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20240411a 요한일서 2장 22절(거짓)-이 근호 목사
일어나지 말아야 될 일이 일어났다는 그 뉘앙스가 수준 따라서 거짓이 같이 증강한다는 것을 아셔야 돼요. 오늘 요한일서 2장 22절하거든요.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이렇게 되어 있어요.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거짓말하는 자는 누구냐에 대한 인간의 반발은 뭐냐 하면, ‘하나님은 뭐하고 거짓말하는 일이 일어나도록 왜 방치하느냐? 그 책임은 하나님이 져야 되지, 우리 인간이 거짓말했다고 그걸 가지고 추궁하시면 안 되지요. 왜 하나님은 지켜보시기만 합니까? 거짓이 아예 삭제되도록 안 생기도록 조치하시면 안 됩니까?’라는 반발이 나올 수 있거든요.
“그런 일이 왜 일어납니까? 안 좋은 일이 왜 일어납니까? 뭐 병이 난다든지 그런 일이 왜 일어납니까?” “좀 일어나면 어떤데. 네가 뭔데?” 이게 정답이에요. 네가 어떤 권리로 ‘나에게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아야 되는 나다’라고 주장할 수 있는 건덕지, 근거를 한번 대봐라. 네가. 근거를 대봐라. 근거 못 대면 거짓이에요.
벌써 강의 결론 나왔죠. 결론 나왔어요. 혼자 나왔는데… ‘거짓이란 근거가 없는 것’이에요. 궁극적인 최종적인 근거가 없는 게 거짓이에요. 근거가 없는 자가 ‘나는 진실이다’ 하면 이건 뭐가 되겠어요? 근거가 없는 자가 나는 진실이라 하면 뭐가 됩니까? 이게 바로 거짓이죠. 근거가 없는 자가 ‘나는 평소에 바르게 살려고 힘쓴다’ 이게 뭡니까? 이것도 거짓이죠.
하나님이 인간에게 최종 근거를 줬어요. 그 근거를 주셨기 때문에 비로소 뭐가 발생되는가? 거짓과 진실이 구분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제 여러분들이 궁금할 거예요. 거짓과 진실을 구분하는 그 근거가 뭐냐? 오늘 강의 내내 이거 하나만 생각하면 여러분 오늘 강의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17절,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다음의 말씀이에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바로 거짓이란 십자가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주장들, 의견들, 질문들, 답변들, 의식들 이게 거짓입니다. 진실은 오직 하나밖에 없어요. ‘전 바른 말했습니다’ 그건 진실이 아니에요. 진실은 십자가가 헛되지 않은 것,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가 헛되지 않은 것만 진실이에요. 그래서 진실은 뭐냐? 예수님의 육신을 진실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육신이에요.
그러면 진실이 진실로 계속 이어지려면 출발점이 뭐냐? 예수님의 육신이 되어야 돼요. 예수님의 육신이 하신 일이 되어야 돼요. 그런데 예수님 육신 말고 또 다른 육신이 있죠. 나라는 육신. 남들의 육신. 그걸 보존하기 위해서 그걸 지켜내기 위해서 어떤 질문을 한다든지 어떤 주장을 한다든지 생각이 거기서부터 나온다면 그건 어떤 생각이 되든 그것은 거짓이 됩니다.
질문 하나 나올 타이밍 됐죠? 자, 다음의 행위가 거짓인지 진실인지 알아보세요. ‘배고픕니다. 밥 좀 주세요.’ 거짓입니까, 진리입니까? ‘제가 배고픕니다. 밥 주세요.’ ‘아들이 수술했습니다. 수술비가 급하니까 백만 원만 좀 제 쪽으로 돌려주시면 나중에 한 달 뒤에 당신 쪽으로 돌려드리겠습니다. 이자 쳐서.’ 뭐 이런 거. 거짓입니까, 진실입니까?
거짓이죠. 지금 얘가 아파서 수술비 달라는 것은 뭘 헛되지 않으려고 하는 겁니까? 내가 자식을 낳았다는 사실이 헛되지 않으려고 필사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 거예요.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어미가 되어서 자식 지키는 것이 뭐가 거짓인가? 거짓입니다. 온 우주가 온 대자연이 당신 자식 지키려고 움직인 게 아니거든요. 서울에 민주당 몰표 나온 것이 당신 자식 지키려고 나온 게 아니에요.
세상 돌아가는 것이 나한테 손해되지 않는 식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세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려운 살림에, 사람이 어려울 때 또 왜 그리 사고가 많이 나는지, 어려운 살림에 수술비도 없는데 엄마가 자빠졌다. 도움을 요청한다. 아는 친척이니까 좀 도와주세요. 진실이에요, 거짓이에요? 이거 거짓이죠.
그러니까 거짓이라 하는 것은 인간 대 인간으로 결정될 문제가 아닙니다. 너 거짓이라고 말할 수 있는 권한은 인간에게 없습니다. 거짓은 하나님만이 추궁할 수 있지, 다른 사람은 추궁 못합니다. 인간 대 인간의 관계는요. 처음에는 대충 아는 관계에서 점점 더 깊은 관계로 들어가죠. 그러면 거짓도 같이 증가해요.
예를 들어서 서로 어색하고 서로를 잘 모르는 사이에 “너희 아버지 잘 계시나?” “응. 잘 계셔.” 이러면 모르는 사이에서는 그게 뭐 문제될 것이 없죠. “아, 아버지 계시는구나. 어머니는?” “어머니도 계셔.” “그래? 그럼 우리끼리 좋아하니까… 우리 만난 지 며칠 됐지?” “3일.” “좋다. 눈 맞았으니까 결혼하자.” “결혼하자.” 하여튼 3일 만에 결혼했다 칩시다. 결혼하고 난 뒤에 아버지란 작자가 왔다. 보니까 결혼한 여자가 남편보고 “당신, 전에 결혼식 참석한 그 아버지 아니네?” “아버지가 둘이거든.” 복잡하죠. “아니 분명히 나한테 그 아버지 살아계시다 했잖아.” “살아계시지. 둘이나 살아계시지.” “둘 이야기 왜 안 했노?” 그때는 깊은 관계가 아니었거든요.
사람이 인간과 인간관계가 점점 증가하게 되면 무엇도 증가돼요? 거짓이라는 것이 자꾸 드디어 같이 들추어나지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둘이 결혼해서 한 46년 7개월 살았다. 46년 7개월 돼서 나이 팔십 가까이 돼가지고 이제는 뭐 알만큼 안다고요? 살아보세요. 거짓이 계속 발굴됩니까, 발굴 안 됩니까? 계속 발굴돼요.
거짓이라 하는 것은 도대체 인간이 다룰 수 없어요. 다룰 수 없고 캐낼 수도 없고. 어떤 아주머니가 임신해서 자기 자식이 초능력 가지기를 원해서 뭐 절에도 가고 교회도 가고 성당도 가고 유명한 신이란 신에게는 요란스레 다 빌었는데 걔가 이 땅에 태어났어요. 태어났는데 어떤 재주가 있느냐 하면 남 거짓말하는 것은 귀신같이 알아내는 재주가 있다 합시다. 그냥 그런 게 있다 합시다. 드라마 중에 그런 드라마가 있어요. 그래서 자기는 무당 신 내림 받았다고 거짓말해가지고 돈벌이가 꽤 잘 돼요. 거래하는 데 가서 거짓이면 삐삐, 진짜면 삐, 이런 식으로.
자, 그럴 때 그 사람이 거짓인지 아닌지를 가려낼 수가 있습니까? 타인의 거짓을 가려낼 수 있습니까, 인간이? 인간은 거짓을 가려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거짓은 근원적이기 때문이에요. 인간이 넘볼 수 없는 다른 세계에 속하는 게 거짓의 세계입니다.
요엘서 같은 경우에, 요엘을 후기 선지자라 하는데 후기 선지자 같은 경우에 또는 작은 선지서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호와의 날’이 있죠. 여호와의 날. 여호와의 날은 쉽게 말해서 이겁니다. ‘태초에 끝이 있었다.’ 태초에 끝이 시작되었다. 알파요 오메가니까 시작과 끝이 태초부터 계속 있어온 거예요.
아주 작정하고, 세상 멸망을 작정하고 하나님께서는 일을 벌여나갔습니다. 태초부터 이미 심판을 전제로 해서 천지를 창조했으니까요. 심판하려면 심판의 대상이 있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있어야 되죠. 태초에 심판의 대상이 뭐겠습니까? 진실 말고 반대말은? 거짓이죠. 그럼 태초에 뭐가 있었다? 태초에 거짓이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십계명을 잘 한번 생각해보세요. 십계명 중 제일 끝 계명이 뭐냐? “탐내지 말라”죠. 탐내지 말라. 그럼 태초에 탐심이 있었다. “거짓 증거하지 말라” 태초에 거짓말이 있었다. “부모를 공경하라” 태초에 부모에 대한 살인 의지, 살해 의지가 있었다는 거예요.
