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2강 (강의:이근호 목사) 첫째 시간에서 하나의 테마로 시작된 것이 뭐냐 하면, 성경책 자체가 사건화 돼있고 우리는 그걸 성경 보면서 존재로 인식했다는 거죠.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할 때 나라는 존재가 선악과나무 열매라는 존재를 내 것으로 따먹었다. 그게 뭐가 문제냐고 할 때 자기를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걸 따먹으면 선악을 알게 되는 지식이 확보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따먹는 순간 우리가 생각한 존재가 아니고 그 자체가 치밀하게 요한계시록까지 이어지는 함축된 사건덩어리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고 할 때 저들은 백성공주처럼 숨 못 쉬고 그런 줄 알았는데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가 어디까지 이어지느냐 하면, 유황불까지 지옥 불까지 계속해서 확산되는 겁니다. 네가 진짜 죽음이라는 걸 맛을 봐.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아담은 그걸 따먹는 날에는 본인이 죽는다고 생각했는데 자기 존재를 타고 넘어서서 자기에게 따먹으라고 지시한 사탄이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유황불에 들어가요.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10절) 결국은 선악과라는 것이 단지 인간을 상대로 한 나무가 아니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마리아가 아기를 임신했다. 우리가 보기에는 마리아라는 존재가 예수님이라는 존재를 임신한 걸로 돼요. 요한계시록 12장에서는 마귀가 그 아기를 삼키려고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 밝혀집니다. 그러니까 마리가 임신한 것이 산부인과에서 아기 낫는 정도가 아니고 온 우주가 여기에 관련돼있다는 겁니다. 예를 이런 겁니다. 어떤 사건화 있는데 예수님이 사건화 되어서 큰 월남 주름치마를 입었다고 생각합시다. 치마가 넓어요. 온 우주까지 주름치마에 포함이 돼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치마를 펄럭이니까 A라는 지점, B라는 지점, C라는 지점, 전부 다 반응을 나타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는 이러한 하나님 됨을 포기하시고 죽기까지 복종을 했거든요. 이렇게 되면 자리는 비는 자리가 되고 여기에 하나의 낮아짐, 십자가에 죽는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일으킨 이분을 아버지께서 들어서 이 자리에 올려 세우니까 주의 자리가 돼요. 주의 자리가 되면서 모든 펄럭이는 존재들은 손에 손잡고 예수님이 주라고 되는 사건에 본의 아니게 휘말려가는 거예요. 빌립보서 2장 9~11절.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월남치마에 휘말려서 사건화 됨으로써 주가 주되심을 드러나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지옥 가는 사람도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느냐는 그 문제는 시편에 나옵니다. 그들은 지옥에서도 주님은 주님 맞는다고 알게 된다는 거예요. 요한복음 5장에 보면, 그때는 산 자나 죽은 자나 전부 다시 부활되어서 주님 앞에 호출 됩니다. 생전에 예수 이름 듣지도 못한 사람도 호출 당하게 돼요. 거기서 분류작업이 일어나서 저주로, 축복된 나라로 가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먼저 당겨서 알았다는 사실이 다행스럽고, 이걸 모른다는 것은 결국은 가봤자 주님의 심판대 앞에 오게 되기 때문에 주님의 펄럭이는 월남치마 속에 하나의 지점을 점유하고 있는 셈이 됩니다. 그래서 이 사건이 이웃과 이웃 사건에서 서로 다투고 주차문제로 싸우다가도 성령이 임해버리면 둘 다 서로를 쳐다보다가도 A라는 사람도 예수님을 경유하면서 이 사람을 보게 되고 주차문제로 시비한 옆집 사람도 예수님을 경유하면서 A를 바라보지요. 그러면 둘 사이에는 예수님이 개입되면서, “당신이나 나나 다 자기밖에 모르는 죄인인 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알게 하셨습니다.” “나도 동의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형제군요. 반갑습니다.” “반가운 것을 반가운 것이고 내일부터는 차대지 마세요. 내가 먼저 점유했어. 어쨌든 간에 차 빼세요.” “왜요?”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누가 못 뺍니다.” 이제는 누가 잘 났나 하는 싸움이에요. 누가 더 못 났는지 하는 싸움이 벌어지는 거예요. 이런 사건으로 모든 성경해석이 가능해요.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찾아왔지요. 아비멜렉은 아브라함 앞에서 자기가 의롭다고 우기고 싶고, 아브라함은 생명 부지하기 위해서 왔는데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이 왔다고 생각했거든요. 