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시험하는 세상

아빠와 함께 2024. 6. 9. 18:35

시험하는 세상

2024년 6월 9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2:18-19

(22:18)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에게 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 무리가 그를 위하여 슬프다 내 형제여 슬프다 내 자매여 하며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를 위하여 슬프다 주여 슬프다 그 영광이여 하며 통곡하지도 아니할 것이라

(22:19) 그가 끌려 예루살렘 문 밖에 던지우고 나귀 같이 매장함을 당하리라

하나님은 다 아셨습니다. 인간들이 결국은 왕이 찾고 자신이 원하는 왕에게 기대하는 바에 의해서 자신들의 살 길을 찾아나선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신약에 들어와서 분명한 것은 이 세상의 왕은 예수님이시며 예수님 외에는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사실은 왕에게 기대를 거는 식으로 예수님에게 기대를 걸어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원조가 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있어 왕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뿐이십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은 언약(=말씀=율법)을 통해서 자기 백성과 같이 하십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왕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주목하십니다. 언약 안에 들어와 있는지를 살피십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은 12지파가 아니라 달랑 두 지파, 곧 유다와 베냐민 지파로만 구성된 이스라엘이었습니다. 당연히 온전한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온전한 복이 이삭에서, 이삭의 온전한 복이 야곱에게, 야곱에게 내려주신 하나님의 온전한 복이 12지파에게 내려지게 됩니다.

그런데 지파가 12개가 아니라 11개라면 그 남은 11개 지파라도 나머지 복을 챙겨 온전한 이스라엘을 이루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겠지만 그렇게 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야곱에게 주신 본이 곧 12지파를 온전히 유발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제자들도 12명입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하나가 궐이 생기게 됩니다.

가룟 유다 빠지게 됩니다. 나머지 11지파로 계속 예수님의 유지를 받들어 나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한 지파를 마자 체워져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하며는 12제자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바로 왕의 자리에 앉으신 예수님의 쉬지 않는 활동성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자 중에서 한 사람이 가룟 유다의 자리를 채웁니다.

부활을 봤다고 해서 너도 나도 제자 속에서 들어올 수가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나머지 열 한 제자의 위상을 증명할 추가적인 제자가 대변해주게 됩니다. 그것은 12제자가 무너진 체제는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가룟 유다의 평가 때문입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 26:24)

즉 주님께서의 가룟 유다의 평가는 그의 출생에 관한 겁니다. 하지만 나머지 제자들은 그들의 출생 이전의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선택이 선행합니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선택된 채 이 세상을 방문한 것과 결을 같이 하기 위함입니다. 아버지부터의 받은 선택성을 12제자와 같이 나누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자신의 위상은 근거로 뽑게 됩니다.

마치 야곱의 선택성이 12아들의 선택성으로 이어짐으로서 12이 곧 하나(1)이 되는 모습으로 복이 나타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선택성은 인간의 존재보다 우선되는 조건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복과 언약을 훼방하고 이 선택성을 가리고 막는 식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자기 존재를 기본으로 해서 그 존재에서 나오는 자기 선택으로 자신의 미래를 구축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왕(王)’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인간들이 왕을 원하는 것을 하나님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하십니다.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한 그것을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하 8:5-7)

왜 이스라엘이 왕을 구했을까요? 그들은 이스라엘 주변의 강대국들이 결코 하나님의 언약대로 운영해나가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체적으로 인간 왕 중심으로 단결하여 국가를 이루어나가는 것이 훨씬 그들 눈에 합리적으로 합당하게 보였던 겁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평소에 자신을 살리기 위해 쉴새없이 시험한다는 뜻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을 담보로 하여 판돈으로 해서 이리 찔려보고 저리 찔려봅니다. 결과적으로 자신이 어느 정도로 대단해 질 수 있는 지를 확률적으로 늘 점검해보고 싶었던 겁니다. 이것은 종교적으로도 실시하는 바입니다. 자기가 믿는 하나님에게 은혜받을 때까지 자기 몸을 밑천으로 해서 계속 내기를 걸어보는 겁니다.