바로 ‘~하지 마라 하지 마라’ 하는 것은 이 세상은 그걸 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이 말은 ‘진실은 거짓 속에 있다’는 거예요. 거짓이 없는 곳에는 진실도 없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빛이 있기 전에 어두움이 먼저 있었고 빛은 어두움이 있고난 뒤에 그 뒤에 오게 되어 있어요. 그럴 때 어두움이 자기 본색을 드러내죠. 빛을 어두움이 믿지 아니하는 거예요. 어두움이 믿지 않는 것.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1:5)
방금 이야기한 것을 여러분들이 중요시해서 이야기를 한번 시작해봅시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영생이든 뭐든 간에 또는 요한일서도 마찬가지지만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했거든요. 요한복음 11장에서(11:25-26).
예수님께서는 나를 믿으라고 했다고요. 나를 믿으라. 예수님 말씀이 그렇게 복잡하지 않아요. 굉장히 간결해요. 나를 믿으라.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어느 누구도 나를 믿는 자가 없다는 뜻이에요. 나를 믿으란 말은, 어느 누구도 나를 믿는 자가 없다. 이미 인간들은 믿는 자가 있어요. 자기 판단을 믿어요. 인간은 자기 판단을.
그러면 진실 된 게 뭐냐 하면, 이 말이 재밌는데 진실 된 게 뭐냐 하면 ‘나는 당신을 못 믿겠습니다.’가 진실이에요. 나는 당신을 못 믿겠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거짓이냐 하면 ‘예. 믿으려고 애쓸게요.’ 이게 거짓이 되는 거예요.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비유가 쫙 나와요. 비유가 한두 가지 나오는 게 아닙니다. 많이 나오죠, 비유들이. 비유들이 바로 그런 것을 지적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믿으라 할 때는, 인간들이 이미 본인 판단에 믿을만한 것은 다 알아서 믿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그걸 환경으로 하는 거예요.
따라서 주님께서 이야기할 때는, 이미 인간들이 딱 체계가 갖춰져 있어요. 나 이런 이런 거 믿는다. 납득되는 걸 믿는다. 내가 이해되는 걸 믿는다. ‘이해 안 되는 것은 믿으려고 애쓸게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지금 확실하게 믿는 것은 이미 따로 챙겨져 있는데, 내가 믿으려고 애쓰는 것은 확고하게 챙긴 것 말고 여분의 것, 내가 더 생각해보고 판단할 것이 아직 남아있는 게 있다. 그건 앞으로 노력하게 되면 현재 기존에 있는 믿음체제에 그걸 합류시킬 수 있다.’ 이런 생각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그런 인간의 믿음 창고를 가만두지 않죠. 폭파시켜버리죠. 폭파시키면서 전면적으로 부정하면서 나를 믿으라는 거예요. 내가 너를 심판할 테니까 믿으라. 내가 너를 심판하는 것도 믿어라 이 말입니다.
그럼 그걸 믿습니다, 하는 경우는 어떤 경우입니까?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주님 앞에 저주받아야 합당합니다.’ 이걸 받아들이는 것인데 이런 인간은 없어요. 인간세계에 믿음이라는 게… 예수님은 믿으라 하는데 아무도 안 믿어요. 마지막 버틸 수 있는 것은 나는 어쨌든 버텨야 되니까 인간들은 생각하기를 어떤 믿음이냐 하면 내가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보는 거예요. 내가 없으면. 주님께서는 그러니까 못 믿는다는 거예요.
인간의 믿음이라는 것은 ‘내가 여기 있음이 곧 의미의 개시(시작)다.’ 내가 여기 있음이 곧 의미의 개시이고 시작인 거예요. 그러니까 이미 인간은 자기 자신의 존재함을 의미 있게, 그것도 그냥 있는 게 아니고 중요하다고 여기고 의미 있게 여기면서 이미 자기 믿음을 시작한 거예요. 개시를 한 거예요.
여기서 주님이 마주쳐 오죠. “나를 믿으라.” 나를 믿으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너 알아서 죽어라’ 이 말입니다. 화투판에서 화투 초보가 두 장을 딱 쥐고 있다. 그러니까 화투 타짜가 화투 숫자 딱 헤아려보더니 “야, 알아서 죽어. 알아서 죽어.” “뭘 갖고 있는데요?” “묻지 말고. 나 너 뭐 갖고 있는지 아니까 알아서 죽어.” 알아서 죽을 거 같으면 화투 왜 칩니까? 화투란 가능성보고 치는 건데요.
그래서 예수님이 나를 믿으란 말은요, 이런 뜻으로 생각하시면 여러분 오케입니다. 너는 너 혼자 못 산다는 거예요. 너는 혼자 살 수가 없다는 거예요. 자꾸 혼자 살면 혼자를 위한 질문이 나와요. 나 아프면 안되잖아. 나 병원가서는 안되잖아. 나 목 아프면 안되잖아. 혼자 있기 때문에 혼자 평소에 자기가 믿고 있는 그것이 질문으로 계속 나오는 겁니다.
아까 진실은 뭐라 했죠? 진실은 예수님의 육신이라 했죠. 예수님의 육신, 이게 진실이에요. 예수님만의 육신입니다. 요한일서에서. 그러면 거짓은? 예수님만이 진실을 이미 완전히 홀로 장악했어요. 모든 진실은 예수님 육신이 다 장악했어요. 이 말은, 예수님 빼놓고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진실은 없어요.
그럼 뭐 성경에 보면 이웃 사랑하라고 나오고 뭐 여러 가지 말씀 나오는데 그런 건 우리는 못한단 말입니까? 못해요. 왜냐하면 그런 말씀은 예수님과 함께 해야 되니까. 예수님과 함께 해야 되지, 단독으로 못해요. 그러면 왜 단독으로 못하느냐를 알아야 될 게 아닙니까? 예수님과 더불어 해야 되고 더불어 한다는 말이 성령이 함께 하는 거예요.
이걸 요한일서에서는… 요한일서 하니까 한번 봅시다. 요한일서 1장 3절,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함이라” 이렇게 되어 있죠. 우리끼리가 아니고 아버지까지 그 아들까지 함께하는 거예요.
함께하는 이유가 뭐냐 이 말이죠. 이건 우리한테는, 예수님을 안 믿는 거예요. 믿을 수가 없어요. 나를 이미 믿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자꾸 혼자 살기 위한 속성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나 혼자 모든 걸 처리하면 괜찮다는 그런 속성을 이미 타고났어요. 이게 거짓이잖아요.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짓되게 태어나게 합니까? 물으신다면 진실은 거짓과 짝을 이뤄서 진실이 되는 거예요. 나는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다. 이래서 진실이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안 믿는 사람은 특징이 뭐에요? 나는 있음 자체로 진실되다. 그러니까 나보고 누구 믿으란 소리하지 마세요. 나는 나를 믿고 있을 테니까. 알아서 잘 할 테니까. 이렇게 하면 이건 뭡니까?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죠. 그걸 요한일서에서는 세상에 속한 자라고 해요.
요한일서 2장 6절에 보면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찌니라” 요한일서 3장 9절은 더 노골적이에요.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그다음에 뭡니까?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뭐가 그 안에 있음이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아, 굉장히 도발적인 표현을 했죠. 하나님의 씨가 네 안에 있다는 거예요. 씨가 다르다는 겁니다. 씨가. 네가 어떤 판단과 행동을 하고 싶어도 씨가, 그 들어있는 씨가 주도권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삭으로 말미암아 구원받고 이삭은 야곱으로 구원받고 야곱은 요셉으로 구원받고 그렇게 되죠. 그 후손에 의해서 구원받죠. 그 후손에 의해서.
태초에 끝이 있었으니까. 끝이 시작되니까. 그 끝에 있는 효용성, 끝이 주는 효용성이 먼저 있는 것까지 영향이 파급되어서 그들을 마지막 끝지점으로 끌어당기죠. 나의 끝. 나의 끝에서 우리는 구원을 얻습니다. 나의 끝에서. 그러면 나의 끝이 되지 않으면 누구를 믿는다? 아직 끝이 아니니까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가능성을 믿어요.
예를 들어서 과연 여러분들이 믿음 있는지 한번 테스트해보면 되죠. 요한일서 3장 8절,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자, 이 대목. 믿습니까? 이렇게 되거든요. 믿습니까. 여기에 대해서 성도이고 싶은 사람은 ‘믿습니다’ 하죠.
‘믿습니다’란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할 게 더는 없습니다’라는 뜻이에요. 주님이 마귀를 멸하는데 내가 거기에 왜 끼어듭니까? 내가 할 게 있어요, 없어요? 주님 하는 걸 못 믿겠다. 내가 나서야 되지, 뭐 나 대신 누가 하는 건 영 못 미더워. 못 미덥다는 게 뭐에요? 불신 아닙니까. 안 믿는단 뜻이잖아요.
