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1강 (강의:이근호 목사)
하나님 감히 주의 말씀을 대합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했다는데 창조 받은 우리가 도로 그 말씀을 파악하고자 할 때 우리의 능력은 미미하고 하지만 성령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면 우리가 성령 안에서 주의 본 뜻을 깨닫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창세기 1장이 성경에 나오지요. 창세기 1장이 시작일 수도 있고 마지막 결론일 수 있어요. 책인데 책을 세워놓겠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여기 있다면 그전까지는 성경책에 대해서 우리가 필요한 것을 묻고 필요한 정보를 가져와서 나를 키우고 하는 식으로 성경책을 하나의 대상으로 본 겁니다. 나는 여기 있고 필요한 것들을 퍼 담아갈 수 있는 그러한 대상으로 봤는데 신약성경에 와서 하나님의 새 언약에 의하면 구약이든 신약이든 이런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우리를 어디다 집어넣느냐 하면, 우리를 점선으로 해봅시다. 점선이란 항상 사라질 가능성이 있는 거고. 끌로 성경책을 파면, 빈 공간을 파서 집어넣으면 해답을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체가 해답이 돼요. 성경 속에 우리가 있으면 성경 전체가 해답이라면 거기에 포함된 우리도 해답이 되는 겁니다. 새삼스럽게 해답을 알 필요도 없이 우리가 바깥에 나가게 되면 질질질 해답을 끌고 나온 셈이 되지요. 우리가 나오면 덩달아 말씀이 끌려나오면 모든 것이 해답이 되는 겁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이것을 해답의 자기 전개, 자기 펼침이 되겠지요. 내가 움직이는 모든 것이 해답이다. 그 해답이 어떤 내용인지 말로 해보라. 말로 하면 안 돼요. 말하기 전에 이미 해답인데 말로 하면, 말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사라져가는 이쪽의 소통이 원칙이거든요. 여기서 통용되는 거란 말이죠. 말을 하려면 이쪽에 사라지는 것을 거쳐서 다시 말하려면 가고 오고 가는데서 이미 해답성을 상실해버려요. 아무리 해답을 말로 설명해도 여기에 통용되는 말 자체, 언어의 한계가 있어요. 한 번 거쳐 왔다하면 진짜 진리성은 다 빠지고 그냥 형식만 남아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예를 들면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하는 것이 과연 진리인 이유가 뭐냐? “내가 여기 있잖아. 내가 그런 이야기를 하잖아.” 이게 해답이거든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얻으리라는 그런 구원자가 여기 있단 말이죠. 그럼 됐는데 그걸 말로 설명하려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다시 돌아오면 주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구원되는 게 아니거든요. 이것 외운다고 구원 되는 건 아니란 말이죠. <!--[if !supportEmptyParas]--> <!--[endif]-->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행동이 해답인데 새삼스럽게 해답을 제시해달라고 하면 해답을 제시하는 방법은 없는 거예요. 창세기 1장에 들어갈 때 앞으로 이 방법을 앞으로 계속 적용할 겁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유럽의 성당을 보면 건축물 지을 때 밑 구덩이에 동굴처럼 파서 아기 예수와 성모 마리아를 안치해놓고 열주, 기둥들을 도리아식, 이오니아식이라 해서 나와 있을 거예요. 여기에서 우리가 해답을 아는 게 아니고 해답 자체로서 우리가 존재하게 된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 나갈 때는 “무엇이 진리입니까?”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무슨 질문을 하게 되면 이런 답이 될까요?”라고 해야 되지요. 답은 이미 챙겼으니까 “이 답변에 해당되는 어떤 질문들을 하게 되면 여기 있는 이런 답변이 나오게 됩니까?”라는 질문을 해야 된다. 그러니까 답변을 새삼스럽게 구하는 게 아니고 이 답변이 답변될 수밖에 없는 질문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의 남은 여생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게 바로 확인 작업에 들어가는 거예요. 새삼스럽게 진리를 끌어 모아서 나는 진리를 알았다는 게 아니고 내 자신이 답변이기 때문에 왜 나는 이런 식으로 남자가 되었을까? 내가 남자가 되는 것이 정답이어야 하는 질문을 찾아가는 거예요. 질문을 만들어보는 겁니다. 구원받는데 어느 것이 수월합니까? 이미 구원받아놓고 저 같은 죄인을 왜 구원하셨습니까? 이게 수월합니까? 제가 어느 정도 착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어느 쪽이 여러분이 힘들고 애써야 됩니까? 두 번째가 더 힘들지요. 도대체 어디까지 따라 붙어야 하느냐? 어디까지 가야 상글리아(이상사회), 유토피아에 도달하는가? 