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에 거룩
2020년 9월 27일 본문 말씀: 빌립보서 4:8-9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그 조건이 상당히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조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어떤 일을 해도 덕이 있고……, 여기 기림이라는 뜻은 존경한다, 칭송한다, 그런 뜻이에요. 항상 존경할만하고, 칭찬받고, 칭송할만하게 사는 것, 이런 결과,
내게 배운 복음을 너희들이 제대로 이해한다면 필히 이런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지난 시간 4장 4절에도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이게 골라가면서 기뻐하라가 아니라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그 다음에 6절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염려할 것 안할 것 네가 가려내지 말고 모든 일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다. 오늘 본문에서도 무엇에든지 경건하고 바르고 참하고 사랑스럽게 살게 된다. 그걸 언급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아는 자에게는 이러한 결과가 필히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복음이 갖고 있는 그 내용을 아신다면 이것이 상당히 우리에게 무리한 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예외가 되는 해당사항이 없어요. 전면적이지요. 전체적이고 일괄적입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복음은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를 추적하고 심사하고 따지는 것이 아니고 본질 자체를, 본성 자체를 바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복음이 우리의 본성을 바꾸지요.
그러면 우리의 본성은 어떠했는가 에베소서 2장 3절에 “전에는 우리도 다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인간의 행동 하나하나를 따지는 것이 아니고 본질을 따지는 거예요. 본성을 따지는 겁니다. 너희들이 아무리 점잖고 훌륭했지만 복음을 알기 전까지 너희는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였다는 겁니다. 네가 몰라서 그렇지 하나님은 알고 계시고 그리고 복음 안에 그 내용이 들어 있다는 거예요. 복음 안에 어떤 내용이 들어 있느냐 하면, “너는 태어날 때부터 본질상 저주받아야 되고 진노의 대상이다. 본성 자체가 그렇다 행동을 고친다고 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복음 안에 들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점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복음이 어떤 복음이었기에 우리는 그것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그게 있다고 생각합니까? 도대체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지요. 우리는 이 복음을 모르고, 자기 본성 자체가 처음부터 저주만 나오는 진노의 자녀일 수 있다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자꾸 뭐든지 최선을 다하고 향상을 하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개선의 여지를 보이면 되지 않겠습니까, 점진적 발전을 하면 되겠지요, 라고 이런 식으로 억지를 부리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든 인간에 대해서 타인이에요. 영원한 타인. 하나님은 인간세계에서 진짜 하나님은 미움과 증오와 살해의 대상으로 규정이 된 겁니다. 이게 전체적이고 전면적이에요. 일괄적입니다.
십자가사건부터 출발해야 될 텐데 사람들은 내 마음의 하나님부터 출발한 겁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하는 일이 뭐냐 하면, 십자가라는 철심을 거기다 박아버린 거예요. 내 안에 신이 나오는 그 장소에 십자가로 철심을 꽂아버리면 거기서 뭐가 고사되느냐 하면, 자아라는 것이 고사가 돼요.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고,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 하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어떤 경우가 있더라도 항상 경건하고, 착하고, 옳고, 바르게 살고, 사랑할만하고, 칭찬할 만큼 살려면요, 이것은 내가 주인공이 되는 한 이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아는 이 땅에서 항상 세상이 부당해요. 나의 노력한 만큼 대가를 치러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불만족스러워요. 그리고 내가 나를 봐도 미흡해요. 우리가 항상 인상 그리면서 평생을 살아가는 이유는, 내가 원하는 것과 실제 나와 차이가 있고 내가 나 자신이 보기에 너무 보잘것없어요. 여기에 분노하는 겁니다.
■본성은 부분을 가지고 이야기하지 않고 일부를 가지고 티 잡지 않습니다. 전체냐 아니냐의 문제에요. 전체가 다 악하면 다 악한 거예요. 본성이 악하면 다 악한 거예요. 본성이 바뀌었으면 뭐가 되어도 다 선한 거예요. 다 정결한 거예요. 본성이 바뀌면 성도가 되어서 철심이 십자가로 꽂혀서 자아가 고사가 되어버리면 죽어버리면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또 우리보기에도 이유 없이 무조건 우리는 선하고 이유 없이 무조건 참되고 정결합니다. 거룩합니다.
