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
2024년 4월 21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0:14-18
(20:14)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미가 나를 생산하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20:15) 나의 아비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기를 네가 생남하였다 하여 아비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를 받았더면,
(20:16) 그 사람은 여호와께서 훼파하시고 후회치 아니하신 성읍 같이 되었더면, 그로 아침에는 부르짖는 소리, 낮에는 떠드는 소리를 듣게 하였더면,
(20:17) 이는 그가 나를 태에서 죽이지 아니하셨으며 나의 어미로 내 무덤이 되게 하지 아니하셨으며 그 배로 항상 부르게 하지 아니하신 연고로다
(20:18)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수욕으로 보내는고
‘저주를 위해 태어난 선지자’, 이것이 예레미야뿐만 아니라 모든 선지자의 공통점임니다. 노아도 그러하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도 그러합니다. 이렇게 되어야 하는 이유는, 언약에서 필연적으로 저주도 같이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저주의 본격화, 저주의 현실자. 하지만 저주의 한복판에 서 있는 예레미야 입장에서는 죽을 맛입니다.
예레미야 1:3-5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누구로부터 난데없이 욕을 얻어먹을 때, 기분이 되게 상합니다. 그런데 이것 자체가 역시 자기 위주의 세계관이 빠져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거기서 빠져나와야 하는 게 맞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예레미야에 이 저주의 분위기에 벗어나지 못하고 자기 좌절에 빠져 있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이 땅에 태어났을 때, 왜 주위 사람들이 나의 특수한 사정도 알지 못하고 복받으라는 식으로 함부로 이야기했느냐 하면서 선지자는 자기 저주받듯이 그들도 저주받아야 한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여기서 구약 인물의 한계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저주마저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신약의 성도입니다.
신약에 나타나는 세계관은 참 ‘이상한 나라’입니다. 어떤 점에서 이상하느냐 하며는 자기를 위한 체계가 맞춰지는 것이 아니라 그 덮쳐진 체계를 위하여 본인이 자기 뜻과 상관없이 맞쳐나가야 하는 그런 세계입니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라는 동화처럼, 엘리스는 버섯을 먹고서 자기 마음과 상관없이 몸집이 커지거나 작아집니다.
이 세상에 그 누가 저주를 반기고 좋아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가능하게끔 되는 세계가 바로 ‘예수 안’의 세계입니다. 이는 곧 인간들의 모든 능력을 능가하는 힘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다는 것은 저주에도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복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복이란 기꺼이 저주 속에 들어갈 때나 비로소 보이는 겁니다. 이유없이 난데없이 복음으로 미움을 받을 때, 도리어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성령이 임한 증거입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1-12)
저주가 옴을 차라리 제대로 복음 속까지 들어온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이는 복과 저주의 세계가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원래 인간에게 있어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저주로 주어집니다. “너희가 가까이 나아와서 산 아래 서니 그 산에 불이 붙어 화염이 충천하고 유암과 구름과 흑암이 덮였는데 여호와께서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되 음성뿐이므로 너희가 그 말소리만 듣고 형상은 보지 못하였느니라”(신 4:11-12)
즉 율법은 일종의 화염방사기 같은 겁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한다면 곧장 저주가 임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이 율법을 반기고 영광스러워해야 하는 이유는 그 저주 안에서 비로 복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저주받은 것이야 말로’ 최고의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에 와서 이 이상한 상황이 본격화됩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는, 사람들의 목숨을 수거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저주받을 목숨, 이 복음 안으로, 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오라는 겁니다. 거기에 예수님의 저주를 만나라는 겁니다. 그러면 복을 받게 된다는 원리입니다. 이와 같은 원칙이 이미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도 소개되어 있습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일방적으로 씨를 뿌리는데 그 밭은 뿌리는 분 마음대로이지 결코 밭이 선택하거나 결정할 사항이 아닌 겁니다. 어떤 이는 길 가에 떨어지고, 어떤 이는 돌짝밭에 뿌려지고, 어떤 이는 가시덤불에 떨어지고, 어떤 이는 옥토에 떨어집니다. 제자들마저 이 말씀을 오해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의 저주와 상관없이 이 말씀을 취사선택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겁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이 주는 복은 필히 십자가 안에 들어왔을 때나 비로소 이해되는 겁니다. 즉 ‘너희 인간들아. 너희들은 저주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겁니다. 바로 이 선언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비로소 복된 자들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노력해도 악마가 말씀을 뺏아가는 것을 방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환란을 이길 수 없고, 아무리 노력해서 세상 부러운 것을 부럽지 않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열매 맺는 것은 저주받은 인간의 시도도 성립될 수가 없는 겁니다. 마가복음 16:15-16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즉 평생토록 인간이 그 어떤 노력을 한다할지라도 그것으로 자신의 운명이 결정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을 받되 자신이 십자가 그 저주에 합류되는 것을 기뻐하는 자에게 해당될 일입니다.
