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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모형

아빠와 함께 2024. 5. 26. 20:56

십자가 모형

2024년 5월 26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2:1-5

(22:1)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는 유다 왕의 집에 내려가서 거기서 이를 선언하여
(22:2) 이르기를 다윗의 위에 앉은 유다 왕이여 너와 네 신하와 이 문들로 들어오는 네 백성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
(22:3)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공평과 정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박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22:4) 너희가 참으로 이 말을 준행하면 다윗의 위에 앉을 왕들과 신하들과 백성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집 문으로 들어오게 되리라마는
(22:5) 너희가 이 말을 듣지 아니하면 내가 나로 맹세하노니 이 집이 황무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너희가 이 말을 듣지 아니하면 내가 나로 맹세하노니 이 집이 황무하리라”라는 말씀은 세상 사는 조건은 인간들이 정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인간은 자기 인생을 본인 책임 하에 개척하고 싶어합니다. 즉 자기 인생을 자신의 선택한 결과이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기준점을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어 공격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인간들이 살아야 될 기준은 벌써 정해져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학대하지 말라’입니다. 이는 곧 이 세상은 필히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발생시키는 세계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자진해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원하는 자는 없기 때문입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는 쉽게 말해서 ‘인생 망쳤다’에 해당됩니다.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거부하고 마다하는 인생이 이런 경우일 겁니다. 누구에게는 기피 대상이 되는 것이 이런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의 선택이나 결정에 의해서 고아나 과부나 나그네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상황을 반영해주는 결과적 처지에 놓인 사람들입니다. 이 본의 아닌 결과도 본인의 선택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들의 등장으로 이들을 힘들게 하고 압제하고 학대한 자들이 동반해서 드러나게 됩니다. 이런 구조는 창세기 12:2-3에도 나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즉 저주받는 경우를 하나님께서 아예 이 세상에서 없애버리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저주의 현실화를 분명히 해두신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내세우는 기준에는 본인이 저주받는 조항을 아예 만들지를 않습니다. 인간들은 자기 선택에 의해서 자기 삶을 구축하고 싶은 겁니다. 자기가 구속받을 자기 말고 또 다른 인간의 등장이 미운 겁니다.

하나님은 그 시대의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등장시키십니다. 이들을 ‘학대하지 말라’는 말씀은 그들과 같은 신세가 되는 것을 기피할 권한이 어느 인간에게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난데없이 고아가 되고 과부가 되고 나그네가 되는 인생이 생겨나게 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모형이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에 대해 신세 한탄을 할 자격이 없는 겁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는 땅의 세계에 발 딛을 기회나 가능성이 희박한 자를 말합니다. 땅이 없이는 살기 힘들다는 것이 뻔한 기정사실임에도 불과하고 그 혜택조차 누리지 못한 자들이 이들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22장에서는 이스라엘이 애굽에 나올 때, 그들의 신세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같았기에 이스라엘 내에 상주하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학대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출 22:21-23) 하나님께서 직접 그들의 후견자가 되어 그들을 대신해서 저주해 주겠다는 겁니다.

왜 대신 하나님께서 나서지요? 고아가 학대당하고 난 뒤에 나서지 말고 미리 고아나 과부가 안 되게 조치하시면 되지 않을까요? 그것은 이 땅 위주로 살아 보겠다는 것 자체가 저주스럽다는 삶의 방식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즉 아브라함에게 축복하면 복을 받고 아브라함에게 저주하면 저주받는다는 말씀은 어느 누구도 아브라함을 저주하게 되어 있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이 나그네 모습을 세상을 보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부러워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대신이 어떻게 하든지 땅을 떠나지 않는 식으로 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땅에 ‘죽음’을 박아넣으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창조가 다섯째 날을 지나 여섯째 날이 되면 땅 위에서는 사는 짐승과 인간이 창조됩니다.

그런데 이 땅은 저주와 죽음이 발생됩니다. 창세기 3:14에서 뱀이 하나님에게 받은 저주는 이러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뱀이 받은 저주의 모습은 어느 짐승보다 땅에 더욱 밀착된 모습입니다.

