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4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3강-존재에서 사건으로 넘어서라-자유의 내용은 내가 채우면 안된다

아빠와 함께 2014. 1. 21. 19:37

2014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3강

(강의:이근호 목사)


첫째 시간은 강의한 게 함축돼 있기 때문에 이해가 안 된다고 걱정하지 마시고 제가 되풀이해 드리겠습니다. 첫째 시간은 뭐냐 하면, 책 속에 홈을 파서 우리를 그 안에 집어넣고 책 속에서 나올 때 존재하는 있음이 나왔지만 나올 때는 하나의 사건이 되고 그래서 우리가 사건이 되면서 사건이 이 책에 있지 않았던 그때 그 시절이 하나의 점선으로 보이면서 나라는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 때문에 죽는 것을 두려워하는 그 모습이 우리 눈에 훤히 보이게 만들어요. 내가 저렇게 살았었지. 저것이 전부라고 알았지. 어쨌든 간에 내가 이미 여기 있음을 지탱하려고 유지하려고 아등바등 사투했는데 그게 하나의 사건인 것을 왜 미처 몰랐을까.


두 번째 시간은 더 중요한 걸 이야기했어요. 있다, 없다는 자체가 이천 년 동안 사람을 속이는 사기라 했습니다. 내가 여기 있는 것은 없는 것을 신이 만들어서 내가 여기 있다는 거예요. 이게 맞느냐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쩌라고? 주님께서는 이겁니다. 원인도 모르는 일이 자꾸만 생긴다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있다가 돼버리면, “나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 여기 있는 나를 지켜 주옵소서.” 자꾸 있다는 자체가 새로운 내용이 아니란 말이죠. 그런데 성경에 보면 엄청난 내용이 들어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일은 성경 내용대로 계속해서 원인도 모르는 체로 자꾸 일이 생겨나는데 우리는 뭘 고집하느냐 하면, “하나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쩌라고?


여러분들이 앞에 큰 길 복판에 서서 내가 여기 있다고 하면 누가 알아줍니까? 새롭게 추가될 내용이 없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다는 자체로 끝나버렸어요. 그 다음에 나를 건지소서 하는데 그건 성경에 추가될 내용이 아니고 이유도 모르는 체, 원인도 모르는 체 자꾸만 일이 발생되어서 내가 현재 이 지경으로 몰아세우는데 그 원인은 성경에서만 나온다는 겁니다. 우리는 내가 있음을 지키려고 하는데 그건 신앙은 아닙니다.


그런데 기독교 이천 년 동안 신학의 내용이 뭐냐 하면, “여러분 있습니까? 주께서 키워주실 겁니다.” 그게 무슨 내용이에요. 그런 성경내용 없어요. 그건 나의 욕구, 욕망을 발휘한 것뿐이지 전혀 신앙생활 아닙니다. “목사님. 제가 이런 형편에 있거든요. 그래서 잘 되게 하옵소서.” 그런 건 성경에 없는 이야기고 하나님이 나에게 발생시키지 않는 일이란 말이죠. 그냥 있는 게 있다는데 그 있다는 게 얼마나 하나님의 일을 조작하는 사탄의 유혹입니까. “너는 있어. 무조건 잘 돼야 돼. 너는 안 죽어야 돼.” 그게 무슨 성경내용이에요. 사탄은 자꾸 성경내용을 삭제시키려고 하는데 거기에 우리가 휘말려 있는 겁니다.


20세기 중반에 하이데거라는 철학자가 있어요. 초기 하이데거와 후기 하이데거의 사상이 다른데 초기 하이데거의 사상에 대한 책이 [존재와 시간]입니다. 이 책의 내용은 이거에요. 존재자는 결코 존재가 아니다. 존재란 있다는 뜻이거든요.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원래 있다는 있음이 아니란 말이죠. 괜히 내가 있다는 것을 중심으로 모든 진리를, 하나님을, 예수와 삼위일체를 내가 있는 걸 출발점으로 해서 조작해낸 것에 불과하고 진짜 존재는 사건으로만 주어진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초기사상이에요. 불트만이란 신학자가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믿음이란 하나의 접점지점이고 사건이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그런데 이런 하이데거가 사상이 바뀌어요. 후기 하이데거에서는 나중에 나온 논문이 [시간과 존재]입니다. 여기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는 대전시민대학에서 강의했었는데, 처음에는 존재와 시간이라 해서 존재를 찾기 위해서 시간을 어떻게 주어지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나중에 그 사람이 나이 팔십 넘어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존재가 우선이 아니고 시간이 우선인 거예요.