이 말씀은 이렇게 정리될 수 있습니다.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9:32-33) 즉 ‘걸림돌이 없는 십자가는 십자가가 아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복음을 믿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그 사람 속에 들어와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즐겁게 저주를 즐기는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도리어 복을 받는 것을 의아해 할 겁니다. 세상은 온통 저주 안 받고 복받은 것을 목표로 움직이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상하지 않는 세상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반면에 성도만이 기꺼이 십자가라는 저주를 유발하는 그것을 붙들고 오직 그 저주받은 흔적인 십자가와 더불어 죽고 더불어 살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선지자의 완성형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주를 사랑하게 된 게 결코 우리 자신의 능력을 아님을 만방에 자랑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00강-예레미야 20장 14~18절(이상한 나라)240421-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0장 14~18절입니다. 구약성경 1078페이지입니다.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미가 나를 생산하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나의 아비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기를 네가 생남하였다 하여 아비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를 받았더면, 그 사람은 여호와께서 훼파하시고 후회치 아니하신 성읍 같이 되었더면, 그로 아침에는 부르짖는 소리, 낮에는 떠드는 소리를 듣게 하였더면, 이는 그가 나를 태에서 죽이지 아니하셨으며 나의 어미로 내 무덤이 되게 하지 아니하셨으며 그 배로 항상 부르게 하지 아니하신 연고로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수욕으로 보내는고”
내가 부모의 태에서 태어날 때, 왜 저 아기는 저주받으라고 주변에서 이야기를 안 해줬느냐고 주변 사람에게 탓을 돌리는 대목입니다. 진작 내가 저주받았더라면 일찍 죽었을 건데 왜 생일날 괜히 축하를 해주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고생은 직사하게 나만 고생했으니까,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내가 여기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 저주를 좀 해달라는 겁니다.
나에게 저주를 좀 하라는 겁니다. ‘생일 축하합니다~’라는 이거 하지 말아 달라는 겁니다. 오히려 생일 때마다 통곡하면서 ‘인간아~왜 태어났냐~왜 태어났어~’라고 탄식하는 것이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담긴 의미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레미야 1장 4~6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라고 되어있어요.
예레미야 선지자가 태어날 때, 선지자의 운명은 이스라엘의 멸망하는 운명이 거기에 함축되어서 예레미야의 출생과 더불어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겁니다. 예레미야가 이스라엘 백성 중에 한 사람이 아니고, 이스라엘 역사를 주도하고 앞으로 이끌 수 있는, 그것도 저주스럽게 이끌 수 있는, 저주스러운 존재의 탄생이 바로 예레미야 선지자라는 겁니다.
내가 태어났음에 이스라엘은 드디어 끝장난 시대가 되었다는 겁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하게 되면, 예레미야를 그냥 사적으로, 보통 인간 중에 한 사람으로 그렇게 볼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주님의 숨어있던 저주가 예레미야라는 한 인물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예레미야를 품어준 역사가 예레미야와 더불어 함께 저주로 끝장나버리는 역사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예레미야는 저주를 위해서 태어났는데, 그게 바로 예레미야가 언약에 의해서 태어난 이유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이 땅에 저주를 발현시키고, 저주를 본격화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죠. 신명기 4장 1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 불 가운데서 그 음성을 듣게 하셨다고 나옵니다, 불 속에서 율법을 주신 거예요.
