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야 지키기
2024년 6월 16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3:3-6
(23:3) 내가 내 양무리의 남은 자를 그 몰려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 내어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의 생육이 번성할 것이며
(23:4) 내가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축이 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23: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23:6)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선지자가 제시하는 메시야 상은 그 당시 일반인들에게 낯설기 짝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동안 자신들이 메시야를 고대하면서 퍼부은 모든 노력과 시도를 긍정적으로 인정해주는 그런 메시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3:4에 보면, “내가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축이 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그동안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축이 나는 경우를 당하는 목자들이 목자라고 행세해 왔던 겁니다.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축이 나지 않는 제대로 된 목자라는 말은 더욱 철두철미하게 제대로 목자 노릇을 하면 성사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도리어 기존의 목자상, 메시야상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줄곧 그동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자신의 양이라고 규정하시고 기존 목자들에게 그 양을 맡기신 형식을 허락하셨습니다. 하지만 실패했습니다. 뭔가 미급함을 채우고 보충하면 제대로 된다는 희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면적으로 전혀 예상 못한 메시야나 목자가 등장될 것을 예고하십니다.
만약에 참으로 제대로 된 메시야나 목자가 오면 백성들이 금방 알아 볼까요? 아닙니다. 사람들은 어떤 경우를 우호적으로 받아들릴 경우는, 이미 자신들이 이런 메시야가 오리라는 것을 미리 짐작했다는 식으로 반길 준비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예상하는 메시야상을 거부하는 이유는, 인간 자체가 자신이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못 믿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어떤 모르는 자가 우리 자신을 향해 “이 사기꾼아!”라고 규정한다면 일단 거부하고 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에 대한 진화와 발전을 그 어떤 순간이라도 포기해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부정하지 않더라도 진리를 더욱 축적이 가능한 단단한 바탕쌓기에 무심히 열중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지요? “지혜자는 눈이 밝고 우매자는 어두움에 다니거니와 이들의 당하는 일이 일반인 줄을 내가 깨닫고 심중에 이르기를 우매자의 당한 것을 나도 당하리니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이것도 헛되도다 지혜자나 우매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전 2:14-16)
뿐만 아니라 전도서 1:16-17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마음 가운데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큰 지혜를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자보다 낫다 하였나니 곧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사람들은 열심히 지혜를 끌어모으고 탐구를 하게 되면 그만큼 진리에 점점 접근해 갈 수 있다고 믿는다. 즉 인간은 자기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 믿음을 포기하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마음 자세로 인하여 인간들은 자신이 사기꾼에 불과한다는 것을 못 받아들이는 겁니다. 사기 치지 않고 순정하게 살려고 애쓴다고 해서 사기꾼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자신이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죽어도 인정 못하겠다는 다짐으로 무장되어 있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보내주신 메시야와 목자를 소개한다는 것은 당연히 거부당한 모델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 자신이 사기꾼이라는 점은 ‘초대하지 않는 낯선 타인의 침투’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 예가 여호수아 2장에 나오는 여리고성에서의 이스라엘 정탐꾼과 기생 라합의 만남입니다. “두 사람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수 2:8-11)
기생라합은 누가 자신을 찾아왔는지 압니다. 그것은 자신의 성을 파괴할 파괴자가 보내서 미리 자신에게 찾아온 겁니다. 그런데 기생라합은 자신의 민족을 파괴할 그들을 지켜주고 보호하고 숨겨줍니다. 즉 자기 안에 그동안 자신이 살던 모든 과거 삶을 거덜내는 자를 품어주고 있는 겁니다.
바로 이 방식이 자기 힘으로 자신의 사기꾼됨에서 벗어나는 방식입니다. 주님께서 오늘날 모든 성도에게 찾아오실 때, 이 원칙과 이 방식을 지키면서 찾아오십니다. “너를 사기꾼으로 밝혀줄 때니 너는 나를 귀하게 여기겠는가?”라고 물으시면서 찾아오시는 겁니다. 기생라합은 이스라엘 입장, 이스라엘 하나님 입장에서 자신을 바라봅니다.
