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돌아온 언약궤

아빠와 함께 2024. 5. 12. 16:44

돌아온 언약궤 

2024년 5월 12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1:11-14

(21:11) 유다 왕의 집에 대한 여호와의 말을 들으라
(21:12)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다윗의 집이여 너는 아침마다 공평히 판결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자의 손에서 건지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는 악행을 인하여 내 노가 불 같이 일어나서 사르리니 능히 끌 자가 없으리라
(21:13)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골짜기와 평원 반석의 거민아 보라 너희가 말하기를 누가 내려와서 우리를 치리요 누가 우리의 거처에 들어오리요 하거니와 나는 네 대적이라
(21:14) 내가 너희 행위대로 벌할 것이요 내가 또 수풀에 불을 놓아 그 사경을 사르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세상에는 인간들의 말만 돌아다닙니다. 따라서 그 속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온다는 것은 평소에 인간의 말만 듣고 사는 사람으로서 참으로 기이하고 특이한 현상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인 선지자의 말을 통해서 들려오기에 마음에 안 들으면 무시하면 그만인 겁니다.

자, 그렇다면 사람은 어떤 말들을 걸러내어 안 들으려고 할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가 틀어졌다는 말은 안 들으려 합니다. 인간의 자기 긍정은 하나님의 긍정적인 면과 연결되어서 증명된다고 여깁니다. 즉 인간들은 자기에 대한 자기 긍정을 항시 포기할 마음이 없습니다.

이런 자세를 가지고 소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들에 대해서 골라잡으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 54:15-17 말씀 같은 겁니다. “그들이 모일지라도 나로 말미암지 아니한 것이니 누구든지 모여 너를 치는 자는 너를 인하여 패망하리라 숯불을 불어서 자기가 쓸만한 기계를 제조하는 장인도 내가 창조하였고 파괴하며 진멸하는 자도 내가 창조하였은즉

무릇 너를 치려고 제조된 기계가 날카롭지 못할 것이라 무릇 일어나 너를 대적하여 송사하는 혀는 네게 정죄를 당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종들의 기업이요 이는 그들이 내게서 얻은 의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사야 선지자도 선지자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토대로 해서 인간들은 자기 긍정을 확고히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편이니 누가 나를 두려워하리요”라는 정신입니다. (사 43:13) 그런데 예레미야가 말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나는 네 대적이라”(렘 21:13) 즉 하나님이 너를 적으로 간주해서 칠 것이라는 겁니다. 이 말씀은 곧 ‘이스라엘의 적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 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적’이 되기 위한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이런 말을 내뱉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백성들이나 지도자급에 있는 자가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즉 인간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경우는 자신이 나쁜 짓을 했을 경우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선지자가 말하는 바는 인간의 본성이 밖으로 나와서 하나님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도대체 인간의 근본 본성이 어떠하기에 하나님의 원수가 될 수밖에 없을까요? 그것보다 더 알고 있어야 하는 점은,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바로 그점만이 진정 하나님의 긍정적인 접속이 성립된다는 겁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10)

즉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될 경우에만 하나님쪽에서 제시된 ‘화목제물’이 삽니다. 신약에 와서는 비로소 드러나는 이런 긍정성이 실은 구약 내내 흐르고 있습니다. 단지 이 긍정성을 위해 인간 본성의 죄악을 수시로 들추어져야 합니다. 민수기 10:35-36에 보면,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가로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궤가 쉴 때에는 가로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천만 인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에 접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자신을 지키는 무기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상 4:11에 보면,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과연 이스라엘은 결정적 무기를 빼앗겨서 망해버린 겁니까? 아닙니다.

언약궤가 단독으로 블레셋 진영을 휘젓고 다니시면서 이스라엘의 진정한 승리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블레셋은 자진해서 언약궤를 이스라엘 쪽으로 반납합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언약궤가 이스라엘에게 돌아오는 것은 다윗 때입니다. 다윗의 승리와 언약궤의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언약궤를 빼앗기도 돌아오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이 언약궤 정신과는 대치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전쟁이란 결코 이스라엘쪽에 승리를 안겨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승리를 돌아가게 하신다는 점입니다.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겁니다.