땅=저주의 세계라는 겁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땅과 멀찍이 떨어진 독수리의 날개로 실어왔다고 하십니다.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출 19:4)

레위기 1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먹어도 되는 짐승과 먹지 말아야 될 짐승의 항목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육지 모든 짐승 중 너희의 먹을만한 생물은 이러하니 짐승 중 무릇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 새김질하는 것이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러하니 약대는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사반도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레 11:1-5)

땅으로부터 다시 태어난다든지, 하늘의 새는 새답게 땅과 연결점이 적다든지, 바다의 고기는 바다의 환경답게 땅의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을 하는 것들을 먹어도 되지만 땅의 짐승과 유사한 것을 먹지 말아야 하신다는 겁니다. 이처럼 땅에서 난 것을 일절 저주받은 것이고 인간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상대하시는 이유는, 인간은 십자가의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5-17)

하나님께서 인간을 못박으시면서 정세와 권세까지 못박으시는 결정적 일을 하셨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죄 사함이란 자기 몸에 얼룩 닦아 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자신이 십자가의 모형으로 사는 것을 인식하는 겁니다. 자신의 도덕성으로 자기를 증명하려고 하지 말고 차라리 말씀에 의해서 박멸당합시다. 그러면 주님의 다 이루어놓은 십자가 일을 느끼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서 원대로 성공 못했다고 허무를 느낄 것이 아니라 그런 인생조차 사명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2장 1~5절입니다. 구약성경 1078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는 유다 왕의 집에 내려가서 거기서 이를 선언하여, 이르기를 다윗의 위에 앉은 유다 왕이여 너와 네 신하와 이 문들로 들어오는 네 백성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니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공평과 정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너희가 참으로 이 말을 준행하면 다윗의 위에 앉을 왕들과 신하들과 백성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집 문으로 들어 오게 되리라마는, 너희가 이 말을 듣지 아니하면 내가 나로 맹세하노니 이 집이 황무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창세기 12장에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알지 못하고 아브라함의 가치를 모르면 저주받는다고 이야기했어요.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12:3) 그런데 이 말은 결정권은 하나님이 제시한 기준이 결정권을 가지지, 인간이 내세우는 기준은 절대로 비현실적이고 결정권이 없다는 거예요. 인간이 내세우는 것들은 주로 어떤 것이냐 하면, 자기를 좋게 여기는 기준을 내세우기 마련이에요.

자기가 우수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기준들을 인간들은 타인 앞에서 내세웁니다. 그래서 로마서 10장에서도 언급했지만, 인간들은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면, ‘내가 이 땅에 살면서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이런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습니다’라는 이런 정당성을 드러내는 식으로 인생들은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단정 짓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 와서 주님께서는 말씀을 요약하고 축약해서 뾰족하게 만든 후, 송곳처럼 우리를 찌르는 것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0)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뭐가 의냐. 그 의인이 의가 있다고 누적된 자기가 살만한 가치 있다는 그것들을 찌르는, 푹 찌르고 들어오는 그것이 바로 복음의 기능이고, 그것만이 하나님에게 의롭다는 거예요.

이 두 문장을 하나로 합쳐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뭐냐. 우리가 뭘 해도 죄인 것을 들춰 내는 능력. 그것이 하나님의 의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너희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너희는 죄인이다”라고 하시면 그냥 죄인인 것을 그냥 기쁘게 받아들이면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증거가 된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5장에도 같은 말씀이 있어요. “너희는 나 하나님의 원수였다”(롬5:10)라고 하신다면 하나님과 원수였다는 사실이 우리를 찌르게 되면, ‘하나님의 원수 맞습니다’라고 받아들이게 되면, 그러면 되죠. 그러면 마태복음 5장 43~44절에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라는 이 말씀은 말씀이 우리를 찔러줄 때나 이런 말씀의 현상이 터져 나온다는 겁니다.

마치 폭죽이 팍 터지듯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안에 일어나는 현상을 보고 매일같이 놀라면서 살아가게 되죠. ‘이건 제가 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하셨습니다. 주께서 말씀대로 하셨습니다’라는 것을 늘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을 더 압축해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매일같이 선택하는 일은 이미 선택당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로써의 선택 행위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했기에 우리가 선택하는 행위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선택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내 선에서 멈추지 마시고, 더 나가게 되면 ‘주께서 나로 하여금 이 일을 선택하게 하셨습니다’라는 주님의 선택까지 이르도록 의미를 뒤로 보내야 해요. 내 쪽에서 그것을 쥐고 있으면 안 돼요. ‘내가 바른 선택을 했습니다’라고 멈추면 안 되고, 자꾸 나를 떠나서 뒤로 보내야 해요.

