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식의 이중성
2023년 12월 20일 본문 말씀: 스가랴 8:18-23
(8:18)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8:19)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월의 금식과 오월의 금식과 칠월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가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할지니라
(8:20)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후에 여러 백성과 많은 성읍의 거민이 올 것이라
(8:21) 이 성읍 거민이 저 성읍에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속히 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자 할 것이면 나도 가겠노라 하겠으며
(8:22)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리라
(8:23)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는 방언이 다른 열국 백성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이방민족에게 망하게 하셨습니다. 이방민족은 나름대로 자기네들이 숭상하는 신이 따로 있습니다. 이스라엘와 이방민족이 전쟁을 벌린다는 것은 신과 신의 싸움입니다. 센 신이 약한 신을 지배하면 그것은 현실 전쟁에서 구현된다고 믿고들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했다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른 신에게 패배했다는 말이 됩니다.
이스라엘은 그동안 주변 나라와의 숱한 전쟁을 통해서 젖과 꿀이 흐른다는 그 약속의 땅을 다 갉아먹히고 마지막 남은 영토는 유다족속의 땅 뿐입니다. 하지만 유다족속은 도리어 이런 형편에 자부심만 고취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지파를 내쳐셨다는 것이 아쉬운 것이 아니라 그만큼 유다족속만을 특별대우했다는 증거로 여겼습니다.
즉 ‘마지막’을 하나님께서 남은 자로 간주하셨다는 말은 그 어떤 경우라도 ‘마지막’은 끝까지 갈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4월 금식, 5월 금식, 7월 금식, 10월 금식이 정기적으로 절기처럼 생겨났다는 말은 금식하지 아니하면 안될 정도로 모든 희망이 절단 난 사태가 일어났음을 말해줍니다.
10월 금식은 예루살렘이 포위당한 날, 2년 후
4월 금식은 예루살렘이 점령당한 날,
5월 금식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성전이 불타 버린 날,
7월 금식은 여전히 민족을 다시 살려보겠다고 내란이 일어나는 말은 유대인 동족이 반란군에게 살해 당한 사태를 말합니다.
금식이란 ‘끊어짐’을 대한 절망적 반응을 묘사해줍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멈춰 섰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예전처럼 다시 이스라엘을 부흥하게 해달라고 간절함이 금식으로 나온 겁니다. 꿈까지 잃어버리면 참으로 민족은 희망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살아계신다면 자신들의 절박함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호응해주리라고 여겼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그 금식의 날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절기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하나님의 반응은 인간의 금식을 좋게 봐서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역사 종결은 당연하게 마땅한 하나님의 조치로 보십니다. 이스라엘 역사가 끊어진 것은 실은 모든 인류의 역사가 이미 단절됨을 미리 보여주신 겁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금식하고 반성하고 회개하는 일은 착한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행동을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과연 우리 인간은 우리 행동을 판단한 재판관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준비해두신 메시야는 단순히 이스라엘이 원했던 이스라엘 역사를 이어가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도리어 인간의 역사를 끊고, 그 끊어진 것들을 가지고 그동안 인간들이 상상치도 못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이 원리는 바로, 인간들의 유한한 시간마저 하나님이 일하시는 무한한 시간의 일부로 간주하시는 겁니다. 유한한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이미 하나님의 무한 시간 작업이 집어넣으시고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메시야를 보내셔서 이스라엘의 금식을 인수인계하십니다. 자신의 것으로 떠안으시는 겁니다. 즉 인간이 더는 자신이 자기를 판단해서 미래에 대해 기대를 거는 것을 근원적으로 부정해버리는 시작점으로 하나님 자신이 이 세상에 들어오신 겁니다. 예를 들면, 요나서에 나오는 니느웨의 상황이 그런 예입니다.
분명이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이 죄악이 하늘에 상달되어 심판받는다고 하셨습니다.(욘 1:2) 하지만 요나서 3장에 보면, 요나 선지자가 도저히 예상못한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니느웨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금식을 하는 겁니다. 니느웨 성의 운명은 당연히 끊어진다고 여겼던 요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성이라는 그 심판의 현장에 가셔서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는 다른 하나님의 모습을 보이신 겁니다. 욥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욥기 1장에서 하나님과 사단은 욥을 두고 내기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단 앞에는 욥의 존재를 거론하십니다.
그는 그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을 원망한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단은 이런 하나님의 견해에 반대하면서 욥을 시험하게 하십니다. 하지만 욥기 40:4에 보면,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뿐이로소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장면을 하나님께서 미리 “찰깍” 캡쳐(순간 사진촬영)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욥의 유한한 인생 속에 하나님의 무한한 시간이 포개져 있는 바가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욥기 40장 올 때까지의 욥의 주장은 ‘가짜 욥’이 되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직접 욥에게 찾아오사 ‘가짜 욥’이 ‘진짜 욥’과 단절케 하신 겁니다. 이 진짜 욥의 모습을 사전에 알고 있는 하나님께서는 사단에게 얼마든지 욥을 자랑스레 내세울 수가 있었던 겁니다.