인간이 평소에 무심코 내뱉는 행동과 태도 뒤에 숨어있는 추임새가 있어요. ‘나는 나 말고는 안 믿는다.’ 이게 모든 행동과 말에 다 붙어있는 거예요. 내가 알아야 내가 미덥지. 내가 안하고 누가 해 준다 하는 건 영 믿음이 안가. 그걸 가지고 못 믿겠다 하는 거예요. 그게 못 믿는 거예요. 못 믿는 거.
‘그럼 못 믿으면… 믿어서 영생 얻고 천국 가는데 못 믿으면 나는 어떻게 되는데요?’ 거짓이죠, 뭐. ‘그럼 거짓이면 지옥 가는데 그럼 나는 어떻게 돼요? 거짓되면 지옥 가는데 나 어떻게 돼요?’ 본인이 본인 혼자 있기 때문에 계속 자기 자신의 결심에 최종 근거를 두는 거예요.
성경에서 말하는 최종 근거는 인간을 뚫고 지나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거든요. 아까 고린도전서 1장 17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지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이 되지 않기 위해서에요. 헛되이 되지 않기 위해서. 아, 얼마나 강렬합니까.
내가 뭐 마음 편하게 살고 행복하게 살고 그거 아니에요. 그거 지키는 게 아니에요. 십자가가 헛되이 되지 않는 것이 주께 진실이라면 거짓은 뭐냐? 어떤 믿음으로 기적을 행하고 믿음으로 병이 낫고 백날 하면서도 계속 관심사가 십자가에 관심이 없고 내가 어떻게 하나님 덕분에 복 받아 잘됐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욕되게 하는 거고 모독하는 거예요. 헛되이 하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거기 거짓 사도가 나와요. 11장 13절에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자, 여기서 거짓 선지자가 이 고린도후서 11장 13절부터 15절을 이야기했을 때 그걸 어떻게 알아봅니까? 거짓 선지자가 방금 읽었던 이 대목을 교인들에게 설교하면서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우리 교회 잘 오신 거예요. 여러분들 속을 뻔했어요.” 이렇게. 꼭 부동산 사기하는 것처럼. “이건 뭐 아무나 이야기하는 게 아닌데. 여러분들은 행운을 얻은 겁니다. 여러분들께만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이러이러한 자가 부동산 사기 치는 사람이라는 거 여러분들한테만 알려주지, 다른 사람한테는 안 알려줍니다.”라고 그런 말까지 하는 사기꾼을 어떻게 알아내냐 이 말이죠.
답변해보세요. 뭐 있는데. 아까 이야기했는데, 정답. 뭐라고 했습니까? 고린도전서 1장 17절. 십자가를 헛되이 하지 않게 하려함이라 했죠. 그러면 그 말과 같은 말이 뭐냐? 나를 헛되이 하는 것이 주님의 진실이죠. 나의 꿈, 나의 희망, 비전, 모든 것을 허사로 돌리는 것. 이제 뭐 감이 오렌지 막 옵니까? 와요?
나의 모든 인생 시도를 헛된 걸로 돌려주시는 그 고마운 말씀. 그 고마움. 얼마나 그동안 우리 정신머리가 엉뚱한 데 가 있었던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되는 그것에 관심 있는데, 우리는 내 인생, 괜찮은 쓸 만한 인생으로 구축하는 데에 거기다 혼신의 힘을 다했으니 이런 배은망덕이 있어요, 그래. 진짜 성령이 아니면 누가 알겠어요. 성령이 안 오시면.
갈라디아서 2장 21절 한번 봅시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아, 이것은 개인적인 구원을 어떻게 받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께 개인 구원은 하나의 절차고 궁극적인 것은 예수님이 헛되이 죽지 않은 죽음이라는 것을 알리는 그것만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진실이에요. 그것만이 거짓이 아닌 거예요.
그리고 그것을 우리보고 믿으라는 거예요. 십자가를 믿으라는 겁니다. 3장 1절,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이러잖아요. 십자가를 누가 방해하느냐? 본인들이 방해하죠.
나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걸 믿습니다, 그거 거짓이에요, 진실이에요? 거짓이죠. 도대체 하나님께서 지키고자 하는 그런 데는 관심이 없고, 천지는 하나님이 창조했으니까 이 완벽한 믿음을 하나님이 인정해주셔서 나를 죽어서 좋은 데 데려가 달라, 이 이야기잖아요. 이거는 누구를 지키는 거예요? 십자가를 지키는 겁니까, 자기 신세를 지키겠다는 거예요? 자기 신세를 지키겠다는 거잖아요.
왜 자꾸 혼자 살려고 해요? 왜 자꾸 혼자 살려고 그러죠? 갑자기 전두환 말이 생각나네. 왜 자꾸 나만 가지고 그래~ 주님께서는 십자가가지고 우리를 푹푹 매일같이 everyday 매일같이 쑤셔대요. “오늘도 십자가 지켰냐?” “안 지켰습니다.” “지켰냔 말이야?” “안 지켰습니다.” 더 쑤시면 학교에서 옛날에 선생님들이 작대기가지고 하는 것처럼 하면 “쌤, 이러면 학교 안 나옵니다.” 그래서 교회 안 나오잖아요. 그 교회는 십자가만 이야기하고, 왜 내 사정은 이야기안하나. 기도 응답도 없고. 자꾸 십자가만 이야기하나.
그 이유가 여기 나옵니다. 나눠드려야죠. 잠시 쉬어가는 시간도 괜찮죠. 이렇게 인원도 몇 명 안 되고 소박할 때는 음악도 한번…. 저번 강남강의는 내가 급해가지고 너무 빨리 끊었는데 오늘은 왠지 또 음악이 듣고 싶네요. 가사를 한번 보세요. 영어되는 사람은 영어가사로….
The Water Is Wide (바다는 넓고)
The water is wide I cant cross over
바다가 너무 넓어 건널 수가 없어요
And neither have the wings to fly
난 날 수 있는 날개도 없는걸요
Give me a boat that can carry two #65279;
배를 주세요 두 사람이 탈 수 있는
And both shall row, my love and I
우리 둘이 저어 갈께요, 내 사랑과 내가
Oh, love is gentle and love is kind
사랑은 부드럽고, 사랑은 다정하죠
The sweetest flower when first its new
처음 꽃피울 때는 가장 향기로운 꽃이지만
But love grows old and waxes cold
사랑도 나이가 들고 차갑게 식어버리다가
and fades away like morning dew
아침 이슬처럼 사라져 버리네요
There is a ship and she sails to sea
바다로 흘러가는 배가 하나 있네요
Shes loaded deep as deep can be
짐을 가득 실었지만
But not as deep as the love Im in
당신에게 빠진 내 사랑만큼 가득하진 않아요
I know not how I sink or swim
내 사랑이 가라앉을지 헤쳐 나갈지는 나도 모르겠네요
The water is wide 바다가 너무 넓어
I can't cross over 건너갈 수가 없어요
and neither have I the wings to fly 내게는 날아갈 수 있는 날개도 없어요
give me a boat 나에게 배를 한 척 주세요
that can carry two 2인용 보트요 (두 명이 탈 수 있는)
and both shall row 둘이 같이 노를 저어 건너 갈게요
my love and I 내 사랑과 내가
보세요. 노래가 얼마나 아름다워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 바다를 물 있는 바다라 보지 마시고 앞에 거짓만 넘실대는 바다로 보세요.
거짓만이 넘실대는 바다를 건너갈 수 없어요
내가 휙 날았으면 좋겠는데 날아갈 날개도 없어요
어떻게 하느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같이 사랑의 노를 저어가면서 건너갈 수가 있겠죠.
그 다음에 계속,
Oh love is gentle and love is kind
사랑은 참 부드럽고 다정하죠
the sweetest flower when first it's new
사랑이 처음 싹 틀 때는 가장 달콤한 꽃이지만
but love grows old and waxes cold
사랑도 시간이 지나고 차갑게 식으면
and fades away like morning dew
아침 이슬처럼 희미하게 사라져 버려요
(간주는 지나가고)
There is a ship and she sails the sea
바다를 항해하는 배가 하나 있어요
She's loaded deep as deep can be
배에는 짐이 가득 실려 있지만
but not as deep as the love I'm in
내 사랑만큼 가득하지는 않아요
……
여기까지. 아무리 배에 짐이 많다 할지라도 짐보다 더 많은 것이 우리의 사랑이지 않습니까, 하는 그 이야기에요. 이 바다를 누가 먼저 지나갔죠? 우리 예수님이 먼저 갔죠. 이 바다, 거짓만 있는 세상을 지나가면서 예수님은 알았어요. 자기 빼놓고는 아무도 이 악마의 거짓을 통과할 수 없다는 것을, 인간은. 그러면 천국 백성은 아무도 올 수가 없다는 거죠.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아까 갈라디아서 3장 2절에 십자가 이야기하면서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3절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성령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미 모든 일을 다 이루셨기 때문에 비로소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에요, 이게. 그러니까 혼자 끙끙대면서 이 세상을 혼자서 헤쳐가려고 그런 부질없는 짓거리를 하지 말라 이 말이죠. 내가 말씀 지키고 율법 지키고 그래서 하겠다, 그런 짓은 하지 말란 말이죠. 그러니까 성경의 어느 구절도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구절은 단 한 군데도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거짓이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 자신이 우리 위주기 때문에요.
