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의 자리
2024년 3월 24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8:18-23
(18:18) 그들이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자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모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오라 우리가 혀로 그를 치고 그의 아무 말에도 주의치 말자 하나이다
(18:19) 여호와여 나를 돌아보사 나로 더불어 다투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옵소서
(18:20) 어찌 악으로 선을 갚으리이까마는 그들이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구덩이를 팠나이다 내가 주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이키려 하고 주의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하여 선한 말씀 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18:21) 그러하온즉 그들의 자녀를 기근에 내어주시며 그들을 칼의 세력에 붙이시며 그들의 아내들은 자녀를 잃고 과부가 되며 그 장정은 사망을 당하며 그 청년은 전장에서 칼을 맞게 하시며
(18:22) 주께서 군대로 졸지에 그들에게 임하게 하사 그들의 집에서 부르짖음이 들리게 하옵소서 이는 그들이 나를 취하려고 구덩이를 팠고 내 발을 빠치려고 올무를 베풀었음이니이다
(18:23) 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죽이려 하는 계략을 주께서 다 아시오니 그 악을 사하지 마시며 그 죄를 주의 목전에서 도말치 마시고 그들로 주의 앞에 넘어지게 하시되 주의 노하시는 때에 이같이 그들에게 행하옵소서
‘어린양’ 유월절 때에 난데 없이 등장되는 하나님의 일의 포인트입니다. 인간 대 인간을 견주어서 우수한 쪽이 승리하는 것이 인간 세계에서의 상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꽂아넣은 ‘어린양’은 인간의 자신들의 몸을 매개로 한 모든 가치체계를 와르르 무너뜨립니다. 즉 ‘사람의 가치’냐 아니면 ‘어린양의 가치’냐를 보라는 겁니다.
어느 것이 현실 자체를 세우고 무너뜨리는 구심점이냐를 묻는 겁니다. 어린양의 등장은 일단 사람은 아니다는 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왜 어린양의 되고 인간이 안되는 걸까요? 그것은 인간은 자신의 자리를 파악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건이나 현실 구성의 주인공이 못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예레미야는 이 어린양의 취지를 계속 이어받고 있습니다. 즉 선지자가 아닌 여타의 사람들은 누가 자기를 죽이거나 모함하거나 해를 입혀도 그것으로 세상이 아주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만한 능력자들이 아닙니다. 하지만 선지자의 경우는 예외가 됩니다. 선지자가 끝나는 신약 시대에는 어떻게 될까요?
고린도후서 5:16에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의미있는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예수님을 볼 때에 육체대로 보는 것은 보이는 모든 이들이 자신을 보면서 육체로 보기 때문이요 그런 안목으로 남들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육체로 세상과 현실을 보게 되면 ‘유월절의 양의 피’가 자기 집안의 장자를 죽이는 연유가 밝혀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를 건드리면서 유다 나라 자체가 온통 망한다는 사실관계가 파악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국의 전설 이야기를 하나 거론하겠습니다. ‘삼천갑자 동방삭’ 이야기입니다.
고갯길에 넘어졌는데 그 고갯길의 전설은, ‘한 번 넘어지면 3년 밖에 못산다’입니다. 갑자기 3년 시한부가 된 동방삭은 고민하지만 그 신기한 고갯길을 여러 번 넘어지므로서 무려 18만년(삼천갑자)이나 살았다는 전설의 인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 ‘신기한 고갯길’의 한계와 무한성을 주목해야 합니다.
‘넘어지면 수명이 3년’이 바로 한계성입니다. 그런데 이 한계를 반복하면 무한성이 됩니다. 한계가 도리어 무한이 되는 겁니다. 분명 예수님은 육의 한계를 지니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육의 한계성을 믿음으로서 영생을 얻는 겁니다. ‘한계성→무한한 영생’으로 나아가는데 있어 필히 ‘선지자의 죽음’과 관련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 절차를 보여주는 것이 삼손 이야기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입어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는 블레셋의 권력을 무너뜨리고 압제 당하는 이스라엘을 해방하는 것이 사사인 삼손의 할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적 말고 과연 삼손 본인은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개인적으로 어떤 관계로 이어져 있느냐 하는 겁니다.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의 손에 빠지겠나이다 하나님이 레히에 한 우묵한 곳을 터치시니 물이 거기서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은 엔학고레라 이 샘이 레히에 오늘까지 있더라”(삿 15:18-19)
하나님께서 승리자인 삼손을 자동적으로 자기 승리에 만끽하도록 해주지 않습니다. 그는 목이 말라 본인이 죽게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이 적들에게만 겨냥되도록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을 통해서 사사마저 죽음에 이르게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적인 내용이 선지자를 통해서만 제대로 알려지고 밝혀진다는 겁니다.