이게 믿어져요. 이유 없이 십자가 꽂혀버리면 이유 없이 무조건 의로워요. 십자가 꽂히면 당당합니다. 여러분, 당당하지 않거든 나대지 마세요. 자아가 내 몸의 주인공이 아니라 자아는 박살나고 주님이 이 몸을 다루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주님이 이 몸을 다뤄요. 하나님께서 몸을 만들었지 자아를 만든 것이 아니에요. 사람들은 시작과 끝을 모르기 때문에 몸이 있으니까 몸이 배고픈데 우리는 내가 배고프다고 이야기해요. 몸이 기뻐하는데 내가 기뻐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몸의 자리에 나를 집어넣는 이유는, 몸의 주인을 만나지 못해서 그래요. 주님이 우리를 보기에 우리가 기쁨이 된다는데 우리는 싸가지 없이 톡 끼어들어서 “내가 보기에 내가 기쁘지 않는데 왜 주님은 나를 기쁘게 보십니까?” .
그러면 주님은 “ 네가 왜 거기서 끼어드느냐?” 그 말입니다. 네가 네 몸의 주인이 아닌데 우리는 내가 죽을까봐 걱정돼요.
성경을 보세요. 천국은 나의 범주와 무관한 동네에요. 천국은 나의 범주를 비켜가고 있다고요. 내가 살아 있는 한 천국에 못 간다. 그 말입니다. 천국은 내가 박살나야 갈 수 있는데 내가 가는 천국은 조작된 겁니다. 날조된 겁니다.
도중에 주인이, 내 몸의 주인이 바뀌어야 돼요. 우리 몸을 받아주는 곳이 천국이지 나를 받아주는 곳이 천국이 아닙니다. 몸이 아프지요 내가 아픈 것이 아니잖아요. 내 자식이 아픈 것이 아니고 주님의 자녀가 아프지요. 내 자식이 아픈 것이 아니고! 나라는 것은 이미 본질상 저주 진노의 자녀입니다.
복음이 뭡니까? 십자가잖아요. 십자가라는 것은, 너희들이 나를 집단적으로 죽였다. 그 내용이 복음의 내용이에요. “너희들이 나를 죽였다. 너희들은 네 몸을 잘못 사용했다.” 그 말입니다. “네가 네 몸을 사용한 것이 아니고 너라는 가상의 이미지를 줬던 그 악한 마귀가, 주님의 소유의 몸을 악마가 다뤄서 으쌰으쌰 선동해서 나를 죽이게 했다.” 이게 복음의 소식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딱 받아들이는 순간 ‘아, 내가 헛것을 쥐고 있구나. 나 자체가 헛것이구나. 몸의 주인님께 돌려드려야지. 내가 남의 것을 왜 내가 내 것이라고 우기고 있느냐?’ 돌려드리면 무엇에든지 참되고, 무엇에든지 경건하고,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사랑받을 만 한데 왜 내가, 쓸데없이 주인도 아닌 내가 쥐고 있으니까 무엇에든지 더럽게 만들잖아요. 악한 것이.
선한데 이유가 없어요. 착한데 이유가 없고, 천국가는 데 이유가 없습니다. 자꾸 이유 만든 착함이 이유 없는 착함을 방해하고 있어요. 내가 이렇게 착하게 살았으니까 나는 착하다, 라는 그것이 정말 이유 없이 착한 주님의 선언, 약속을 방해하고 있다고요. 아직도 악마편이 되어가지고.
이 자아가 문제가 돼요. 자아를 어떻게 빼내느냐? 하나님의 방식은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예수의 옷을 뒤집어씌워버립니다. 27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몸과 거룩한 옷의 만남이에요.
대제사장이 입던 옷이 아주 폼이 나요. 출애굽기 28장 4절에 보면 “그들의 지을 옷은 이러하니 곧 흉패와 에봇과 겉옷과 반포 속옷과 관과 띠라.” 그리고 12절에 “그 두 보석을 에봇 두 견대에 붙여 이스라엘 아들들의 기념 보석을 삼되” 그 뒤 15절에 “너는 판결 흉패를 에봇 짜는 법으로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공교히 짜서 만들되.”