이 십자가를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 세 분의 하나님이 동원되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그 세 분의 하나님이 오직 주목하는 것은 십자가가 헛되지 않는 거예요. 십자가가 헛되지 않는 것. 예수님의 공로가 헛되지 않는 것. 바로 그러한 취지에서 요한일서가 쓰여진 거예요.
그러니까 야, 거짓말하는 거 빨리 정체 드러내. 숨지 말고 나와, 이 적그리스도야. 적그리스도가 뭐냐? 요한일서 다시 봅시다. 본문 요한일서 2장 22절 하는데 적그리스도는 뭐냐 하면 22절,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23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고 나는 하나님 믿는다.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다.’ 이렇게 되면 자기가 먼저 하나님 아들 된 셈이 되죠. 하나님을 아버지라 믿는다면. 여기 성령으로 인하지 않고서는 아버지를 아바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다고 되어 있다고요. 로마서도 그렇고 갈라디아서에도 나오거든요. (롬 8:15, 갈 4:6)
그러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지, 뭐. 부르면 어떻게 돼요? 성령이 아니고서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다 되어 있으니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 또는 경상도 말로 ‘아부지’ 이렇게 불러버리면 그러면 나는 성령 받은 사람 돼요? 어떻게 돼요? 말씀대로 했잖아요, 말씀대로. 그러면 성령 받은 사람 되는 겁니까?
아들이 부르는 아버지가 아버지에요. 아들 자리에서. 그런데 그 아들 자리를 제치고 현재 내 자리에서 부를 수 있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 하나님은 없어요. 그러면 아들 자리에서 부른다는 그건 성령이 임해야 비로소 부를 수 있는 아버지죠. 성령 없이 부르는 아버지가 아니고, 성령이 있을 때야 나타나는 아버지.
그러면 성령 있을 때 아버지하고 성령 없을 때 아버지하고 그게 다른가? 성령 있으면 ‘아버지~~~’ 막 떨리고 성령 없으면 그냥 성의 없이 ‘아버지’하고 뭐 차이 나는가요? 그 차이는 바로 자기 자신에게 어떤 사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게 십자가가 헛되지 않기 위한 조치에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남을 감사하면서 그렇게 하신 예수님과 아버지께 아버지라 부르는 거예요.
나의 존재 의미의 개시가 나부터 출발해서는 안 되게 하기 위해서 내가 손 못 대고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나를 뭉개버리고 박살내는, 그걸 구멍 뚫어버리는 십자가, 십자가 끝이 뾰족하잖아요, 그걸로 구멍 팍 뚫어서 내 안에 다른 것이 더 있다는 것을 노출시키는 거예요. 나보다 더한 게 있단 말이죠.
탐험, 모험을 즐기는 탐험가 영화 보면 나오잖아요. 분명히 끝인데 뭔가 또 비밀번호를 입력하니까 분명히 끝인데 그 뒤에 동굴 나오고 동굴이 또 그 안에 숨어들어있죠. 하나님은 우리를 동굴로 사용하는 거예요. 오늘 안양강의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케이블로, 복음을 전달하는 케이블, 아버지 집에 보일러 놔드릴 때 배선 있잖아요, 배선, 성도는 그냥 얼기설기 배선의 연결망이에요.
독자적인 게 없어요. 독자적인 건 예수님만 독자적이고 우리는 독자에게서 흘러나온 연결망, 연결선이라고요. 촘촘한 연결선들이에요. 그러니까 성도끼리 서로 비교한다는 게 성립 안 되죠. 배선과 배선끼리 뭘 비교해요. 배선인데. 그래서 주님 안에서 서로 사귄다는 요한일서의 말씀이 성립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왜 인간은 자꾸 거짓됨을 본인이 내부적으로 인정하면서도 왜 거짓말을 하고 싶어 하느냐? 욥기 6장 6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사람이 자꾸 구라, 거짓말하는 이유가 세상사는 게 재미가 없어 그래요. 맛이 없어요. 맛은 타인을 속여먹을 때 짜릿한 맛을 느껴요. 남을 속여먹을 때. 그러니까 인생 제대로 맛있게 살려면 직장생활하지 말고 사업해야 돼요. 속여먹을 수 있잖아요. 인간이 자기에 대한 자기의 자부심을 느끼는 경우가 뭐냐 하면 내 말에 남이 속아 넘어갈 때 비로소 인간은 존재감을 느껴요. 먹혀들었어. 그래, 나의 세계는 누구도 침범 못하는 나만의 세계. 나만의 세계가 확보됐어.
이러한 거짓이 그냥 사소한 대인관계에서 대인관계가 깊어지면 같이 증강하잖아요. 하나님 보시기에 그 거짓의 끝모습, 끝물, 어디까지 거짓이 계속 자라나고 있는지는 마태복음 7장에 보면 나옵니다. 아, 그거 보면 참 무서워요. 거짓의 끝모습이. 마태복음 7장 15절,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아까 질문을 다시 해야겠는데요. 거짓 선지자가 이 본문을 언급할 때 여러분 어떻게 파악할 수 있습니까? 아까 같은 질문인데. 같은 문제를 계속 반복하고 있는데요. 정답 알려주고 내일 시험 쳐도 다 까먹을 거예요. 정답 미리 알려드렸잖아요. 정답이 뭐였습니까? 나를 헛되이 하는 것. 나를 헛되이 하는 그것이 거짓이 아니고 진실이에요. 나를 헛되이 하는 것.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헛되지 않는 것은 따로 이미 끝장내놨으니까요. 십자가니까요. 예수님의 육신이 하신 일만 헛되지 않아요. 내 육신이 하는 일은 전부다 헛돼요. 자꾸 십자가 얼쩡거리고 십자가 가리지 마라. 주님이 하는 일에 왜 네가 하는 일이 자꾸 얼쩡거려? 나와. 비켜! 사진 좀 찍자, 십자가. 자꾸 앞에 얼쩡거려가지고 짜증나잖아.
거짓 선지자는 결국 뭡니까? 거짓 선지자는 오늘 낮에 안양 강의 때도 했지만 자꾸 우리를 격려해요. 잘할 수 있어. 너 남한테 지면 안 되잖아. 남들 봐. 너는 뭐하고 있어? 저 사람만큼 따라가야 될 거 아니야, 이런 거. 이번에 총선 패배해서 제가 사퇴하겠습니다. 국민의 힘 비상대책위원장 사퇴했단 말이죠. 그거 진실이에요, 거짓이에요? 거짓이에요. 그런 게 거짓이에요.
그럼 목사님, 거짓 아닌 게 어디 있습니까? 다 거짓이죠. 여기 노래 한번 더 틀어줘요? ‘바다가 너무 넓어 건널 수 없어요.’ 모조리 거짓의 바다에요, 거짓의 바다. 나 좀 알아줘. 나 좀 지켜줘. 나 좀 살려줘. Help me. 전부다 이런 소리만 하고 있다고요. 서로에게. 자기 집에 재산이 20억 있는 사람이 500억 있는 사람보고 나 좀 살려달라는 거예요. 이게 거짓이잖아요. 거짓.
마약을 왜 합니까? 마약을 왜 하는데? 마약, 술, 담배 그거 왜 하는 거예요? 안 무너지려고 하는 거예요. 안 무너지려고. 그런데 그걸로 인하여 무너지잖아요. 인간은 자기를 지키는 것 때문에 자기가 무너져요.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옷을 입는데 비에 젖은 옷만 자꾸 입다보니까 나중에 비에 젖은 바바리부터 옷부터 코트까지 점점 비에 젖어. 지키려는 그 모든 시도가 자기에게 무게감을 더 증강시키는 겁니다.
거짓 선지자는 10분 뒤에 해야 되겠습니다.
서울강의20240411b 요한일서 2장 22절(거짓)-이 근호 목사
거짓 선지자가 노략질하러 온다는 이 말은… 이미 거짓 선지자가 믿습니다. 뭘 믿느냐 하면 자기 자신을 믿어요. 거짓이다, 그리고 이것은 진실이다 하는 것은 그 기준을 자기한테 이익이냐 손실이냐 그걸 이미 따지고 거기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갖고 있는 거예요. 이 세상에 믿음 없는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전부다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내가 알아서 내 인생 꾸려나간다는 그게 전부에요.
