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

가짜 인간

아빠와 함께 2024. 5. 11. 18:36

서울강의20240509a 요한일서 2장 22절(가짜 인간)-이 근호 목사


오늘은 요한일서 2장 23절입니다.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Whoever denies the Son does not have the Father; the one who confesses the Son has the Father also.

예수님이 계셨다는 것, 이렇게 생각하시면 쉽습니다. ‘예수님이 계셨다’는 것은 무엇과 견줄 수 있느냐면 ‘내가 여기 있다’가 현재 여기서 대결구조를 형성합니다. 내가 여기 있는 것과 재원씨가 거기 있다, 우리 지금 싸우는 관계에요? 아니죠. 인간 대 인간의 존재는 서로 친하게 지내면 되죠. 왜 인간은 인간하고 친하게 지내야 되느냐? 너나 나나 똑같은 세계 안에 구조 안에 놓여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셔서 인간 대 인간이 놓여있는 이 세계를 요한복음 1장5절에서는 어두움이라고 이야기해요. 어두움은 깜깜하다, 새카맣다 이런 것보다도 어두움을 무엇의 누락으로 표현하는데 ‘빛의 없음’을 어두움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두움은 자기가 어둡다는 걸 모르죠.

인간들은 이 세상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자는 거예요. 이 세상을 더 높은 데서 보면 이 세상에 뭔가 빠졌다고 생각할 텐데 이 세상 자체를 있는 그대로 봐서 처음부터 온전한 것으로 봐버리면 누락, 빠져 있음이라는 게 없죠. 빠져 있음이 없으면 내가 속해있는 세상을 어두움이라고 사람들은 알아채질 못합니다. ‘아, 깜깜해.’ 이건 밤에 하는 얘기지, 낮엔 깜깜하다고 하질 않죠.

성경에서는 빛이 없으니까 어둡다는 거예요. 그러면 빛이 있는 세계, 빛의 세계는 뭐냐 하면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빛이라는 거예요. 예수님 계시게 되면 빛이다. 그럼 인간 대 인간, 너와 내가 있는 인간세계는 어두움이 되는 이유가 예수님이 여기 계시지 않기 때문에 이게 어둡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제가 아까 말한 대로 예수님이 계시는 것과 내가 있는 것이 어떤 상태에 있다? 서로 대결상태에 있는 거예요. 서로 결합될 수 없는 상태, 충돌될 수밖에 없는 그런 세계죠. 붙었다 하면 폭발되는 세계. 어두움이 빛을 이길 수가 없죠. 피조세계가 창조자를 못 이기잖아요.

그러면 요한복음에서 또는 요한일서에서 이 세상 자체는 어둡고 빛이 없다 했는데 예수님은 지금 아버지와 함께 있다고 되어 있거든요. 그러면 아버지가 함께 계신 예수님이 없다는 말은, 어두움에는 뭐가 없다는 거예요? 어두움에는 하나님 아버지가 없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 아버지가 없는 곳.

그래서 23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다. 그리고 24절에 보면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럼 여기서 이제 강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질문 하나 던지고 시작하겠습니다. ‘지옥이란 뭐냐?’ 지옥이 뭐냐? 여기 24절, 25절에 의하면 아들 예수님 안과 아버지 안에 있지 않으면 그것을 지옥이라고 해요. 아들의 안과 아버지 안에 있지 않으면 그게 바로 지옥입니다.

그러면 예수님 안과 아버지 안에 있지 않으면 지옥이 되는 이유는 거기에는 25절에 의하면 영원한 생명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이것은 확정났어요. 확정된 거예요. 확정된 것. 쓸게요. ‘지옥이란 확정된 거다. 확정된 것.’ 지옥에서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묻지를 말아라. 지옥은 지옥다워야 되니까. 확정된 거예요.

그래서 지옥에 있는 사람이 영생을 탐한다는 것은 지옥답지 않죠. 지옥이 지옥답다는 말은, 지옥은 어두움이거든요, 어두움은 반드시 대결상태가 이루어져야 돼요. 그래서 생명이 생명 되려면 반드시 어두움의 세력에 의해서 거부당하는 요소가 있어줘야 천국이 천국입니다.

방금 제 이야기에 인간위주가 있어요, 없어요? 전혀 인간위주가 없어요. 확정된 거예요. 인간들이 어떻게 하고 이런 것과 관계없어요. 역시 인간들을 다 빼는 거예요. 빛과 어두움, 어두움과 빛이에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어두움의 세계 일부를 구성하고 있어요. 어두움의 세계.

약간 늦게 오신 분을 위해 다시 하면, 어두움의 세계는 너와 나가 있고 너와 나의 세계 특징이 뭐냐? 결핍을 모른다는 거예요. 결핍을 모른다. 태어나보니까 하늘이 있고 태어나서 보니까 강이 있고 바다가 있다. 뭐? 이게 뭐가 문젠데? “그건 어두운 거예요.” “뭘 어두워? 낮에 해 뜨는데 뭐가 어두워요? 밤에 가로등 불 켜는데 뭘 어두워요?” 약간 어둡긴 하겠다만.

이 세상 자체에 대해 문제 삼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문제 삼을 이유가. 그래서 인간의 관심사는 ‘내가 문제 있다’가 아니라, ‘문제없는 이 세상에 얼마나 잘 적응하느냐’ 이게 평생 필생의 소망입니다. 평생을 걸쳐서 달성하고 싶은 목표가 뭐냐? 이 세상에 보다 적응하는 자가 살아남는 자다, 그런 의식이죠. 요지부동이죠.

방금 제가 한 이야기를 이렇게 봅시다. 어두움은 어둠 속에서 빛은 빛 속에서 뭐가 있느냐? ‘관계’가 형성되어 있어요. 관계가. 23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이것은 뭐냐 하면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거예요. 관계되어 있다는 거예요.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다’ 이렇게 해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에 눈뜬 사람은 생명, 영생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 세계에서의 관계는 어떤 관계입니까? 인간세계는 어두움이라 했죠. 어두움은 뭐라 했습니까? 인간세계 자체가 지옥이라는 말은 거기에 아들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그래서 어두움이라는 거예요.

요한복음 용어를 따라서 자꾸 연결, 연결시키려 하니까… 요한복음 개념 자체가 어떤 융통성을 용납하지 않아요. 그냥 이런 뜻이에요. ‘그 개념 안에 다 들어 있잖아. 너희가 앞으로 체험해보면 알 거야.’ 뭐 이런 식이라니까요. 똑같은 개념을 여기도 쓰고 여기도 쓰고 저기도 쓰는 이유가 그 개념과 개념 사이에, 아버지와 아들, 생명, 영생, 어두움-2장 11절에도 나와요, 어둡다는 게- 이런 개념들을 가지고 하나하나 집어내어서 이게 뭡니까, 저게 뭡니까 묻지 말고 그 관계가 어떻게 서로 얽혀 있는가, 그 얽혀 있는 것을 포착하라는 겁니다.

어두움은 어두움대로 빛의 세계는 빛의 세계대로 관계가 있는데, 빛의 세계는 아버지와 아들과의 돈독한 관계가 있고 어두움은 바로 그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빠져있고 누락된 것이고 그게 이 세상이다. 그걸 주님은 어둡다고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이 있든 상관없이 그들은 세상에 잘 적응하고 잘 살고 있는 거예요. 이 세상에.

요한일서를 썼던 분도 사도 요한이고 요한복음을 쓴 분도 사도 요한이거든요. 요한일서의 개념을 찾기 위해서는 그 개념을 받쳐주는 사건들이 있다고요. 예수님의 사건. ‘그 예수님의 사건을 요한복음은 요한일서에서 어떻게 그걸 해석해서 정리했는가’ 이렇게 생각해야 되거든요.

그래서 요한일서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꾸 요한복음의 사건으로 되돌아가야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그때 무슨 말을 했지만 그 당시에는 제자들도 몰랐었는데 성령이 오고 난 뒤에 ‘예수님의 한 마디 한 마디, 예수님의 표정과 움직임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고 성취되는 내용이었구나.’ 하는 거예요. 그걸 요한일서에 다 담아놓은 거예요. 최종 정립해서.

요한복음 1장에서 “빛이 왔으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되어 있어요. 그럼 어두움은 어두움대로 빛은 빛대로 따로 있는 거예요. 이 어두움의 세계에는 영생이 없습니다. 영생이 없어요.

그러면 제 질문이 뭐냐? ‘지옥이란 뭐냐?’ 확정된 것인데, 지옥이란 존재+존재. 있음과 있음의 집단, 이게 바로 어두움이에요. 지옥이란 있음과 있음의 집단. 너 있고 나 있고, 에요. 지옥이라 하는 것은 뭐 염라대왕 어떻고 괴물 나타나고 불붙고 그런 거 생각했는데, 요한복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너 있고 나 있는 것. 나 말고는 다 너니까 나 말고 다수의 너가 있어서 같이 어울려 있는 것, 이게 바로 지옥이다. 이게 지옥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요지부동 그 지옥상황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한 적 없다. 이 말은, 지옥은 자기가 지옥인 걸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는 거예요.

이렇게 보니까 사도 요한이 상당히 과격하죠. 상당히 과격해요. ‘너나 제대로 하세요’가 아니에요. 너나 제대로 하라 하면 이건 존재에 관한 거잖아요. 지금 사도 요한은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없다,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이 없으면 아버지와 예수님 관계가 없으니까 지옥이다 이 말이죠.

