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죽음
2024년 5월 5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1:8-10
(21:8)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또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신다 하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니
(21:9) 이 성에 거주하는 자는 칼과 기근과 염병에 죽으려니와 너희를 에운 갈대아인에게 나가서 항복하는 자는 살리니 그의 생명은 노략한 것 같이 얻으리라
(21:1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얼굴을 이 성으로 향함은 복을 위함이 아니요 화를 위함이라 이 성이 바벨론 왕의 손에 붙임이 될 것이요 그는 그것을 불로 사르리라
옛날이나 지금이나 ‘매국노’라는 칭호는 불명예스럽게 느껴질 겁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이런 점을 너무나 잘 알면서 바벨론에게 항복을 권합니다. 망해야 산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예레미야 말 듣고 그냥 곱게 항복하면 되지 않을까요?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요령껏 자기 챙기는 존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희망이 없이는 못삽니다. 즉 선지지가 사람에게 언급하는 것은 바로 그 희망마저 접어라는 이야기입니다. 희망이란 욕망에서 비롯된 겁니다. 인간이 살아 있다는 것은 자신의 욕망이 안 죽고 살아있다는 겁니다. 비롯 자신의 숨이 끊어져도 자신의 욕망만큼은 살아있기를 원합니다.
인간이 왜 이렇게 되었느냐 하면, 인간에게는 이미 ‘지식’, 곧 ‘앎’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앎이 자아를 지탱해준다면 그 앎이 무너지면 자아도 무너지고 있는 상태를 사람들은 죽음의 체험이라고 보는 겁니다. 인간의 욕망은 타인의 욕망 환경에 근거해서 그들이 나를 인정해 주면서 생겨나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도 나를 인정해주지 아니하면 그 인간은 그나마 남아 있었던 자신의 욕망을 껴안고 자살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 비슷한 예가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 심판에서 일어납니다. 거거서 롯의 처는 천사의 조치에 반발합니다. 천사는 소돔에서 나오는 가정에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합니다.
“뒤돌아 보지 말라”고(창 19:17) 사람이 뒤를 돌아본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앞과 뒤를 무시하는 태도입니다. 앞은 인간에게 없는 세계입니다. 반면에 인생에서의 뒤쪽은 분명히 있는 쪽입니다. 있는 쪽의 체험이 인간의 기억을 구성하고 그것이 인간의 자아를 형성합니다. 그만큼 친근한 겁니다.
따라서 인간은 항상 뒤를 보면 삽니다. 기껏 아는 것은 모조리 뒤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마치 예레미야의 말씀 앞에서 사는 쪽과 죽는 쪽을 선택하는 것처럼 보일 겁니다. 하지만 인간은 결코 아는 것을 놔두고 모르는 쪽을 선택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지난 기억에 준해서 어느 쪽이 희망쪽인지를 알려고 합니다.
이런 태도는 결코 그 인간이 죽는 쪽이 아닙니다. 여전히 자신의 가치를 살리는 방식입니다. 과거(뒷쪽)에 의존해서 미확실한 앞쪽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되려면 자아는 굳건하게 계속 살아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시는 것은 이런 경향성을 지적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점이 신약과 비교해서 구약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또 한 인물을 거론하면 욥입니다. 욥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너무나도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비록 맹렬한 육체의 고통 속에서 있어도 기억만큼은 생생합니다. 친구들과의 많은 논쟁 속에서 욥이 확인하고 싶은 것은 친구들 보다 자신이 신의 지식에 보다 가깝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폭풍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욥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은 인간 지혜의 우수성 자연세계에서 명백한 것으로 여긴 욥에게 일반 짐승들의 능력과 비교케 하시는 일들을 하나님께서 나열하시면서 묻습니다. 하마나 악어나 여러 동물들을 언급합니다. 여기서 욥은 짐승들보다 무능력한 존재에 불과함을 알게 됩니다.