자꾸 헤매는 거예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오늘 낮에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제가 아는 선교사님이 태국에 갔어요. 방콕에는 더러워서 못 가고 거기는 이미 삯꾼 선교사들이 있기 때문에 자기는 아무도 찾지 않는 밀림으로 들어갔어요. 거기는 접시도 없어요. 나뭇잎사귀를 접시 삼아 밥을 싸먹는 거예요. 일년 내내 쌈밥 먹는 거예요. 인터넷도 안 되는 곳에 들어가서 주의 복음을 전하겠다는 거예요. 이제 말합니다. 사실은 내가 해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이게 해답인지 싶어서 시도해본 거란 말이죠. <!--[if !supportEmptyParas]--> <!--[endif]--> 해답이란 내 몸이 해답이 아닌 이상 어딜 가도 해답이 아닙니다. 만약 내 몸이 이미 해답이라면 어딜 가도 나는 해답이 되는 거예요. 뭔가 성경 속에서 발을 떼어서 세상으로 나간다면 뒤에 해답이 줄줄 따라 나와서 실타래처럼 성경 속에 있던 진리들이 엉덩이에 붙어서 잡아당겨져서 살아간다는 자체가 해답이 되는 겁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이렇게 살아간 사람들이 누구냐? 성경에 나오는 모든 선지자와 사도들이 이렇게 살아갔어요. 스데반 집사가 신학 연구한 사람이 아닙니다. 예레미야가, 기드온이 신학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기드온은 방앗간 주인이었어요. 방앗간 주인이 신학을 하면 얼마나 했겠습니까. 그냥 하나님의 신이 임하니까 그 자체로 해답이 된 겁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러면 우리가 해답에서 나올 때 존재로 나오느냐, 아니면 사건으로 나오느냐? 이것이 문제가 되는데 만약에 존재로 나온다면 내 뒤에 있는 사슬처럼 줄줄이 따라오는 것들이 다 존재가 돼요. 그러면 존재와 존재 사이에 이어진 게 갑자기 끊어지면 나는 해답이 안 되는 수가 생겨버립니다. 그래서 내가 여기 있다는 존재로써 진리를 존재로 끌고 오면 항상 뒤돌아서 점검을 해야 돼요. “잘 있느냐? 하나님과 관계는 좋지? 벌써 기도 안 한지 사흘 됐는지 관계 끊어졌는지 모르겠다.” 이것은 살아가는 것처럼 진리가 어디 있는지 찾는 수고 이상으로 여전히 불안해요. 안정감이 없고 초조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래서 성경말씀이 바깥으로 나올 때는 존재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사건으로 나와요. 아담이란 사람이 분명히 있었지요. 자기는 아담이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심지어 선악과 따먹을 때도 있다고 생각했고, 선악과나무도 있다, 생명나무도 있다. 존재입니다. 왜? 내가 여기 있으니까.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선악과 사건이 일어났다. 생명나무가 그 값을 한다. 나는 아담으로서 아담에 합당한 사건이 일어나서 흙이 되어가는 사건화 속에 사건들이 터지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말씀이 바깥에 나올 때는 존재로 나오는 게 아니고 사건으로 나오는 겁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하나의 사건이 되려면 사건은 시공간에 저촉되지 않습니다. 여기 있다가 갑자기 저기 있고. 시공간을 초월해서 사건화 돼버리면 이 사건, 저 사건이 터지는 겁니다. 사건에 제일 좋은 예는 이런 거예요. 갑자기 파리가 날아왔을 때 파리를 치는 거예요. 이것 예상 했습니까? “파리가 아마 2초 뒤에 올 거야.” 이것은 파리를 내가 쳐야 된다는 내가 미리 예상치 못한 나의 돌발적인 행동과 파리가 나타나는 행동이 모여서 거기서 파리 치기라는 사건이 벌어진 거예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또 한 예를 들면 차가 절벽으로 떨어지려고 하는데 지금 2초만 지나면 절벽으로 떨어져요. 그런데 뭔가 날아와서 차를 막으니까 자기는 손 다 베이고 붕대 감고, 차는 벌떡 섰다가 퉁하고 내려앉고. 보니까 김수현이라. 착한 전지현은 벌벌 떨면서 봤고 뒤에 있는 범인들은 뭐 저런 게 다 있나하고 도망치고. 이게 사건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말씀이, 우리가 정답입니다. 우리가 정답을 알려면 우리가 존재로 내가 규정할 수는 없고 말씀에 대한 해답으로써 나도 모르는 사건들이 계속해서 발생되는 거예요. 그 사건이 일어나면서 일어난 A사건에 그동안 잠잠하던 자들이 갑자기 관련성 있는 사슬로서 사건화 되어서 붕 뜨게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예를 들면 기존교회에서는 구원받으려면 교회 나오세요. 목사가 사람들에게 존재를 명령합니다. 집에 있지 말고 당신 존재를 이 시간, 주일 낮에 교회에 와야 됩니다. 내가 확인할 거예요. 출석 점검할 겁니다. 나오세요. 그래서 말씀 듣고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하는 거예요. 하지만 성경을 그렇게 하지 않고 내가 집에 있다가 교회 나옴으로 말미암아 거기 다른 집사, 목사, 장로들과 얽히게 돼있어요. 새로운 사건에 얽히게 돼있어요. 