사실은 펄럭이는 월남치마 밑에서 예수님을 경유해서 복의 근원이 와버린 거예요. 아브라함이 등장한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을 복의 원천으로 간주하셨던 하나님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아비멜렉 집안의 여자들이 임신을 못해요. 그럴 때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나무랍니다. “왜 당신 하나님의 종이면서도 종 아닌 척했어요?” 이건 사람을 높이는 말인지 낮추는 말인지 구분이 안 되지요. 당신이 하나님의 종이라면 진작 종이라고 하지 그 입을 다물어서 우리 집안 여자들이 임신을 못했단 말이죠. 그래서 아비멜렉이 때를 씁니다. “당신이 우리 집안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기도해주니까 임신이 되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그 자체가 본인한테 부담이 되는 거예요. 뭘 만지면 금으로 다 변할 때 보통 문제가 아니란 말이지요.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은데 복의 근원이라는 감투를 쓰게 되니까 이 사건에 휘말리니까 본인 나름대로 존재를 주장할 수 없게 돼버려요. 이미 아브라함은 구원받았어요. 왜냐하면 이건 구원받고 안 받고 할 것 없이 구원이 쳐들어와서 자기를 폭격해서 엎어지고 자빠지고 해서 아예 아브람은 삭제해버리고 아브라함의 인생으로 전환을 시켜놓으니까 자기가 그 사건에 휘말려 가버렸으니까 일이 벌어지면 괜히 본인이 미안한 거예요. 그냥 “안녕하셨어요?” 하고 쓰다듬었는데 멍이 들어 있단 말이죠. 얼마나 미안하겠어요. “본의 아니게 죄송합니다.” 하고 엎드리니까 광풍이 불어서 5미터 떨어져버리고. 어떻게 본인도 그렇게 안 하려야 안 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듯이 골리앗과 다윗의 전쟁 현장에 다윗은 없다는 말을 했는데 다윗은 없었어요. 그걸 이 시간에 설명합니다. 첫째 시간에 했는데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해야 되겠지요. 성경책이 있는데 이건 정답이에요. 정답이 나올 때는 존재가 아니고 사건화 되어서 나와요. 사건은 존재와 존재의 연속으로 설명이 안 됩니다. 존재덩어리 해봐야 나눠지는 그 사이를 또 설명해야 되기 때문에 이건 설명이 안 돼요. A에서 B로 변할 때 우리는 A가 여기 있는데 B로 변했다는 것만 알지 어떻게 변했는지 생성 자체에 대해서 알 길이 없어요. 모든 사건들이 다 그래요.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도 마찬가지고. 그 자체가 사건이기 때문에 나도 하고 싶은데 방법을 알려달라고 하지만 방법이라는 게 없어요. 그 귀신은 나가기 위해서 그 당시에 찾아온 거예요. 파리를 칠 때 파리가 있어야 칠 것 아닙니까. 내가 치고 싶을 때 파리가 찾아온 것이 아니고 파리가 왔다는 난데없는 돌발사태, 우연한 사태에 직면한 나의 우연한 본능, “나는 파리가 날아와도 참아야 하느니라.” 이게 전혀 안 되고, “이게 뭐야?” 하는 순간 점잖은 내가 왜 그러지. 이걸 존재로 설명해버리면 아무리 착해도 안 돼요. 제가 강의실에 오면서 제가 양심에 예민하거든요. 정말 양심이 고운 사람인데 양심에 어긋난 짓을 했어요. 뭐냐 하면 분명히 문을 ‘미시오’라고 했는데 당겼어요. 세상에 이런 죄가! 왜 법을 어깁니까. 미시오라면 밀어야지. 당겨버렸어요. 제가 너무 가슴 아파서 말을 못해요. 존재는 사건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걸 사건화를 설명할 수 없는데 예수님 자신이 사건이거든요. 우리는 이걸 앞에서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여기서 예수님이 등장함으로 비로소 등장하는 주의 원수가 등장하니까 말 그대로에요. 주님이 있어야 주님의 원수가 있지 그냥 원수는 내 원수지. 내 돈 떼먹고 사기 친 사람은 주의 원수가 아니에요. 원수는 주님이 나타날 때 주님을 공격하는 차원에서 나타나는 게 주의 원수입니다. 주님이 나타나지 않으면 주의 원수가 안 나타나고 나의 원수가 나타나요. 베드로의 원수가 누굽니까? 예수님이잖아요. “주여, 그러시면 안 됩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가 주님의 원수인 줄 몰랐지요. 야곱이 자기가 받은 축복을 자기가 소유화시키고 존재로 지키려고 할 때 누가 야곱의 원수가 됐습니까? 복 주신다는 그 주님이 야곱의 원수가 되잖아요. 그래서 얍복 강가에서 서로 안 지려고 무엇을 위한 싸움인지 무슨 명분인지 모르겠어요. 무조건 안 지려고 하는 거예요. 야곱은, “이것은 내 축복이니 내가 지키겠습니다.” 내 고장, 내 나라 내가 지킨다는 향토예비군도 아니고 자기가 지키겠다는 거예요. 주님이라도 내 것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식으로 한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지키겠다는 그 몸을 쳐버렸어요. 치니까 야곱은 죽은 거예요. 그 죽은 자리에서 하나님으로 일어나지요. 그 이름이 야곱의 이름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이지요. 이스라엘. 그게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나옵니다. 