하나님께서는 자아가 결합된 이 몸의 더러움을 지금 거룩한 몸으로 바꾸는 작업을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서 전개시킵니다. 그 약속을 전개시킬 때 맨 먼저 등장한 것이 약속을 인체에다 부착시킨 것이 대제사장의 옷인데 그 옷이 무슨 옷이냐? 거룩한 옷이라는 거예요. 거룩한 옷이에요. 대제사장 직분자체가 거룩하기 때문에. 거룩한 옷이에요. 속된 옷이 아닙니다. 거룩한 옷을 입고 속된 세계에 드디어 나타나는 겁니다.
내가 뭐 윤리 도덕가지고 깝죽대고 뭐 해봐야 나에게서 나오는 것은 모든 것이 진노 받을 만한 저주거리만 나옵니다. 저주스러운 윤리고 저주스러운 도덕이에요. 여러분은 윤리적으로 살았다, 도덕적으로 살았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까지 갈 것도 없어요. 철학적으로만 따져 봐도 그것은 도덕윤리가 나온 것이 아닙니다. 힘이 나온 거예요.
남을 용서해도 나에게 힘이 되고, 남을 배려해도 누적된 내가 꼭 살아남아야 되고, 나만 가치 있다고 자기 자신을 스스로 키워내는 정립된 힘으로 작용하게 되어 있어요. 남에게 봉사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전부 다 힘이다 그 말이지요. 주보대, 전화받침대, 얼마나 참하게 만들어놓았는지 혹시 힘 아니에요? 그거 자기의 아니에요? 전부 다 힘으로 작용하는 거예요. 힘으로. 날 무시하지 말라고.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죽었잖아요. 그것 때문에. 자체적으로 거룩을 양산하는 그 힘 때문에 하나님께서 튕겨져 나갔어요. 자체마음속에 신이 있거든요. 나를 거룩되게 인정해주는 그러한 자체적인 신, 귀신이지요, 악마지요, 우상이고. 내가 나를 살리기 위해서 가상 신을 만들어놓았을 때 “아이고, 이 가짜야!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자기 본성도 모르고, 본질도 모르고. 아나, 이게 본질이다.” 해서 십자가로 그 출처, 신을 만드는 그 출처 한복판에 꽂아버리는 것, 이게 성령의 역사입니다.
대제사장이 이 옷 입고 거룩한 하나님을, 인간의 대표가 되어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러니까 대제사장이 이 거룩한 옷을 입는다는 것은 소방수가 방화복 입는 것, 잠수부가 잠수복 입는 것과 같아요. 이것 안 입으면 죽어요.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저주받아 죽어요. 심판의 불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일괄적입니다. 이 거룩은 우리가 부분부분 인간들이 지혜를 짜내서, 윤리도덕 짜내서 조각조각 모아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일괄적으로 주어져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불 심판은 전면적으로 일괄적이기 때문에.
8절부터 주목해야 할 단어는 ‘무엇에든지’ 에요. 무엇에든지. 어떤 때는 착하고 어떤 때는 안착하고가 아니라 무엇에든지, 어떤 경우를 만나든지, 어떤 상황이 되든지, 무엇에든지 정결하고,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고. 그것은 뭐냐? 골라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항상 기뻐하고, 알아서 관용하고 알아서 염려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경우라도 걱정하지 않고 어떤 경우라도 염려하지 않는 것.
일괄적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백날 까불어봐야 나올 것은 저주밖에 안 나오니까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따지는 것도 귀찮아. 일괄적으로 거룩이에요. 이유도 없어요. 그냥 거룩이에요. 그냥 정결하고 착해요. 자기가 보기에는 어설프더라도, 자기는 하루 종일 인상 그리고 화만 내고 있어도 주님 보시기에는 “아이고, 칭찬받을만하다. 아이고, 칭찬받을만하다.” 이런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 말입니다.
