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유통
2024년 4월 28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1:1-6
(21:1) 시드기야 왕이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과 제사장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를 보내어 예레미야에게 말하기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우리를 치니 청컨대 너는 우리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라 여호와께서 혹시 그 모든 기사로 우리를 도와 행하시면 그가 우리를 떠나리라 하던 그 때에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21:3)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대답하되 너희는 시드기야에게 이같이 말하라
(21:4)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너희가 성밖에서 바벨론 왕과 또 너희를 에운 갈대아인과 싸우는 바 너희 손에 가진 병기를 내가 돌이킬 것이요 그들을 이 성 중에 모아 들이리라
(21:5) 내가 든 손과 강한 팔 곧 노와 분과 대노로 친히 너희를 칠 것이며
(21:6) 내가 또 이 성에 거주하는 자를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 치리니 그들이 큰 염병에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세속 왕과 이스라엘의 왕이 의식이 달라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멸망 말기가 되면 왕들이 기존의 이방민족의 세속 왕과 조금도 다를 바는 없는 의식으로 국가 행정에 임하게 됩니다. 나라를 자기 소유로 간주해서 장기집권을 노립니다. 이스라엘 전체를 자기를 위한 나라인 것이라도 된 양 여깁니다.
이런 입장에서 왕들은 선지자를 대하고 있습니다. 아쉬울 때,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얻겠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신을 끌어와서 신과 손잡고 좋은 관계를 엮으려는 것은 자신도 신처럼 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비리비하고 별 본일없는 존재가 되기 싫은 겁니다. 인간들은 도무지 어디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발견해야 될 지를 모릅니다.
마태복음 7:13-14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사람들은 이 말씀을 대하면서 자신의 미래를 좋은 쪽으로 돌리려 합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있어 ‘좁은 문’은 없습니다. 인간들이 그 어떤 생각해도 모두 ‘넓은 길’이요 멸망의 길입니다. 넓은 길과 좁은 길을 두고 선택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건네는 말씀은 자체적으로 모순이 들어 있고 그 모순의 덫은 인간이 풀어낼 수가 없습니다. 그저 말씀 시킨대로 살면 무사히 지옥가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어겨도 지옥이요 지켜도 지옥입니다. 이게 이미 확정된 인간의 운명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모순 속에 선지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드기야가 예레미야에게 자문을 구하기 이전부터 이미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스라엘 전체 운명을 분명히 언급했습니다. 바벨론 군대가 오거든 아뭇 소리말고 항복하고 나라를 말아먹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에게 있어 자신이 망하는 것으로 결정짓는 말씀을 순순히 따를 뜻이 없습니다. 정해준 운명이라도 어떻게든 예외가 있을 것이라고 고대해 보고 선지자에게 물어 봅니다. 저기를 절망에 이르게 하는 것은 진리가 아닐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들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 바로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의 죽음입니다.
사람들은 ‘망하는 것’이 ‘사는 길’이라는 사실을 오해해서 ‘망함으로서 살 수 있다’는 식으로 이해하려 합니다. ‘망하는 것’과 ‘사는 길’ 사이에 ‘망하므로서 살아보자’는 그 인간의 제거가 필수적으로 개재됩니다. 선지자가 백성들에게 강압적으로 ‘망하므로서 살자’는 식으로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선지자에게 먼저 있을 수 있는 모순을 거쳐 백성들 내부에 퍼지도록 집어넣습니다. 인간이 감히 아무리 해도 풀어낼 수 없는 선지자 내부의 모순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스스로 자신을 학대하는 것 자체를 말씀의 내용으로 자리잡습니다. 자기 학대가 해결점이 아니라 자기 학대로서 해결점이 없음을 표현토록 하는 겁니다.
두 개의 예를 들겠습니다. 하나는 열왕기상 13:23-24에 나옵니다. “자기가 데리고 온 선지자가 떡을 먹고 물을 마신 후에 그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니라 이에 그 사람이 가더니 사자가 길에서 저를 만나 죽이매 그 시체가 길에 버린 바 되니 나귀는 그 곁에 섰고 사자도 그 시체 곁에 섰더라”
남쪽 유대 나라에서 말씀을 전했던 선지자가 하나님의 지시대로 곱게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북쪽 선지자가 남쪽 선지자를 속이고 자신도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다고 우기고 남쪽 선지자를 대접하게 됩니다. 곧 이는 말씀 자체가 포함하고 있는 내용이 선지자에게까지 파급된다는 말입니다.