그러니 예수님께서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는 이 이야기는 이런 말입니다. 예수님 빼놓고는 이 땅에 참된 선지자 없다는 뜻이에요. 예수님 빼놓고는. 세례 요한 믿으면 구원 받아요, 안 받아요? 세례 요한 믿으면? 아브라함 믿으면? 안되죠. 예레미야 믿으면 안되죠. 그들은 바른 선지자지만 바른 선지자기 때문에 그들은 ‘나를 믿으라’가 아니고 엘리야, 모세 같으면 ‘장차 오실 십자가 죽으시는 분을 믿어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변화산에서 주께서 별세하실 것을 이야기한 것이 모세, 엘리야 아닙니까.
자기한테 이익이 있을 수도 있고 관심 있는 것을 관심 휙 돌려버리는 거예요. 나 말고. “나 왜? 저 아니에요. 저 아니에요. 예수님이에요.” 돌릴 수 있어야 돼요. 돌아가야 돼요. 좋은 엄마라고 자식들에게 존경받을 때 “내가 아니야. 예수님이야.” 하고 돌릴 수 있어야 돼요.
그럼 여기에 거짓 선지자는 뭐로 아느냐? 열매로 안다. 좋은 열매, 나쁜 열매. 무엇이 좋은 열매고 나쁜 열매인지를 거짓 선지자가 스스로 판단한다면 이것도 소용없는 거거든요. 예수님께서 좋은 열매, 나쁜 열매 언급하는 것은 네가 판단하라는 말이 아니고 19절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그다음에 “불에 던지우느니라” 불에 던지운다.
이 말은, 믿으라는 거예요. 불에 던질 때까지 하나님의 일은 멈추지 않고 쉬지 않고 있다는 것을 네가 흔쾌히 즐거운 마음으로 네가 거기에 고개 끄떡여지느냐? 이걸 묻는 거예요. 아휴, 잘 하셨습니다. 조져야죠. 오케이! 그게 믿어지냐 이 말이죠. 그게 믿음이거든요.
믿음이라 하는 것은 더 이상 나한테 어떤 것도 내가 지킬 게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내가 지킬 게 있으면 나는 그걸 믿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진짜 믿음을 가리는 거짓 믿음이 되겠죠.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고 산다는 것은 굉장히 편한 거예요. 오히려 너무 편해서 도리어 의심이 될 지경이 되어야 돼요. 아휴, 내가 이걸 왜 믿지? 본인이 따져 봐도 설명할 길이 없어요. 주님께서 알아서 다 한다는 것이 어떻게 믿어졌냐 이 말이죠. 주께서 알아서 다 하신다는 말은 그 안에 무엇도 포함되었느냐 하면 내 구원에 대해 내가 알아서 챙기려고 전전긍긍했던 내 손모가지를 비틀어서 내 구원, 내가 쥐고 있는 그것을 주께서 가져가가지고 ‘내가 너 구원해줄게’ 하고 빼앗아간 것조차도 믿어지니까 이 얼마나 해피한 순간입니까.
아, 세상에. 복도 복도 뭐 이런 복이 다 있네. 세상에 이런 복이 어디 있어요. 그 반대되는 게 뭐냐 하면 지지리 복도 없는 년 하는 거 있잖아요. 자식 복도 없고 남편 복도 없고 뭐 이런 거 있잖아요. 그거하고 정반대죠. 지지리 복이 없다는 것은 뭔가 시도하려고 했는데 안 된다는 뜻이고, 진짜 너무나 복이 되는 순간은 내가 안했는데 이미 주께서 알아서 척척 다 해주니 고마운 게 아니고, 그게 믿어지는 게 고맙다니까요. 그게 믿어지는 게요.
아유, 막 킹콩처럼 답답해서 가슴을 치고 싶어요. 이게 왜 믿어지냐는 말이죠. 그리고 이게 기분 좋지만 설명할 길이 없어 답답한 거예요, 설명할 길이 없어서. 다른 사람이 듣고 “나는 안 믿어지는데 너는 왜 믿어지는데?” “몰라, 그건. 나는 믿어지네 그래.” “몇 분간 믿어지는데?” “몇 분간이 아니고 계속 믿어지지.” “난 3초 가는데.” 계속 믿어지는 거예요.
특히 여기 마태복음 7장 끝에 보면 거짓 선지자의 극단이 나옵니다. 21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요령부리는 자들은 여기서 전부 다 탈락입니다.
주님이라고 부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로마서 10장 13절, 뭐 까짓 거 부르지. 그렇게 불러버리면 뭐가 믿어지느냐? 내가 주님이라고 부른 그 행위를 내가 포기 못하고 믿는 거예요. 그 행위를 믿는 거예요. ‘나는 주님을 주라고 믿습니다. 부릅니다.’ 이러고 있는 거예요.
얼마나 믿음이 없으면 그걸 믿을까요. 얼마나 개코도 믿음이 없었으면 뭐라도 안하면 섭섭해서 뭐라도 하는 걸까요. ‘주여 주여’ 왜 이런 짓 하는 거예요? 믿음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믿음이 없어서.
그러니까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못 들어간단 이야기죠.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는 거예요. 이것이 믿는 사람에게는 또 기분 좋은 이야기에요. 주님의 뜻대로 행하신 당사자가 누굽니까? 주님이잖아요. 주님 뜻대로 천국에 넣어줬다는 것, 이게 또 퉁탕퉁탕 킹콩, 이게 왜 믿어지냔 말이죠.
내 구원이 내 뜻이 아니고 주의 뜻이었습니다. 나는 천국은 생각도 안했습니다. 그런데 생각도 안하고 있던 나를 이미 천국에 넣어줬다는 그것이, ‘넌 천국에 가는 거야’ 하는 그것이 내 일인 듯 내 일 아닌 내 일 같은 나의 일. 따지고 보면 내 구원이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 되어버리죠. 내 선에서 떠난, 주님 손에 가있는 주님의 일이 왜 그게 인정이 되고 수긍이 되고 믿어지냐 이 말이죠.
자, 그 믿음의 증거가 뭐냐? 감사가 일어난다는 겁니다. 감사. 수십 번도 더 이야기했어요. 감사가 일어나면 성령의 일이고 억지가 되면 불안과 두려움과 억지가 되면 이건 악령의 일이에요. 이게 감사가 되는 거예요. 뭐 24시간 늘 감사하라는 말이 아니고, 항상 수시로 주께서 지킬 것은 너의 육신과 상관없는 것, 예수님의 육신과 관련된 십자가를 지킨다는 그것이 우리에게 고마움과 감사로 연결된다는 거예요.
불신자 같으면 ‘하든 말든 그건 주님이 알아서 하고 나는 내 일 따로 있습니다.’ 하고 자기 일을 믿을 건데, 내 일은 아무것도 아니고 주님의 일이 감사가 되고 더 고마움이 될 때 그게 요한일서에서는 주 안에 사귐이 있다고 하는 거예요. 주님의 사랑 안에 있다고 하고 성령 안에 있다고 하는 겁니다. 요한일서에서. 요한일서가 굉장히 어려운 책인데요.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굉장히 이게 쉽고 가볍고 고마운 일이에요.
요한일서 2장 14절 한번 봅시다. 2장 14절 끝에 보면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어디 있다 했어요? “너희 속에 거하시고” 이게 믿음이 없는 사람은 이러려고 노력을 해요. 억지가 돼요. 믿음이 없는 사람은.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그런데 성령 받은 사람은 ‘아, 내 뜻은 아닌데 주의 뜻이 말씀이 내 안에 거하시고 활동하도록 그렇게 하시는구나.’ 하고 이게 믿어진다니까요.
믿음을 설명하면서 믿어진다는 말 말고 다른 표현을 하면 어떻습니까?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거든요. 성경에서 다른 표현은 부정적인 표현밖에는 동원할 게 없어요. 뭐냐 하면, ‘주의 말씀이 내 속에 있어서 나로 하여금 소소한 나의 모든 꿈과 희망을 주의 말씀이 그걸 전부 다 개무시해주신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요.
문제는 그래서 기쁘냐, 감사하냐, 고마우냐를 덩달아 거기에 덧붙여야 되죠. “너의 소소한 모든 계획이 다 좌절되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고맙나?” “고맙죠.” “왜 고마운데?” “말씀이 친히 내 안에서 ‘네 뜻 나가. 내 뜻을 일방적으로 실시할 거야.’ 하니 세상에 그처럼 고마운 게 어디 있습니까.” 이게 또 감사하죠.
2장 24절 봅시다.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걸 논리적으로 따지면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워요. 그러나 한번 믿어버리면 이게 하나도 어렵지 않아요. 딱 믿게 되게 되면,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면 내가 아들 안에 있고 아버지 안에 있다. 당근이지. 그거 당연한 거지, 뭐. 이렇게 되거든요.
방금 한 것을 상세하게 이야기한 것이 요한일서 5장에 나와요. 5장 10절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이렇게 되어 있죠.