어떤 사람은 나한테 존재를 요구했지만 막상 나는 거기 가서 사건의 유발자로 행세하게 되는 거예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사건, 사건하니까 무슨 뜻인지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요. 어떤 물체를 A라면 3초 뒤에 B로 바뀔 때 우리는 이 물체가 B로 바뀌었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뭘 놓치느냐 하면, 우리가 어떻게 바뀌는지 그 생성에 대해서는 몰라요. 바뀌기 전과 바뀐 후를 파악할 뿐입니다. 왜 그러냐? 우리 자체가 나를 존재로 보기 때문에 존재에서는 존재만 보이지 사건은 안 보이거든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예를 들어서 어떤 학생이 반에서 15등하다가 10등 됐을 때 전에는 15등하는 학생에서 이제는 10등하는 학생, 전에는 15등하는 존재에서 10등하는 존재가 되었구나. 앞으로 네가 5등까지 하는 존재, 그런 인간이 되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해서 15등에서 10등까지 됐는지는 모른단 말이죠. 학원을 다녔습니다. 학원을 다녀서 뭘 배운다는 그것이 어떻게 15등에서 10등 됐는가를 따지고 보면 항상 존재기 때문에 존재와 존재는 연결이 안 돼요. 끊어져 있어요. 설명할 길이 없어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래서 이걸 어떻게 설명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10등 되는 사건에 휘말리게 해버렸다. 휘말린 사건 속에서 나는 우연히 영어학원을 알게 되었고 영어학원도 내가 10등 되는 사건에 휘말렸고, 거기서 유명한 학원 강사를 만나서 기초를 알았는데 마침 시험 문제에 기초에 관한 것이 나와서 풀다보니까 15등에서 10등까지 되었습니다.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고 나도 미처 모르는 어떤 사건에 휘말렸는데 그 사건을 구태여 이름을 붙인다면 내가 10등한 사건. 내가 10등해야 될 사건.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렇다면 구원받는다는 것은 구원에 대한 모든 과정은 하나님만 아시지 우리는 하나님만 아시는 구원 작업에 어쩔 수 없이 말려든 거예요. 요한복음 6장에 내가 온 것은 아버지 뜻을 행하려 함이라. 아버지 뜻은 뭐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내가 마지막 날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이게 성경 안에 있잖아요. 성경 안이 예수에게서 나올 때는 존재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사건으로 나오지요. 그 사건에 휘말리면 구원받은 거예요. 그리고 그 사건에 진짜 휘말렸는지 어떻게 아느냐 하면,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아버지께서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한다는 것이 믿어져버리면 내가 나쁜 짓 한 것과 구원 안 되는 것과는 전혀 별개 문제인 겁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러면 구원 안 되는 것은 뭐냐? 구원 안 되는 사건이 따로 있어요. 그 사람은 본인이 지옥 가고 싶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구원 안 되는 작업 속에 그쪽 노선의 사건에 휘말리다보니까 아무리 애를 써서 구원이 안 됩니다. 심지어 회개해서 자살까지 해도 구원이 안 돼요. 아무리 해도 구원이 안 생겨요. 가룟 유다가 스승 팔아먹었다고 자살할 정도로 착해요. 하지만 15년 동안 해도 구원이 안 생겨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구원이 안 생기니까 자기 존재가 항상 불안정하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억지를 부리는데, 자기는 구원받은 존재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떤 사건으로 설명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일으킨 사건에 휘말려서 구원됐다고 고백하는 게 아니고 나는 어느 교회에 가서 뭘 배웠고 세례 받았기 때문에 나는 누가 뭐래도 구원받은 존재, 구원받은 사람 맞는다고 우기는 겁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리고 질문합니다. “목사님, 구원받았는데 그 다음에 무슨 일을 해야 됩니까?” 질문 자체가 사건에서 해답에서 나온 질문이 아니고 자기가 용쓰고 애쓰는 가운데 뭘 또 추가해야 구원에 도달 되겠느냐는 그런 존재에 관한 질문밖에 나는 어떻게 해서 구원받겠습니까? 성경구절을 어떻게 공부하면 구원되겠습니까? 어떤 정보를 확보하면 구원의 근거가 되겠습니까? 자꾸 존재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겁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면서 2014년도 우리 교회 목표를 정한 거예요. 그러면 우리 교회가 이미 존재가 되고 맙니다. 