왜 이렇게 하느냐 하면, 자신이 과연 신자가 맞는지 하나님의 백성인지 본인이 확답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본인이 본인에 대해서 확인하고 싶은 겁니다. 마태복음 6:13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서 와서 악마의 시험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늘 의심하면서도 그 가운데 확실한 것을 따로 세울 것을 강요받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과학적이며 합리적이라는 주장 하에 계속 확률을 염두에 두고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호야김이라는 왕도 확률상 신생국가 바베론보다 든든하고 오랜 전통을 지닌 애굽이 더 신임이 갔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조금도 주저함도 없이 여호야김 왕에게 전했습니다.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것이 유다나라가 살길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입장에서는 확률상 애굽나라가 유다나라를 지켜 줄로 확신했습니다. 그는 예레미야가 전하는 기록된 말씀을 그 자리에서 칼로 연속적으로 찢은 왕입니다.(렘 36:22)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나오는 교인들이 과연 자신이 죽어 천국갈 것인지 여부를 살아 생전에 확인하고 싶어서 간절히 하나님에게 기도합니다. 카지노의 룰렛 게임은 당첨될 확률이 37분지 1이지만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확률은 그것보다 훨씬 작은 확률이라도 상관없이 반복적으로 기도합니다.

따라서 세상의 왕이라는 것은 백성들의 도박 의지를 대표해서 발휘해주기 위해 앞장 세워지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호세아 13:11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 왜 하나님께서 왕을 허락하시면서 그 왕을 폐위시키시는 겁니까? 그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왕으로 활동하시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우편에 계신 주께서 그 노하시는 날에 열왕을 쳐서 파하실 것이라 열방 중에 판단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파하시며”(시 110:5-6) 즉 예수님의 왕되심에 합당한 일 수행은 세상 왕을 처버리는 겁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성령이 충만해서 이점을 알았던 겁니다.(행 7:55)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존재보다 예수님의 선택이 먼저였음을 늘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06강-예레미야 22장 18~19절(시험하는 세상)240609-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2장 18~19절입니다. 구약성경 1078페이지입니다.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에게 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 무리가 그를 위하여 슬프다 내 형제여, 슬프다 내 자매여 하며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를 위하여 슬프다 주여 슬프다 그 영광이여 하며 통곡하지도 아니할 것이라, 그가 끌려 예루살렘 문밖에 던지우고 나귀 같이 매장함을 당하리라”

여기에 요시야 등장하죠. 그다음에 여호야김 등장합니다. 성경에는 나오는데, 사람들이 성경에서 별로 유명하게 생각 안 하는 이름이 나와요. 그게 요시야, 그다음 왕이 여호와아스 그리고 다음이 여호야김, 그리고 여호야김의 아들이 여호야긴이고 그다음이 시드기야이고 그리고 유다 나라가 끝납니다. 유다 나라가 끝났다는 말은 하나님의 언약된 나라가 이 지구에서 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만들었는데, 이스라엘 중에서 지파가 12지파가 되는데, 이 열두지파가 솔로몬 이후에 2개와 10개의 지파로 나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 생각에는 이스라엘이 하나가 둘이 되었다고 생각하겠지만 둘이 되었다는 말은 하나가 아니라는 뜻이고 하나가 아니라는 말은 둘 다 가짜라는 뜻이에요.

열두지파가 열둘이 하나로 뭉쳐야 하는 이유가 야곱의 열두 지파에게 내린 축복은 중간에 나뉘면 안 되게 되어있어요. 왜냐 하면 열둘이 모여서 하나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의 축복이 이삭에게, 이삭의 축복이 야곱에게, 야곱의 축복이 열두 가지를 뻗었는데, 열두 가지는 열두 가지가 다 있어야 해요. 열한 가지 있고 한 가지 날아가고 하는 그런 건 안 됩니다.

그게 사사기 마지막에 베냐민 지파가 날아갔을 때, 그들이 걱정을 많이 했잖아요. 열두지파가 유지가 될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되고요, 그 이스라엘이 될 때 무엇을 찾고자 하느냐면, 야곱의 축복이 과연 축복대로 이 역사 속에 남겨지고 있다는 것을 드러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몇 명 뽑았는가. 열두 명 뽑았어요. 열두 명 뽑았는데 의도적으로 주님께서는 그중에 가롯유다를 뽑아서 가롯유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막14:21) 그러면 가롯유다가 만약에 그 자리에 있었다면 뭐라고 했겠습니까. ‘주님이 차라리 저를 선택하지 않았으면 저에게 좋을뻔했습니다’라고 이야기했겠죠. 주님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뻔하였느니라”라고 하시고 가롯유다가 그걸 듣고, 물론 그 자리에 이미 없지만, 가롯유다의 후손들 있잖아요.