야곱의 머리 위에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듯이 이제는 이스라엘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믿으면 네가 바로 간사한 것이 없는 참 이스라엘 백성이 되는 거예요. 이게 존재로 하는 것은 사건화로 바꾸지 아니하면 성경해석 하나도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건화로 오지만 이 세상에는 아담 당시에는 누가 있습니까? 뱀이 있었지요. 사탄입니다. 아담을 하나의 존재로 간주하는 겁니다. 존재란 말은 쉽게 말해서 ‘있다’는 말이에요. 있다는 말은 누가 쓸 수 있느냐 하면, 이 세상에 있다고 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고, 모든 것은 예수님에게서 있음에서 나온 사건들에 불과한 거예요.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깔아놓은 피조물들이란 말이지요. 피조물은 존재로 있는 피조물은 없어요. 피조물은 반드시 창조주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그런 의도로써 하나님께서 일부러 만든 겁니다. 존재를 인정하고 피조물을 만든 게 아니고 주님이 다 만들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피조물이 있는 거예요. 주체와 객체를 혼동하시면 안 됩니다. 사람들이 입사할 때 회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회사 없으면 나도 없고 회사 있으면 저도 있습니다. 그러다 몇 개월 안 되서 데모하고. 갑자기 회사라는 존재를 인정하고 나는 회사만 있으면 된다는 자기 존재를 사라지게 하는 그런 것에서 갑자기 나란 존재부터 살아야겠다는 것으로 바뀌는 거예요. 존재, 있음은 예수님만 있는 거예요. 그래서 골리앗과의 전쟁에서 만군의 하나님만 계셨고 그 하나님의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사건화 된 피조물로 다윗이 그 현장에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항상 말해야 돼요. 이 전쟁은 나와 골리앗의 전쟁이 아니고 주님과 주님의 원수로서의 골리앗과의 전쟁입니다. 그런데 골리앗도 존재가 아니고 배후에 있는 악마, 하나님의 언약, 모세의 할례언약에 대해서 악마의 대변자로서 휘말린 자가 골리앗인 겁니다. 골리앗은 그걸 모르고 존재와 존재로 보니까 “어떻게 이스라엘은 어른이 없어서 미성년자를 보내서 나와 붙나. 어른들은 양심도 없어.” 그런데 그 전쟁 양식은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오고 오는 모든 구원전쟁에 동원돼요. 사람의 힘이나 능으로 되지 않고 오직 주의 이름으로만 하는 전쟁이에요. 이건 사람의 능이나 말이나 힘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존재를 빼야 되는 겁니다. 여기서 사건화 될 때는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이렇습니다. 존재로 있을 때는 있음과 없음으로 나눠요. 나는 여기 있는데 나처럼 있지 않고 없는 게 무엇일까를 생각할 때 있음과 없음인데 하나님은 행하기와 안 행하기로 나눠요. 행함의 차원이에요. 인간들은 있음과 없음의 차원이 되는 겁니다. 있음과 없음의 차원에서 유명한 것은 하이데거라든지 모든 철학이 여기서 나온 거지요. 특히 과학도 여기서 나와요. 교재 1페이지에 보면, [입자물리학에서 각 입자의 질량은 정지 상태의 질량 더하기 운동의 가속화에 의해 제공되는 여분의 것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정지 상태의 전자의 질량은 0으로, 그것의 질량은 오직 가속화에 의해 발생하는 나머지 것으로만 보태진다(힉스 메커니즘). 이는 곧 자신이 자신의 초과를 만들어냄으로써만 어떤 기만적인 실체를 유발하는 무(無)적인 현상이다.] 물리학 시간 아닙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런 이야기에요. 사람이 가만있으면 존재성이 드러나지 않는데 뭔가 움직일 때는 자기 존재가 밝혀집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런 이야기했는데. 사람이 가만있을 때는 관성의 법칙에 의해서 가만있는데 움직일 때는 가속도가 붙을 때만 그게 움직임이 돼요. 그 가속도를 이 글에서 ‘여분의 것’이라 한다. 그런데 물리학에서는 뭐가 움직였다는 걸 이야기할 수 있는데 누가 너를 움직였는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어요. 만약에 내가 이 종이를 들 때 너 말고 누가 종이를 들게 했느냐고 할 때 답변이 없어요. 종이 내가 들었어. 누가 너로 종이 들라고 했어? 누가 하라고 한 게 아니고 내가 들고 싶어서 들었어. 너에게 종이 들고 싶다는 생각을 누가 들게 했느냐? 자꾸 여분의 것을 이야기하지 아니하면 사람은 죽은 시체가 돼요. 사람이 자기가 시체가 아닌 걸 증명하려면 여분의 운동을 보여줘야 되고 행동으로 움직여야 돼요. 움직이는 건 좋은데 내가 왜 움직이는지는 항상 설명이 없어요. 아무 해답이 없다니까. 그래서 현대양자물리학에서는 저 멀리 있는 별이 너를 움직이게 했다고 설명하는 거예요. 상하이에서 나비가 움직이면 뉴욕에서 폭풍이 일어났어요. 그걸 나비효과. 작은 변화가 큰 변화를 일으킨다고 돼있습니다. 