이 사실을 미리 알지 못한 ‘가짜 욥’은 기존의 다른 친구들과 다를 바없이 적극적으로 자기 의를 변호하면서 하나님께 대들었습니다. 바로 그런 욥은 진짜 자신을 하나님께 찾아올 때 발견하고 그는 자신과 결별했습니다. 단절했습니다. 이는 곧 오늘날 주님께서 죄인된 자들을 예수님 자신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다루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인간 세계는 기존의 자신의 시간노선 하나만 고집합니다. 무한의 시간, 즉 주님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시간을 고려하지 못합니다. 단선적인 자기 시간이 개과천선하면 주님의 시간과 이어지는 줄로 압니다. 이 고귀한 것에 인간의 예상하고 희망을 겁니다. 이 모든 것이 ‘가짜 인간의 기획’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존재를 유일한 존재로 여기고 미래까지, 하나님에까지 이어가기 위해 심지어 금식까지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금식, 십자가 사건이 찾아들게 되면 자신이 예수님이 시작하신 일로 인하여 자신의 몸이 이중적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가장 추잡한 그 순간마저 가장 고결하고 숭고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사랑스럽기 짝이 없는 순간임을 알게 됩니다.
열왕기하 5장에서 엘리사의 사환은 문둥병자였던 이방나라의 장군의 선물에 탐을 내다가 그 사람의 문둥병이 이스라엘인 본인이 걸리게 됩니다. 게하시는 자기와의 단절을 알지 못하고 현 자신을 발전시키려고 시도한 겁니다. 참된 이스라엘은 이처럼 자기와 단절된 자들입니다. 따라서 이런 은혜에 놀라운 자들이 성도를 붙들고 이렇게 부러워합니다.
“너는 너 자신이 가짜인 것을 어떻게 알았어?”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의 이중성에 늘 놀라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3강-스가랴 8장 18-23절(금식의 이중성) 231220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스가랴 8장 18절에서 23절까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월의 금식과 오월의 금식과 칠월의 금식과 시월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가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할찌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후에 여러 백성과 많은 성읍의 거민이 올 것이라, 이 성읍 거민이 저 성읍에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속히 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자 할 것이면 나도 가겠노라 하겠으며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는 방언이 다른 열국 백성 열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 아멘
유다 민족은 금식하고 있고 금식했던 유다 민족이 어떤 반전을 갖게 되는데 그것은 나중에 많은 민족들이 와서 심지어 유다 민족의 10배나 되는 그런 사람들이 와서 유다 민족 한 사람 한 사람 붙들고 “당신이 받은 은혜 우리도 같이 좀 받자”는 식으로 부러워하는 마음으로 유다 족속을 찾게 되는 날이 온다는 겁니다. 근데 그 오는 날이 전에 금식했던 그 날이라는 거에요. 그러면 유다 민족은 금식을 했고 다른 민족은 이런 유다 민족이 하는 금식이 없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유다 민족의 금식은 유다 족속에게 특별한 계기가 있어서 일어나는 금식입니다. 어떤 계기가 있는가? 금식에도 뭐 많아요. 4월의 금식과 5월의 금식과 7월의 금식과 10월의 금식. 일 년에 4차례 크게 금식하는 날을 정해서 그 유다 족속들이 집단적으로 금식을 했는데요. 거기에 유다 족속들이 마음적으로 전부 다 동의가 되었습니다. 동의가 안 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땅을 잃어버리고 남의 나라 압제에 있으면서 이러한 서러움을 유다 족속이라는 이름으로 공통적으로 지금 겪고 있는겁니다.
내가 행함이 잘못되어서 단독으로 내가 벌 받는 것이 아니고 나는 별로 그만한 고통을 당할 이유 없는데 한 족속이라는 이유 때문에, 같은 유다 족속에 속했다는 이유 때문에 한꺼번에 집단적으로 시련과 어려움을 당하니까 자연적으로 마음이 결속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서로 모르고 지내고 이웃집이 누구도 살지 않지만 만약에 갑자기 대기업 건설회사에서 여기 대기업 아파트 새로 짓기 때문에 “나가주세요”라고 하는 순간 바로 옆집에 누가 사는 것도 모르지만 갑자기 “우리 시청 앞으로 모입시다.” 서로 아는 사이가 되고 마는거에요.
각자 개인이 살아왔던 게 다 다른데 어떤 사건이 임해서 그 사건이 그 지역 집단에게 한꺼번에 동일한 압력으로 동일한 사태로서 들이닥치면 그들은 한통속으로 한 마음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건이 유다 족속에게 무슨 사건이냐? 여기 4월, 5월, 7월, 10월 나와 있지만 전부 다 공통점이 있어요. 이 모든 금식의 날은 유다 족속, 하나님의 남은 족속이라고 이스라엘이 뜯겨져도 하나님의 다윗의 등불은 있어서 결코 망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철석같이 믿었던 하나님의 유다족속과 최후의 남은 족속과 그리고 성전이 불타버리는 거에요.