여기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든다는 거예요. 자, 이렇게 보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의 일은 오로지 거짓의 바다 위에서만 가능하다.’ 거짓의 바다. 그것도 넓은 바다. 아무도 그것을 뚫고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넘실대는 거짓, 그 거짓을 배경으로 해서 하나님의 일이 그 안에 주어집니다. 왜 그렇게 해야 되느냐 하면 ‘예수님이 믿으라 했을 때 그걸 믿지 아니하면 그건 자동적으로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든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생각할 것은, 거짓의 바다가 하나님 일을 믿으면 되는데 왜 안 믿느냐? 그것은 그들의 최종 근거지가 없기 때문이에요. 그게 유다서에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바로 앞이에요. 11절, “화 있을찐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자, 여기 두 사람 나왔죠. 한 사람은 가인, 또 한 사람은 발람 선지자 나왔죠. 이 두 사람이 거짓되다고 규정해놨는데 거짓이 뭐냐? 거짓이란, 최종 근거가 없어요. 바탕이 없어요. 뭔지 몰라요. 내가 딛고 있는 이 존재의 바탕이 과연 안정감이 없고 확실한지 그걸 본인이 알 수 없고 모호해요. 내 기초가 모호하다고요.
그래서 12절에 “저희는 기탄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의 애찬의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의 특징이 뭐냐? 이 땅에 어떤 기초가 없어요. 그냥 구름이니까 바람 따라 흘러가는 거죠, 그냥. 기초가 없으니까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뿌리까지 뽑혔으니까 기초가 없는 거예요.
13절은 더 노골적이죠.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그다음에 뭡니까? “바다” 그리고 “거친 물결”. 물결은 바다의 표면만 일어나는 거예요. 바다의 표면. 그러니까 그냥 스쳐가는 현상 같은 것이 뭐냐? 이 세상 모든 인간 군상들의 모습이에요. 스쳐지나가는 것. 종잡을 수 없어요. 안정적인 자리가 없어요. 그냥 사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어요. 뿌리라는 게 없다니까요. 뿌리. 근거가 없어요.
불신자들이 뿌리가 없다, 근거가 없다 하는데 그러면 성도의 뿌리는 무엇이냐? 언약입니다. 노아 언약 한번 생각해보세요. 노아 언약. 무서운 물의 심판이 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영원한 안정적인 shelter, 피난처를 주께서 친히 마련해주셨습니다. 그게 방주입니다. 그게 방주거든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한번 생각해볼 것은 천지창조 때 천지창조의 기초가 뭐냐 하는 거예요. 천지창조의 기초. 상당히 복잡하고 어려운 질문을 일단 제시했는데요. 창세기 1장 9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천하에 물이 있고 물 바닥에 뭐가 있었습니까? 땅이 있었죠. 그럼 땅의 기초가 뭐죠? 천지창조는 그게 나타나지 않아요. 물은 땅 위에 있었다. 따라서 물이 거두어지면 땅이 나타난다. 그 땅의 기초는? 없죠.
지금 물도 기초가 없고 땅도 기초가 없는데, 기초가 없는 물과 땅을 불신자들이 안전빵이라고 여기고 그게 안정적인 자연 질서라 여기고 그 토대위에 그들은 문명을 이뤘습니다. 이 지구상에. 그런데 베드로후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성냥불로 긋는 것처럼 어떻게 됩니까? 홀라당 타서 없어지죠. 불로 다 태워져서 사라지죠.
그러면 이 세상에 안정적이라고 여겼던 하늘의 해와 달과 별과 이 창조의 모든 것은 허상이었어요. 허구였고 허상이었어요. 그것만 허상입니까? 인간의 몸도 허상이죠.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죠. 물론 이쁜 흙도 있고 못생긴 흙도 있지만 흙은 흙이죠. 결국 죽으면 화장터에서 한줌의 재로 다 돌아가잖아요.
근거가 없잖아요. 근거가. 토대가 없잖아요. 토대가. 이 세상도 토대가 없고요. 하늘과 땅, 자연도 토대가 없어요. 그러면 토대는 누구밖에 없습니까? 언약에 의해 언약에 준해서 오신 예수님밖에 없어요. 예수님 토대는 아버지에요. 아버지 하나님이에요. 예수님과 아버지만이 언약이라는 토대를 갖고 있단 말이죠.
거기에 노아가 잠시 참여를 했죠. 노아가 방주 안에 들어갔거든요. 그리고 방주가 안정적인 처소로서 비 왔을 때 일 년 동안 버텼단 말이죠. 이제 방주에서 나옵니다. 일 년 후에. 나왔을 때 근거가 어디 있어요? 기초가, 살 곳이 어디 있습니까?
노아는 그 다음 언약을 기다려야죠. 그다음 준비된 언약. 노아 다음에 준비된 언약은 아브라함 언약입니다. 노아의 자식 가운데 셈의 후손, 아브라함이 언약이 되죠.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자식 낳고 이렇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죽었습니다. 어디서? 기초가 없는 땅 위에서. 그러면 아브라함의 기초는 뭐냐? 이삭이 되죠. 그게 이삭 언약이에요. 이삭은 야곱 언약. 야곱은 요셉.
요셉의 후손들은 어디에 살았죠? 애굽에 살았죠. 애굽에 살던 그들에게 주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 하신 그다음 절차가 뭐냐 하면 바로 모세를 통해서 율법이 기초가 되는, 율법 언약이 기초가 되는 세계죠. 율법 언약 그다음에는 다윗 언약의 성전이고 성전이 지나면 성전을 인물화시킨 것이 예수님이죠.
결국 내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기초는 하나님께서 진리로서 헛되지 않게 하는 것은 오직 마지막 최종적으로 남아있는 영원한 것, 그것은 십자가를 헛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이게 믿어지냐 이 말입니다. 이게.
이게 믿어지냐고 제가 말씀드리면 “그거 못 믿을 거 뭡니까? 감사히 믿어집니다.” 이렇게 하죠. 그런데 국민의 힘 이번에 다수 의원되라고 표 찍어줬던 대구 사람들, 부산 사람들, 서울 강남에 서초구 사람들 그 사람들 투표했을 거 아닙니까. 그런데 민주당에게 완전히 주도권이 다 밀렸다. 그럼 어떻습니까? 마음에 감사가 막 올라옵니까?
민주당, 국민의 힘이 기초입니까? 이게 기초에 해당돼요? 노아 방주도 아니죠? 그런데 왜 교회에 복음을 안다는 사람이 대화하는 내용 그 모든 것이 기초가 없는 흔들리는 부초 같은, 아무 바닥도 없고 뿌리도 없는 것가지고 마치 게임하듯이 ‘이거 승리해야 돼. 이번 일은 내가 표 던지고 내가 힘쓴 것이니까 반드시 상대방을 이겨내야 돼.’ 기초도 아닌 여기에 왜 그렇게 울고불고 감정이 상하고 화를 내고 왜 그러느냔 말이죠.
물론 거기에 비트코인도 포함됩니다만. 주식도 포함되지만. 돈에 기초가 있어요, 없어요? 없죠. 그런데 거기에다가 자기 인생의 즐거움과 기쁨을 왜 다 소모하느냐 이 말이죠. 모든 정서적인 것, 감성적인 것을 왜 거기에 매달려 살아가냐 이 말입니다.
거기에 대한 답변은 아까 다시 욥기로 와서 이야기했습니다. 욥은 욥의 고난 가운데서 이런 이야기했어요. 욥기 6장 6절에 내가 고난 받고 사는 것이 재미가 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맛이 없다는 거예요. 계란 흰자같이. 계란 흰자 맛있던데… 물론 소금을 쳐야 되지만. 계란 흰자같이 소금이 없으면 무슨 맛으로 사나.
그러니까 인간은 왜 맛으로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죠, 욥이? 욥의 기초가 없었습니다. 욥의 기초가 없으니까 한순간 순간 재미나게 살아야 그때 그때마다 마약하듯이 재미, 재미, 계속 연속된 재미로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뭐가 재미일까를 늘 살피고 찾는 가운데 있어요.
전에 몇 번 이야기했지만 우리 교회 나오는 어떤 집사님은 공부 좀 한 분인데도 불구하고 얼마나 사치를 모르는지 샤넬이 뭔지를 몰라요. 나이 오십이 넘었는데. 프랑스의 고급 브랜드 이름을 모른다니까요. 집에 돈도 없는 것도 아니에요. 의사에요. 그런데 병원에 운동화 신고 돌아다녀요. 왜냐하면 그게 빨리 빨리가 되니까. 왔다갔다 왔다갔다 가보면 나보다 더 빨리 움직여. 가운은 입어놨으니까 안에 뭐 입었는지 표 안 나잖아요. 안에 입은 것은 교회 올 때 드러나요. 츄리닝 비슷한 거. 저게 중국산인가 할 정도로 하여튼 사치를 모르는데요.