예수님 조롱 못 해서 환장한 사람들이요. ‘네가 뭔데 네가 구세주라고 해?’라고 조롱하고 싶어서 내부적으로 참을 수 없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그런 발언이 그들에게는 인간에 대한 존엄성의 심각한 훼손으로 보는 거예요.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말은 도대체 인간을 창조해 놓고 창조한 책임을 자신에게 돌려야 할 건데, 창조한 인간에게 돌리는 이것은 하나님께서 비겁한 일이 아닌가를 인간들이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하죠. 참, 가롯유다가 예수님이 그를 제자로 뽑지 않았으면 배신할 일도 없고, 배신할 일 없으면 자살할 일도 없고, 강원도에서 감자나 캐면서 살 것을. 괜히 주님에게 저렇게 한 소리 듣고 하니 안 됐다는 생각이 들 거예요. 주님께서 가롯유다에게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말은 나머지 열한 제자를 두고 이야기한 겁니다.

“열한 제자 너희도 똑같은데, 내가 너희를 선택했다. 그것도 사랑으로. 버리지 않기로 선택했잖아” 이 말은 ‘우리가 가롯유다 되었으면 큰일날 뻔했다’라는 것이 잘못된 생각인 거예요. 주님의 선택이 태어남보다 먼저라는 겁니다. 예레미야 같은 경우도 그렇고.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 주님의 선택이 먼저 있었고, 이는 우리가 태어난 이전부터 하나님의 존재가 우선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태어난 인간은 주님의 존재를 인정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거예요. 여러분 왜 삽니까? 이 세상에 왜 태어났죠? 6 월달 되면 자꾸 생일이 생각나요. 생일날 되면 생일 축하 노래 부르고. 도대체 태어난 것이 내 뜻이 아니죠. 내 뜻이 아니라면 지금 살아가는 것 도 내 뜻이 아닌 거예요. 그럼, 내 뜻이 아닌데 우격다짐으로 내가 굳이 살아갈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인간은 주님의 선택을 모르면, 사명감이 없으면 살아도 이미 죽은 자예요. 없는 존재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열두지파 이스라엘을 모델로 해서 열두 제자를 뽑는데, 하나를 일부러 빠지게 했어요. 그 빠진 대목, 이게 바로 없는 대목이에요. 빠져서 없다는 말은 열하나는 있다는 말이 아니고, 몽땅 없는 거예요. 왜? 하나 빠지고 열하나 있다고 그게 열둘이 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를 마저 채우죠. 채울 때 뭐로 채우는가.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증명할 사람으로 채웁니다. 그게 바로 맛디아입니다. 주님의 존재가 우리가 구원받는 것보다 우선한다는 사실을 증거할 자를 가롯유다 자리에, 비어있는 자리에 채워 넣으면 비로소 나머지 열한 제자는 활기를 얻게 됩니다. 물론 열한 제자도 마찬가지죠. 공통점이 있어요.

열한 제자도, 그리고 열두 번째 들어간 그 제자도 합쳐서 ‘주님은 부활하셨다’라는 사실, ‘주님은 살아 계시다’라는 사실을 그 열두 제자가 새끼를 쳐요. 새끼를 치게 되면, 그리고 천 번이라는 완전한 새끼를 쳤을 때, ‘1000’이라는 것은 완전인데, 완전한 새끼를 쳤을 때 나오는 숫자가 ‘144000’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하자나 실패는 없었다는 것을 증명할 사람이에요,

‘나는 실패 안 해서 구원받았다’라는 자기 구원을 증명할 사람이 아니라, 주님에게는, 주님의 언약은 인간을 가지고 이용하시되, 어느 경우에도 실패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실패가 없는데 왜 인간들 보기에 가롯유다도 빠지고, 왜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왜 실패처럼 느껴지는가. 그렇게 실패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있어요. 그건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지 못한 이유가 왕에게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결론을 미리 말씀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시편 110편 5절에 “주의 우편에 계신 주께서 그 노하시는 날에 열왕을 쳐서 파하실 것이라” 열왕이라는 것은 왕들의 계열, 그 왕들의 계열을 쳐버리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왕을 치는 겁니다. 왜냐 하면 왕이라는 말은 모든 것이 하나로 집중되는 자리가 왕의 자리예요. 그게 왕의 자리, 또는 주님의 자리입니다.

