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말씀의 부직포

아빠와 함께 2024. 4. 14. 17:18

말씀의 부직포 

2024년 4월 14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0:7-10

(20:7)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20:8) 대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20: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20:10)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의 두려움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나의 친한 벗도 다 나의 타락하기를 기다리며 피차 이르기를 그가 혹시 유혹을 받으리니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선지자는 결코 사람들로부터 대우받기 위해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하지만 기대치 보다 더 심한 비난을 받게 되면 흔들리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게 마련입니다. 선지자 자체 내에서 모든 것을 정리가 안 되기 때문이다. 최종 정리는 선지자 시절인 구약이 아니라 신약에 와서 해결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에게 불평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전제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말씀대로 전하고 거기에 대한 우호적인 호응과 반응도 합당하게 받게 되기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이러한 소박한 기대마저 허락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개인적으로 사용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구조에 수립하고 형성하는 용도로 선지자를 이용하십니다. 그 구조란 바로 예수님을 중심을 두고 인간들을 주변에 배정하고 배치해 놓은 관계입니다. 즉 모든 가치와 의미가 주변에 있는 인간에게 쏠려들어가지 않고 중심되는 예수님에게 쏠리는 구조입니다.

선지자의 고통보다 그 근본적으로 고려할 사항은 중심에 계시는 하나님의 고통입니다. 이점을 해소책으로 신약에 돌입해서 등장한 선지자라고 할 수 있는 세례요한의 경우를 봅시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29-30)

즉 여기서 세례 요한은 ‘기쁨’을 언급하고 고백합니다. 세례 요한에게 비난과 고통이 안 와서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요한은 구조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신랑 곁에선 신랑의 친구’라는 표현이 그러합니다. 그렇다면 선지자 고통의 원천은 선지자에게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고통이라는 뜻입니다.

선지자는 자기 고통에서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고통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선지자는 양쪽 다 달라붙은 부직포와 같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에게도 붙어있게 되고 자신을 비난하는 백성들에게는 달라붙어 있습니다. 백성들이 선지자를 욕하는 이유는, 선지자의 말 안에 인간들의 암담한 미래와 좌절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선지자가 자신들에게 희망을 말해주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종말’이란 ‘모든 것이 이미 다 주어진 것’을 뜻하고 역사란 ‘아직 모든 것이 주어지지 않았다’를 뜻합니다. 백성들은 그들이 기대하는 대로 세상 일이 진척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백성들은 자기 부정이 나타나지 않게 됩니다.

선지자 예레미야 예언 속에는, 이스라엘은 ‘필히 망해야 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신약적으로 표현하면 이러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되든 나를 불신자로 만들 때, 비로소 ‘구원의 기준’이 새롭게 나타난다는 겁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내가 마치 신자처럼 느껴질 때, ‘구원의 기준’은 나로 인해 가리워지게 되는 겁니다.

이처럼 ‘나’에 대한 관심사가 하나님께서 벌리시는 구원에 방해가 됩니다. 누가복음 12:16-21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16-21)

이 대목을 보면서 우리는 왜 예레미야 시대의 유다사회가 예레미야에게 화를 내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그들이 듣기에 예레미야 예언 속에서는 ‘하나님의 희생’에 대한 내용이 섞여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단코 실패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일반인들의 신앙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고 자신들은 그 완전한 하나님을 받아들임으로서 구원에 이른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씀 속에서 장차 메시야가 당할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마치 사람들 보기에 ‘실패한 사명자로서의 메시야’로 이해될 것입니다. 정작 신앙에 실패해야 될 자는 백성들 자기 자신이라는 점을 이스라엘은 안 받아들이고 싶은 겁니다. 예례미야는 ‘다 이루심’과 또 다른 한편, ‘아직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음’ 양쪽을 다 결치고 있는 겁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 농부’이야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부자되었다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자신이 자기 영혼하고 의논하고 해결하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오로지 자체적인 문제로 끌어오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모든 일은 구조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중심이 되는 인간은 그 구조로부터 위치를 배정받는 처지에 놓여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구조의 중심은 누가 차지할까요? 시편 91:11-15에 보면,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개인이 이익을 보려고 해서는 아니됩니다. 그 이유는, 이미 악마가 광야에서 예수님에게 이 말씀을 적용시켜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빼고서 나머지 그 어떤 인간도 이 말씀의 성취자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높아지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들이 제일 기피하고 싫어하는 가장 낮은 자리인 십자가까지 내려 가셔야 하는 겁니다.