불타버려서 이스라엘 자체가 아주 싸그리 흔적도 없이 다 날아가버리는 거에요. 그 사태를 당한 자들이 바로 유다 족속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유다 족속이 이스라엘 다른 지파 다 날아가도 끝까지 유다 족속이 살아남았던, 멸망할 때까지 있었던 그 이유는 뭐냐? 이스라엘의 최후, 이스라엘의 마지막 모습을 목격하라고 하나님께서 유다 족속을 끝까지 남겨 두신거에요. 하나님이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던 그 성전이 그게 불타는, 성전이 불타버리고 여호와를 모르는 적군들에 의해서 인정사정없이 냉혹하게 성전이 불탔다는 것은 “여호와 없다”이런 뜻이거든요.
“여호와 하나님은 애초부터 너희에게 없었다”를 확정시켜주는 사건과 동시에 이스라엘도 날아가 버리죠. 하나님과 함께 있던 이스라엘이 하나님 없으니까 그 나라도 없는 게 되어버린 그걸 만천하에 공개하고 증명이 되어버린 사태, 그것이 바로 그들은 1년에 4차례 그 이후에 흩어져서 금식하는 날로 정했던 겁니다. 10월의 금식은 기원전 588년에서 587년. 시드기야가 유다의 마지막 왕입니다.
마지막 왕 통치 9년에 10월 10일날 예루살렘이 포위되기 시작 할 때 그들은 살려달라고 금식했습니다. 악을 쓰고 금식했죠 금식 외에는 뭐 다른 대책이 없으니까. 금식한 이유는 간단해요. “하나님 뭐하십니까. 우리가 이렇게 위기를 당하고 우리의 위기는 곧 하나님의 위기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이참에 한번 보여 주이소.” 이런 식이죠. 지금 하나님 과연 계시기는 계시는 거에요? 계시다면 이 위기 상황에 한번 하나님 등장하셔서 놀라운 기적을 베풀어서 ““그래 내 너 보호하고 있잖아. 나 여기 나타났다. 가만히 있어 내가 적들을 물리칠 테니까.” 이런 놀라운 시나리오 그런 각색에 의해서 한번 등장해 주이소. 그걸 요구하는 금식이었어요.” 망하기 전이니까. 망하기 2년 전이니까.
그런데 포위망은 더 좁혀왔어요. 4월 금식은 뭐냐 하면 드디어 기원전 586년에 유다 왕 마지막 시드기야 11년에 4월 9일날. 그러니까 10월달에 당했던 사태 4월달에 당했던 사태. 이 4월 9일날 예루살렘이 바벨론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점령당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생각이 이거에요. “너희가 믿던 하나님은 애초부터 없었다. 근데 너희는 아직도 어리석게도 하나님이 너희를 지켜준다고?” 바벨론 입장에서는 유다 족속에 대해서 그들의 모순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이 바벨론 나라는 여호와를 모르는 나라에요. 여호와를 모르는 나라가 다른신을 믿고있었어요. 마르둑이라는 신을 믿었었는데. 하여튼 여호와를 모르는 나라가 여호와를 아는 나라를 점령했다, 접수했다는 말은 “여호와는 애초부터 없던 하나님이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진짜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 맞다”라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해준 것. 역사적으로 확실하게 증명한거에요. 이론이 아니고 사상이 아니고 상상이 아니라 역사가 증명한 것은 바로 여호와는 이렇게 없다는 사실을 BC 586년에 이스라엘 멸망을 통해서 보여준 겁니다.
그래서 바벨론 사람들은 유다 사람들에게 진짜 진심으로 당부하고 싶은 거에요. “여호와 믿지마라. 안 믿으면 모순이 없어지잖아. 있다 해놓곤 안 도와줬잖아. 안 도와줬는데 왜 아직도 미련을 갖고 있느냐. 정신 차려라 정신 차려. 너희 믿는 하나님은 없다. 스스로 모순에서 빨리 탈출해라. 정신 바짝차리고 현실을 직시하라. 하나님은 없다.” 아주 처참하게 망가집니다. 뭐 그냥 학살 수준으로 당해버려요. 지금 하마스 저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학살 수준이에요. 하나님께 기대했다는 그 죄목으로 그렇게 그들은 학살당한 겁니다.
5월 금식은 그해에 점령당할 때 5월 7일 날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버렸습니다. 그러니까 4월 9일 날 점령을 당했거든요. 점령을 당할 때 그래도 아직까진 성전은 있었다 이말이죠. 그러니까 한 달 사이에 여호와를 계속 믿던 여호와께 집착했던 사람은 희망을 가질게 아니겠습니까? “그래, 예루살렘 줘버려. 하지만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이기 때문에 설마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 집이 불타도록 방치하지는 않을거다”라고 가느다라한 희망이 있었지만 그 희망이 드디어 작살났습니다. 그게 5월 금식이에요.
7월 금식은 이제 끝났어요. 끝나고 난 뒤에 7월달에 바벨론에서 파견한 총독이 있어요. 그 총독이 통치를 하니까 아직도 여호와께 미련 있는 사람이 내 나라인데 니가 여호와 모르는 이방민족이 어디 이 거룩한 약속의 땅을 유린하느냐. 우리가 궐기해서 일어나서 우리가 궐기한 모습을 보여줘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야, 너희도 아직도 나에게 희망을 거는구나. 내가 너희 다시 바벨론 물러가고 다시 하나님께 약속의 땅 유대 민족을 일으켜줄게.”라는 하나님의 언질같은 것을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반란을 일으켜서 총독을 죽여버렸어요. 총독만 죽인 게 아니고 그때 바벨론에게 정복당하는 것이 이게 도리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던 많은 유대인들도 여기서 학살당했습니다. 그게 7월 금식이에요.
