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바탕
2024년 6월 2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2:8-9
(22:8) 여러 나라 사람이 이 성으로 지나며 피차 말하기를 여호와가 이 큰 성에 이같이 행함은 어찜인고 하겠고
(22:9) 대답하기는 이는 그들이 자기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을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긴 연고라 하리라 하셨다 할찌니라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셨다는 것은 말로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는 직접 성전을 짓게 하시고 그 성전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만나주셨다는 점에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의 뜻을 전하시면서 참으로 직접적인 교육적 도구를 준비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바로 모세가 시내산에서 돌판을 들고 오신 것과 같습니다. 모세는 그 돌판을 들고서, 지금 하나님의 마음이 이렇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돌판을 깨뜨려버립니다.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언약에 깨어졌다는 것입니다. 약혼자가 결혼하기로 하고 만든 커플 반지를 가차없이 길에 던지고서는 발로 짓밟는 행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내 마음이 이 뭉개진 반지 모습으로 충분하다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단순히 예루살렘이 성전이 불타 없어지는 정도로 언약 깨어짐을 다 반영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신약에 오면 도리어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언약 깨어짐을 알리십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즉 구약에서 그토록 이스라엘을 상대로 날려주시는 율례와 계명을 신약에 와서 예수님에게로 집약되고 집중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만 상대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이미 인간하고는 언약이 끊어진 상태로 돌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과 계시가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주어졌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율법와 법도를 예수님께서 친히 해석하고 설명해주니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살해 의지를 품기 시작합니다. 인간에 대해서 근원적으로 모독했다고 느끼게 된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모독받을만 함을 기정사실로 간주하십니다. 여기에 대한 예화가 신약성경에 무수하게 많이 나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가 그것입니다. 탕자는 결코 자신을 아들답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모든 재산을 허랑방탕해서 다 날린 입장에서 그는 다시 옛적의 위신을 가질 자격자가 못됨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는 신세가 한심스러워서 아버지 집에 취직하려갑니다.
탕자는 결코 자신을 아들로 받아주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갖지 않았습니다. 감히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음을 감수하고 있습니다. 그런 탕자를 아들로 일찍감치 결정해놓으신 것은 아버지입니다. 첫째 아들이, 탕자가 우리 집안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자식이라고 반박을 해도 아버지의 결정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 자리와 아들 자리의 차이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나오는 예도 같은 취지입니다. 바울과 실리를 가두어두었던 감옥에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서 죄수들이 전부 탈출했습니다. 그당시 법에 따라 죄수들이 감당해야 될 형벌은 간수가 다 뒤집어 쓰게 생겼습니다. 간수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사형수로 신분이 변했음을 받아드립니다.
다시 간수로 복직될 것을 기대조차 안합니다. 그에게는 이제 목숨이 언제 끊어지는지만 남아 있습니다. 예레미야 21:8-9에 보면,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또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신다 하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니 이 성에 거주하는 자는 칼과 기근과 염병에 죽으려니와 너희를 에운 갈대아인에게 나가서 항복하는 자는 살리니 그의 생명은 노략한 것 같이 얻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 준해서 보면, 흔히 말하는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이 아닙니다. 그냥 성에 남아 있으면 죽고, 자신을 멸하려 온 적들에게 궁상맞고 비굴하지만 빌고 노예로 팔려가면 산다는 겁니다. 그러나 생각하기 따라 노예로 팔려가는 것이 차라리 죽기 보다 더 못한 신세가 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겁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간수나 구약 예레미야 시대에 나오는 유대나라의 신세나 모두 본인들이 기대하는 ‘생명의 길’이 아닌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풀어놓은 선택지는 인간들이 기대하고 소망과 희망을 주제로 제시되는 내용이 아닙니다. 인간이라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비켜간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무엇을 상상하고 예상하되 결코 자신의 망하는 꼴을 용납하지 않기 떼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간수에게 제시한 살 길을 다시 옛날 직장으로 복직해서 마치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받을 구원은 모든 말씀과 인간사의 운명이 예수님에 의해서 결정난다는 안목을 두고 말합니다.