‘주께서 허락하신 환경이기에 저는 어쩔 수 없이 이런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그 선택을 통해서 주님이 이미 우리를 선택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하면 되겠죠. 제가 방금 언급한 것이 지금 신약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이제 신약에 대해서 결정적인 것은 역시 신약에서 결정되기 때문에 다시 구약을 통해서 신약적으로 가봅시다.

우리가 늘 이 시간에 하던 방식이에요. 구약을 통해서 신약으로 돌려보낼 때, 먼저 신약을 통해서 구약을 경유하면서 구약에 해답이 막혀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다시 신약에서 해답을 찾는 겁니다. 왜냐 하면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예레미야 22장을 보게 되면 여기에 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공평과 정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라고 되어있어요.

이 본문이 예레미야 22장에 나옵니다. 그러면 여기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굳이 언급하시는 이유에 대해서는 어디로 가야 하느냐 하면 출애굽으로 가야 해요. 출애굽기 22장에 보면 21절에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라고 나옵니다. 그 의미를 알기 위해서 앞으로 더 나아가야 해요.

그게 뭐냐 하면 창세기 3장 14절에 나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이 대목, 그러니까 모든 육축과 들의 짐승을 나란히 세우면 그것들 보다 더욱 저주를 받는 거예요. 그러면 저주를 더욱 받는다는 의미가 뭐냐. “네가 배로 다니고” 가장 땅에 딱 들러붙어 어떤 틈도 없이 밀착된 상태에서 배때기로 계속 다니는 거예요.

땅과 틈도 없이 하나가 된 채로. 그럼 뭐냐. 땅의 저주가 그대로 뱀에게 다 들어오는 거죠.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땅이 저주라는 말입니다. 땅이 저주라면 그러면 복은 뭐냐. 땅에서 떨어져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떨어지는 것이 저주에서 벗어나고 복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겠죠. 그래서 독수리가 성경에 나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사40:31)

너의 믿음이 독수리와 같이 된다는 말씀도 나오고, 출애굽기 19장 4절에는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그러면 이건 땅과 멀어지는 거예요. 땅과 마주치는 일이 될 수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취지를 이스라엘 민족에게 담는다고 생각할 때,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면 이 민족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내용을 담아야 이스라엘의 취지, 땅에서 멀어지는 취지가, 저주로부터 멀어진다는 취지가 살도록 법을 만들겠습니까?

여러분에게 묻는 제가 잘못이죠. 인간이 그걸 만들어 내는 것이 곤란하죠. 그게 바로 레위기 11장에 보면 나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육지 모든 짐승 중 너희의 먹을만한 생물은 이러하니 짐승 중 무릇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 새김질하는 것이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러하니 약대는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사반도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레 11:1-5)

땅과 결부 되어있는 짐승을 먹지 말라. 땅에서 살더라도, 땅에서 다시 뒤집어서 되새김할 수 있는 그런 것을 먹어도 되는데, 땅과 갈라지지 않은 거, 땅의 요소와 갈라지지 않은 것은 먹지 말라는 겁니다. 그리고 하늘을 날면서 하늘에 나는 짐승 답게 해야지 하늘을 날면서 땅같이 행동하는 것은 먹지 마라. 바다에 있으면 바다에 사는 온전한 짐승답게 살아야지, 바다에 있으면서 땅에 있는 짐승도 아니고 희한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먹지마라. 미꾸라지, 꼼장어, 이런 것들.

그것은 창세기 1장까지 들어갑니다. 하나님이 창조 제 다섯째 날에, 하늘 만드시고 또 공중에 나는 새를 만드시고 나서 여섯째 날에 땅에 짐승을 만드셨거든요. 그러니까 첫날부터 6일로 가까이 갈수록 점점 더 땅에 결부된 짐승을 마지막에 만드세요. 그리고 그 땅에 하나님께서 뭘 두셨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하지 마라”라는 죽음을 두셨어요.