자, 그러니까 10월 금식, 4월 금식, 5월 금식, 7월 금식. 이 금식의 특징은 뭐냐하면, 유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는 이스라엘 역사 자체가 이제는 더 이상 이어갈 수 없다라는 그 사태를 맞이해서 남아있는 유다 족속이 땅도 없고 나라도 없어요. 그러면 그들은 뭐냐? “우리는 뭡니까?”하는 자기에 대한 자기의 질문을 하는거에요.
“우리의 정체성은 뭡니까? 도대체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이거는 뭐에요? 대대로 이어온 우리의 혈족은 그러면 일반 민족하고 다를 바 없는 그런 민족이었습니까? 아 그거는 정말 싫다.” 그게 싫어서 하나님이여 땅도 잃고 나라도 잃었지만 금식하고자 하는 아주 유대 민족은 아직도 흩어졌지만, 포로잡혀갔지만 하지만 우리는 그 포로 잡힌 나라에서, 게토라고하죠, 자기들 끼리 유다 민족이라는 자기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 사람, 같은 아픔을 갖고 있는 사람들 끼리 모여서 금식을 했고 그 금식하는 그것이 다시 약속의 땅에 돌아와서도 마찬가지로 그런 금식 날을 정기적으로 지켜서 장차 다윗의 그 영광을 희망하면서 금식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뭐냐 하면 인간은 아주 독하죠. 마지막 자기 몸뚱아리 하나만 남아있으니까 몸만 달랑 남은 것이 아니고 몸이 남아있는 이상 인간의 희망도 함께 남아있습니다. 그게 헛되든 그게 헛되지 않든 상관없이 사람은 희망없이는 못살죠. 미래가 없는 민족은 이미 죽은 민족이기 때문에 그래요. 미래에 대해서 꿈을 가질 때는 어떠한 역경 가운데서 다시 일으킬 수 있다는 극히 상식적인 철학, 상식적인 사상 하나 믿고 이들은 금식해 왔다는 겁니다.
과연 그들의 금식은 성공했을까요?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스가랴에서 오늘 본문에 보게되면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그들의 금식을 인수인계해요. 그들의 금식을 하나님이 떠안겠다고 나서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스가랴를 통해서 너희들의 금식을 내가 떠안아 버리면 그러면 그들의 금식은 과연 응답된건가 그들의 목적달성은 된겁니까? 아니요, 그 반대입니다. 정 반대에요.
주님께서 금식을 떠 안음으로써 이제 이스라엘이 금식하는 것 조차도 그게 바로 악한 일이 된다는 것을 본격적으로 주께서 말씀할 수 있었던 겁니다. 인간인 이상, 존재하는 이상, 희망을 갖고 꿈을 갖는 것. 금식이 뭡니까? 독하디 독한거잖아요. “이럴바에야 차라리 내가 밥을 끊겠습니다. 나는 굶어 죽겠습니다”하는 비장한 마지막 각오가 금식이에요. 곡기를 끊어버리니까. 늙어서 끊는거 말고 펄펄 살아있을 때. 곡기를 끊어버리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그 금식하는 그 절기를 인수인계 받으면서 일방적 인수인계 받으면서, “그러니까 너희들은 멸망 당해야 마땅한 민족이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꿈을 놓치지 않고 절망하지 않기 위해서 금식하는 그 자체가 니가, 너희들이 멸망 받아 마땅한 죄에 해당 된다는 겁니다. 이게 놀라운 사태에요. 이거는 금식할 때 이런 평가는 예전에 꿈도 못꿨어요. 그런건 생각도 못한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곡기, 밥까지 끊어가면서 죽기까지 하면서 기도하는데, 금식이 기도 아닙니까, 기도하는데 설마 이것이 악한 일이 된다는 생각은 인간의 머리에서는 나올 수가 없죠.
하나님 뜻은 이겁니다. 그들이 금식하는 이유가 이거에요. “우리가 율법을 어겨서 나라 망했으니까 이제 하나님께서 다시 도와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살아나서 옛날처럼 하나님 말씀대로 바르게 사는 인간으로 거듭나게 하옵소서.” 그래서 금식한거거든요. 근데 하나님이 그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그야말로 독하디 독한 악이라고 규정하는 이유는 인간들이 자기 행위에 대해서 스스로 “잘 못 되었습니다”라는 평을 내렸다는 그 자체에 있습니다.
“네 행위에 대해서 니가 뭔데? 니가 판단을 내리느냐. 니가 재판관이야?” “여러분 보세요. 우리가 잘못되었으니까 잘못된걸 하나님 앞에 자복해서 금식까지 하면서 하나님앞에 용서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다시 기적적인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실겁니다. 과거의 사무엘부터 모든 역사가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스스로 자복하고 금식합시다.”라고 인간이 나올 때 주님은 “니가 너를 판단하는 재판관이야? 거기에 대해서 인간이 뭐라고 답변하겠습니까?”