잠언 8:35-36에 보면,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무릇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생명과 죽음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완수해 내는 것이 아니라 이 우주의 원천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어 그분 속으로 자신이 녹아지는 것을 뜻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났으며”(잠 8:22-24) 즉 자기 인생을 인간 자신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은 근본이나 근원이 아닙니다. 또한 인간은 전체나 전부가 아닙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합니다. 전체를 모르고 부분을 안다고 해서 전체 입장에서 틀린 지식을 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신약의 사도 바울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옛수님을 만나기 전에 스데반 집사에게 죽임을 가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여기고 용기있는 그 죽음에 가담했습니다.
그랬던 사도가 예수님에 의해서 예수님 자기 세계로 납치되어 들어갔습니다. 그 안에서 자신 및 세상을 두루 보니 과연 모든 성경이 자기가 아니라 예수님에게 돌진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망과 생명을 결정하는 그 말씀이 예수님의 행하심에 집중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동안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상상력에 의존했던 겁니다.
실제 하나님의 일하심과 자신이 상상한 하나님의 일하심이 상충되었던 겁니다. 그리고 사도는 말합니다. ‘나는 이미 죽었다’고 말합니다. 혹시 내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우리 주님의 뜻이 있어 살려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삶이란 십자가로 인해서 이미 모든 생명과 사망은 인간이 행함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결정권에 달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이 아무리 죄를 지어도 그것으로 지옥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안목이 바로 ‘자유에서 나오는 안목’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우리 자신을 우리에게서 놔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05강-예레미야 22장 8~9절(구원의 바탕)240602-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2장 8~9절입니다. 구약성경 1085페이지입니다.
“여러 민족들이 이 성읍으로 지나가며 서로 말하기를 여호와가 이 큰 성읍에 이같이 행함은 어찌 됨인고 하겠고, 그들이 대답하기는 이는 그들이 자기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을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긴 까닭이라 하셨다 할지니라”
하나님의 언약은 있었다. 그 증거를 대라. 예루살렘 성이 있다. 그러면 예루살렘 성전이 건재하면 언약은 제대로 가동 중이고, 만약에 예루살렘 성이 불타버리면 이것은 성 하나가 날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언약이 사라졌다는 것을, 끊어졌다는 것을 의미하죠. 바로 이게 유치원 아이들, 초등학교 아이들 가르치는 교육 자재와 똑같은 거예요.
돌판이라는 그 돌로 만든 판을 들고 모세가 내려갈 때, 꼭 어린아이들 가르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너희들 앞에 돌판 있지? 내가 너희들 앞에서 깨뜨린다. 자, 깨졌지? 돌판이 깨진 것이 무엇을 뜻하느냐. 너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깨어졌다는 것이다”라는 뜻으로 보이죠. 서로 사랑하는 남녀 간에 커플 반지를 했단 말이죠. 그러나 어느 날 만나서 여자 쪽에서, 그걸 내리치고, 발로 밟아 쪼갰단 말이죠.
이게 무슨 말이에요? ‘반지 아깝다. 반지 많이 아프겠다’라는 그런 이야기하는 게 아니잖아요. 반지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너와 나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응용문제 하나 들어가죠. 십자가에 예수님이 죽으심이 뭘 뜻하는 겁니까? 이거 복음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버림받아 죽었다는 말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끊어졌으니까 천국 올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하나님의 뜻은 아주~산뜻합니다. 깔끔합니다. 복잡할 게 없어요. “오지 마. 관계가 끊어졌는데, 왜 자꾸 들어오는 거야?” 바로 이 사실을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대목이 오늘 본문의 대목입니다. 하나님의 성이 불타버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깨졌다는 뜻이고, 언약 깨어진 증거가 여기 9절에 보면, 그들이 자기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고 다른 신에게 절했다는 겁니다.
이 본문을 보면서 우리는 살짝 이런 생각이 들 거예요. ‘나는 하나님을 버렸다. 오케이. 나는 버렸어.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절에 가지는 않아. 부처를 믿는 것은 아니야’라고 그렇게 답변할 수도 있잖아요. 하나님을 버린다고 해서, 필히 다른 신을 섬긴다고 그렇게 단정 지을 수 있느냐. 논리상 그렇게 할 수 있느냐를 한번 생각해 봐야 해요.
