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마을 2010 여름 수련회 제 9강
레위기 26장입니다.
3절부터 보시면 이런 말씀이 죽 나옵니다. “3 너희가 내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 4 내가 너희에게 철따라 비를 주리니 땅은 그 산물을 내고 밭의 나무는 열매를 맺으리라 5 너희의 타작은 포도 딸 때까지 미치며 너희의 포도 따는 것은 파종할 때까지 미치리니 너희가 음식을 배불리 먹고 너희의 땅에 안전하게 거주하리라”
그런데 문제는 14절부터 봅시다. “14 그러나 너희가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여 이 모든 명령을 준행하지 아니하며 15 내 규례를 멸시하며 마음에 내 법도를 싫어하여 내 모든 계명을 준행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배반할진대 16 내가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곧 내가 너희에게 놀라운 재앙을 내려,,,,,,,” 규례를 준행하지 않으면 재앙이 내린다고 합니다.
21절을 봅니다. “너희가 나를 거슬러 내게 청종하지 아니할진대 내가 너희의 죄대로 너희에게 일곱 배나 더 재앙을 내릴 것이라” 23,24절을 봅니다. “이런 일을 당하여도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내게 대항할진대 나 곧 나도 너희에게 대항하여 너희 죄로 말미암아 너희를 칠 배나 더 치리라” 27절입니다. “너희가 이같이 될지라도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고 내게 대항할진대” 그러니 하나님께 대항하는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레위기에 대하여 신학자들이 말하기를 레위기는 모세 당시에 쓰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이방나라에 잡혀 갔을 때에 후회하는 방식으로, 반성하는 식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을 안 들었더니 이렇게 되었구나! 하면서 내려오는 말들을 편집하여 나중에 적었다는 것입니다. 초반부터 너는 인간 안 돼! 라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실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쉽게 하면 이런 것입니다. 이번 수련회를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아시겠지요? 아멘! 사랑 많이 받았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제사장을 보내주시고 희생 제물로 속죄제를 지내게 하신 주님입니다. 이 말에 동의하시지요? 그럼요! 동의하고말고요! 얼마나 감사한지요!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떤 죄를 짓고 진 밖에 나가도 대 속죄일에 언약을 갱신하면서 우리의 모든 죄를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모든 죄를 다 일괄해서 사면하여 처리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런 분위기로 수련회를 마치는 지점에 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없거든요! 아니 목사님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성경에 나오고 방금까지 목이 쉬도록 강의를 한 것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전제하에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없다니요? 라고 하신다면 하나님이 있다는 전제를 하였다고 할 때에 이런 하나님 저런 하나님 여러 가지 하나님의 하나 일수는 있는데 문제는 이런 하나님 저런 하나님이 없다고 가정하면 이번에 강의한 것도 아무른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아니 그런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우리 가운데 그런 사람이 누구야? 그런데 다입니다. 그것을 레위기가 마지막에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실컷 연구하고 분석하고 더듬어 찾아갔습니다. 하나님이 어디에 계십니까? 하고 찾는 것입니다.
이번에 양 장로님 말씀 듣고 얼마나 옛날 생각이 나든지, 새벽 기도하는 교인이 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 만나고 싶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어디에 계십니까? 그렇게 크게 기도하면서 마치 혼자 전세 낸 것처럼 기도 하더니 한 오년 후에 길에서 만나가지고 요즈음 무엇 하십니까? 교회는 나가고 있습니까? 그러니 교회는 이년 전부터 발 끊었습니다. 그것을 쓰는 것이 레위기의 마지막 결론부분입니다. 이것은 레위기만이 아니라 여호수아의 마지막 결론부분도 그렇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였다는 말씀이 성경에 나오면 그 뒤에 음성적으로 따라 붇는 말이 그런데 신은 없다고 대꾸합니다. 일종의 대항신학입니다. 하나님께 대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선악과를 만들고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차단하였다는 말씀과 또 가죽 옷을 입혔다는 말씀을 듣고서는 잘 알았습니다. 잘 들었습니다. 하고서는 그런데 신은 없거든요! 이런 그림자가 뒤에 딱딱 붙어 오는 것입니다. 창세기로부터 모든 성경의 뒤에 딱딱 붙은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딱딱 붙어주어야 레위기 제대로 해석한 것이 됩니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성경에 맞추려고 합니다. 일종의 외피용입니다. 마치 철없는 유치원 아동이 선생님이 머리를 기르니 자기도 머리를 기르고 싶고, 선생님이 화장하니 자기도 화장하고, 선생님이 커트하니 자기도 커트하고 싶어 합니다. 어떻든 그 현장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유치원 선생님이 닮고 싶은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 아이가 나중에 대학생이 되면 유치원 선생님은 잊어버릴 것입니다. 그때는 내가 철딱서니 없어서 선생님을 모방했지! 그러면 왜 그때는 유치원 선생님을 따라 한 것입니까? 철이 없었으니까 그랬던 것입니다. 그때는 아직 스무 살이 안 되었으니 기껏 다섯 여섯 살의 범위 내에서 그것이 전부인줄 알았든 것입니다.