신명기 5장 5절에도 “그때에 너희가 불을 두려워하여 산에 오르지 못하므로”라고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율법 자체를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화염방사기. 그러니까 율법을 주셨다는 것은, “이제 서서히 불 질러 볼까? 다 태워볼까?”라고 주신 것이 율법입니다. 인간이 불을 만지면 타죠. 인간이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자기 손이 타버려요.
너무나 무서운데, 그것을 지켜내지 못해서 그 무서움의 결과는 자기가 옴팍 뒤집어쓰는 거, 그게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의미이고, 취지이고, 그 율법의 시대에 속한 사람들의 운명이기도 한 겁니다. 그러니까 이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평소에 태만하게,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이, 직접 성경을 본다든지, 예레미야의 출생에 관해서 보게 되면 어떤 생각이 드냐면, 굉장히 낯설어요.
이상하기도 하고 나와는 어울리지 않고, 나는 영~구미에 당기지 않고, 성경을 안 보고 싶고, 성경이 무슨 내 인생의 미래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이 들지요. 내가 만약 예레미야같이 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죠. 예레미야가 자기 태어난 것을 오늘 본문에서 저주했잖아요. 이걸 보면서 ‘싫어. 나는 예레미야처럼 되기 싫어’라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어쩔 수 없이 그 사람은 예레미야와 바이바이(Bye~Bye)를 할 수밖에 없고, 이는 하나님의 언약과도 바이바이가 되는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저주 가운데 태어나게 하는가. 그것은 저주 안에 들어가야 복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걸 쉽게 이야기하면 인간의 모든 행위는 죄가 되고, 그 죄를 죄 되게 하기 위해서 저주가 주어지는데, 그 저주 안에 들어갈 때 인간의 모든 행위를 죄로 규정하는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의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백성과 선지자의 만남은 죄인과 율법의 만남이에요. 죄인과 화염방사기와의 만남이에요. 그렇게 해서 누가 희생되는가. 백성이 희생되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가 희생됩니다. 바로 그 희생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방정식이 그렇게 나옵니다. 죄와 의가 만나서 죄가 이기고, 의는 형편없이 되고, 그런데 형편없이 된 그 희생이 바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로서 주어지게 됩니다.
어떻습니까? 이 과정. 머리로는 이해가 되죠? 머리로는 수긍이 되죠. 이것은 인간이 중립지대에 설 수 없다는 겁니다. 나는 나쁜 짓 안 하고 착한 거 해야지. 나는 하나님의 말씀 들어야지. 이렇게 중립지역을 하나님께서는 어떤 경우라도 우리에게 허락한 적이 없고, 이미 확정했어요. “너는 저주받아라. 오케이? 오케이. 그러면 너에게는 하나님의 희생을 눈에 보이게 해줄게”라고 되는 거예요.
‘나는 저주를 안 받을래’라고 되면, 하나님의 희생과 점점 더 멀어지게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의 편지가 신약에 굉장히 많이 있거든요. 사도바울의 편지를 보면서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봐야 하느냐면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옆에 소쿠리 하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지금은 철이 지났는지 모르겠는데, 시골에 보면 쑥을 캐는 할머니들을 본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제가 아직도 의문점이 풀리지 않는 것이, 쑥 캐는 할머니는 있는데, 쑥 캐는 할아버지는 안 보이는지. 아직도 그게 고민이 됩니다. 왜 쑥 캐는 할아버지는 단 한 명도 없는가. 그래서 제가 제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남자들은 허풍이 많아서 허세를 떤다고 그러는 거죠. ‘그거 돈 몇 푼이나 되나?’라고 안 하고, 가정 살림은 여성이 전문가이기 때문에, 이거 쑥 뜯어서 된장 풀어 먹으면 얼마나 맛있다는 것을 알죠. 속도 풀리고.