기껏 설명한 게 그건데 누가 그렇게 했느냐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니까요. 그래서 현대 인간들은 해답이 없어요. 아무 해답이 없고 얼마나 활용도가 좋은지만 챙기지 해답 자체는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남는 것이, 누가 나를 태어나게 했는가, 누가 나를 죽게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그들의 결론은 뭐냐? 물리학도 그렇고 철학도 마찬가지고. 있음이란 반드시 없음에 기초로 해서 있음이 있다. 이게 그들이 내린 결론입니다. 말은 맞는 것 같아요. 밝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반드시 어두운 곳이 있어야 이곳은 밝다는 말이 성립이 되잖아요. 항상 하나만 있을 때는 높다, 낮다가 없어요. 의자가 두 개 있을 때 의미가 생깁니다. 혼자 있을 때는 누가 옆에 있다는 것이 성립이 안 되는데 옆에 누가 붙으니까 있다, 없다가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있음이 해답이 없기 때문에 없음을 갖다 붙여서 우리는 없었는데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는 것이 신학의 기초가 되는 겁니다. 이것 마귀가 준 거짓말입니다. 이천년 기독교에 속으신 겁니다. 정확하게 이야기해서 그렇게 속고 싶어 해요. 납득이 되니까. 히브리어 ‘빠라’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이다. 그것 아니거든요. 이미 없다는 것은 무엇을 전제로 합니까? 있는 것이 빠진 상태를 없다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의미 없는 거예요. 말장난에 불과한 거예요. 미장원 옆에 빵집 있다. 빵집은 어디 있느냐? 미장원 옆에 있다. 이건 하나마다에요. 아무 의미 없어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내가 존재를 기정사실화시켜서 거기다 그림자를 깔아놓고 저건 그림자기 때문에 나는 아니고 그림자에 비친 모습이 나다. 그래서 어쩌라고? 시커먼 그림자는 아니고 밝게 있는 나다. 그래서 하나님이 없는데서 있게 했다. 결국은 뭡니까? 오늘 낮에 설교한 건데 다시 해볼게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세상은 신이 만들었다’와 ‘신이 세상을 만들었다’의 차이점은 뭐냐? 세상에는 나도 포함되지요. 나는 신이 만들었다고 했을 때 “이왕 만든 것 제대로 관리해주세요.”라고 다그치고 요구할 권리가 있을 것처럼 생각해요. 나, 하나님이 만들었잖아요. 잘 해서 천국 보내달라고 하지만 신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하면, 신이 주 자리에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을 멸망시키든 지옥에 집어넣든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항변할 권리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똑같은 말 같지만 사실은 반대말이에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래서 신학자들 중에서 주어를 우리부터 있음부터 출발하지 말고 하나님부터 출발하자고 주장하는데 이것도 말이 안 돼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반대개념이에요. 인간은 유한하고 하나님은 무한하다. 이미 자기를 한계 있다고 봤기 때문에 뭔가 자꾸 무한 것을 걸치고 싶은 거예요. 나보다 더 위대한 것, 나보다 더 많이 아는 것, 미래에 대해서 빠삭하게 다 아시는 분, 모든 계획도 홀로 주관하시는 주권을 가지고 계신 분을 내가 주권을 안 갖고 있기 때문에 갖고 있는 분을 따로 상정해서 현재 나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인간적인 자기 폐쇄적인 자폐적인 증세에 불과해요. 정신병 증세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신이란 인간의 한계를 마저 채워주는 보충물이 되는 거예요. 결국 신이 보합물에 불과하기 때문에 주인공이 누굽니까? 신이 만들었다는 내가 주인공이고 신은 나를 절대화시키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고. 이것이 오늘날 우리뿐만 아니고 이미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만든 택한 백성이니까 책임지셔야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솜씨를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기다립니다. 구름 타고 오기를 기다립니다. 할 때 예수님이 하신 기적은, 너희들이 악하고 음란하다는 사실 이것만이 내가 줄 수 있는 기적이다. 그러니까 이런 기적은 주님께서 기적을 베풀어주면 알지만 유라는 존재가 이런 기적을 요청할 일은 없지요. 다시 말해서 유가 무를 찾지만 주님께서는 유 자체가 무기 때문에 기껏해야 무를 찾는 거예요. 사실은 유, 있음 자체가 죄악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자리를 포기하지 않고 존재의 세계에 그들의 시스템에 맞춰서 무의 세계, 주님이 이 자리를 차지해버려요.