즉 신약적으로 말해서 욥은 어린아이가 되는 겁니다. 다시 무지의 상태가 되는 겁니다. 창세기 2장에서 아담과 하와는 무지합니다. 무지는 곧 무죄입니다. 하지만 무죄 상태가 구원의 상태가 아닙니다. 구원의 상태는 무죄가 아니라 의인된 상태를 말합니다. 마태복음 18:1-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1-4)
어린이가 된다는 것은 창세기 3장이 아니라 창세기 2장이 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모르기에 죄가 없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구원되는 것은 아닙니다. 욥이 “나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고 고백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단지 구원은 인간으로 해낼 수 없는 바, 창세기 3장에서 2장에서 넘기면서 진행되는 겁니다.
구원은 무죄상태가 아니라 의 상태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의에 장악당하므로서 구원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의는 어떻게 주어지는 겁니까? 마태복음 13:44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밭은 어디까지나 밭일 뿐입니다. 밭에는 보물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즉 어떠한 것도 숨겨놓지 않고 ‘보물 있다’는 말씀을 주님이 하시는 겁니다. 이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구원에 대한 야망과 욕심이 있는 자들에게 늘 실패토록 하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야망마저 죽어야 하니까요.
밭에서 보물 나오는 것은 발견되어야 사항입니다. 그래서 기뻐하니까요. 농부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팔았다는 말은 곧 자신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하는 겁니다. 자신을 위하여 발견해야 ‘저는 제가 자연사하는 것도 싫습니다. 주를 위해 장렬하게 죽게 하옵소서’하는 것은 실은 욕망입니다.
욕망은 결코 달성되면 아니됩니다. 그러면 사람이 희망이 없어 죽습니다. 진정한 자신의 죽음은 자신의 욕망마저 자신이 모를 경우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같이 되는 겁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신이 조달하는 것이 아니라 늘 하나님께서 제공함을 아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능력이 되는 ‘하나님의 의’마저 자신이 공부해서 획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주시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 착상하는 겁니다. 멍게처럼 자기 두뇌가 따로 작용할 필요없음을 압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착상하면 이제부터 주님의 말씀과 지식이 기존의 우리 야심을 위한 모든 것들을 갉아먹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아의 죽음’입니다. 날마다 죽이는 바로 그것이 우리 안에서 날마다 생명이 되게 하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무지한 어린아이가 되어 주님의 의의 증인으로 쓰여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02강-예레미야 21장 8~10절(나의 죽음)240505-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1장 8~10절입니다. 구약성경 1078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또 이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신다 하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니, 이 성에 거주하는 자는 칼과 기근과 염병에 죽으려니와 너희를 에운 갈대아인에게 나가서 항복하는 자는 살리니 그의 생명은 노략한것 같이 얻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얼굴을 이 성으로 향함은 복을 위함이 아니요 화를 위함이라 이 성이 바벨론 왕의 손에 붙임이 될 것이요 그는 그것을 불로 사르리라”
여기 두 가지,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이 분명히 다른데, 차이 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어떤 기준을 세웠느냐 하면, 바벨론 나라가 이스라엘을 점령하는 사건을 만드시고, 그 앞에다가 “너 죽을래, 살래?”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 질문 자체가 ‘네가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이건 명량해전을 앞두고 이순신 장군이 했던 그런 이야기 같기도 하고, 안중근 의사가 큰 대의를 앞두고 했던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오늘날 총선에 나서는 국회의원들이 연설하면서 써먹기도 하고 비장한 각오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이 주신 이 사건이 무슨 사건이냐 하면, 놀랍게도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사건입니다. 오늘날 성도가 십자가 믿으면 구원받고, 십자가 모르면 지옥 간다는 그 십자가 사건도 사실은 그게 나무막대기가 아니고, 우리를 대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께 버림받는 사건이에요.
심판의 사건, 저주의 사건 앞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생명과 사망의 길로 나누어진다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 말씀은 이렇게 주어졌지만, 사람들은 성경 자체를 거부하기 때문에 이런 기회조차도 주어지지 않지요. 왜냐 하면 성경 말씀에 모든 것이 응축되고 함축되도록 다 끌어모으면, 바로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심판받는 그 지점이에요.
