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 만들기
2024년 3월 31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9:1-6
(19:1)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가서 토기장이의 오지병을 사고 백성의 어른들과 제사장의 어른 몇 사람을 데리고
(19:2) 하시드 문 어귀 곁에 있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가서 거기서 내가 네게 이른 말을 선포하여
(19:3) 이르기를 너희 유다 왕들과 예루살렘 거민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곳에 재앙을 내릴 것이라 무릇 그것을 듣는 자의 귀가 진동하리니
(19:4) 이는 그들이 나를 버리고 이곳을 불결케 하며 이곳에서 자기와 자기 열조와 유다 왕들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무죄한 자의 피로 이곳에 채웠음이며
(19:5) 또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산당을 건축하고 자기 아들들을 바알에게 번제로 불살라 드렸나니 이는 내가 명하거나 뜻한 바가 아니니라
(19:6)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다시는 이곳을 도벳이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 칭하지 아니하고 살륙의 골짜기라 칭하는 날이 이를 것이라
이스라엘의 특수성은 인간의 자율성 위에 먼저 하나님의 율법이 지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율법에 하나님의 언약에 갇혀 있는 바가 됩니다. 그런데 원래 인간은 이처럼 ‘갇혀 있는 것’이 정상이 아닌가요? 아담과 하와가 아무리 낙원 생활을 했다할지라도 ‘낙원’이라고 곳에 갇혀 있는 것이 정상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내에 지옥을 만들겠다는 겁니다. 지옥의 성격은 ‘살육의 골짜기’라고 이름까지 지어놓았습니다. 살육 할만해서 살육하시겠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서 우리 자신이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이런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에 대해서 우리들은 어떤 자세를 보여야 할까요? 첫째는 “안돼!”라고 소리치는 겁니다.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이곳이 최고의 징벌과 저주와 고통이 주어지는 지옥이 될 수 있는가? 절대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고 일어나서도 안 된다.
단지 우리 자신들을 회개하고 개선하라고 미리 엄포놓으시는 경고성 발언이라고 이해하고 싶을 겁니다. 둘째 반응은 이런 식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디까지나 이스라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 소유입니다. 그렇다면 주인되시는 분이 지옥을 만드시겠다면 흔쾌히 반겨야 마땅하다는 반응 말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느 쪽의 반응을 보이게 될까요? 생명책을 가지고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출애굽기 32:33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리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두고 다음의 두 가지 반응이 가능합니다.
첫째, “안돼! 나는 생명책에서 내 명단 지워지면 안돼! 나 꼭 천국가야 돼. 천국에서 명단이 지워지더라도 예수님께서 피로 내 죄를 용서하시면 나는 죄 없이 되기에 여전히 생명책 명단에 내 이름을 영원토록 올라가 있을거야. 나는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어!”라고 말입니다. 이런 반응말고 다른 반응이 다음과 같이 있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반응은, 나의 운명에 관심두기보다는 이참에 생명책이 어떤 책이 어떤 책이라는 것을 알게 도히어 너무 기뻐! 생명책에 죄지은 자가 여전히 들어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 나라고 할지라도 당연히 생명책에서 제거되어야 해. 우리 주님께서 참 조치를 잘 하셨어! 과연 어느 쪽이 바른 태도일까요?
이런 상반된 태도는 바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기계’로 쓰여지고 있음을 우리는 고려해야 합니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세보다 율법의 율법다음이 더 우선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런 율법의 갇혀 있는 자들입니다. 이처럼 자기의 신세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우선하는 자들이 과연 실제로 있을까요?
요한복음 3:29에서 세례요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리고 이 말을 뒷받침해 주는 고백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요 3:28)
즉 세례 요한은 자신이 ‘〜 아니요’라는 말은 되풀이합니다. 그것은 세례 요한의 정체를 알고 싶어서 세례 요한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시비거는 자들을 겨냥한 세례요한의 자기 고백입니다. 주변 사람들은 평소에 자신을 남들에게 내세우는 방식을 그대로 사용하여, 세례 요한도 아마 자신들처럼 살아가고 있을 것이라고 여겨서 세례 요한을 시비건 겁니다.