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뭐라고 합니까? 이단이다. 마귀 들렸다. 그래, 마귀가 신이야. 메시아가 마귀에요. 오늘 돌발적인 발언 막 합니다. 마귀의 특징은 우리를 힘들게 하고 해롭게 하고 그런 거지요. 우리를 저주하고. 나쁜 것은 다 마귀고, 좋은 것은 다 우리가 챙기잖아요. 예수님께서 바로 그러한 마귀의 모습으로 오신 거예요. 메시아를 마귀로 인정하고 마귀를 메시아로 인정하는 그러한 시스템이, 어둠을 빛으로, 빛을 어둠으로 하는 시스템이 이미 악마의 지배에 의해서 가동된 겁니다. 공장이 잘 가동되고 있는 겁니다. 메시아를 기다렸던, 메시아를 환영할 만반의 준비를 돼있던 그들에게 메시아가 살해당했다. 그들은 얼마나 견주어봤겠습니까. 과연 예수님이 메시아 맞는지. 아무리 견주어 봐도 예수님이 메시아 될만한 점은 전혀 발견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주께서 발견 못하도록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아버지에 대해서 아시는 분은 아들밖에 없고 아들에 대해서 알고 있는 분은 아버지밖에 없어요. 그러면 어떤 존재도 예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모르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그때는 하나님께서 존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 행함이 등장합니다.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더라. 이게 존재가 되면 빛은 있었다고 끝나버려요. 그런데 이것이 존재가 아니고 사건에서 행동이 나온다면, 빛은 한 번으로 있는 게 아니고 빛이 있으라는 말씀이 살아있는 이상 계속 살아있는 거예요. 창세기 때 빛이란 것은 해와 달이 없는 어둠이지만 하나님 책에서 나올 때 시대에 따라서 계속 나오게 되면 이제는 어둠이라는 의미가 단지 조명시설이 없는 어둠이 아니라 점점 더 이 세상이 악한 쪽으로 어둠이라는 개념으로 확대가 돼요. 처음에 모세 율법에서 음란이란 간음을 의미하지만 나중에 음란은 우상숭배, 신약성경에 들어가면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음란한 여인이라고 하지요. 야고보서에서. 그걸 요한계시록에서는 음녀, 바로 바벨론, 이 세상의 모든 것들. 로마가 네 번째 짐승인데 그러면 왜 다섯 번째 짐승은 없느냐? 이 세상은 로마의 확산입니다. 현재 유럽에 있는 건물들 보세요. 전부 다 로마네스크에요. 거기서 나온 것이 고딕양식, 그 다음에 바로크, 로코코, 이렇게 나와요. 전부 다 로마에서 나온 겁니다. 로마의 특징은 바로 모든 존재에 대한 극치, 존재의 극단을 추구하던 나라에요. 모든 존재의 힘을 다 규합하는 겁니다. 그 로마가 결국 예수라는 존재를 살해했고 그 뒤에 로마가 있는 이상은 이 작업은 지금도 예수라는 존재에 대해서 예민하게 없애려고 애씁니다. 없애는 방식은 예수님을 잡아 죽이는 것은 사도 바울 당시고, 지금은 예수를 가짜 예수로 계속 바꿔치기하면 돼요. 십자가 없는 예수로 하는 거예요. 앞으로 십자가 있는 가짜 예수가 또 튀어나옵니다. 십자가를 이야기하는, 십자가마을 표명하는 마귀들이 나옵니다. 오직 십자가뿐이라는 마귀가 튀어나오는 거예요. 그것은 시대에 따라서 어떻게 될지는 우리는 모르지요. 어쨌든 중요한 것은 있음이란 반드시 없음을 자기 바탕으로 데려온다는 특징이 있다. 있다는 것은 내가 없었는데 있다. 여기에 신이 개입해서 감사합니다. 하는 식으로 자기 존재를 긍정하는 이것이 바로 나중에 마귀적이 되지요. 그러면 하나님은 여기에 대해서 반복, 무슨 반복? 하나님의 행동의 반복, 끊임없이 반복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해를 만들었습니다. 해가 떴다고 안 지는 것 없지요. 해를 만들어놓으면 어떻게 됩니까? 계속해서 햇빛을 비추지요. 그게 해에서 나왔겠어요? 해를 만든 하나님의 행동입니까? 해를 만드신 하나님의 행동이 나오지요. 십자가도 마찬가지에요. 십자가도 사건화 되게 되면 사도 바울은 십자가 구경도 못했어요. 십자가 색깔도 몰라요. 그랬던 사도가 갈라디아서에서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고 이야기했고 너도 보고 있지라고 이야기했고, 내가 십자가 안에 있다고 이야기했고, 6장 14절에서는 내가 오직 자랑하는 것은 십자가밖에 없다고 했어요. 그 말은 이미 십자가가 자기 내부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겁니다. 일회적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사건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는 거거든요. 처음에는 십자가가 어떻게 생겼어? 이러다가 지금은 내 안에서 십자가는 어떤 사건을 일으켜? 사건으로 설명하는 거예요. 십자가 사건은 나라는 존재를 계속 사건화 만들고, 사건화가 뭉쳐지면 존재가 돼요. 존재가 되면 또 이걸 사건화 만들고. 존재에서 사건, 이럴 때 계속해서 십자가가 개입하고 사건화 된 것을 존재로 바꾸는 것을 계속해서 주의 원수, 악마가 개입해줘야 돼요. 나, 오년 전에 은혜 받았다. 은혜 받은 사람이 누군데? 나, 여기 있잖아. 오년 전에 은혜 받은 나 여기 있고, 육년 전에 복 받은 나 여기 있다는 거예요. 