잘못했다고 이야기하는데도 불구하고, “잘못되었습니다. 우리가 죽어 마땅합니다.”라는 것 조차도 이게 죄악이 된다면 도대체 인간에게 죄 아닌게 뭐가있어요? 지금 인간들은 어떤생각을 하고있느냐 하면 ‘우리가 잘못된 것 맞다. 잘못된 것 끄집어내자. 하지만 모든게 잘못되었지만 잘못됐다 하는 이것은 아직도 우리에게 선이 남아있다는 증거가 아니고 뭐냐?’ 이렇게 나오는거에요.
주님께서 그 금식을 주께서 인수인계 받는 이유가 “너희의 금식은 금식도 아니고 그 너라는 인간 자체가 내가 인수받는 이유는 금식을 가지고 환난을 기쁨의 날로 바꾸는 이유는 내가 금식은 너희들이 하는 금식 날을 나의 금식으로 받아 줌으로써 너희들은 처음부터 가짜 인간이었고 엉터리였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들추어 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금식을 인수한거에요. “아이고, 가상하구나. 대단하구나. 금식을 하다니. 내가 니 소원대로 들어주마.” 이래가지고 하나님이 금식을 인수인계하는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망한 것은요. 이스라엘 속에서 하나님이 동행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마저 불탔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멈춤이 곧 세상의 멈춤으로 하나님께서 선언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겁니다. 이미 세상의 시간은 멈춰졌어요. 시간이 흘러가도 그건 의미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또 하나님께서 인간의 금식을 인수인계하고 떠안는다는 말은 인간이 지금까지 왔던 그 시간 노선과 끊어진 채, 단절된 상태부터 인간들이 예상도 못한 새로운 시간의 시작을 알리는 거에요.
그동안 인간들이 살아왔던 것이 인간의 역사라면 그 역사를 멈춰버리고 이제는 새롭게 금식을 시도한 그분. 예수님의 시간. 예수님의 시간으로 그걸 받아 주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시간을 받아들이면 예수님의 금식에 근거해서 예수님 새로운 세계는 뭐냐? 금식의 날이 곧 무슨 날이 되느냐? 기쁨의 날이 되고 완성의 날이 되고 희락과 즐거움의 날이 되는 겁니다. 기쁨의 날, 즐거운 날.
로마서 14장 17절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등장해요. 하나님의 나라가 등장하는데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요. 다시 말해서 내가 더 금식 할까 말까, 먹는걸 중단 할까, 계속 먹을까 이런 문제로 하늘나라가 오는게 아니라는 겁니다. 금식한다고 구원받는게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럼 뭐냐? 하늘나라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되어있어요. 기쁨과 평강과 희락이다. 공포와 두려움 같은 것 없어요. 절망 같은 것은 아예 깨끗하게 다 없어요 거기는, 하늘나라는. 평강과 희락과 완성과 기쁨과 다 이루심만 있을 뿐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갑자기 그 나라 가고싶어하죠? “나 그 나라 갈래 그 나라 갈래. 어떤 공포도 없고 두려움도 없고 기쁨만 있는 그 나라 갈래. 그 하늘나라 천국 들어갈래” 하잖아요. 그걸 하나님께서 차단시키는 거에요. 왜냐하면 너는 인간 자체가 엉터리이기 때문에 그것을 소망하는 그 자체가 이게 엉터리 소망이라는 거에요. 끊어져야 돼요. 나의 희망으로부터 내가 끊어져야 돼요, 절단돼야 돼요.
우리는 나의 미래가 내 선에서 멈춰져야 됩니다. 참 이게 이해하기 힘든데, 하나의 쉽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인간이 추잡한 짓들을 하면서 평생을 살다가 “아, 이거 내가 인간 너무 막간다.” 그리고 난 뒤에 이제 교회 가서 회개하고 “하나님 제가 진짜 함부로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용서해주세요. 이제는 다시 그런 추잡한 일은 다시 하지 않겠습니다.”하고 예수 믿고 또 성령 받은줄로 착각해서 성령 받고 예수 믿을 것 다 믿고, 구색 있잖아요. 교회 나와서 하는 구색. 피 믿고 십자가 믿고 천국 재림 바라보고. 바르게 사는 것. 다 갖춰서 이제는 다시 그런 추잡한 짓을 하지 않겠다 라고 결심할 때 그게 바로 추잡한 짓이에요. 그게.