결국 남쪽 선지자는 사자에게 물려 죽게 되는데 이는 남쪽 선지자가 경험한 그 북이스라엘의 악한 환경됨의 결과를 몸소 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말씀은 죽음을 유발하는 결과를 내어놓는 겁니다. 바로 이런 사실을 기존의 세속 왕들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들은 그저 살기 위해서 선지자를 찾을 뿐입니다.
또 다른 예는 열왕기상 20:35-37에 보면, “선지자의 무리 중 한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그 동무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치라 하였더니 그 사람이 치기를 싫어하는지라 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나를 떠나갈 때에 사자가 너를 죽이리라 그 사람이 저의 곁을 떠나가더니 사자가 그를 만나 죽였더라 저가 또 다른 사람을 만나 가로되 너는 나를 치라 하매 그 사람이 저를 치되 상하도록 친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진해서 다른 선지자에게 맞은 선지자도 살고 그리고 그 선지자를 사정 안 봐주고 친 선지자는 삽니다. 하지만 차마 동료 선지자를 때리지 못한 선지자는 사자에게 물려 죽게 됩니다. 이 말은 선지자 말씀 자체가 죽음을 기정사실화하는 것과 관련있습니다. 죽음을 유통시키는 겁니다.
죽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게 자연스럽고 반대로 아직도 숨을 쉬면서 산다는 것을 이상스럽게 여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적어도 왕이나 선지자가 모두 이스라엘 사람들이라면 ‘죽어야 산다’가 아니라 ‘죽이시는 방식으로 살리심’의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 경우의 선지자가 굳이 등장해야 하는 이유는, 이스라엘 왕이 다른 민족과의 관계 화친을 통해서 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아픈 몸에 수건을 감고 왕에게 나와서 하나님을 대신해서 따지게 됩니다. “왜 죽이라는 아람의 벤하닷을 죽이지 않습니까?”가 그 이유가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살리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이용해서 본인이 살고 싶어서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신의 존재는 자신을 꾸미기 위해 화장술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일체 인간이 예상하는 구원을 배제하기 위해서 이처럼 선지자들로 하여금 죽음이 실려있는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그것은 선지자 속에 장차 오실 메시야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변신하려고 해서는 아니됩니다. 말씀은 항상 예수님을 나타내지 결코 우리 자신에 의미를 두시지는 않습니다.
죽음은 평소의 인간으로서 관리가 안됩니다. 그래서 또다시 세상을 원망하게 됩니다. 따라서 선지자라 할지라도 반복해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 어떤 한 순간이라도 너의 목숨은 말씀과 늘 교체할 생각하라”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 기대 걸지 말게 하옵소서. 그래서 선지자 역할을 충실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01강-예레미야 20장 14~18절(죽음 유통)240428-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0장 14~18절입니다. 구약성경 1078페이지입니다.
“시드기야왕이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과 제사장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를 보내어 예레미야에게 말하기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우리를 치니 청컨대 너는 우리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라 여호와께서 혹시 그 모든 기사로 우리를 도와 행하시면 그가 우리를 떠나리라 하던 그 때에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대답하되 너희는 시드기야에게 이같이 말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너희가 성밖에서 바벨론 왕과 또 너희를 에운 갈대아인과 싸우는바 너희 손에 가진 병기를 내가 돌이킬 것이요 그들을 이 성중에 모아 들이리라, 내가 든 손과 강한 팔 곧 노와 분과 대노로 친히 너희를 칠 것이며, 내가 또 이 성에 거주하는 자를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 치리니 그들이 큰 염병에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도움을 청하는데 하나님께서 도리어 “너는 지금 내 편이라고 생각하느냐? 네 편 아니야. 너를 치는 바벨론 편에 내가 서 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할 때 애굽 나라에 재앙이 임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때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한 적이 없습니다. 이게 중요한 점이에요. 우리가 도움 요청하면 도와주지 않아요.
도움 요청하면 반대로 더 쳐버립니다. 왜냐면 인간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도움을 요청한다는 것은 음흉한 속셈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네가 내 덕 보려고 하잖아. 내 덕 봐서 뭐 할 건데? 인간들은 신과 손을 잡아서 신처럼 행세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아는 사람이 됨으로써 자기가 세상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고, 자기가 초월적인 높은 존재인 것처럼 거들먹거리기를 욕망하고 있어요.