예수님을 존재로 보지 말라는 이유가, 지옥이 존재와 존재(존재+존재)잖아요. 거기다 플러스(+), 빨간 걸로 할게요, +예수님, 예수님이 딱 등장하니까 사람들은 ‘나도 존재, 너도 존재, 예수님 당신도 존재’ 이렇게 하거든요. 예수님은 존재가 아니고 뒤에 아버지가 있죠. 예수님은 존재가 아니고 관계에요, 관계.

그리고 나, 너는 그냥 존재로 시작해서 존재로 끝나기 때문에 뭐가 날아가요? 관계라는 게 성립이 안돼요. 서로서로 잠시 기쁘고 이용하고 서로 친하게 지낼 수는 있지만 그러나 항상 후다닥 어디로 돌아옵니까? 자기 존재로 돌아오는 거예요. 자기 존재로.

그러면 성경에서 지옥이면 그냥 지옥으로 살지, 빛은 왜 등장했는가? 예수님이 빛으로 등장하신 이유가 굳이 있는가? 그냥 지옥이면 지옥대로 살도록 내버려두고 나중에 심판하면 그만이지, 왜 예수님께서 이 지옥 같은 세상에 오셨는가 하는 거예요.

이제 어렵다 정말. 어려워요.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가 예수님 몸의 변화를 통해야 밝혀진다는 거예요. 몸의 변화를 통해야 밝혀지는 거예요. 예수님 몸이 변해요. 그 변하는 이유가 예수님을 못 잡아먹어서 달려들어서 그런 거예요. 예수님을 가만두지 않는 거예요.

예수님 존재의 몸은 숨어있는 아버지와의 관계에 의해서 몸 자체가 변화되는데, 이 변화는 뭐 예수님께서 요술하듯이 ‘얍! 내가 몸이 변한다’ 이게 아니라 몸이 변할 때 여기 뭐가 동원되느냐 하면 모든 구약의 성경이 다 동원돼요. 이 몸의 변화에 말씀이 주어지는 거예요. 말씀이.

그러면 예수님의 그 몸이 뭐로 변하느냐 하면 나중에 뼈로 변해요. 요한복음 19장에. 오늘 할 게 많기 때문에 여러분 귀찮게 하지 않고 내가 쭉쭉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오늘 할 게 많아요. 요한복음 19장 36절에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몸 중에서 뼈를 주목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예언, 성경말씀과 관련되는 모습으로 몸이 보여줘요.

이거 진짜 어려운 건데요. 여러분 믿고 그냥 어려운데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하나님의 관계 때문에 변한다는 말은, 어떤 의미냐면 예수님 몸의 변화에 따라서 하나님 자체가 변한다는 말도 돼요, 이게. ‘하나님이 변한다? 그건 신이 아니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죠.

인간의 몸은 젊었다가 나이 들어 늙었다가 할 수 있지만 인간의 그 몸은 그냥 애초부터 예상한 몸이에요. 그냥. 누가 칼로 찌르고 안 하는 이상 자연스럽게 늙어죽는 몸이에요. 자연스럽게 늙어죽는 몸이죠. 거기에 대해서 인간들은 자신감을 갖고 있는 게 나만 늙어죽는 게 아니고 남들도 다 늙어죽으니까.

자신의 몸은 그냥 이 몸으로 끝까지 내 몸으로 가는 거예요. 어떤 관계가 없어요. 나는 나랑 계속 상대하고 있는 거예요. 내 존재로서 시작했으면 마지막도 내 존재로서 끝나는 거예요. 왜냐하면 아버지하고 관계가 없으니까. 그걸 뭐라고 했어요? 어두움이라 했죠. 어두움. 그게 어두움이에요.

늦게 오신 분을 위해 다시 말씀드리면 어두움이란 뭐가 누락됐어요? 예수님과 하나님 관계가 누락된 것을 어두움이라 하고 그걸 바로 지옥이라 합니다. 왜 지옥이라 했어요? 뭐가 없기 때문에 지옥입니까? 불이 막 세서? 꼬챙이로 찔러서? 뭐가 지옥이에요? 생명이 없어 지옥이잖아요. 생명이 없으니까.

백화점에서 생명 팝니까? 안 팔죠. 그럼 그 백화점, 지옥입니다. 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너나 나나 똑같은 인간들이 들락날락해요. 거기에 예수님이 들락날락하지 않아요. 그냥 같은, 존재하는 인간들이, 존재, 있는 인간들 몸이 왔다갔다 하는 거예요. 우리는 거기에 너무 익숙해졌고 너무 적응이 잘 되어 있어요. 그래서 지옥이 지옥인줄 모르고, 뭐가 누락된 줄 모르고 그냥 이 몸 가지고 이 세상에 잘 버티면 살만큼 살다가 뭐 죽으면 그만이지, 이런 식이라. 누가 가면 어디 가는지도 모르겠고.

예수님이 오시면서, “너희 전체는 어두움이다. 나는 빛으로 왔다. 그런데 어두움이 빛을 영접하지 아니한다. 어두움을 어두움으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 자기에게 누락된 걸 모르고 있다. 이것은 아버지와의 관계가 끊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다. 세상은. 나는 빛인데 아버지와 관계가 있다.” 이렇게 오신 거예요.

그러면 “너희 아버지는 누군데?” 물을 거 아니에요. 너희 아버지는 누군데? 주님이 하나님이라 했어요, 아버지라 했어요? 아버지죠. 뭘 피합니까? 이 성경말씀은 하나님이죠. 성경말씀은 하나님인데, 예수님이 마치 하나님을 잘 아는 식으로 나는 그의 아들이라 이야기했어요. ‘마치’라는 말은 적당치 않아요. 정말 잘 알아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홀로 아는 것처럼, 단지 혼자만 하나님 아는 것을 ‘아버지’라고 표현하는 거예요. 아버지.

혼자만 아버지를 알고 그리고 아버지가 아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모든 성경말씀이 거기에 동원되어 있어요. 모든 말씀이 총동원되어 있어요. 그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에요.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 인간에게 쏠리는 게 아니고, 오히려 인간에게 쏠리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어디에 전부다 모인다? 집중된다? 예수님께만 모든 말씀이 다 집중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아버지와 아들에게만 영생이 있어요. 나머지는 지옥이죠. 영생이 없으니까. 그리고 대자연도 예수님께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영생은 공짜다’ 이런 이야기를 해요. 주님은 영생을 공짜로 여기는 사람에게 영생의 값을 찾으십니다. 공짜라 하는 것은 그 뒤에 공짜로 소유에 성공했다 뭐 그런 뉘앙스가 있죠. 그냥 공짜로 끝나는 게 아니죠. 내가 언제든지 가져갈 수가 있다 이 말이에요.

예식장에 가서 결혼식 끝나고 나중에 식사할 때도 그거 공짜 아닙니다. 표 줘야 돼요. 물론 먹을 때는 표 낸 사람끼리는 그냥 공짜로 먹으러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연회식장 바깥에 있는 사람한테는 표가 있어야 들어가는 거예요. 그 표 얻으려고 하면 부조내야 되죠. 요새는 관례가 뭐냐 하면 결혼식 할 때 물어야 돼요. 실례지만 식사비 얼마 나옵니까? 얼마 전에 결혼식 했는데 식사비가 4만5천원 나왔어요. 아주 싼 거죠, 서울에 비해서. 그럼 계산해야 돼요. 자, 내가 부조를 얼마 해야… 식사비가 1인당 4만5천원이니까 둘이 하면 9만원, 그럼 부부가 참석하면 도대체 부조를 얼마 해야 부조했다는 티를 낼 수 있느냐? 최소 20만원 해줘야 10만원은 값 치르고 10만원 한 셈이 되니까요. 옛날 촌에서처럼 내 때에 촌에서 불 피워가지고 육개장 끓이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뭐 밥 퍼주고 하는 그거, 막걸리 먹고 또 행패부리고 싸우던 그때 그 시절은 아니잖아요.

영생에 값이 있다 이 말이에요. 영생의 값. 그 영생의 값을 누가 치러야 되는가? 어두움이 치러야 된다는 거예요. 어두움이. 감히 영생이 왔는데 어두움이 공짜로 받을 수 없죠. 그럼 어두움이 갚아야 될 영생의 값은 뭐냐? 새카만 어두움 그 자체에요. 짙은 어두움이에요.

짙은 어두움이 되려면 철저하게 자기 부정이 되어야 되겠죠. 자기 부정. 자기가 죽는 것도 모자라요. ‘에이, 목숨 하나 버리지. 주님을 위해서.’ 안 돼. 그것도 안돼요. 그런 건 베드로가 다 했어요. ‘제가 목숨 바치겠습니다.’ 안 돼. 그거 안돼요.

그래서 이 존재가 갖고 있는 어두움의 깊이를 주님 앞에서 값으로 다 이게 노출되어야 되고 다 들추어져야 돼요. 철저하게. 그러면 들추는 방법은 뭐냐? 그들이 예수님을 학대해야 됩니다. 학대하는 방법은 뭐냐? 가만있으면 예수님을 별로 학대 안 해요. 너는 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삽시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어떤 방법을 하느냐 하면 요한복음은, 사람들이 혹하도록 만들어요, 예수님께서. 그래서 기대를 잔뜩 하고 예수님께 달려들게 만들어요. 요한복음 6장에서. 부조도 안 받고 주님께서 또 공짜로 오병이어 가지고 오천 명을 먹였잖아요. 사람들은, 진짜 이거 공짜다! 이런 분을 우리 임금 삼아야 돼. 한동훈 저리 가! 이재명 저리 가! 예수님이 우리의 대통령해야 돼. 모든 문제 해결.