이것이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차이점이죠. 남자가 살림 백날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치아라. 내가 다 할게’라고 하죠. 그런데 사도바울이 쑥 담는 바구니를 옆에 들고 있다고 생각하고, 사도바울이 뭘 여기에 집어넣느냐 하면, 사람의 목숨을 수거해서 집어넣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마다. 하나님의 백성 같으면 일단 목을 따요. 목을 따서 바구니에 담으면 그 바구니 이름이 ‘예수 안’이에요.
목을 딴다고 해서 그걸 섭섭하게 여기지 말라는 거예요. 왜? 그냥 살아도 죽고, 죽어도 죽는 걸 가지고, 그 죽을 목숨을 죽을 목숨이라고 따주는 게 어디냐는 겁니다. 따줄 때, 복음으로 목숨을 따주잖아요. 얼마나 고맙냐는 말이죠.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뭐냐.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자세는 너희들이 되지도 않는 그 죽어가는 목숨을 다른 데 쓰지 말고, 이 복음에 그냥 바치라는 겁니다.
복음에 다 바쳐라. 내 목숨을 바칠 곳을 찾으면 너는 인생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는 거다. 너는 다 된 거야. 그야말로 구원에 성공한 거야. 단, 하나님이 주는 이 복음에 집어넣는 거야. 이게 바로 신약성경에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예레미야는 구약이에요. 구약이니까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죽는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아직도 구약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으니까 버티는 겁니다.
여기 14절에 보면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미가 나를 생산하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이런 식으로 해서 18절까지 ‘나에게 잘 태어났다고 하는 사람은 제발 저주를 받아라’라는 식으로 욕을 하면서, 당신의 그 축복 때문에 나는 죽을 고생을 하고 있다고 하죠. 18절에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수욕(수난)으로 보내는고” 치욕스럽게 보내고 있다고 이렇게 원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레미야는 언약의 사태에 속해 있으면서 해결점은 전혀 없어요. 역시 구약의 한계이죠. 우리가 신약 성도지만 구약 예레미야의 입장에 있다고 하면 정말 절망적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고, 하나님께서 힘들게 했기 때문에, 힘든 것은 힘든 건데, 아무리 신앙이고 복음이지만, 힘든 것은 힘든 거고, 아픈 것은 아픈 거예요.
어떤 해결점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신약에서 어떤 식으로 해결점이 준비되어 있는가. 오늘 설교에서 이것마저 마저 들어야 합니다. 해결점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영국 작가(루이스 캐럴(Lewis Carroll))가 지은 어른을 위한 동화가 있어요. 그 동화에 보면 앨리스가 언니와 같이 점심 먹고 있는데, 보니까 토끼 한 마리가 지나가거든요.
보니까 어디 굴에 들어가요. 자기도 장난꾸러기라 장난삼아 토끼가 들어가는 굴에 자기도 따라 들어가 봤어요. 호기심이 넘치니까. 따라 들어가 보니까 그 굴 안에 새로운 구조의 세계가 등장하는 겁니다. 그 세계의 특징은 나를 나라고 가만히 두지 않고 늘였다가 줄였다가, 줄였다가 늘렸다가 해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책의 전체 내용에서 계속 일어나는 것이 뭐냐 하면 몸체가 작아졌다가 커졌다가 하는 거예요.
물론 여러 가지 다른 일들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버섯을 먹었는데 갑자기 목이 길어졌다가, 다시 또 버섯을 먹었는데 목이 작아졌다가, 물 한 컵 마시니까 몸이 커졌다가, 또 뭘 하니까 작아졌다가. 그러니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야기의 특징은 뭐 위주냐 하면 그 세계의 체계 위주이지, 그 안에 들어가 있는 인간은 내 몸이라고 붙들 수 없는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겁니다.
