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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의 죽음

아빠와 함께 2024. 6. 3. 22:10

사흘의 죽음 

 


히브리서 1:10-11에 보면,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창조는 기존의 세상 창조가 아니라 저주와 복의 창조입니다. 지옥과 천국의 창조입니다.  
 
주님에 의해서 성도는 자기 안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반복적으로 작동이 일어납니다. 이는 곧 이미 자신은 ‘죽은 자’로 간주되어 오로지 ‘이미 죽은 자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원칙’을 나타냅니다. 십자가 자신 분만이 우리에게 명령할 수 있습니다. “일어나라!”  

 

부분의 총체, 부분의 전체와 진짜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전체 사이에 뭐가 있느냐? 단절이 있습니다. 이게 끊어져 있어요. 수정해서 들어갈 수 있는 게 안 됩니다. 인간들이 인간들을 만나봐야 그저 부분과 부분으로 알 뿐이지 전체는 될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이 단절돼 있다는 이 사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이 사실이 사도신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 사도신경 아시죠?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거기에 보면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이렇게 되어있어요.

 왜 사흘인가? 사흘의 뜻이 뭐냐? 왜 하필이면 3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는지 사도신경에 보면 해답이 나와 있어요.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죽은 자와 산 자를 심판하러 오시려면 예수님이 사흘 동안 하신일 속에서 어떤 자가 산자고 어떤 자가 죽었는지 그 기준이, 표준이 사흘 동안에 형성 돼야 해요. 사흘이라는 기간, 예수님이 죽은 기간이 하루가 아니고 3일이에요. 예수님이 3일 동안 죽어 계신 거예요. 죽어 있으면서 3일 동안 예수님은 뭘 통과했는가를 봐야 되는 겁니다.

호세아 6장에 보면 1절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라고 돼 있어요.  

 

호세의 이 이야기는 일단 먼저 예수님이 이루어 주셔야 되거든요. 우리가 되기 전에 예수님 단독으로 호세아의 말씀이 그대로 여기에 응해야 됩니다. 순서가 그런 거예요. 그런데 여기 보게 되면

■먼저 존재하는 자가 있고, 여기 ‘우리’라고 되어 있는데,

■그다음에 두 번째는 그 존재하는 것을 찢어버려요. 이게 두 번째 단계 순서고요.
■세 번째, 찢어진 것을 도로 낫게 하시고, 즉 싸매 주시는 단계가 있어요. 이렇게 세 번의 절차가 필요한 겁니다. 원, 투, 쓰리, 에요. 그 세 번의 절차에서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기 때문에 3일 뒤가 우리가 사는 날이 되느냐 하는 거예요. 도대체 이 3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사는 날이 되는가?

지층판이 끊어졌어요. 단층이에요. 단층이 되면 끊어진 단면이 나오잖아요. 예수님이 끊어진 단면이에요. 너희들이 부분적으로 아는데 그 부분은 다 합쳐도 절대로 전체가 될 수 없다. 부분에서 전체로 가는 길은 끊어져야 된다. 왜냐면 심판을 심판답게 하기 위해서 끊어진 그 기간 동안에 주님 하신 것, 어떤 자가 죽은 자고 어떤 자가 산 자인 것을 주께서 정리하는 그 순서, 절차가 필요한 겁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내가 예수님 말을 믿는 게 아니고, 주의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오는 거예요.  

호세아 말씀은 예수님부터 먼저 지켜야 되기 때문에. 예수님이 지킨 그것이 그대로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그 호세아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작동하고 있는 겁니다, 살아서. 세 번째가 ‘반 때’입니다. 이 반 때가 무슨 뜻이냐?
2분의 1인데 그다음의 사태, 그다음 세계의 전체를 2분의 1로 나눠서 보여주는 거예요. 2분의 1은 죽은 자의 전부가 2분의 1, 나머지 2분의 1은 천국 갈 사람의 전부가 2분의 1, 둘이 합하면 3일이 되는 겁니다. 세 번째 날이 되는 거예요.

사도신경 다시 보게 되면 주께서 사흘 만에 죽은 자에서 살아나신 이유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한다, 이거에요. 산 자와 죽은 자에 대해서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책이 두 권이 있는데 한 책은 인간의 행함에 대한 책이다, 인간의 행함은 인간이 자기에 대해 서술한 거예요. 내가 이렇게 뭘 했다는 걸 서술한 거예요. 이게 행위책이에요.
생명책은, 주님이 뭘 했다는 거예요. 아버지 앞에 나는 이런 일 했다는 게 생명책입니다. 예수님 쪽은 살아있는 게 2분의 1이고, 행위책은 뭐냐? 죽은 자가 지옥 갈 수밖에 없는 것을 보여주는 2분의 1이에요.  