혹하게 만들고 반기게 만들고 적극적으로 추종하고 따라오게 만들어요.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주님이 그걸 가지고 영생의 값을 치르는 대가로 사용해요. 예수님께서 거기다 몇 마디 딱 던지니까 그들은 예수님한테 희망 걸었던 거보다 몇 배나 더 분노와 실망스러움을 느끼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말씀은 어렵도다” 그다음에 하는 유명한 말, “누가 믿을(들을) 수 있느냐”(요 6:60) everybody 아무도 못 믿어. everybody가 아니라 nobody에요. nobody nobody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거예요.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것.

그러니까 지옥이 철저하게 지옥으로 살래. 본인은 그런 뜻이 아니지만 주님 보시기에 우리는 ‘지옥에서 나 안 나갈래. 나 지옥이 좋아. 나 이 지옥 껴안고 살래. 나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관계 없어도 괜찮아.’ 왜? 내가 다른 내가 되면 안 되니까. 나는 당신으로 인하여 내가 다른 내가 되는 것을 내가 용납하지 않는 거예요. 내가. 나는 내 존재로서 충족되니까 이것을 나는 계속 밀어붙이겠다는 거예요.

그럼 여러분들 이야기 들어보니 이야기가 좀 이상하죠? 어떤 점이 이상하냐 하면 우리가 알기로는 영생은 공짜로 알고 있고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는 걸로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믿을만한 요소를 누가 먼저 미끼 던지느냐 하면 예수님 쪽에서 미끼를 던진 거예요.

강의하시다가 설교하시다가 ‘어이구, 벌써 점심시간 됐네. 다들 집에 가시고 잡숫고 오세요.’ 이러면 아무 문제없어요. 아무 문제없고 점심 먹고 다들 올 거예요. 야, 이건 권세 있는, 권세 있다는 말은 우리가 못 들은 새로운, 말이다 해서 올 건데 ‘너희들이 식사해결해라.’ 제자들보고. 제자들이 무슨 재주가 있습니까? 성심당 빵집 그거 대전까지 가서 오천 명 먹을 빵 사려면 성심당 문 닫아야 돼요.

거기서 빌립이 시험받았고 그다음 안드레가 애 도시락 들고 왔어요. 안드레도 참… 애 도시락 먹도록 놔두지, 그걸 뺏기는 또 왜 뺏나. 그 도시락을 들고 왔는데 보리떡 5개, 물고기 2마리. 어린애 먹는 거예요. 어른 먹는 거 아니에요. 양이 충분치 않아요. 그걸 놓고 축사하시고 떼어줬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그게 공짜죠. 공짜 밥을 먹은 거예요. 공짜 밥을.

그래서 제자들과 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기위해서 적극적으로 정말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모시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면 그들과 같이 목회하시고 천국백성 만드시면 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게 아니고 와~ 오니까 그야말로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다 나가떨어지게 했어요. 그 많은 제자들 중에서 하나도 없이 다 가버렸다 이 말이죠. 열두 제자는 빼놓고 나머지는 다 가버린 거예요.

왜 떡 줄 때는 공짜인데 영생 줄 때는 공짜가 아니죠? 야, 참 이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니죠? 믿기만 하면 영생 주는 거 아닙니까? 아니죠. 믿기만 하면 영생 안 주죠. 이 말은, 영생은 인간이 값을 치러야 되는데 내가 있는 존재 자체가 지옥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에게만 비로소 영생이 공짜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어느 인간이 자기가 지금 ‘나는 지옥에 태어났어. 지옥에서 살다가 지옥으로 빠져죽는다. 아하하, 기분 좋아. 나 이 세상 너무 좋아.’ 이런 미친 인간이 어디 있어요? 아니, 본인이 지옥에서 태어난 것도 인정 안하고 지옥에 산다는 것도 인정안하고 지옥 간다는 것도 인정 안합니다, 인간은!

내가 늘 즐겨 부르는 노래 있죠. ‘저 바다에 누워~’. 이 한 몸으로 태어나 저 바다에 누워~하잖아요. 우리가 태어나기를 지옥에서 어두움에서 태어난 거예요. 왜? 주님과의 관계가 없으니까. 아버지와의 관계가 없으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죠. 제 말 잘 들으세요.

하나님과 관계가 있고 그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로 말씀을 보잖아요. 보는데 그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모세의 율법을 보면서 하나님 믿는다고 자부했는데, 요한복음에도 굉장히 많이 나와요, 거기서 뭘 못 찾았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 자녀라는 관계성을 찾아내지 못했어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요한복음에 나온 말씀처럼 모세가 너희를 고소할 것이다. 결국 저희들이 이거 지키면 천국 간다고 지키고 있는 그 법이 오히려 우리 자신들이 소경이며 이거는 어두움이며 예수님을 죽여야 될, 예수님을 시체로 만들어야 될 그 주인공들인 거예요. 예수님을 죽여 없애버릴 주인공, 빛의 전사들이에요. 그걸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대립관계죠, 대립관계. 대립관계에 있는 거예요.

지금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요. 요한일서나 요한복음을 한두 번 봤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수없이 보면서 자기 쪽에 어떤 변화가 없어요. ‘아, 나는 처음부터 지옥가야 되는구나.’ 이런 변화가 없다고요. ‘나 있는 자체도 괜찮지만 괜찮은데다가 요한복음, 요한일서까지 공부하니까 앞으로 더 괜찮을 것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영생, 피를 값없이 주셨으니까 주겠다는데 받지 뭐. 공짜로 받지 뭐. 그럼 나는 예수님과 더불어서 천국 간다.’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이것은 인간의 존재와 존재가… 지금 예수님은 아버지와의 관계에 있잖아요. 아버지와의 관계라고요. 이 관계로 들어가야 되는데 들어가지를 못해요. 인간이라는 존재가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에 들어올 수 있는 방안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요한일서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라고 해서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하나님 믿고 나는 천국 가야지’ 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이 앞장서서 일단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먼저 이야기를 하라는 거예요. 예수님에 대해서.

그럼 오늘날 우리 같으면 ‘아, 예수님 믿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으로 온 걸 믿습니다. 육신으로 오신 걸 믿습니다.’ 이렇게 한단 말이죠. 그런데 그 자리가 어떤 사고방식의 자리냐 하면, 오병이어 때 떡 해주고 공짜로 양식 줬다고 해서 ‘아, 나 양식주신 예수님을 나는 믿습니다.’하는 그 사고방식과 똑같은 사고방식이에요. 추방되기 직전입니다. 주님 곁을 떠나기 직전의 사고방식, 마음가짐이에요.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 간에 일어나는 그 일에 대해서 그 일과 동일한 일이 그다음 예수님과 나 사이에서 동일하게 일어나줘야 돼요. 그런데 공짜라고 해서 그냥 맞먹으려고 하는 거예요. 동일하게 일이 일어난다는 말은, 관계없는 자에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새롭게 거기다 적용된다는 뜻이에요.

존재라는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나에게서 와서 나로, 나 하나만 있으면 된다는 거예요. 나 하나만 있으면 되는 게 존재에요. 여기 있음,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관계라 하는 것은 나 있음이 아니고 적어도 몇 명이 되어야 돼요? 둘이 되어야 관계가 생겨요. 둘이 되어야. 예수님의 존재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위한 존재가 되는 거예요.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위해서. 거기서 영생이 있으니까요. 인간은 꿈쩍도 안하죠.

그래서 여기 2장 27절에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이렇게 되어 있죠. 이 말은 뭐냐 하면 성령이 너희한테 있는데 그것은 누가 줘야 돼요. 주님께서 성령을 준 사람에게만 성령이 그 사람에게 임합니다. 그러면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드디어 관계에 들어가는 거예요.

제가 이 짧은 시간 관계상 요한복음에 나오는 그 많은 구절을 다 찾아드릴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들어가야 되겠죠. 중요한 것은 들어가야 되는 거예요. 아버지와 아들. 내 안에 아버지가 있고 아버지 안에 내가 있다는 것. 요한복음 10장 뭐 여러 군데 많이 나와요. 요한복음 7장, 5장에도 나오고. 나는 아버지 안에 있다.

그러면 그렇게 이야기하는 예수님이 인정하는 자기 백성은 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있는 것처럼 너희들도 아버지 안에 있고 내 안에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겁니다. 그러니까 뭡니까? 성도는 특징이 뭐냐? 그냥 나 존재로서 있는 게 아니에요.

존재로 있어버리면 이게 지옥이죠. 지옥의 특징을 여러 번 했는데 또 합시다. 지옥의 특징은 뭐냐? 자기 누락을 모른다는 거예요. 자기 결핍을 모른다는 거예요. 태어나면서 하나님과 무관계에 있다는 말은 곧 영생이 없다는 거거든요. 인간은 이래요. ‘나 영생 같은 거 없어도 괜찮아요.’ 이렇다니까요.