우리에게는 한 분의 왕, 한 분의 주님 외에는 우리에게 다른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그분이 선택해서, 선택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 땅에 6월달 인지, 5월달 인지, 아니면 4월달에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걸 모르면 우리는 살아도 사는 이유가 없는 사람이에요. 괜히 지금 시간만 때우다가 요양병원에 들어갈 사람들이에요.

우리 주변에 이미 요양병원 간 사람들 많아요. 십자가마을에 보면 연세 좀 있으신 분들의 시어머니, 시아버지, 부모님 중에 요양병원 간 사람들 있어요. 좀 가서 위문공연 해드리고 싶은데, 위문공연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왜 사십니까?’라고 그냥 묻는 거죠. ‘요람에서 요양병원까지, 산부인과에서 요양병원까지, 병원에서 병원으로 가시는데, 갈 때까지 뭐 했습니까? 뭐 했습니까? 왜 살았습니까?’라고 꼭 묻고 싶어요.

묻기 전에 이미 치매 걸려 계시겠지만. 꼭 묻고 싶어요. 왜 사십니까. ‘나는 존재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라는 그런 답변이 나오면 감격스러워요. 나는 주님의 그림자이기 때문에 그림자에게는 존재한다는 말을 붙이면 안 돼요. 그림자는 사건이지 존재가 아니에요. 그림자 치고는 늘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여러 가지 약도 먹어야 하지만.

바로 이 어두운 그림자가 하나님의 왕 됨을 지우기 위해서 뭘 내세웠느냐 하면, 왕을 내세운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자진해서 뭐냐, 왕에게 길들어지기를 본인이 원했던 거예요. 11월달에 미국에 대선이 있습니다. 트럼프가 될 거냐 말 거냐 이런 식이죠. 그리고 몇 년 뒤에 우리나라도 대통령 선거 있지요. 북한에 가면 김정은 있고.

거기에 왜 관심을 두는 거죠? 우리의 몸이 왕에게 길들어졌기 때문에 그래요. 왕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인데, 나라는 인간이 왜 다른 인간에게 굳이 길들어지기를 왜 요청할까요. 그것은 왕을 앞장세워서 우리가 시험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시험을 하기 때문에 그래요. 시험이라는 말이 굉장히 어려운 말인데, 제가 쓰는 말이 아닙니다.

이건 마태복음 6장 13절에 주기도문에 나온 거예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른 말로 하면 이 세상 것에 마음 두지 말게 하옵시고, 이 세상 것에 대해서. 왜냐 하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와서 겪었던 것이 바로 이 세상의 왕에게 유혹받고, 시험받았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께서 먼저 겪었고 당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내가 여기서 당했던 것에 대해서 너희들은 빠지지 말라는 겁니다.

시험이 뭐냐.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지금껏 제가 살면서 카지노라는 곳에 가서 뭘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이렇게 말하려고 하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본적은 있어요. 나이아가라 폭포 갈 때 호텔에서 나오면서 입구 자체가 전부가 카지노로 되어있어서 안 보려야 안 볼 수가 없었어요. 거기에 룰렛(roulette)게임이 있는데, 그 게임이 뭐냐 하면, 동그란 판을 37등분한 거예요.

37등분 된 기계는 아무런 뭐가 없이 무의식적으로 기계는 돌아가요. 기계가 돌아가기 전에 자기가 먼저 칩을 자기가 원하는 번호 하나에다가 칩을 겁니다. 그리고 기계가 돌다가 스톱(stop)이 되잖아요. 만약 7번에다 칩을 걸었는데 룰렛이 아무 생각 없이 돌다가 7번이 딱 나오면 그건 아다리된 겁니다. 대박 난 거예요. 이건 뭐냐 하면 인간의 욕구 충동이 확률적으로 봐서는 37분의 1이에요. (1/37) 0~36번까지 총 37칸이거든요.