따라서 자기 민족과 자신은 마땅히 멸절당해야 마땅함을 인정합니다. 더 이상 자기를 지키기 위한 용도로 메시야를 이해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취지는 요한복음 2:25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십니다.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요 2:24-25)
이런 차원에서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가나 혼인잔치에 행사하신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은 인간들의 모든 한계와 예상을 주님쪽에서 싹뚝 자르시는 기적입니다. 사람들은 약간은 어디둥절했지만 그들의 목숨과 그들의 배신과 무관하기에 그냥 예수님에 대해서 주최측을 고마움을 표하는 정도였을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목자는 장차 어떤 식으로 출현하고 양들은 또 어떤 식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지게 됩니까? 요한복음 21:15에,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의 자기 결정으로 인해 양을 버리고 간 그 목자의 심정이 바로 제대로 예수님의 양이 어떤 양인지를 아는 계기가 되게 하십니다. 즉 베드로 자신이 양을 주님에게 바치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에게 일어난 목자 배신을 통해서 자신의 죄를 인식하는 자에게만 주님은 양을 맡기십니다. 결코 양은 베드로 본인의 양이 될 수 없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전도한다는 식으로 전도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07강-예레미야 23장 3~6절(메시야 지키기)240616-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2장 18~19절입니다. 구약성경 1078페이지입니다.
“ 내가 내 양 무리의 남은 자를 그 몰려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내어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의 생육이 번성할 것이며, 내가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 하거나 놀라거나 축이 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예레미야가 나름대로 성심성의껏 친절을 다하여 주의 말씀을 전합니다. 예상외로 자세하게 그리고 세밀하게 장차 메시아가 어떻게 온다는 것을 언급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 당시 사람들이 이 말씀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듣는 이유가 있어요. 그건 기존에 자신들이 알고 있었던 메시아 개념을 본인들이 버릴 수가 없는 겁니다.
기존에 알던 메시아관에 맞추어서 그동안 투자한 것이 있고, 몰입한 것이 있는데, 그것과 연결되어야 과거에 애쓰고 힘썼던 그것이 뭔가 내가 생각했던 내 행함의 결실이 맺어지는 쪽으로 메시아와 내가 같이 기뻐하는 그러한 최종 모습을 사람들은 기대하게 됩니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이 헛수고이고 소용없는 일이 되면서까지 메시아가 오리라는 것은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를 못했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은 그리고 하나님 약속의 구현은 우리를 비켜 가서 실현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뒤에서 호출해요. “이리와~이리와” ‘하나님, 제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잖아요. 보세요. 얼마나 열심히 합니까’ “아니, 벌써 다 끝났어. 너 행한 거 말고 주님 행하신 거기로 돌아와서 그것 가지고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해야지”
내가 지금 열심을 낸다는 것은 주님을 못 믿겠다는 것밖에 안 되거든요. 흔히 금보다 귀한 믿음이라는 말이 성경에도 나오고 찬송가에도 나오거든요. 정금보다 귀하다고 말은 그렇게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계획은 그렇게 제대로 대우 안 해줍니다. 대우해 줄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인간의 반응은 뭐냐. 딱 네 자예요. ‘못, 믿, 겠, 다’ 납득이 안 된다.
왜 못 믿겠느냐 하면, 하나님이 주신 말씀 속에는 나 자체의 소멸을 전제로 해서 예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이미 다 치러진 일이에요. 예를 들면 요한복음 2장에서 가나안 혼인 잔치에 마리아는 걱정이 늘어졌습니다. 손님을 몰려오는데, 포도주는 떨어졌어요. 공짜 포도주 먹으려고 온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죠. 손님은 오고, 포도주는 떨어지고, 대책이 난감한 겁니다.