‘하나님마저 심판당한다. 하나님은 하나님마저 때리신다’라는 이것에 모든 초점이 모아져 있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마저 하나님을 때린다면, 하나님이 아닌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이거는 뭐 죽어야 마땅하다고 나오는 게 당연한데, 우리는 하나님이 하나님을 때리는 그 상황 속에서도 아주 반발하면서 기피 하죠.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하나님마저 평가하려는 그런 건방짐이 우리에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내가 평가해서 괜찮은 하나님 같으면 내가 믿어줄게’라는 것을 이미 안에 마귀가 심어 놨어요. 그래서 아무리 심판을 해도 ‘내가 뭘 잘못 했는데?’라고 외면하기 일쑤죠. 이게 참, 교회 안 다니는 사람만 그러면 좋겠는데, 교회 다니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해당되죠. 성경은 우리를 계속해서 밀어붙입니다. 밀어붙이는 경우의 하나가,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심판하면서 롯의 처가 나오는데, 롯의 처가 판단을 잘못한 대목을 보면 이렇습니다. 롯의 처는 무엇이 앞에 있고 무엇이 뒤에 있는가를 분간 못 했어요. 앞과 뒤를 분간 못 해서 앞을 바라봐야 하는 자가 뒤의 세계를 본 겁니다. 뒤를 본 거예요. 롯의 처가 뒤를 보았는데 소금기둥이 되었다. 이렇게 롯의 처에게 소돔과 고모라 심판이 연속되었다는 말은, 롯 가정의 뒤에서 심판의 기운이 계속 따라 붙였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어요.
계속 따라오는 거예요. 쟁기를 잡고 앞을 봐야 하고 뒤를 보지 말라는 것은, 뒤가 우리의 관찰 대상이 되는 게 아니고, 뒤는 우리의 관찰 대상 이전에, 뒤에 이미 우리를 평가하고 있는 세력이 따라오는 거예요. 전설의 고향에 ‘내 다리 내놔라~~죽인다~’라고 하는 세력이 계속 따라 붙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뒤를 포기해야 하는 겁니다. 가만히 있는데도 뒤에서 밀어주니까 얼마나 이게 참, 이런 재미난 놀이동산이 또 있을까요?
심판이 우리를 앞만 보도록 밀어주니, 참 고마운 심판이에요. “뒤돌아보지마~쭉쭉 가~쭉쭉~” 그런데 기억이 문제죠. 자꾸 세상을 돌아보니까 세상은 뭐냐,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잖아요. 세상은 원래 심판받을 세상이기 때문에 일 등만 기억해요. 그것 탓한다고 뒤돌아볼 필요 없어요. 일등만 기억하는 그거, 이미 우리 안에 일등만 되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세상 시켜서 우리를 매몰차게 계속 밀어내는 겁니다. 자동적으로 밀어내는 거죠.
그러면 롯의 처에서 처가 보여주는 것은 선분상, 그러니까 직선의 선분상 앞과 뒤를 두고, 앞에는 생명, 뒤에는 사망, 이렇게 되는 겁니다. 롯의 처같은 경우에는. 그런데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신약이 아니고 구약이에요. 구약에 비해서 신약은 엄청 어렵습니다. 구약에 비해 신약은 엄청 어렵습니다. 일단 구약부터 말씀드리고 신약 말씀드릴게요.
오늘 본문 예레미야에서, 참 이것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인데, 바벨론에 완전히 멸망되기 이전이에요. 바벨론에 완전히 멸망되기 이전에, 그러니까 바벨론이 쳐들어온다는 것을 뭘로 바꿔보느냐 하면 일본 나까무라 군대가 쳐들어온다고 바꿔봅시다. 현실감이 좀 생기도록. 일본군들이 우리에게 밀려왔다. 그러면 인민군이 밀려온다고 바꾸면 어떻겠느냐. 인민군으로 바꾸면 실감이 안 나요.