남편도 만만치 않아요. 여기 메모지 있죠. 남편도 의산데 약국에서 오는 메모지를 쩍쩍 들어붙는 메모지를 하나도 버리지 않고 다 모아놔요. 모아서 나한테 줬어요. 나 이거 떼고 붙이는데 귀찮기는 좀 귀찮지만 하나도 버리지 않고. 이렇게 두꺼운 것도 있지만 이것보다 더 작은 것도 있어요. 작은 것도 떡떡 붙어있어요. 약국에서 제약회사에서 주는 거. 하여튼 취미도 전혀 없고요. 오직 병원 일밖에 몰라요. 병원 일. 허 병원 취직해서 일하는 병원 일밖에 몰라요. 남편도 마찬가지고. 집안에 가구 하나도 없어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묻죠.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사노? 무슨 재미로 사느냐? 그런데 그 두 분은 너무 바쁘기 때문에 무슨 재미로 사는지 질문조차 할 시간이 없어요. 다시 말해서 의사가 사명감이에요. 사명감. 무슨 재미로 사는지 그걸 제가 얼마 전 설교에서 이야기했습니다. 타인이 나로 인하여 즐거우면 그 재미로 살아요.
타인이 나로 인하여 즐거우면 나의 존재감이 살아나요. 나의 존재감이. 나의 모든 일이 그 사람에게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된다면 내가 얼마든지 지금보다 더 힘들게 살아가도 좋소. 나는 그것으로 족합니다. 의료계의 유관순 여사 같아요. 그게 바로 또 나름대로의 인생의 사는 맛입니다.
그렇다면 뭐 돈도 별로 없으면서 골프 치러 다니고 시건방 떨고 이런 것은 결국 그 사람들과 비교해볼 때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시건방 떨고 골프채 잡고 돌아다니고 왜 그렇게 하는가? 나로 인하여 즐거운 사람이 주변에 없어서 그렇죠. 그러면 내 즐거움은 누가 챙겨야 돼요? 내가 챙겨야죠. 늘 자기가 자기한테 보답하듯이 과소비를 해줘야 돼요. 과소비를 하고 자기가 자기에게 늘 상장 제시하고 선물 주고 그렇게 해서 자신의 거짓됨을 그런 식으로 감추는 겁니다.
그러면 욥은 어떤가? 욥은 바로 남을 도와주고 구제하는 데서 그리고 믿음 좋다는 소리를 듣는 데서 욥은 맛을 느꼈던 겁니다. 그런데 몸이 아픈 순간부터, 돈이 다 날아가고 재산 다 날아가고 몸이 아픈 순간부터 일절 그것이 다 끊어졌거든요. 그러니까 욥이 하는 말이 도대체 내가 사는 맛을 모르겠다는 겁니다. 사는 이유도 모르겠고 재미가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 무슨 재미로 살죠? 거기에 대해서 요한일서 본문으로 돌아와 봅시다. 질문을 제가 그렇게 한 이유가 성경 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성경에서 말하는 그 의미와 동떨어지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우리가 세상 속에서 실감해야 돼요. ‘이거 뭐 다 아는 이야기인데. 나는 예수님을 믿어.’ 예수님을 믿는데 그다음 나오는 질문은 ‘그런데 인생 무슨 재미로 살지?’ 이런 거. 예수님 믿는다 해놓고는 인생 사는 재미는 따로 챙기려고 시도하는 것.
그것이 결국은 ‘진실은 거짓과 만나야 드러난다’는 겁니다. 요한일서 4장을 한번 보게 되면 4장 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라고 되어 있죠. 이 말에 함축된 말이 굉장히 많이 들어있어요. 엄청나게 많이 들어있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는 존재라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어요. 없어야 뭐냐?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죄,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이 부각되고 완전히 돋보이게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사랑이라는 거예요. 그게 사랑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진실한 사랑은 거짓된 사랑과 만나야 진실된 사랑이 돋보이기 때문에 우리 역할은 뭘 하게 되어 있어요? 거짓된 사랑. 거짓된 사랑을 우리가 하는 게 아니고 우리의 육신 자체에서 이게 뿜뿜뿜 뿜어져 나와요. 복음 아는데 요새 사는 게 재미가 없어.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주님의 진실된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벌이신 거예요.
자, 요한일서 5장 5절 봅시다. 또 한 가지 예가 있어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되어 있죠. 여기 세상을 이기는 자가 등장하는데 인간이 사는 재미, 존재감이 뭐냐 하면 내가 이 세상에서 최고가 되고 남한테 안지고 늘 이기는 사람이 되는 걸 인간은 사는 재미로 느껴요. 왜 우리에게 그런 본성과 본능이 나오는지 그거는 우리 육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이건 말릴 수가 없어요.
진실은 예수님의 육신입니다. 그럼 거짓은 뭡니까? 죄 있는 우리의 육신이 거짓이에요. 죄 있는 육신과 진실이 만났을 때 진실한 사랑이 거기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아까 ‘주님이 하신 것을 흔쾌히 가볍게 믿습니다.’ 하는 그게 진짜 계속 유지되는지를 한번 살펴보자는 거예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래, 우리는 뭐 조심해야지.’ 또 이렇게 나온다면 지금 아까 주님의 하신 일만 그냥 푸근하게 믿습니다, 하는 그게 다 날아가버렸어요. 자기 또 단도리 한다고요. 제가 몇 가지 질문만 했을 뿐인데 ‘아, 앞으로는 조심해야 되겠네.’ 뭘 조심해. 세상 일이 조심한다고 이게 됩니까. 내가 억누를 수는 있지만 이게 전부 다 거짓된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육신이 노리는 게 뭐라는 걸 알아요. 그게 뭐냐? 우리 힘으로 내가 세상을 이기는 자 되고 싶은 거예요. 지기는 싫은 겁니다. 그게 사탄의 일이죠. 지난 시간에 했지만 다시 한번 보게 되면 요한일서 2장 16절에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오늘 바다, 거짓된 바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이게 육신에 있는데 없을 리가 있어요. 우리의 육신이 있는데.
그러니까 요한일서 말씀을 지킬 생각하지 마시라 이 말입니다. 제 말은. 지키는 게 아니고 믿는 거지, 지키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 말씀이 내 안에 거하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지킵니까? 알아서 거하는데. 계속 거해주세요, 이런다고 될 문제가 아니거든요.
오늘 강의에서 딱 한 가지만 기억하라고 제가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만 십자가를 헛되이 하지 않는 것,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한결같이 그것만 있어요. 그러면 우리도 거기에 끼어들고 싶은데 우리는 육신의 정욕이 있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느냐? 성부 성자 성령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우리로 하여금 육신의 정욕을 육신의 정욕이라고 고발해버리는 겁니다.
그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에 우리가 자랑거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삶의 보람인 양 여기고 살아갔다는 것을 지적해주는 거예요. 뭐가? 말씀이 우리 안에 계셔가지고. 그러니까 지적받을 때는 기분 나쁘지만 가만 생각해보니까 말씀이 우리 안에 있다는 그 자체도 한량없이 또 즐겁고 기쁜 일이에요. 특혜죠. 다른 성령이 없는 사람한테는 있을 수 없는 일. 늘 지적해주는 것.
2장 19절에. 요한일서는 자꾸 반복해야 돼요. 지나간 것 알았다고 넘어가면 안돼요. 전부다 보일러 배선처럼 연결되어서 하나를 건드리면 다른 것도 다 이야기해야 돼요. 2장 19절,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이 분류작업은 우리가 못합니다. 그것은 우리 속의 말씀이 그렇게 하게 해요. 누구하고 헤어졌다고? 임용재? 임용재가 들었으면… 이 강의 듣겠나.
2장 21절 봅시다.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건 진짜 설명이 필요합니다. 이거 설명하려면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에 대해서 언급해야 돼요. 예수님이 비유는 너희들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고 하셨는데 그 대목을 봅시다.
다 아시지만 마태복음 13장 13절에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이는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게 함이라고 되어 있어요.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는 이사야 말씀은 어떻게 된다? 반드시 이루어져야 된다는 거예요.
이게 이사야 55장 11절에 나와요. 55장 11절,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주님이 보내신 뜻은 헛되이 돌아오는 법이 없고 반드시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데 그 이루어진 내용이 뭐냐?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하니까 제자들이 뭐라고 오해를 하느냐 하면 우리는 딱 들으면 압니다, 안다는 거예요. “우리는 주님 말씀 딱 들으면 아는 쪽이죠. 그렇죠? 듣기는 들어도 모르는 쪽은 저쪽 불신자 쪽이고 우리는 딱 들으면 아는 쪽이죠. 그렇죠, 예수님?”하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제자들의 이 사고방식이요. 주님도 얼마나 많이 했겠습니까. “말씀이 너희 안에서 말씀이 이루어지고 너희는 그냥 믿기만 하라. 그 말씀이 알아서 하는 것을 믿기만 하라.” 이렇게 주께서 한두 번 신신당부한 게 아니잖아요. 그렇게 많이 했잖아요. 했는데 제자들은 자꾸 뭐냐 하면 이제 알았으니까 우리가 알아서 처신 제대로 해서 보답을 해주겠다는 거예요. 무슨 보답을 해요. 주님이 알아서 하는데.