이것은 마리아의 한계예요. 아, 마리아라는 인간이 내놓을 수 있는 것에 그 한계점, 이것까지는 하지만 더 이상 넘어가는 일은 인간에게 없다는 거. 이게 바로 믿음이잖아요. 이게. 믿음이란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이 믿음이잖아요. 내가 뭐 할 줄 안다고. 내가 뭐 했다고. 주님이 찾아오니까 비로소 나는 나를 날마다 의심하는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사람들이 평소에 무심코 이야기한 가운데서 이런 이야기를 제가 종종 듣게 되어요. ‘목사님, 세상은 진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죠? 예, 창조했습니다. 그러니까 진화론은 틀리고 창조론이 맞잖아요’라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어요. 창조론 맞지 않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창조론 같은 것은 받아주지 않습니다. 그 창조론 알아서 뭐 할 건데요?
창조론은 인간이 창조를 믿을만하게 곽을 짠 거예요. 기왕 어렵게 한 거, 이래도 잠 오고 저래도 잠 오는데, 한번 밀고 가 봅시다. 전도서 2장 15절에 “심중에 이르기를 우매자의 당한 것을 나도 당하리니 내가 어찌하여 지혜가 더하였던고 이에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이것도 헛되도다” 우매자보다 지혜가 낫다고 철석같이 믿고 지혜에 지혜를, 지식에 지식을 더하고 더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내가 끌어모은, 이 축적된 지식이 하나님의 영광에 아무짝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공부 왜 했어~공부 왜 했어. 이럴 것 같으면 하지 말지’라는 식으로. 전도서 1장 17절에 보면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똑똑하려고 했고, 똑똑한 것이 실수를 줄이는 것이고 진리에 approach, 접근하는 것이고, 다른 방법은 없고 이것뿐이라고, 이렇게 공부하면 진리에 더 가까이 가겠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에, 그 끝은 이것도 다 헛것이에요. 헛것이라는 것은, 뭐가 있는데, 뾰로롱~하면서 순간적으로 연기와 함께 사라지는 겁니다. 뭐가 있었는데, 어! 없어요. 결국 소용없다는 이야기죠. 아무 소용이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오늘 본문을 다시 돌아와서 예레미야가 이야기하는 것은 기존에 예레미야 당시 사람들이 고대하고 고대했던 그 메시아, 메시아가 다 헛짓인 것을 알게 하는 그 시점에 메시아가 온다는 겁니다.
모든 것이 허사로 끝날 거예요. 허사로 끝날 때 인간은 자기가 기대하던 메시아를 철석같이 오시기를 간절히, 간곡히 기다렸죠. 뭐로? 믿음으로. 주님께서는 “그 믿음, 망가질래? 안 망가질래?”라고 하시는 거예요. 병원에 가면 아프다는 사람들이 병원에 오죠. 제가 제시하는 병원에 병 치료는 아주 간단합니다. 죽으면 모든 병이 치료가 됩니다.
바이러스가 살아있는 우리 몸을 숙주로 삼아서 전파하는데 내가 죽으면 바이러스가 재미가 없어요. ‘아, 나 딴데 갈래. 이미 죽어서 재미없어’ 이미 죽었으니까요. 우리의 모든 고민과 걱정도 없어져요. 지금 의료대란이 있어요. 현재 의사들이 파업합니다. 그러면 국민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지가 공부 좀 했고, 공부하는데 힘들었고, 업무량이 빡세다고 해서, 정부가 의사들을 우습게 본다고, 그러니까 정부가 자기들에게 빌빌거리며 기어도 모자랄 판에 어디 지적질이고 명령질이야. 한번 혼나 볼래?’라고 의사들이 파업하는 겁니다.
의사들이 파업할 때 국민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환자를 볼모로 하는 비겁한 짓이라고 하는데, 절대로 환자를 볼모로 하지 않아요. 그 이유가 있습니다. 의학의 발전은 의료기술 몇 개 한다고 해서 의학이 발전되는 게 아닙니다. 의학의 발전은 이미 쌓여있는 지혜와 지식을 두고 수많은 투자를 해야 하고 공부를 해줘야 해요.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병이 그러니까 병균이라는 것이 자생적으로 변종을 해요. 옛날에 알았던 병으로는 안 되고, 의사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따라잡아야 하는 거예요. 그걸 누가 하느냐. 의대 교수들이 하는 거죠. 의대 일반 동네병원들이야, 손님이 오면 ‘어디 아파요?’라고 물어보고 매뉴얼 대로 처방하면 그만이지만 진짜 의학의 발전에 힘쓰고 있는 의대 교수들은 죽기 살기로 외국 논문 보고, 새로운 장비 들이고, 그거 작동법 다 알아야 하고, 연구하고 또 연구하는 거예요.