이 원리에 입각해서 신약의 교회가 무엇인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교회 이야기를 처음 끄집어내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교회에 대해서 반응을 나타낸 베드로가 도리어 진정한 교회 정신에 원수가 되는 발언을 하게 됩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마 16:21-23) 

배추밭에 배추를 거꾸로 심어라고 종 10명에게 부탁했지만 참으로 배추를 거꾸로 심은 자는 한 명 뿐이고 나머지 아홉명의 종들은 똑바로 심어 배추를 살려낸 것에 대해서 주인이 돌아와서 대노하는 것처럼 주인에게 종에게 부탁하신 참 뜻은 배추를 죽여 썩게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생각하신 교회는 자신의 피로 세워지는 모임입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 20:28) 진정한 교회는 자기 자신을 살리기 위해 뭐라도 이용하는 그 인간의 사고방식이 곧 악마의 사고방식인 것을 노출시키는 교회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는 모두 다 촛대가 옮겨짐을 당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버린 것이 아닙니다. 교회 스스로가 자신들이 하나님의 원수됨을 자인한다면 촛대를 다시 돌아옵니다.

이처럼 오늘날도 성도들은 세상에 나가서 자기를 위한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 환경을 통해서 성도는 본인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자각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만 고집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03강-예레미야 21장 11~14절(돌아온 언약궤)240512-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1장 11~14절입니다. 구약성경 1078페이지입니다.

“유다 왕의 집에 대한 여호와의 말을 들으라,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다윗의 집이여 너는 아침마다 공평히 판결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자의 손에서 건지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악행을 인하여 내 노가 불 같이 일어나서 사르리니 능히 끌 자가 없으리라,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골짜기와 평원 반석의 거민아 보라 너희가 말하기를 누가 내려와서 우리를 치리요 누가 우리의 거처에 들어 오리요 하거니와 나는 네 대적이라, 내가 너희 행위대로 벌할 것이요 내가 또 수풀에 불을 놓아 그 사경을 사르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기 구약성경의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나는 네 대적이라” 그러니까 ‘이스라엘아, 너는 내 적이다’라는 말이죠. 달리 말해서 ‘이스라엘은 내 적이다’라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12절에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라는 이 문장만 해도, 현재, 현실 구조 체제에서, 인간의 말만 뉴스 시간에 늘 나오고, 우리가 들리는 모든 이야기가 사람 이야기인데, 거기에 여호와의 말이 섞여 들어온다는 것이 정말 신기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지금 성경을 보니까 여호와라는 말이 ‘옛날 구약 때 여호와께서 직접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했구나’라고 생각하지만, 성경만 덮어버리면 인간의 말 외에 아무말도 들려오지 않습니다. 인간의 말만 들려와요. 인간의 눈치만 보며 살면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의 말이 아닌 말이, 내 인생 구조에, 이 현실구조에 들어오게 되면, 그때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사람의 말들을 치워보세요.

치워버리고 주의 말씀에 직접, 그 앞에서 나를 내세우게 되면, 그때 바로 우리가 일종의 선지자가 되는 거예요. 선지자의 특징은 사람들 말보다, 주의 말씀이 나를 결정지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넓은 길로 가지 마라. 좁은 길로 가라. 거기 좁은 길에 영생이 있다”라는 이 말을 예수님, 하나님이죠, 예수님 말이라고 여기지 아니하고, 성경 없이 그냥 누가 ‘넓은 길로 가지 마라. 거기는 멸망의 길이다. 좁은 길로 가라. 거기는 영생의 길이다’라고 누가 이야기하면 우리는 그것을 실행에 옮깁니다.

‘그래. 이게 바로 내 인생에 해결책이었어. 나는 이제 지리산 들어가서 자연인 된다’라는 이런 결과가 딱 나오잖아요. ‘잘 있거라. 이 인간들아’라는 식으로. 그런 마음 자세로 성경을 보니까, 성경을 아무리 봐도 성경이 들려오지를 않는 겁니다. 제가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배추밭이 하나 있는데, 일을 시키는 주인이 배추밭에 배추를 심으라고 했어요.