예수님께서 언약 가운데 이런 언약이 있어요. 십계명에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20:3)라는 것이 십계명에 적혀있습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은 네가 인간이라면 딱 두 종류의 신을 너희들이 믿게 되어있다. 다른 한쪽을 안 믿으면 다른 한쪽을 필히 믿게 되어있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아까 제가 얘기 드린 것처럼, ‘나는 교회도 안 다니고, 절에도 안 다닌다. 나는 나를 믿는다. 그런데 무슨 또 다른 종교를 선택했다는 말인가. 거기에 대해서 답변해 보라’라고 나올 수 있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상대로 하지 않아요. ‘너는 이거 하고, 이거 하지 말고, 이거 아니면 이거 해’라고 사람을 상대해서 이야기한 것이 아니에요.
성경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을 하나 대라면 저는 거침없이 이 대목을 댑니다. “모든 성경은 내게 대해서(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이라”(요5:39)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요. 모든 성경은 우리보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결과적이라니까요. 우리는 결과적이에요. 우리가 나서서 구원받을 수 없고, 심지어 지옥 가려고 해도 지옥을 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옥을 선택할 수가 없어요.
지옥을 선택할 권한도 자격도 없어요.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지옥 못갑니다. 지옥은 하나님께서 선택해 준 사람만 가는 거예요. 일부러 나쁜 짓 해서 지옥 가려고 발악한다고 해서 지옥 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왜냐 하면 천국 지옥은 반드시 예수님을 경유해서 결정되게 되어있어요. 그게 예레미야 21장 8절에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다고 되어있어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당시 유대인 이스라엘 사람에게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라고 이야기했지요? 이게 바로 구약입니다. 구약은 어떤 말씀을 해도 그 당시 구약의 언약 대상자는 이스라엘 사람이에요. 유대인들이었어요. 아직 메시아가 오지 않았습니다. 메시아가 오는 시기는 구약이 아니고 신약입니다.
신약이 되면 이 말씀이 어떻게 다르냐 하면, 사망의 길이고 생명의 길이고 하는 그건 예수님이 결정할 문제지, 우리가 ‘사망의 길 안 가고, 영생의 길 갈래’라는 결정권이 우리에게는 이미 박탈당한 그 이후에 문제입니다. 여기에 나온 예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많이 있는데 여러분들이 쉽게 들었던 이야기 중에서 몇 가지를 제가 골라서 하겠습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지옥 갈까, 천국 갈까?’라는 것을 내가 결정해서 되는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성경의 증거들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간수가 나오는데 이 간수는 바울과 실라를 옥에 가두었다가, 옥중에 죄를 계속 관리하는 책임자였는데, 갑자기 여기에서 밤중에 지진이 일어나서 옥문이 열려서 죄수들 다 도망가 버리고 어떻게 수습이 안 될 정도였습니다.
옛날에는 간수나 교정 책임자들이 죄수를 놓치면 간수 된 사람이 자기 목숨을 대신해서 내놓고 죽든지 벌 받든지 했어요. 왜냐 하면 죄수와 간수가 협작하는 일을 사전에 막고자 그런 잔인한 법을 세웠던 겁니다. 그런데 죄수가 다 달아났어요. 그러면 이 결과는 뭐냐, 이 간수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냥 죽은 거예요. ‘내가 어떻게 하면 살까?’라는 거 없습니다. 이미 죽은 거예요.
죽으려고 할 때, 바울과 실라가 도망치지 않고 간수장에게 옵니다. 와서 오히려 누가 누구보고 위로받냐면, 바울과 실라가 도망치지 않고 앉아 있는 모습이 너무 신기했습니다. 그래서 이 간수는 알았어요. 이 일이, 지진이 일어나서 죄수가 떠난 것이 바울과 실라의 구원과 관련된 일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행16:30)
이 대목에서 “선생님 제가 어떻게 해서 구원을 얻습니까”라는 그런 발언이 나오는, 그런 질문이 나오는 그런 상황이, 본인이 선택할 입장에 있지 않고 이미 죽기로 확정된 입장인 것을 생각해 주셔야 해요. 누가복음 15장에도 나오지요. 탕자가 아버지 재산 다 탕진하고,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 가지고 연명하면서, 결국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면서 본인은 자기에게 자기 결정을, 자기 판결을 내렸어요.