이게 성령 받지 않은 사람들, 이게 믿어지지 않아요. 맨 날 자기만 관찰해서 자기 다독이기 급급해서 성경에서 무엇에든지, 모든 것에, 매일같이,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보시기에 나를 착하고 의롭고 거룩하게 본다, 라는 그러한 내용에 대해서 미안해서라도 황송해서라도 우리는 거부하고 싶은 생각이 막 들 거예요. “하나님, 내 성질 압니다. 너무 이러지 마세요. 너무 저를 붕붕 띄우지 마세요. 내가 얼마나 성질 못됐는데요?” 하면 주님께서 “네가 성질이 못된 것이 아니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다. 네가 성질이 어떤 때는 인자하고 성인 같고 악하고, 그게 아니야. 본질상 선한 것도 더러워.”
왜? 그것은 네 자아가 네 몸을 기어이 내 것이라고 우기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통째로 옷으로 뒤집어씌웁니다.몸과 옷의 만남이에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몸과 약속의 만남이에요. 다른 말로 몸과 언약의 만남 통째로 뒤집어씌우는 겁니다.
그 예가 여호수아 3장 8절과 15절에 나와 있습니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수아 3장에서 요단강 건너갈 때 8절에 보면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 그 다음 15절에 “(요단이 모맥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16절에 “곧 위에서부터 흘러 내리던 물이 그쳐서 심히 멀리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 읍 변방에 일어나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물이 밀어붙이는데 물이 더 이상 그쪽으로 못 가게 만드니까 물이 쌓이는 것에요. 저쪽 물은 이미 빠지고 이쪽으로는 물이 쌓이고 중간에 요단강에 길이 난 겁니다. 그 가운데 누가 장풍을 썼어요? 누가 거기 서 있느냐는 말입니다. 거룩한 옷을 통째로 뒤집어 쓴 언약궤를 메고 서니까 잡아 죽일 듯이 달려들던 그 홍수난 물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는 그냥 패스, 통과시키는 거예요.
이것이 요한계시록에 나와요. 요한계시록 홍해 상황으로 나와요. 유리바다 건너갈 때 그냥 통과해요. 왜? 옷이 색깔이 피로서 하얗게 씻음 받은 사람은 그냥 통과해요. 그냥 통과하는 거예요. 왜?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자아한테 아무것도 요구하거나 문제 삼거나 닦달내지 않습니다. 이게 복음 안에 들어 있습니다.
지옥 가는 사람이 가장 지옥스러운 일은 이 몸이 안 죽는다는 게 문제에요. 힘들면 죽으면 돼요.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없는데서 왔다가 없어지는 것이 인생이라고 보는데 그게 아니고 없는데서 왔다가 죽을 몸이 되는 그 간격이 인생이에요.
그런 몸 가지고 어떻게 자기를 구원할 수 있습니까? 내가 나를 측정하는 것 자체가 이미 사달난 거예요. 내가 얼마나 착하게 살까, 얼마나 착하게요, 내가 얼마나 훌륭하게요, 그 자체가 사달난 거예요. 나를 스스로 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모든 조건에서 자기를 잊으면 돼요. 모든 조건에서 나를 빼기 하면 돼요. 수학에서 더하기 빼기 있잖아요. 나를 빼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빼기만. 주께서 교회 오게 하셨다. 나를 빼면 돼요. 나는 주님 앞에 다뤄지면 그만이니까.
다윗은 장차 올 천국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시편 23편 1절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게 바로 ‘무엇에든지’거든요. 혼자 살지 않는다는 겁니다. 목자에 딸려서 가고 있다는 겁니다. 목자가 몸체라면 우리는 그 뒤에 따라가는 그림자.
그림자가 홀로 그림자 될 수가 없지요. 우리는 예수님의 그림자에요.주님 때문에 인생 살고 있는 겁니다. 망해도 내 몸 안 망했습니다. 주님 몸 망했습니다. 거지 나사로 거지되어도 거지 나사로 몸이 아니고 주님의 몸을 거지되게 하셨습니다. 개한테 핥게 만들었고 지옥 간 부자는 부자 되나 안 되나 자기 것이라.