그걸 사건이 와서 너는 하나의 껍데기에 불과하고 그런 사건을 유발시키는 것은 주님인데 주님을 볼 생각은 안 하고 주님을 믿었다는 자기 자신을 믿는 그런 존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는 늘 반복적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미국에 계신 어떤 분에게 메일이 왔어요. 십자가마을에 헌금도 하시는 분인데 자기가 한 동안 성경을 안 봤답니다. 수십 년 복음을 들어서 안다고 생각하고 성경 보면 뭐하냐. 그러다가 최근에 다시 보게 됐다는 거예요. 보면서 내가 알게 되었다는 자체가 복음 자체와 얼마나 괴리된 사고방식인지 알게 되었다는 거예요. 내가 뭘 알아차렸다는 이 말은 그것 알아서 구원받는데 요긴하게 쓰이겠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결과가 뭐예요? 누가 등장해요? 자기가 주인공 되잖아요. 이게 마귀가 역사한 거예요. 네가 은혜 받은 것이 뭉쳐져서 은혜 받은 내가 되고 그 나를 내가 숭상하고 자랑질하고 그걸 경배하는 거예요. 그런 나는 존재로서 즐거워하게 되겠지요. 디모데전서에 보면, 알렉산더와 후매네오를 사탄에 내줬다. 사탄은 뭐든지 뭉치는 일을 잘해요. 사탄은 사건을 존재로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어서 사탄에게 넘어가게 되면 그 사람은 대번에 나도 안다고 자기 존재를 내세우게 돼있습니다. 그런 경우가 우리 주변에 많이 나타나는 것에 대해서 감사합시다. 왜냐하면 복음 안다고 한 사람들이 결국은 복음 아는 자기 자신을 부인하지 못하는 현상들이 십자가마을을 중심으로 많이 일어나고 있어요. 일종에 십자가 사건의 부흥운동인데. 십자가고 뭐고 안다고 하는데 뭔가 그걸 존재화로 굳이는 작업, 교회로 만드는 작업, 교단으로 만드는 작업에 굉장히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입니다. 예를 들면 처음에는 집안에서 자기 혼자 교회 나왔는데 내 남편도 교회 나오고, 내 딸과 아들도 교회 나왔을 때 그때부터 각자 주께서 나오게 하셨다는 생각을 처음에는 가졌는데 네 명 다 나오니까 우리가족은 구원받았다는 거예요. 갑자기 우리가정이 나오면서 사건이 존재로 바뀌었어요. 그러나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누가 내 모친이고 내 동생들이냐? 예수님은 자기 모친이 오고 동생들이 와도 모친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그들이 바로 내 동생들이고 내 모친이라고 이야기했어요. 이것은 무엇을 전제로 하느냐 하면, 인간들이 얼마나 자기 육신 중심의 공동체, 가정이라는 것을 우상화한다는 것을 뻔히 아시는 거예요. 그래서 주께서 마태복음 10장에서 너희 원수가 집안 식구라고 했잖아요. 이 말씀도 보세요.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의 원수가 집안 식구라고 했지요. 집안 식구를 원수화한다면 그 사람은 잘못된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집안 식구를 원수화하는 너는 뭔데? 갑자기 자기 빼놓고 다 원수가 돼버려요. 집안 식구를 원수라고 했을 때 그 집안은 주님의 입장에서 집안이지 내가 보는 집안이 내 원수는 아니에요. 나도 원수기 때문에. 맨날 내 존재와 같이 하기 때문에. 그래서 성경말씀은 한번 안다고 미뤄놓을 책이 아니고 매일같이 우리에게 주님의 행동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의 행동에 대한 결실물이 되고 열매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의 행동은 무슨 행동과 대결하겠습니까? 내가 나름대로 행하는 행위와 대결구조로 나가지요. 야고보서 2장에 보면, 우리교회에서 뒤늦게 이 질문하시는 분이 있어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벌써 15년 전에 이야기했는데. 왜 야고보서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했는데 로마서에서는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하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했는지 연세가 70이 넘어서 뒤늦게 질문하는 분이 있었어요. 기생 라합이 자기 소속이 여리고성입니다. 그러면 자기는 여리고 사람입니다. 자기의 모든 토대가 여리고에요. 그런데 다른 외부 민족, 이스라엘이 왔거든요. 그럴 때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살려줬다는 것은 뭘 포기했다는 말입니까? 이걸 믿음에 합한 행함이라고 합니다. 어느 인간이 자기를 포기할 수 있습니까. 포기 못해요. 자기 자리를 포기한다는 것은 자기 저주를 기정사실화하는 겁니다. 내가 저주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은 어느 토대에 서야 그런 안목이 생기느냐 하면, 자기가 여리고성 자리에 있지 말고 쳐들어오는 이스라엘 자리에 가서 봐야 되거든요. 그러면 기생 라합은 여리고성에 살고 있으면서도 구원받기 이전에 이미 그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자기편이라고 살려주는 겁니다. 어떻게 자리를 옮겨갔습니까? 그 설명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쳐들어오는 행동에 말려든 거예요. 