이럴 경우에만 이 말씀은 성취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모든 말씀은 인간이 다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친히 다 이루신 겁니다. 성도는 바로 이미 다 이루어내심이 이 인간 역사 속에서 얼마나 잘못되게 왜곡시키고 있고 오해하고 있는가를 실감해야 합니다. 비록 타인들의 비난과 곡해가 아프다할지라도 세례요한처럼 신랑 옆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곧 구조상 ‘예수 안’의 삶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요구에 의해서 주님 중심이 훼손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99강-예레미야 20장 7~14절(말씀의 부직포)240414-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0장 7~14절입니다. 구약성경 1078페이지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대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의 두려움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나의 친한 벗도 다 나의 타락하기를 기다리며 피차 이르기를 그가 혹시 유혹을 받으리니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선지자는 사실상 자기 것이 없습니다. 다 주께서 담아 준 말씀이 가득 차 있을 뿐인데, 자기는 우편배달부처럼 하나님의 뜻을 전달했을 뿐인데, 자기 주변의 반응이 선지자로 하여금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게 하고, 더 이상 선지자의 일을 못 하게 만들고, 좌절하도록 하는 그런 환경으로 옥죄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그만하면 안 되겠습니까? 나도 할 만큼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비난받는 것도 한두 번이지 갈수록 더 심하게 욕설이 나오니까, 더 솔직한 심정은 9절에 나옵니다. “나의 중심이 불붙는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그러니까 양쪽에서 다 치는 거예요. 하나님 쪽에서는 말씀을 전하라고 하고, 받는 쪽에서는 곱게 받는 것이 아니고 욕설이 날아오고, 모욕하면서 비방이 들어오죠.

10절에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의 두려움을 들었나이다”라고 되어있어요. 지금 우리가 ‘예레미야가 참 힘들겠다’라고 동정할 생각하지 마시고, 우리가 냉철하게 예레미야를 집어넣어서 주께서 기대하는 구조가 뭐냐를, 인간 구조를 어떻게 편성하느냐를 보시면 되는 겁니다. 옛날 구약 때 하나님께서 언약궤를 중심에 두고, 열두 지파가 중심을 둘러싸는 구조로 이루어졌죠.

이스라엘 백성은 그 구조에 대해서 그렇게 중요시하지 않았습니다. 시키는 대로 언약궤 중심으로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언약궤 중심으로 가는 그것이 이스라엘 자체적으로 있을 때는 ‘그게 무슨 뜻이지?’하는데 이방 민족과 전쟁 속에서 그 구조라 하는 것은 이방 민족에게는 처절한 복수와 파멸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은 약간 순간적이지만 알았을 거예요.

하나님께서 벌이는 전쟁은 이 구조의 문제구나’ 그러니까 구조의 문제라는 것은 사적인 개인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하나의 개인을 하나님이 구성한 어떤 구조 속에 배정하는 거예요. ‘너는 어느 위치고, 너는 어느 위치에 있다’라는 거죠. 그러면 이방 민족의 중심은 뭐냐. 언약궤가 없어요. 중심이 언약궤가 아니에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중심이 언약궤가 있습니다.

언약궤가 뭐냐. 언약궤라 하는 것은 ‘이미 모든 것이 그 안에 주어져 있다’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다 이루었다’ 그러면 오늘 설교는 의외로 쉬워요. 예레미야 선지자야! 예~ 다 이루었으니까 당해도 괜찮아. 다 이루었으니까 당해도 괜찮아. 그러나 예레미야는 구약 사람이 되어서 그걸 못 견뎌 하는 거예요. 힘든 것은 힘들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서, 같은 선지자인데요, 세례요한 같은 경우에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29절에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내 중심이 오셔서, 중심이 오신 그것으로 족합니다. 족한 정도가 아니죠. 나는 그것으로 기뻐합니다.

그리고 뒤에 나오는 말이, 30절에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그는 흥하고 나는 동반해서 쇠퇴해야 합니다. 이 말은, 내가 쇠퇴하지 않으면 뭘 자꾸 가리냐 하면 주님뿐이라는 사실을 내 존재가 훼방하는 짓을 하게 돼요. 내가 궁지렁 궁지렁하고, 군소리하고, 인생에 대해서 내가 짜증을 내고, 우리 부모는 왜 다른 사람들처럼 행복하지 않느냐는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게 되면, 신랑이 주신 그 기쁨이 다 날아가 버리죠.