‘나는 이제 어떤 경우라도 아버지 아들은 아니다. 그 어떤 경우라도 아버지 아들 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왜? 아버지 아들 되는 자격을 내 쪽에서 훼손했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내 쪽에서 끊었기 때문에 내쪽에서 다시 아들 되겠다는 염치없는 말은 더 이상 나에게서 나올 수 없다고 확정된 상태에서, 나를 종으로 여겨서 밥이라도 먹여달라고 아버지 집에 갔을 때, 아버지의 결정은 바로, 아들이 일방적으로 내린 결정, ‘나는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아닙니다’라는 결정의 바탕 위에서 일방적으로 내립니다.
“너는 누가 뭐래도 내 아들이다” 누가 뭐래도 내 아들이다. 간수도 마찬가지예요. “어떻게 합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행16:31) 구원을 얻는 것이 다시 간수직으로 복직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게 어려운 거예요, 지금 간수가 경험한 것은 자기가 간수직을 잘못해서 죄수들 대신 자기 목이 달아날 그런 처지에 놓인 겁니다.
어제만 해도 간수장이었어요. 며칠 전만 해도 간수장, 간수장, 간수장, 간수장, 지금은 사형수. 과거가 얼마나 자기가 간수장으로 화려하고 연금 타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자기는 죄수를 대신한 사형수예요. 이 사형수 될 때, 간수장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복직되느냐 기껏 그 정도예요. 주님은 그렇게 되면 간수장이 자기 인생을 선택할 권한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예수를 믿었으니까, 내 인생 무너진 것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다시 회복 시켜주고 만회하고 보상할 것이라는 생각, 그것은 우상입니다. 그런 하나님 없습니다. 내가 뭘 상상해도 절대로 그 상상한 것을 의도적으로 주께서 제켜버리시는 하나님. 예상도 못한 일을 벌이시는 거죠. 그런 예는 수백 가지라서 다 할 수 없는데, 사도바울 생각나서 말씀드릴게요.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을 체포해서 가두고 죽이는 것이,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사도바울의 이 행위가 좀 추잡한 예지만,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어제 토요일 서울시에서 동성애 퀴어(Queer)축제를 했습니다. 여러분, 그 축제에 외국대사관도 참여했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세상에 모든 분위기가 동성애에 대해서 동정하고 그들의 인권을 보호하자는 것이 서양의 대세라면 우리나라는 물건을 팔아먹는 입장이고 수출해야 살거든요. 지하자원 파내서 살 수 없거든요. 수출 제품 생산에서 원 제조가 아니라 제품을 만들어서 수출할 때는 그쪽 나라에 심기를, 정서를 건드리면 수출이 안 돼요. 따라서 국가적으로 동성애 퀴어축제를 인정해 줄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거기에 맞불 축제를 했지요. 기독교 단체에서 동성애자 인간들은 로마서 1장에 의해서 저주받을 자인데, 이 저주받을 자의 축제를 벌이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얼마나 분노하겠느냐고 앞장서서 외쳤던 그 여자분이 그것 하고 난 뒤에 이틀 후에 자신이 동성애자와 연애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의 저주를 운운하고, 이런 자는 죽여 마땅하다고 사형을 운운하던 그가 자기가 동성애자가 되어서 인권을 부르짖는다면 동성애자 하는 사람은 좋아하지만, 다른 사람은 ‘아, 인간은 믿을 게 못 되겠네’라고 하죠.
인간은 믿을 게 못 됩니다. 나는 믿을 게 못 돼요. 사도바울이 구원받은 것은 예상하고 상상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사도바울이 네가 어디까지 상상하나, 네가 어디까지 예상하나를 다 보시고, 사도바울이 정해놓은 그 시간적, 시대적 노선을 비약해서 중첩된 다른 예수님의 스토리, 예수님의 시간대로 사도바울을 잡아서 끌어당긴 거예요. 그냥 일방적으로 끌어당긴 거예요.