지금 그 인간은 자기와 절단되지 않았어요. 끊어지지 않았어요. 반전을 노리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게 바로 엉터리 인간이라는 거에요. 그게 가짜 인간인 거에요. 새 사람, 새 피조물 그런 개념 나오니까 그게 탐이 나는거에요. 주께서 성령을 주시고 주께서 주님의 금식에 근거해서 성령이 찾아오게 되게 되면 뭐냐 하면 뭘 아느냐 하면 그 추잡한 자체가 그게 바로 내가 상상도 못한 고귀함이고 고결함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거에요. 이걸, 얼굴보니 동의 하지 않는 얼굴들을... 이걸 뭐라고 하느냐, 이중성이라고 하는 거에요. 몸의 이중성
시간 선에 이중의 시간이 돼요. 인간 쪽에 예상하는 시간이 절단되고 그 절단될 때 아까 그 이스라엘 사람들이 금식하죠. 금식하는 이유가 뭐냐? 이어가기 위해서. 이제는 새로운 이스라엘이 되기 위한 마지막 아주 비장한 각오가 금식이에요. 이거 안되면 끝나는거에요. 어떤 노림수가 있어요. 근데 그걸 못 끊어요. 만약에 그대로 되어버리면 이게 선이, 역사 선이 이중선이 아니고 단선(單線)이 되어버립니다. 그럼 엉터리 인간이 계속 엉터리 인간, 엉터리 소망, 엉터리 사랑, 엉터리 구원, 엉터리 하늘나라가 계속 이어져요. 이건 마귀가 원하는 겁니다. 마귀가.
“내 힘으로 안 되는데 주의 힘으로 나는 새 인간 되었다.” 이게 마귀가 원하는거에요, 이게. 주님께서는 복선이에요. 두 개의 시간이 같이 겹치는 겁니다. 이렇게 정리하면 돼요. 우리는 우리 주께서 금식을 인수 받아가지고 새로운 역사를 이룰 때, 새로운 이스라엘을 이어나갈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생각한 이상으로 엉터리고 가짜고 추잡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추잡한 걸 상상해도 그 이상으로 우리는 더럽고 추잡해요. 그런데 그런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이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의롭고 훌륭하고 사랑받을 만한 대상입니다. 그 자체가.
이거는 나쁜짓이고 이거는 해서는 안되고 할 때 집중을 자기 생각에 집중하고 있잖아요, 자기 생각에. 자기 생각에 집중하다 보니까 어떤 고치면 지금보다 더 나아지고 더 성질이 고결하게 된다, 더 우수하게 된다고 생각하는거에요. 우수는 그렇게 고쳐서 되는게 아니고 그 추잡한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그렇게 사랑스럽고 고귀한 거에요. 그게 의라는 거에요, 그게. 자기로부터 안 끊어진 사람은 이 말을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 듣습니다.
역사를 단선에서 복선으로 바꾸시는 이유는, 또는 인간의 단선이 아니고 이중성으로, 두 개의 몸으로 바꾸시는 이유는 죄인을 데리고 예수님 자신을 증거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죄인을 버리지 않고 죄인을 다뤄요. 다루면서 예수님 자신을 증거하는 거에요. 자신의 금식을. 이제 우리가 지금부터 생각해야 될 것은 뭐냐? 이미 구약의 역사에서 하나님 이스라엘 통해서 하나님께서 죄인 된 이스라엘을 다루면서 하나님의 자신의 새로운 복선, 다른 이중적인 역사를 이렇게 이미 뜨문뜨문 보여준 적이 있어요. 이미 그걸 보여 주셨어요, 벌써.
이스라엘이 자기 이스라엘 존재만 자꾸 이어가기를 신경 쓰다 보니까 그 중간중간 하나님께서 복선되는 시간의 흔적을 줬는 것을 그들은 생각을 못 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오해 중의 하나가 요나입니다. 요나 3장 5절에서 10절에 보게 되면, 이게 좀 긴데 제가 빨리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요나가 가서 외칩니다. 40일 지나면 니느웨가 망한다. 이렇게 했습니다. 망한다 했으니까 아까 들은 대로 이건 니느웨의 단절입니다. 니느웨는 끊어지는 거에요. 니느웨 역사는 멈춰지는 겁니다.
“그 이야기 듣고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가로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찌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로 멸망치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이 말이 이 말에 대해서 이런 하나님의 현상에 대해서 누가 납득을 못하고 누가 못 받아들이느냐 하면 요나 선지자입니다. 이거는 요나 선지자는 상상을 못했어요. 왜냐하면 멸망한다는 것이 요나 1장 2절에 보면,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니느웨 성의 악독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어요. 도달 된거에요. 그러니까 그 이야기를 누가 들었느냐? 요나가 하나님의 지시를 들었던 겁니다. 요나의 입장에서는 단선적인 역사를 갖고있어요.
단선적인 역사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고, 그 계신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용서하지 않고 필히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거에요. 그렇게 판단 한 겁니다. 누가? 요나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입장을 대변해서. 그런데 요나가 아무리 애를 써도 요나가 불가능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거는 뭐냐하면 그 니느웨에 왜 자기자신을 거기다가 왜 파견 근무 시키는지 이유에 대해서는 몰랐던 거에요, 요나가.
이미 니느웨에는 멸망이에요. 근데 이미 멸망, 끝났으면 니느웨가 멸망되었으면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심판권 행사는 이미 끝난 걸로 요나 쪽에서 요나가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러나 요나가 모르는 하나님은요 끝났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일이 본격화 되는거에요. 이런 하나님을 누가 알아야 되느냐? 요나가 알아야 되고 이스라엘이 알고 있어야 돼요. 왜? 하나님은 인간이 엉터리란 것을 알기 때문에. 이스라엘도 엉터리란걸 알기 때문에. 엉터리 아닌 존재는 하나님 자신밖에 없어요. 근데 요나는 착각 해가지고 하나님이 엉터리 아니듯이 나도 덩달아 엉터리 아닌걸로 착각한 겁니다.