어린이집에 가서 물어보세요. ‘혹시 여기서 오늘 점심에 피자 먹을 사람?’하면 ‘저요! 저요! 저요!’ 하는데, ‘오늘 점심에 영생 먹을 사람?’ 조용. 아무도 손 안 듭니다. 지금 영생은 나한테 그다지 필요치 않아요. 그러면 피자는 왜 필요한가? 내 몸을 내가 추스르기 위해서는 본능적으로 필요한 거예요.

오병이어 줄 때 사람들이 주님한테 막 삐쳐서 떠났습니까? ‘뭐 맛있는 거 주지. 오병이어가 뭐야?’ 이렇게 삐쳤습니까? 아니죠. ‘놀랍다. 놀랍다.’ 이러면서 자진해서 추종했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네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 배부르면 주님과의 관계가 정상입니까? 자기 존재나 볼록하니, 아랫배나 볼록하니 나오지, 관계가 볼록하게 나온 건 아니라 이 말이죠.

그래서 주께서는 “영생 줄까?” “영생 주세요!” “모세는 만나를 줬는데 나는 영생 줄까?” “영생 주세요!” “그러면 너희들이 나를 찔러 죽여라.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들에게 영생이 없다.” 그 이야기 듣고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했겠어요? ‘예수님, 저희들은 주님한테 호의적입니다. 난 주님을 좋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따라왔잖아요. 물 건너 산 건너 바다 건너서 따라왔잖아요. 그런데 저한테 예수님을 죽여야 된다고요? 그게 모세 율법의 완성이라고요? 믿지를 못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믿지를 못하겠습니다.

여러분, 믿음이라는 게 얼마나 대단한 믿음을 갖고 있는가를 알죠? 믿음은 예수님의 영생을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믿음은 예수님의 영생을 차단하기도 하는 게 믿음이에요. 그것을 요한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믿음은 육에서 나와서 육으로 가면서 여기서 인간들의 믿음이 나온다는 거예요. 육에서 육으로 가면서 믿음이 나온다는 거예요. 어두움의 믿음이죠. 빛을 거부하는 힘이 믿음으로 나오는 거예요. 빛을 거부하는 힘이.

그래서 유대인들이 한결같이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는 여호와를 믿습니다.’ 요한복음에 많이 나와요. ‘여호와를 믿습니다.’ 그리고 베데스다 못가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믿습니다. 이 호수 물이 찰랑할 때 먼저 뛰어들면 우리는 병이 낫는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아직 어렵고 중요한 것은 시작도 안했어요. 뭐냐 하면 예수님의 존재가 변하는데 누가 협조를 해줘야 되느냐 하면 세상 사람들이 특히 불신자들이 협조를 해줘야 예수님의 몸이 변할 수가 있어요. 아까 봤죠. 뼈까지라도 성경말씀과 관련되어 있어요. 뼈까지라도.

뼈가 나왔다는 것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예수님의 육이 발려지고 그 안에 꽉차있던 말씀이 예수님의 몸을 통해서 성취되면서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것, 처참한 죽음을 통해서 비로소 말씀이 성취된다는 겁니다. 그 관계가.

이건 말보다도 실제로 보는 게 좋겠어요. 요한복음 15장 25절,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 잘 한번 보세요. 이 성경말씀을 예수님 빼고 다른 인간이 지킬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왜 못 지킵니까?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말씀의 관계성이 다른 인간에겐 성립되지 않고 있어요. 이게 성립되지 않으면 다른 인간은 그냥 지옥맨, 지옥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요한일서에서 너희에게 영생이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이에요? ‘너 지옥 가!’ 이런 뜻이에요. 아까 봤죠? 아들을 시인하지 않는 자에게는 아버지가 없고 아버지가 없으면 영생이 없다고 되어 있잖아요. 반대로 아들을 인정하게 되면 아버지를 인정한 게 되고 아버지를 인정하게 되면 영생이 있다,가 돼요.

그러니까 영생이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이에요? 우리한테 현재 뭐가 없다? 돈은 몇 푼 있는지 모르겠지만 뭐가 없어요? 부동산은 있지만 뭐가 없어요? 자식은 있지만 영생은 없는 거예요.

‘영생 없으면 영생을 어디서 구하는데? 영생을 어디서 구하는데?’ 대번 그렇게 나오겠죠. ‘영생 나 갖고 싶어요.’ 없다니까 갖고 싶다는 거예요. 값을 치르라니까, 값을! 무슨 값? 말씀에 의해서 아들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잖아요. 그러면 너는 너에게 버림받을 수 있느냐를 묻는 거예요! 네가 너에게.

지금 나를 위해서 영생 받으려고 하는 입장에서 내가 영생 포기해? 포기각서 써? 어디 뭐 사채 썼어요? 신체 포기각서? 내가 어떻게 영생을 포기해요. 영생을 얻고자 내가 예수님을 믿는데, ‘예수 믿는 순간 너는 영생 얻은 자라고 자부할 수 있나?’ 이게 됩니까, 안 됩니까? 이게 안 되죠. 이게 될 수가 없죠.

그러니까 모든 교회 다니는 사람들 다 사기꾼들이죠. 목사도 사기꾼이고 전부다 사기치고 있는 거예요. 넘볼 걸 넘봐요. 넘볼 걸 넘봐. 안 되는 짓을 하고 있다고요, 이게. ‘그냥 세상에 적응해서 교회 다니고 세례 받았으니까 챙길 건 챙겼고 세상에 나가서 돈 벌고 살고 그렇게 살면 되지. 그렇게 살면 미완성인 내가 또 완성될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을 너무 안일하게 가져가는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든 말든 뭔 뜻인지… 알아서 죽었겠지 뭐. 십자가 믿습니다, 이러면 끝나는 거예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 시편 35편 19절, “무리하게 나의 원수 된 자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시며 무고히 나를 미워하는 자로 눈짓하지 못하게 하소서” 무고히 나를 미워하는 것이 이 어두움 세계의 일부겠습니까, 전부겠습니까? 전부죠. 왜? 어두움의 요소니까. 존재는 어두움의 요소에요.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끊어진 모든 존재는 동일한 본성을 드러내게 되어 있어요.

그다음에 시편 69편 4절, 거기에도 ‘무고히’라는 말이 나와요. “무고히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내 머리털보다 많고 무리히(무리하게) 내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 하는 자가” 이게 뭐 돈 관계있었습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했는가? 진짜 어려운 이야기할게요. 하고 첫째 시간 쉽시다. 이렇게 하나님을 미워하도록 누가 유발했느냐? 누가 예수님을 미워하도록 누가 유발했는가? 예수님이 유발했다니까요! 이게 전략이에요, 전략. 예수님이 유발했다고요.

예수님이 처음에 귀신 쫓아내고 물 위를 걷고 할 때 어땠습니까? 사람들이 혹 했어요. 메시아 왔다고 난리도 아니었죠. 걸려들었어, 너희들. ‘아휴, 예수님 가든 말든 나는 내 일 해야지.’ 이게 아니라 ‘그래, 우리의 소망이 왔어. 메시아 떴어, 떴어!’ 너도 나도 다 가는 거예요. 그들이 누구를 죽여요? 예수님을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10분 쉽시다.

 

 

서울강의20240509b 요한일서 2장 22절(가짜 인간)-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15장 4절에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오늘 본문인 요한일서 2장 24절에도,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 그다음 25절,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생명을 준다는 게 이런 거거든요. 본문을 딱 보게 되면,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면 생명을 얻는다’ 지금 이 이야기거든요. 이게 말이 됩니까? 부부가 한 이불을 덮어도 그건 안에 거하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꿈이 다르니까요. 같은 꿈을 꿉니까, 부부가? 아니죠. 그러나 예수님과 한 이불을 덮으면 같은 꿈을 꿔야 돼요. 이게 이 세상에서 성사될 일입니까?

이왕 말 나왔죠. 예수님 꿈은 뭐에요? 예수님 꿈은 말씀 완성이에요. 말씀 완성입니다. 다니엘의 꿈은 뭡니까? 다니엘의 꿈은 말씀 완성이에요. 다니엘. 느부갓네살 꿈도 말씀 완성이에요. 요셉의 꿈은? 말씀 완성이죠. 언약 완성이에요. 하나로 통일이 돼요, 모든 꿈이.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의 꿈은 오직 언약 완성이다.’ 이거 한번 실험해볼까요, 그럼? 교인 한 열댓 명 같이 잠자고 난 뒤에 적자는 거예요. 어젯밤에 꾼 꿈을 적어서 전부다 제출하시고 맞는지 틀린지 보죠. 하나도 안 맞죠. 하나도 안 맞아요. 그런데 예수님 꾼 꿈은 하나도 안 맞는데, 예수님 관계없이 인간들이 꿈꾼 것을 제출하라 하면 전부다 똑같은 꿈이에요. 육에서 육으로 가요.

그런 점에서 인간들의 꿈은 한통속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면 어두움이에요. 어두움에서나 꿀 수 있는 꿈을 다양하게 그들은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인간들이 여러분 다 다르다고 생각하죠? 인간들은 똑같아요. 똑같은 걸 꿈꾸고 있습니다. 똑같은 걸. 같은 어두움의 세계에 한통속으로 한 요소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똑같은 꿈을 꾸고 있어요.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 오실 때 예수님이 하는 일을 보고 그들은 오해한 겁니다. 네가 오해했다. 예수님을 오해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했다는 말이고, 예수님을 오해했다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그들은 그 속에 들어오지 못한 상태에 있다는 거예요. 만약에 만약에 그들에게 또는 제자들에게 성령이 온다면 성령은 예수님이 꾼 꿈과 동일한 꿈을 꿀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바로 예언 성취에요. 예언의 성취입니다.