그래놓고 하는 말이, 옆의 교회는 300명이 목표인데 우리는 500명을 목표로 하겠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우리가 500명 채우고 저쪽은 한 100으로 갈 때 이겼다는 즐거움이 있다고 해버리면, 성경에선 교회는 하나님의 피로 산 거지요. 그러면 이런 교회는 성경에는 없는 교회에요.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밖에 없어요. 그런데 교회가 벌써 두 개가 돼버렸어요. 다 가짜에요. 가짜기 때문에 바른 교회 하겠다는 자체가 가짜 교회에요. 성경에는 바른 교회라는 게 없어요. 왜? 교회 자체가 미흡함이 없기 때문에. 마태복음에 16장에 보면 교회는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거예요. 죽음의 권세, 지옥의 권세를 이기는 힘이 교회에서 나오잖아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제가 어느 강의에서 했지만 교회의 힘이 어디서 나옵니까? 입구에 문 열면 힘이 나옵니까? 열면 거기서 에어컨이나 히터 바람만 나오는데. 그러면 강대상 기어 올라가면 지옥의 권세를 이기는 힘이 나옵니까? 제도적으로 봐서 평신도 되면 기를 적게 받고, 집사 되면 기를 더 받는 거예요? 그러면 목사 되면 기를 더 받아서 나자빠집니까? 도대체 권세가 어떤 행정조직에서 어떤 장소에서 어느 시간대에 오느냐 이 말입니다. 그게 설명이 안 되지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아까 파리가 날아온 게 사건이지요. 파리가 언제 날아올지 압니까? 사건은, 파리가 날아가는 것처럼 본인도 모르게 그 사건 때문에 본인도 존재에서 갑자기 사건화 돼버려요.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것이 교회라면 교회 자체가 성경의 내용이기 때문에 교회는 항상 사건화 된 교회로서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겁니다. 그 사건화 된 교회는 설명이 안 된다니까. A에서 B로 변할 때 설명이 안 돼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사도행전 5장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나오지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었습니다. 헌금 반을 감췄다가 걸려서 네가 나를 속임이 아니고 성령을 속임이라고 해서 성령이 죽이실 때 탁 쳐서 죽였습니까? 질질 끌면서 죽였습니까? 성령이 죽이실 때 심장부터 멈추게 했습니까, 두뇌부터 멈추게 했어요? 어떻게 했어요? 그게 안 되지요. 그냥 죽였다는 사건에 같이 말려있지 성령께서 탁 치니까 그때 숨을 거두었는지 치고 난 뒤에 2.5초 뒤에 숨을 거뒀는지 그런 것은 우리가 알 필요도 없고. 다만 거기서 성령이 계시는구나. 성령이 교회 되게 하기 위해서 죽이시는구나. 그것만 알면 된다니까요. 진짜 교회는 성령에 의해 죽어 나가봐야 그게 교회라니까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만약에 어느 교회가 예배당 지었는데 몇 사람 죽어 나가면 황무지 돼요. 죽으려고 옵니까? 겁나서 다 도망가지요. 그래서 진짜 교회는 어느 공간이나 어느 장소를 독점할 수 없다. 그걸 붙잡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성경 속의 내용은 전부 다 사건화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관심은 사건이라 할 때 그 사건의 중심은 뭐냐? 사건의 중심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신약 쪽에서 창세기를 봐야 돼요. 사건의 중심은 구약에서 어린양입니다. 신약 요한계시록에서도 어린양의 보좌에서 모든 사건의 중심이 내려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생명나무가 나무로서 그냥 존재하는 줄 알았지요. 생명나무가 오지 못하도록 사건화 된 힘이 나올 줄 아담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선악과 따먹으면 그 독성 때문에 죽는 줄 알았지 선악과 따먹은 그것이 저주의 영역으로 추방되는 것으로 죽음을 표현할 줄은 아담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렇게 사건화 될 때 그러면 창세기 1장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이야기에서 어떻게 사건을 끄집어낼 수 있는가? 우리는 사건을 끄집어낼 수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사건의 원천이 아니고 사건의 원천을 경유해야 됩니다. 사건의 원천은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을 경유해야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아는데 그러면 경유하기 전에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했다. 그럼 예수님을 경유하고 난 뒤에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것이 맞는가, 틀리는가? 이것은 대번이 틀린 거죠. 왜냐하면 예수님을 경유하기 전에 알았던 그 모든 용어들은 존재에서 나왔거든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내가 여기 있는데 신이 나를 만들었다. 