‘나는 대단한 존재야’라고 신처럼 되고 싶어서 신을 자기편으로 끌어당기는 겁니다. 보통 도사들이 그런데, 도사들이 수염 기르는 이유를 도대체 모르겠어요. 청와대 왔다갔다하면서 그렇게 하는데, 꼭 수염을 길러야 도사인가요? 교회 나와서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자기의 신분적인 변신을 시도하는 겁니다. 전에는 별 볼 일 없는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써 대단한 존재로 변신을 시도하는데, 그래서 얻고자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자기 내부에 ‘나도 신처럼 산다’라는 자기의식을 확보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도 지키고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기도하고 봉사하고 교회 충성하는데, 그 과정에서, 그 어느 대목에서 내가 자신을 죄인으로서 빼야 할 대목을 찾지 못해요. 왜냐면 자기가 갈수록 중요한 존재가 되니까요. ‘나 아니면 교회가 안 돌아간다’라는 생각, 와~~한두 명이 아니죠. 나 아니면 교회가 안 돌아간다. 진짜 주일날 교회 한번 빠지고 싶은 생각이 막 들죠.
지난 시간도 예레미야에서 했지만, 주님께서 예레미야를 어떻게 사용하는가. 그것은 예레미야가 한 고백이 이겁니다. 나는 아무 쓸모 짝없는 것을 왜 자꾸 주님이 저를 들어 쓰십니까? ‘이런 말 하면 주께서 크게 쓰시겠지’라는 이런 노림수가 있는 것이 아니고요, 솔직히 말해서, 자기에게는 하나님이 찾아온다든지, 가까이 온다는 이 자체가 자기에게는 죽음의 경험이에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그렇게 찾아온 이유는 이것뿐입니다. 매사에 목숨 걸어라. 세상 사람들은 자기에게 목숨 걸고 살았는데, 예레미야 선지자야, 너는 나에게 목숨 걸었어. 좀 힘들지만, 한순간도 나에게 목숨 걸지 않은 순간이 없기를 바란다.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예레미야가 묻죠. ‘왜 제가 그래야 합니까?’라고 자꾸 묻는데, 이에 대한 답변은 이래요. “네 속에 내 아들있거든” 너 말고, 너의 속에 장차 오실 예수님 있다는 겁니다.
이처럼 진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은 항상 빠지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하고 유도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아까 찬송가도 그런 찬송가 불렀는데, 마태복음 7장에서 “좁은 길로 가거라. 영생의 길은 좁은 길에 있고, 넓은 길은 많은 사람이 찾기는 찾지만, 그것은 멸망으로 직행하는 길이다”라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셨을 때, 그 대목을 보는 사람들은 아마 100이면 100명 다 오해하고 봤을 거예요.
뭐냐 하면, 자기 앞에 좁은 길과 넓은 길이 있는데, 너는 어느 쪽 선택할래? 한쪽은 힘든 길이지만 뒤에 영생 있다. 그리고 한쪽은 수월한 길이지만 그 뒤에는 지옥 있다. 어느 쪽 할래? 이런 식으로 묻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렇게 묻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이 뭐냐 하면, 이 말씀은 좁은 길, 넓은 길, 이 말씀은 인간들에게 영생의 길 자체가 없어요.
그냥 인간들의 모든 길은 처음부터 넓은 길이기를 원하지, 좁은 길을 따로 상정하지를 않아요. 좁은 길을 끄집어내는 것은 예수님이 그걸 끄집어냈지, 인간들은 좁은 길이라는 것은 생각도 못 합니다. 사람들이 춘향전도 심청전도 서양의 많은 신화에 보게 되면 많은 영웅이 나오잖아요. 많은 역경을 이긴 사람들이 나오잖아요. 그 사람들이 역경과 고난을 이겨냈고 결국 승리했다고 하는데, 그게 좁은 길이 아니에요.
결국 끝은 이미 기쁨의 길이고 이미 승리의 길이에요. 따라서 그것은 그 자체가 멸망의 길입니다. 그 자체가. 인간의 머리에서 끄집어내는 모든 동화, 백설공주부터 해서 모든 동화가 사실은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올 수 있는 거예요. 백설공주 하니까 생각나는데, 나이 든 사람은 백설공주 이야기 제목을 뭘 로 바꾸냐면 ‘백살(100살)공주’로 바꿔요.