그러면 신랑이신 주님이 있으나 마나 한 거예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나는 내 행복으로 살겠다는 그것밖에 안 되잖아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조인트(Joint)를 합니다. “달라붙어라. 너의 구조를 버리고 주님 중심의 구조로 네가 달라붙어라” 그러면 어떻게 달라붙을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부직포입니다. 부직포란 말은 제가 지어냈지만, 부직포란 말은 양쪽 다 달라붙는 부직포.

하나님 쪽에도 붙어있고, 세상 쪽에도 붙어있는 부직포가 되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예레미야는 중간에서 양쪽 다를 체험합니다. 한쪽은 ‘다 이루었다’, 한쪽은 모든 것이 다 주어지지 않았다고 불평하는 쪽. 양쪽 다를 예레미야, 한 개인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죠? 주님 생각하면 다 이루었잖아요. 그런데 막상 주어지는 사건이나 순간순간 다가오는 사고, 사태에 직면하게 되면 짜증이 확 올라옵니다.

‘꼭 저를 이렇게 힘들게 만들어야 주님 속이 후련하십니까?’라는 식으로. 왜 주님은 나를 이렇게 못 살게 하는지. 벌써 2주째 감기도 낫지 않고, 왜 굳이 이렇게 힘들게 하는지. 꼭 구원되고 천국 가는데 이런 것을 굳이 겪어야 합니까? 이런 거죠. 그런데 그게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선지자 속에, 또 다른 말로 하면 성도 안에 들어있는 이 내용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방금 예레미야 입장을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이것만 이야기하면 성경 말씀 반을 놓친 것이 됩니다. 그러면 누구 입장을 생각해야 하느냐면, 예레미야에게 소위 선지자의 말씀을 듣는 그 당시 유대 사회의 입장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예레미야가 설교하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처음부터 욕이고 끝까지 욕이에요. 그 당시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인정하기 때문에 함부로 욕하기가 겁나요.

그래서 조심스러운데, 해도 해도 너무해요. 예레미야가 하는 이야기를 축약해 보면 이런 거예요. 여러분도 예레미야 이야기를 듣고 중간쯤 나쁜지, 썩~나쁜지, 기분이 좋은지, 셋 중 하나를 골라보세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불신자로 만들지 아니하면, 살아계신 주님의 구원의 기준이 보이지 않습니다”라고 하면서 “믿습니까?”라고 했어요.

우리 자신을 불신자로 만들지 아니하면 여러분들은 진짜 하나님이 어떤 기준에서 우리를 구원하는지, 기준이 바뀝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어쨌든 간에 불신자로 살아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불신자에 대한 대가는 혹독한 것이 될 텐데, 그것은 이 땅에서 여러분들의 행복은 물 건너갔습니다. 불신자 주제에 뭐, 콩 내라, 팥 내라 할 그런 입장 못 됩니다. 그래도, 그래도, 이렇게 힘들게 살아도, 구원의 기준이 ‘아, 저거구나’라고 알아차린다면, 여러분들은 기뻐해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만약 예레미야가 하고, 선지자가 한다면, 기분이 어떻겠어요? 이상하게 틀린 말은 아닌 거 같은데, 듣는 형님은 기분이 되게 나쁘죠.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쉽게 말해서 예레미야 속에 예수님의 피를 섞은 거예요. 그런데 듣는 입장에서는 뭐냐. ‘당신이 하나님 말씀 전하는 것은 내가 흔쾌히 인정하겠는데, 제발 그 속에 피 좀 안 섞으면 안 돼?’

‘피 좀, 메시야가 죽었다는 이야기 좀 빼고 이야기하면 안 돼?’라는 식이에요. 손자에게 김밥 만들어 주니, 손자가 그냥 먹으면 될 텐데, 시금치는 쏙쏙 다 뺍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좋은 일을 하셔서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라고 이렇게 좋게 좋게 이야기하면 안 되나? 그렇게 하게 되면 나도 ‘예, 믿습니다. 할렐루야~’라는 좋은 말로 전부다 호응을 하고 싶은데, 그러니까 당신은 불신자라는 말, 그러니까 신자가 아니라는 말을 왜 굳이 거기에 집어넣느냐는 말이죠.