땅은 땅이로되, 죽음이 함께 만들어지는 땅으로 만드셨습니다. 저주가 만들어지는 땅입니다.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 그러니까 이런 말을 하게 되면 인간은 뭐냐? 인간은 모형이에요. 교회 생활 오래 하고 성경 그렇게 많이 보면서도 여전히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것이 죄사함에 대해서 크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죄사함이 뭐냐 하면 우리가 모형임을 인정하는 것이 죄사함이에요. 얼굴에 검댕이 묻었다고 세수하면 검댕이가 지워지죠. 그러나 저녁이 되게 되면 또 얼굴에 뭐가 묻고 그래요. 햇볕에 타면 얼굴 시커멓게 되는 것처럼. 이처럼 인간은 노출되게 되면 환경을 그대로 반영해 주는 겁니다. 아무리 십자가 믿고, 죄사함 받고 해도, 또 뭐가 묻어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또 십자가 믿고 묻은 거 씻어내고, 계속 이런 식이에요. 그만한 이론은 불교도 준비 되어있습니다. 한 번에 다 믿느냐, 아니면 믿고 난 후에 날마다 씻느냐, 계속 믿어야 하느냐 아니면 한번 믿었으니까 그다음부터는 계속 씻어내는 작업만 하느냐. 이런 논쟁이 불교에서도 나옵니다.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온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 자신이 땅에서 나왔다는 그 자체가 이미 죽음을 보여주는 모형이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자기 처지만 걱정하는 거예요. 자기에게만 자꾸 불쌍히 여기고 자기 인생을 가엽게 여기는 그것이 인간에게 전부예요. 그러니까 그것을 버티기 위해서 자꾸 윤리도덕으로 ‘그저 어느 정도는 정당하지 않습니까’라고 하는 거죠. 어느 정도는 정당하거든요.

제가 유럽을 가면서 서울의 유튜브를 보니까 제일 눈에 들어온 것이 김호중(트로트가수) 이야기였어요. 김호중이 이야기를 하면서 그 사람이 조폭 출신의 가수인데 음주 운전하고 조수석이랑 자리 바꿔서 자기 뺑소니 해놓고 조수석 사람에게 대신 운전했다고 말해달라고 부탁했는데, 그걸 보면서 참, 사람은 바꿔서 쓰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하는데, 김호중의 열렬한 팬의 입장에서 생각해봅시다.

김호중이 어떤 존재인가를 우리는 애초부터 문제 삼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가 조폭 출신인 거 다 알았고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영화로도 나왔거든요. 그걸 문제 삼는 것이 아니고, 김호중과 같은 목소리와 그의 기능은 세계적으로 한국을 빛낼 수 있는 인물이다. 따라서 어쨌든지 그 사람의 노래를 할 수 있는 권한은 국가가 나서서도 안 된다. 왜냐, 만약에 음악에 천국이 있다면 그것이 음악의 천국이다.

음악의 천국에서 김호중이가 어떠한 것과는 관계 없이, 음악 천국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이게 보라색 옷을 입은 김호중이의 팬들의 여망입니다. 음악의 천국. 음악의 세계에 그딴 게 뭐가 의미가 있느냐는 겁니다. 거기서 나온 유명한 말씀이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라는 말씀이죠. 다른 가수는 안 그러냐는 거죠. 그런 인재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클래식에서, 아니면 가요계에서.

임영웅이? 임영웅같은 소리하고 있네. 김호중같은 소리를 가진 그런 가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없는데 왜 그것을 문제 삼는가. 이거 혹시 정치적 희생타 아닌가. 이렇게 이야기한다고요. 문제는 음악의 천국이 없다는 거예요. 음악의 천국은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천국은 없습니다. 인간이 음악을 추구하고 누구를 되게 좋아하는 것은 자기가 자기 속에 내가 죽어 마땅함을 감추기 위한 하나의 속임 수법이 돼요.

내가 아름다운 음악을 추구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추구하는 것으로, 나는 그만한 선한 요소가 있다는 것을 하나님에게 인정해달라고 하는 식이죠. 이것은 바로 인간이 십자가 모형이라는 사실을 몰라서 그래요. 인간은 모형입니다. 자기 자신을 주인공으로 내세울 수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이게 골로새서 2장에 나옵니다.

여기에 십자가 이야기하면서 2장 14~17절에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보세요. 우리를 모형으로 여겨서 십자가에 못 박으십니다. 우리는 인형입니다. 인형을 못 박는 거예요. 주님께서. 짚으로 인형 만들어서 저주받으라고 못 박는 장희빈처럼 그렇게 하는 거예요. 못 박아버려요.

못 박을 때 뭘 박느냐. 우리를 박는 게 아니고, 우리를 꼼짝 마라하고, 우리를 사람 대우한 존재가 있어요. 우리를 인간 대우한 존재. 네가 음악을 좋아하고 예술을 좋아하게 되면 모든 것이 용서가 되도록 하는 존재가 있어요. 그게 마귀입니다. 우리를 십자가 못 박을 때, 정사와 권세 그리고 악마를 같이 못 박은 거예요. 거기서. 영원한 저주의 표시로써. 모형이 아닌 것은 악마예요. 우리는 모형이에요.

