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와 바스훌
2024년 4월 7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0:1-6
(20:1) 제사장 임멜의 아들 바스훌은 여호와의 집 유사장이라 그가 예레미야의 이 일 예언함을 들은지라
(20:2) 이에 바스훌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여호와의 집 베냐민의 윗문에 있는 착고에 채웠더니
(20:3) 다음날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착고에서 놓아 주매 예레미야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 이름을 바스훌이라 아니하시고 마골밋사빕이라 하시느니라
(20:4) 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너로 너와 네 모든 친구에게 두려움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그 원수의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네 눈은 그것을 볼 것이며 내가 온 유다를 바벨론 왕의 손에 붙이리니 그가 그들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옮겨 칼로 죽이리라
(20:5) 내가 또 이 성의 모든 부와 그 모든 소득과 그 모든 귀물과 유다 왕들의 모든 보물을 그 원수의 손에 붙이리니 그들이 그것을 탈취하여 바벨론으로 가져가리라
(20:6) 바스훌아 너와 네 집에 거하는 모든 자가 포로 되어 옮기우리니 네가 바벨론에 이르러 거기서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너와 네가 거짓 예언을 하여 들린 네 모든 친구도 일반이리라 하셨느니라
선지자가 말씀을 해도 인간들은 말로 알아 듣습니다. 이는 평소에 인간들은 그동안 축적된 각종 언어들로 인하여 자아가 이미 형성되어 있습니다. 즉 어떤 말에 좋은 호응해야 하는지 어떤 말에는 분노를 나타내어야 하는지 이미 구축되어 있는 자기 자아의 가치를 기준으로 해서 반응을 보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 바스훌이 격한 화를 내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옮깁니다. 예레미야를 때리고 그리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왜 이런 행동을 하지요? 그냥 예레미야의 말에 대해서 그러러니 하고 무시하면 안될까요?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신 의견이나 나 생각은 따로 있어”라고 하면서 갔다 버리면 안될까요?
일종은 바스훌은 발작을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 ‘말’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효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는 인간들의 말에 막히므로서 발휘하게 되어 있습니다. 선지자의 말씀은 특정 인간을 공격하는 것이 취지가 아니라 아예 이 이스라엘의 영역 자체가 필히 바벨론에 불바다 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앞으로 잘 해봅시다’는 독려 차원에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희망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희망이 없으면 자기 시스템이 스스로 무너지게 되어 있는 것’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즉 선지자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목적 의식을 제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고대하고 듣기를 원한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전합니다. 이것은 곧 ‘희망 없이 자체적으로 파괴되어도 괜찮아, 상관없어’에 관한 취지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내뱉은 말씀은 인간들이 반성을 하든지 대들든지 상관없이 그냥 그대로 진행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 ‘말’에서 ‘말씀’으로 이전할 수가 없습니다. 이럴 경우에 성도는 말씀 앞에서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말의 세계’에 갇혀 있는가를 아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예를 드렴,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씀입니다.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만하더라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가로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실진대 돼지 떼에 들여 보내소서 한 대
저희더러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마 8: 28-34)
왜 예수님을 자기 지방으로 제발 나가주었으면 부탁하지요? 인간들의 세계는 ‘말씀의 세계’가 아니라 ‘말의 세계’입니다. 자체적으로 희망을 품고 반성하고 검토하고 진보하는 재미로 살아가는 세계입니다. 이런 세계를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라고 말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에서 밉상받고 버림받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원하시는 세상은 ‘이 세대’가 아니고 ‘오는 세대’입니다. 그런데 이 ‘오는 세대’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미리 이 세상에 뿌려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의 말씀을 들은 바스훌은 그것을 ‘말’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그의 이름을 바꾸어줍니다.
바스훌이라는 이름은 ‘세력 확장’이라는 뜻입니다. 예레미야는 이 이름을 ‘마골빗사빕’이라고 바꾸어집니다. ‘두려움의 확장’이라는 뜻입니다. 이 뜻대로 바스훌은 바벨론 군대가 직접 예루살렘까지 접수할 때까지 꼼짝없이 그는 계속 살아서 이 모든 멸망의 광경을 다 받아내어야 합니다.