그걸 일단 그렇게 생각해보시고 요한복음 15장 16절에 보면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는 말씀이 나오죠. 자, 선택했다는 거예요. 선택할 때는 예수님이 나를 선택했다고 보지 마시고, 오늘 강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거에요,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나를 선택해야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 우리가 끼어들 수 있어요.

이게 사도 바울이 말하는 세례하고 달라요. 사도 바울의 세례는 예수님과의 연합을 말합니다. 예수님과 연합을 말하지만, 사도 요한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에 끼어드는 것을 ‘거한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거한다. 거하기 위해서는 기존 세계에서 실망해야 되고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실망해야 되겠죠.

그런 점에서 [My first mistake]라는 1958년도 노래인데요. 그 가사를 한번 봅시다. 그냥 노래부터 틀면 또 이거 뭐 팝송 노래 공부하는 덴가 이럴 수가 있기 때문에… 일단은 들려드려야 되겠죠, 말은 그렇게 해도 어떤 노래인지. 일단 가사 보고요. 가사 보고 하겠습니다.

[My first mistake] Tennie Smith (1958)

My first mistake was seeing you
나의 첫 번째 실수는 당신을 만난 일입니다. (재밌죠? 초반부터 재밌잖아요.)
Right from the start, I guess I knew
바로 그 순간 알고 있었을 거예요. 앞으로 내가 어떻게 된다는 것을.
My second mistake was kissing you
나의 두 번째 실수는 (왜 자꾸 실수를 하죠?) 당신에게 키스한 것이었죠.
Cause you chained my heart and my soul too
왜냐면 당신이 나의 마음과 영혼까지 빼앗아 가 버렸으니까요
Then I dropped all my friends
그래서 (당신이 너무 좋아서) 난 친구들을 만나지도 않고 모두 멀리 했었습니다.
Cause I had only you on my mind
왜냐면 제 마음 속엔 오직 당신 뿐 이었으니까요.
(이거 도대체 실수를 한 거예요, 안 한 거예요, 지금? 그런데 왜 실수라 했죠?)
You grew tired of me, But I was too blind to see
당신이 점점 나에게 싫증을 내는데도 난 아무 것도 알아채질 못했어요.
(야, 이거 분위기 이상하게 흘러갑니다. 분위기 이상해요. 남자가 슬슬 이젠 다 빼먹고 싫증난다 이 말이에요? 뭐 신선한 게 없다 그런 뜻이에요? 싫증을 내는데도 난 알아채지 못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알았어요.)
My last mistake was letting you go
나의 마지막 실수는 당신을 보내버린 것입니다.
Cause we'll never meet again
왜냐면 우리는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And I still love you so
난 여전히 당신을 너무나 사랑하는데도 말입니다.
And I still love you so.
난 여전히 당신을 너무나 사랑하는데도 말입니다.

사랑하는데 뿔따구 난 사랑이에요. 당신이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까이기 전에 어떻게 한다? 원칙. 까이기 전에 깐다. 그쪽이 나한테 헤어지자 하면 내가 먼저 칼로 찔러 죽이든 그런 식이죠. 어떤 노래인지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노래가 재밌어요. 가사를 한번 보세요. 조금만 들려드릴게요. 나머지는 나중에 집에 가면서 찾아 들어보세요. 가락이 상당히 1958년도 답죠? 엔틱(antique)하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존재에서 존재로 돌아오는, 순환되는 방식입니다. 이것은 결혼하나 결혼 안 하나 마찬가지에요. 결혼해도 꼭 마찬가지에요. ‘아휴, 난 자식이나 믿고 살란다.’ 이렇게 된다니까요. 특히 이 부분, ‘당신이 점점 나에게 싫증을 내는데도 난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 존재가 성경을 보면서 영생 얻기 위해서 내 존재가 그 예수님을 나의 믿음의 존재로 간주하고 존재로 덤벼든 거예요. 존재로 덤벼들면 어떻게 됩니까? 이게 my first mistake였어요. 예수님을 모르고 믿은 거예요. 그리고 뭐 사업이 잘 풀리고 하면 ‘야, 예수님이 날 사랑하나? 복 주는 모양이다.’ 이렇게 되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망하고 난 뒤엔 어떻게 됩니까? 내 쪽에서 예수님을 버리죠. 예수님께 까이기 전에 까버리는 거죠. 그다지 예수님이… 믿기는 하지만 내가 몰빵 할 대상은 아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다시 자기 존재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좀 미안하거든요. 미안하니까 뭐라고 합니까? ‘And I still love you so. 난 그래도 당신을 사랑해요.’

거기에 대해서 이왕 나온 노래 하나 더 있으니까 봅시다. 방금 했던 이 노래는 상당히 순진해보이죠? 1958년도니까 순진한데 보다 더 시기가 지나서 현대에 가까운 오늘날에는 마음자세가 복잡하게 돼요. 복잡하게 되는데, [Only you]라는 Kate Purcell이 불렀던 노래 가사 한번 봅시다.

[Only you] Kate Purcell (1997)

In all of my confusions
내 모든 혼란 속에서
You tracked my mind not knowing a reason why
그대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내 마음을 추적했어요.
Sweetness soft, your embracing words you said, you know you're teasing me
달콤한 부드러움, 그대가 말한 포용력 있는 말들, 날 놀리는 거 알잖아요.
Caught up in a world of eagle not knowing where I can go
독수리의 세계에 사로잡혀 난 어디로 갈지 몰라요
(그러니까 이거는 스토킹 당하는데 스토킹 당하는 그 자체에 일단 행복을 느끼면서 거기에 푹 빠져 들어갔죠.)
Sleepless nights, I've been through and stayed when I dream of only you
잠 못 이루는 밤들, 그동안 겪어왔고 머물면서 당신만 꿈꾸고 있어요.
(스토킹을 저쪽에서 먼저 했는데 이제는 스토킹 당한 쪽이 스토킹하는 그런 입장으로 전환된 거예요.)
Only you, only you, only you, only you
오직 그대, 오직 그대, 오직 그대, 오직 그대

네 번이나 반복했죠. 이제 서서히 미쳤다 이 말이거든요. 미친 여기까지 한번 들어봅시다. 어떤 노래인지. 가락이 벌써 현대스럽잖아요. 서서히 미쳐가고 있죠. 오직 당신 뿐.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존재가 어떤 관계에 빠지게 되는 겁니다. 관계에 빠져서 그 관계 속에 사로잡혔는데 어느 정도냐? 독수리의 세계에 사로잡히는 것. 나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그런 위세에 눌리면서 그것을 자기가 새로운 존재의 보금자리로 전환하는 거죠.

그러면 이 [Only you]라는 노래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은 자기 존재가 무너지는 쪽으로 갑니까, 아니면 무너지지 않고 더 완숙해지고 완전한 쪽으로 갑니까? 인간은 어느 걸 선택해요? 어디에 빠집니까? 인간이 빠지는 것은? 나를 더 완벽하게 하고 더 지켜주고 안정된 쪽으로 키우죠.

바로 요한복음은 그 반대입니다. 그 반대를 예수님 쪽에서 먼저 실시해요.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1장에서부터 변이가 시작돼요. 그전까지는 예수님께서 알아서 병자를 고쳤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병 고쳤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왔잖아요. 따라왔는데 이제부터는 예수님이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의 신상에 어떤 변화를 야기하는 쪽으로 말씀이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성령께서 예수님을 이끌고 갑니다. 자기 신상의 어떤 변화를 야기하는 쪽으로.

요한복음 15장에서 택한다 했잖아요. 그전에 요한복음 10장에서는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안다고 되어 있어요. 그 말씀을 들으면 예수님의 몸은 멀쩡하고 멀쩡한 몸으로 자기 양들을 그냥 멀쩡한 자기 몸으로 데려와서 포근하게 안아서 구원한다는 그런 뉘앙스가 강해요.

그런데 11장에 오게 되면 나사로가 몸이 아픈데 병 고치러 가지를 않습니다. 그렇게 병을 많이 고쳐주고 귀신을 쫓아냈으면서 정작 나사로 가정은……. 나사로 가정과 예수님 관계는 남이 부러워할 정도로 돈독한 관계에요. 저 관계는 끊어지지 않을 관계처럼 생각하죠? 끊어집니다.

아…. 바닥까지 내려가는 거예요. 바닥까지. 예수님의 몸에서 보여주는 그것이 인간의 육이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육인 본인들이 원했던 욕망의 화신처럼 그런 모습으로 예수님 몸이 비쳐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인간의 몸은 육이에요. 엉터리에요. 가짜라니까요.

자, 여러분 이거는 아주 간단한 건데요. 예수님의 증인 되죠. 예수님의 증인. 성도를 예수님의 증인이라 하죠. 증인은 가짜입니까, 진짜입니까? 증인은 가짜에요. 예수님은 진짜죠. 예수님은 진짜에요. 예수님은 가짜를 가지고 자기 진짜를 증명하는 방식을 사용하십니다.

왜? 진짜 인간이 없기 때문에. 진짜 인간이 없어요. 인간은 아버지와의 관계가 끊어져 있어요. 그러니까 가짜에요. 영생이 없어요. 그냥 지옥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영생 갖고 있다는 것을 지옥 가는 사람을 가지고 증명해내는 증인으로 삼으시는 거예요.