그것은 곧 ‘죽었다가 살아나야 한다’는 겁니다. ‘죽음’이 필히 전제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즉 선지자가 본인도 모르는 자신의 바탕과 자리와 접선되기 위해서는 그는 반드시 죽음을 경험해야 한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의 적들은 웅덩이를 파고 그 속에 선지자를 집어넣어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선지자는 적들의 이런 시도의 이유를 전부다 알지 못합니다. 그 선지자는 자동적으로 다음과 같이 선포해 버립니다. “날 건드리는 자는 예외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는다”입니다. 이것은 분명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조건이 있습니다. 선지자 본인이 자기에게 일어나는 현상과 관련성 있음을 알아야 한 겁니다.
즉 자기마저 마땅히 죽어야 하는 존재라는 겁니다. 유월절날, 애굽 사람들의 장자들이 죽어나갔다는 사실만 주목할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인들의 맏이는 멀쩡했습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왜 내 아이는 여전히 멀쩡하냐”고 말입니다. 멍쩡한 게 당연한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파악해야 합니다.
삼손의 경우는 ‘수수께끼’에 해당됩니다. 시작과 끝을 다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사의 그 자리의 기능을 위해 삼손을 살려주었습니다. 이점은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있어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레미야가 다른 사람보다 우수해서 예레미야를 건드리면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에 들어와서 골로새서 1:27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그리고 그 비밀은 에베소서 1:4에는 다음과 같이 소개됩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즉 구약의 ‘수수께끼’는 신약에 와서 비밀이 됩니다. 그 비밀의 최종 자리는 ‘창세 전까지’ 이릅니다.
즉 예수님 이외에 그 어떤 인간도 자기 순종으로 자기 죄를 씻지 못합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순종으로 죄 사함을 얻습니다. 성도의 바탕은 결코 본인이 아닙니다. 창세 전의 비밀인 예수님이 바탕이 되십니다. 성도는 자신을 위해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한 등장인물로 쓰여질 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때문에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세상도 다 무너집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더는 자신의 자리를 자기 것으로 돌리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96강-예레미야 18장 18~23절(선지자의 자리)240324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8장 18~23절입니다. 구약성경 1080페이지입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자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모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오라 우리가 혀로 그를 치고 그의 아무 말에도 주의치 말자 하나이다, 여호와여 나를 돌아 보사 나로 더불어 다투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옵소서, 어찌 악으로 선을 갚으리이까마는 그들이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구덩이를 팠나이다 내가 주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이키려 하고 주의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하여 선한 말씀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그러하온즉 그들의 자녀를 기근에 내어주시며 그들을 칼의 세력에 붙이시며 그들의 아내들은 자녀를 잃고 과부가 되며 그 장정은 사망을 당하며 그 청년은 전장에서 칼을 맞게 하시며, 주께서 군대로 졸지에 그들에게 임하게 하사 그들의 집에서 부르짖음이 들리게 하옵소서 이는 그들이 나를 취하려고 구덩이를 팠고 내 발을 빠치려고 올무를 베풀었음이니이다, 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죽이려 하는 계략을 주께서 다 아시오니 그 악을 사하지 마시며 그 죄를 주의 목전에서 도말치 마시고 그들로 주의 앞에 넘어지게 하시되 주의 노하시는 때에 이같이 그들에게 행하옵소서”
출애굽 아시죠? 유월절 양이 있느냐 없느냐로 절단난 사건이 유월절 사건이었습니다. 유월절 사건은 애굽에서 벌어진 이스라엘과 애굽 사이에 차이를 내기 위해서 이스라엘 쪽에서 이스라엘이, 히브리인인 더 우수하고 낫다는 증거를 찾지 않았어요. 하나님께서 너는 훌륭하고 너는 못하다는 식으로 그 둘을 가려낸 것이 아니라, 난데없이 어린양 하나의 피를 바른 집과 피가 없는 집 사이를 두고 한쪽은 통곡 소리가 들리게 하시고 한쪽은 맏이가 멀쩡하다는 사실에 대해서 기쁨이 넘치는 가정으로 만들었습니다.
