금씩 죽어가는 즐거움이 있지요? 지금 놀리는 거 아닙니다. 매일같이 끝내지 않은 연장근무 계속하고 있지요? 그게 메시아의 전조현상입니다.
이 세상에 불심판의 전조현상을 우리 성도를 통해서 마음껏 보여주 거, 이게 바로 죽음의 역학이고, 죽음의 추진력이에요. 죽음이 나로 하여금, 영생이라는 것이 계속 감지될 수 있도록, 영생보다 더 귀한 것이 없음을 느낄 수 있도록, 오늘도 지옥같은 세상에 강제로 그 작업장에 집어넣어서 연장근무 시켜주시는 겁니다. 그게 오늘날 예수님을 아는 천상 회의에 참석자, 성령을 입은 참된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선지자들이 자기를 지키는 말씀이 없음을 기쁘게 그들은 깨달았습니다. 좀 더 살려고, 나를 지켜보려고, 하나님의 말씀 보고 교회 나오는 이 더러운 짓을 어쩔 수 없이 하지만, 이게 더러운 짓인 것을, 이것조차도 주께서 시켰다는 사실을 이제는 기쁘게 깨달을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