도대체 이 관계가 어떤 관계여야 이 방정식이 성립되느냐 이 말입니다. ‘나는 가짜를 통해서 진짜 나를 증명한다’ 이 공식이 어떤 과정을 겪어야 이게 돌출되느냐? 이게 정립이 될 수 있겠느냐?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 누구보다도 가까운 관계,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좋아했던, only you only you only you only you 아까 노래 봤죠? 오직 주님만 있으면 좋겠다는 그 나사로 가정에서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합니다. 틀어져요.

마리아, 마르다가 달려들죠. 남의 집에 가서 좋은 일 다 해놓고 여기선 힘 빠졌나? 예수님을 그렇게 잘 대접하고 잘 섬겼던, 오시면 늘 주무시고 가셨던 그쪽에서… 우리 오빠 죽어간다는 소식을 뻔히 다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와야 될 그 주님이 우리 오빠를 기어이 죽여야 속이 시원했습니까? 내 오빠를 죽여야 속이 후련했겠습니까?

주님의 뜻은 이거에요. 네가 살아있지만 존재로서 살아 있잖아. 내가 아버지처럼 살아있는 게 아니고 존재로서 살아있어요. 단독으로 살아있다고요. 단독으로. 관계가 끊어진 거예요. 인간은 홀로 살고 있어요. 홀로 살고 있단 말이죠. 그럼 홀로 살고 있는 사람이 only you only you~ 하면서 예수님만이 최고라고 할 때는 혼자 사는 걸 포기하겠다는 말입니까, 안 그러면 내 가치를 높이겠다는 뜻이에요? 나 혼자 사는 것이 다치지 않고 나 혼자 살되 전보다 더 관계가 좋아지는, 내가 더 가치 있는 존재로 혼자 살고 싶은 욕망으로서 예수님이 필요했던 거죠.

그동안 얼마나 많은 기적을 예수님이 행했어요? 소경이 눈을 떴잖아요. 그리고 베데스다 못가에서 소문 다 퍼졌다 이 말이죠. 앉은뱅이가 걸었다는 이야기. 간음한 자가 용서받았다는 그 이야기. 얼마나 이게 바리새인들 빼놓고는 주위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을 만한 일입니까. 하나님이 자비를 베풀 때 거저 자비를 베풀더라. 누구한테? 나에게. 네가 뭔데? 나 진짜거든.

그러니까 이게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 관계가 틀어져야 되는 거예요. 주님에 의해서 가짜로 들통 나야 함께 거함이 돼요. 사도 바울의 말대로라면 세례가 돼요, 세례가. 연합이 된다고요. 내가 가짜가 될 때, 내가 원하는 예수님은 진짜 예수님이 아니고 내 착각에 의한 예수라는 것을 성령에 의해서 발각당할 때, 최곱니다. 최고에요.

아니, 가짠데 어차피 가짠데, 가짜 is 뭔들, 가짜가 뭔들 못하겠어요. 가짜가 뭔들 못하겠습니까. 결코 나는 주님의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어요. 진짜 예수님은 진짜 자기 양을 찾아야지, 가짜 양을 찾으면 진짜가 진짜답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를, 네가 선택하는 게 아니라 내(주님)가 선택해버려요. 선택해버리면 가짜 안에 진짜가 들어와요. 가짜는 가짜대로 남고 진짜가 들어오신다고요. 말씀이 우리 밖에 있을 때는 말씀을 지키면 되지만, 내 허락도 없이 말씀이 나의 침실 같은 내 속까지 쑥 들어와 버렸다. 말씀이 확 들어와 버리면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면 너는 애초부터 말씀을 지킬 능력도 재주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자, 예를 들어봅시다. 마가복음 10장 25절, 이건 마태복음 19장에도 나오는 말씀인데요.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제자들이 서로 서로 말한 거예요. 도대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지금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는 본인들의 본심을 드러냈죠. 예수님을 왜 찾습니까? 왜 따라다닙니까? 구원을 얻기 위해서. 메시아가 오게 되면 그 메시아의 나라에 갈 수 있기 때문에. 구약적으로.

그러니까 이 제자들은 성경말씀의 예언에 대해서 그들은 자발적으로 존재로서 그 예언의 말씀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다고 자부한 거예요. 아, 이거 모든 인간이 지금 교인들이 이런 착각에 빠진 거 아닙니까. 말씀을 믿고 믿기만 하면 말씀 속에 들어온 걸로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그렇죠.

앞선 순서가 있는데도. 그 순서는 뭐냐? 예수님과 내 관계가 틀어지는 걸 말하는 거예요. 틀어지지 않으면 성령이 오질 않습니다. 예수 버리고 내빼야 돼요. 예수님 곁에 근처도 가지 말아야 되고 엄마야, 식겁했다 하고 도망쳐야 돼요. 지금 아직 예수님을 안 만나서 어떤 의미에서는 도망 안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필요한 예수는 only you only you~ 막 이러면서 내가 필요한 사랑의 대상자를 내가 고르는 셈이 된다고요. 이거 한번 까여봐야 정신을 차리는 거예요. 실망스러워 봐야.

그래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뭐냐? 이거에요. 27절,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그러면 하나님의 일하심은 무엇을 배경으로 일하신다는 말입니까? ‘사람은 할 수 없다’를 기정사실화 시키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에요.

하나의 말씀을 놓고도, 간단한 예지만 “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말씀을 놓고 심령이 가난한 것에 대해서는 일체 사람은 그 심령을 가난하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 밝혀져야 비로소 그때 보이는 것이 뭐냐? 이것은 내 소관의 일이 아니고, 심령이 가난하게 하는 것은 주의 하시는 일이다.

주의 하시는 일이라면 그 결과가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그 결과가 뭐냐 하면 바로 너는 심령이 가난하지 못한다는 쪽으로 우리를 파괴하는 쪽으로 할 수 없다 쪽으로 벌써 성령에 의해 통보가 될 때 그 사람이 성령 받은 사람이죠. 내가 어두움에 있고 나는 하나님 관계에 들어갈 수 있는 그런 입장이 못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죠.

그러면 여기서 한번 생각해봅시다. 두 번째 강의에서 핵심부분에 도달했는데 질문을 한번 적어볼게요. ‘왜 인간은 자기를 포기 못합니까?’ 또는 같은 말, ‘왜 인간은 자기를 부인(부정)하지 못합니까?’ 왜 인간은 자기를 부정하지 못하죠? 거기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전체를 못 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예수님은 전체를 보느냐? 전체를 보죠. 왜? 아버지와의 관계 때문에. 창세 전의 관계 때문에.

그러니까 인간이 구원을 못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거예요. 전체를 못 봐요. 육에서 육만 보는 거예요. 자기 필요한 것만 봐요. 배고프면 주님께 밥 달라. 자기 오빠 죽으니까 우리 오빠 나사로 살려내라.

주께서는 오빠를 살려주는 게 목적이 아니고 전체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 전체가 뭐냐? 아버지와 아들 관계, 곧 예수님이 전체에요. ‘나(예수님)라는 전체에 네가 일부가 될 수 있겠냐?’를 묻는 겁니다. 그게 ‘나를 믿느냐’는 거예요. ‘너 안 믿고 부분되는 너를 안 믿고 전체되는 나에게 모든 것을 다 걸 수 있느냐?’ 그걸 묻는 거예요.

예수 믿고 어떤 이득을 챙기냐 하는 것은 그건 아직도 부분에서 부분으로 되돌아가는 거예요. 지금 전체는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 인간은 못하나 아버지는 다 하는 거예요. 아버지라고 언급할 수 있는 분은 누구밖에 없어요?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 예수님께서 아버지 일을 하는 거예요. 아버지가 말하는 전체 일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예수님에 대해서 깨춤 추고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들은 전부다 부분들이에요. 부분들. 물론 부분들 배후에 누가 있습니까? 요한복음 8장에 보면 너희 아비는 악마라 했으니까 악마가 인간들을 쪼개가지고 부분들을 만들어가지고 각자 각자 자기 인생만 신경 쓰게 만들었어요. 자기 인생만.

참 이거… 악마가 참 못됐어. 악마는 어쨌든 저쨌든 간에요…. 사람들이 악마와 친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악마 보기에 인간은 무지하잖아요. 나밖에 모르죠. 부분이죠. 그래서 악마가 우리한테 요구하는 것은 ‘네 부분에 전념을 다하라’에요. 이걸 학교교육, 국가교육을 하든 어린이집부터 해서 계속 가르치고 있는 거예요. 이 사회가 가르치는 거예요. 너에게 전념하라. 오늘 제목을 해버릴까. ‘너에게 충성하라.’

자기에게 충실한 사람을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셨어요. 성령이 말한다는 것에 대해서, 여러분들 이건 상식이니까 알아두세요. 예수님께서 평소에 제자들에게 이야기했던 그 당시에 제자들은 못 알아먹었어요. 예수님 말 한마디도 못 알아먹었어요. 그런데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이야기한 것을 다시 되새길 때마다 이제 전체에 입각해서 알게 된 거예요.