왜냐 하면 인민군은 우리 국군과 게임이 안 됩니다. 미군과 군사협정 때문에 게임이 안 돼요. 상대가 안 됩니다. 우리는 북한이 쳐들어오면, ‘너그들 세 끼나 챙겨’라는 이 정도예요. 밥 세 끼도 못 챙기면서 무슨 힘이 있어서 공격하겠어요. 그런데 일본이 쳐들어온다고 하면 이건 죽은 거예요. 전에 이야기했던가요? 우리나라 독립군은 5천 명, 일본군은 5백만, 이게 게임이 되겠습니까? 그것도 군사력에 있어서.
소총 들고 땅!땅! 하다고 해서 우리나라가 해방되겠어요? 안되죠. 김일성이 와도 해방 안 돼요. 조차지(租借地) 또는 조계지라고 하는데 상하이 16군데에 조계지가 있어서 여러 나라가 중국을 점령하면서 분리 되어있었어요. 그중에 하나에 가서 임시정부 세워서, 김구 세워서 대항했지, 그 땅도 상하이, 중국 땅이지 우리 땅 아닙니다. 그것도 외지에 침략당한 남의 땅이라고요.
무슨 게임이 되겠습니까? 거기에 대해서 김구같은 사람, 독립투사, 벤또 던지고 한 사람, 그런 사람 말고, 안중근 말고, 진짜 국민을 살린 사람은 누구냐 하면, 일본에게 항복하라고 한 이런 사람이에요. 이게 말이 됩니까? ‘일본에 항복하는 것이 진정 나라를 살리는 길이다’라고 오늘날 이야기해 보세요. ‘너는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해라’라고 욕 얻어먹을 거예요.
‘독도도 퍼주고, 쓰시마 퍼주고, 다 퍼줘라’라고 욕할 거예요. 이 민족주의가 문제가 됩니다. 민족주의. 내 것을 내가 지키는 것이 얼마나 상식에 해당하는 겁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구약을 통해서 “항복하라. 그러면 살리라”라고 나오세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차라리 ‘죽으면 살리라’라는 이건 쉬워요. 죽는 순간까지 자존심은 챙기잖아요.
그런데 항복이라고 하는 것은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날아가 버리는 거예요. 예레미야가 그 이야기를 해주는 겁니다. 예레미야가 노란 넥타이 맸다고 하면 지금쯤 목 졸려 죽었어요. ‘인간아, 네가 선지자야? 네가 하나님의 종이야? 내가 너부터 한번 죽여줘? 선지자가 되었으면, 하나님이 보냈으면 하나님의 나라인 이 거룩한 이스라엘을 어떻게든 살릴 생각을 해야지. 나라를 팔아먹을 그런 발언을 그것도 하나님의 계시라고 어떻게 이야기하냐?’라고 아무도 믿지를 않았습니다.
이게 뭐냐. 바로 사망이 그들 마음속에 작용하고 있었던 거예요. 이건 롯의 처와 똑같은 겁니다. 내 과거가 있던, 현재의 나를 만들어 준 그 민족과 그 나라를 내가 배신할 수가 없는 거예요. 남은 배신할 수 있는데, 사기꾼이 남은 배신할 수 있어요. 하지만 보이스피싱 범죄자가 본인에게 사기치 지는 못해요. 전세 사기꾼이 자기를 사기치 지는 못해요.
다른 건 다 속여도 자기 자신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제가 울산에서 강의할 때 운전해 주는 권사님이 계세요. 그 권사님이 명랑하게 항상 속에 있는 바른 이야기를 해주셔서 제가 들으면 늘 즐거워요. 이번에는 어떤 말씀을 하셨느냐.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나는 옛날 복음 모르고 교회 다닐 때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다는 거예요.