이처럼 그때는 이렇게 이야기 하는 하나님이 실제로 있는 줄로 여겼고 그런 하나님께 맞추어 주어야 무슨 복이라도 받을 것으로 느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한때의 에피소드였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감추어진 속마음을 재미나게도 옆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 자신이 누구인지 네가 모른다고 하십니다.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니면서 신이 없다는 생각이 어릴 때는 안 들었고 크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차마 교회 나가라는 어머니 앞에서 예의상 차마 그런 말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니 이제는 말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본인이 어떻게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기에 주께서 레위기 26장에서 내가 안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를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그 피조물이 그 스스로는 모르는데 그 속에 어떤 반발의식, 신에게 대항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가를 그를 만드신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말입니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나온 결과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런 것입니다. 백날 하세요! 나에게는 하나님이 없는 것으로 굳혔습니다. 라는 것이 아직도 다 들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받게 될 때에, 왜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파토하듯이 다 드러내시는가 하면, 이런 것입니다.
광고에서 그런 것이 있습니다만 대학 강의실에서 대리출석 하는 것입니다. 교수가 이강석이라고 부르는데 이 친구가 결석을 하면서 친구에게 대리 출석을 부탁한 것입니다. 그러면 친구가 목소리를 바꾸어 대답을 합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미덥지 못하여 다른 여러 친구에게도 대리출석을 부탁하였습니다. 그러니 이강석이라고 부르니 여기저기서 예라고 합니다. 도대체 누가 진짜 이강석입니까?
하나님께서 내 아들아라고 부르시니 여기저기서 예하고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내 아들아 하면서 부르시는 것은 이스라엘을 집합체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옆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별로 내키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주여 제가 하나님의 아들 맞습니다. 라고 나오는 것은 집합체 의식을 벗어나서 독단적으로 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도 하나님의 계획에는 아무른 차질이 없다고 여기면서 여기저기서 대답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인간은 항상 개인에서 나와서 개인으로 돌아가지 이것을 하나님의 뜻처럼 하나님의 아들은 단지 개인이 아니라 집합체라는 사실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그것에 대한 느낌이 오지를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데 네가 왜 그런 소리 하느냐며 따지게 됩니다. 그러니 아무리 강의를 하여도 나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그 순간 강의한 것이 한꺼번에 다 날아갑니다.
그렇게 날아 갈 때에 비로소 하나님은 개인을 닦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의 아들이 개인이 아니라 집합체라는 사실을 드러내시는 일에 유용한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없다, 없다, 없다는 것을 모아서 집단을 만들어버리면 이 집단전체가 무엇이 됩니까? 우리가 전에 홍해 바다를 건넜다는데 그것이 과학적으로 증명이 안 되는 거잖아! 그러니 없는 것이지! 이렇게 없다는 것이 처음에는 소수이지만 나중에 점점 많아져서 다 동의하게 됩니다. 그래서 없다고 하는 사람 손을 번쩍 들어보라고 하면 처음에는 머뭇머뭇하다가 나중에는 다 듭니다.
이것을 보시고 주님께서 흐뭇해하십니다. 말이 이상하지요! 내가 레위기 26장에서 예언한 그대로 가고 있구나! 내가 신명기 32장에서 예언한 대로 말씀대로 그대로 가고 있구나! 그렇게 보실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지점에서부터 수련회를 다시 시작해 봅시다.