여자의 후손은 뱀의 후손과 싸우는 거예요. 인간은 그것을 위해서 출생해야 하는 겁니다. 인간의 육신을 통해서. 물론 가인도 출생해야 하고 죽으면 안 돼요. 살아서 가인의 후손들을 많이 퍼뜨려야 해요. 어차피 모형들이니까요. 바둑돌이니까요. 흰 돌, 검은 돌, 바둑돌이니까요. 십자가에서 승리했거든요. 누가 승리했느냐. 하나님의 의가 승리했어요. 왜냐. 십자가에서 같이 달렸으니까. 예수님이 승리하셨거든요.

골로새서 2장 17절에 보면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같은 모형들을 숭배하지 말라. 그것을 의지하지 말라. 우리의 몸은 내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것이다. 우리의 몸은.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한 그림자이고 히브리서에서는 모형이고, 진짜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뭐 어쨌다는 건데.

그리스도가 땅으로 오셔서 땅을 차버리고 하늘로 갔어요. 땅은, 저주받은 땅은 제거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것을 이미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고생하는 곳이 땅인 것은 그냥 넘어가고, 창세기 2장 14절에 땅이 저주스럽다는 것을 출애굽 하면서 그 요소를 이스라엘 내부에 심어줬습니다. 땅에 살면서 땅과 괴리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처량한 모습들이 바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입니다,

그들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땅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는 존재로서 그들이 비친 겁니다. 열왕기상 21장에 보면 거기에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봇의 포도원이 있었다. 바로 이 이야기를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과 섞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봇은 모형이다. 나봇은 이 땅에서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와 같은 존재다. 그런데 그 나봇에게 하나님께서 선물을 주셨는데, 포도원이라는 선물을 주셨다.

그때까지는 나봇은 하나님께 감사하지요. 그런데 여기서 아합이라는 왕이 그 포도원이 탐이 나서, 그것을 빼앗아 버렸다. 여기서 신앙인이 어떤 자인 것이 드러납니다. 빼앗길 때, 땅의 권세자가, 권세와 정사니까, 땅의 정치꾼과 정사가 포도원을 빼앗을 때, 나봇은 빼앗겨야 합니다. 이게 핵심이에요. 빼앗겨야 해요. 고소하고 소송하고 그러면 안 돼요. 그냥 빼앗겨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후견자 됨이 드러납니다. 내가 내 맘에 안 들잖아요. 내가 노력해서 거창한 내가 윤리 도덕적이라고 내세우지 말고, 솔이나 수세미같은 걸로 빡빡 문질러서 나를 없애버려야 해요. 나를 없애면 비로소 주님의 일이 등장하는 거예요. 그동안 주님의 일을 누가 가렸느냐.

내 식대로, 내 방법대로, 내 능력대로, 그냥 사람 사는 것처럼 대외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하니까 뭐가 죽느냐 하면, 고아나 과부나 나그네라고 규정되는 그 규정이 날아가 버리는 거예요. ‘너만 힘세냐? 나도 힘세다’라는 이런 거죠. ‘너만 사람처럼 살아? 나도 사람처럼 살 권리 있다. 내가 뭐가 잘못되었는데’라는 식이죠.

판사가 김호중이에게 한 말이 맞아요. ‘네 인생만 중요하고, 매니저 인생은 안 중요하냐?’라는 그 말이 맞아요. ‘너는 벌 받으면 안 되고, 저 사람은 벌 받아도 되냐?’라는 게 맞아요. 내가 김호중이 매니저라면 자리 바꿔줬습니다. 왜? 김호중이라는 강력한 자에게 빼앗겨야 하니까. 물론 그런 식으로 빼앗긴 건 아니죠. 김호중이가 살아야 자기도 밥 먹고 산다는 식으로 했지요.

어떤 인간도 자진해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가 되려는 의도를 가진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아무도 없어요. 그냥 버티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잘못 건드려서 된통 당한 사람이 있습니다. 된통 당했을 때 어떤 표현을 하느냐면 기왓장이 난데없이 날아와서 내 뒤통수를 치는 거, 집에 있는데 말씀이 날아와서 나의 뒤통수를 정면으로 치는 것같이 와서 쳐버려야 해요.