그런데 예수님을 경유해버리면 나는 믿습니다. 내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것을 믿습니다. 나란 존재가 사라져버린 후가 돼버려요. 예수님을 경유하게 되면 우리가 경유하기 전에는 “내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에 대해서 예수님도 아마 동의하실 거야.” “천지를 누가 만들었다고?”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기특해라. 사탕 줄게.” 이렇게 칭찬받을 줄 알았는데 여기에 사탄이 등장해요. 예수님을 경유하면 인간 존재는 안개가 되어 날아가 버리고 있으나마나한 존재고 진짜 한바탕 붙을 대상인 예수님의 적수가 나와요. 하나님의 원수가 나온다고. 고래 싸우는데 새우가 왜 끼어듭니까. 빠져야지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전투장. 거기에 어디 사람이 끼어듭니까. <!--[if !supportEmptyParas]--> <!--[endif]-->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목사님, 내가 진실을 이야기할게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맞지요?” 틀렸습니다. 왜 틀렸습니까? 그것은 당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서 이 말을 인용했기 때문에 틀렸습니다. 성경 그대로 읽었는데? 그대로 읽어도 틀려요. 그러면 목사님은 안 틀리게 읽어 보세요? 안 틀리는 게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개입할 입장이 못 되기 때문에. <!--[if !supportEmptyParas]--> <!--[endif]--> 성경에서 나를 앞장세울 때는 이걸 내가 사건화 되게 되면 이 속에서 우리는 뭘 만나느냐 하면 나의 원수가 아니고 천지를 만드신 예수님의 원수가 우리 눈앞에 목격 되게 돼있고 그 일처리는 우리가 처리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보내신 사건화 시켰던 예수님께서 마귀를 처단시키고 마귀를 좇아내고 마귀를 굴복시키는 그 현장에 우리는 단순히 목격자로서만 사건에 말려들게 하신다는 거죠. <!--[if !supportEmptyParas]--> <!--[endif]--> 나는 이렇게 못났는데 나를 구원했습니다. 왜 못났는데? 그것은 그동안 내가 살아온 모든 것이 마귀의 유혹에 의해서 살아온 나. 그런데 주께서 하나님의 원수를 발등상에 함께 하시도 주가 되사 그 주된 값을 마음껏 발휘하신다고 우리로 하여금 마귀와 놀고 있다고 지적질 해주시는 거예요. 주님이 주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마귀와 같이 살고 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에 의해서 사건화 되게 되면 세상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흠뻑 젖어드는 위대한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이 놀라운 고귀한 거룩한 사명을 감당해야 돼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신나지 않습니까? 우리가 죄를 짓는다는 것은 아주 즐거운 일이에요. 우리 몸이 죄를 기억해요. 누려! 이제는 마음껏 누리는 거예요. 어떤 인간이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있습니까? 할 수가 없어요. 두뇌에 뇌간이라는 게 있어서 왼쪽, 오른쪽 정보가 교류되는데. 그러면 오른손 하면서 한 손은 수술하면서 뇌간을 자르고 바쁘다. 한쪽은 구세군 냄비에 돈 넣어야 되고 한쪽은 내가 몰라야 돼요. 팔이 몇 개가 돼야 돼요? 오십견 있는 사람은 하지도 못해. 팔이 올라가지도 않아. <!--[if !supportEmptyParas]--> <!--[endif]--> 처음부터 다시 해볼게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내용이 성경책에 있더라. 그러면 우리는 어디 있느냐? 여기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점선이 아니고 실선이에요. 신약에 와서 성도들이 성령을 받았어요. 그러면 갑자기 자기는 예수 안에 있어요. 창조주 안에 있단 말이에요. 우리의 본모습은 진리 안에 있어요. 진리 안에 있으면서 뭘 바라보느냐 하면, 내가 했던 행세, 나의 모형이 자기 존재를 긍정하고 자기 의를 챙기기 위해서 착한 척하면서 성경을 연구하고 계속 보는 거예요. 이 모습을 우리가 보고 있는 거예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이 모습을 볼 때 여기에서는 내가 여기 있고 단지 책이었는데 그리스도 안에서는 나는 이 안에 있고 바깥의 모든 것은 묵시적 존재, 내가 여기 버티고 있는 존재로 있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았던 진짜 실체, 그게 뭐냐? 악마가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우리 자신을 가지고 계속 앞장세우고 있었던 겁니다. 그게 보이는 거예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렇다면 전에 창세기 1장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건 맞는 말이죠? 