이름을 바꾸므로서 마치 ‘말씀의 선지자’처럼 행세하면서 유다나라의 멸망과 함께 해야 합니다. 그의 새로 덧입혀진 이름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차질없이 그대로 진척됩니다. 이와같이 ‘말씀’을 모르는 채 ‘말 이해’를 마치 ‘말씀 이해’로 여긴 사례가 또 있습니다. 마태복음 16:19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즉 예수님의 말씀에 의할 것 같으면, 천국이 없는게 아니라 실제로 있으며 그 천국가는 문도 실제로 있습니다. 문제는 열쇠가 있어야 열린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열쇠 갖기를 요구합니다. 마태복음 19:27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과연 베드로의 이런 제안이 열쇠가 될 수 있을까요? 베드로는 모든 것을 예수님에게 다 드렸다고 하지만 그 어느 인간은 다 드릴 수가 없습니다.
천국 열쇠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으로 인해 성도는 모든 것을 다 예수님에게 빼앗기게 됩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 19:29-30)
지금 우리에게 있는 것들은 우리 것이 아니라 주님 것인데 우리가 얼마나 소유된 것에 미쳐있는 지를 느끼라고 주신 겁니다. 베드로가 ‘모든 것’을 주님에게 바쳤다고 하지만 이것은 ‘말씀’의 입장이 아니라 ‘말’의 입장에서 생각한 겁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다 바쳐도 결코 다 내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이 찾아오게 되면, 이제 뭘 바치고, 뭘 빼앗기고 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들이 있어도 그것이 주님이 주신 사랑과는 족히 비교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랑이란 주님께서 내 인생을 난도질 한다 할지라도 그 칼질 하나하나가 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해합니다. 이 사랑이 바로 ‘천국의 열쇠’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모든 것이 주님의 사랑을 가로 막고 있음을 감지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98강-예레미야 20장 1~6절(막힌 말씀)240407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0장 1~6절입니다. 구약성경 1078페이지입니다.
“제사장 임멜의 아들 바스훌은 여호와의 집 유사장이라 그가 예레미야의 이 일 예언함을 들은지라, 이에 바스훌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여호와의 집 베냐민의 윗문에 있는 착고에 채웠더니, 다음날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착고에서 놓아 주매 예레미야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 이름을 바스훌이라 아니하시고 마골밋사빕이라 하시느니라, 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너로 너와 네 모든 친구에게 두려움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그 원수의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네 눈은 그것을 볼 것이며 내가 온 유다를 바벨론 왕의 손에 붙이리니 그가 그들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옮겨 칼로 죽이리라, 내가 또 이 성의 모든 부와 그 모든 소득과 그 모든 귀물과 유다 왕들의 모든 보물을 그 원수의 손에 붙이리니 그들이 그것을 탈취하여 바벨론으로 가져가리라, 바스훌아 너와 네 집에 거하는 모든 자가 포로되어 옮기우리니 네가 바벨론에 이르러 거기서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너와 네가 거짓 예언을 하여 들린 네 모든 친구도 일반이리라 하셨느니라”
성경에 예레미야를 보게 되면 자꾸 무엇이 생각나야 하느냐 하면, 애굽에서 고생 많이 했던 히브리인들이 하나님의 간섭과 개입으로 애굽이라는 그 나라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요. 애굽에서 430년 동안 살았던 그들이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어디로 갈 건지, 어떤 계획이 있습니까? 이렇게 살겠다는 어떤 마음 다짐이 있습니까?
전혀 없어요. 그냥 모세 하나 따라 나왔고, 그리고 모세가 바로 왕과의 어떤 조치가 있어서, 그들은 모세의 하나님, 그들의 하나님이 아니죠, 모세의 하나님이 주신 그 지시, 그 뜻이 있어서 그 뜻을 믿고 따라 나온 겁니다. 그게 말하기예요. 모세가 그 백성에게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말을 할 때, 그들이 그 말을 듣고 왜 따라 나오죠? 우리가 어디 남의 말을 듣는 사람들입니까?