죽은 몸이 이제는 원래 주인이 회수해가는 거예요. “네 몸은 네 몸이 아니었다. 내 몸이었어.” 언약을 위해서 나타나야 될 몸이었습니다. 없는데서 생겨난 몸입니다. 언약은 결과가 두 종류에요. 하나는 복, 하나는 저주에요.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둘로 선별했습니다. 하나는 저주, 하나는 복, 하나는 복, 하나는 저주. 아브라함약속을 인정하지 않으면 저주, 아브라함 약속을 인정하면 복.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어떤 자기에게 주도권이 없어요. 내 인생 내가 관장할 수 있는 권한은 인간에게는 아예 없습니다. 인생에서 내가 주인이라는 그 생각을 빼세요. 그거 빼야 돼요. 아, 안 빠지네. 이게 이스라엘 역사 같은 경우에 이스라엘 내내 안 빠졌습니다. 빠질 수가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어떻게 했는가? 로마서 보면 하나님의 하신 작업이 나옵니다. 로마서 9장 27절 보시기 전에 로마서 11장 4절에 엘리야 이야기가 나오는데 잠시 말씀드리고 로마서 9장 27절로 넘어가겠습니다. 엘리야가 훌륭했지요. 자기밖에 믿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자기밖에 없으니까 바알 믿는 아합왕이 마지막 남은 선지자까지 체포영장 발부해서 수배자로 만들었지요.
그래서 엘리야가 그걸 알고 “나만 남았습니다. 내 목숨만 찾습니다.” 로마서 11장 3절에서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4, 5절에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얼마? 7천명.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는 방식으로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습니다.이스라엘 속에 남은자라는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계속 겉에 있는 이스라엘을 버리는 거예요.남은자를 이스라엘은 몰랐어요. 누가 남은자인지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없는 자를 언약의 사람으로 만들어내기 위해서 그 창조의 작업에 구약부터 개입하신 거예요. 인생에 개입하신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인생이라 하는 것은 뭐냐? 없음에서 죽을 몸 되는 간격이다. 그 간격에 누가 뛰어드는가? 이미 죽었던 예수님이, 하나님이 그 간격에서 살아서 인생 속에 들어왔다. 그 들어온 사례가 뭐냐? 구약 이스라엘이다. 그래서 뭘 하시는가? 이스라엘을 없애면서 이스라엘 속에 남은 자를 찾아내시는 그러한 선별작업에 나서신 거예요.
선별작업이라 하는 것은 가을에 추수할 때 과일 상품 될 것, 상품 안 될 것, 당도 떨어지는 것, 좋은 것, 이렇게 선별하듯이 주께서 선별작업을 하는 그것이 바로 남은자작업이에요. 그 남은자작업을 할 때 다른 사람들은 행함으로, 자기자신이 여호와를 행함으로, 믿음으로 구원받겠다, 하는 모든 것은 탈락이요, 로마서 11장에서 그 남은자가 어떻게 남은 자냐?
행함이 아니라는 거예요. 행함이 아니고오직 은혜로 남은자가 있을 것이다.은혜로! 은혜로, 은혜로! 행함이라 하는 것은자아가 살아 있을 때는 필히 행함이 나와요. 왜냐하면 자아가 내가 살리는 그 작업을 내가 멈추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나를 지키고자 하는 그 작업을 멈추지 못하거든요.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 자아의 한계를 이루게 만들어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방민족을 만나게 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좀 골치 아픈 대목인 것을 염두에 두고 잘 들으세요. 이스라엘로 이방민족을 만나게 해가지고 이스라엘이 스스로 이스라엘은 하나님 것이 아니고 내 것이라는본질상 진노의 속성을 발현하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듯이 무슨 일에든지, 무엇에든지 참되고, 무엇에든지 경건하고,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고, 할 때 이 ‘무엇에든지’를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는 항상 성도로 하여금 안 믿는 사람, 불신자, 타인들을 만나게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에 걸쳐 있는 장착되어 있는 그 보석……, 그 모든 의미를 예수님께서 그냥 대제사장 옷 입고 오신 것이 아니고 불신자들, 마귀의 종들과 맞닥뜨리면서 이 모든 장착된 의미를 다 성사시켰거든요. 완성을 시켰다고요. 예수님은 시장 통에서 바리새인 사두개인 모든 사람들과 격의 없이 다 만났습니다. 다 만나서 예수님의 확정된 본질 나는 아버지의 뜻을 이룬다, 그런 식으로 잠복되어 있는 마지막 남은자로서 자기역할 다 했습니다. 부딪혀야 됩니다. 만나야 돼요. 그렇게 해서 그게 바로 하나님의 남은자 선별과정입니다.