그런데 좌절될 확률이 얼마냐 하면 37분의 36이에요. (36/37) 그렇기 때문에 도박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왕이라는 존재가 뭐냐. 도박이라는 존재는 뭐냐. 우리 인생이라는 존재는 뭐냐. 나를 판돈으로 걸고 하나님 앞에 도박을 벌이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우리는 예수 믿고 그런 도박장 안 갑니다. 그런 거 증오합니다’라고 하시는데, 하나님께는 왜 기도하죠?

37분의 1도 아니고 3667분의 1을 걸고 왜 하나님께 기도합니까? 딴 거 아니에요. 하나님이 과연 있는지 없는지를 도박을 거는 거예요. 인간은 자체가 도박꾼이에요. 도박한다는 말은 뭐냐. 나는 나를 믿겠다는 거예요. 나의 기대치를 믿겠다는 겁니다. 이걸 교회에서 뭐라고 하느냐. 기독교 신자라고 해요. 도박꾼을. 생각해 보면 도박계와 종교계와 똑같아요.

신을 상대로 도박을 벌이는 겁니다. ‘내 인생 책임질 거요, 말 거요’라는 이런 거죠. 그렇다면 이 이야기 듣고, ‘그렇다면 하나님께 범사에 감사해야 하지, 도박할 게 아니구나’라고 생각하겠죠. 아니에요. 여러분은 이미 빠졌습니다. 그게 뭐냐. 아~대한민국이에요. 대한민국은 대통령 중심 체제입니다. 대통령을 앞장세워서 뒤에서 우리가 밀어주고 후원하고 표 찍어줄 테니까, 이 세상, 이 세계에 대해서, 현대 글로벌시대에 다른 나라와 경쟁에서 당신이 대표로 나가서 룰렛게임을 하라는 겁니다.

동해안 유전개발? 20퍼센트 확률이라는 것은 엄청나게 확률이 높은 거예요. 8퍼센트만 해도 뚫습니다. 유전 개발할 때. 이게 뭐냐 하면 왕이 일을 벌이고 왕의 정책을 보좌하는 정책자들이 벌이는 모든 일의 확률이 10퍼센트가 안 됩니다. 환율을 높이고 내리고 하는 거, 증권회사의 모든 펀드매니저들이 하는 거, 전부다 그만큼의 확률이 안 돼요. 그냥 도박입니다.

그러면 그 도박 정신은 어디서 나오는가. 바로 과학에서 나옵니다. 과학적, 합리적 정신에서 나오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종교계가 하는 하나의 공식, 기독교뿐만이 아니고 모든 종교가 하는 공식이 있다면 바로 이겁니다. 은혜받을 때까지 판돈 건다. 한번 기도해서 안 되잖아요? 2번 합니다. 37번?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37번에 곱하기 37번이라도 단 한 번만, 한 번만 잭팟(Jackpot) 터지라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신자예요.

내가 신자인지 안 신자인지에 대해서 우리는 도박판인 이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신자인 것을 스스로 확인하고 증명하고 싶어서 스스로 시험하고 있어요. 배후에서 악마가 그 짓을 하게 하죠. 하나님께서는 그 도박판 없애버립니다. 작살냅니다. 과학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과학 역사를 공부해 보면 푸른곰팡이에서 생성한 페니실린 같은 경우에도 이걸 몇 번을 시험했느냐 하면 만 번이 넘어요.

만 번 했는데 아다리(적중) 하나 딱 됐습니다. 이건 확률이 만분의 일(1/10000)이에요. 방사능 연구한 퀴리부인(Marie Curie, 과학자, 1867~1934)은 실험을 얼마나 했던지, 퀴리부인은 그거 성공한 뒤 자궁암에 걸려 죽었어요. 엑스레이 너무 쬐어서 죽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나라 인구가 5천만인데, 5천만 중에서 도박꾼 아닌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어요.

전부다 도박꾼입니다. 도박에 살고 도박에 죽고, 아침에 눈만 뜨면 도박하고 꿈에도 도박하고. 자식 학원에 보내면 공부 잘하겠지. 무슨 이런 도박이 다 있어요? 그건 도박이거든요. 그 도박을 탈피해서 이성적 합리적으로 하겠다는 것이 과학이에요. 그런데 과학의 성과 자체도 도박이에요. 그걸 일본말로 겐또(어림, 짐작)라고 합니다. 침놓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주파, 저주파 침을 놔서, 저주파 전류에서는 엔돌핀이 생성되고, 고주파에서는 다이돌핀이 분비되어서 침이 진통 효과를 준다는 거예요. 이것이 인간의 신경인 뉴로모듈레이션(Neuromodulation)과 관련된 신경조직에 침을 놓는 방식이에요. 침을 놔서 만병을 통치할 거 같으면 노벨상 받지요. 이런 과학분야, 그리고 다른 모든 분야에서 왕의 총괄이 책임지고 있다는 것이 모든 국가의 운명입니다.