열 명의 종에게 배추를 심으라고 하는데, 배추를 심을 때, ‘모두 배추 심는 법 알지? 배추는 뿌리를 아래로 향하게 하고 이파리가 하늘로 향하게 심는 거야’라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주인이 이상한 주인인지 배추를 거꾸로 뒤집어서 뿌리가 하늘로 향하고 싱싱한 이파리를 땅에 묻으라는 거예요. 분명히 지시를 그렇게 했어요. 했는데, 그것도 빠르게 한 번만 하고 주인이 떠났을 때, 나머지 사람이 자기들끼리 이야기합니다.

‘야야, 주인이 지금 나이가 70이 넘었어. 정신이 오락가락해. 분명히 지시는 내렸는데, 다른 건 모르겠고, 배추밭에 배추 심으라고 했어’라는 그것만 딱 들려오는 거예요. 그리고 얼른 듣기로는 주인이 뭔가 이상한 이야기를 한 거 같아요. 그리고 주인 빠진 다음에 인간들에게 물어보니까, ‘배추밭은 뿌리를 땅에 박아야 잘 산다’라고 해요. ‘그렇지. 그렇지’라고 해서 했는데, 바보 등신같은 인간이 주인이 시킨 대로 한 거예요.

주인이 딱 말하면 한 번에 알아차려야 하는데, 이거는 곧이곧대로, 배추를 거꾸로 땅에 심었어요. 나중에 주인이 왔습니다. ‘배추 잘 심었나?’ ‘잘 심었습니다’ 그러니까 주인이 하는 말이 ‘심었는데, 왜 배추가 안 썩었어? 왜 안 썩었어? 내가 거꾸로 심으라고 한 것은 배추가 썩으라고 그렇게 하라고 한 거야’ 그들은 배추 심는 행동을 통해서 본심이 드러난 거예요.

‘주인님은 날 살리겠지’라고. 그러나 살리는 것이 아니고 나랑 같이 죽자는 이야기예요. 말씀을 대할 때, 오늘 본문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너희의 적이다”라고 하고 그다음에 13절이 오늘의 핵심입니다. “누가 내려와서 우리를 치리요” 그 당시에 우리가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우리라도 이런 말을 할 수 있어요. 왜냐 하면 성경에 수십군데 나오지만 시간 관계상 두 군데만 찾아보겠습니다.

이사야 42장 12~13절에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며 섬들 중에서 그의 찬송을 선전할찌어다, 여호와께서 용사 같이 나가시며 전사 같이 분발하여 외쳐 크게 부르시며 그 대적을 크게 치시리로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해서 비록 이스라엘에 힘이 없더라도 하나님이 나서서 적들을 막아주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딱 나오잖아요. 예레미야만 선지자입니까? 이사야도 선지자 아닙니까?

이사야 54장 14~17절에 “너는 의로 설 것이며 학대가 네게서 멀어질 것인즉 네가 두려워 아니할 것이며 공포 그것도 너를 가까이 못할 것이라, 그들이 모일찌라도 나로 말미암지 아니한 것이니 누구든지 모여 너를 치는 자는 너를 인하여 패망하리라, 숯불을 불어서 자기가 쓸만한 기계를 제조하는 장인도 내가 창조하였고 파괴하며 진멸하는 자도 내가 창조하였은즉, 무릇 너를 치려고 제조된 기계가 날카롭지 못할 것이라 무릇 일어나 너를 대적하여 송사하는 혀는 네게 정죄를 당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종들의 기업이요 이는 그들이 내게서 얻은 의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사야의 말씀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친히 하나님이 알아서 지켜주기 때문에, 적들이 아무리 달려들어도 이스라엘은 멀쩡하다는 겁니다. 너의 예언과 말씀을 이사야 선지자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 이미 알고 있어요. 이전 선지자니까 알고 있단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흔히 대두되는 의문점이 뭐냐. 성경 말씀 가운데서 서로 조화가 안 되는 것을 어떻게 조화를 맞추냐.

이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런데 조화가 안 되기를 뭘 조화가 안 돼요. 배추만 거꾸로 심으면 조화가 다 돼요. 문제는 배추를 거꾸로 심을 생각 안 하고, 본인이 썩을 생각 안 하고,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썩을 생각 안 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신다고 하니까, 오늘 본문 예레미야에 21장에 이 말씀, 13절에 이 말씀은 이건 선임선지자의 말과 충돌되기 때문에, 우리는 안 들어도 된다는 쪽으로 정리해요. 왜? 그래야 조화가 되니까.