즉 “나는 나를 구원받는 나로 만들기 위해 이것 거것 시도를 해오고 있으니 너도 나처럼 뭘 할게 아닌가?”하면서 묻는 겁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 세례 요한은 전혀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중요한 것은 신랑입니다. 이 신랑은 자기보다 우선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30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즉 평소에 내가 나에게 신경쓰고 사는 것 바로 그것이 예수님 하시는 일에 대해서 훼방하고 방해하는 지옥적인 일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내부에 천국과 지옥 양쪽을 다 보여주는 기능을 발휘시키십니다. 이스라엘은 필히 망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당연하는 쪽’이 천국 쪽이요, ‘그래서는 안 된다’는 쪽이 지옥 쪽입니다.
마태복음 9:14-15에 보면,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고 나옵니다.
즉 예수님 뜻은 이것입니다. ‘왜 금식해야 하는가?’를 따집니다. 금식을 하면서까지 뭔가 따내려고 있는 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했다면 바로 그것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우상섬기는 마음가짐이라는 겁니다. 인간들은 신을 섬기면서 감사와 기쁨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나를 부정하므로서 감사와 기쁨이 나옵니다.
천국 가는 게 하나의 업무가 되고 목적이 되어버리면 이때부터 인간의 마음은 초조하고 불안하고 염려되고 걱정됩니다. 문제는 자기를 부정하는 방식이 본인의 노력으로 가능한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 앞에서 마땅히 인간은 부정당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즉 내가 내 인생 염려하고 걱정하라고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니라 율법에 우선성을 두고 그냥 기계처럼 사용되는 바로 그 관계가 천국의 모습에 해당되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2:15-16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여기서 성도는 기계 정도가 아니라 아예 기체(氣體)처럼 쓰여집니다. 그 어떤 상황인지를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의 우선성을 뿜어내면 됩니다. 괜히 예수 이름 빙자해서 자기 사업을 따로 구상하면 아니됩니다.(눅 8:38)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매 순간, 매 장소가 우리 자신이 결정한 게 아님을 명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97강-예레미야 19장 1~6절(지옥 만들기)240331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9장 1~6절입니다. 구약성경 1078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가서 토기장이의 오지병을 사고 백성의 어른들과 제사장의 어른 몇 사람을 데리고, 하시드문 어귀 곁에 있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가서 거기서 내가 네게 이른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너희 유다 왕들과 예루살렘 거민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곳에 재앙을 내릴 것이라 무릇 그것을 듣는 자의 귀가 진동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를 버리고 이곳을 불결케 하며 이곳에서 자기와 자기 열조와 유다 왕들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무죄한 자의 피로 이곳에 채웠음이며, 또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산당을 건축하고 자기 아들들을 바알에게 번제로 불살라 드렸나니 이는 내가 명하거나 말하거나 뜻한 바가 아니니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다시는 이곳을 도벳이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 칭하지 아니하고 살륙의 골짜기라 칭하는 날이 이를 것이라”
이스라엘이라는 그 나라의 특수성이 하나님의 모든 뜻을 거기에 집약해서 보여준다는 데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지옥이 무엇인가를 꼭 죽어서 아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특별하게 ‘아, 이런 곳이 지옥이구나’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스라엘 내부에 아예 지옥을 만드셨습니다. 지옥을 규정해서 상설지옥 처소로 이스라엘이 그 안에 들어있도록 한 겁니다.
이스라엘의 기능 자체가 나중에 우리가 죽어봐야 아는 것이 아니라, 안 죽어봐도 알 수 있도록 미리 당겨서 경험케 하는 것이 이스라엘을 만드시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러면 지옥이 뭐 하는 것이냐. 지옥은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살육의 골짜기’라고 되어있어요. 힌놈의 골짜기가 살육의 골짜기로 바뀐다는 것은, 힌놈의 골짜기에서 인간들이 하던 그것이 바로 지옥 갈 자들이 평소에 하고 있는 일을 힌놈의 골짜기라는 그 장소에서 계속 일어났고, 그 결과가 뭐냐. 다 죽여버린다는, 살육한다는 장소가 살육의 골짜기로 칭할 것이라고 이렇게 했습니다.