인간은 절대로 남의 말을 듣지 않아요. 남의 말을 이용하지요. 듣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자기가 커가면서 구축된 선입견같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선입견은 뭘로 구성되어 있는가. 그동안 들었던 것과 자기의 욕망이 정리해서 차곡차곡 쌓여있는 그러한 내용으로 되어있어요. 그걸 쉬운 말로 두 자로 고집이라고 합니다. ‘참, 너 고집 세다’라고 하는데, 이 세상에 고집없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집은 고집대로 챙기고, 좀 유도리(여유)있게 한다고 고집없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 사람은 위선자죠. 마치 고집이 없는 것처럼, 다 퍼주고 다 해주는 것처럼, ‘광주에서 대구까지 고속도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처럼, 뭐든지 해주는 것처럼 하지만, 그 또한 고집이죠. 그래서 인간은 남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고, 매일같이 자기가 한 말을 듣고, 자기만 들어요.
나에게서 나왔던 말은 도로 내가 회수하게 되는 겁니다. 받아들이는 거죠. 자기 말을 그냥 던지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오직 자기 말에만 귀를 기울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조금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예언을 하니까 1절에 보면 “제사장 임멜의 아들 바스훌은 여호와의 집 유사장(관리하는 사람)이라 그가 예레미야의 이 일 예언함을 들은지라” 이 사람이 예레미야를 때리고 체포했고 죄수 취급을 했습니다.
어디서부터 이상하냐 하면, 예레미야가 예언하더라도, ‘그래, 착각 많이 해라. 너는 너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지? 난 너의 말 안 들어’라고 그냥 무시하면 되지 않습니까? ‘구름 타고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라고 하면 듣는 사람들이 ‘그래, 많이 해. 아이고, 구름 타고 오시면 재미있겠네. 너나 믿으세요’라고 하면 끝나잖아요. 그런데 왜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께 분노하고, 또 여기 바스훌이라는 사람은 예레미야에게 왜 분노하는가요?
이게 굉장히 이상한 대목이에요. 남이 이상한 소리 하면 그냥 무시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들은 무시를 못 하고 있습니다. 이게 하나님이 말씀을 전하는 현장에서 필히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누가 선지자가 이야기하면, 또는 내가 이야기하면, 다들 이게 말씀이 아니고 말이에요. 그런데 말이 언제 말씀으로 바뀌냐 하면, 내가 하는 그 말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그것이 폭력으로 나에게 돌아올 때, 그것이 바로 선지자나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말이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나온 겁니다.
그 이유가, 그 내용, 말씀 내용의 핵심이 십자가에 고난받는 내용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 보면 사도바울의 하는 말이,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했어요.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그 말은, ‘우리 같은 인간이니까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좋게 좋게 이야기할게’라고 되면 그건 말씀이 아니고 말이에요. 설득하려는 말. 꼬셔서 예수 믿게 하려는 꼬시는 거. 그러나 전도하는 것은 사람이 못합니다. 전도는 인간의 말이 못하고요, 말씀이 해야 해요. 말씀이 전도할 때, 반드시 그쪽의 심기를 다 뒤집어 놔야 해요. 근원까지.
그러면 여기 예레미야가 이야기한 것이 바스훌이라는 사람의 속을 뒤집었는가. 인간이 제대로 하자, 바르게 삽시다, 이렇게 해서 뒤집어진 것이 아니고, 예레미야의 예언이 뭐냐면, 너희들이 살고 있는 이 자리가 불바다가 된다고 이야기한 거예요. 이건 인간에게 어떤 가능성이나, 바르게 살면 어떤 희망이 있다고 되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끝났어. 끝났어. 우리는 이제 다 죽은 거야”라는 그 이야기 한 거예요.
이게 말이 아니고, 말씀입니다. 말은 우리가 잘해보자는 것은 말이고요, 가장이 되어서 식구들 모아놓고 ‘우리 한번 잘해보자. 나도 반성하고, 나도 담배 끊을게. 앞으로 술도 끊고 음주운전도 안 하고 잘해보자’라고 하면, ‘우리 아빠 최고!’라고 이런 식으로 공익광고에 나와요. 서로서로 인간 대 인간이 의견 맞추면 못 할 것이 뭐가 있어요. 서로 양보하고, 서로 약간씩 마음 낮추면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잖아요. 이게 말이에요. 말.