예를 들면 쥐가 우글거리는 방에 치즈덩어리 하나 던져놓으면 배고픈 쥐들이 가만있지 않잖아요. 어떻게 합니까? 사방에서 달려들어서 이리 뜯어먹고 저리 뜯어먹고 나중에는 치즈가 오그라들어서 별로 남지 않지요. 하이데거에 의하면 시간이란 쥐새끼인데 이 존재를 시간이 와서 다 뜯어먹어버리면 나중에 관절 아픈데 이것 뜯기고 저것 뜯기고 나중에는 얼굴 보톡스 해봐도 보톡스가 빠지면 더 쭈글거리고. 시간이란 쥐새끼한테 당할 재간이 없어요. 그렇게 예뻤던 미남도 나중에 시간이 지나니까 본인도 못 볼 정도로 자기 사진 찍지 말라 하고. 꼴보기 싫다고. 쥐새끼가 뜯어먹은 치즈 꼴이 되니까.


하이데거가 느지막이 철이 든 거예요. 그전까지는 나 여기 있어. 나 있으니까 알아 줘. 자기 있음을 자랑질하고, 믿음 좋은 사람 있고, 헌금 많이 하고, 기도하고, 하나님께 사랑받고 있다고 자꾸 있다를 주장하는데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뜻, 성경을 알게 되면 이 있음이 빛이 날 것이란 했던 그 사람이 시간이란 쥐새끼한테 다 뜯어 먹히고 결국은 시간이 승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예요.


그래서 정리해봅시다. 있음이란 의미 없어요. 너만 있는 게 아니고 나도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말이 안 되고. 알 수 없는 일이 발생이 돼요. 내가 원치도 않는. 그걸 첫째 시간이 사건이라 했는데 사건의 예로 날파리가 온다는 걸 예상도 못했고 갑자기 잠재적인 내 행동이 나온다는 것은 우연한 사건 속에서 날파리와 내가 만들어낸 우연한 사건에 휘말린 거예요. 그래서 중요한 건 신앙생활은 뭐냐? 그 사건이 뭐냐? 그 원천을 증거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없는데서 있다는 자체는 아무 의미 없고 지금도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일을 만들어내시는 행위가 더 중요한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의 행위가 멈출 때가 있어요. 있음은 없음과 대비되지만 하나님의 행동은 행동하지 않음과 대비가 되죠. 언제 행동하지 않는가? 우리 몸이 죽을 때 고생 좀 했다. 편히 쉬라고 하지요. 편히 쉰다는 의미가 주께서 편히 쉬게 하는 거예요. 주님의 자리에 동참해서 같이 쉬는 거예요.


소급해서 이야기하게 되면 그전에 주께서 구원했었다는 것, 우리 자체가 정답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동안 부지런히 우연한 사건들로 하여금 이 지경으로 몰아세운 겁니다. ‘지경’이라 하면 의미가 부정적으로 들리잖아요. 그런데 어느 인간도 자기 자신에 대해 만족하는 사람 없거든요. “주여, 왜 자꾸 이 지경으로 몰아세웁니까?” 할 때 그 이 지경. 그렇게 물으세요. “주여, 도대체 왜 나는 저 사람처럼 되지 않고 이 지경으로 돼야 됩니까?” 그러면 내가 있다는 고집은 날아가요. 있는 건 아무 의미 없어요. 어차피 쥐새끼가 와서 다 뜯어먹을 테니까. 주께서는 도대체 어디에 근거해서 나를 이 지경으로 몰아세웁니까? 할 때 창세기 내용대로 사건에 휘말리게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창세기 2장에 남자와 여자가 나오잖아요. 아직도 과학자들과 생물학자, 철학자들은 해답이 없어요. 왜 사람은 남자, 여자로 구분되는가? 똑같이 남자 되든지, 똑같이 여자 되든지, 남자, 여자 자체 구분을 없애버리든지, 한 인간 속에 남자, 여자 다 있든지, 안 그러면 무성 생식하는 아메바처럼 하든지. 왜 여자 따로 남자 따로 만들었는지를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그렇게 이 지경이 된 것을 누가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해답이 없습니다. 그것은 모든 과학과 철학은 내가 여기 있는 있음으로 출발하기 때문에 있음의 배후를 몰라서 그래요.