이 조화에 대해서 성경 다른 구약에 여러 가지 말씀 나오는데, 아주 유명한 말씀 있어요. 그 대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민수기 10장 35~36절에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가로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궤가 쉴 때에는 가로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천만인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라는 이 대목입니다.

그러면 제가 부흥사라고 치고, 이 대목을 본문에서 뽑아서 한 시간 동안 부흥회를 한다고 하면, 듣는 교인들에게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메시지를 보여주려고 안달이 날 거란 말이죠. 그건 뭐냐 하면, ‘하나님의 궤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한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으면 여러분의 적들이 도망하게 되고 여러분의 인생은 펼 거고, 성공하고, 만사형통할 것입니다. 믿습니까?’

부흥사가 오니까 ‘이 교회 교인들이 싸우고 문제가 많은데, 이번 부흥회를 통해서, 다 같이 은혜받읍시다’라는 이런 식으로. ‘싸운다는 것은 하나님이 없기 때문인데, 하나님만 믿으면 여러분 잘되실 겁니다. 이 교회 대박 날 겁니다. 아파트도 재개발 들어갔으니 대박 날 겁니다’라는 식으로 이렇게 위로하는 거예요. 그런데 말입니다.

사무엘상 4장 22절에 보면, 똑같은 하나님의 언약궤예요. 언약궤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보면, 그들이 전쟁하면서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습니다.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

민수기 10장 다시 이야기하면 이런 겁니다. ‘하나님의 궤를 우리가 소지한다면, 이제는 뭐, 외계인들이 쳐들어오고, 미국이 쳐들어온다면, 북한이 쳐들어와도 관계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신다’ 수십 년 전에 교회에서 북한 남침설이 있을 때, 교회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을 지켜주신다는 이야기가 많이 설파되었어요.

그러니까 위험하다 싶으면 집구석에 앉아있지 말고 교회 새벽기도 나오라는 말이죠. 죽어도 교회에서 같이 죽자는 말이죠. 원자폭탄도 지나가니까. 우리는 원자폭탄보다 더 센 하나님의 궤가 있다는 거죠. 그런데 그 궤를 빼앗겨요. 도대체 성경을 어떻게 해석한 겁니까? 신약성경에서 한 번 더 보겠습니다. 신약성경은 볼 것도 없어요. 너무 유명하니까.

요한계시록 2~3장에 일곱 교회 나옵니다. 일곱 교회의 특징이 뭐냐. 촛대를 옮기는 거예요. 촛대를 옮기는 겁니다. ‘교회냐? 예~ 그러면 촛대 옮겨 줄게’라고 되는 거죠. 교회인데 촛대 옮기면, 교회였다고 생각한 교회가 더 이상 교회가 아니에요. 교인이 몇 명 남아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교인이 하나둘 빠져서 교회가 없어지는 것은 고마운 일이에요.

그런데 교인이 하나둘 늘어서 갈수록 숫자가 많아져서 부흥되는데 교회가 아니라는 판정을 내려버리면, 이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따라서 이 언약궤, 신약의 촛대, 신약의 교회, 도대체 이 교회가 뭐냐는 거죠. 교회가 무엇이기에, 자꾸 교회가 엉뚱한 소리를 하는가. 그건 교회가 나오는 대목을 찾아봐야지요. 마태복음 16장을 보면서 왜 우리가 하나님의 적이냐, 왜 우리가 적이냐를 아울러 봐야 합니다.

마태복음 보기 전에 로마서 5장 10절 먼저 보겠습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라고 되어있거든요. 화목제물을 구약의 언약궤로 바꿉시다. 언약궤가 언약궤답게 되는 것은 인간이 언약궤 있음으로 우리는 산다고 믿는 그 믿음을 하나님의 원수의 생각으로 간주하고 포기하는 것이 언약궤가 사는 방법이에요.