그리고 인간들은 그런 말들에 의해서 살아왔어요. “너 끝났어”라는 이건 아니죠. 그건 사람에게 하면 실례죠. “너 안 돼. 끝났어” 그러면 그 사람과의 대화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원칙이 있습니다. 뭐냐. 희망이 없다면 그 시스템이 스스로 파괴되게 만드셨어요. 이 세상이.
악마가 인간에게 희망을 줬는데, 인간은 그 희망이 끊어지게 되면, 희망이 없으면, 그 시스템 자체가 그냥 와장창 다 무너지게 되어있습니다. 이게 바로 말씀이에요. 따라서 내가 말을 원하는지, 말씀을 원하는지, 한번 스스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희망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구겨버리고, 뭉개버리고, 주저앉는다는 이 취지에 대해서, 우리가 흔쾌히 고맙게 여기고, 감사히 여기는지를 자신에게 한번 되돌아보시길 바랍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우리에게 작은 희망마저 ‘당신이 선지자면 선지자지, 우리에게 그 작은 희망마저 틀어막아 버리면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라는 것인가’라는 반항이 나온다면, 그 사람은 평소에 말씀과 상관없이 남들 듣고 좋은 말 안에서 자기 자신이 살아온 겁니다. 한가지 예를 들게요. 마태복음 8장 34절에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가다라 지방의 무덤에서 사는 귀신 들린 두 사람을 만나는데, 먼저 귀신이 예수님을 알아봤어요.
참, 귀신같죠. 귀신은 그냥 알아봐요. 그냥 흙 만져보고, 맛보면서 ‘이건 악지(惡地) 중에 악지군’ 하면서 알아보는 게 아니고, 파묘 해서 귀신 나오는 게 아니고, 그냥 딱 보면 귀신은 주님을 알아요. 인간은 바보 등신이라 모르고. 인간은 자기 챙기는 것만 관심 있어서, 주님이 온 지, 부처가 온 건지 모르고 귀신은 알아요. ‘아직 때가 안 되었는데, 우리를 멸망하러 왔습니까?’
벌써 귀신을 어떻게 조치할지를 귀신들이 알아요. 그래서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귀신 들린 자를 쫓아낼 때, 갈 데 없다고 하니까 돼지에게로 가라고 해서 멀쩡한 돼지 이천 마리 정도가 물로 달려가서 몰사했다는 이야기죠. 그다음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 8장 33~34절에 “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형님, 제발 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못 살겠습니다’ 왜? 돼지가 죽었어요? 그렇습니까? 이 말의 세계에서는 말씀은 부담되는 거예요. 감당을 못해요. 말의 세계는 희망이 있어요. 비전이 있고. 계획하고 목표하는 것이 의미가 있어요. 그러나 말씀의 세계는 그 처소, 장소, 자리 문제를 근원적으로 외쳐버려요. “안 된다. 끝났다. 백날 살아도 행복은 없는 거야”라는 이게 말씀의 세계입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예수님께서 인간세계에 말이 아니고 말씀을 준 이유는 인간세계가 순수하게 거짓이기 때문에 그래요. 거짓의 순수함. 0.1퍼센트의 진리도 안 들어있는 세계. 그걸 가지고 성경에서는 옛 세대라고 해요. 이 눈에 보이는 세대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는 일단 이 세대가 진리라는 것은 손톱만큼도 없다는 거, 완벽하게 어둡다는 거, 빛은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통보해야 해요.