어떻게 다시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행복하게 해드리려면 우리가 강의를 들으면서 하나님이 있다고 백날 말해보아라 나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세를 견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자세를 견지하여 달라는 말입니다. 지금은 철이 없어서 하나님이 없는 줄 모르고 있는 것 같은데 나중에 십년만 더 살면, 그래 결심했어! 하나님은 없는 거야! 라고 하면서 이제는 공개적으로 대외적으로 말하게 됩니다. 그동안 외피용으로 남에게 보이기 위한 신앙의 짐을 벗어버리는 해방감! 멋지지 않습니까?
이럴 때에 주님은 흐뭇해하십니다. 주님만 흐뭇하시면 됩니다. 우리 개인이 이렇게 하나님을 부정하다가 혹시 하나님이 있으면 나만 당하는 것이 아니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이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하였는데 내가 이것을 믿지 않지만 그러나 혹시 사실이라면 내 신세 버려놓은 것이 아니겠느냐! 이런 걱정을 하면 주님께서는 더 솔직해! 없다고 생각해! 예 없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이놈아 하시면서 흐뭇해하십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그 말씀조차 의미 없이 날아갑니다. 그렇게 해 주어야 레위기 26장의 말씀과 일치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어디에 서야할지 안절부절 좌불안석입니다. 그런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옛날에 스타트랙이라는 영화를 티브이에서 보았습니다. 티브이를 거의 안 보는데 스타트랙이라는 외화를 한번 보았습니다. 공상 과학 영화입니다. 여기 사람이 있고 당나귀 귀를 가진 사람인데 이 사람은 다른 장소로 이동을 시키는 것입니다.
웜홀이니 화이트홀이니 블랙홀이니 하면서 우주에서 차원을 달리하여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그런 것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머리 부분이 점선으로 되어 있고 밑에는 실선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점선으로 되어 있는 부분이 저쪽에서 실선으로 나타납니다. 아직 이쪽의 다른 부분은 그대로 있는데 점선부분만 이동이 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그 밑의 부분이 점선이 되면서 저쪽에서 실선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행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부정하고 대항하면서 없다고 하면 이 모든 것이 날아간다고 여기는 그러한 인간을 집단화 시켜 버리면 여기에 여러 명이 있더라도 한명이 되는 것입니다. 한명 즉 아담이 됩니다. 그리고 이런 인간이 무엇으로 바뀌느냐 하면 이 하나님이 없다는 인간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언약을 누리기 위해서 한 명이 됩니다. 이 한 명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바꿔치기 하려면 이쪽은 항상 하나님을 부정하는 솔직한 고백을 드러내 놓아야 합니다. 그것은 쉽지요. 나는 하나님 없다. 하나님 모른다 하면 됩니다. 그러면 신을 부정한 것입니까? 그것은 부정이 아닙니다. 적어도 부정이 되려면 신이 누구시죠? 라는 관심조차 아예 없어야 제대로 된 부정입니다. 그런데 신을 자꾸 생각한다는 것은 혹시 신이 있으면 어떻게 하나? 혹시 있으면? 이런 생각은 아직까지 미련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니 열심히 자기의 생업에 몰두한다든지, 로또에 당첨이 된다든지, 월드컵 때에 붉은 악마에 휩쓸려 응원을 하게 되면 그 순간적으로 점선으로 드러나면서 그 점선이 실선으로 바뀝니다. 깜박깜박할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하나님을 잊어버릴 때에,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를 의식할 필요조차 없을 그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새사람 만드는 작업을 그때 본격적으로 행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학에 관심을 가지고 복음에 관심이 있고 하면서 열정을 낼 때는 주님께서 팔짱끼고 기다리십니다. 주님 보실 때에 어떤 사람이 개혁주의 신학을 연구하고 수련회 따라 다니고 하면서 무엇이 나올 줄 알고 저렇게 하지만 저것은 한때라고 보십니다. 그러나 곧 지칠 거야! 지칠 때가 되었는데 한 15분 남았구나!