언약궤가 있음으로 우리는 언약궤를 믿고 있으면 우리는 산다는 식으로, 언약궤 이용해서 나 산다는 그 사고방식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와 진배없고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인정할 경우에만, 언약궤가 머물러있게 된단 말이죠. 그러니까 사무엘상 4장에서 하나님이 언약궤를 떠난 게 아니에요. 이스라엘 쪽에서 언약궤를 떠났어요. 언약의 취지를 모르니까.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언약궤가 블레셋 진영을 한 바퀴 돌고 다시 와요. 어디로? 이스라엘로. 다시 오면서 이스라엘에 어떤 변화가 있어 줘야 합니다. 엘리 제사장같은 사고방식 말고, 나중에 사울 왕을 달라는 그런 사고방식 말고, 언약궤가 언제 다시 오느냐. 다윗 때 돌아와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았지만, 그동안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과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이미 이스라엘 쪽에서 변질된 거예요.

우리 쪽에서 변질된 거예요. 그래서 오늘 설교에서 이렇게 정리합시다. 하나님의 촛대는 항상 말씀 안에 촛대이기 때문에, 말씀이 들어오면 촛대로 들어오고 우리가 말씀 거부하면 촛대도 나간다. 하지만 말씀을 보게 되면 다시 성령께서 촛대를 계속 우리에게 주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 열두 제자도 마찬가지죠, 그들이 예수님을 버려도 주께서 다시 돌아오시잖아요. 주님이 제자들을 다시 찾아오잖아요. 그 과정을 보자는 말이죠.

‘믿습니다’라고 하지 말고, 우리가 진짜 본마음 본색이 하나님의 원수인 것을 자인해야 해요. 그것도 매일 같이 자인해야 해요. 인정을 해줘야 해요. ‘원수 따로 없다. 내가 하나님의 원수다’ 하나님이 내 편이라고 우겼던 그거, 하나님의 선지자 말씀을 딱 보고 ‘이건 내 보디가드(경호원) 이네’라고 생각한 순간, 우리에게 예레미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네가 내 적이야. 그렇게 생각하는 네가 바로 내 적이야. 누가 너를 치리오? 내가 너를 칠게. 됐냐?” 뭐, 누가 이스라엘을 치리오? 유다를 치리오? 내가 친다니까. 이렇게 예레미야가 말하니까 죽은 거예요. 순교같은 죽임을 당한 거예요. 이제 남은 문제는 우리 본색을, 진짜 우리 안에 무슨 괴물이 있기에 자꾸 하나님을 이용할 생각을 하느냐는 거죠.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한결같은 원수인 것을 깨달으면 그게 기쁨이고 즐거움이고 복이고 가벼움인데, ‘이번 일을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섭섭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라고 맨날 허장각이 대사치던 멘트처럼 자꾸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뭐냐. 그걸 말씀이 또 우리에게 알려줬거든요. 그걸 외면하면 안 돼요. 그게 바로 마태복음 16장에 나옵니다.


21~23절에 볼 건데, 21절 앞부분은 교회 이야기예요. 천국 열쇠 나오고, 베드로에게 네게 교회를 세운다고 이렇게 교회 이야기하면서, 21절 들어갑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탄의 일을 생각하는구나”라는 뜻으로, 사탄의 일 대신에 사람의 일을 언급하신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사람에게서 나오는 말 있잖아요. 말, 태도, 행위, 이런 것들 속에 이미 하나님의 대적이 들어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원수가 인간 속에 이미 자리 잡고, 인간의 마음을 꽉 틀어쥐고 있는 겁니다. 우리 인간만 그걸 몰랐죠.

그래서 틀어쥐고 뭐했습니까? 이 세상에서 전쟁한 거죠. 제가 들었던 이야기인데, 베트남전쟁 때 맹호부대로, 맹호의 특징은 맹호 같아요, 맹호부대에 속해서 베트남 현지 전쟁에 참여한 군인을 보내놓고, 부모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 아들은 맹렬한 전쟁터에 나가서 훌륭한 아들로 살 것이다’라고 기도합니다. 이게 얼마나 무지한 생각인지.

전쟁터는 사람을 뭉개버리는 현장이에요. 전쟁터에서 좋은 사람 없습니다. 전쟁이란 그래요. 자본 전쟁도 그렇고, 오늘날 자영업자도 마찬가지고, 좋은 사람 없습니다. 직장생활도 마찬가지고요. 좋은 사람 없어요. 심지어 솔로(티비프로)에 나와서도 좋은 사람 없어요. ‘나는 당신을 선택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면 끝날 문제죠. 모~~든 게 전쟁입니다.