그래서 항상 TV 볼 때, 몸에 좋은 거, 건강을 유지하는 거, 정력 좋은 거, 오줌 누면 변기가 깨지고 하는 그런 거, 이런 모든 게 백살공주와 관련 있습니다. 인간에게 신이라 하는 것은, 사실 자기를 감추는 화장발이에요. 인간은 자기가 신이지 누구를 믿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건 선지자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모든 사람은 지옥 간다’ 그런데 이게 언어상 문제가 있어요. 언어에서 ‘모든’ 그러니까 ‘All’이라고 하면 반드시 예외(exception)를 두게 되어있어요. 그 예외를 없애면서 전부를 표현하게 되면 이렇게 합니다. ‘지옥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이중부정을 하게 되어있어요. 이렇게 예외 자체도 없애버립니다.
모든 인간은 지옥에 들어가지 않을 자, ‘않는다’라는 말, 그리고 ‘없다’라는 말, 이렇게 부정어 2개를 사용하고 있어요. 모든 인간에게는 천국 자체도 환상이 되는 겁니다. 좁은 길은 없습니다. 영생의 길은 없습니다. 없는데 주님이 그것을 만들어 내요. 없는데 그때 창문이 열려서 만들어 내요. 벌써 내 인생 끝났다고 했는데, 끝났을 때, 비로소 내가 스스로 자포자기할 때, 비로소 주께서는 믿음으로 간주하시고, “자포자기했나?” ‘예, 자포자기했습니다’ “충분히 했지?” ‘했습니다’라고 할 때 “자, 이쪽이 영생 길이야”라고 하시면서 이제야 길이 보입니다.
이때 사람들은 ‘주께서는 한쪽 창문을 닫으실 때, 다른 한쪽 창문을 열어두시는구나’라고 이게 ‘사운드오브뮤직(The Sound of Music)’이라는 영화 대사에 나와요. 거기서 나오는 수녀가 합창단 아이들에게 그렇게 말하는데, 그 수녀가 그렇게 이야기할 때, 제가 속으로 웃었어요. 하나님께서 한쪽 창문을 닫으신다는 말은 다른 한쪽 창문을 열 타이밍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게 숨겨주면서 몰래 독일군으로부터 피하는 대목에 나옵니다.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영생의 길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목숨을 걸었는지, 그 여부만 계속 주께서 살피시는 거예요. 만약에 목숨을 걸지 않으면 우리는 내가 구원받을 길을 계속 찾게 됩니다. 이건 스스로 개척하고 어떤 고난받는 영웅적인 삶을 본인이 재현함으로써, 신적인 능력자로 자기를 행세하는 셈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그걸 간증 집회라고 하죠. 굉장히 주의해야 해요.
좁은 길은 우리가 가는 것이 아니고, 좁은 길 자체가 우리에게 마중 나와서, 우리가 좁은 길 영생의 길이 항상 막혀있고 넓은 길만 생각하는 것을 확인시켜 주면서, 나와 말씀을 현장에서 바꿔치기해 주는 겁니다. ‘내가 말씀을 지킨다’에서 ‘말씀이 나를 갖고 노신다’로 바꿔치기해 주는 거예요. 요거 5분 정도 갑니다. 바꿔치기 했으니까, ‘나 이제 구원받았다’라고 하는데, 새로운 상황 오게 되면, 그 상황에서 또 다른 새로운 내가 예상 못한 새로운 말씀으로 또 바꿔치기를 해줘요.
이게 예를 들어야 설명이 가능한 데, 선지자에 관해서, 오늘 본문도 선지자에 관한 이야기인데, 예레미야 본문 내용은 부 제사장이 와서, 이 사람이 질이 안 좋은 사람인데, 이 사람이 와서 자기 왕인 시드기야 왕이 시켜서 왔다고 하면서 현재 우리가 바벨론에 포로 잡혀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에게 응답 구해서 도움을 요청할 수 없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이야기한 거예요.
지금 이런 이야기한다는 것도 지금 시드기야가 많이 마음을 낮춘 거예요. 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어요. 왜냐 하면 시드기야 이 사람은 믿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애굽 나라를 믿어요. 전통적으로 강대국인 애굽나라를 믿었기 때문에, 신생 국가가 잘하기는 뭘 얼마나 잘하겠어요. 전통적으로 40년 동안 올림픽 대표팀을 안 나간 적이 없는 한국팀이 어떻게 인도네시아를 이기겠어요. 제가 요즘 신났습니다.