딱 때가 되면 목사님 저 취직했습니다. 취직하고 교회 나오겠습니다. 안 믿습니다. 취직하면 교회 끝났습니다. 시집가게 되었습니다. 시집이 불교집안이지만 제가 선교사 된 마음으로 가겠습니다. 안 믿습니다. 시집가면 끝났습니다. 시집가면 아이 키운다고 유아 실에서 아이 본다고 말씀도 듣지 않고 끝났습니다.
한때 하나님이나 신은 흥밋거리이고 하나님의 존재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한때 자신의 사정이 난처하여 어떤 돌파구가 없을 때에 한번 쑤셔보는 식으로 면피용으로 외피용으로 열정을 내 보는 것입니다. 그 열정이라는 것도 새로운 일이나 새로운 직업에 종사하게 되면 그런 것은 젊은 날의 철딱서니 없을 때에 마치 신이 모든 것을 인도하는 냥, 잠언서에 나오는 것처럼 모든 것을 맡기라 그리하면 친히 인도하시리라는 그 말을 나에게 적용시키지요! 개인에게 적용을 시킵니다.
착각이었습니다. 문제가 어디에 있습니까? 나에게, 하나님이 나에게 관여한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죄송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관여하시는 것이 아니고 집단에 관여 하시는데 그 집단은 아직도 미확정입니다. 그 집단은 하나의 개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집단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이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면, 이광석! 예! 라고 부를 때 비로소 그때 신앙은 시작이 됩니다.
이사야 성경을 보면 부르지도 찾지도 아니한 자에게 부름과 찾음이 될 것이며 내 백성이 아닌 자에게 내가 부름을 당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사야 65:1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호세아 1:10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그리고 하나님을 부른 자는 버림을 당하리라. 철저하게 버림을 당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레위기 첫 시간에 강의한 것이 그것입니다. 법이 없는데 무엇을 지킵니까? 하나님이 법 없이 찾아오신다고 하니 사람들은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것이 없으니 자기의 행함을 가지고 법을 지켜서 하나님을 찾아 나섭니다. 그렇게 하여 기껏 법을 지켜보지만 그것은 개인에서 와서 집단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서 개인으로 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광석 부르시니 예! 합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아들! 하시니 예! 합니다. 그런데 여기저기서 나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눈깔아!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야! 하는 심정으로 교회 다니고 있습니다. 내가 믿는 예수님을 네가 왜 건방지게 믿어! 이런 것입니다. 우리 교회만 복음을 알아야지 왜 화평교회가 복음을 알아! 눈깔아! 우리 십자가 마을에서만 복음을 알아야지! 다른데서 왜 알아! 저것 이단이야! 아직도 열정이 있을 때에 그럽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빙긋이 웃으시면서 저 열정 한 15일 가는지 몰라! 그 정도 갈 거야! 그런데 우리 교회가 복음에 시들해 지면 주님께서는 조금 더 시들해져! 좀 더 시들해져! 그러십니다. 그럴 때 내 교회 내 구원이 아무짝도 소용이 없는 하나의 욕심이었고 구원에 대한 탐욕일 뿐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일하시는 것이 나와 관련된 것이 아니고 나는 점선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우리는 선악과를 이미 따 먹었기에 생명나무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런 우리를 실선으로 옮기면서, 점선이 실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림은 한계가 있어서 이것 밖에 그리지 못합니다. 이 점선이 실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점선은 사라지고, 사라지는 것과 대비하여 그리스도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세리나 창기, 소경, 문둥병자가 되어 모든 것이 박탈되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선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삭개오가 키도 작고 세리라서 모든 사람이 자기를 무시하였을 때에 그 사람은 희미한 그리스도가 실선이 되면서 그 주님은 나를 위한 주님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주님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언제 그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죄인을 위한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런 그리스도는 가짜입니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를 위한 그리스도입니다.