내가 스스로 내 힘으로 정결하고, 옳고, 바르게 살고, 경건하고, 사랑할만한 사람으로 되겠다는 이 모든 내가 나를 여전히 포기 못한다, 나는 내가 있어야 나는 나답다, 라는 것을 그렇게 무차별하게 박살내면서 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게 만들지요. 나에 대한 희망, 내가 믿어야 구원받고, 내가 잘해야 칭찬받고, 내가 잘해야 하나님형상 본받는다는 이 모든 나에 대한 기대를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쉴 새 없이 주어지는 상황을 통해서 그것이 불가능함을 일깨워줍니다. 인간이 바르게 산다는 것은 인간에게 없다는 것, 그건 너의 헛바람이다.헛바람 포기하라는데 무슨 고집이 세서 왜 자꾸 본인에 대해서 포기를 안 해요.
하나님의 평가는 놔두고 약속이 있는데 그것은 놔두고 자기가 자기를 평가해서 자기를 포기 못하는 것,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는 식으로 이스라엘속의 남은자를 끄집어내듯이 주님께서는 한평생 우리를 포기하고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을 끄집어내는 식으로 우리를 남은자로 쳐줍니다.
“너는 항상 옳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터무니없는, “너는 나의 작품이야.” 너 같은 인간, 자아를 잊어버린 인간이야말로 너의 욕심이 없는, 너 자신의 감각이 없는 자만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감각, 예수님에 대한 그것만 쳐다봄, 바로 그 세계가 성경에 나오는 천국입니다. 그게 하나님나라, 아들의 나라, 예수의 나라, 하나님의 형상의 나라입니다.
우리 힘으로 형상을 이루는 게 아니에요.형상자체가 완제품으로, 전면적으로 이미 우리에게 침투했어요. 예수님입니다.예수님이 우리 속에 들어왔어요. 그러면 우리가 더 이상 나에 대해서 손댈 것이 없습니다. 주께서 알아서 이끄시고 인도하세요.
로마서 9장 27절 보게 되면,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바다의 모래같을찌라도, 그 많은 숫자가 있을지라도 남은자만, onl,y 오직 남은자만 남긴다는 것은 내가 스스로 남게 될 어떤 시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기 때문에 나밖에 몰라요.남은 자는 주님께서 내가 스스로 남은 자 될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사태가 우리에게 쳐들어옵니다. 그게절대절망이에요. 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살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라고 만들어요. 내가 갈 곳은 지옥밖에 없다. 그 말 맞아요. 내가, 나, 자아, 자아가 갈 곳은 지옥밖에 없습니다. 자아가 갈 곳은 지옥밖에 없어요.
그 지옥밖에 갈 수 없는 자아를 주님의 자아가 섞어버립니다. 섞어버린다고요. 만화영화에 그런 것 많잖아요. 주인공이 절벽 끝으로 쫓기다가 결국에는 끝에 가서는 폭포 밑으로 떨어집니다. 떨어지는데 세상에 어디서 날아왔는지 슈퍼맨이 날아와서 절벽에서 낙하하는 그걸 탁 캐치해서 올라갈 때 그게 이유 없는 정결이고, 이유 없는 착함이고, 이유 없는 사랑이에요.
우리한테는 날개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하늘나라 갈 수 있는 방안이 없어요. 그냥 본질상 진노기 때문에 지옥이 입을 벌리고 어서 오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갈 수밖에 없어요. 중간에 성령이, 천사가 날개를 펴서 우리를 공중 납치할 줄은 상상도 못했지요.