어떻게 신생 국가가, 어떻게 가난한 나라 축구팀이 이기겠느냐. 이런 식으로 까불다가 실제로는 지고 난 뒤에, 한국축구의 미래는 누구에게 맡겨야 하느냐고 선지자에게 찾아온 거예요. 예레미야에게 찾아온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왕이, 평소에 세속적이 왕이 뭘 하는지, 뭘 생각하는지를 여러분들이 생각을 해봐야 해요.
지금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장기 집권을 노리고 있습니다. 지금 신태영에게 몇십억 줘도 괜찮아요. 지금 국민을 축구가 하나로 다 모았기 때문에. 도대체 왕이 생각한 것이 뭐냐. 그걸 알려면 조선 시대 때 과거(科擧)시험 문제를 알아야 해요. 조선 시대 때 출제 위원들이 어떤 문제를 냈고 답안은 뭐였던가. 옛날 과거시험에서. 옛날 과거시험에 출제된 문제와 답안지를 공개 해드리겠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임진왜란 전쟁이 끝난 후에, 일본과 화친하는 것이 좋으냐, 징벌하는 것이 좋으냐’는 이것을 주관식으로 답하는 이게 과거시험입니다. 실제적이죠. 또 이런 게 있어요. ‘술 먹지 말라 그렇게 해도 왜 아직까지 술의 폐해를 뿌리뽑지 못한 까닭을 A4용지 2장 내외로 써라’라는 이것이 과거시험입니다. 또 이런 문제가 있어요. ‘앞으로 조선 백성들이 교육받으려면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하는가?’라는 이런 거.
그리고 ‘인재를 등용해서 쓰는 사항과 현재 있는 모든 국가 제도 자체가 혁파되고 난 뒤에 예상할 수 있는 국가 국정운영에 대한 대책은?’ 이런 게 나오거든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거 넓은 길이거든요. 영생과 아무 상관없지요. 지금 시드기야는 나라가 조선 나라가 아닙니다. 이성계가 아니에요. 이스라엘 왕이에요. 이스라엘 왕이라면 적~~어도, 하나님을 기쁘게 할만한 대책이 뭐냐를 A4용지 2장 이내로 쓰라고 이렇게 나와야 해요.
지금 왕의 관심은 장기 집권입니다. 하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큰 교회 당회장 목사가 부 교육자 다섯 명쯤 모아놓고 면접 보거나 시험 칩니다. ‘우리 이 교회가 지금 재개발 지역 한복판에 있는데, 앞으로 우리 교회 목회에 장기적인 미래 설계의 대안을 제시하라’라는 이런 문제를 낼 수 있지요. 팔고 이사 가느냐, 여기서 재개발하고 입주자를 그냥 받아들이는 쪽이 교회 부흥에 도움이 되느냐는 그 문제와 똑같은 문제를 내는 거예요.
그 문제를 왜 냅니까. 목사 자기의 장기 집권이죠. ‘나이 70되면 나가겠지’ 안 나갑니다. 놀면서 월급의 3분의 1을 가져가니, 연금도 이런 대단한 연금이 없지요. 교인들도 그게 정상인 줄 알고 있습니다. 교인들은 교회 다녔으니까 천당 가겠지. 이러고 있어요. 그건 넓은 길이죠. 멸망으로 가는 길입니다.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존재하는 이유는 딱 이겁니다.
간단한 거예요. 딱 들으면 알아요. 주께서 주신 질문은 이겁니다. “네가 죽는 이유는?” 딱 이겁니다. 네가 필히 죽어야 될 이유는. 앞에 있는 과거시험과 다르죠. 목회 대책과 다르죠. 죽는 이유는. 교회 교인들이 필히 죽어야 될 이유는. 이게 주께서 주시는 질문이고 거기에 대한 답변이 있어야 하겠죠. 답변은 성경적으로 답변해야 해요. 열왕기상 13장, 이름 모를 선지자 하나 등장합니다.
같은 열왕기상 20장에 봐도, 거기에도 이름 모를 선지자 하나 등장해요. 이름 모를 선지자입니다. 이 두 선지자의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그 선지자가 말하는 과정 중에서, 다른 같은 선지자가 사자(Lion)에 물려 죽습니다. 사파리에서 차에서 내리기는 왜 내리냐는 거죠. 으르렁거리는 사자에게 물려 죽죠. 둘 다 사자에게 물려 죽는 겁니다.