볼모로 하는 것이 아니고요. 그동안 내가 국민의 의료를 위해 이렇게 힘썼는데 왜 의사는 돈밖에 모르는 나쁜 사람으로 그렇게 치부해서 환자를 볼모로 해서 의사들 많아지면 수입이 줄어든다는 식으로 천박하게 평가하느냐는 거죠. 그래서 이참에 의사들이 얼마나 고생하고 힘들게 연구하고 계속 앞으로 주어지는 병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할지 사명감을 가지고 싸우기를 바라는 의사의 심정을 헤아려 달라고 파업한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달래도 안 되고, 돈 준다고 해도 안 되고, 그러면 너희들끼리 현재 숫자로 잘 먹고 잘살라고 해야 그칠 것 같은데 거기에 대해서 국민은 대처를 어떻게 하면 되느냐. 저들은 나라의 말도 안 듣는데 국민의 대처는 어떠면 되느냐. 간단해요. 모든 환자는 순교하면 됩니다. 되게 간단해요. 어디 아파요? 민간요법 하면 됩니다.
어디 부으면 된장 찍어서 바르면 되고, 덧나면 빨리 죽으면 돼요. 그러니까 뭐든지 해결책은 간단합니다. 내가 살아있는 것이 진리를 훼방하고 있는 거예요. 살아있기 때문에 마귀에게 끌려가는 거예요. 따라서 장차 오실 메시아는 뭐냐 하면, 그들이 메시아를 고대하고 기대하는 이 모든 것, 그 모든 것에 의해서 죽어버리는 메시아가 오십니다.
죽어버리는 메시아가 오시면 어떤 결과가 오느냐 하면, 그 당시 유대 제사장이나 선지자나 이런 사람들이 또는 율법 학자들이, 우리가 목자이고 유대 백성은 불쌍한 양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메시아를 그대로 너희에게 가르치면, 너희들은 내 말을 믿어라. 내 말을 믿으면 너희가 장차 메시아 오시면 100% 너희들은 구원받은 양이다. 내가 보장할게. 오케이? 납득 되지? 이런 식으로 그들은 계속 양을 끌고 가야 하는 거예요.
끝까지 인간들이 이해될 수 있는 목자. 그러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왜 하나님은 인간들이 어느 누구도 이해 안 되고 납득 안 되는 그런 메시아, 인간의 지혜가 소용없다는 것이, 지혜가 바람처럼 날아가고, 지혜 없는 데서 드디어 등장하는 그런 메시아를 왜 준비하셨는가. 그것은 이렇습니다. 인간은 왜 본인이 어떻게 왜 사기꾼인지를 인간은 몰라요.
후딱 지나가서 못 들으셨으면 다시 강조 해드릴까요? 인간은 본인이 어디서 사기꾼이고 거짓인지를 본인이 모르고 있는 겁니다. 태어날 때부터 사기꾼인데, 애써 이것이 제대로 공부하고 합리적으로 논리를 따지면 약간 남아있는 사기성도 날아갈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닙니다! 인간이 사기꾼인 것을 아는 것은 초대받지 않은 타인이 투입되어야 해요.
초대받지 않은 타인이 왔을 때의 반응, 거기에 대한 멋진 반응을 누가 보여주는가. 여리고 성에 기생 라합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생라합은 이스라엘 정탐꾼을 어떻게 했느냐 하면 자기 집안에 숨겨줬죠. 이것은 뭐냐 하면 기생라합은 이스라엘 정탐꾼을 지켜준 겁니다. 자기는 일종의 보초이고. 혹시나 경찰이 오는가 싶어서 보초 서고.