그 운명에 대해서 호세아 13장 11절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이토록 단호히 주어졌습니다. 이 말씀 들으면 여러분 놀랠 거예요.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 이게 오늘 예레미야의 말씀과 똑같아요.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확률이었습니다. 아무리 예레미야가 이야기해도 안 듣습니다. 왜? 현재의 정치 동향이 바벨론에 항복하고 포로 되는 것보다는 애굽에게 의지하는 것이 확률상 유다나라가 버티기에 확률상 높기 때문에, 여호야김은 애굽을 의지했어요.

따라서 애굽이라는 대국이고 강국을 바벨론이라는 신생 국가가 이긴다는 것은 확률상 이건 20퍼센트도 안 돼요. 확률상 더 높은 확률은 애굽을 의지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뭐라고 윽박지르느냐 하면 “여호야김 당신은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계시를 위반했기 때문에 당신은 멸망해서 죽는다”라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당신이 죽을 때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다”라고 이야기했거든요.

그런데 여호야김 왕은 예레미야가 말한 그 성경책을 찢어버렸어요. 이야기하면 찢어버리고, 이야기하면 찢어버리고. 찢어버린 이유가 하나님이 이야기하려면 확률상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를 나에게 전해주면 내가 안 믿겠다는 것이 아니고 믿겠다는 거예요. 확률상 내가 납득되는 이야기를 네가 하면 내가 왜 안 믿어. 그런데 아무리 봐도 정치적으로 그 당시에 상황이 확률상 바벨론은 신생 국가예요.

오래된 전통이 다르잖아요. 여러분도 미국 믿을래요, 러시아 믿을래요? 이건 뭐 미국이죠. 상호방위조약이 있잖아요. 우리는 그걸 믿습니다. 이게 바로 우리 판돈인 우리 인생을 건다는 뜻이에요. 남은 인생을 겁니다. 그러나 여기 해답은 시편 110편 1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지금 벌써 몇 번째 이 말씀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오늘도 이 말씀으로 오늘 설교를 끝내겠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죽을 때 뭐라고 했느냐 하면,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사도행전7:55) 이게 스데반 집사가 죽을 때 그런 게 아니고 살아있을 때 본마음이 그대로 나왔잖아요. 그러니까 시편 110편처럼 하나님 우편에 예수님이 서 계신다는 말은 세상 끝 날까지 놀지 않고 지금도 일하신다는 거예요.

그게 열두 제자를 채우는 부활로 우리에게 작용한 겁니다. 열두 제자 새끼 까듯이, 열두 제자에게 주님이 살아계셔서 나라는 존재 이전에, 나라는 생일 이전에 주님의 창세 전에 예정하사 선택했다는 그 소식이 우리로 하여금 야곱이라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그 속에 여러분을 집어넣었다는 사실이요, 이래야 도박이 그쳐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라고 해야 도박이 그치는 거예요.

도박이 그쳤으면 어떻게 살까요? 심심풀이로 하세요. 어차피, ‘어느 요양병원으로 갈까? 확률상 여기가 나을까, 저기가 나을까?’라는 그거는 뭐 확률상 하세요. 그러나 하면서 뭘 해도 나는 달라질 게 없다는 거, 안전빵이라는 사실. 이것은 우리 왕이 지금도 우리 주님이시기 때문에 세상에 눈에 보이는 도박꾼의 총수들을 주께서 멸하시는 것이 주님의 지금 역할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것이, 뭔가 숨기고 있는 것이, 그것이 무엇인지를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나 잘되기 위해서 합리적 생각을 한 그것이 결국은 얼마나 내 중심적이라는 사실을, 스데반 집사가 알았던 그 예수님의 생각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시고, 이런 생각이 죄라는 것을 알게 하신 바로 그분이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일하시는 주님의 부활 활동인 것을 저희들 기쁘게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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