선지자가 죽어야 비로소 말씀의 의미가 확실해지고 분명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선지자야, 제발 말씀대로 죽어줘. 이거예요. 선지자의 존재 이유가 그렇습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범죄도시3에서 이런 대사가 나오는데 제가 너무 좋아하는 대사예요. 마동석이 가서 깡패를 소탕하는데 ‘야, 너 이름이 뭐야?’ ‘까불인데요’ ‘어디서 까불고 있어’ 그러니까 이름이 까불이라고 패는 거예요.
이걸 목사에게 적용해 보세요. 주님이 마동석이라면 ‘야, 너 뭐 하는 사람이야?’ ‘저 복음 전하는 사람인데요’ ‘어디서 까불고 있어’ 뭐 복음 전하는 게 유세입니까? 뭐 벼슬이에요? 죽음으로써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아들 예수님이 죽음으로써 이야기한 거예요. 왜? 아무도 거기를 안 가니까. 노선이 딱 2개잖아요. 예수님 가신 노선 빼고 나머지 모든 인간의 노선.
살고자 하는 인간 노선과 자진해서 죽는 노선 딱 2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넓은 길 외에는 찾지 않습니다. 아무리 고난이 심하더라도. 열왕기상 13장에 보면 여기 선지자 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분명히 하나님께서 당부했어요. “네가 내 말을 잘 전해라” 그러니까 선지자가 오해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잘 전하면 그것으로 오케이고, 내 할 일 다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교묘하게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네가 말씀을 전하면서 절대로 네가 왔던 길로 돌아가지도 말고, 그쪽에서 어떤 대접을 받더라도 일체 그 대접을 거절하고, 말씀만 전하고 빨리 튀어라. 그러면 넌 살 것이다”라고 되어있어요. 제가 웃음이 나오는 것은 사자에게 물려 죽은 이 선지자가 그렇게 했어요. 시킨 대로 했다고요.
다 했고, 이제 거의 다 살았어요. 말씀 전하고, 말씀은 주님의 죽음과 병행하기 때문에 전한 자도 함께 자칫하면 죽습니다. 말씀 빨리 전하고, 뭐 대접해 준다는 소리 다 거절하고 빠져나오는데, 다른 선지자가 ‘잠깐 스톱~~’한 거예요. ‘당신 뭔데?’라고 하니까 ‘우리는 같은 선지자야’라고 한 거예요. 우리 같은 업종이라는 뜻이죠. 당신만 계시받았어? 나도 계시받았어.
내가 받은 계시가 뭔지 알아? 당신같은 훌륭한 선지자 대접하라는 계시를 받았어. 당신은 당신 식으로 말씀에 충실하고, 나는 내가 받은 계시대로 말씀에 충실하기 때문에, 나는 당신에게 대접하고 싶어. 그러니까 여기서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뭘 주냐 하면, 모순점을 제시하는 거예요. 그 모순점을 이길 재간이 있는 인간은 선지자가 아니라 우 선지자도 없습니다. 갑자기 ‘우’ 씨가 욕먹게 되었지만.
어떤 인간도 주께서 제시한 덫에서 빠져나올 위인은 없습니다. 같은 업에 선지자라 하니까, 그리고 그 사람도 하나님의 계시대로 한다고 하니까, 그 사람의 성의를 무시할 수 있겠어요? 그 사람이 내민 달걀, 부활절 달걀, 그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안 먹을 수가 없는 거예요. 먹었더니만, 길에서 준비된 사자(Lion)가 그 선지자를 물어 죽였습니다.
여기서 내리는 진리가 무엇이냐. 북쪽을 거쳐왔다는 단지 그 이유만으로, 너는 북쪽의 영적 상태, 언약적인 그 신앙 상태가 선지자를 잡아먹는 신앙 상태인 것을 너의 목숨 바쳐서 보여줘야 해. 그 진짜 선지자를 꼬셨던 가짜 선지자가 북쪽 선지자입니다. 선지자가 그만큼 썩었다는 말이죠. 인간이 어떻게 환경을 이깁니까. 못 이기죠.