이게 둘이 겸할 수 없어서 그래요. 겸할 수가 없어서. 성경해석 쭉 읽어보면 ‘은혜가 되네. 큐티도 하면서 은혜가 돼’라고 백날 은혜 되면 뭐 합니까. 다 끝나고 나면 자기가 신자인데요. 이게 뭡니까? ‘주께서 은혜 주신 거 내가 받아 챙기니 나는 이익 봤다’라는 그것밖에 안 되거든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복음 전할 때 자기는 멀쩡했어요? 이게 결정적입니다.

예수님은 복음 전했으니, 멀쩡하고 아무 탈 없었습니까? 막~ 백성들이 환호하고 그렇게 예수님은 무사히 하늘로 올라갔습니까? 아니잖아요. 말씀 자체가 그게 아니잖아요. 말씀 자체가 말씀 전한 본인을 이 인간들이 사는 세계에서, 혼돈과 어둠의 세계에서 죽이게 만들었단 말이죠. 그런데 말씀을 듣는 우리는 멀쩡하기를 원하고 있단 말이죠.

뭐가 어디서 잘못된 겁니까? 어디가 문제가 생긴 거죠? 여기에 바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바로 이점을 전제로 해서 주께서 말씀을 주신 겁니다. 얼마나 인간들이 안일하고, 얼마나 태평인지, 나에게 아무 문제가 없으면 그게 곧 현실인 줄 알아요. 누가복음 12장 16~20절에 보게 되면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방금 18절까지 읽었습니다. 자, 이 부자 농부가 한 생각에 무슨 하자가 있습니까? 우리가 그것을 듣고 막 분개합니까? 오히려 ‘와, 좋겠다. 농사 잘되니까 너무 좋겠네’, ‘그래서 안 그래도 창고 다시 지으려고’, ‘잘했어. 잘했어. 창고 지어야지’ 우리는 마치 나의 일인 것처럼 좋아서 같이 호응할 것이고, 나도 언젠가는 풍족한 곡식을 소출한 부자 농부처럼 되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죠.

부럽죠. ‘참, 하나님에게 복 받았구나’라는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할 때요, 인간들의 생각은 어떤가를 놓치지 않고, 그것부터 먼저 시작해요. 출발 딱 하게 되면 사람들은, ‘그렇지. 그렇지. 그게 맞지’ 뒷말은 어떤 것인지 모르고 일단은 그게 내 생각이고, 오늘 우리 모든 사람의 생각이라 해서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20절에 보면 하나님이 나타났어요.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예레미야가 꼭 이런 식으로 초를 치니까 욕을 안 얻어먹으려고 해야, 안 얻어먹을 수가 없는 거예요. 곡식 잘 되면 축하한다고 하면 끝날 문제이고 예레미야를 욕할 이유가 없습니다. 꼭 초를 쳐요. 예레미야가. 오늘날 성도가.

오늘 아침에 예배전에 들었던 이야기인데, 교회 올 때 자기 성경책 들고 오니까, 당연히 자기 성경책 들고 오지 남의 성경책 훔쳐 오는 건 아니잖아요. 그러면 그냥 넘어가면 되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질문하는 거예요. ‘왜 자기 성경책을 들고 오는 줄 압니까? 지가 구원받으려고 들고 옵니다’ 이렇게 초를 왜 치느냔 말입니다. 초를. 무슨 효과를 노리고.

무슨 시비 못 걸어서 환장한 것처럼. 그래서 분위기 싸하게 만들어야 속이 시원한지. 하여튼 교회에 오면 주께서 이렇게 적절한 예를 주신다니까요. 그것은 바로 19절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이게 문제였던 거예요. 이게. “내가 내 영혼에게” 이게 모든 자들에게 잠재되어 있었던 겁니다. “내가 내 영혼에게”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을 알아요. 하나님이 복 주신 거 다 아는데, 하나님이 복을 주든 뭘 주든, 나의 관심사는 오로지 한 곳에만 꽂혀 있습니다. 내 영혼 잘 되면 끝나요. 이것은 구조가 아닙니다. 이건 구조가 아니에요. 내 자리를 내가 마련하겠다는 겁니다. 내가 중심이 되겠다는 것을 일체 포기한 적이 없는 상태예요. 나는 내가 중심이 된 구조로써 오케이.