레위기 26장 1절을 같이 읽습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 앞에 무엇이 나옵니까? “자기를 위하여”가 나옵니다. 이 말은 제발 자기를 위하여 살지 말고 하나님을 위하여 살라고 하는 그 능력이 우리에게는 있다? 없다? 없습니다. 왜요? 출생자체가 처벌이기 때문입니다. 출생 자체가 처벌이기에 우리는 “자기를 위하여”라는 그 굴레를 우리 힘으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나가면 자기를 위해서 살다가 무엇에 의하여 방해를 받는가 하면 신이라는 존재입니다. 신이라는 존재가 “자기를 위하여”에 걸림돌이 됩니다. 한 20년 믿었는데도 신이 자기를 위한 일에 자꾸 장애가 되니 이제 그만 믿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좀 쉬었다가 나중에 다시 믿겠다는 식으로 나옵니다. 왜요? 자기를 위한 삶에 하나님이 자꾸만 방해가 됩니다. 뭐 특별하게 도와주는 것도 없고, 취직도 안 되고, 결혼도 안 되고 뭐 이런 하나님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 아시면 이번 수련회 제대로 아신 것이 됩니다. 왜 아브라함에게 언약 주시고 그 언약대로 구원하시면 되실 텐데 왜 율법을 주시는 것입니까? 네가 하는 행위가 네 구원하고 관계없이 구원받는 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그러면 구원과 관계없다며 율법을 안 주시는 것이 마땅한데, 주님께서 관계없다고 하시고서 율법을 주시는 것은 보조를 맞추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등장하실 때에, 너희가 나를 핍박하였다는 증거가 나올 때에 예수님이 우리의 주가 되십니다. 우리가 여기서 이동할 때에 우리의 행위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것을 통하여 이동합니다. 이제는 나에 대하여 생각할 것도 없이 하나님께서 이미 집합체로 만들어 아들 만들기의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는 점을 우리는 찬양합니다.
신명기 9장5절을 보겠습니다.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맹세 즉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있다고 생각하여 하나님과 거래한다고 생각하면 이 말씀자체가 틀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틀리게 하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너의 선함과 의로움이 아니라는 말까지 들으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면, 그러면 하나님 나에게 손 떼세요! 내 의로움과 착함도 필요 없다면 하나님 혼자 다 하시면 되지 왜 자꾸만 나를 끄집어 당기십니까? 라고 항의 할 수밖에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내가 하고 싶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데 주님이 하시는 일에 나를 끼워 넣지 마세요! 그런 이야기를 제 아내가 자주 자주 해왔습니다. 요즈음은 뜸 하지만, 몇 달 전까지 그랬습니다. 말씀을 연구하고 있는데 무엇을 좀 도와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좀 바쁘다고 하면, 그것은 네 일이고, 나의 일을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간청하는 자에게는 재판관이 귀찮아서 들어주지요! 그런데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말씀 연구한다고 말씀 이해되는 것도 아니고 주께서 보내신 분을 통하여 그 일을 하게 하신다고 제가 억지로라도 이해하려고 합니다.
레위기에서 너희가 나를 배척하면 벌을 받으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벌을 받으면 벌을 받는 대로 반발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었을 때에 동의를 하였겠습니까? 하지 않았겠습니까? 동의하지 않습니다. 유치원 아이에게 너는 선생님 외에 다른 선생님 좋아할 거라고 하면 그 아이가 동의하지 않습니다. 자기 눈에는 자기 선생님이 최고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저의 집에 가면 고등학교 3학년 때 제가 좋아했던 천순옥이라는 여인의 사진을 아직도 가지고 있어요! 우리 교회 권사님들 다 보여주어서 압니다. 그때는 정윤희고 무엇이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여인이 최고였습니다. 얼마나 그 여인 아름다웠든지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그 정도 수준입니다. 말도 못할 정도로 빛이 나고 신비로웠습니다. 제가 그러니 권사님들이 얼마나 예쁜지 한번 보자고 해서 보여드렸습니다. 그러자 권사님들이 아이고 사모님보다 못하구먼!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직 철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이 없다고 함으로 지금까지 들어온 하나님의 말씀을 다 날려버릴 그런 폭탄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 모릅니다. 수십 년을 믿어도 하나님 자체가 없다 이 인간아! 정신 차려라 이 기독교인들아 하나님은 없는 거야! 불교의 말이 맞아! 하는 그런 마음을 항상 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품고 있는 마음을 본인이 끄집어 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끄집어 내어줘야 주님의 말씀대로 되기에 주님이 흐뭇해하십니다. 이제 드디어 기어 나온다. 나를 위한 하나님! 나를 위한 하나님이라는 그 마귀를 그 귀신을 왜 이제야 끄집어내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끄집어내는 방법이 여호와의 전쟁입니다.