어린양의 피가 개입되는 사건을 통해서 나의 큰아들은 멀쩡할 거라는 사실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거죠. 어쩌면 여러분의 큰 자녀분은 지금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강릉에 계십니까? 멀쩡하게 안녕하십니까? 우리가 뭔가 어제까지 멀쩡했으니까, 오늘도 멀쩡해야 한다는 이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주님께서는 좌절시키십니다.
예레미야의 등장은, 예레미야가 이스라엘 속에 등장했다는 말은 어린양의 취지가 안 죽고 여전히 이스라엘과 동행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럴 때 예레미야를 사람들은 뭐로 보느냐 하면 ‘저 예레미야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다. 이것이 뜻하는 것은 우리가 때리면 그는 맞을 것이고, 우리가 그를 죽이면 죽는다는 것이 당연하다. 왜? 똑같은 인간이니까’라고 그렇게 그들은 예레미야에 대해서 오해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6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예수님이 자기를 찾아오기 전과 후가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예수님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것은 누구나 예수님을 ‘인간이다, 목수의 아들이다’라는 그러한 판단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거예요. 예수님에 대해서 육체대로 아는 것 말고, 그것이 틀렸고 아니라는 말을 할 수 있는 다른 그리스도의 안목이 필요한 겁니다. 그런 안목이 필요하다면, 예수님의 인물이 잘생겼다든지, 키가 크다든지, 아는 것이 많다는 그 정도 되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을 후벼파는 거예요. 아주 치아를 뽑듯이 예수님을 이 땅에서 뽑아내는 겁니다.
예수님을 뽑아내고 난 뒤에, 예수님이 뽑힌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를 봐야 해요. 보통 인간을 뽑아서 무덤에 넣으면 인간은 그냥 무덤에 시신이 되어서 썩습니다. 이게 모든 인간의 동일한 점이에요. 그래서 인간은 살아있을 때도 육이지만, 역시 죽어서도 최후에 모습은 육으로 마감되었다, 육이 마지막이다. 따라서 예수님이나 나나 그리고 다른 사람이나 다를 바 없다. 똑같은 인간일 뿐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생각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을 무덤에 넣었는데, 예수님의 무덤이 빈 무덤이 되었어요. 시신이 없어요. 부활 되신 겁니다. 단순히 소생되었으면, 죽었다가 그냥 육으로 소생이 되었다면 잡아서 또 죽이면 됩니다. 전에는 예수님을 체포할 수 있었는데, 가롯유다가 알려주고 군병들이 잡아서 포승줄로 묶고, 채찍으로 때릴 수 있고, 뺨을 때리고, 얼굴을 가릴 수도 있었는데, 죽었다가 살아난 예수님은 그다음부터는 인간 쪽에서 찾고자 하고 붙잡고자 해도 주님은 나타나지 않아요.
여기서 우리는 뭘 알 수 있느냐. 예수님의 진짜 자리를 우리가 오해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자리와 동일한 자리를 갖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우리 인간들이 자기 생각만 해서 그런 거죠. 자기 한계에 부딪힌 겁니다. 주님은 육적인 분이 아니고 영적인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이 영적인 분이라는 것은, 처음의 인간도, 잃어버린 그 인간도, 영적인 요소가 가미된 존재로서 하나님이 창조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아담이 범죄 함으로, 인간은 그 생명나무와 더불어 살아야 할 인간이 그 자리를 못 찾고 있고, 못 돌아갈 형편에 있습니다. 우리 처지가, 우리 자리가 이래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 본래의 자리가 과연 육이 전부냐, 살다가 죽는 게 인간의 모든 것이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서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결코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장차 오실 예수님과 동일하게 유월절에 일어났던 그 사건의 취지를 살리는 그 중간에 예레미야를 하나님께서 선지자로 보내셨습니다. 보내셔서 예레미야의 존재 의미는 뭐냐. ‘예레미야야, 너는 이미 죽은 자다’ 그래서 여기서 설교가 어렵게 되는 거예요. 인간의 기존 안목은 그대로 있고, 성경은 육적이 아니라 영적으로 해석을 해야 하니까, 중간을 이어 나가는 그 단어 하나하나가 인간 쪽에서 가능한 안목이 전부 차단되고 막혀버리는 내용을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산자가 죽은 자를 건드리니까, 죽은 자가 산 자를 건드린다. 내가 살아있는데, 살아있는 내가 예수님을 죽였는데, 이미 예수님은 죽어버렸는데, 죽어버린 자가 살아있는 나를 건드렸다는 말은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실은 내가 죽어있고, 우리가 죽인 자가 진정 살아있다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내가 왜 죽은 자인가를 하루하루 확인하는 차원에서 하루하루 목숨이 연장되는 겁니다.