‘하나님, 나는 자연사도 싫습니다. 죽여주옵소서’ 그 정도로 나는 주의 일을 한다고 자식이 어떻게 밥을 먹었는지, 고3을 어떻게 지냈는지, 자기는 그런 것도 모르고, 오직 자신은 온몸을 바쳐서 주님의 일에 모든 것을 헌신한 거예요. 그런데 복음을 알고 난 뒤에 그게 마귀 짓인지를 이제 알았습니다. 권사님은 자기 체험을 가지고 그렇게 이야기해요. 우리 교회에는 해당 안 되죠. 아예 안 하니까.
그럴 줄 알고 아예 안 하니까. 봉사고 헌금이고 아무것도 안 하니까 우리는 굉장히 편한데, 신약에서는 이게 굉장히 어려운 것이, 구약 욥의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신약부터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3장 44~46절에 보면,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라고 되어있어요.
이게 굉장히 쉬운 말로 보이지만, 이게 굉장히 어려운 말이에요. 하나님께서는 밭에 아무것도 숨겨두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천국은 없는 겁니다. 이 말은 진짜 천국을 바라볼 생각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 하면 자기가 가야 할 천국만 정신 팔려서 그래요. 내가 발견해 내는 것이 천국이라고 교회 와서 우기고 있습니다.
납득되도록 설명해달라는 거예요. 목사님, 납득되도록 해주세요. 어떻게 어떻게 지식을 확보하고 어떻게 어떻게 성경 말씀을 확보하면, 내가 들어갈 미래의 천국을 내가 확보하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게 바로 뒤를 돌아보는 거예요. 우리 이쪽 세상, 심판받을 세상은 뭐냐 하면 내가 열심히 이해하고 납득했던 세상에 집합체가 내가 뒤돌아볼 세상이에요.
내가 눈치챘던 세상이고, 내가 잘만 하면 들어갈 수 있는 천국을 우리는 그동안 꾸준히 내가 구성해 왔던 겁니다. 천국을 만들면서 나도 같이 천국 갈 사람으로 내가 나를 변화시켜 왔던 거예요. 내가 변화시키는 나를 하나님께서는 안 받아줍니다. 제발 좀 변화되지 마라. 그 변화가 문제예요. 변화가. 그러면 구약에 욥기를 봅시다.
지난 시간도 여러 번 욥을 했지만, 욥의 특징은 뭐냐 하면 욥 안에 무능력이 들어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욥과 친구들이 실컷 논쟁하게 만들어 놓고 마지막에 폭풍 속에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때 욥이 하나님께 뭘 기대했겠습니까? ‘하나님, 저 어때요? 제가 앞으로 어떤 것을 더 알아야 안심 놓고 천국 갈 수 있습니까? 내가 더 확보해야 할 지식은 뭡니까?’
그런 것이 궁금했겠죠. 왜냐 하면 자기가 뒤돌아본 과거는 사람인 친구들과 붙어서 누가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누가 많은 지식을 확보했냐는 그 견주기를 한 거예요. 그걸 비교한 거예요. 따라서 욥은 거기에 대해서 자신만만했습니다. 너희들이 하나님에게 가까이 간 것보다 내가 더 하나님과 가깝다는 것을 나는 자부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자녀가 잘 되고, 부자 되고, 자녀가 건강하고, 신앙생활 잘하고 있으니까, 이건 가깝다는 하나님의 표창장이 아닌가, 상장이 아닌가, 자기는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막상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이야기한 것은 뭐냐 하면 “욥아” ‘예’ “네가 하마를 붙잡을 수 있느냐?” 하마, 악어, 독수리... 왜 그런 말씀을 하실까요? 하나님께서.