내 것이라고 붙들고 있으면 안 되는 상황, 그게 바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예요. 나중에 그 이야기 다 끝나고 보니까 결국 꿈이에요. 꿈속의 이야기인 거죠. 이게 과연 꿈이겠느냐. 신약에 오게 되면 방금 이야기한 인간 개인보다 체계가 우선이라는 것이 신약에서는 현실로 주어집니다. 우리가 신약의 현실을 모르기 때문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경험을 안 했기 때문에, 계속 신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셔도 우리는 계속 일관되게 버텨나가요. 끊임없이.
하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 예를 들어보면 사도바울이 쑥 캐는 처녀처럼, 쑥 캐는 할머니처럼, ‘그냥 목숨 갖다가 넣으세요’라고 하는 게 얼마나 기쁜 소식인 줄을 여러분들이 아셔야 해요. 마가복음 16장 15절~16절에 보면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라고 되어있어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나쁜 짓 거의 안 하고, 조금은 했겠지만, 컨닝은 한 열댓 번 했겠지만, 그런 나쁜 짓 거의 안 하고, 부부싸움도 한 달에 두세 번 정도 했지 거의 안 하고, 거의 안 하고 바르게 살았단 말이죠. 그런데 마가복음 16장에 의하면, 그런 식으로 구원을 얻는 게 아니고, 복음을 믿는 사람만 구원을 얻어요. 여러분은 이제 하도 많이 들어서 신기하지도 않은 겁니까.
이게 뭐냐 하면 네 체형을 포기하고, 네 인생을 포기하고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그러니까 단순히 복음을 아는 것이 아니고 복음이 너의 운명과 너의 체형을 줄였다가 늘였다가 하더라도, 너는 그것을 오히려 감사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믿는다는 말이 무슨 지식이 아니고, 그 복음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거예요. 이상한 나라예요.
버섯을 먹으면 목이 길어지고 줄어들고 하는 것처럼, 복음이 들어오면 더 이상 내가 나의 행동을 어떻게 단도리하고, 어떻게 한다는 게 전혀 생각이 안나요. 아무 상관이 없으니까. 나의 행동한 것이 나의 확정된 운명과 아무 상관이 없으니까요. 손님에게 쌀을 더 팔고 안 팔고 이런 거 아무 상관이 없어요. 쌀값이 오르고 내리고 이게 아무 상관이 없어요.
내 인생은 내가 지키는 것이 아니에요. 이건. 복음이 들어오면 그래요. ‘아이고, 나 안 해. 나 짜증 나.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할 거야’ 이러면 저주를 받는다니까요. 이건 우리가 판단하고 선택하라는 문제가 아니고, 그냥 덮친 거예요. 이 사실이. 이상한 나라가 앨리스같은 우리에게 그냥 덮친 거예요. 이게 사람들에게 안 믿어지는 거예요. 이게. 이게 안 믿어지면 또 다른데 한 곳 더 봐야죠.
마태복음 13장에 씨뿌리는 비유. 이것도 이상한 나라예요. 씨를 뿌리는 사람이 그냥 씨를 뿌려요. 그냥 씨를 뿌린다고요. 주님이 복음의 말씀을 뿌린다고요. 뿌리는데, 어떤 사람은 악한 자가 와서 그 뿌린 말씀을 빼앗아 가버려요. 안 뺏길 도리가 없어요. 내가 여기 있어서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가 새롭게 등장한 이상한 나라가 덮쳐버리면, 내가 복음을 믿어야지, 안 믿어야지 하는 이것도 내 맘대로 안 돼요. 왜냐 하면 마귀가 나보다 더 세니까.
또 어떤 사람은 말씀이 들어왔는데, 돌밭에 뿌려질 때 기뻤어요. ‘야, 이런 말씀도 있구나’라고 했는데, 어떤 환란이 왔을 때나 핍박이 왔을 때, 자빠지고 넘어지고 해서 열매가 없어요. 마태복음 13장 21절에 보면. 또 어떤 사람은 이걸 보고 ‘내가 환란을 이겨야지’라고 하는데 그게 소용이 없다니까요. 어떤 사람은 말씀을 들을 때 기뻤는데, 갑자기 세상의 복이 넘치게 들어오는 거예요.