여러분 집에 하나님께서 “거기 안방 좀 내놔라. 내가 그곳을 지옥이 무엇인지 알려주도록 안방을 사용하겠다”라고 하면 여러분들은 상당히 겁날 겁니다. 우리 가정은 천국 되기를 원하지 우리 가정 한복판에 의도적으로 지옥을 만드셔야 하는지 막 반발하고 할 거예요. 그런데 바로 하나님께서 지옥을 만들겠다면 그냥 지옥을 만들도록 우리 모든 것을 내놓도록 하는 역할이 사실은 이스라엘의 역할이어야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절대로 이스라엘 나라를 소유하면 안 돼요. 이스라엘 소유자가 따로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소유주가 되셔서 천국이 무엇인가도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주고, 지옥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도 이스라엘이 필요한 거예요. 그것을 이렇게 정리하면 됩니다. 내가 율법을 너희에게 주노니,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을 받고(천국이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이게 지옥이죠)
그러니까 이스라엘 안에 인간들이 그렇게 궁금해하는, 죽어야 안다는 그 천국과 지옥을 안 죽어도 살아생전에 경험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에게 모든 것을 기능화시키는 겁니다. 기능화시키는 것을 요새 말로 하면 ‘기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계는 인간 자신의 의도와 자기 계획같은 것을 일체 무시하는 것이 기계입니다.
그래서 이 기계는 동작하는 것, 기계가 설비하고, 윙~하면서 돌아가는 그 자체가 기계거든요. 무엇이 나올지, 어떤 결과가 나올지, 이런 것은 기계 자체가 염려할 필요 없습니다. 그건 기계 소관이 아니에요. 그냥 움직이는 대로 움직이면 되죠. 그러면 나 자신이 기계라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섭섭하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내가 로봇이냐. 나도 생각할 수 있는 인격체다. 인간에게는 존엄성이 있다. 우리의 자율성, 자유의지도 있잖아’라고 이야기할 거예요.
그러나 내가 기계 되기를 거부하면 감사와 고마움도 날아가요. 감사라 하는 것은 내가 기적을 베풀지 아니해도 되는 데서 오는 것이 감사예요. 내가 큰 업적과 큰 결과를 안 남겨도 되는 데서 나오는 것이 고마움과 감사입니다. 뭔가 어떤 실적과 기대치를 갖는 순간부터, 우리는 감사가 싹 다 날아갑니다. 하루를 살더라도 이건, 그야말로 지옥같은 삶이 되는 겁니다.
‘이겨야 할 텐데. 패배하면 안 되는데. 반드시 뭐가 되어야 하는데’라고 갑자기 땀이 삐질삐질 나면서, 긴장되면서, 온몸의 자율신경 모든 체계가 비정상적으로 가동되지요. 긴장이 바짝 되고. 그런 식으로는 이건 뭐 하루를 살더라도 힘들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밖에 안 됩니다. 세상 사는 것이 왜 그렇게 힘드냐. 슬픔을 가상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 뜻대로 안 되면 나는 슬퍼할 거야’라는 식으로.
슬픔이 자꾸 가상되기 때문에 힘든데, 인간은 왜 슬퍼해야 하는가. 그건 본인이 하나의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이건 내 세상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인간은 슬퍼하는 겁니다. 뭐 이건 먹히지도 않는 이야기죠. 무슨 이야기냐 싶죠.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지옥을 만들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뭐냐 하면, ‘나, 지옥 안 갈래’라고 하고 있다고요.
벌써 이건 하나님의 취지와 우리의 뜻이 핀트(요점)가 어긋난 거예요. 지옥을 가고 안가고, 천국 가고 안 가고 하는 것은 네가 내세울 주장이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그런 입장이 아닌 거예요. 그냥 기계라니까요. 지옥 보여줘야 하면 지옥 보이면 되고, 천국 보여줘야 하면 천국 보여주면 되는 거예요. 지옥과 천국을 보여주는 데 있어서, 우리는 감사할 것밖에 없습니다.