그래서 하이데거는 내가 있다는 존재자는 해답이 아니고 존재자로 하여금 존재자 되게 한 그 존재를 찾아가는 것이 진리라고 했단 말이지요. 그것은 존재가 존재자 되게 할 때 이 존재는 어떻게 연결되느냐 하면, ①시간이 주어지면서 존재자가 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존재자 된 것을 감사하자. 이것이 초기라면 후기에서는, 이걸 매개라 해요. 용어도 어려워. 또는 중재, 중매, 매개물, 성경에서 말하는 중보자, 화학에서 말하는 촉매. 자기는 변하지 않고 남을 결합시키는 중간매질, 이런 것을 시간으로 봤는데 나중에 후기에서는 ②시간이 나를 존재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존재자를 지워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하이데거는 글을 쓸 때 존재를 그냥 쓰지 않고 가위표를 합니다. 아예 자기가 만들었어. 적당한 단어가 없어서. 없애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물리학에서 물질이 그냥 에너지 나오는 것은 아니고 쪼개지면서 퍼지거든요. 인간이 존재인 줄 알았더니만 주께서 유발시킨 사건덩어리였습니다. 우리가 죽어가면서 사건의 원천인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도록 완전히 산산조각 내는 방식으로 여기에 도입되는 것이 시간인 거예요.


그 시간을 창세기 1장에서부터 하나님은 물질을 창조한 것이 아니고 결국은 시간을 창조한 거예요. 왜냐하면 첫째 날, 둘째 날 하는 식으로 규격을 지어놨어요. 주부들이 빨래를 서랍에 넣을 마구잡이로 넣지 않잖아요. 양말 넣는 곳, 손수건 넣는 곳, 돌돌 말아서 넥타이 넣는 곳, 와이셔츠 따로 넣고. 우리 집이 그렇게 한다는 것이 아니고 살림 잘하는 집을 보니까 구분돼있어요.


첫째 날 서랍에는 빛, 두 번째 날 바다, 네 번째는 해와 달 이렇게 넣는 것은 시간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 낮과 밤, 밤과 낮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는 겁니다. 그리고 최종적인 시간은 하나님 시간, 거룩한 안식일인데 안식일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자기가 내놓은 숙제를 스스로 안식케 할 날이 올 것이란 겁니다. 그래서 시간이란 그 자체로 완성이 아니고 시간의 완성의 날이 올 것이라는 관점에서 미리 당겨서 줬기 때문에 시간의 완성,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님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을 시간 형식으로 미리 깔아놓은 겁니다.


시간을 믿으면 안 돼요. 일곱째 날 주께서 창조한 걸 믿으면 구원받습니까? 성경에 그렇게 돼있어요? 네가 천지를 창조한 걸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그러면 유대인들 구원 다 받아요.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 돼요. 예수님만 존재입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든 것은 예수님이 유발시킨 사건에 불과합니다. 사건은 월남치마가 펄럭이면서 원 주인공을 찾아가는 것처럼 사건들은 집결되어서 모든 만물이 주를 위하여 주로 말미암아 주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이미 깔아놓은 할당되고 배당된 자기 자리에요.


그걸 제가, “주여, 나를 왜 이 지경으로 만들어놨습니까?” 우리는 불만스럽지요. 내가 엮여있다는 것을 무시하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이 내가 여기 있다는 그 점을 무시해요. 무시하려면 왜 만들어놨는지. 무시할 것 같으면 만들지나 말지. 그걸 욥이 이야기해요. 이렇게 힘들게 할 것 같으면 저를 왜 만드셨습니까? 차라리 사산되게 만들지. 임신하더라도 출산되지 못하게 만들지. 뭐 때문에 저를 이렇게 만들어놨습니까? 욥이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최초로 존재에서 사건으로 넘어서려는 몸부림이에요.


예수님이 죽었을 때 우리는 이순신 장군이 죽은 것과 통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이라는 존재가 죽었구나. 사도 바울은 그렇게 보지 않고 예수님의 존재에서 비로소 본격적으로 십자가 사건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니 이제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남는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나라는 존재는 주님의 존재가 죽었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내가 사는 것은 예수님의 존재가 예수님의 사건화 된 나의 존재가 새롭게 발생된다고 본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새롭게 발생 되는 거예요.


그럴 때 비로소 악마, 주의 원수가 보이는 시점이 그 시점입니다. 그동안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내 돈 사기 치고 도망한 놈, 교회에서 나를 뒤에서 험담하던 인간들, 그런 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도했었는데 이제는 그 기도 자체가 전부 나 있음에서 출발한, 나 자신이 주님과 관련 없는 마귀의 자식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먼저 존재하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 사건을 내가 만들어요. 기도할 내용을 내가 채우는 거예요. 이것 주옵소서, 저것 주옵소서.


마태복음 6장에서 주께서 그런 기도하지 말라.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이미 아시니까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기도하지 말라고 한 거예요. 그런 조로 강의를 끝내면 묻는 사람이 있어요. “목사님, 어떻게 기도합니까?” 방금 강의시간에 그런 기도하지 말라 했는데 또 여기 있는 나를 어떻게 책임져야 하는지 하고 나오는 거예요. 스피노자가 내 인생은 내가 만든다고 했잖아요. 그 버릇이 그대로 남아있어요. 내가 내 기도하지 미쳤다고 남의 기도합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거든요. 그러면 자기를 위해 기도하지 말라 하니까 어떻게 할 겁니까?