욥은 자기가 모든 분야에 능력 있는 자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한 분야, 한 분야에 대해서 욥이 시시하게 보는 이 땅에 있는 짐승과 일대일 대응을 해봐요. 대응을 해보면 하마는 하는데 욥은 못 하고, 악어는 하는데 욥은 못 하고, 물고기는 하는데 욥은 못 하고, 하나님께서 욥에게 하는 것은 욥은 못 하고, 못 하고, 할 수 있는 것이 없고를 계속 발굴하고 발취해요. 우리 하나님께서 욥에게.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마다, 욥은 땅 파는 드릴처럼 욥의 하는 모든 말이, 그동안 했던 ‘하나님이 어떻고, 이웃사랑이 어떻고, 어떻게 하나님께 바르게 영광 돌리고’라는 이 모든 것이 무능력에서 나오는 발언들이었다는 것을 하나님 쪽에서 증명해 줘요. ‘하나님이여 제가 얼마나 의로운지 증명해 주세요’라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전혀 능력이 없는 무능력한 자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알려줍니다.
그러면 이것은 욥이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받느냐. 구원받지 못해요. 욥은 하나님께 이야기했다고 해서 구원받지 못합니다. 구원받지 못하면 욥은 하나님께 그 이야기를 왜 들었는가. 나중에 복까지 받았는데, 왜 복이 구원이 안 되는가. 하나님은 욥을 어디로 데려가느냐 하면, 의에 자리에 데려가는 것이 아니고 죄 없는 자리에 데려갑니다. 죄 없는 자리.
이게 뭐냐 하면 창세기 2장에 가요. 창세기 2장에는 아담이 의인이 아닙니다. 의인이 아니고 죄 없는 상태인데, 어떤 것을 죄 없는 상태라 하느냐면, 무지한 것을 아는 상태가 죄 없는 상태예요. 선악에 대해서 아는 게 없을 때, 그게 원래 하나님이 창조했던 첫 자리예요. 오늘이 무슨 날이냐 하면 방정환 선생님이 제정하신 ‘어린이날’이에요.
어린이날 되면 여러분들이 성경 말씀에 이것을 염두에 둬야 해요. 누구든지 어린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고 되어있어요. 그러면 어린아이 되면 구원받느냐. 그건 아니에요. 어린아이같이 되는 것이 구원받는 시작점인데, 그 어린아이가 어린아이처럼 살아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어린아이는 무지몽매한 상태예요. 어린아이는 그 자체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에 무죄해요.
어린아이에게 처벌하기가 곤란하다는 겁니다. 왜냐 하면 뭔가를 의도해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면 그 창세기 2장에 어린아이라면, 창세기 3장에 여자 이름이 하와예요. ‘생명’ 생명에서 집어넣는 것은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주님과의 전쟁을 통해서 무지한 자를 뭐로 바꾸느냐. 의인으로 바꿔요. 아이가 의인 되는 거 아니에요. 욥이 의인은 아니에요.
의인은 오직 한 분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의인이고 예수님부터 시작해서 예수님 안에서 그때부터는 무지한 자가 아니라, 무지하고 무죄한 자가 아니라, 의를 아는 자가 등장하는 겁니다. 맨날 또 무지한 것을 자랑하면 안 돼요. 우리는 한꺼번에 알아야 해요. 예수님이 하신 일이 그게 의고, 그 의만 하나님께서 천국에 통과하게 하신다는 사실.
주님이 바로, 그 의가 천국이고, 천국의 문이에요. 이게 바로 구약의 한계죠. 다시 한번 마태복음 13장 보겠습니다. 44절에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이것은 발견해야 할 문제입니다. 발견해야 할 문제. 그 밭은, 그 밭은 뭐냐,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밭이 아무것도 없지, 또 뭐가 있겠어요.
그래서 뭐가 특이하냐 하면, 밭인데, 아무것도 없어야 마땅한데, 거기에 보물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그 밭에 보물을 숨겨둔 당사자가 와서 알려줘야 아는 거예요. 그러면 그걸 발견한 그 사람은 내가 뭔가 이 보물에 대해서 기여도나 내가 뭘 했다는 것이 완전히 빠져야겠죠. 자기의 커리어(Career)가 소용이 없어요. 교회 경력, 이력 아무 소용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주님 쪽에서 드릴로 뚫어야죠. 소위 아는체하는 우리 자신을 뚫어야 한다고요. 저도 다니면서 어지간한 식당은 다 아는데, 울산에서 식사하러 가는데 어떤 가게의 이름이 보였어요. ‘회사 가는 총각’ 그걸 보면서 저거는 일반 회사인데 자기 직원들이 총각이 많으니까 회사 다니면서 보람을 느끼라고 회사 이름을 격려 차원에서 ‘회사 가는 총각’이라고 지었는가 했는데, 서목사님께 물어봤어요.