여전히 하나님이 미궁이겠지요? 그래서 한군데 더 찾아 보겠습니다. 욥입니다. 욥이에요. 욥기 1장에서 사단과 하나님이 이야기하는데 내용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욥을 이렇게 평합니다. “사탄아 니 어디갔다 왔어?” “세상 돌아다니고 왔습니다.” 하니까 하나님께서 악마 앞에서 욥을 특별히 거론해요. “너가 내 종 욥 봤냐?” 이렇게 묻습니다. 그리고 아예 욥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평을 해버려요. “욥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고 경외하는 사람, 악에서 떠난 사람은 없다” 라고 했어요.
여기서 이 하나님의 말씀에 이 책을 보는 모든 인간들은 이 하나님의 말씀에 다 속아 넘어간거에요. 심지어 누가 속아 넘어갔느냐 하면 욥도 속아 넘어가죠. 욥은 이야기를 안 들었겠지만... 평소에 자기는 그렇게 생각했죠. 하나님을 순전히 섬긴다고 했기 때문에 욥도 결국 속아 넘어간 셈이 되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욥에게 이렇게 경외하고 순전하고 더 나아가서 쉽게 말하면 욥은 욥에게 어떤 일이 벌어져도 욥은 나를 원망하지 않는 존재라고 언급을 했어요. 여기서 사탄이 발칵 본색을 드러내죠. “하나님이여. 인간치고 그런 인간 없습니다. 내기할까요?” 뭐 내기는 하나님이 먼저 했으니까. 하나님하고 사탄하고 내기를 한 거에요. 어떤 경우라도 원망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악마의 주장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은 있다. 욥. 하나님의 주장입니다. 근데 여기에 대해서 그 현장에 욥이 있다면 욥도 하나님의 뜻을 몰라요. 그래서 욥기의 내용은 뭐냐? 욥은 자기는 하나님 앞에 순전하게 섬기고 경외하고 어떤 원망이라도 원망치 않는 그런 존재라고 욥이 스스로 착각 했는데 이거는 진짜 욥이 나올 때 까지 일시적인 가짜 욥이었어요. 욥은 하나님이 직접 자기를 찾아 올 때까지는 자기가 가짜 욥인 것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욥 거의 끝장에 가서 하나님하고 욥하고 쉽게 이야기해서 아주 쉽게 이야기합니다. 어렵기 때문에. 쉽게 이야기해서 하나님하고 욥하고 찰칵, catch해요. 찰칵. 사진을 찍어요. 하나님하고 욥하고 사진을 찍어버리면 그 사진이 찍힐게 아니겠습니까? 순간에. 하나님과 욥이 사진 찍히는 것.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여 제가 말이 너무 많았습니다. 제가 재를 뒤집어 쓰고 이제는 아무 소리 안 하겠습니다.”하는 그 순간을 찰칵 캡쳐를 사진을 해가지고, 그걸 사단에게 제시해버려요. 그러면 그 사진 찍힌 욥은 처음에 하나님이 하늘나라에서 지목한 욥의 진짜 욥의 모습이 되는거에요.
더 쉽게 말씀 드릴까요? 욥 안에 예수님 들어있습니다. 욥 안에. 완전한 의가 들어있고 욥 안에 완전한 고귀함과 순결함이 들어있었어요. 그런데 욥은 그걸 모르고 자기가 순결하고 고귀하고 나쁜 짓을 안 했다고 그렇게 고래고래 친구들에게 고함지르면서 하나님께 대들면서 하나님을 원망했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어떤 말이냐 하면 하나님을 원망한 욥. 그것이 원망하지 않은 욥인 거에요. ‘가짜 욥 안에 진짜 욥이 들었다’라는 말도 되고 달리 이야기하면, 가짜 욥 안에 예수님 들어있다 하는 것이 정답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금식을 인수인계하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이스라엘이 가짜거든요. 선악과 따먹은 우리가 가짜에요. 근데 뭐가 진짜인 줄은 몰라요. 우리는 왜? 단선에, 가짜가 예수님 믿고 바르게 사는 인생이 되어버리면 과거는 나빴지만 지금은 새사람 되었다 돼 가지고 단선, 이게 시간이 단선이 되어요. 그래서 이걸 어렵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인간들의 유한한 시간 속에 무한한 시간이 접혀져서 들어있다 이렇게봐요.
인간은 미래에 잘할려고 하는데 주께서는 접혀진 무한의 시간 안에, 예수님이 그 시간이거든요, 무한한 시간. 그 무한한 시간이 바로 이스라엘 속에 들어가 있어서 이스라엘 역사가 끊어지면서 진짜 이스라엘 역사가 예수님부터 출발해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많은 이방 나라가 이스라엘을 찾아오면서 이렇게 부러워하는거에요.