그것을 가지고 고린도전서 13장 6절에서 8절에 보면 그걸 가지고 사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하고 7절에 보면, 모든 것을 참는다. 여기 또 ‘모든 것’이 되풀이해 나옵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차 떼고, 포 떼고, 다 빼고 나면 마지막 남는 것은 모든 것, 곧 다른 말로 하면 사랑, 다른 말로 모든 것, 전면적인 것, 부분적이 아니고 전면적인 것, 마지막 전체그림,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에요. 주님이, 내 인생이라고 착각하는 그 인생 속에 개입하신 거예요. 우리를 납치하신 거예요. 그분이 누구냐? 목자입니다. 그분이 바로 목자에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라고 다윗이 이야기할 때 다윗은 뭘 생각했습니까?
자기 형편, 꼬라지가 어떤 꼬라지라도 상관없다는 거예요. 왜? 내게 부족함이 없기 때문에. 어떤 경우라도 부족함이 없어요. 어떤 경우라도. 모자람이 없어요. 미흡함이 없어요. 짜증내고 싶어도 짜증낼 조건이 없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어떤 경우에, 모든 경우에, 주의 지팡이가 더 크게 보이고 주의 안위하심이 더 뚜렷하게 보이게 만들어요. 모든 것. 제가 언젠가 그런 강의한적 있습니다. 교회 나와 찬송하고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그딴 것 무슨 소용이 있냐는 말이에요. 코로나 불어오면 예배 참석도 안하고 전부 다 마스크 쓰고 앉아서 교회 나오지도 않고 인터넷으로 보고 있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니고그냥 주를 사랑하면 신앙이에요. 집구석에 있든지 화장실에 있든지 주를 사랑하면 그게 신앙입니다. 왜?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기 때문에 이것은 주를 사랑하라는 말이 아니고 모든 인간은 본질상 저주받게 되어 있다는 이것, 하나님 보시기에 몸과 자아가 연합되면 잘못된 연합이에요.
몸과 자아가 연합되면 안돼요. 안되는데 결합된 거예요. 몸은 주님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닌데 왜,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영탁이 노래,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자아가 왜 거기 끼어드느냐, 자아가 몸을 왜 납치하느냐는 말이지요. 주님이 납치해야지, 네가 왜, 손톱 발톱 이걸 왜 네가 소유하느냐는 말이지요. 어차피 우린 죽을 몸도 아닌데.
영원히 둘 중 하나 아닙니까? 안 죽어요. 천당 가서 살고, 하나는 지옥 가서 살고. 이 땅에 죽음은 없어요. 한쪽은 죽음이 없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가 되고 한쪽은 죽음이 있다는 것이 어떻게 변화될 수 없는, 고칠 수 없는, 수정될 수 없는 영원한 저주스러운 저주, 저주스러운 영원함이 그들의 운명이 된 겁니다. 감사의 운명, 사랑받은 운명, 한쪽은 저주해도 저주가 끊어지지 않는 저주스러운 운명.
이제몸과 여러분 사이에 성령이 개입하고 십자가 철심을 꽂아서 여러분의 자아가 갈수록 고사, 말라죽기를 바랍니다.나 같은 것은 싸가지 없는 것 외에는 없다. 끼어들데 안 낄데 구분도 안하고 무조건 끼어들어서 “주여, 내 팔자가 왜 이렇습니까?” 한탄만 늘어놓는 이 악마의 자식, 이것은 여러분,이 육신이 죽는 순간, 그런 아픈 기억도 옛날 꿈처럼 없어질 겁니다.
결국 성도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인도자와 더불어 삽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당당하고 주저없이 삽니다. 어떻게 살아도 복음 안에서 성도는 하나님의 기쁨이 됩니다.(눅 15:10)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다 이루었다 하는데 그 이루었다 함이 믿기지 않고, 와 닿지 않고, 반갑지도 않은 그 이유가 쓸데없이 우리 자아가 내 것이라고 우기는 이 말도 안 되는 반발심과 반항기가 있음을 저희들이 깨닫게 됩니다. 이제부터는 미안한 마음으로, 황송한 마음으로 이유 없는 이 의로움과 착함을 통해서 주 앞에 마음껏 목자로서 대우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지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왜 안식을 누리지 못하나 (0) | 2024.06.11 |
---|---|
존재가 아니고 사건 (0) | 2024.06.06 |
사흘의 죽음 (2) | 2024.06.03 |
강제소환 (0) | 2024.05.25 |
골로새서2장1-23절 (0) | 2024.05.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