저거는 무슨 회사입니까? 저거는 횟집입니다. 그러니까 쓸 때 ‘회’를 띄어서 써야 해요. ‘회 사 가는 총각’ 진짜 몰랐구나. 그러면 인간은 왜 모르는 채로, 주님께서 우리를 십자가로 뚫어야 하는 이유가, 인간은 자꾸 모르면서도 내가 알아야 아는 것이 나를 구원해야 한다는 식으로 자기를 자꾸 독촉하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거기서 뭐냐.
모든 인간은, 교회 나온 사람들뿐만이 아니고, 모든 인간은 어떤 나름의 욕망이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내가 획득한 지식으로 내가 복을 받고 구원받는 것을 인간이 욕망해요. BC490년 경에 제논이라는 고대 철학가가 있는데 이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아킬레스라는 그 당시 최고의 마라톤 선수가 있었는데, ‘최고의 마라톤 선수와 거북이가 마라톤 달리기하면 누가 이길까?’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 그건 보나 마나 최고 마라톤 선수 아킬레스가 이긴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제논이 하는 말이 ‘아무리 해도 마라톤 선수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앞설 수가 없다’라고 한 이것이 제논의 역설이라고 해요. 물론 같이 달리는 것이 아니고 거북이를 앞장세워요. 한 백 미터 앞장세우고, 아킬레스가 뒤에서 달리게 되면 그 거북이를 따라잡으려고 가는 시간만큼 거북이가 약간 앞서가기 때문에 여전히 거북이가 앞선다는 거예요.
아무리 따라가도 무한대로 가도 따라잡을 수가 없고 거북이가 항상 조금씩 앞서니까 계속 뒤따라갈 수밖에 없다고 하는 거죠. 이것을 그 당시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무슨 뜻인지를 못 알아들었어요. 그런데 이것을 정신분석학에 자크 라캉(1902~1981, 프랑스 정신의학자, 정신분석학자, 철학자)이라는 사람이 정신분석을 공부하면서 이것을 알아냈어요.
뭐냐 하면 인간 욕망의 대상이 있는 한, 인간은 그 욕망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거예요. 인간의 욕망은 따라잡으려고 하는 가운데서 욕망은 살아있고, 욕망이 살아있어야 인간은 삶의 의욕이 생기는 겁니다. 이게 마귀의 방법이에요. 마귀는 앞에 천국을 두고서 계속해서 네가 천국을 가려면 이렇게, 이렇게 해야 천국을 갈 수 있다는 것을 교회를 통해서 계속 거짓말하고 사기를 쳐요.
왜? 천국 가고 구원받는 게 자기의 유일한 욕망이기 때문에. 요양병원 가도 유일한 욕망은 천국 가는 거예요. 지옥 안 가고. 오늘 본문처럼 사망의 길이 아니고 생명의 길을 가고 싶은 욕망이 있는 거예요. 욕망을 위해서 인간은 뭘 끌어모으겠습니까? 성경 지식부터 해서 교회 봉사, 자기 할 수 있는 것을 다 끌어모으겠지요. 그런데 인간은 뭘 모르느냐 하면, 욕망은 달성되게 되면 본인이 죽는다는 거예요. 따라서 욕망은 따라가는 거예요.