왜? 그것이 내가 주관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특징은 율법이 인간 위에 있다는 겁니다. 말씀이 인간 위에 있는 거예요. 그러면 말씀이 인간 위에 있다면 이건 이스라엘 사람들이 굉장히 고마워해야 하는데, 왜냐 하면 그것은 갇혀있기 때문에 그래요. 말씀에 갇힌 상태. 말씀의 능력에서 도망치고 싶어도 못 도망치는 겁니다.
성도도 매 순간순간 그런 체험을 하게 되어있어요. 뭘 해도 어느 구석에 가더라도 그것이 성경 말씀이 말씀대로 그대로 이루어지고 진행된다는 그러한 상황 속에 내가 놓여있습니다. 그러면 갇혀있다고 하니까 갇혀있다고 제가 언급을 하는데, 이건 원래 창세기 3장에 아담과 하와도 사실은 에덴동산에 갇혀있었어요. 안 갇혀있을 때가 없었습니다.
다만 좋은 환경 속에 갇혀있었지요. 그걸 낙원이라고 하는 겁니다. 천국 간다는 것은 갇혀있음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자가 천국 가는 겁니다. 반대로 ‘하나님 네가 뭔데 나를 가둬?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하나님도 신이야? 나도 신이야. 나는 나의 세계를 따로 펼칠 거야’라고 하는 이거는 지옥에 갇혀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기능 가운데서 딱 두 가지만 하면 됩니다. 지옥에 갇혀있는 면면과 천국에 갇혀있는 모습을 우리는 주께서 이끄시는 대로 그때그때 보여주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천국 내놓으라고 할 때, 천국 내보이면 되고, 지옥 내놓으라고 할 때, 지옥을 내보이면 되는 겁니다. 천국과 지옥의 공통점은 둘 다 갇혀있다는 겁니다. 하나는 천국에 갇혀있고, 하나는 지옥에 갇혀있습니다.
천국에 갇혀있다는 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면 “어린양의 생명책에 네 이름이 있다”라고 표현하는 거예요. 갇혀있다고 하니까 기분 막 나쁘고 했을 텐데, 어린양의 생명책에 너의 이름이 거기에 적혀있다는 거예요. 노트에 적혀있어요. 명단에. 생명책에 있다는 이 말이죠. 그런데 그 명단에 적혀있는데, 그게 생명책이기 때문에 조건이 있어요.
그 조건이 출애굽기 32장 3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리리라”라고 되어있어요. 생명책에 명단이 있는 이유가 누구든지 율법에 의해서 죄를 범하면 생명책에서 지워버린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두 가지 반응이 나옵니다. 하나는 ‘안 돼~~지워버리면 안 돼. 하나님 그거 안 됩니다. 그렇게 나오시면 안 되죠. 나 지옥 가면 안 되는데’라는 반응이 하나 있어요.
또 다른 반응이 궁금하죠? 다른 반응은 ‘아, 생명책이 그런 것이구나. 내가 생명책에 대해서 알게 되었네. 죄지은 자는 들어갈 수 없는 게 생명책이네. 반갑다, 생명책아’라는 뭐 이런 거. 이런 반응. 여러분들은 어느 쪽이죠? 생명책에 반응을 보인다는 사람은 특징이 뭐냐.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기 자신보다 생명책이 우선이며, 그게 바로 생명책이 우리 갇혀있는 자에게 가르치는 원리원칙이라는 것을 감사히 받아들이는 거예요.