이건 자기 내부를 다 내준 거예요. 누구에게? 이스라엘 정탐꾼에게. 그러면 이스라엘이 왜 정탐하러 왔을까요? 이것은 바로 여리고 성에 있는 사람들 단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다 죽이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실천하는 차원에서 정탐꾼이 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나는 내가 사기꾼인 것을 내 힘으로 파악 못 해요. 파악 못 할 경우, 초대받지 않은 누군가가 오셔서 사기꾼이 나를 죽여줘야 해요.
죽여주게 되면 나를 죽이시는 주님을 내가 보호하고 지켜주는 겁니다. 이게 바로 물과 포도주라는 것은 가나안 혼인 잔치에서 상상도 못 한 거예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줬을 때, 사람들은 그 예수님을 지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고맙다고 여기는 거예요. ‘아이고, 이렇게 친절을 베푸시고 이 잔칫집의 분위기를 환하게 환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요.
그러니까 초대받지 않은 주님의 포도주와 무엇이 그들에게 대조되었느냐 하면 기존에 자기가 예상했던 포도주의 맛과 대조하는 그것까지는 갔는데 맛있게 먹고 고맙다고 하고 그다음에 끝났어요. 기생라합처럼 이것은 내가 생각하는 그것을 오히려 그것을 파괴하고 부수고 공격하는 분으로 주님이 찾아왔다는 겁니다. 그 사람들은 그 생각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요한복음 2장 25절에 창조론과 관련해서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하는 이야기가 교회라 하는 것은 성도를, 교인들을 천국 보내 주기 위해서 말씀을 전하는 곳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하죠. 맞는 이야기냐를 생각할 때, 그게 맞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잘라내도 이렇게 심하게 잘라내요. 주님은 우리가 사기꾼인 것을 알기 때문에, 사기꾼에서 내놓는 그 어떤 것도 네가 구원받는 매개로 사용하지 않고 그걸 철거해 버린다는 겁니다. 이분이 바로 오실 메시아입니다. 이분이 메시아예요.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께 갈 다리를 놓아요. 다리를 놓고 그 다리를 철거 안 해요. 다시 여차하면 뒤돌아갈 생각이죠.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 위한 모든 것을 발길질로 차서 물속에 빠뜨린다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나타내겠습니까? 이 다리를 건너가면서 ‘나는 예수님을 이렇게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한다. 지혜를 모으고 성경을 연구하고 헬라어, 히브리어를 연구해서 예수님 이러이러하고, 나는 확신한다. 나는 오늘 밤에 천국 간다’라고 했던 것을 주님이 사정없이 발길로 차버릴 때, 우리는 뭘 느끼냐 하면, 내가 나에게 사기를 치고 있었던 거.
내가 나에게 사기를 친다는 거. 왜 예수 믿으려고 하느냐. 그다음부터는 주님의 공격이 시작됩니다. “네가 왜 예수 믿으려고 하느냐?” ‘내가 죽어서 천국 가면 행복해질 거 같아서요’라는 답변 내놓을 수 있어요. 인간은 자기 행복을 포기 못 하니까. 주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행복이 있는 곳에 불행이 있다면 너는 어떻게 할래?” 행복이 있는 곳에 반드시 불행이 따라온다면.