심지어 돈 좀 있다는 나이 연세 많은 사람이, 한 달 회비만 해도 보증금 7만 원에 한 달 회비 350만 원 되는 실버타운 내에서도, 나이 80 먹은 노인들까지도 전쟁입니다. ‘그 이쁜 할머니가 왜 너랑 사귀냐?’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나의 전쟁뿐이에요. 이 세상에서. 오직 나를 지키는 전쟁만 수행하는 것이 인간의 일입니다.

‘높은음자리’라는 가수가 불렀던 노래가 있거든요. ‘저 빠따(바다)에 누워’라는 노래인데. 그 가사 보면 요새 이 가사가 날마다 마음에 다가와요. ‘나 하나의 모습으로 태어나, 바다에 누워’ 그러니까 나는 누구의 변형체라는 거예요. 악마의 변형체겠죠. ‘나 하나의 모습으로 태어나 바다에 누워, 해 저문 노을을 바라 다 본다’ 어느 대목에 꽂히냐면, ‘나 하나의 모습으로 태어나’라는 이 부분이에요.

태어난 자체가 오직 이 모습 지키라고 인간은 태어났다고, 인간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사람의 말만 선택해서 듣게 되어요. 하나님의 말씀같은 것은 밀어내버려요. 말씀이 무슨 밥을 먹여줍니까, 뭘 해줍니까? 밀어내죠. 나 하나의 모습만 지켜내면 끝나는 거예요. 이게 아주 오래된 옛날 노래지만, 지금 20대~30대 노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모든 노래 가사들이. 너 하나 잘 지키면 된다는 거예요.

다시 마태복음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통해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배추를 거꾸로 심으시는 겁니다. “내가 고난받고 죽는다”라고 하실 때, “너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라고 한 그 너인 베드로 하는 말이 “예수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라고 했거든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교회는 그런 식으로 세워질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톡! 하고 베드로가 자기의 속마음을 여지없이 드러냈어요.

괴물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냈어요. 교회는 그렇게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떻게 세워지는가. 사도행전 20장 28절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교회는 하나님의 피로 세워져요. 제가 수십 번 이야기했는데, 교회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피로 세우신 거예요.

이스라엘에서 언약궤 떠나면 그것은 이스라엘 숫자가 몇 명이 되든, 그것은 이스라엘 아니죠. 교회 숫자가 얼마가 되든 모든 초점이 피로 모여지지 않으면 그건 교회가 아닙니다. 그건 언약궤가 피로 물들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이 이야기하기를 ‘목사님,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닌데, 그래가지고 교인이 한 명도 없으면 어떻게 합니까? 참석 교인이 한 명도 없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거는 교회가 크게 부흥된 거죠. 이거 이야기, 피 이야기에서 나왔다면 그동안 가짜만 교회도 모르는 채 천당 가려고 온 샘이 된 거예요. 따라서 그들은 말씀도 모르고 본인 나름의 좁은 길을 선택해서, 남은 교회 안 가는데, 자기는 열심히 교회 다녀서 열심히 충성하는 고난을 받는다고 본인이 정리해서 교회 온 거예요. 피는 관계없이 본인이 스스로 파악했다는 좁은 길, 지옥 갑니다.

다시 말해서, 문은 없어요. 문은 없다는 말은 베드로가 대표해서 마귀 일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원수이기 때문에, 우리도 마찬가지고, 천국 가는 문은 없습니다. 그 피가 하나님의 문이에요. 이게 천국입니다. 천국의 열쇠입니다. 그러면 늘상 피를 생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배추를 거꾸로 심어야죠. 내가 맨날 교회 다니면서도, 내가 이만큼 잘나고, 대단하고, 내가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나의 전쟁을 하고 있는 이것이 주께서 그동안 아직도 세상을 계속해서 살게 만들고, 직장생활하고, 자영업 하게 만들고, 계속 살게 하면서, 나는 내 생각뿐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과 더불어서 예수님의 피의 고마움을, 모든 죄를 사해주는 우리의 모든 못난 인생 속에서 피어나는 식으로, 주님은 우리가 언약궤가 되게 하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또 죄지으러 세상에 나가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나의 의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화목제물로 언약궤로 하나님의 의로 구원된다는 사실을 알기는 알지만, 악한 세상 못지않게 악한 저희들을 붙여주셔서, 그것이 실감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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