그러면 열왕기상 20장 35~37절에 나오는 이 선지자는 또 어떤 선지자냐 하면, 역시 이름없는 선지자 한 사람이 무리 중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왕에게 나오기 전에, 이번에는 같은 선지자에게 이야기합니다. “나를 때려라. 나를 패라. 죽지 않을 만큼 나를 패랄”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러니까 동료 선지자가 ‘당신같이 훌륭한 주의 종을 내가 어떻게 때립니까’라고 하니까 거기 35절에 보면
“선지자의 무리중 한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그 동무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치라 하였더니 그 사람이 치기를 싫어하는지라” 싫어하니까 그다음에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36절에 “네가 나를 떠나갈 때에 사자가 너를 죽이리라 그 사람이 저의 곁을 떠나가더니 사자가 그를 만나 죽였더라” 나를 때리든지 네가 사자에게 물려 죽든지 둘 중 하나예요. 무슨 이런 선택지가 있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죽고 난 뒤에 또 다른 사람을 만나서 “나를 치라”라고 하니까, 그 사람이 말씀 전해야 할 책임이 있는 선지자를 쳤어요. 치는 척한 것이 아니고 진짜 쳤어요. 상하도록 쳤어요. 전치 한 달쯤 나온 거 같아요. 이건 잘 모르겠고 하여튼 쳤는데 눈탱이가 밤탱이 되어서 아파서 수건으로 가린 겁니다. 그리고 상처가 있는 채로 말씀을 전합니다. 아까 친 사람은 사자에게 안 물려 죽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왕에게 이야기합니다. 벤하닷이라는 아람 왕이 있는데 지금의 시리아죠. 그 벤하닷이라는 왕을 하나님이 죽이라고 했는데, 그 사람이 빌빌거리면서 항복했다고 해서 같이 화친하고, 같이 외교관계를 맺고, 같이 약조하고 그를 놔줘 버렸어요. 저 정도 하면 정신 차리겠다 싶어서 놔줬어요. 그 뒤에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진짜 얻어맞은 선지자가 “임금님 제가 누구 종을 하나 잘 지키라고 종에게 당부하고 저는 전쟁에 나갔는데, 그 종이 사람을 지키지 않고 그 사람 잃어버렸다고 그러는데, 그러면 내가 그 종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라고 하니까, 왕이 듣고 있다가 “그건 네 이야기지. 왜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를 끄집어내느냐?”라고 하니까, 그 선지자 하는 말이 “이거 당신 이야기야. 당신은 종이야. 종이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 죽이라고 한 명령을 어기고 종 주제에 안 지키고 풀어줬으니까 이제 당신이 죽을 차례야”
그러니까 결국 하나님 말씀이 뭐냐 하면 죽음을 이러저리 이동시키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이리 가서 이렇게 전하고, 저리 가서 저렇게 전하고, 십자가 죽음을 유통하고 소통하는 그 범위, 그것이 말씀 속 세계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선지자가 성도예요. 사자에게 진작에 물려 죽어야 하는데 안 죽고 버티고 있는 이유가 있어요. 왜냐 하면 네 죽음 대신 죽었던 예수님의 죽음을 네 죽음이라 생각하고 유통하라는 말입니다.
유통하면서 본인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 늘 얻어맞아야 하죠. 늘 얻어터져야죠. 세상에 나가서 성도가 세상과 통용될 수 없는 의미를 제시합니다. 아까 축구 이야기도 그렇고, 뭐 몇십억 주고 류현진 데려갔는데, 1승 3패, 이건 뭐 KBS 기계가 잘못되었다고 하는데. 그러니까 야구에 인생의 보람을 걸고, 축구에 인생의 보람을 걸었던 사람들은 사는 게 재미가 없어요.
국민의 힘에 재미를 느끼던 사람들도 요새는 하나도 재미가 없어요. 왜 나에게 사는 재미를 제공 안 해주는 거야. 그것은 아직까지 사자에게 안 물려서 그래요. 말씀에게 물리지 않아서 그래요. 십자가의 이빨에 물리지 않아서 ‘남은 인생은 내 행복을 위해서 살리라’라는 거예요. 백살공주같은 그런 의식.
진짜 선지자의 핵심은 주님으로 하여금,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반복시킴으로써 비로소 현장에 지금 죽어도 괜찮을, 이게 바로 영생의 길이야. 십자가 안에 내가(주님) 다 이루었다는 겁니다. 이걸 날마다 되새길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일이 덫이고, 인간의 행함으로 실천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케 하옵소서. 지켜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착해서 천당 가는 것도 아니고, 우리 모순을 통해서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기쁨으로 수긍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