하고 외쳤던 그것이 배후에 악마가 그렇게 사주한 것이 벌써 들통 난 거예요. 마귀가 네가 그것 알면 구원받아. 그것 알면 하나님 앞에서 칭찬 받을 걸. 라고 나한테 사기를 친 거예요. 이미 선악과 따먹은 상태에서는 뭘 해도 죄가 되거든요. 사기를 쳐서 네 자신이 대견하고 훌륭하고 믿음 좋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마음껏 과시하라 이 말이거든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사탄이라는 것이 서서히 등장해요. 이런 걸 공부하려면 어려운데 사탄이 등장하는 것이 뱀으로 돼 있다가 서서히 등장합니다. 성경책이 있는데 성경책이 우리를 파견하거든요. 우리를 사건화 되어서 파견돼요. 창세기 5장 때 파견된 사람이 아담이고, 7, 8, 9장 때 노아고. 노아니까 그 당시에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장사하고 대조가 되면서 보이는 거예요. 그 다음에 모세 시대에는 모세 당시에 대조되는 새로운 모세 상이 있을 것이고. 엘리야 당시는 엘리야.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러니까 모세, 엘리야 이런 사람들의 뒤 배경은 말씀에서 이미 존재 자체가 답이에요. 답으로서 나와서 그리고 이들은 세상을 바라보면서 질문을 만들어서 답을 주신 주님께 도로 질문을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여, 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셔야만 됩니까?”라는 질문을 하는 거예요. 이미 답은 나와 있어요. 천지를 창조했다. 남은 것은 왜 세상은 스스로 진화되지 않고 왜 하나님이 7일 만에 창조해야 됩니까? 8일도 아니고 10일도 아니고, 45억년도 아니고. 진화론에서 지구가 45억이고 우주는 137억년이거든요. 어지간히 길게 잡았어. 시간을 길게 늘어놓고 지 마음대로 요리하겠다는 거거든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왜 45억 동안 세대별로 주라기 공원도 나오고 이런 식으로 하지 않고 왜 7일 만이냐. “우리가 알기에는 45억년이 적당한데 왜 7일입니까?” 하고 물으면 정답은 45억년이란 대답은 이게 존재에서 나왔으니까 존재에서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서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지만 7이라는 것은 사건화 되거든요. 사건에 무슨 존재적인 논리가 개입됩니까. 말이 안 되는데. [별에서 온 그대]에서 전지현 차 몰고 가는데 김수현이 차를 막는 걸 어떻게 설명합니까? 유비쿼터스 식으로 막무가내로 등장하는 어떻게 설명이 돼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엘리야가 불수레를 타고 올라갔습니다. 불수레가 존재론적으로 따지면 불수레가 과연 중력을 이깁니까? 가스는 만유인력에 의해서 온도가 높을 경우에 올라가는 거예요. 나중에는 결국 중력에 의해서 떨어지지만. 그처럼 과학적으로 설명이 됩니까? 별 크기 얼마나 작아야 “바로 이 집에 태어났습니다.” 하고 사라지고. 별이 얼마나 큰데. 그게 설명이 되겠어요? 홍해가 갑자기 벽이 되고. 저쪽도 빠져야 되는데 왜 벽이 돼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사건은 이미 나를 존래로 내가 여기 있다는 걸 통해서 파악해나가면 사건은 도망쳐요. 해명이 안 되는 쪽으로 도망쳐버려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쪽으로 도망을 쳐버려요. 사건은 우리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건 속에 있는 존재는 사건이 더 크기 때문에 그 존재는 사건에 대해서 무화, 존재는 사건의 일부로서 날아가 버려야지 거기서 따로 안 깨지고 남아있는 존재덩어리는 사건 속에서는 용납이 안 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예를 들어서 초짜 기자가 와서 “여기는 화재현장입니다. 지금 화재사건입니다.” “김기자,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해보세요.” “어떤 사람이 고시공부하다 촛불을 넘어져서 불이 났습니다.” “그럼 그 초가 얼마짜리입니까?” 중요한 것은 불이 났는지 사건이 중요하지 초가 중국산인지, 얼마짜리인지 묻는 게 아니지요. 단독적으로 묻는 게 아니라니까. 그 중에서 사건을 중간에서 끄집어내면 여러 개의 존재로 변해버리지 그걸 하나로 뭉칠 수 있는 연결고리는 다 깨져버린 겁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냥 흘러가는 데로 사세요. 이 말이 더 쉽네. 지금까지 설명한 것보다. 그냥 흘러가는 데로 사시는데 이건 잊지 마세요. 그 사건의 원천은 오직 예수님에게서 나온다는 겁니다. 사랑받을 자는 사랑받고 미워할 자는 미움 받고. 그 모든 것이 예수님에게서 나온 거예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장 1절, 이것 하고 끝났어요? 이게 시작이에요. 천지를 창조한 사건 속에 십자가 사건이 있었던 겁니다. 그것은 천지를 창조한 것이 원천이 아니고 십자가가 원천이었고 십자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미리 깔아놓는 환경으로 조성해나가는데 화단공사. 