나보다 생명책이 우선이라는 이 조건을 네가 흔쾌히 받아들이겠느뇨? 예, 받아들이겠습니다. 이게 무슨 결혼식장은 아니지만, 결혼식장이라고 한다면, 저도 주례를 수십 번 했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신부인 여러분은 신랑인 주님의 생명책을 사랑하시겠느뇨?”라는 이게 결혼 혼인 잔치라면, 그리고 주께서 물으신다면, 그래서 뭐 여자가 ‘아니요’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아니라고 하면 결혼식이 무효가 되지요. ‘여기서 결혼식은 무효로 끝났습니다. 이 신부는 신랑으로부터 제외됩니다’라는 식으로. 혼수 준 거 다 돌려주고 파토 내죠. 그런데 어느 결혼식장에서 ‘신부는 신랑을 사랑하겠느뇨?’라고 할 때, ‘예!!’라고 힘차게 하면 부끄러우니까 주례만 들을 수 있도록 ‘예’라고 작게 이야기하죠. 이 질문이 제가 꾸며낸 질문이 아니고, 요한복음 3장 29절에 나옵니다.
성경에 벌써 나오고 있어요. 요한복음 3장 29~30절에 보면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라고 세례요한이 이야기했어요. 세례요한이 자꾸 주위에서 ‘너 뭐야? 너 뭐야?’라고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세례요한은 어떻게 이야기하느냐 하면 ‘왜 자꾸 나만 가지고 그래~’라는 뜻인 거예요.
내 문제는 내 소관이 아니고 신랑 소관인데, 왜 자꾸 내 문제로 보면서 내가 해결해야 할 것처럼 왜 나에게 자꾸 들이대고 질문을 던지냐는 거죠. ‘너 뭐야?’라고 하니까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됐냐?’라고 하는 거죠. 자꾸 ‘너 어떻게 할래? 너 지옥 갈래, 천국 갈래?’라고 묻는 것은 묻는 본인이, 지금 예수님보다도 자기가 우선적이라서 그런 질문을 던지는 거예요.
그 질문자가. ‘너 어떻게 할래? 이렇게 살아서 네가 그 생명책에 죄 많이 지으면 잘린다는 것을 네가 들었잖아’라고 하면, ‘응, 들었어’라고 하면 ‘나 지금 걱정돼 죽겠어. 지금 지은 죄가 한두 개가 아닌데, 지금 생명책에 내 이름이 없는 거 같아. 너무 걱정돼. 너는 걱정 안 돼?’라고 물으면, ‘응, 걱정 안 돼. 나는 나보다 생명책이 우선이니까’ 여러분이 이걸 흉내라도 낼 수가 있겠습니까? 흉내라도.
이게 바로 천국에 가는 사람의 특징이에요. 갇혀있음을 흔쾌히 좋아한다니까요. 지금 세 번째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가 주님에게 갇혀있는 신세가 너무나 영광스럽다는 거예요. 왜냐 하면 창세기 3장에 아담과 하와가 있는 곳이 낙원입니다. 에덴동산, 낙원이에요. 낙원은 갇혀있는 곳이에요. 낙원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갇혀있는 것을 기분 나빠하는 거지, 죄짓기 전에는 낙원만큼 좋은 곳이 없었습니다. 최고입니다.
마태복음 9장 14~15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의 제자들이 금식하고 있었어요. 금식하고 있는데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무리에게 욕을 하고 비난하는 거예요. 지금 금식 기간인데, 지금 온 나라가 금식하며 고난주일 지키는데, 당신은 지금 뭐 하고 있느냐? 왜 당신은 금식 안해? 바리새인도 금식하는데 요한의 제자들도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라고 하니까 그때 예수님께서 이런 이야기 하십니다. 답변 듣기 전에 먼저 이런 취지로 답변을 했다는 것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금식 왜 하는데? 누구 좋으려고 금식하는데? 금식해서 얻고자 하는 기획과 의도가 뭔데?’
쉽게 말해서 인간이 뭔가 기획과 의도,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그만큼 불안하고 초조하고 근심된다는 뜻이에요. 본인이 기계가 아닌 거예요. 자율적 존재라고 그걸 계속 우기고 자기 속에서 다짐에 다짐을 하는 거예요. ‘나는 자율적으로, 내 뜻대로, 내 선택대로 내가 된다, 그렇게 해서 내가 된다’라는 본인이 자꾸 주문 외우듯이 자꾸 그렇게 살아가는 거예요.