예를 들어서 이런 겁니다. 너에게 충성하라, 대표적인 것이 뭐냐 하면 소위 달란트 비유에요. 거기 직원 세 사람 등장하는데 그중 한 사람이 악한 자죠. 악한 자가 주인한테 욕 되게 먹고 ‘너는 지옥이나 가라. 너 같은 인간이 지옥 간다.’ 왜 이렇게 욕을 얻어먹었느냐 하면 이 악한 자가 주인이 있을 때는 티를 안 냈어요. 주인에게 봉사하는 척했어요.

그런데 주인이 부재했을 때, 주인이 없을 때, 주인이 부재했다는 말은 주인의 존재가 현장에 없잖아요. 그러면 갑자기 누구 존재가 부각됩니까? 자기 존재가 부각되죠. 그런데 충실한 종은 주인이 없더라도 주인의 자리를 놓치지 않았어요. ‘주인님이 여기 계시다. 주인님이 이렇게 시켰어.’ 그 주인님 자리를 차지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있어요. 그런데 이 악한 종은 이젠 중심이 누구로 바뀌느냐 하면 자기로 바뀌었어요. ‘내가 나를 위해서라면 이 달란트를 어떻게 활용하겠는가?’ 생각 자체가 시작 자체가 자기 존재의 이득부터 생각하게 된 거예요. 이게 악한 종이에요.

홀로 사는 겁니다. 관계없이 홀로 사는 것. 지옥입니다. 지옥은 뭐냐? 자기 혼자 사는 거예요. 자기 혼자 사는 것. ‘나 예수 믿는데요?’ 이렇게 주장하면 ‘예수님이 당신에게 어떤 걸 했습니까?’ ‘믿기를 잘했다. 칭찬해준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믿기를 잘했다니. 주님이 이단 옆차기로 날아와서 작살냈다, 이렇게 되어야죠.

예수님이 나사로 오빠 고치기 전에 와서 막 바쁘게 ‘야, 가자. 가자. 가자. 오빠한테 가자.’ 이랬습니까? 아닙니다. 누굴 먼저 만났어야 해요? 마르다, 마리아를 먼저 만나야 돼요. 그들에게는 오빠가 전부에요. 기둥 같은 오빠가 전부에요. 내가 보니 아무리 짐작해도 오빠가 다 먹여 살린 거 같아. 오빠가. 그런 오빠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여동생은 취미활동만 하고 오빠가 다 밥 먹여 살리면. ‘오빠, 무슨 옷 입을까?’ ‘이 옷 입어.’ ‘옷 없어.’ ‘사줄게. 사줄게. 백화점 가서 사줄게.’ 이런 거. ‘우리 오빠 최고!’ 이런 거.

그러니까 얼마나 오빠가 동생들에게 잘해줬으면 오빠 죽은 것에 대해서 주님 앞에 주저없이 화를 그대로 노출합니다. 예수님 만나자마자 제일 먼저 한 게, 우리 오빠 왜 죽였냐. 예수님 넥타이 맸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멱살 잡힐 뻔했어요.

인간에게 팔이 있는 이유는 자기 목을 자기가 조르기 위해서. 자기가 자기 목을 조르는 거예요. 이게 일상의 지옥 속에 현재 인간들 생활입니다. 화를 낼 데가 없어요. 마지막 화의 극단적인 모습은 자기가 자기 목을 조르는 식으로 너 죽고 나 죽자. 너나 나나 다 나거든. ‘죽자. 죽어버리자. 부끄러워 어떻게 더 살려고 하냐, 이 땅에서? 그렇게 망해놓고 뭐 어떻게 살려고? 차라리 죽는 게 낫지. 내가 없어지는 게 낫지.’ 이런 식으로. 같이 없어지자.

그게 누구였습니까? 무슨 유다? 가룟 유다. 바보 아니죠. 똑똑했죠. 예수님은 알았죠. 아이고,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말씀하실 때 듣는 다른 사람은 굉장히 기분 나쁠 거예요. 왜냐하면 가룟 유다를 충분히 이용했잖아요. 충분히 이용하고 토사구팽. 써먹을 대로 다 써먹고, 가거라. 네 주인한테 가거라. 마귀한테 보내버리죠. 왜? 주님한테 섭섭해요? 주님이 나를 또 그렇게 사용할까봐 겁납니까?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먼저 선택한 거예요. 먼저 선택. 먼저 선택했다는 말은 ‘너는 나를 사랑했다’ 이게 아니라, 너는 나를 사랑한 적 없어요. 인간은 자기만 사랑하지, 예수님을 사랑한 적 없어요. 주님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그러한 증거를 남길 때까지만 사랑해요.

그만큼 우리는 주님을 몰라요. 주님을 모른다고요. 주님과의 관계가 틀어지는 것이 그게 주님의 사랑의 시작인 것을 몰라요. 우리는 주님과 맞먹을 수 있는 그런 상대인 줄 알고 있어요. 아버지도 모르는 주제에. 전체도 모르고 자기밖에 모르는 부분인 주제에 뭐 예수를 믿겠다고 그런 시건방진 발언을 함부로 하고 있어요.

주님이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할 때 그 나를 믿는다는 것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재주가 아닙니다. 믿음은 그들의 재주가 아니에요. 믿음은 성령이 와야 성령이 온 그 결과물을 믿음이라 하기 때문이에요. 이것도 어려운데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관계로서 나온 믿음과 소망과 사랑만 받아요. 관계로서.

그러니까 ‘너 믿느냐’를 묻는 게 아니고 ‘너에게 믿음 생기도록 누가 줬느냐’를 묻는 거예요. 1을 묻는 게 아니고 2의 관계를 묻는 거예요. 누가 주던데? 성령님이 주셨죠. 그래, 그 믿음이야. 너 말고 성령님이 주신 믿음이어야 된다고요. 그 믿음이 물론 예수님 믿음이지만.

인간은 자꾸 홀로 처리하려고 하고 홀로 살려고 하고 자기 운명, 미래를 자기 혼자 결단 내리려 해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그 사람과의 관계를 틀어야 되죠. 마리아도 울고 언니 마르다도 울고 온 집안이 울음판 되었습니다. 그거보고 예수님도 울고. 그러고 난 뒤에 “가자.” “죽은 지 나흘 됐습니다. 꿈 깨세요. 끝났습니다. 나흘 되었어요.” 아니, 나흘 되고 찾아와서 살릴 것 같으면 진작 와서 고치지. 그 뒤에 조문객으로 왔던 유대인들이 그런 식으로 비아냥거렸어요.

그들은 아버지와 아는 예수님과, 아버지는 전혀 모르는 그냥 가상의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걸 믿는다고 우기는 사이, 그 두 개의 믿음 사이가 끊어져야 된다는 사실을 그 중에 아무도 몰랐습니다. 나흘 되었는데 아시다시피 그걸 살려내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제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 주신 그 구약 말씀이 예수님의 한 몸에 집중화되기 시작했다.’ 집중화가 되기 시작한 거예요. 이제는 예수님 몸과 다른 몸이 아니라, 말씀이 예수님 몸만 고집하면서 몸을 어떤 방향 쪽으로 밀어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 몸에 집중하죠. 집중된 이 한 몸이 장례를 치릅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 몸의 변화에요.

다시 말해서 그 전에 주님께서 많이 밑밥을 깔아놨거든요. 네가 나를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 했잖아요. 돌아가시기 전에 요한복음 14장, 15장에서 많이 이야기했어요. 하지만 그들이 사랑합니까? 밑밥은 깔아놨지만 여전히 모든 말씀은 어디에 속해요? 제자들 배제하고 어디에 집중됩니까? 예수님의 한 몸에만 집중되도록 성경말씀이 주어집니다.

요한복음 19장 아까 보려고 한 것 다시 봅시다.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것이 뭐냐 하면 ‘예수 안에 어떻게 거하냐’ 그 문제를 우리가 한번 알아보는 거예요. 우리가 어떻게 예수 안에 거해요? 말이 안 되잖아요. 한 방이나 한 아파트에 살까요? 거하는 게 도대체 뭐에요? 영생 얻는 건 좋은데 거한다는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이걸 모르겠다 이 말입니다.

사도 바울 같으면 간단해요. 예수 그리스도로 세례 받으라. 십자가 영으로. 그러면 사도 바울은 십자가 안에 내가 살고 이게 되는데 사도 요한은 거기에 아버지까지 끌고 들어간다니까요. 아버지까지. 거한다는 게 뭐냐? 아들 안에 거하고 아버지 안에 거하면 네가 영생을 얻는다.

영생 얻는 건 기분 좋아요. 인간은 감히 상상도 못하는 복이니까. 그런데 문제는 ‘거한다’가 성립 안 되면 영생 없죠. 분명한 겁니다. 예수님 속에 거하지 않으면 영생 없어요. 아주 단호합니다, 이거는. 양보할 걸 양보하지, 양보 안 되죠.

요한복음 19장에 보면 37절,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이게 스가랴 12장 10절의 말씀, 그리고 요한계시록 1장 7절 말씀에 나오죠. 거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보자는 말이죠.

저희가 찔렀는데 찔렀으면 찔린 자는 어떻게 돼요? 죽죠. 찔렸으니까. 죽으면 어떻습니까? 죽었으면 죽죠. 그럼 어떻게 돼요? 산 자의 세계에서 처리돼서 산 자 세계 바깥으로 시체가 되어서 나가야 되겠죠. 그러면 그 찌른 자를 볼 일은 없지 않습니까? 그 찌른 자를 보려면 첫째, 찔렸다는 흔적이 있어야 되고 두 번째, 흔적이 있는 자가 다시 살아나야 되죠. 그래야 틀어졌다는 것이 확실해지니까.