그럼 그건 결국 뭐냐? 우리의 본성 가운데서 믿으라 해도 주님을 안 믿고 결국 주께서 어떤 아이디어를 주면 최종 행함으로 일구어내는 나 자신만을 이미 믿고 있었다는 것이 티가 나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해석을 보게 되면 항상 뭐를 경유해야 되느냐? 주께서는 십자가를 헛되이 하지 않는다는 그걸 경유해서 나한테 오게 되면 아, 나는 성경말씀을 내가 행함으로 그걸 실천에 옮기려는 의도가 이게 나의 믿음 안에 내용으로 꽉 자리 잡고 있다는 것, 이 거짓됨이 들통나는 기쁨과 감사와 고마움이 병행돼서 일어나줘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성경보고, 압니다. 맨날 안대. 무슨 뜻입니까? 알아서 잘할게요. 누가 잘하래, 누가? 참내. 아니, 누가 잘하라는 이야기 아니에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헛되이 돌아옴 없이 다 성취된다. 반드시 이루어진다. 내게 주신 자는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된다.’ 거 이상하네. 그게 믿어지네.
그게 믿어질 것 같으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자기 행위에 대해서 믿습니까, 안 믿습니까? 자기 행위에 대해서 안 믿죠. 그럼 자기 행위의 결과에 대해서 믿습니까, 안 믿습니까? 안 믿죠. 자기 행동에 대해서 어떤 열매가 있기를 원합니까, 안 원합니까? 그걸 안 원하죠.
결국 믿음이 있다는 말은 일체 내 자신의 어떤 것에 대해서 내가 믿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나를 믿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믿어라 믿느냐~’하는 노래 있죠? 안 믿어요. 자신에 대해서 안 믿습니다. 아무것도 안 믿어요.
그러니까 이 결과가 뭐냐 하면 사도 요한과 함께 붙어 있다가 떠나간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이게. 성령이 없으면서도 있는 척하면서 왔다가 사도 요한의 이런 말 듣고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요한일서 2장 27절 봅시다.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이상하게 믿어집니까?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이렇게 되어 있죠.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제가 여러분한테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이 ‘아무’ 속에 우리 자신이 포함됩니까, 안 됩니까? 포함되어야 되겠죠. 내가 나를 가르칠 필요가 없어요.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면, ‘내가 범인인 사건에 대해서 경찰서장이 나한테 수사를 맡기는 것’입니다. 내가 범인인데 내가 범인인 그 사건에 대해서 경찰서장이 지시를 해가지고 “어이, 수사팀장. 자네가 이번 사건을 수사해서 나한테 보고서 올리게.”라고 했을 때 그 사람이 수사를 어떻게 하겠어요? 일주일 뒤에 수사보고를 어떻게 올리겠습니까?
“서장님,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범인 찾았습니다. 제가 범인에 대해서 잘 압니다.” “그래? 왜 그리 빨리 됐나?” “제가 범인에 대해서 너무 잘 압니다.” “그 아줌마 제가 죽였습니다.” 그 아줌마 제가 죽였습니다. “그럼 너는 교도소 가야되겠네.” “지금 교도소 가는 게 문제가 아니고, 제가 사건을 해결했다는 게 중요합니다.” 이상하게 미친 것처럼.
지금 그 사람은 교도소 가는 게 문제가 아니고 자기가 사건 해결했다는 것으로 기뻐한다는 것은, 서장이 내게 주신 그 말씀이 그동안 나의 이 삶의 현장을 지배했다는 뜻이거든요. 그 사건을 조사하는 가운데서. 사건 수사하는 작업에 내가 대상으로 참여되어 있다는 사실이에요.
성경이,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그 모든 내용이 바로 그거에요. 이사야 말씀대로 ‘저희는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한다’라는 그 말씀에 대한 수사를 예수님이 자기 제자들에게 맡기는 거예요. 제자들은 “우리는 아니다. 그치? 우리는 다 알지, 그치? 무슨 뜻인지 알지, 그치? 그런데 불신자들 한번 조사해볼까?” 이러고 있다고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는 깨닫기 위해서 너희에게는 특별히 비유로 이야기해줄게.” 이랬거든요. 나중에 그 비유를 제자들이 아무도 못 알아봤어요. 46년 된 성전이 무너져서 사흘 만에 짓겠다. 우리가 그 뒷내용을 전혀 모른다 치고, 예수님께서 길 가다가 “몇 년 동안 지었나? 46년 동안? 내가 3일 만에 지을게.” “그걸 어떻게 사흘 만에 짓습니까?” 다 하겠죠.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다가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고 난 뒤에 그들은 이렇게 깨달았어요. 저 성전을 짓는 게 아니고, 그 말씀을 하신 성전이란 단어를 언급하신 그 예수님 자신이 바로 성전이란 사실을 알게 된 거죠.
그래서 아까 그 노래에 두 명이 탈 수 있는 배. 요한일서의 내용이 뭐냐? 절대로 혼자서 말씀처리하지 말라는 이 말이죠. 여기 영어 가사에 있잖아요. ‘and both shall row' 같이. both. 보쓰. 발음도 어려운데, 강의 제목 이걸로 하고 싶다, 정말. 함께. 같이. 더불어. 사귐. 다 같은 말이에요. 요한일서의 말씀이에요. 성령이 함께하사 이 일은 네 일이 아니고 예수님 내가 입에서 나온 모든 말씀을 내가 성취하는 바로 나의 일이라는 거예요. 나의 일에 네가 거기에 같이 성령에 의해서 부름 받은 거예요.
넌 어차피 쪼다에요. 아무것도 못해요, 우리는. 돌아서면 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에 미쳐가지고 아휴, 요새 사는 게 맛이 없네, 이러고 있다고요. 뭐 재밌는 일 없나, 이런 식으로. 뭐 류현진이도 공 던지는 폼 보니 뭐 프로야구 한화 응원 할랬더니만 류현진 벌써 2패해버렸고 졌고. 그다음에 손흥민이는 왜 소식이 없어, 이런 거. 남자들은 그런데 여자들은 요새 무슨 재미로 사는지 모르겠어요. 여자들은 무슨 재미로 살아요? 뭐 신상 나온 거 평가질? 신상 나온 거 합니까? 아니면 연예계에 누가 또 이혼했는가 그런 거 보는 재미에요?
남자나 여자나 이 세상에 재미는 돈 버는 재미보다 더 위대한 재미는 없습니다. 그래서 유대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 있어요. 돈을 썩히면 비료처럼 냄새가 난다는 이야기 있어요. 퇴비처럼 냄새가 난다. 돈은 굴려야 맛이지. 퇴비 놔두면 썩는 냄새 나잖아요. 돈은 놔두면 안돼. 돈은 자꾸 굴려야 돼. 이게 유대인들 탈무드의 처세술이에요. 이게 바로 사는 즐거움과 재미입니다.
사는 즐거움과 재미의 특징이 뭐냐? 욕망이 육신처럼 부유물처럼 떠다녀서 이 바람 불면 확 떠밀려 울고불고 난리고 짜증내고 난리고 도대체 고정된 자리가 없어요. 언약의 자리가 아니에요. 육신의 욕망이라는 게. 탐심은 끝이 없고. 자꾸 말씀 버리고 복음 버리고 세상 쪽을 향하여 돈 벌어서 남들 보기에 자랑질하고 싶은, 그래서 그 나름대로의 내가 세상을 이겼다 외치고 싶은.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그래도 돛대처럼 살았다는 이름을 외치고 싶다. 세상은 나를 보라, 뭐 이런 거.
이거는 혼자 살 때나 하세요. 혼자. 주님이 가만두지 않죠. 그러니까 우리의 그 못된 성격을 주님께서 성령께서 사랑으로 계속해서 내가 주님 사랑하지 않았다는 이 말씀대로 “너 사랑하지 않았지? 그러니까 말씀대로잖아.”
그러면 비유가 뭐냐? 예수님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은 이것은 진짜 현실이고요. 비유도 아니고요. 실제로 죽었다가 실제로 부활했어요. 내 지갑에 돈 있는 것만 현실이 아닙니다. 진짜 현실은 예수님의 십자가 지혜, 그 능력. 그걸로 모든 것은 만사 다 끝났어요. 이제는 그 십자가를 향하는 말씀이 우리 속에 있어서 날마다 십자가로 기뻐하고 계속 새롭게 새롭게 끝없이 고마워할 때 바로 우리는 언약에 기초를 둔 영원한 주의 백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거짓 거짓하지만 우리 자신이 거짓됨을 십자가 피 앞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이것이 우리 인생의 기쁨이고 감사고 인생의 맛이고 재미고 즐거움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