다시 이야기합니다. 여기에 대한 간단하게 기억하세요. 창세기의 내용대로 여러분에게 찾아갈 겁니다. 찾아가는 서비스를 해드립니다. 이 땅에서 나오는 사건은 성경에 예수님이 계심에서 나오는 사건과 교체시켜 줄 겁니다. 그 사건 중에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단 말이죠. 남자, 여자를 풀 때 그냥 남자, 여자로 보지 마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봐야 돼요. 왜냐하면 남자가 된 게 아니고 나는 남자라는 사건이다. 이렇게 설명해야 되거든요. 당신은 여자 되는 사건에 휘말려있습니다. 이렇게 설명해야 돼요. 그래야 진짜 이 사건을 주신 분이 누구시냐는 질문이 나오도록 살아가야 되니까. 여러분 어렵지 않지요. 우리의 몸은 내 존재밖에 모르는 몸이지만 사실은 이게 정답이에요.


여자에게 사랑이란 혼자 두지 말라는 거예요. 남자는 사랑을 몰라요. 여자가 사랑을 이야기할 때 비로소 뒤늦게 눈치 채는데 그건 때가 늦었어요. 여자 입에서 당신은 날 혼자 두지 마세요. 날 혼자 두지 않는 게 사랑입니다. 할 때 뒤늦게 와서 그래 같이 있을게. 할 때는 이미 늦었어요. 왜냐하면 나를 혼자 두지 마세요라고 발설하게 만든 그 상태에 들어가 버리면 이미 사랑은 깨진 거예요. 왜냐하면 그 발언을 여자 쪽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성경에 그렇게 어렵게 돼있어요.


다이빙대의 특징은 앞으로 디딤돌이 돌출돼있다는 겁니다. 여자가 결혼을 해서 사랑을 느끼게 되면 자기 자리는 생각지도 않아요. 남자의 연장된 자리가 곧 자기의 고유의 자리가 되는 겁니다. 지금 창세기 2장 이야기하는 거예요. 남자가 자기 자리를 내어줄 때 그 자리가 여자의 자리인데 남자가 떠나면 이건 무너지는 거예요. 그럼 날 혼자 두지 말란 것은 내가 당신의 곁에 있다는 걸 늘 알게 해달라는 이야기에요. 나는 당신의 여자인 것을 당신이 확인시켜달라는 거예요. 이 소리를 듣고 뒤늦게 네 곁에 있어줄게 하는 것은 삼식이밖에 안 되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나에게 남자가 필요합니다.” 돼버리면 이 디딤돌에서 나갔기 때문에 이 밑장은 남자가 만든 게 아니고 여자 본인이 아쉬워서 만든 자리가 남자가 와버리면 이 자리를 내가 원래 원했던 자리가 아니에요. 그럼 여자가 원하는 것은 뭐냐?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줄게.” 이것은 여자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 남자에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당신이 마련해줘.” 그러니까 남자는 미치는 거예요. “말을 해. 시키는 대로 다 해줄 테니까.” 여자는 “그걸 꼭 말로 해야 되느냐?” 말로 해버리면 나의 영역이 되기 때문에 그것이 이뤄졌더라도 할지라도 여자가 만약에 어떤 빈자리를 만들어서 남자가 그 빈자리에 오더라도 그 밑바닥은 여자 쪽에서 내민 남자 없는 입장에서 만든 자리기 때문에 남자는 귀찮은 거예요. 이 남자는 나의 남자지 나는 그 남자의 여자는 아닌 거예요. 말도 어려워^^


그래서 라캉이나 프로이드는 남자, 여자를 하면서 남자는 있는데서 정리하고 있는데서 추려서 진짜 보석을 있는데서 추려내지만 여자는 항상 없는데서 출몰하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여자는 항상 자기 존재를 지워버리고 내가 없는 자리에서 새로운 여자가 되기를 원할 때 자기의 뜻에 부응해주는 남자이기를 원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비현실적이기는 하지만 이런 겁니다. 여자 혼자 한국에 살기가 너무 지루한데 추운데 따뜻한 태국에 살고 싶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남자가 갑자기 태국으로 발령 났다. 가자. 태국에 살다보니까 너무 후지고 이야기할 사람도 없고 미국 가서 살아볼까? 남자가 마침 미국으로 발령 나서 또 가는 거예요. 나의 미래를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누가 내 미래를 장만해줄 때 비로소 그것이 바로 나의 남자가 되는 거예요.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럼 그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해서 남편이라는 어설픈 예수를 자꾸 눈앞에 쓸데없이 왔다갔다하지요. 방금 이 이야기가 로마서 7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여자는 독립적이지 않아요. 고립적이지 않고. 로마서 7장 2절에 보면,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이게 현대 젊은 여자들에게 상당히 보수적으로 느껴지지 않습니까. 특히 기분 나쁜 단어가 남편 생전에는 매인바 됐다고 할 때 남자가 생각할 때 여자가 얼마나 부자연스러울까 하는데 실제로 여자는 그렇지 않아요. 누가 나를 확 잡아줬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누가 일방적으로 내가 어떻게 살 것이라고 미처 챙기지 못한 상태에서 남편이 와서 이것이 영생이 자리라고 잡아주는 그런 남편이기를 원하는 겁니다.