여호와의 전쟁은 옆 나라를 치기 위한 전쟁이 아닙니다. 말씀대로 진짜 목이 곧은 백성이고, 죄인이고, 죄인의 괴수라는 것이 저쪽 민족을 보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멘, 할렐루야를 말하는 네가 바로 여호와의 전쟁의 대상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하여 전쟁을 벌이십니다.
처음에는 언약궤 들고 와서 설치고, 금식하고 난리입니다. 소위 외피용 티를 냅니다. 나중에는 그것도 귀찮습니다. 이방민족이 하는 전략대로 외교로 남의 힘을 빌려서 미국과 방위조약 맺는 식으로 합니다. 그것도 안 되면 아예 한국을 팔아치우는 방식을 취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전쟁은 이것이 레위기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이번 강의에 제일 중요합니다. 이 전쟁의 책임자가 누구입니까? 제사장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아니 제사장이라면 종교인이니 기도만 하면 되는데 전쟁에 제사장이 왜 나섭니까? 어제 마지막 시간에 무엇을 말씀드렸습니까? 이스라엘은 무슨 책임제? 내각 책임제가 아니라 대 제사장 책임제라고 하였습니다.
대제사장 책임제가 되면 전쟁에 있어서 세상 사람들은 무기와 무기의 전쟁입니다. 청동기 시대의 무기와 철기시대의 무기가 맞붙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스라엘은 청동기 무기입니다. 강철 검이 없는 청동기 무기로는 상대가 안 됩니다. 적은 강철 검이 있고 이쪽에는 없습니다. 철기 칼과 청동기 칼이 부딪히면 청동기 칼은 엿가락처럼 칼이 휘어져 버리고 잘려버립니다. 저쪽은 멀쩡합니다. 이것은 게임이 안 됩니다.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은 나무 작대기 같은 것으로 싸우게 만드십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족장이나 군인들에 의하여 전쟁을 해 버리면 이런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이 되지 않고 나의 전쟁이 되어 버립니다. 나의 안일과 나의 보전과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하여 내가 하나님의 힘을 빌려서 내 것 챙기는 전쟁을 벌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아말렉이 갑자기 이스라엘 뒤에서 덮치게 만드십니다. 이때 모세가 들었던 무기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수능 시험에 나올 만합니다. 1) 칼. 2)총. 3)미사일. 4)지팡이. 4번 지팡이입니다. 그런데 지팡이는 무기가 아닙니다. 무기 없다가 됩니다. 완전히 무기 없습니다.
여호사밧 왕 때에 무기 없습니다. 성가대 앞장세워 갑니다. 성가대의 소프라노가 외친 하이 톤에 의하여 적이 무너졌다는 그런 식으로 보지 마세요! 나팔을 불었더니 나팔의 음파가 1초에 340헤르츠로 날아가서 여리고 성벽의 약한 부분을 쳐서 무너뜨렸다는 것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아무 것도 없이 이쪽은 “언약 있음”과 저쪽은 “언약 없음”의 싸움입니다.
그런데 그 언약이라는 것은 지난 시간에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어린 아이가 키가 아주 큰 어른의 뺨을 치려고 아무리 손을 휘둘러도 칠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그 어른의 밑바닥을 치는 것이 곧 하나님이 치는 것이라고 말을 했지요! 이런 말이 다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이 무엇이냐 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유치하지만 낮은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제사장입니다. 언약의 갱신으로 주어지는 제사장입니다.