갑자기 재벌 집 자녀가 되어서 빨간 지붕 있는 벤츠 타고 돌아다니고, 용두리 촌에도 돌아다니고, 온 집안 다 먹여 살리고. 여러분은 드라마를 거의 한 번도 안 보니까 무슨 말인지 모를 거예요. 재벌 집에 비자금 있고 뭐 이런 거요. 그 이야기 할 때, 그 이야기가 뭐냐 하면, ‘부럽지? 부럽지? 부럽지?’라고 부추기며 자꾸 우리에게 그런 이야기하는 거예요. 드라마가 우리에게 ‘너도 저렇게 되고 싶지?’라고 그렇게 이야기해요.
가난한 집 아가씨로 태어났는데, 우연히 대기업 인턴으로 입사해서 재벌 집의 키 크고 잘생긴 남자와 커피 한 반 부딪혔을 뿐인데, 나중에 드라마 끝날 때는 재벌 집의 며느리 되어있을 때, 그게 바로 ‘부럽지? 부럽지? 너도 그렇게 되고 싶지? 그게 네 꿈이지? 평소에 잠재된 너의 꿈이잖아’라는 식으로 자꾸 재촉하는 거예요. 재촉하니까 그게 뭐냐 하면 자꾸 유혹받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나도 저렇게 드라마처럼 되고 싶다는 유혹을 받으니까, 복음 자체에서 오는 열매는 없고, 기존의 세상 열매만 허겁지겁 따라가다가 지옥을 간다는 겁니다. 그다음은 뭐냐. 결국 돌밭에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가시덤불처럼 세상에 유혹이 많은 것도 아니고, 그냥 옥토에 떨어졌는데 저절로 30배, 60배, 100배 열매를 맺었는데, 그들이 천국을 간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듣고 어느 쪽에 속하고 싶습니까? 네 번째 밭에 속하고 싶죠? 땡 탈락입니다. 이 말씀을 누가 들었느냐. 예수님의 제자들이 들었어요. 들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그들이 한 가지 놓친 것이 있어요. 씨뿌리는 비유가 어디서 완성되는가. 로마서 9장 33절에 나옵니다.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게 뭐냐.
걸림돌 없는 십자가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걸림돌 없는 예수님은 가짜 예수님입니다. 저주를 받을 때 비로소 그 안에 복이 있는 거에요. 그러면 누가 저주받는가. 우리는 저주받기 싫어요. 나는 아프기 싫어요. 예레미야도 똑같아요. 그런데 저주받은 분이 누구냐.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 안에, 그 바구니에 우리가 쑥 들어가면 그때 예수님의 저주를 만나요. 우리 대신 다 해결하신 저주.
내가 저주받는다고 사라지는 죄가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고생해도 우리 죄는 없어지지 않아요. 그러나 예수님이 받으신 그 십자가 안에서 우리의 모든 어떤 것도 죄사함이 되는 겁니다. 그 예수님의 저주를 나의 행복보다 더 귀하게 여길 때 우리는 아낌없이 예수안으로 목 딸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 그제야 씨뿌리는 비유, 거저 주시는 거, 30배, 60배, 100배가 전부다 예수님 솜씨지 내 솜씨가 아닌 것을, 예수님의 저주도 경험하고, 예수님의 복도 같이 경험해서 우리가 이 시대에 살아있는 하나님 언약의 사람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은 우리 몸 다치는 것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예수님은 한편으로 좋아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는 내 몸 하나 건사하는 것이 무서워서 늘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요.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빈말로 듣지 말고, 주님의 저주 안에서 비로소 우리가 생소해하던, 몰랐던 주님의 생명과 영생을 거저 누리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