아직까지 거실 안 지었어요. 밑에 도로 닦는 것, 천지를 창조한 거예요. 마지막에 다 집 짓고 보니까 우리 눈에 띠지 않았던 악마가 나옵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창세기 1장부터 뭘 겨냥했다? 악마 나와! 너, 숨지 마. <!--[if !supportEmptyParas]--> <!--[endif]--> 악마는 인간의 존재로서는 파악되지 않습니다. 파악되지 않지만 아담 당시에 사건화 되면서 악마 대신 뱀이라는 피조물이 나왔어요. 피조물이 아담과 대화했습니다. 그 시대에 맞는 사건에 휘말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동물원에 가서 뱀과 이야기해봐야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이 시대 사건에 부합되기 때문에 한 거예요. 노아 당시에는 방주라는 배를 만들고 들어가기만 하면 심판에서 면제됐습니다. 요즘 배 만들어놔야 그냥 박물관용으로 입장료 오천 원 받고 사진 몇 장 찍고 할 뿐이에요. 이게 방주란다. 아이고, 크기도 해라. 여덟 명밖에 구원 못 받았다면서. 글쎄 말이야. 우리 같으면 많이 오겠는데. 노아가 지을 때 애썼을 텐데.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이것은 노아 방주가 사건이 아니고 존재가 되는 이유가, 들어가는 우리 자신이 존재라고 인정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가 나를 존재라고 인정하게 되면 남는 문제는, “하나님이여 이 존재 어떻게 구원시킵니까?” 존재를 구원해달라는 거예요. 존재 구원은 없어요. 모든 것이 예수님 사건에 휘말린 판에 무슨 새삼스럽게 존재를 의미합니까. 안 되니까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라는 존재는 여기 있고, 그 다음에 나를 구원할 하나님의 존재가 저기 있다. 그래서 그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있다. 하나님이 있다고요? 야고보서 2장에 보세요. 하나님이 있다고? 귀신도 그 정도는 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귀신이 지금 겁내는 것은 존재가 아니고 십자가 사건에 휘말려 있다는 이 사실을 아무도 이야기하지 말기. 존재는 없고 모든 것이 사건뿐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알려주지 마. 그것 하는 거예요. 지금도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을 때 마귀의 전략은 하나밖에 없어요. 너라는 존재를 네가 지켜야 된다. 스피노자가 한 말이에요. 여러분의 인생은 여러분이 만드는 겁니다. 스피노자 아니라도 할 수 있지만 나라는 인생은 내가 만듭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것이 마태복음 4장에 보면 마귀가 와서 돌이 떡 되게 해라. 네가 잘 돼. 네가 뛰어내려라. 네가 안 다칠 거야. 나한테 절해라. 그러면 부귀영화는 예수, 너한테 줄 것이다. 마귀의 시험은 하나밖에 없어요. 네가 잘 돼. 네가 잘 되는 거야. 인생, 너한테 달린 것 아니야? 그러니까 이렇게 하면 네가 잘 되는 거야. 기도하면 잘 되고, 금식하면 잘 되고, 십일조하면 잘 되고. 네가 잘된단 말이야.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이게 바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존재로 믿는 사람들의 공통점이에요. 유대인들은 성경에 달달 외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악마인 줄을 본인이 몰랐어요. 예수님이 알려줘도 몰랐어요. 예수님이, 너희 아비는 악마라 하니까 그들이 뭐라고 한 줄 알아요? 너는 뭐냐고 나오거든요. 또 질문을 보세요. 나는 이건데 너는 뭐냐? 존재로 질문하는 거예요. 지금 우리는 어떤 사태에 말려들었는지 그렇게 질문하지 않고 너는 뭐냐는 거예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본디오 빌라도가, “진리가 뭔데?” 예수님이 답변을 안 했습니다. 이미 너는 진리의 원천 속에 말려들었어. 너는 어쩔 수 없이 나를 사형하도록 언도를 내려야 돼. 너는 빼도 박도 못해. 왜? 그것이 사건화 된 빌라도의 모습이기 때문에. 마귀는 그것을 존재로 급작스럽게 바뀌게 만들어요. “저, 구원받겠습니까?”라고 묻는 거예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한 가지만 하고 쉬겠습니다. 출애굽기 4장 21절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아들이라 했지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출애굽 할 때 이스라엘 백성 오십 만 명 가운데 아들이 몇 명입니까? 참 이게 난처한 질문인데 ‘아들들’이라고 해야 맞는데 ‘아들’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성경책 안에는 예수님의 존재를 말하고 밖으로 나가면 예수님이 사건화 되어서 나가거든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아들이 아니에요. 