그럴 때, 비로소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입장에서 ‘모든 성경은 내게 대해서 증거하는 것이지, 네가 지키는 것이 아니야. 내가 지키기 때문에 네가 천국 가고 지옥 가는 것은 내 결정이야. 내가 결정하는 거야. 그러니까 네가 네 인생을, 미래를 결정하려고, 죽어서 천국 가려고 예수 믿으려는 거, 그런 결정하지 마’라는 그런 시선을 사도바울은 장착하게 된 거예요. 자기 몸에 장착하게 된 거예요.
그럴 때 비로소 예수님의 하신 말씀인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이해하는 거예요. 원수가 따로 있어서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모든 인간은 일단 하나님의 원수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로마서 5장 10절에서 그렇게 이야기한 겁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우리가 원수 된 자였습니다. 우리가 원수 되려고 죄를 지은 것이 아니고,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착해지려고 하잖아요. 인간은 도덕적으로 살려고 한단 말이죠. 우리가 도덕적으로 살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최태원(SK회장)이 그게 인간이야? 어떻게 한 남자가 두 여자를, 그것도 숨어서 그러는 게 아니고 노골적으로 두 첩을 만들고 하느냐. 아까 장로님이 이야기하셨는데, ‘이건 남자가 아니라 여자들이 분개하고 들고 일어나야 할 일이다’라고.
제가 낮 설교에서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남자들이 난리고 여자들이 왜 들고 일어나지 않느냐가 아니라, 여자들은 돈 보고 들고 일어나지요. 왜 그 현실을 자꾸 부정하십니까. 남자든 여자든 윤리도덕으로 사는 척하죠. 사실은 돈만 주면, 공짜로 한남동에 살게 하면, 첩이라도 좋소이다 입니다. 세상은 돈으로 움직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남자들은 거기서 끽소리 못 하는 게, 거기서 최태원이 아무 말 못 하는 게, 자기가 돈 4조 원 있습니까? 없으면 입 다물어.
최태원이가 얼마나 남자답습니까. 1조 2천억 줄 용의가 되어있으니, 얼마나 배포가 셉니까. 그만한 능력자 아닙니까. 능력자. 그런 능력자 안 되면 사람은 입을 다물어야 해요. 인간 세계는 세상의 모든 것이, 앞으로 내가 얼마나 훌륭하고 착하냐는 것은 내가 하기 나름이라는 것이 유포된 세계예요. 따라서 자기가 동성애자 되기로 한 것은 상상도 못 한 겁니다.
인간의 상상에 한계는 뭐냐. 나는 나름 최선을 다해서 바르게 사는 거. 이게 나의 세계다. 나는 여기에 대해서 하자 없다고 우기고 문제없다고 여깁니다. 이렇게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나라는 인간을 예수님이라는 인간으로 바꿔버립니다. 그 바꾸는 대목이 잠언서 8장에 나옵니다.
예레미야 21장 8절에서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라고 할 때, 마치 유대인들은 ‘너희가 잘 선택해’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리죠. 그러나 예레미야 21장 9절에 보게 되면 이 선택이 마냥 낙관적이 아니에요. “이 성읍에 사는 자는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으려니와 너희를 에워싼 갈대아인에게 나가서 항복하는 자는 살 것이나 그의 목숨은 전리품 같이 되리라”
너희들이 칼과 기근에 죽지만, 살길은 너희들이 항복하면 산다는 겁니다. 이건 인간의 상상에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존심으로 살고 자기가 스스로 자기 인생을 개척하는 그 자존감이 있어야 인간은 살았다가 되거든요. 그런데 ‘네가 여기서 그냥 죽을래, 남에게 포로 될래?’라는 이게 무슨 선택지입니까. 이게. 둘 다 인간의 자존심을 훼손하는 건데요. 우리가 예상한 선택지는 그런 게 없어요.