통보하시는 이유가 뭐냐. 오늘 본문에 예레미야도 마찬가지인데, 통보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 또는 새세대, 천국 하늘나라는 자물쇠로 잠겨있어요. 여러분 이거 한번 생각해 보세요. 천국 가는 문이 있어요. 있는데 잠겨있는 문이에요. 문이 없는 게 아니고 있는데, 잠겨진 문으로 문이 있어요. 문이 있는데 못 들어가요. 그러면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뭐냐.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16:19)
열쇠가 있어야 들어간다는 겁니다. 완전히 약 올리는 거죠. 천국 가는 문이 없는 게 아니고, 다시 말해서 천국이 있어요. 이쪽 말고 저쪽 세계에 있는데, 문도 있어요. 있는데 이게 막혀 있어서 아무도 못 가요. 못 가는데, 그러면 그냥 못 간다고 하면 끝나는데, 열쇠가 있어야 들어간다는 겁니다. 요즘 같으면 비밀번호를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들 생각은 어떻습니까. 비밀번호를 알아서 ‘띠,띠,띠,띠,띠’ 누르고 들어가면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교회에서 비밀번호를 알려줘요. 예수님 피가 어떻고, 뭐가 어떻고. 그러면 ‘예.수.님.의.피’라고 누르고 나가면 지옥입니다. 상당히 재미있는 이야기인데, 지옥이 기다리고 있어요. 예수님께서 아무리 말씀을 이야기해도, 듣는 인간은 말로 이해하기 때문에, ‘그러면 비밀번호는 어떻게 됩니까?’라고 나오는 거예요.
따라서 이 문제를 예레미야 오늘 본문에서는 어떻게 해결하는가 보세요. 이렇게 합니다. 예레미야가 하루 있다가 그다음 날 나왔어요.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바스훌아, 너의 이름이 뭐야?’라고 예레미야가 묻는 거예요. ‘바스훌이지, 뭐긴 뭐야’라고 답하는 거예요. 바스훌의 뜻이 뭐냐 하면 ‘세력 확장’이라는 뜻이에요. 그러고 난 뒤에 3절에 보면 “예레미야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 이름을 바스훌이라 아니하시고 마골밋사빕이라 하시느니라”라고 나옵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마골밋사빕’은 ‘두려움의 확장’이에요. 내 인생을 내가 지켜내기 위해서 버티려고 했을 때, 그래서 선지자가 아무리 말을 해도 그것은 나에게 유리한가, 불리한가만 따져서 말로 듣는 거예요. 선지자는 어떻게 하라는 말이 아니고, 이 장소가, 바닥 자체가 이미 끝났다는 거예요. 이미 멸망 당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멸망 당했다는 것을 증거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게 뭐냐. 예레미야 자기를 때리고 가둔 바스훌, 네가 해라. 이제는 바스훌이라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두려움이 얼마나, 어떻게 이 주변으로 몰려와서, 결국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는 말 그대로 이 세상이 멸망하는지를 그는 끝까지 증인 노릇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본문 4~6절까지 길게 나와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바스훌은 그때까지 죽으면 안 돼요.
생생하게 살아서, 두려움이 계속해서 바스훌 쪽으로 두려움이 계속 오는 거예요. 이 바스훌이 큰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하나 이야기에 대해서 다른 사람은 시비 걸지 않았는데, 자기가 시비 걸음으로 말미암아, 예레미야가 하는 그 말 내용 그대로, 실제로 저주스럽게, 두려움의 확장으로써 실제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온몸으로 체험해야 할 새로운 중심 자리에 바스훌이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기의 말씀에 대한 내용 역할을 은근슬쩍 바스훌에게 떠넘긴 샘이 되죠. ‘네가 나를 때렸어? 네가 나를 욕했어? 네가 나를 가두었지? 이제 네가 해라, 선지자’라는 거죠. 네가 나를 때리고 가두든 뭘 하든, 내게 주시니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다는 거예요. 이게 예레미야의 뜻이에요. 지금 우리 둘이 잘해보자, 바르게 살자는 그런 문제가 아니고, 우리 인간은 나중 문제고, 하나님이 먼저 계셔서 말씀을 던진 이상, 그걸 취소시킬 위인이 이 세상에 없어요.