사건에 말려들었다는 말은 이미 자기 존재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쳐들어오는 폭풍에 자기 몸을 맡겼으니까. 그것을 야고보서에는 행함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 행함은 귀신이 알고 있는 믿음과 구별되는 겁니다. 그런데 야고보서에서 주의할 것은,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했을 때 절대로 이 믿음을 탈락시키면 안 된다는 겁니다. 맞지요? 너는 믿음을 보이라 우리는 행함을 보이겠다고 할 적에 행함만 덜렁 보이면 그건 행함이 되지 행함이 깃든 믿음은 아니거든요. 제가 지금 말장난하는 게 아닙니다. 결국은 믿음을 보여야지 행함을 보이면 안 된다는 말이에요. 행함이 깃든 믿음을 보여야지 그냥 믿음은 안 보이니까 행함을 보여 버리면 이건 믿음조차도 안 된다는 거죠. 결국은 야고보서조차도 믿음을 보여야 된다는 말은 나는 누구를 의지한다는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나는 스스로 내 자리를 주님에 의해서 폭풍에 의해서 이미 박탈당한 존재라는 겁니다. 주님의 존재에 의해서 박탈당하면 우리는 펄럭이는 월남치마처럼 주님이 일으킨 파편화된 사건에 불과한 겁니다. 안개처럼 그렇게 된 거예요. 창세기 1장을 봅시다. 물리학이야기는 나중에 혹시 기회가 되면 하겠지만 시간이 아까워서 못하겠어요. 다만 물리학에서는 있다, 없다로 있음을 일방적으로 우기는 거예요. 여기 있잖아. 나는 있다는 말을 붙이면 안 된다는 것이고 있음은 예수님께만 붙여야지 우리는 있다, 없다를 붙이면 안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창조했지 없는데서 있게 하신 건 아니에요. 로마서 4장이나 이런 데 보면 없는데서 있게 하셨다고 돼있지요. 그 이야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미 있다, 없다고 하기 때문에 없는 자리에다 그 용어를 그대로 사용해서 오신 거예요. 나중에는 있다, 없다 자체를 전부 다 날려 보냅니다. 그 증거가 창세기 1장에 보면,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더라. 이것은 계속 반복되는 하나님의 액션이 되는 겁니다. 이 빛이 에베소서에 보면, 우리 영혼에 비추는 마음에 비추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거든요. 그러니까 이것이 점점 더 반복 되면서 새로운 의미를 주의 원수를 밝힘과 동시에 계속 발전해나가고 이어져 나가는 겁니다. 그게 첫째 날이다. 첫째 날도 마찬가지에요. 이 날은 흔히 말하는 보통 스물네 시간을 말하지만 이 날이라는 것이 점점 길어지면 나중에 신약에서는 이 세대로 바뀌는 거예요. 이 세대는 사건에 의해서만 끊어집니다. 예수님의 오심 사건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사건, 그리고 부활, 재림은 이쪽에 속하거든요. 오심과 이것이 이 세대가 악한 세대인 것을 보여주는 세대가 되는 거예요. 이걸 그대로 창세기에 적용시키면 날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일하셨던 날. 그러면 일곱 날은 뭐냐? 하나님이 쉬셨던 날을 기념하는 거예요. 그래서 안식일 지킨 그들이 멸망한 겁니다. 왜? 기존의 날을 지켰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거예요. 날을 지정하신 주님을 생각해야 되는데 주님을 생각하지 않고 안식일 지켰다는 자기 존재를 생각하니까 멸망당해도 싼 거예요. 이웃을 사랑하라 할 때 이웃을 사랑하는 주님을 생각해야 될 텐데 “내가 저 사람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 어떻습니까?” 하니까 사랑이 안 되고 그게 자기 사랑이 되는 거예요. 피조물이라 하는 것은 거기에 뭐가 감겨 있느냐? 피조물 자체가 주님이 하신 행동의 반복성으로 있는 거예요. 해는 계속해서 비춰야 되고, 달은 계속해서 떠야 되고, 별은 계속해서 빛나야 되고. 그리고 물고기와 식물들도 하나님께서 움직이는 대로 움직여줘야 되는 거예요. 식물이 우리 말씀 지키자. 그래서 지키는 게 아닙니다. 시편에 그런 게 많이 나오는데 시편 104편에 보면, 하나님의 신이 식물로 하여금 창조의 원리대로 유지되도록 운행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또 하나님의 신이 때에 따라서는 식물을 죽이고 동물을 죽이고 사람을 죽이잖아요. 그것은 그러한 액션이 나오는 원천되시는 장차오실 주님께서 이 땅에서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실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들을 죽이고 인간들을 살려내는 일을 하시는 거예요. 오늘 낮에 이야기했지만 나의 상처가 나의 존재보다 먼저 있다는 말을 했지요. 주님의 차원에서 그렇게 이야기한 거예요. 예수님의 상처, 십자가 사건이 주님의 존재보다 먼저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상처는 사건이고, 있다는 것은 바로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존재보다 사건이 우선되는 겁니다. 사건을 사건화 시키기 위해서 존재는 있다가도 허물어져야 될 그런 입장인 거예요. 