칼에 죽을래? 배고파서 죽을래? 이게 무슨 선택지입니까. 내가 나답게 사는 것을 제3항의 선택지로 주든가 해야지, 그것은 빼버리고, ‘나는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하는데, 그냥 아버지 아들보다 종으로 살래’ 이게 바로 우리의 한계를 보여줄 때, “너는 끽소리 하지마. 큰아들 너도 가만히 있어. 나는 저 탕진한 아들이 내 아들이야”라고 가락지 끼우고, 잔치 벌이죠. 구원은 그렇게 되는 겁니다.
“내가 구원하겠다는데, 같은 인간들의 눈치 보지 말고 너는 너의 눈치도 보지 마. 모든 성경은 너에게 쏠린 게 아니고 나에게 직접 관련된 거야”라는 이 말은 뭐냐. 결정권을 갖고 있는 사람이 네가 아니고 나인 예수님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그 예수를 믿어요. 모든 말씀이 그분에게 다 뭉쳐져 있다는 것을, 그리고 완성된 것을 믿습니다.
사람과 비교하거나 경쟁할 하등의 이유도 날아가 버린 거예요. 잠언서 8장 35~36절에 이런 말씀 있습니다.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라고 되어있어요. 이 잠언서가 어지간히 잔소리를 해대요.
이거 하나, 저거 하나, 어리석은 자는 어떻고, 똑똑한 자는 어떻고, 이렇게 해놓고, 결국 최종적인 생명과 죽음은 너의 행함이 아니고 바로 다른 분, 창조의 근원 되시는 분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하는 그분이 나중에 등장해서 그분이 일방적으로 정하기 나름인 거예요. 결정하기 나름인 겁니다. 그걸 오늘 본문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그걸 두 자로 언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약속.
약속 안에 예수님 들어있습니다. 그냥 들어있지 않아요. 네가 못한 거 내가 다 이루었다는 식으로 약속이 들어있습니다. 그 약속 가지고 어떻게 하느냐. 주님께서 내 앞에 사망과 생명이 놓여 있으니, ‘너는 너를 선택할 거냐, 나를 선택할 거냐?’를 묻는 작업에 주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나서게 되는 겁니다. 한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어제로 죽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어제로 죽었는데, 이상하게 오늘 다시 살아났어요. 어제 죽었으니, 오늘은 유령이겠지요. 어제부로 죽었고 오늘 내가 살아있는 걸 느낀다면, 우리의 이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런 질문이 성립됩니다. 왜냐 하면, 어제부로 죽었고, 죽은 나는 스스로 살 수 없고, 그런데 지금은 살아났으니까, 중간에 누가 개입했는가. 예수님이 개입했겠죠.
그러면 예수님이 개입해서 오늘 내가 유령이든 뭐든 살고 있으니까,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건 바로 나를 통해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식으로 하는 거죠. 어떻게 증거하느냐. 나는 내가 살려고 평생을 애썼는데 그게 다 헛수고였고, 정작 사는 것은 주께서 나를 살려주더라. 그걸 사도바울이 성령을 받아서 알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사도바울만 성령이 와야 합니까?
우리는 오면 안 되는 거예요? 성령이 우리를 비켜 가야 합니까? 누구든지 그리스도가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면,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관점으로 세상과 그리고 나와 그리고 거기 하나 더 보태서 최태원까지 포함해서 복음적 관점으로 어제 죽었다가 주님 덕분에 산 관점에서 이 세상에 일어난 사건을 바라볼 때,
진짜 사건은 바람피운 것도 아니고, 첩질하는 것도 아니고, 이 세상이 예수를 믿지 않는 거, 이것이 바로 지옥 갈 사람인 것을 알게 된 것을, 우리는 너무나 감격하면서 이제는 주위에서 다른 사람이 첩질하든 말든 개의치 않고, 거리낌 없이 맘껏 구애받는 것 없이, 우리는 자유롭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이 자유를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무엇에 관심이 있고 신경을 썼었습니까. 세상과 남과 비교하는데 우리가 주눅 들었습니다. 타인과의 경쟁을 통해서 이겨보려고 애쓰는 것이 우리에게 스트레스와 인생의 짐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여, 이 짐이 예수님께서 어떤 짐인 줄 아시고, 다 벗게 해주셨사오니, 가볍게 가볍게 매일 살아가는 유령처럼 살아가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