이게 뭐냐 하면, 복이 있는 곳에 반드시 저주가 따라온다면 그 저주를 끊어낼 자신이 있어, 없어? 못 끊어내죠.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주님께서 우리 자신을 돌려보냅니다. 그게 사무엘하 3장 16절에 다윗과 아브넬이라는 장군과 정치적 협상을 하고 자신이 귀순하겠다고 한 거예요. 아브넬은 다윗의 적 사울 편에 있는 사람이에요. 다윗이 기세가 올라가니까 자기가 귀순하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럴 때 다윗은 아브넬이 진정으로 사울 왕과 절교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옛날에 사울 집안에 있던 사울이 딸이 있어요. 그리고 다윗은 자기가 사울의 사위입니다. 그렇게 해야 다윗은 일반 사람들에게 ‘내가 사울 집안을 박살 낸 것이 아니고 나도 사울의 집으로써 정통성이 있습니다. 일부 있습니다’라는 것을 백성들에게 전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옛날에 나와 혼인했던 미갈을 데려오라고 하니까 아브넬이 미갈 데려가면 되지, 뭐 어렵지 않았어요. 데려가는 데 문제는 거기에 뭔가 같이 딸려 오는 게 있어요. 보니까 이미 미갈은 다윗과 헤어지고 나서 새로운 남편과 살고 있었어요. 가정을 이루었단 말이죠. 이름이 발디엘 이에요. “이스보셋이 보내어 그 남편 라이스의 아들 발디엘에게서 취하매”(삼하3:15)
그리고 16절에 “그 남편이 저와 함께 오되 울며 바후림까지 따라 왔더니 아브넬이 저에게 돌아가라 하매 돌아가니라” 남편이 울면서 오는데, 어디까지 오느냐 하면 바후림까지 오면서 울어요. 바후림이 어디냐 하면 예루살렘 북서쪽에서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바후림이 있어요. 거기까지 엉엉 울면서 ‘여보~여보~어디 가~’라고 하면서 그냥 진심으로 울면서 따라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브넬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가!’라고 하면서 돌려보냈습니다. 다윗이 하는 행위, 다윗이 하는 이 정치적 행위, 예레미야 오늘 23장 5절에서는 뭐라고 나오느냐 하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하나님의 언약은 다윗을 통해서 기존에 알고 있던 메시아를 거부하고, 다윗 중심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새로운 일을 발생시킵니다.
새로운 일을 발생시키는데 누가 모르느냐 하면 미갈의 나중 남편은 그걸 모르고 그냥 개인적인 정에 의해서 울면서 자기 아내를 따라오죠. 인간들이 메시아에 대해서 왜 못 믿고 예수님의 믿음을 그렇게 귀하게 보배같이 여기지 않는가. 이걸 보면 알 수 있어요. 인간은 항상 어디에 중력이 집중되는가. 내가 얼마나 행복하냐. 내가 얼마나 좋은 시절을 보냈는가.
하나님이라도 나의 이 아름다운 현재의 삶을 박살 낼 그런 권한은 없다. 나는 나의 행복을 계속 추진할 거야. 나는 행복 포기 못 해. 그러나 다윗은 뭡니까. 다윗과 아브넬의 정치적 상황은 ‘어! 가!’ 오늘날 주님이 메시아로 왔을 때, 누가 울고 짜고 붙들고 하느냐 하면, 나의 추억과 나의 과거가 자꾸 예수님과 연결하면서 ‘저 예수님 믿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까?’라고 하면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가!!’ 주님의 일인데 네가 거기에 왜 끼느냐는 거죠.
끝으로 거기 관련해서 요한복음 21장에 나옵니다. 21장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찾아와서 오늘 예레미야 말씀과 똑같이 내가 새로운 양을 만들고, 새로운 목자를 준다는 그 말씀이 요한복음 21장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루어지면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먼저 3번 찾아오죠.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럴 때, 베드로는 이미 자기가 사기꾼인 것을 예수님을 통해서 알게 된 겁니다.
그래서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는 말을 못 해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요21:15) “그렇다면 내 양을 먹이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양을 베드로 너의 순수함과 거짓 없는 지혜로 가르치는 목자가 되는 것을 나는 허용하지 않겠다. 항상 “주께서 하셨습니다. 주께서 하셨습니다”를 어느 한 시도 그걸 잊어버리거나 놓치면 안 돼요.
그래서 서울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 ‘전도하지 않는 방법으로 전도하세요’ 전도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전도하시라고. 왜? 전도하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나의 사기성이 발작하는 거예요. 그러나 주께서는 그것을 끊어버리고, 주께서 살아계셔서 자기 백성 알아서 양이 되게 하고 목자 되게 하는 이 일에 우리는 항상 자기를 부인하고 참여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끊어낼 줄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고, 성심성의껏 한다고, 믿음으로 한다고 하는 그것이 사기인 것을 날마다 주님께서 일하시는 가운데 발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