미녀와 야수 같은 그런 결혼을 할 때 남편이 폭력을 휘두를 때 우리 같으면 당장 이혼하지 하는데 여자는 매 맞고 횡포를 당해도 이미 그 남자의 여자기 때문에 다른 자리가 없어요. 그냥 참을 때까지 참아보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여자라는 신부라는 사건에 휘말리게 하신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이 여인은 바로 교회를 말하는 거예요. 그리고 여인은 누가 휘어잡을 줄 몰랐는데 안식일이라는 시간으로 지연되면서 결국 안식일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이 나타나면 그분이 오른편으로 확 잡아줄 때 우리는 그분의 신부가 되는 겁니다.


결국 내가 왜 남자고, 왜 여자 되고 이 지경이 됐는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살기 위해서 그리스도라는 유일한 존재를 보여주기 위한 사건에 휘말린 거예요. 그것은 하나님의 행하심입니다. 그러면 남자와 여자는 언제까지 되느냐? 죽으면 끝입니다. 여자가 나이 들면 여성 호르몬이 감소되고 반대로 남성 호르몬이 증가되면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도 안 되고 함부로 방귀 막 뀌고. 이미 결혼하면 남자고 여자고 없어요. 그때는 천사와 같아서 더 이상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행위는 끝나버립니다.


이제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신앙생활은 우리가 하는 게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오직 예수님만 하실 수 있고 우리는 그 혜택과 효과만 누릴 뿐이에요. 남이 신앙생활하고 우리는 덩달아 신앙생활 한 셈이 되게 만드는 그 관련성,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그걸 기독교 이천 년은 뭐로 받았습니까? 당신 거기에 있지요? 당신이 있으니까 책임지시오. 성경에 보세요. 믿으라 했잖아요. 믿어야지. 맨날 믿으라 하니까 오후 2시면 믿고, 오후 3시 되면 안 믿고, 오후 4시면 믿고, 오후 5시 되면 안 믿고, 치매 걸리면 안 믿고. 도대체 정신을 차릴 수 없어. 스스로 자기 꾐에 빠지는 거예요. 나는 있다. 내가 책임져야지. 맨날 자기가 책임지는 식으로 이기적인 경향으로 교회에 오는 거예요. 그걸 좋다고 목사는 거기서 돈 빼먹고. 보이스피싱처럼.


교인들 헌금으로 퇴직금으로 등쳐먹어도 교인들은 얼마나 순진한지. “주여, 주께서 저 목사를 벌하기를 원합니다.” 누구 좋으라고? 내 돈이었거든요. 그게 또 자기 존재. 내가 쓸 것 안 쓰면서 교회에 헌금했으니까. 그 돈은 장소만 이동했을 뿐이지 그 돈은 자기 돈이지. 그 돈은 내 존재에서 만든 나의 사건이지 주님의 사건이 아닌 거예요. 자기밖에 모르니까 일곱 귀신이 와서 등쳐먹어도 맨날 하는 소리가, “신이시여, 벌해주소서.”


신은 벌하지 않아요. 하나님이 바보거든요. 신이 어느 정도 바보냐 하면, 눈 감기고 뺨 때릴 때 누가 때렸는지 알아맞히면 당신 메시아로 인정해줄게. 조롱을 당하고 놀림을 당한 거예요. 장애 노인이 동네에 가다보면 애들이 놀리고 돌 던지고 하잖아요. 그처럼 주님의 덩어리는 돌에 맞는 덩어리고 연약해도 너무 연약해. 도살할 양 같이. 이놈이 차서 멍들고 저놈이 차서 멍들고. 꼭 거지 나사로처럼 개가 와서 핥아도 거기에 대항하지 못하고. 우리 하나님도 이 땅에서 그렇게 당했는데 누구한테 도움을 원해요. 주님도 그렇게 당했는데.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언제냐 하면, 내가 주님을 조롱할 수 없는 자리에서 불러야 주의 이름이에요. 주의 이름은 나의 이름이 삭제된 그 순간에만 부를 수 있는 게 주의 이름이에요. 내가 이름이 있는 이상은 절대로 주의 이름은 주의 이름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왜? 나의 이름을 위한 똘마니에 불과하니까.