그것이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이 자기 부하의 아내를 건드리다가 그 부하 우리야가 죽잖아요. 그럴 때, 우리야는 하나님의 언약궤만 생각해서 전쟁에 나가서 그것만 충실했던 거예요. 하나님께 충실한 자는 항상 이 땅에서 땅에 발을 디딜 권한을 주께서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모은 재산이 얼마이고, 이 땅에서 얼마나 내가 가정을 잘 꾸미고, 이런 것들이 자꾸 박멸되어야 해요.

박멸되지 않으면 주의 기이한 일이 우리가 감사가 안 돼요. 자기에게 감사하고 자기에게 고마워한다니까요. 남과 견주려고 애를 쓰고. 그러면 오늘 예레미야 이 말씀이 전혀 해당이 안 됩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그런 사람이 있어요? 가난한 사람만 있겠지요. 가난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데요? 부자 되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이죠.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없어요.

그러나 강한 권세가 와서 강제로 빼앗겨야 합니다. 그런 잘난 가수 만나서 매니저 하면서 같이 한통속이 되든지. 하여튼 이 땅에서 내가 나를 업어치기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이 땅에서 발을 스스로 뗄 생각을 우리는 못 해요. 주의 일은 뭐냐. “너 고아야, 과부야, 나그네야. 내가 강제로 이 세상에 미련 없게 만들어 줄게. 이 땅에 기대하지 않게 만들게”라고 하는 것이 오늘날 성도에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고아나 과부, 나그네가 있어야 그다음에 도와주시는 후견인, 고엘(גאל: 무르다, 되찾다, 구속하다) 제도인데, 진짜 도와주시는 하나님이 따로 계시는 것이 비로소 감각되는 겁니다. 시편 8편 1~2절에 보면 굉장히 유명한 말씀인데도 사람들은 그냥 넘어갈 정도로 정말 납득이 안 가요.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바로 이 대목입니다.

전쟁에 어린아이와 젖먹이를 왜 동원 시킵니까? 우리는 어른이에요. 어른은 될 수 있는 대로 남에게 힘 빌리지 않고 스스로 설 때, 내가 사람답게 산다는 것을 나타낸다는 거. 우리는 평생 가정교육을 통해서, 사회와 국가 교육을 통해서 평생 배웠던 겁니다. 우리는 도로 어린아이와 젖먹이가 되기 싫어요. 내 나름대로 내세울 내 힘을 내가 장착하고 살고 싶어 합니다.

자기 것은 자기가 지키고 싶어 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전쟁터에 보내줍니다. 전쟁터에 가니까, 자기 딴에 힘 있다고 생각했는데 힘이 소용없어요. 이스라엘보다 몇십 배나 강력한 군대와 이 세상과 마주칠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서 기껏 젖먹이나 어린아이같이 아무 힘도 쓸 수 없는 미약한 존재임을 드러내는 거예요.

우리야 장군과 다윗이 싸울 때, 다윗이 이겼지요. 왜 우리야 장군을 죽였고 아내가 빼앗겼으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다윗 편이 아니고 우리야 편이었어요. 그 일이 일어난 다윗, 그 다윗이 알았던 그 자리, 그 자리에 대해서 예레미야는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왕들아, 유다 왕들아, 다윗에게 일어난 그 경우에 너희의 자리가 어느 자리인지를 잊지 말라. 따라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학대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죄가 되느니라”라고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이 본문을 듣고 왕들은 여호와김, 여호와긴, 여호아하스, 이런 왕들이거든요. 나중에 시드기야까지 나가요. 이 왕들은 무슨 뜻인지 전혀 모릅니다. 신약에 와서 비로소, 아하, 오늘날 성도를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모형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신약성경에서 비로소 발견하죠. 어떤 식으로 합니까? “너, 의인 아니야. 너는 내세울 윤리도덕 없어. 너 죄인이야. 그러니까 너는 나의 원수고 죄인 중의 괴수야”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서, 그 사실을 만끽하게 만들어요. 따라서 내가 하나님의 죄인이지만, 내가 죄인 되는 것은 십자가에 우리를 이미 못 박아 죽여서 살렸다는 사실을, 어떤 권세도 우리에게 간섭할 게 없다는 것을, 그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서 모형으로 마음껏 사용하고 있다는 거, 사명감이 있다는 거, 이것이 우리의 허무감을 이깁니다. 우리의 사명이 내 인생의 허무를 이기는 거, 이것이 바로 성령이 함께한 성도의 모든 모습이고 신약의 성도에게 나타난 천국의 이야기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보았습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말씀을 내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인지를 이제는 깨닫고 주께서 주신 자유를 마음껏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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