‘이렇게 죽나?’ 하루 더 살면 ‘이렇게 죽을 거냐?’ 결국 우리는 죽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 가는 거예요. 그러면 그 죽는 이유는 어디 있느냐. 예수님이 죽으셨던, 인간에게 맞아 죽으셨던 그 자리, 또는 선지자가 거반 죽게 되었던 구덩이 자리, 그 자리를 일부로 하나님께서 말씀 성취로 그 자리를 마련해주신 겁니다. 그리고 선지자로 하여금 특수한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오늘 설교가 좀 난해하더라도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난해하게 들어가기 전에 먼저, 여러분이 알기 쉽도록 말씀드리기 위해서 ‘삼천갑자 동방삭’이라는 중국의 이야기 있지요? 이 사람이 누구냐 하면 우연히 언덕을 내려가다가 넘어졌어요. 넘어졌다가 그 고갯길의 불길한 전설이 뭐냐. 한번 넘어지면 3년밖에 못 산다는 거예요.
그래서 고민 고민이 되어서 집에 와서 ‘아, 이제 3년밖에 못 사는 시한부 인생인데 어쩌면 좋으냐’라고 하는데, 다른 사람이 듣고 있다가 ‘여러 번 넘어지면 되잖아’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천 번 넘어져서 3천 년 살았다는 이야기가 삼천갑자 동방삭 이야기예요. 여기에서 우리가 그 이야기에서 뭘 주목해야 하느냐 하면, 고갯길의 그 자리의 특수성을 한번 보자는 말이죠.
도대체 그게 어떤 자리이기에, 3년밖에 못 사는 거, 아주 절망적이고 저주받을 고갯길이 어떻게 3천 년까지 이어지는지. 제대로 전설을 만들려면 한 번 넘어지면 두 번 이상은 못 넘어진다는 그런 법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 법을 안 만들어서 3년보다 더 많이 살게 되었어요. 이건 옛날이야기지만, 여기 구약에서는 실제로 이상한 지점을 마련해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삼손 이야기입니다. 사사기 15장 14절에 보면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르는 동시에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삼손에게 임하매 그 팔 위의 줄이 불탄 삼과 같아서 그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 삼손에게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임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묶었던, 자기를 죽은 자로 만들었던 줄들을 한꺼번에 다 터지게 만들었고 턱뼈를 보고 손에 잡고 그것으로 블레셋 사람 1천 명을 죽였고, 그리고 노래를 부릅니다. 나귀의 턱뼈로 한 무더기, 두 무더기, 나귀의 턱뼈로 내가 일천 명을 죽였다는 노래. 그다음에 그 턱뼈를 던져버렸는데, 여기서 삼손이 심히 목마름으로 이제는 적들 때문에 죽는 게 아니고, 목말라서 죽게 생겼어요.
그래서 18절에 보면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받지 못한 자의 손에 빠지겠나이다”라고 하니까 19절에 “하나님이 레히에 한 우묵한 곳을 터치시니 물이 거기서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샘 이름은 엔학고레” 이것은 ‘부르짖은 자의 샘’이라는 이 명칭을 말하고 삼손이 20년 동안 블레셋 사람들이 있을 때 사사로, 지배자로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시작을 하나님의 신으로부터 시작해요. 하나님의 능력부터 시작합니다. 이것은 육적이 아니고 영적이에요. 영적인 것이 왔을 때, 영은 인간과 만났을 때, 인간에게 어떤 특이 현상을 보여주는 지를 보이는 겁니다. 우선 성령, 하나님의 능력을 받았으니까, 일단은 하나님의 영을 받았으니까, 하나님의 원수에 대해서 징벌하고, 공격하고, 전쟁을 벌여서 승리하도록, 그렇게 삼손을 통해서 일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거기서 자기 백성을 건지는 일을 하는데, 문제는 삼손이 그 일을 하면서 본인이 죽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죽느냐. 목말라 죽게 된 겁니다. 여기서 하나님 일의 절차가, ‘하나님의 영이 임했다 -> 적들을 이겼다’라고 사람들은 거기까지만 생각해요. 그러나 그 와중에 누구도 죽을 지경이냐 하면, 구원자 역할을 하는 사사 본인도 하나님의 성령으로 하시는 구원의 일에 참여했다면, 본인도 죽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여기서 말해줍니다.