그러면 인생 오케이입니다. 나만 잘되면 되지. 19절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는 것은, 너희가 이 말씀에서 벗어나도록 노력해야 네가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인간도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라고 하는 이 인간에서 벗어날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단 한 사람도 없어요. 심지어 복음을 아는 사람도 해당됩니다.

그래서 이런 입장에서 예레미야는 종말을 말씀 속에 담았던 거예요. 이 유대 나라 망한다는 거. 그 망한다는 것을 우리가 흔쾌히 받자는 이야기예요. 그 점을 유대인들은 ‘No’라고 거부하는 거예요. 시편 91편에 11~14절에 보면,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특히, 여기 14절에 대목은 선교단체에서 많이 인용한 말씀이에요. 다시 한번 읽어볼게요. 자, 여러분들이 대학생들이라 생각하시고 저는 간사입니다. 젊은 시절 20대로 돌아가서 제가 말할테니 그때 그 기분으로 들어보세요.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믿습니까?” 여기서 이 “믿습니까?”가 빠지면 안 돼요. “믿습니까? 받아들입니까?”

그러면 젊은 아이들이 시험치고 떨어지고, 시험치고 또 떨어지고, 사는 것이 암담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도와주리라 생각하고 교회 가서 있다가, 간사님이 특히 “내가 저를 높이리라, You raise me up, 높은 곳에 발을 높이리라”라는 그 소리를 들으면요, 이걸 ‘나는 안 믿을란다’라고 하는 사람이 없어요. ‘그래, 내가 왜 진작 주를 찾지 못했지? 이참에 맘 결심 한번 하자. 나 혼자 끙끙대지 말고, 주께서 나를 높여주고’

‘단, 조건이 뭐냐? 내가 주님만 사랑하면 사랑하는 주님이 나를 높여준다는데, 내가 이 희망을 그동안 왜 몰랐었지. 이제부터는 내가 이렇게 하리라’라는 이 이야기 맘에 들어올 거예요. 그러나 이 이야기의 본문은 누구의 이야기냐 하면, 여러분은 짐작하셨겠지만, 광야에서 마귀가 이 말을 사용했다는 거예요. 무섭지 않습니까? 무서운 세계죠. 마귀가 이 말씀을 사용한 거예요. 예수님에게.

이 말씀을 마귀가 인간들에게 했는데 인간들은 다 넘어갔어요. ‘난 이제 신자야. 나는 이제 주님 사랑하니까, 높이실 거야’ 그런데 단 한 사람은 속아 넘어가지 않았어요. 예수님은 이 말씀에 속아 넘어가지 않았어요. 예수님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이루는가. 그 인간들이 가기 싫어하는, 인간이 망했다, 망했다 중에서 최저로 망한 그 자리, 십자가에 같이 동참한 자만이 이 구절이 들려요.

이 구절에서 나는 내가 아니고 예수님이 ‘나’라는 거. 그리고 “다 이루었다”를 듣는 자만이 이 땅에서 악마가 어떤 식으로 꼬드기더라도 다 이루심이 강하게 이기는 거예요. 그것이 예레미야 오늘 본문에도 있습니다. 20장 7절에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그런데 예레미야는 이 말을 하면서도 아직 신약 성도가 아니어서 무슨 뜻인지 본인이 헷갈린 거예요.

‘이겼는데 왜 힘듭니까?’라고 이렇게 나오더란 말이죠. 이겼사오니, 어떠한 비난과 힘든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이김이 취소되지 않습니다. 왜? 그 십자가 이김은 모든 것이 이미, 천국의 복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이미 부직포처럼 양쪽 다가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거예요.

우리는 뭘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위치한 위치가 예수 안에, 예수님 안에 위치되어 있으니까, 오늘날 선지자같은 기능, 우리를 통해서 주께서 하게 하시는 거, 이게 바로 말씀의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기준만 드러나게 하옵소서. 내가 어떻다, 저떻다가 아니라, 주께서 피가 모든 것을 다 해결했음을 왜 우리는 맘 편하게 못 받아들입니까. 이제는 다 이루어졌으니까, 어떤 것도 다 이루어 주심을 드러내는 복이라 여기고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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