히브리서 1장 10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지금 여러분이 이해 안 되지만 들여다보면 무슨 말인지 이해될 거예요.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셨잖아요. 그중에 우리도 지음 받았다. 그러면 우리는 존재로 생각해서 하나님이 지었기 때문에 제 인생 책임져주세요 하고 싶은데 그 다음 말이 뭐냐?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존재를 만들었으면 하나님이 책임지시라는 말을 하지 말고, “죽이든지 살리든지 마음대로 하시옵소서.” 그렇게 나와야지. “하나님이 만들었으니까 책임지세요.”라고 나온다는 것은 그것은 멸망당해도 싸다. 모든 피조물들은 만들어졌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을 사수하려고 하지 말고, “누가 만들었습니까? 만드신 분 뜻대로 하시옵소서.” 이렇게 맡겨야 피조물답다는 겁니다. 맡긴다고 살려주는 것도 아니에요. 맡기면 멸망해줄게. 멸망하시옵소서. 안 할 줄 알아? 거기에 대한 밀고 당기는 게 없어요. 우리는 멸망당해야 됩니다. 그게 사도 바울의 십자가입니다. 이미 너는 멸망당했다는 겁니다. 그 멸망당할 때 주께서 멸망시킨 이유는, 멸망시킬 권한도 주님에게 있고 거기서 누구를 구원할 권한도 오직 주님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멸망이라는 하나의 액션 속에 우리를 몰아세운 거예요. 이 사실을 누가 아느냐 하면, 13절에 보면, 천사가 알고 있습니다. 천사가 알고 있으면 마귀도 알고 있다. 그래서 마귀는 이미 창세기 3장부터 아담에게 선악과 따먹으라고 한 거예요. 따먹으면 네가 신처럼 되리라고 한 겁니다. 마귀는 창세기부터 모든 사고방식을 존재 중심으로 보자. 이미 만들어진 것, 설마 건드리겠나. 예쁘다고 만든 걸 설마 만드신 분이 깨진 않을 거야. 이미 만들어졌기 때문에 고유 권한을 하나님께 요구하자고 나신 것이 악마였습니다. 악마가 왜 그러느냐 하면, 악마가 전쟁할 때 바로 그걸 주장했거든요. 만들어놓은 우리도 권한이 있다고 주장하고 싶어서 대든 겁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일부러 그런 마귀를 만드심으로써 주가 되시는 데 이용하신 거예요. 그런 것들을 심판할 권리가 바로 나사렛 예수 주님한테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된 겁니다. 이제 결론만 하고 오늘 강의 쉽시다. 나는 여기 있다고 할 때 평소에 우리는 여기 있다는 말 안 해요. 나는 뭘 한다고 하지. 그러면 내가 여기 있다고 할 때는 반드시 어떤 경우냐 하면, 뭔가 없을 때만 있다고 해요. 여기 지갑이 있었는데, 안경이 있었는데. 안경이 없을 때 있다가 등장하게 돼있어요. 그래서 인간이 여기 있다는 것은 반드시 없다는 걸 배경으로 깔고 항상 염두에 두고 내가 여기 있다,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뭘 모르느냐 하면, 왜 내가 나에게 현재 없는 것을 자꾸 의식해야 되는 이유에 대해서 몰라요. 왜 모를 수밖에 없느냐 하면, 관심사가 내가 여기 있는 것에만 있지 옆에 있는 없다에 관심이 없는 거예요. 사람들은 내가 없어지는 것을 제일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거예요. 죽기가 무서워 종노릇하듯이. 내가 없다는 것을 현실로, 내가 여기 있는데 없다? 안 돼, 안 돼. 그러면서도 죽어가고 있잖아요. 주님께서는 없다는 자리에 오셔서 진짜 있다는 것이 얼마나 창조주를 모독하는지 죽음으로써 보여주신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있다, 없다는 자리에 오시면서 전체를 예수님만 있다고 해야 돼요. 예수님만 있다고 했을 때 그 다음에 빛이 있으라 하잖아요. “빛이 있습니다.” 하면 절대로 하면 안 돼요. 주님이 먼저 있기에 내가 있다는 관계를 가져야 이 빛은 유지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하면 빛이고 별이고 해고 다 무너지지요. 그러면 예수님만 있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 땅에 사라져야 되는데 이 사실을 나사로가 죽음으로써 마리아, 마르다는 사실은 없는 존재고 네가 살려면 네 자리에서 나를 믿으면 안 되고 죽은 나사로 자리에 같이 가자. 같이 오빠 나사로가 되어서 나사로와 같이 죽는 자리에서 다시 나를 봐라.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11:26) 그러한 것을 오빠의 자리에서 보자는 거예요. 자꾸 네가 살았던 자리에서 예수 믿으려고 하지 말고 이미 내가 죽었다는 자리에서 만들어 줄 때 그 죽음의 자리가 바로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십자가 자리라는 겁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십자가가 네게 있는데 누가 너를 꾀더냐 하지요. 항상 십자가와 더불어 늘 살려내는 그러한 은혜를 우리는 내 존재가 무시당하는 느낌과 더불어서 여러분 같이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마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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