본인도 죽어야 해요. 그러면 삼손은 이걸로 끝났느냐. ‘삼손은 결국 목말라 죽었다’라고 그렇게 되느냐. 그게 아니고, 사람들은 그때까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영이 어떤 인물과 결합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뭘 하고, 그 사람이 뭘 했다’라고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야기 절차가 더 가보면 삼손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삼손이 죽게 된 그 장소, 그 장소를 친히 치시니까, 거기서 목말라 죽어야 할 삼손까지 소생케 하는 샘물이 터져 나온 거예요.
이것은 없는 장소예요. 이걸 압축하면 하나님의 신이 작동할 때는 인간의 육이 다른 사람을 치고 이기는 인간 싸움의 투쟁 자리에 있으면서 미처 인간이 몰랐던, 도대체 내가 어떤 위치, 어떤 자리에서 지금 싸우고 있느냐를 놓치기 쉽다는 이 말이죠. 나는 잘났고, 저는 못났기 때문에, 나는 저 사람을 치고 이긴다는 이것만 생각했지, 과연 내가 살만한 가치가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 못 하고, 승리하고 잘 나갈 때는 인간은 이걸 놓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없는 장소를 만들어서 삼손을 새로운 샘물의 생수로 회복해서 구원하도록 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뭘 하는 것이 아니고, 특히 선지자 같은 경우에는 선지자가 뭘 하는 것이 아니고, 선지자를 되게 하는 그 자리가 있어요. 그 자리가 선지자를 결정짓는다는 거, 선지자의 기능을 하게 했다는 겁니다.
이것을 사사기의 삼손 시대에는 ‘수수께끼’라고 합니다. 비밀이죠. 수수께끼가 어디서부터 시작되고, 어디가 그 최종 목적지인지를 삼손에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삼손은 그저 과정이에요. 삼손이라는 사나이 하나 신나게 흔들고 자시고 하면서, 어디서 왔는지 시작도 감춰져 있고, 끝도 감춰져 있고, 그렇다고 이스라엘이 그걸로 영원히 해방된 것도 아니고, 나중에 이스라엘은 또 망하거든요.
그러니까 이건 중간 과정, 중간 과정을 보여주면서, 수수께끼 같은 과정만 살짝 보여준 겁니다. 그게 선지자의 입지예요. 선지자 시대의 한계입니다. 오늘 본문의 예레미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레미야는 오늘 본문에서 이렇습니다. ‘너희들이 감히 나를 죽이려고 구덩이를 파? 너희들 나 건들이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만약에 나를 건들면...’
그러면서 오늘 본문21~22절에 보면 “너희들 아내는 과부가 되고, 자녀를 잃고, 장정은 사망을 당하며, 청년은 전쟁에 가서 칼에 맞아 죽어라. 군대가 너희들에게 졸지에 덮쳐서, 너희들은 다 멸망한다. 그리고 저주가 너희를 따라 붙여서, 너희를 다 적 앞에 엎어지고, 주님 앞에 너희들은 다 좌절당한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뭐냐? 너희들이 감히 나를 죽이려고 구덩이를 팠다는 거예요. 예레미야 나를 죽이려고 한 거예요. 여기서 예레미야의 한계가 들통납니다. 예레미야는 자기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자기를 건들면 이런 결과가 주어진다는 겁니다. 과연 예레미야를 건드려서 그런 결과가 주어질까요, 아니면 예수님을 건드릴 때 이런 결과가 주어지겠습니까?
아까 삼손 이야기처럼, 예레미야도 하나의 자기에 대해서 자기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자기가 선지자 자리 그 전부에 대해서 모르고 있어요. 그런데 신약에 오면 드디어 그것이 풀립니다. 그걸 구약에서는 수수께끼라 하지만, 신약에서는 비밀이라고 합니다. 비밀. 무슨 비밀? 창세 전의 비밀. 그러니까 오늘날 성도는 삼손보다 위대하고, 예레미야보다 위대해요.