여러분, 이건 정말 인생 참 편하지 않습니까? 나만 편한가요? 그러면 편한지 안 편한지 시건방지게 제가 여러분에게 테스트를 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7~30절을 보겠습니다. 일단 미리 말씀 드려볼게요. 이 말을 듣고 ‘목사님, 너무 편해요. 너무 고마워요’라고 될지 제가 마태복음 19장 27~30절까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라는 이 말씀, 어떻게 마음이 많이 편해졌습니까?
이 본문을 본 사람들이 빨리 후딱 지나가요. ‘나, 안 들었다~~안 들었다’라고 하면서 후딱 지나가요. 베드로 하는 말이 모든 걸 버렸다고 해요. 자기 딴에 모든 걸 버렸지요.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모든 걸 버렸다는 것은 말이에요. 열쇠가 아니에요. 그건 유사 열쇠. ‘삐비비비빅’하는 비밀번호, 유사 열쇠예요. 진짜 열쇠는 말씀이 열쇠예요.
세상의 모든 것이, 미래의 계획이, 우리가 걱정 안 해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갑니다. 걱정될 리가 없죠. 걱정이.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오케이? 오케이~ 이러면 끝날 문제인데. 그동안 뭔가 내가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걸 한 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이 빼앗기는 게 사랑이에요.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하시는 분은 내게 뭐가 있다면, 그것이 주님의 사랑을, 그분의 사랑을 가로막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베드로 말이 ‘우리가 모든 것을 드리면 되잖아요’라고 하는데, 웃음이 나올 뿐이죠. “네가 나에게 뭘 준다고?” “예!” “너는 너 자신을 몰라. 절대로 너는 빼앗기기 전에는 나에게 모든 것을 줄 위인이 아니다. 네가 바스훌이야”
항상 인간은 자기 걱정이 우선이에요. 자기 염려가 우선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냥 갖고 계세요. 주께서 알아서 다 빼앗아 줍니다. 괜히 내 것을 보관하려고 하니까, 믿음은 믿음 대로 자기가 보기도 웃음거리 됐고, 가지고 싶다고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대만 지진 봤죠? 이만한 돌덩이 내려오면 다 부서집니다.
우리 인생을 회 치는 도마라고 생각하고, 주님이 우리를 놓고 그 위에 회를 치시든지, 초장에 찍어 드시든지, 주께서 하시는 대로 난도질당하는 그 즐거움이, 그 칼질 하나하나가 사랑의 칼질이에요. 우리는 빼앗기기 전에는 사랑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우리 쪽에서 조종하기 때문에. 얼마면 돼? 얼마? 이런 식으로 조정하기 때문에 그건 아니죠.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내가 다 가져간다. 대신 너에게 영생 줄게”라는 말씀에 동의한 제자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들은 아무리 주님이 열쇠 이야기해도, 열쇠에 관심 없습니다. 열쇠가 좋긴 좋지만, 내가 현재 가진 것이 열쇠보다 지금은 더 급박해요. 나는 가진 거 없으면 나다움이 없어지니까 못삽니다. 이게 바로 바스훌이에요.
그러나 방금 이야기한 것이 바로 신약성경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인간이 뭐라는 것을 이미 다 아시기 때문에, 아시기 때문에 느긋한 마음으로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현재, 우리가 내 것이라고 여기는 목숨이든 자식이든 뭐든, 형제든 자매든, 내 것이라고 여기지 말고, 주님의 것을 내 것이라고 여기게 함으로써 내 본색이 얼마나 바스훌이며, 얼마나 나는 세력 확장에 팔려있으며, 얼마나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이 모든 재산을 넌지시 한 번 제공해 보신 거예요.
이걸 통해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죄인 중에 괴수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또다시 희망 없는, 희망을 가질 이유도 없는, 그러면서도 다 이루었다는 그 속에서 사랑을 느끼며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으로 내 것 있다는 것이 주님 앞에 얼마나 죄인으로 들통나는지요. 주께 다 드릴 수 있다는 그 마음이 있다는 자체도 주제 파악도 못 한 건방진, 교만한 말인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해주시고 뭐를 가지나, 내놓으나 상관없이, 우리는 주의 말이 아니라 말씀대로 진행됨을 오늘도 찬미하고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