내가 더 이상 내 이름을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이상 내 이름으로 유지할 수 없는 인생을 살 때 나의 존재함, 나의 있음이 붕괴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허물어질 때 주의 존재 , 주의 이름을 찾습니다. 사도행전 16장 33절. 감옥에 지진이 일어나서 사도 바울과 실라가 탈옥한 줄 알고 간수장이 낙담하고 있을 때 보니까 다른 사람들은 도망쳤는데 그 둘은 도망 안 갔을 때 간수장이 하는 말이, “선생들이여, 내가 어찌하면 구원을 얻겠습니까?” “주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면 너와 네 집을 구원을 얻으리라.”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냥 내맡기는 거예요.


그동안 성경에서 풀리지 않는 것 중에서 하나가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 것이 개인적인 구원욕구인지, 아니면 그것이 하나님이 일으킨 사건인지 분명치 않아요. 개인욕심으로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데 그건 가짜란 말이죠. 그것 말고 진실로 주의 이름을 부를 때 그걸 제삼자가 어떻게 구분해야 되는가? 예수님 이용해서 천당 가겠다는 그런 더러운 욕심인지 아니면 그야말로 구원되기 위한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의 일부인지.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뭉개진 그것을 그대로 내비치는 겁니다. “주여, 이 지경은 주께서 만드신 것 맞잖아요.” 비로소 고백하는 거예요. 니 이름은? 내 이름은 없어졌습니다. 그동안 내가 주인공 되던 그런 시절은 끝났습니다. 이 지경 됐는데 내가 주인공 된들 감당도 안 되는데 내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어요. 그냥 맡기옵나이다.


그래서 부자도 천국에 갈 수 있는 거예요. 부자가 천국 가는 게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힘든데 바늘구멍을 통과할 수 있는 방법은 부자 된 자체를 나의 존재로 보지 않고 주께서 일으킨 부자 된 사건에 휘말렸다고 보는 겁니다. 좀 그런 일이 있었으면 좋겠어. 헌금 좀 하게. 우리는 맨날 부자 안 되는 사건에 휘말려서. 교회란 존재도 별로 가치도 없고.


성경의 모든 해석은 이렇게 봅시다. 우선 내가 여기 있고 이 존재를 키우기 위해서 말씀을 도입하는 나를 실선으로 간주하는 이것을 먼저 언급하세요. 두 번째 거기다가 그것 때문에 조롱당하는 예수님을 배치하는 겁니다. 나는 이렇게 잘 되는데 예수님은 왜 그렇게 처참하게 망가졌습니까?


부자 청년이 실수한 거예요. 예수님 만나서 영생 얻으려 왔으면 모든 걸 팔고 나를 따르라 할 때 모든 걸 팔고 주님 따라 가면 되는데 부자가 하는 말이, 내가 돈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되돌아가버렸지요. 그 되돌아간 자리가 어떤 자리입니까? 나는 부자로 존재한다. 그럼 처음부터 영생 얻으려고 올 때부터 뭘 포기 못한 거예요? 나는 부자를 가지고 예수님을 만난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존재를 사건으로 바꾸라고 이야기하니까 그래도 나는 부자인 게 더 좋아. 하고 본래의 자리로 가버린 거예요. 그런데 그 있음은 시간이 쥐새끼처럼 다 뜯어먹어요.


교재 3페이지에 두 번째 제목이 [예정된 자유]지요. 자유가 무슨 예정된 자유가 무슨 자유냐고 생각하는데 4페이지를 봅시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예정된 자유이어야 한다.] 그 다음에 줄 그어놓으세요. [이것은 우리가 진정 자유롭다는 것을 알려면 우리 자신이 그 내용을 채워서는 아니 된다는 말이다.]


성경내용으로 채워지고 성경내용이 주도가 돼야지 자유롭고 싶은 그 상황을 나라는 존재에서 만들어내면 이것은 시간에 시달리게 돼있어. 시간에 쫓기게 돼있고 죽음에 쫓기게 돼있어. 시간의 끝은 나의 죽음의 아니고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성경 창세기부터 이미 시간이라는 서랍장에 모든 사물을 담았기 때문에 시간과 더불어 사라지는 순간에 창조된 사물도 같이 사라지는 거예요.