왜냐 하면 성도가 알고 있는 그 원천, 그 자리가 창세전부터 예정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창세전부터. 예레미야는 엄마의 태에서 나올 때 선택받았죠? 예레미야는 그렇게 알고 있어요. 그러나 성도는 에베소서 1장 4절에 의해서, 성도는 창세전부터,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안에서 선택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말은 나로 하여금 인간 되라고 선택한 것이 아니고, 나로 하여금 예수님 이야기에 등장인물로 선택되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창세전에 선택된 거예요. 지금 예레미야 오늘 본문같은 경우에는 ‘너희들 나 건들었지? 꾀를 내서 나를 잡겠다고? 잡아 죽이자고? 너희들 나 잘못 건들었어. 나 건들면 너희들 다 망해’ 현실은 망한 거 맞아요. 망한 건 맞는데, 아주 망하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예레미야는 결국 애굽에서 본인도 죽습니다. 죽고 난 후에 예레미야는 부활하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는 무덤에서 부활하지 않았어요. 무덤이 어디인지 몰라요. 모세도 죽고 난 후에 부활하지 않았습니다. 부활이 첫 열매는 엘리야도 아니고 모세도 아니고 에녹도 아니에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왜 그러냐 하면 예레미야 선지자, 욥, 이런 선지자가 대단하지만, 그들은 율법의 온전함까지, 창세전 내용까지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의 일부입니다. 주께서 시킨 대로 했지만, 그들이 시킨 대로 한 그 공로로 그들이 구원받는 것은 아니에요. 시킨 대로 했지만 정작 모세나 엘리야 같은 경우에, 그들은 나중에 알게 되었어요. 본인은 하나님이 시킨 대로 했지만, 여전히 자신들은 아무리 해도 못 하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내 죄를 다 씻는 십자가 죽음은 내 몫이 아니고 예수님 몫이라는 사실을 변화산에서 그들은 알고 예수님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내 위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위주로 돌아가고, 세상은 내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거, 이것이 두 자로 ‘비밀’입니다. 끝으로 마가복음 4장 11절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마가복음 4장 10절~12절에 보면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로 더불어 그 비유들을 묻자오니,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자기가 아는 거, 자기가 행한 거, 자기가 하나님이 시킨 대로 해서 죄사함을 얻지 못합니다. 어떻게든 하나님에게 순종해도 죄사함을 얻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님이 아버지께 순종함으로 그 여파로, 결과로, 열매로, 우리가 죄사함을 얻게 된 겁니다. 이게 바로 유월절 어린양의 원칙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성도에게 그 결과가 주어지는 것은 뭐냐? 그냥 그 비밀을 아는 자로서 감사하면 되죠. 왜냐 하면 지옥을 통과하는 자만이 참된 것을 말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미래가 되며, 그 미래는 이미 예수님께서 다 끝내버린 우리의 과거가 됩니다. 그러니까 육으로 알던 것을 영으로 알려고 하니까, 인간들이 쓰는 표현력 가지고서는 늘 이렇게 한계가 있는 거예요.
죽은 자인데, 죽은 자 맞는데, 내가 죽은 자라는 것을 아는 것으로 인해, 이미 우리는 죽었다가 산 자가 되는 겁니다. 참,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 정신병자라는 소리를 들었거든요.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이 정신병자같은 세계에 대해서 그런 소리를 듣거든, 그게 바로 선지자가 들었던 ‘저거, 죽여버릴까’라는 말에 예레미야는 화를 냈지만, 우리는 도리어 기뻐해야 하는 겁니다.
주기도문에 이런 게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나오잖아요.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셨던 미끄럼틀이에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게 주님의 미끄럼틀이에요. 그런데 자기를 정신병자로 보지 않으려고 이걸 본인이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러고 있다고요. 영화에 보면 지구 종말 때 마지막 신자들이 주기도문 막 외운다고요. ‘우리의 죄를 사하옵소서’ 그러니까 좀 봐달라는 거죠.
죄사함은 이미 끝난 거예요. 죄를 사했기 때문에, 우리가 영적인 좋은 의미의 정신병자가 되는 겁니다. 이미 죄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말합니다. ‘네가 뭘 해서 죄사함 받았나?’ 그러면 이렇게 말하죠. ‘이야기 해줘도 넌 몰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사는 목적과 의미가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을 미워하고 박해하고 싫어하는 그쪽으로 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하옵소서. 자기가 훌륭하게 일하고, 주의 뜻을 행했던 그것으로도 구원받을 수 없음을 도리어 기뻐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