이스라엘 되게 하는 그것이 아들로서의 자리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아들로서의 자리가 신약에 오게 되면 유일하게 아버지의 뜻을 나타내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성사되는 자리가 이스라엘 자리에요.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자리를 구원하겠다는 겁니다. 그 아들이 누구냐? 그 아들은 한 분밖에 없어요. 요단 강 세례 받을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if !supportEmptyParas]--> <!--[endif]--> 아들은 예수님밖에 없는데 예수님을 설명하기 위해서 오십 만 사람이 나와야 되고 결국 오십 만 중에 아들은 하나도 없었던 거예요. 왜? 그들은 애굽인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아니에요. 애굽인인데 다만 하나님의 자리, 이스라엘 자리와 같이 사건에 휘말린 애굽이란 점에서 그들은 혜택을 입는 거예요. 그들의 몸이 애굽을 기억해요. 모든 것이 애굽적인 사고방식인데 광야에서 열 번이나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이야기했어요. 칼로 도려내도 애굽이 다 떨어져 나가지 않아요. 계속 도려내고 잘라도 자른 하나하나가 애굽으로 살아있는 겁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에 굉장한 말씀이 뭐냐 하면, 네가 오른팔이 범죄 하거든 팔을 잘라버리라 하지요. 자를 사람 있습니다. 팔 하나로 살 수 있으니까. 그런데 오른 눈을 빼버려라. 멀쩡한 눈을.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것만 있는 게 아니에요.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났다는 말이 나와요. 그 말이 그럼 결혼 안 한다고 하면 구원받습니까? 결혼 안 한 존재를 의미하는 게 아니고 결혼 못하게 된 사건에 휘말리게 되거든 그걸 주께서 일으키신 줄 알고 믿으면 그것이 바로 사건에 휘말려서 구원받는 구원의 방식이라는 겁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러니까 “하나님이여, 그런 사건에 휘말리지 않게 하옵소서.” 또는 “그런 사건을 피해가게 하옵소서.”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존재적인 질문 자체가 우리한테 해당이 안 되고 우리는 결혼을 하더라도 결혼 안 한 상태가 되면 되고요. 결혼을 하더라도 주님과 결혼한 상태면 되고. 지금까지 결혼을 안 한 사건에 휘말렸지만 올해에 할 수 있는 문제기 때문에 또 새로운 사건에 대비될 수 있는 문제거든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러니까 그런 이야기할 때 그 이야기를 통해서 결혼을 해야 됩니까, 안 해야 됩니까 하는 질문을 통해서 예수님이 답이라는 것을 다시 깨우치면 돼요. 이것은 내가 결혼하고, 안 하고 관계없이 사탄으로 지배받는 이 세계에서 결혼해도, 안 해도 어린양 때문에 구원받았다,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사탄의 세계에서는 분명히 그것만 부각되면 사건화 된 이유가 있는 겁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다시 말해서 결혼할까요, 말까요? 하다가 갑자기 죽어버리면 이것은 5분 후에 살 권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5분 후에 멋지게 살아있다는 것을 기정사실화 시켜서 내년에 결혼할까요, 말까요? 묻는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다시 조용히 이야기합니다. 그냥 흐르는 데로 사세요. 사시면서 사건에 말려든 거예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아들이란, 이스라엘이란 것은 원래 아들의 자리, 예수님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건방지게 자기가 아들이라 하니까 아들인 줄 알았던 거예요. 그게 존재로 이해한 겁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뭐냐? 이스라엘 존재를 어떻게 지키고 사수하고 이것은 천국에 보내볼까 애쓰는 그 자체가 이스라엘을 멸망한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구원받는데 구태여 집단화 된 이스라엘을 건지려고 구원받으려고 시도한 자체가 그들은 옆 나라와 타협할 수밖에 없었고 구원은 하나님의 이름에 있다고 했건만 애굽의 힘을 빌려왔고 바벨론에 의지하다가 그들과 함께 다 망한 거예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런데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고 망하는 그 자체가 곧 망하는 그 자리에서 비로소 그동안 숨겨진 구원의 자리가 된 거예요. 누구 하나 망해서 재가 될 때 그 재에서 생명나무가 재를 뚫고 나옴으로 말미암아 죄보다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더 위대하다는 사실을 망하는 사람을 통해서 우리한테 증명해 보이는 겁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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