그 속죄제에 있어서 모든 것은 동일한데 제사장의 속죄일은 향단 뿔에 피를 바릅니다. 그런데 그 모든 회중과 일치되는 오직 한명의 제사장은 제단 뿔에 피를 바릅니다. 제단 뿔이 번제 중심이라면 향단 뿔은 너희가 언약을 배신하였다는 것을 갱신하여 보여주는 것이 향단 뿔입니다. 그래서 이 전체 회중을 대신하여 한 명이 싸워주면 하나님이 언약이 계속하여 유지 된다는 것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모세 언약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시내산이 위에 있다가 아래로 내려옵니다. 이동합니다. 위에 있던 거룩이 아래로 내려오고 구름 기둥 불기둥으로 이동합니다. 그 다음에 언약궤가 전쟁에 나섭니다. 전쟁에 나서게 되면 비로소 우리가 평소에 자기를 위해서 사는 모습이 드러납니다. 하나님 없다! 하나님 없다는 정도는 아직 멀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 있다는 것을 논하지도 아니할 정도로 이방인처럼 언약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약이 없어짐으로 언약이 사는 것입니다. 이 말이 괜찮습니다. 혼자 괜찮은데 언약이 없어지면서 비로소 언약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없어지면서 잊었던 언약이 되살아납니다. 내가 그동안 찾았던 하나님은 외피용이고 남에게 보여주고자 한 것이었는데, 진짜 깨어지고 희망의 출구가 완전히 막히고 절망만 있을 때에 그때 비로소 내가 지킬 법이나 언약은 전혀 없고 주님 홀로 지켜서 나로 하여금 그것을 바라보고 믿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하여주셨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전쟁은 제사장이 나섭니다. 군인도 아닌 제사장이 왜 나섭니까? 서양 중세 기독교 역사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반드시 누구를 대동하느냐 하면 군목을 대동합니다. 일종의 제사장을 대동합니다. 적벽대전에는 제사장 역할을 하는 사람이 제갈공명입니다. 모든 민족들이 신을 붙잡아 두지 않아 신이 떠나 버리면 폭삭 망한다는 의식이 마치 전염병처럼 정신적인 이데올로기처럼 전 민족에 다 있습니다.
신을 어떤 식으로 붙잡느냐가 그 나라의 관건을 좌우합니다. 그런 행세를 이스라엘도 하였습니다. 그러니 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빨리 너의 본색을 드러내! 나를 귀찮게 하지 말고 너는 너의 행세를 드러내면 돼! 나는 하나님을 버리겠습니다. 진작 그러지! 진작 그래야 네가 하나님이라고 한 하나님이 네 자신을 위한 우상이었는지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림을 그려 보겠습니다. 옛날에 전쟁을 하면 기마병을 앞장세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막을 중심으로 아론 자손과 므라리와 고핫 자손이 있고 그 밖으로 동서남북에 이스라엘의 12지파가 진을 치기도 하고 행진하기도 합니다(진 편성과 행군순서 민2:1-34참조). 이것을 외울 필요는 없습니다. 외우라고 하여도 외우지도 않겠지만 이런 모양으로 진격을 합니다. 그런데 이방 나라는 아주 발달한 철기무기로 나아옵니다. 이방 나라가 보면 미친 짓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런 진을 치고 나아오는 앞에서 제사장은 나팔을 붑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이 있다는 것을 믿는 척을 한다는 것입니다.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척을 합니다. 왜요? 달리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유치원 아이가 그 선생님의 머리 모양을 닮아 가는 것은 그 아이가 미용학회에 참석을 하지 않습니다. 달리 대안이 없습니다. 그 아이가 아침마다 보는 것은 선생님의 머리 모양만 보고서 닮아가듯이 그 당시는 아직도 하나님이 너희는 앞으로 이렇게 될 거야! 하는 그 말씀이 충분하게 납득이 되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잘 하고 있는데 자꾸 하나님은 너희는 나를 배반 할 것이다. 하나님을 떠날 것이라고 하느냐고 자꾸 부정적으로 이야기 하시느냐고 합니다. 잘하라고 하면서 격려를 해야 하는데 왜 그렇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불러서 의인되게 하시는 고유 권한이 누구에게 있느냐 하면 하나님께 있습니다. 죄인이 알아서 금식해서 의인 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약 때에 있으니 그것을 압니다. 신약의 어린 아이라도 구약 사람들보다 낫다고 되어 있습니다.