“너는 너가 너 자신이 가짜인 것을 그걸 어떻게 알았어? 하이고 부러워 죽겠네. 이게 바로 이방인들이 유다족속하나 붇들고 열명씩 와가지고 세상에 어떻게 인간 치고 내가 엉터리고 가짜인 것을 어떻게 알았지? 금식해도 구원못받는거 어떻게 알았지? 회계하고 반성해도 구원, 천국 안되는걸 어떻게 알았지?” 이걸 어떻게 알긴 어떻게 알아요. 그안에 예수님이 새로 시작해서 알았지요.
소위 복음 알고 공부하고 뭐 수십년 복음 들었습니다 하는 사람들. 그 사람속에 여전히 뭔가 여전히 남아 있는게 뭐냐 하면 이제 복음 알았으니까 바르게 살아야 되지 않느냐는 인식이요. 그거 이미 바리새인들이 다 한거에요. 이중성입니다. 가장 더러운데 그 더러운 것이 그게 하나님 예수님을 증거하는데 가장 귀하게 쓰여지고 있다는 그 고귀한 신분. 그 신분의 고귀함을 감격함으로 감사해야 돼요. 다시 말해서, 쉽게 해서 다른 이방인들이 십자가 복음을 알건 유대인에게 붙잡는 것처럼 스스로 자기가 못난 내가 못난 나를 붙잡아야 돼요.
“이 우예 알았지? 그 사실을? 내가 생각한 천국이 가짜였다는 것을 니가 어떻게 알았어? 내가 가고 싶어서 온갖짓 하고 예수 믿고 십자가 피 믿고 온갖짓 한 그 천국이 완전히 나를 위한 나의 연속성을 연속되기 위한 하나의 지식이었다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았지?” 그게 뭐 내가 가짜 인간이 할 게 그 짓 밖에 더 있겠어요? 가짜 인간이. 인간은 자기 연속성을 포기 못 합니다.
끝으로 한가지 예를 들면, 열왕기하 5장 24절. 유명한 나아만 장군이 이스라엘 포로잡혀온 노예 종 여자 종 어린 소녀의 말을 듣고 문둥병이 걸렸는걸 엘리사한테 치료받겠다고 온거에요. 그 이야기 여러분 다 아시니까 생략하고 중요한 것은 이겁니다. 거기에 엘리사의 매니저, 비서죠. 게하시가 나옵니다. 게하시가 자, 한번 생각해보세요. 나아만 장군이 이방인이에요. 근데 게하시는 그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엘리사의 비서가 된 거죠. 그럼 문둥병은 누가 걸렸는가?
이방 나라 장군 나아만 장군이 걸렸어요. 근데 여러분 아시다시피 그 뒤에 보면 게하시가 문둥병에 걸립니다. 나아만 장군은 본인이 가짜인걸 모르다가 문둥병 걸리고 난 뒤에 그래도 자기가 가짜 인간, 인간도 아니죠, 가짜 인간인 것을 모르다가 나중에 엘리사에 의해서 요단강 7번 들어가고, 엘리사를 만나지도 못했어요, 7번 하고 엘리사 한테 선물을 드리니까 엘리사 가 선물을 안 받아요.
그때 비로소 전에 내가 문둥병 걸린 인간이 문둥병 걸릴 만 해서 걸렸다는 사실을 은혜로 알게 돼요. 아! 이게 내가 문둥병 안 걸리는 인간 이게 이상한거에요. 마땅히 걸렸었어야 된다는 거에요. 근데 누가 모르느냐? 이방인 나아만 장군은 그걸 아는데, 그 왔다 갔다 하는 가운데 게하시가 나아만 장군한테 가서 “우리 주인님한테 드릴 선물이 있죠. 저보고 다시 받아오라고 저한테 심부름 시켰습니다.”하고 끼어드는거에요. 게하시가 왜 그런 행동을 합니까?
게하시는 이참에 자기가 계속 발전하고 싶었던 거에요. 부자 되고 싶은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초월하고 싶은거에요. 자기가 대단한 존재로 변신하고 싶은 겁니다. 단선이에요. 역사가 단선이에요. 엘리사가, “에라이, 니가 한번 당해봐라. 너 어디갔다와? 너 문둥병 걸려라.” 그래서 게하시가 문둥병 걸렸습니다. 이방인에게, 니느웨에게 일어났던 그 단절을 이스라엘만 몰랐고 이방인 나아만에게 있던 그 단절을 정작 이스라엘이 몰랐던 거에요.
주님께서 이방인 우리에게 십자가를 알게하는겁니다. 이 뭡니까? 나는 태어나면서 가짜였는데, 예수님의 증인, 예수님을 증거하라고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라는 금식, 스스로의 단절이 이제는 주님의 단절 속에서 모든 나의 역사가 끊어졌고 주님의 역사가 내 안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증인하기 위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무슨 능력으로 내가 가짜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주께서 우리속에 오셔서 이 가짜 속에 진짜 인간, 진짜 마지막 아담, 두 번째 아담 예수님 쳐들어오셔서 우리가 주님의 증인 아니고서는 천국 백성 될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주신 이 은혜, 이 십자가의 은혜가 이젠 우리의 유일한 자랑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