그것은 이런 뜻을 가지고 있어요. ‘바르게 살면 좋은 나라 간다. 착하게 살면 좋은 나라 간다’라는 이게 바로 지옥이잖아요. 그게 지옥이라고요. 본인에서 본인이 해방되지 못한 것이 지옥이잖아요. 본인 의도와 목적에서 본인이 벗어나지 못해요. 그런데 지금 세례요한은 뭐냐 하면 나 말고 다른 분이 계시다. 자꾸 나보고 득달 내지 말고, 나보고 따지지 말고, 멱살 쥐고 시비 걸지 말고, 나 말고 다른 분을 보라는 겁니다. 내 곁에 계신 분을 보라는 겁니다.
내가 외치는 자를 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세례요한은 ‘나는 어떻게 됩니까? 나는 구원받아요, 지옥 가요?’라는 이런 것을 내가 나에게 외치지 않아요. 외칠 필요 없어요. 나는 그분의 기계니까. 그분의 소리이고 그분의 목소리니까. 마이크니까. 제가 이런 이야기 하면 꼭 뒤에 들려오는 소리가 이런 소리가 들려요.
‘목사님 말이 틀렸다는 말은 아닌데, 그러면 교인이 몇 명 남아있겠습니까?’라는 식으로 반박이 들어와요. 그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목적이 있다는 거예요. 목사가 설교하면 적어도 교인이 한 50명은 되어야 밥 먹고 살지 않겠습니까. 갑자기 무거운 주제가 되어버렸네요. 50명은 되어야 개척교회가 안정권에 들어가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이건 목사의 고민만은 아니에요. 그냥 카페를 차려도 마찬가지예요. 카페를. 카페 차렸는데 하루에 손님 한 300명은 되어야, 가게세도 내고 운영되지 않겠습니까? 밤에 꿈을 꾸나, 아침에 일어나나, 이 걱정이 떠날 새가 없습니다. 편할 날이 없어요. 그러니까 소위 교회 다니는 사람은 짐이 이중 짐이에요. 하나는 손님이 와야 밥 먹고 사는 거예요. 또 하나는 장사하고 돈 번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것에 내가 혹시 소홀히 해서 제대로 천국에 대처를 못 해서 지옥 가면 어떻게 할지 고민이 두 개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둘 중에 적당한 균형 맞추기, 예를 들어 ‘주일날 오전은 가기’라는 이런 거, 바쁘면 그것도 한 달에 한 번밖에 못 오고 하는 이런 거, 직장이 중요하지 교회가 중요하냐는 식으로, 자꾸 하나님을 상대로 조율하고 흥정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을 누가 했느냐. 그것을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거예요.
주변에 강대국들이 포진해서 이스라엘을 넘보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율법을 아주 버릴 수는 없고, 정기적으로 형식적으로 제사는 드리되, 그들과 똑같이, 그들이 너무 잘 사니까, 그들이 잘사는 비결을 알아서, 그들의 생활방식을 그대로 하는데, 그 이방 민족의 특징은 뭐냐. 인간의 자율성을 보장해 주는 하나님이에요. 인간의 욕구와 욕망을 충족해 주는 신이에요.
그냥 먹이는 대로 복을 주는 신이에요. 그게 바로 우상입니다. 내가 헌신하고 잘하면 돌아오는 것도 많고, 내가 성의 없으면 성의 없는 대로 대가가 주어지는, 그저 밀고 당기고 밀고 당기고, 밀당이 가능한 신이 바로 우상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겉으로는 여호와 섬기고, 예루살렘에 문이 여기 나오는데요. 그전에 여기 오지병이 나오는데, 병을 만들다가 중간에 안 되면 전체를 다 깨버려야 해요.
오지병이 있는 그 문이 무슨 문이냐 하면 그 깨진 것들만, 살육당한 병들, 병으로 치면 살육당한 병들이 쓰레기 되고, 그 쓰레기는 나중에 가루로 만들어서 어디에 수출한답니다. 그 당시에도 수출 없이는 못 사니까. 욕조같은 것의 밑부분, 주방에 반질반질한 부분을 할 때 오지병 재료가 쓰인다는 거예요. 오지병 있는 그곳이 바로 힌놈의 골짜기고 그 문이 하시드 문이라는 거예요.