그걸 아담이 몰랐었지요.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죽는다는 그 개념은 시간이라는 서랍장에 담긴 죽음이거든요. 그런데 아담은 생각하기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했는데 따먹어도 안 죽었잖아요. 괜히 쫄았네. 그런데 시간이 흘러가면서 죽음은 사건화 된 죽음인데 진짜 죽음은 예수님 죽음을 경유해야 그 죽음의 실상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실상으로 데려갈 때 그냥 데려가는 것이 아니고 여기 새로운 역사의 시간의 내용이 꽉꽉 채워진 채 들어가게 돼요. 그게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다툼의 장, 그게 시간이 기관차가 되어서 실어 날라요.


뱀의 후손이라면 뱀의 후손을 때려잡은 사람은 지리산의 땅꾼밖에 더 있습니까? 그게 메시아입니까? 그 당시에는 그래요. 그런데 시간이라는 것이 어떤 목적을 향하여 달리거든요. 달리다보면 시간을 통해서 그 서랍장에 있던 하나님의 창조의 개념들의 뭔가 둘로 나눠지는 실체를 보여줍니다. 뱀의 후손 쪽이냐, 여자의 후손 쪽인지 보여주는 거예요. 주일 낮에 설교했잖아요. 이스라엘은 꼬리가 두 개 있는데 진짜 몸통과 관련된 꼬리는 상처받은 역사고, 상처 없는 역사는 이스라엘 이름으로 앞장세우는 악마의 본부로 통하는 악마가 몸통이 된 역사는 상처가 없는 역사에요. 승리자의 역사입니다. 많은 사람이 찾는 길은 멸망의 길이고, 찾는 사람이 없는 길은 생명의 길입니다.


모든 성경은 창세기에서 정립이 돼야 돼요. 존재에서 사건으로 바꿔져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백날 해석해봐야 나의 존재에서 출발해서 결국은 내 존재 잘 되는 쪽으로 되돌아오게 되면 십자가는 빨리 치워버려요. 그리고 성화 단계에 들어가요. 중요한 것은 나의 착함은 나한테 달려있으니까. 성경 몇 장 읽어야 되고 기도를 얼마 해야 되고. 하지만 고맙게도 시간은, 이런 분들 많이 있잖아요. 나중에 퇴직해서 성경공부 잘 할게요. 퇴직하게 되면 눈이고 뭐고 안 들리고 잠이 와요. 젊을 때라야 뭘 좀 알지. 이제는 머리가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시간이 쥐새끼라서 다 뜯어먹어요. 아는 것도 다 뜯기고. 건강할 때 돈 벌고 있을 때는 몸 망가지고.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아까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라는 것은 결국 시간이 남아 있는 한 그 몸의 완성이 될 수 없다는 거예요. 진짜 여자와 남자가 한 몸이라 할 때 한 몸의 완성은 교회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한 몸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창세기는 뭐냐? 모형이고 그림자에 불과한 겁니다. 그림자라고 무의미한 것이 아니고 그림자는 실체와 반드시 연결돼있는 거지요. 연결되어있을 때 창세기 3장 15절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으로 연결시킵니다.


그럼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을 한 박스에 담아봅시다. 이걸 언약이라 합니다. 언약 속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 창세기 3장 15절의 약속이 들어있어요. 여기에 보면,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여기 원수가 두 개가 나오지요. 그러면 뱀의 후손은 누구고, 여자의 후손은 누구냐고 묻고 싶지요. “목사님, 저 여자의 후손이에요, 뱀의 후손이에요?” 자꾸 묻고 싶지요. 그걸 물을 자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존재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걸 왜 묻는데.


4페이지 위에서 다섯 번째 줄 봅시다. 만약에 내용의 본질을 우리가 채운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마치 고속도로를 주행 중인 두 대의 자동차가 시비가 붙어 갈 데까지 가보자고 고집을 피웠더니 결국 둘 다 본인들이 가려고 했던 목적지가 아닌 엉뚱한 데로 차를 몰고 간 경우와 같다.]


이건 뭐냐 하면, 나는 예정돼있는데 너는 예정돼있지 않기 때문에 지옥 간다고 할 때 그런 다툼에 과연 예정론이 개입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개입될 수 없지요. 그것은 차 두 대가 잘났다고 하다가 엉뚱한데 가는 거예요. 둘 다 엉뚱한데 가요. 따라서 나라는 존재와 다른 존재를 비교해서는 안 되고 그러한 비교 자체를 완전히 무산시키기 위해서 언약이 투입됩니다. 언약의 박스를 뜯어보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들어있는 거예요.