함께 거할 수 없는 자라는 사실, 인간은 아버지와 아들 세계에 결코 들어올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예수님이 찔린 그 창 자국을 통해서 확실히 해야 돼요. 아무도 누구도 영생 얻을 자 없음을 분명히 해야 돼요. 그 분명한 것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가 인식해야 돼요. 나는 영생 얻을 자격이 못 된다는 것.

요한복음 17장 한번 봅시다. 제자들도 이걸 알아요. 알기 때문에 요한복음을 다시 보게 되면 이제부터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무슨 말을 한지 아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을 기록했겠죠. 17장 9절,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그다음 뭡니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다.

‘내게 주신 자’가 무슨 뜻이냐 하면 아버지와 아들만 아는 관계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그러니까 부름 받은 자라는 이건 근처도 안 가요. 인간은 배제되는 거니까. 아버지 알고 아들을 아는 그 자를 주님께서 기도하는 거예요. 하게 되면 성령께서 그 기도의 응답에 따라 아버지도 알고 아버지와 아들이 아는 그 대상자가 이제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 들어가서 모두가 하나가 돼요.

요한복음 17장 23절에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 21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이렇죠.

오늘 강의한 게 정리가 다 되었어요. 우리가 들어가는 장소는 내 존재가 구원받는 게 아니고, 존재가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 관계 속에 이제 우리가 끼어들어가는 거예요. 아버지와 아들 관계 속에. 그러면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어떤 관계냐? 버림받은 관계죠. 뼛속까지 말씀에 입각해서 버림받은 관계죠.

우리가 제일 싫어하는 상태가 그 상태잖아요. 잃어버렸잖아요. 누구한테? 아버지한테 잃어버렸어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세상에 손들고 자진해서 하나님한테 버림받을 사람 나와 보라 그래요.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으니까 그게 엉터리에요. 가짜에요. 아무도 없으니까.

예수님도 버림받는 거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겟세마네 기도할 때, 할 수만 있거든 버림 안 받고 어떻게 일처리하는 방법 없습니까? 안 된다. 세 번이나 안 된다 했어요. 그러면 하겠습니다. 버림받겠습니다.

이걸 사도 요한은 대신 죽으심이라 한 거예요. 대신 죽으심. 인간은 자기 죽는다고 대신 죽음이 아니에요. 대신 죽으심은 예수님 죽음만 대신 죽으심이에요. 다른 죽음은 대신 죽으심 아닙니다. 따라서 성령이 온다는 것은 다른 게 아니고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이 우리 안에 들어온다는 거예요.

다시 요한일서로 올라가봅시다. 요한일서에 보면 1장 7절에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피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완성되었듯이 그 완성된 표시가 피에요. 그러면 그 피 속에 우리가 들어가는 겁니다. 제가 아까 안양강의에서 마지막에 그런 질문했죠. ‘피가 중요합니까, 여러분의 목숨이 중요합니까?’ 물었거든요. 진심이나 본심을 내가 들으려고 한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말해봐야 진심, 본심 아닌 걸 뻔히 알기 때문에.

그러면 이론상으로 뭡니까? 이론상 내 목숨보다 누가 중요해요? 피가 중요해요. 내 목숨 살리기 위해 피가 있는 게 아니고 피를 위해서 피가 무엇인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가짜 내가 동원되는 거예요. 진짜 예수님의 피를 위하여 가짜 내 피가 동원되는 거예요. 그 관계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2장을 볼까요. 중요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제가 일부러 보자 합니다. 12장 3절,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그러니까 여기 가룟 유다가 뭐라 합니까? 아, 이 많은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면 얼마나 좋으냐. 이거 뭐 갑자기 사회복지가 막 나오는 거예요. 자격증 있는지 모르겠어, 사회복지사 자격증. 갑자기 구제를 하게 되면 사람들이 ‘야, 예수님 착한 일 하니까 우리를 도와 줄 거야.’ 이렇게 하잖아요.

여러분 베들레헴에서 예수님 태어날 때 베들레헴의 2세 아래 영아가 다 죽었죠. 2세 아래 영아가 다 죽었잖아요. 이게 누가 유발한 거예요? 예수님 살리기 위해서 애들 죽은 거예요. 마귀의 세계에서. 예수님이 사회복지 차원이 어디 있어요? 예수님의 가치가 네 아들 죽는 것보다 그 가치가 더 고귀하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요. 너 그 안에 거할 자신 있나 그 말이에요! 그 안에.

정말 터무니없는 관계 아닙니까? 어떻게 우리가 우리 결심으로 그 관계에 선뜻 들어갈 수 있어요? 무섭지도 않아요? 못 들어가요. 무서워서. 내 자식 버리고. 못 들어갑니다. 어디 뭐 신천지 빠질 일 있습니까? 자식 버리고 돈 바치고. 안되죠. 그거 한다고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거한다는 말은 예수님의 피 안에 우리가 놓여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예수님 피 안에. 그런데 예수님 피를 누가 냈어요? 바로 우리 가짜 때문에 가짜 인간, 나 같은 가짜 인간 때문에 흘린 피거든요. 그럼 피 안에 거한다는 말은, 늘 고맙죠. 맨날 가사도 모르는 뭐 외국 노래 틀게 아니고 조광조 노래 한번 틀어야 돼. 고맙소 고맙소~ 노래 [고맙소] 해야 돼요.

정리하고 오늘 강의 끝내겠습니다. 우리는 부분이에요. 나밖에 몰라요. 태어나서. 기껏 알아봐야 내 가정, 내 사회생활. 하지만 다른 사람은 어떻게 사는지 우리는 관심도 없을뿐더러 경험도 못할뿐더러 하여튼 인간은 부분에 전념하고 충성해요. 이건 충성하자고 믿는 게 아니고 충성했다는 그 자체가 우리에게 이미 믿음화된 거예요.

그게 지옥이에요. 지옥이란 존재와 존재만 그냥 다수가 꽃다발처럼 있는 게 이 세상이에요. 존재에요. 누구도 아버지하고 관계없어요. 나만 잘 챙기면 된다는 세계 속에 살고 있어요. 이게 바로 결핍이에요. 영생이 없어서 결핍이에요. 돈이 없어서 결핍이 아니고 부자가 못 되어서 결핍이 아니라 인물이 못나서 결핍이 아니라 영생이 없어 결핍이에요.

그런데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영생 줄게.” “아, 어떻게요?” “아들 안에 거하라.” “뭐 거하지 뭐. 믿습니다.” “아니야. 그거 아니야.” ‘믿습니다’ 그래가지고 되는 게 아니에요. 피를 경유해야 된다고요. 피를.

그래서 요한일서 1장에 보면 나오죠. 누구든지 죄 없다 하면 누구를 거짓말쟁이로 만드느냐? 예수님 하나님 그 관계를 몽땅 사기로 간주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죄 없다 하면. 아 참. 그러니까 우리가 존재로 사는 것이 나한테 충성하는 것이 얼마나 주님을 모독하고 십자가 또 죽게 만드는 일의 반복인 것을 알아야 돼요.

안양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 때 그 은혜는 공짜 아닙니다. 다 회수할 거예요. 우리 몸에 발린 은혜를 뜯어 가면 우리는 육으로 나타나요. 이게 인간이죠. 은혜 내놔. 은혜 다 뜯어버리면 이게 더러운 육이 돼요. 그냥 흙 같으면 고상하기나 하지. 이게 악마의 육이에요. 악마의 가현체에요. 악마의 몸체가 나와요. 그동안 은혜로 덮여 있으니까 인간입네 하죠. 그걸 뜯어내는 거예요.

그걸 뜯어내는 방법이 뭐냐? 피 이야기를 해서 뜯어내요. “너희들이 나를 죽였잖아. 너희들이 날 죽였잖아. 너 가짜 맞지?”라고 성령이 와서 십자가를 근거해서 우리에게 그걸 통보해줍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이걸 알아요. 사랑. 사랑을 알게 돼요, 사랑. 사랑을 알게 됩니다. 어떤 사랑? 요한일서 4장에 나오죠. 너희가 나를 사랑한 게 아니고 하나님이 너희를 사랑했다. 말로? 아니. 말로 아니죠. 화목제물. 화목제물을 세 자로 하면 십자가. 한 자로 하면 뭡니까? 피.

이제 요한복음 6장 현장에 가봅시다. 자, 예수님께서 “내 피와 내 살을 먹지 아니하면 생명이 없다”라고 했어요. 그 당시 사람들 다 떠났습니다. 제자들은 뭣도 모르고 떠나고 싶지만 못 떠나죠. 예수님이 붙잡고 있으니까 못 떠나죠. 그러면 성령 받은 제자들은 떠났습니까, 그 말씀 듣고? 아니죠. 이제 피 안에 사니까.

예수님이 당했던 그 고난을 그들이 복음 전하는 현장에서 똑같이 당하는 거예요. 아버지와 아들과 성도가 하나 되어 있다는 증거가 피 복음으로 인하여 고난 받는 바로 그것입니다. 나 가짠데 진짜 예수님 피를 증거하는 증인으로 우리가 선택되었고 뽑힌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보고 뭐 내놔라 하는 것도 아니고 뭘 특별히 하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거하라 했습니다. 다 이루었던 피 안에 거하는 이 감격을 늘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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