예루살렘 성전에 가면 남쪽의 골짜기에 하시드 문이 있어요. 거기에 토기장이의 잔해들이 많이 있단 말이죠. 그 깨진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그동안 충실하게 우상을 섬겨온 거예요. 충실하게. 이 말은 율법은 율법이지만 율법이 내 속을 변화시킬 수가 없었다는 것을 충실하게 증명해 내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 쪽에서도 충실하게 그 결과를 줘야지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이제 살육의 도시, 다시 말해서 게헨나(힌놈의 골짜기), 게헨나(gehenna)가 신약적으로 하면 지옥입니다. 네가 지옥이 되어라. 다시 말해서 너희들은 이쪽에 갇히지 않으면, 저쪽에 갇혀있고, 지옥 아니면 천국에 갇혀있다는 이 사태를 우리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겁니다. 내가 이스라엘을 지옥으로 만들어 줄게. 그래야 율법에 갇혀있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상황인지를 알라는 거죠.
우리나라 이스라엘이 망했다는 이것보다 더 큰 복은 없다는 겁니다. 내 인생이 조지고 망했다는 거, 다시 말해서 나는 뭐든지 내 뜻대로 될 줄 알았는데, 주님께서 내 뜻을 아주 뭉개버리고 박살 내는 이것처럼 하나님의 존재를 실감하는 경우가 또 있을까요? 망하면서 복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기계가 다시 한번 기계로 돌아오는 아주 귀한 순간입니다.
성경에 여러 어려운 점이 많은데, 거기서 하나 뽑으라면 누가복음 8장 38~39절 말씀입니다.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저를 보내시며 가라사대,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일 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 하시니” 귀신들렸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이 점에서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꼭 아셔야 해요.
내가 예수 안 믿고 절에 갔는데, 주께서 부처 귀신을 쫓아냈다. 그때 인간에게 단박에 떠오르는 것은 ‘이제부터 하나님이 나를 특별히 쓰시려는구나’라는 것인데, 그거 잘못된 생각입니다. 귀신들린 자가 제자 되기를 원했지만, 주께서 ‘아서라. 그리 말아라. 너는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왜 주께서는 그 귀신들린 사람, 그거 큰 간증 거리인데도 불구하고 주께서는 자기와 함께 다니기를 거부하셨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가 뭡니까. 그것은 그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비전과 계획을 갖고 있었어요. 이제는 예수와 함께 남은 인생을 보람있게 사는 거, 인간에게는 보람있는 일은 인간이 계획하면 안 돼요. 인간은 그냥 살지 보람있게 살면 안 돼요. 왜냐 하면 인간은 어디서도 주님의 기계가 아닌 적이 없기 때문에. 기계에 이쁜 기계, 보람있는 기계 이런 거 없습니다. 참한 기계도 없습니다.
그냥 주님 옆에 붙어있어도 기계요, 주님께서 멀찍이 떨어져도 주께서 쓰시는 기계입니다. 다만 성도라 하는 것은 고린도후서에 나오는 말씀이 정확한 정답이 됩니다. 고린도후서 2장 15~16절에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그냥 냄새예요. 냄새 풍기는 기계라고요. 어느 자리에 있든지 그 향기를 피우면 되는 거예요. 우리는 처음부터 갇힌 자기 때문에, 내가 내 계획을 수립하면 안 돼요. 다만, 나보다 먼저 우선되는 것이 복음이고, 말씀이고, 천국이고, 생명책이고, 그것이 나보다 우선된다는 사실을 알고, 그냥 그런 천국이 있다는 것을 아는 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냥 향기를 피우면 될 문제이지, 어떤 목회를 한다든지, 교회를 세워서 크게 부흥한다든지, 그러한 비전이나 계획은 안 갖는 것이 좋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있는 장소가 우리가 마련한 장소가 아니고, 주님의 기계가 기계로써 살려고 주어진 장소이기에, 어떤 위치에, 어떤 시간, 어떤 환경이든지 범사에 감사에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