그러면 누가 지옥 가고 누가 천국 가느냐 하는 결정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여자의 후손에서 이 원수야 하면서 보내는 거예요. 나라는 존재는 여자의 후손이 될 수 없어요. 왜냐하면 나는 존재가 안 되기 때문에. 다른 데서 온 사건이기 때문에 우리는 존재를 경유해야 돼요. 그러니까 창세기 3장 15절의 정답은 이 해석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유해야 되는 겁니다.


기다리세요. 여자의 후손이 누구인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 되는 겁니다. 그 기다렸던 사람이 아브라함이에요. 아브라함이 아들 바쳤다고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큰아들 바쳤다고 구원되는 것 아닙니다. 아이들 때리지 마세요. 때린다고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저지른 일로 날 구원하는 게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기다려야 된다니까요. 우리는 거기에 휘말린 사건이기 때문에.


기다리게 되면 구원받았다는 소식이 들리나? 안 들립니다. 그러면 기다릴 필요 없지 않는가. 내 존재가 구원받는 게 우선인데 기다리는 이유도 내 존재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서 죽겠단 말이지요. 합격했을까, 불합격했을까? 고민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구원은 항상 예상 밖으로 오는 거예요.


여러분이 수능을 쳤거나 입사시험을 치게 되면 우리는 시나리오를 짜요. 집에 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와서 축하드립니다. 이번에 삼성에 입사했습니다. 우리는 합격통지 전에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화 기다리고 있는데 전화가 왔는데 친구가, “너, 합격했데.” 내가 원하는 그 코스가 아니잖아. 우리는 좋은 소식도 내가 원하는 코스로 와야 좋아해요. 그런데 꼭 이렇게 우발적으로 돌발적으로 예상도 못한 옆구리를 치고 뭔가 소식이 왔을 때 뒷맛이 없어요.


그것은 우리 존재를 잊고 어떤 사건에 휘말리게 하는 우리가 하나의 수동적인 존재로서 합격을 가진 게 아니고 합격에 휘말렸기 때문에 할 일이 많아요. 이제는 삼성에 합격했기 때문에 할 일이 많아요. 원룸도 얻어줘야 되고 합격했기 일어난 파생된 새로운 골칫거리가 기다리고 있어요. 왜? 시간이니까. 아직 천국이 아니니까. 하나님이 내 아들 합격시킨 사건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휘말리는데 언제까지? 죽을 때까지. 죽을 때는 언제인데? 그건 몰라. 그것은 하나님의 행동이 끝날 때에요.


하나님이 들풀을 키우는데 언제까지 키우느냐 하면, 불쏘시개 할 때까지만 키워요. 불속에 들어간 들풀을 끄집어내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참새를 먹이시는데 언제까지 키우시느냐? 굶어죽을 때까지 먹이시는 거예요. 참새를 키움으로써 하나님이 키우신다는 사건을 보여주시고 들풀을 키움으로 들풀을 친히 키우는 것으로 보이는 것처럼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우리를 지금도 주님께서 키운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건에 휘말려 있습니다. 항상 우리 시나리오대로 소설대로 모든 일이 되질 않습니다.


첫째 시간에 한 것은 우리가 성경 속에서 이미 해답으로 나왔을 때는 존재로 나온 것이 아니라 사건으로 나오면서 그동안 철딱서니 없이 나, 나, 나, 나 위주, 내 존재, 남은 죽든 로말든 나만 잘 돼야 된다는 철없음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보게 하는 거예요. 근심하며 돌아가는 부자 청년을 보면서 저 모습이 딱 내 모습이었다. 난 그걸 정답인 줄 알았는데 주의 사건에 휘말린 이것이 정답이지, 저것은 오답이었고 마귀가 나를 엉망진창으로 완전히 망쳐버린 존재가 나 위주로 기도하고 날 위해서 살고. 이게 구약에 우상숭배거든요. 나 때문에 주께서 있다는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목사한테 속아 넘어가고 교회에 속아 넘어갔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두 번째 시간에는 있다, 없다가 아니라 계속 하나님께서 살아있을 동안에 일을 시켰기 때문에 지금 살아있다. 그냥 살아있는 법은 없어요. 지금 수련회 참석하고 계시거든요. 아마 참석 못할 일이 있을 거예요. 직장 때문에. 그러면 그 일을 하면서 주께서 못하게 하셨다고 생각하면 되는 겁니다. 갈 수도 있는데 일부러 안 간다. 이러면 존재가 돼버려요. 가고 싶었는데 못 가게 만드시는데. 서울에 있는 목사님은 몇 년째 못 가게 하셔요. 인천에 있는 목사님은 몇 년째 못 오게 하시는 거예요. 지금 좋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세 번째는 그 실 내용은 내가 내 존재에서 채우지 말고 이미 성경에서 일방적으로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2014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3강.hwp (32.0K), Down: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