양 장로님이 어린애하고 장시간 동안 이야기를 하였다면서요? 구속사를 아는 어린애하고! 다시 말씀드립니다. 신약에서는 언약을 갱신하고 갱신하여 마지막으로 갱신하였기에 더 이상 갱신 할 것이 없다는 것이 신약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버리고,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한 자가 하나님에 의하여 부르게 되는 그런 대 역전극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무엇입니까? 철저하게 하나님께 농락당한 것입니다. 어떤 농락을 당하였습니까? 인간의 죄란 결국 다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죄란 인간 속에 하나님의 언약에 대하여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거부하는 세력이 인간을 장악하고 있어서 그 세력에서 인간은 조금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하나님께서 뻔히 아시면서도 왜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고 지키라고 하시며 쉐마! 쉐마! 들으라! 이스라엘아 내 사랑하는 백성아 라고 하시면서 이것은 무슨 거짓말 하는 것도 아니고 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언약은 하나님 홀로 이루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택하신 것입니다.
사도바울에 의하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홀로 다 하셔서 구원받고 천당 가고 지옥가고 하는 것을 하나님 홀로 다 하실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이 이만큼 하셨으면 우리가 양심이 있지! 어느 정도는 보답을 해야지! 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직도 구약에 속하여 망해야 될 사람들의 표본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은 자처하여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0장에 보시면 너희들이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나는 스스로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좀 심하게 말할까요?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오 목사님 저를 미워하지요? 아니요! 저를 막 때리려고 하지요? 아니요! 당신이 나를 죽이려고 하지요? 당신이 미쳤구나! 요한복음 7장에 나옵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죽이도록 만드십니다. 세상에 이런 억지가 어디 있어요?
그것이 출애굽에 나옵니다. 바로 왕이 모세와 이스라엘을 핍박합니다. 핍박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로 왕을 강퍅하게 합니다. 강퍅하게 하심으로 이스라엘을 핍박하게 만드십니다. 그쯤해서 바로는 그만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만히 있으면 되나? 더 해라고합니다. 계속 강퍅하게 하셔서 다 망하도록 합니다.
이런 하나님에 대하여 감히 상상도 못합니다. 인간의 아이디어로는 이런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성경의 은밀한 내용입니다. 십자가를 알아야 십자가라는 돋보기를 들고 다시 성경을 찬찬히 보니까 아하! 인간은 철저하게 놀아났구나! 그렇게 놀아난 과정이 이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이렇게 은혜를 주었는데 우리가 양심상 가만히 있으면 됩니까? 구원은 은혜로 받지만 하나님의 적을 정복하는 것은 행함으로 하는 것이라는 사람들을 주님은 잘도 이용하셨습니다.
이런 전쟁을 할 때에 적들이 물러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을 본 홉니와 비느하스는 또 오해 한 것입니다. 이 언약궤가 진격을 하니 여기서 여기까지 공기의 밀도가 있으니 언약궤가 이만큼 나가면 저쪽이 이만큼 밀린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과학적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이쪽을 미니까 저쪽이 밀린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마치 어린애 기차놀이 하듯이 주께서 손을 잡고 일하시는데 그것을 모르고 사람들은 이야 이것만 있으면 대박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나는 칼과 총이 무기인줄 알았는데 이 언약궤가 무기이구나! 언약궤만 있으면 천하무적이라고 여깁니다. 아무개 목사만 오면 우리교회는 구원받는다. 아무개 장로가 오면 우리교회가 밟힌다. 이런 것 주님께서 다 보십니다. 한 3년 있다가 주님이 없다고 해야 됩니다.
주님께서 혼자 하셨습니다. 성부 성령이 계시지 않습니까? 성부 성령께서 뒤에 계시고 성자께서 혼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혼자 하신 그분을 믿어야 하는데 그 분이 여호와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이 주의 이름이고 그래서 하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하여 이 땅을 거쳐 가신 주의 이름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리고 단서가 붙습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주 안에서 나는 죽고 날마다 내 안에서 주께서 홀로 인간으로 만들어 인도하고 있습니다. 하는 것이 모든 것이 날아간 상태에서 믿어지는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레위가 자체가 예언이었습니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우리 내부에 있는 악마성을 그대로 노출하라고 주신
죄를 더 짓게 만드는 율법 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법 외에 한 의가 되신 예수님이 친히 오셔서 화목제물이 되시고
그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게 되었사오니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언약대로 스스로 홀로 하셨다는 것은 저희가 감격하면서
이제는 나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이 된 것을, 지체가 된 것을
한 목소리로 주께 영광 돌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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