 

한때를 왜 반 때로 나누느냐? 그래야 단절이 돼요. 불연속성이 되는 겁니다. 이쪽 2분의 1에서 저쪽 2분의 1로 못 건너가요. 2분의 1 자체가 이제까지 살았던 세상의 전부를 보여주는 2분의 1, 앞으로 등장할 2분의 1은 2분의 1의 단절을 지나서 새롭게 등장할 전체는 2분의 1로 보여줍니다. 인간은 그 반을 넘어올 수가 없어요. 왜냐면 십자가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넘어올 수가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살았다, 하는 모든 것들은 죽여버리는 그 날이 바로 세 번째 날에 있어야 될 2분의 1을 보여주는 그 사건의 날입니다. 2분의 1. 세상에 때가 반 때라는 게 없잖아요. 반 때라는 게 인간 세상에는 없어요. 때라는 것은 숫자를 셀 때, 카운트 할 때 그때가 어떤 때든, 1초든 1분이든 1시간이든 하나로 쳐버려요. 반이라는 것은 성립이 안 됩니다. 인간 머리에선 반이라는 게 없어요. 반이라는 건 뭔가 온전치 못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어? 내 반쪽이 날아가 버렸어.’ 이렇게 반은 온전치 않아요.

주님께선 이 세상이 온전치 않다는 겁니다. 어디에서 막히느냐? 한때, 두 때, 십자가 그 반 때에서 막혀버린 세상은 온전치 않은 세계에요. 이 온전치 않은 반 때의 세계를 자재로 생각해서 그걸 인수해서 그 2분의 1에서 전체를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20절에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나 자신의 동질성에 단절이 없고 끊어짐이 없으면 이건 생명이라고 할 수 없어요. 기존 세계의 이어짐은, 이것은 부활도 아니고 생명도 아닙니다. 히브리서의 말씀처럼 모든 세계는 다 무너져야 돼요. 예수님께서 무너지게 하시는 겁니다. 왜냐면 예수님께서 단절을 거쳐서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실 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상속자가 아니라고요. 상속자에서 끊어짐을 우리는 알아야 돼요. 끊어지고 상속자는 따로 있어요. 상속자가 그다음에 어떻게 하느냐? 죽은 우리를 불러 줄 때, 불러 줄 때 우리는 주님의 행하심에 의해서 부름 받은 나라가 천국입니다. 내가 행한 것, 내가 믿은 것 말고.

로마서 8장 30절에 그 대목이 나오잖아요. 여러분이 이걸 다 외우고 있으니까 굳이 찾아볼 이유도 없겠지만요. 29절부터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복사 한다고 했지요, 복제를 해버려요.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29, 30절)

예수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죽으심으로서 죽음의 단절을 하시고, 그 단절된 2분의 1의 새로움을 가지고 거기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어서 부활의 능력이 오게 되면 그 부활의 능력에 의해서 우리에게 부르심이 이루어지고, 그 부르심이 이루어진 것은 예수님에게 이루었던 모든 상속분을 같이 공유하는 하늘나라 백성이 되게 하셨다 그 말이지요.

 


한때, 두 때, 반 때, 있는 것 찢으시고 찢으신 것 다시 새롭게 완전하게 치료해주시는 그 기간, 3일의 십자가라는 단절성이 우리 내부에 들어와야 돼요. 우리 안에서 십자가가 매일같이 반복되는 겁니다.  

광야는 나를 장례 치러야 할 환경이에요.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죽어가는 그러한 환경이 이 세상입니다.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다는 것, 내가 손댈 수 없는데 주께서 죽여주신다는 이것이 얼마나 큰 기쁜 소식인지요?  

 

고전11장 23절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이게 바로 제사입니다. 주께서 잡히시던 밤, 주께서 죽고 난 뒤에 남기신 그 떡과 그 피를 우리가 우르르 와서 먹고 마시는 거예요.
주께서 3일 동안 이루었던 그 결과물, 십자가 사건의 결과물, 이것이 우리 안에서 계속 작동하도록 참여하는 것, 이게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러면 주님 혼자 하면 되는데 ‘우리’라는 존재는 왜 그렇게 있느냐? 기생 라합과 여기에 두 정탐꾼과 거기에 하나님이 개입해서 만들어낸 것이 창문에 내 걸린 붉은 줄이었습니다. 이 3인 1조가 되지 않으면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 바로 붉은 줄이에요. 기생 라합, 기생 라합은 자기의 고향을 떠나버렸어요. 그리고 정탐하러 온 정탐꾼, 천사와 같은 정탐꾼, ‘날 숨겨줘’ 날 숨겨달라 하는 그것, 기생 라합이 숨겨줬잖아요. “숨겨줘.” 그리고 “날 숨겨줬으니까 이 예수, 또는 이 예수에 속한 천사를 숨겨줬으니까 내가 너를 잊지 않으마.” 곧 “네가 나를 시인했으니까 나도 마지막 날에 너를 시인하마.” 이러한 협약, 이러한 계약, 약속, 그렇게 만나도록 주선하신 분은 하나님 아버지, 그렇게 해서 생긴 것은 십자가 피, 오직 끊어낼 수 없는 나를 끊어낸 그 십자가, 그 십자가가 여러분 속에서 늘 작동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산 자와 죽은 자,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고 천국과 지옥, 우리가 선택할 문제가 아닌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우리는 입 다물고 멸망하는 세상과 함께 멸망하고 죽으면 되는데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십자가 알려주셔서 이제는 십자가를 믿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가 우리 안에서 작동하는 그러한 운반체로 만들어 주셨사오니 이제는 사나 죽으나 십자가 하나만 자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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