그래야 희망이 생기니까. 희망이 있어야 사람은 안 죽어요. 문제는 안 죽으니까 지옥을 가는 겁니다.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은 목숨이 붙어 있어서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남에게 인정받지 못할 때, 그 사람은 죽은 거예요. 내가 나를 인정해야 하고요. 남이 인정해야 하고요. 이게 같은 말이에요. 나의 나를 인정하는 것은 타인이 인정해야 비로소 내가 그것을 받아 밑천으로 내가 나를 인정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남이 나를 인정 못 하면 우리는 자살합니다. 자식이 부모를 인정 안 하면 부모는 살맛이 없어요. 그리고 부모가 자식을 인정 안 하면 자식은 살 수가 없습니다. 숨이 막혀서 그 집에 못 들어가요. 그러니까 산다는 것은 목숨이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인정받는 내가 살아있어 사는 거예요. 만약 인정 못 받는다? 100퍼센트 우울증 걸립니다.
왜 요새 아내가 우울증 걸리고 남편이 우울증 걸립니까? 남편 퇴직했다고 이제 편하게 살려고 하니까, 여자가 ‘밖으로 나가’라고 하지요. 직장도 없는데 밖에 나가서 할 게 뭐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남편은 그다음부터 우울증 걸립니다. 지금까지 돈 벌어다 줬는데 이제 돈 못 번다고 나를 박대하나? 여자 입장에서는 ‘이 집안은 나의 나와바리야’ 이게 바로 우리 내부에 있는 역설입니다.
살고자 하니까 지옥 가고, 그렇다고 해서 내 자부심 버리고 나 아는 지식 다 엉터리라고 인정하고 죽을 수는 없고, 그러니 인간은 이래나 저래나 천국과 상관없는 그저 자기 과거의 뒤를 바라볼 수밖에 없지요. 끝으로 결론 내려야 하겠죠? 여러분, 우렁쉥이 아십니까? 멍게. 멍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멍게는 처음 올챙이 모양처럼 될 때 자기 두뇌가 있고요, 두뇌에서 뻗어 나오는 척색(notochord)을 가지고 있어요.
이걸 가지고 우렁쉥이 멍게는 땅에 꽂고 평생을 삽니다. 멍게가 척색을 땅에 딱 꽂고 난 뒤에 자기 뇌와 자기 척색을 자기가 먹어버려요. 왜? 이제는 정박해서 착상해서 살기 때문에 더 이상 두뇌가 필요 없어요. 그래서 멍게는 두뇌가 없습니다. 뇌가 없어요. 두뇌는 운동기관인데 운동할 필요 없으니까, 두뇌가 필요 없는 거예요.
주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 땅에서 이미 해결 다 지으신 분이 성도 안에 들어와서 우리 안에 착상해요. 착상하고 그다음부터 어떤 운동을 하느냐 하면 내가 스스로 내 구원의 욕망을 주님의 성령께서 그것을 다 없애버립니다. 이미 너는 죽었다는 거예요. 내 목숨이 끊어졌다는 말이 아니고, 네가 행할 수 있는 어떤 행함의 가치가 아무짝도 쓸모없다고 이미 하늘에서 소식이 들려왔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네가 굴리는 너의 두뇌는 소용이 없어요. 차라리 내 두뇌를 먹어버려야 해요. 성경 보고 지식으로 구원받겠다는 것을 없애버려야 합니다. 주께서 우리 안에 착상이 되면 그걸로 되는 거예요. 착상되면서부터 우리 안에 현상은 뭐냐, 주님이 나를 갉아 먹는 거예요. 내가 방해되니까 없애버린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이 우리 안에 살아있어서 천국이, 이미 다 이루어진 천국이 아직도 이 세대를 바라보고 있는, 과거의 인간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를 날마다 우리 뜻대로 안 되게 해주는 거, 이게 바로 우리 안에 이미 작용하고 있는 생명의 현상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고백이 저와 우리들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생명으로 갈래, 지옥 갈래?’라는 선택의 여지 없게 우리를 먹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천국 지옥이 우리 선택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의 선택인 것을 왜 이제야 우리가 그것을 발견했는지. 늘 주께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